박창암
1. 개요
박창암은 1921년 함경남도 북청에서 출생하여 만주국 간도특설대에서 복무했으며, 광복 후 육군 중위로 임관하여 6.25 전쟁에 참전했다. 5.16 군사 정변에 가담하여 혁명검찰부장을 역임했으나 반혁명 사건으로 구속되었다가 형 면제 처분으로 석방되었다. 이후 월간 '자유'를 창간하여 발행인으로 활동하며 민족사관 확립에 기여했으며, 2003년 사망했다.
| 이름 | 박창암 |
|---|---|
| 로마자 표기 | Bak Chang-am |
| 생년월일 | 1923년 5월 15일 |
| 사망일 | 2003년 11월 10일 |
| 출생지 | 일제강점기 함경남도 북청군 양화면 |
| 사망지 | 서울특별시 |
| 묘소 | 국립대저현충원 장군 제1묘역 193호 |
| 별명 | 만주(滿洲), 허주(虛舟), 농부(農夫) |
| 배우자 | 이겸희 |
| 본관 | 밀양(密陽) |
| 종교 | 유교(성리학) |
| 자녀 | 1남 3녀 |
| 친인척 | 이상오(장인) 이시우(장조부) 이일우(처종조부) 이상정(처백부) 한문이(처백모) 권기옥(처백모) 이상화(처중부) 이상백(처숙부) 이준희(처남) 이열희(6촌 재종처남) 서정귀(6촌 재종동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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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속 조직 | 만주국군 조선인민군 대한민국 육군 |
|---|---|
| 최종 계급 | 하사(만주국군) 대위(북한군) 준장(대한민국 육군) |
| 복무 기간 | 1943년 ~ 1963년 |
| 근무 | 육군 제8사단 육군본부 국가재건최고회의 |
| 지휘 | 육군 제8사단 예하 수색대대장 육군본부 특공특수부대장 육사 생도대장 국가재건최고회의 혁명검찰부장 |
| 참전 | 1947년 인민군 토벌 특수작전 및 공비 토벌 1950년 6.25 한국 전쟁 |
| 직책 | 혁명검찰부 부장 |
|---|---|
| 임기 | 1961년 5월 25일 ~ 1963년 1월 16일 |
| 의장 | 장도영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
| 대통령 | 윤보선 대한민국 대통령 송요찬 대한민국 대통령 권한대행 김종오 대통령 권한대행 박정희 대한민국 대통령 권한대행 김현철 대한민국 대통령 권한대행 |
| 수상 | 장도영 대한민국 내각수반 송요찬 대한민국 내각수반 김종오 대한민국 내각수반 권한대행 서리 박정희 대한민국 내각수반 김현철 대한민국 내각수반 |
| 정당 | 무소속 |
| 경력 | 자유월보사 사장 한국독립당 최고위원 겸 당무위원 (1964년) 한국국민당 상임고문 겸 당무위원 (1986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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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얼빈 공업대학 동문 -
류궈중
류궈중은 흑룡강성 출신으로 여러 성의 주요 직책을 거쳐 국무원 부총리가 된 중화인민공화국의 정치인이며, 농업, 보건, 빈곤 퇴치 등의 분야를 담당하고 있다. -
하얼빈 공업대학 동문 -
신수현 (배우)
신수현은 1996년 울산에서 태어나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그램 출연 후 드라마, 영화, 뮤직비디오, 연극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며 2020년 그리메상 신인 연기자상을 수상한 대한민국의 배우이다. -
만주국의 한국인 -
최남선
최남선은 1890년에 태어나 1957년에 사망한 대한민국의 문인이자 독립운동가, 언론인, 역사학자이며, 《소년》을 창간하고 신체시 〈해에게서 소년에게〉를 발표하여 현대 한국 문학의 선구자로 평가받으며, 3·1 운동 독립선언서 기초, 친일 행적, 단군 연구, 《단군론》, 《불함문화론》 저술 등의 활동을 했다. -
만주국의 한국인 -
황석영
황석영은 만주 출생으로 한국 전쟁을 겪고 성장하여 사회 현실과 시대상을 반영하는 소설을 쓴 대한민국의 소설가이다. -
통위부 보병학교 동문 -
원용덕
원용덕은 일제강점기 만주국 군의관으로 복무하고 대한민국 국군 창설에 참여했으며, 정치적 사건에 개입하여 정치 군인으로 평가받았고, 4·19 혁명 이후 구속되었다가 사면된 인물이다. -
통위부 보병학교 동문 -
김동하 (1918년)
김동하는 일제강점기 만주군 장교이자 대한민국 해병대 창설에 참여한 군인, 정치인으로, 5·16 군사정변에 가담하여 국가재건최고회의 최고위원을 역임했으나 반혁명사건에 연루되었고, 만주군 복무 경력으로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었다.
2. 생애
박창암은 1921년 함경남도 북청군에서 태어나 옌지에서 연길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교직에 근무하였다. 1943년 만주군의 간도 특설대에 입대하여 사회주의 계열 독립군을 토벌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1946년 군사영어학교에 입교하여 1949년 육군 중위로 임관, 6.25 전쟁에 참전하여 빨치산 토벌 작전과 대북 심리전 분야에서 활동했다. 1951년 커클랜드 부대장을 역임하고, 1952년에는 미국 특수전학교를 졸업하고 육군본부 직할 특수부대 9172부대에서 근무했다. 1960년 육군사관학교 생도대장을 역임했다.
1961년 박정희 소장이 주도한 5·16 군사 정변에 가담하여 국가재건최고회의 혁명검찰부장을 역임하며 부정축재자 처벌 등 국가기강 확립에 힘썼다. 그러나 1963년 '반혁명' 혐의로 체포되어 징역 13년을 선고받았으나, 1년 후 형 면제 처분으로 석방되었다.
1968년 사재를 털어 월간 '자유'지를 창간하여 2002년까지 발행하며 반공 정신 함양과 민족사관 확립에 힘썼다. 1976년 이유립, 안호상 등과 함께 국사찾기협의회를 조직하여 국사찾기 운동을 전개하고, 《환단고기》 관련 사료를 발굴, 조사하여 세상에 알렸다. 1990년대에는 "5·16 세력은 혁명공약을 완수하고 국민들과 약속했던 대로 민정이양을 했어야 한다"는 주장을 펴기도 했다. 2003년 11월 10일 작고했다.
2.1. 초기 생애와 만주군 복무
1921년 함경남도 북청의 밀양 박씨 가문에서 태어났으며, 단천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만주국립연길(간도)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간도의 조양천(朝陽川)초등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했다. 1943년 만주국 군대인 간도특설대에 입대했다. 간도특설대는 사회주의 계열 민족 해방세력인 팔로군, 동북항일연군, 조선의용대와 만주 북서부에 잔존해 있던 대한독립군단을 토벌하기 위한 특수 부대였다. 간도특설대가 살해한 항일무장세력과 민간인은 172명에 달하며, 강간·약탈·고문을 당한 이들도 적잖다.
2.2. 해방 후 군 복무와 6.25 전쟁 참전
1946년 군사영어학교에 입학했다. 1949년 한국군에 입대하여 12월 8일 자로 예비역 중위로 임관(군번 20041번)했다. 1949년 8월 창설된 보국대대에 소속되어 제2중대장을 역임했다. 1950년, 보국대대는 제3사단에 배속되어 토벌 작전에서 성과를 올리자, 박창암의 중대는 제7사단에 파견되었다.
해방 후 평양에서 협신(協新)공업학교 교사를 하다 서울로 옮겨 1949년 육군 중위로 임관해 6.25 전쟁을 치르게 됐다. 전쟁 중에는 빨치산을 토벌하는 작전과 대북 심리전 분야에 주로 참여했다. 한국 전쟁 당시 8사단 수색대장과 동해유격대장, 육군 특수부대장을 지냈으며, 1960년 육군사관학교 생도대장을 역임했다.
1950년 7월 12일, 대전에서 현역으로 편입(군번 11700번)되었고, 제1군단 직할 수색대 대장을 역임했다.
1950년 8월, 제15연대 비밀 제2대대장으로 다부동 전투에 참전했다. 북진 당시 제8사단 수색대장을 지냈다. 1951년 2월, 제8사단 대전차포대 대장을 역임했다.
1951년 4월, 커클랜드(Kirkland) 부대장을 역임했다.
1952년, 이용문 작전국장이 특수부대 창설을 계획하자 50명의 기간 요원 중 한 명으로 선발되어 하와이 인근 섬에서 훈련을 받았다. 1952년 2월 24일부터 7월 14일까지 미 특수전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같은 해 8월 귀국하여 제9172부대에 소속되었고, 이후 부대장을 역임했다.
1952년 겨울, 무지개부대장으로 제주도 게릴라 토벌 작전에 참가했다.
1960년, 육군사관학교 생도대장을 역임했다. 1961년 5·16 군사정변이 일어나자 사관후보생들을 이끌고 참여했다.
2.3. 5.16 군사정변 가담과 반혁명 사건
1961년 박정희, 장도영 등과 함께 5·16 군사 정변에 가담하였으나 알래스카 토벌 작전으로 숙청되었다. 육군 준장으로 예편하였다. 그는 5·16에 주체세력으로 참여해 구정권의 부패를 척결하는 혁명검찰부의 부장을 맡았다.
그는 혁명검찰부장으로 활동할 당시 장도영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을 반혁명 음모 혐의로 구속, 군사재판에 회부하기도 했다. 그러나 1963년 2월 혁명검찰부장을 그만두고 준장으로 예편하자마자 본인이 오히려 반혁명 혐의로 구속되었다. 1963년 3월 11일 김재춘이 이끄는 중앙정보부는 그가 반혁명사건에 연루된 인물이라고 발표했다. 중앙정보부는 5·16 당일 박정희 소장과 함께 해병대를 이끌고 한강 인도교를 건너 쿠데타를 성공시킨 김동하 예비역 해병대 중장과 박임항 예비역 육군 중장, 이규광 예비역 육군 준장(전두환 전 대통령 부인인 이순자 여사의 삼촌) 등 5·16 핵심 멤버가 그와 함께 5·16을 뒤집는 반혁명을 모의했다고 발표했다.
박정희 세력이 아직 민정(民政)으로 이양하지 않은 시점에서 터져 나온 이 반혁명사건은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이 사건은 ‘군사혁명을 통해 목적한 바를 성공시켰으니 이제 군은 본연의 임무로 돌아가자’는 세력과, ‘군사혁명을 성공시켰으니 차제에 군복을 벗고 정부를 이끌어 군사혁명의 취지를 강화하겠다’는 박정희 세력 사이의 갈등에서 빚어진 것이었다. 법정에 선 박창암은 “혁명의 목적은 달성됐으므로 군은 당초 약속대로 참신한 민간인에게 정권을 이양하고 군 본연의 임무로 돌아가야 한다”며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을 맹비난했다.
재판부는 박창암에게 징역 13년을 선고했으나 1년 후 그는 형 면제처분으로 석방됐다. 1963년 준장으로 예편했다. 그가 교도소에 있는 사이에 박정희는 대장으로 전역하고 제5대 대통령선거에 출마해 당선됐다. 대통령이 된 박정희는 박창암 등에게 형 면제처분과 함께 복권 조치를 취했다.
2.4. 월간 '자유' 발행과 민족사학 후원
1968년 박창암은 사재를 털어 월간 '자유'지를 창간했다. 그는 2002년까지 월간 '자유'의 발행인으로 일하며 자신의 철학을 펼쳤다. 반혁명사건으로 투옥되기 전까지 그의 키워드가 반공이었다면, 자유지 창간 이후에는 '국사(國史)'로 바뀌었다.
이는 그가 간도에서 성장한 경험과 당시 대전 지역에서 국사 바로 세우기 운동을 하던 이유립과의 만남이 큰 영향을 주었다. 이유립은 1970년대 중반부터 '자유'지에 글을 기고하며 민족사관의 관점을 알렸다.
1976년 이유립, 안호상, 유봉영, 문정창, 박시인, 임승국 등과 함께 국사찾기 협의회를 조직, 강단학회와 맞서 국사찾기 운동을 전개했다. 이들은 《환단고기》에 대한 사료를 조사, 발굴하여 세상에 알렸다.
박창암은 유신정권하에서 임승국과 함께 박정희 대통령을 상대로 국사교과서 개정 행정소송을 하기도 했다. 이후 《자유》지는 재야 사학자들의 논문 및 주장을 발표할 수 있는 토대가 되었다.
이 기간 중 그는 미국의 동양미술사학자인 존 카터 코벨(Jon Carter Covell)이 한국에서 연구와 저술활동을 할 수 있도록 지원했다. 코벨은 일본 문화의 근원이 한국에 있음을 학술적으로 밝힌 인물이다.
2.5. 가족 관계
密陽중국어 박씨인 박창암은 부인 이겸희(李謙熙)를 두었다. 이겸희는 이상오의 딸이며, 이상정, 이상화, 이상백의 조카이다. 이열희와는 6촌 남매간이다.
박창암의 가족 관계는 다음과 같다.
| 관계 | 이름 | 비고 |
|---|---|---|
| 부인 | 이겸희(李謙熙) | |
| 장인 | 이상오(李相旿, 1905년 ~ 1969년) | 수렵가, 바둑 유단자. 아호(雅號)는 모남(慕南). 경상북도 대구 우현고등보통학교 및 일본 호세이 대학교 법정학과 학사. |
| 처백부 | 이상정(李相定, 1897년 6월 10일 ~ 1947년 10월 27일) | 독립운동가. 아호(雅號)는 청남(晴南), 산은(汕隱). 이상오의 첫째형. 대한독립군 중장 |
| 처백모 | 권기옥(權基玉, 1901년 1월 11일 ~ 1988년 4월 19일) | 독립운동가. 이상정의 부인, 여성 비행사, 대한독립군 대령 |
| 처중부 | 이상화(李相和, 1901년 5월 9일 ~ 1943년 4월 25일) | 민족 시인. 아호(雅號)는 상화(尙火, 想華), 무량(無量), 백아(白啞). 이상오의 둘째형. |
| 처숙부 | 이상백(李相佰, 1904년 8월 6일 ~ 1966년 4월 14일) | 사학자 겸 체육인. 아호(雅號)는 상백(想白), 백무일재(百無一齋). 이상오의 셋째형. |
| 처종조부 | 이일우(李一雨) | 민족운동가 겸 계몽사상가 |
| 6촌 재종처남 | 이열희(李烈熙, 1924년 12월 18일 ~ 2012년 8월 9일) | 치과의사 겸 성형외과 의사, 경북대학교 의과대학 교수, 치과대학 1,2대 학장 |
| 6촌 재종동서 | 서정귀(徐廷貴, 1919년 ~ 1974년) | 4대·5대 국회의원, 재무부 차관(1960년), 호남정유사 사장 역임 |
3. 이갑성 밀정설 제기
1980년 자신이 발행하는 잡지 《자유》에 이갑성의 밀정설을 제기했다. 1980년 임정 국무위원 출신 조경한이 박창암을 불러 이갑성이 일제의 밀정 노릇을 했다고 주장하며 "내가 이걸 밝혀야 되겠는데 자네 용기 있나"라고 했고, 박창암은 조경한의 부탁을 수락했다.
조경한의 진술을 토대로 월간 《자유》에 발표했고, 이갑성은 병석에서 소송을 제기했으나 재판 진행 중 소송 결과를 보지 못하고 사망하여 소송은 취소되었다. 이후 윤치영이 그를 찾아와 "몇이 달라붙어도 해결 못 할 일을 해결했다"며 치하하였다.
이갑성의 친일 논란은 또 다른 독립운동가 조경한, 이강훈 등에 의해 일제에 전향해 밀정까지 했다는 의혹이 한동안 제기됐으나, 구체적인 행적을 조사한 결과 문제 제기의 내용이 사실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이 확인됐다. 1940년대 상하이에 나타났던 비슷한 이름의 밀정에 대한 소문이 와전되면서 발생한 오해일 가능성이 대단히 크다.
4. '해방 후 광복군' 논란과 박정희 비밀공작원설
박창암은 함경남도 북청 출신으로, 만주국립연길(간도)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교사로 근무하다 1943년 만주국 군대인 간도특설대에 입대했다. 간도특설대는 사회주의 계열 민족 해방세력인 팔로군, 동북항일연군, 조선의용대와 만주 북서부에 잔존해 있던 대한독립군단을 토벌하기 위한 특수 목적을 띈 독립군 토벌 부대였다.
광복 후, 박창암은 5·16 군사 정변에 가담하였으나, 이후 '알래스카 토벌 작전'으로 숙청되어 육군 준장으로 예편하였다. 그는 혁명검찰부장으로 활동하며 장도영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을 반혁명 음모 혐의로 구속하기도 했지만, 1963년 반혁명 혐의로 본인이 구속되는 처지가 되었다. 이 사건은 군사정변 성공 이후 군의 본연 임무 복귀를 주장하는 세력과, 군 주도로 정부를 이끌고자 했던 박정희 세력 간의 갈등에서 비롯되었다. 박창암은 법정에서 "혁명의 목적은 달성됐으므로 군은 민간에 정권을 이양해야 한다"며 박정희를 비난했다. 재판부는 징역 13년을 선고했으나, 1년 후 형 면제처분으로 석방되었다. 이후 박창암은 박정희 정부와 거리를 두고 월간 '자유'지를 창간하여 발행인으로 활동했다.
한편, 박정희가 만주군 시절 비밀리에 광복군 활동을 했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으나, 이는 사실과 다르다는 증언과 자료들이 존재한다. 박정희와 함께 근무했던 신현준은 광복군의 존재 자체를 광복 이후에야 알았다고 증언했으며, 이는 박정희의 비밀 광복군설을 반박하는 중요한 근거로 사용된다.
해방 직후, 베이징에는 많은 조선 청년들이 집결했고, 임시정부는 이들을 김학규 광복군 3지대장 휘하로 편입시켰다. 이때 신현준과 박정희는 만주군 장교 경력을 인정받아 각각 대대장과 중대장을 맡았는데, 이들은 '해방 후 광복군'으로 불린다. 염인호 서울시립대 교수의 논문에 따르면, 박정희처럼 해방 이후 확군된 병사의 수는 베이징, 난징, 상하이 등에서 상당수에 달했다. 박정희가 소속되었던 광복군 부대는 북평잠편지대, 혹은 제3지대 주평진대대로 추정되는데, 이는 광복군이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 부대 명칭을 부여한 것으로, 사실상 포로수용부대에 가까웠다.
박정희의 비밀 광복군설은 소설 <광복군>(저자 박영만)을 통해 확산되었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간도특설대에 대한 증언을 한 이용(이집용)은 박정희와 신현준이 비밀 광복군이었다는 주장은 거짓이라고 밝혔다. 육군본부의 '창군전사'나 장창국의 '육사 졸업생' 등에도 박정희가 비밀 광복군이었다는 내용이 등장하지만, 이는 모두 날조된 것이다. 철석부대 출신 박창암, 송석하 등은 박정희가 철석부대 근처에도 간 적이 없다고 증언했다.
광복군 출신 장준하는 소설 <광복군>의 내용에 격분하여, 1967년 대선 당시 윤보선을 지지하며 박정희의 친일 행적을 비판했다. 김승곤 전 광복회장은 박정희가 소설 <광복군>의 내용을 보고 화를 냈으며, 저자인 박영만은 돈 한 푼 받지 못했다고 증언했다. 당시 중앙정보부에 근무했던 이종찬 전 국회의원은 <광복군> 책을 모두 거둬들이라는 지시가 내려왔으며, 박정희 대통령은 자신의 광복군 활동 주장이 거짓임을 인정했다고 증언했다. 박정희가 '해방 후 광복군'이 아니라, 오히려 길거리를 배회하다 체포되어 국내로 송환되었다는 자료도 있다. 광복군 출신 이재현은 박정희를 잡아 한국으로 송환한 책임자였으며, 일본군 출신이 너무 많아 군 편제가 필요하여 신현준, 이주일, 박정희에게 임시 직책을 맡긴 것뿐이라고 밝혔다.
5. 학력
* 만주국 지린성 옌볜 자치주 옌지 사범학교 졸업
* 대한민국 군사영어학교 1기 (1946년)
* 대한민국 통위부 보병학교 졸업 (1947년)
* 대한민국 조선경비보병학교 졸업 (1948년)
* 미국 육군 특수전학교 졸업 (1955년)
* 미국 미주리 종합군사학원 졸업 (1956년)
* 대한민국 육군포병학교 졸업 (1957년)
* 대한민국 육군공병학교 졸업 (1957년)
* 대한민국 육군기갑학교 졸업 (1958년)
* 대한민국 육군보병학교 졸업 (1958년)
* 대한민국 국방대학교 행정학사 5기 (1960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