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자벨 드 포르투갈 왕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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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자벨 드 포르투갈 왕녀는 1503년 포르투갈의 마누엘 1세와 아라곤의 마리아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카스티야 여왕 이사벨 1세의 이름을 물려받았다. 1526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와 결혼하여 스페인과 포르투갈 간의 정치적 동맹을 강화했다. 카를 5세의 부재 시 스페인 섭정으로 활동하며, 펠리페 2세, 마리아, 후아나 등 5명의 자녀를 두었다. 1539년 막내아들을 낳다가 사망했으며, 카를 5세는 그녀의 죽음 이후 재혼하지 않고 슬픔 속에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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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자벨 드 포르투갈 왕녀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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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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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호 | 신성 로마 황후 |
배우자 | 카를 5세 |
가문 | 아비스 가 |
아버지 | 마누엘 1세 |
어머니 | 마리아 데 아라곤 |
출생일 | 1503년 10월 24일 |
출생지 | 포르투갈 왕국 리스본 |
사망일 | 1539년 5월 1일 |
사망지 | 톨레도, 카스티야 왕관령, 스페인 |
매장지 | 엘 에스코리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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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및 자녀 | |
결혼 | 1526년 3월 10일 카를 5세와 결혼 |
자녀 | 펠리페 2세 마리아, 신성 로마 황후 주아나, 포르투갈 공주 |
왕비/황후로서의 정보 | |
스페인 왕비, 독일 왕비, 오스트리아 여대공비, 네덜란드 여공 | 1526년 3월 10일 – 1539년 5월 1일 |
신성 로마 황후 | 1530년 2월 24일 – 1539년 5월 1일 |
2. 어린 시절과 교육
이자벨은 1503년 10월 24일 리스본에서 포르투갈의 마누엘 1세 국왕과 그의 두 번째 부인인 아라곤의 마리아 사이에서 태어난 둘째이자 첫 딸로, 외할머니인 이사벨 1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1506년 오빠인 루이스가 태어나기 전까지 왕위 계승 서열 2위였다.
'''결혼'''
이자벨은 유모인 엘비라 데 멘도사의 감독하에 수학, 르네상스 고전, 라틴어, 스페인어, 프랑스어(모국어인 포르투갈어 외), 에티켓, 기독교 교리를 배웠다. 14세 때 어머니가 사망한 후, 이자벨과 여동생 베아트리체는 어머니의 재산과 비제우와 토레스 베드라스의 수입을 상속받았다.
3. 결혼
; 정치적 배경
이자벨 드 포르투갈 왕녀와 카를 5세의 결혼은 스페인과 포르투갈 간의 강력한 동맹을 위한 정략결혼이었다. 포르투갈은 당시 스페인에 대적할 수 있는 유일한 해상 강국이었으므로, 양국 간의 충돌을 피하고 해양 탐험을 지속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었다. 카를 5세는 합스부르크 출신 이었기에 스페인 귀족들의 요구와 프랑스의 영향력을 견제하기 위해 이베리아 반도의 공주와 결혼해야 했다.
1518년에 카를 5세는 여동생 오스트리아의 엘레오노르를 이사벨의 과부인 아버지와 결혼을 시켰다.
1521년, 카를로스는 그의 또 다른 사촌인 잉글랜드의 메리 1세와 약혼을 했지만, 1525년에 이 약혼은 취소 되었고, 잉글랜드와의 동맹은 포기 되었으며, 그는 마침내 이사벨과 결혼하려 했다.
1525년 이사벨의 오빠 주앙 3세와 카를 5세의 여동생 카타리나가 결혼하면서 합스부르크 가문과 아비스 가문의 유대가 더욱 강화되었다. 카를 5세는 이사벨과의 결혼을 통해 90만 포르투갈 크루자두(또는 카스티야 폴드)의 지참금을 받았으며, 이는 1521–1526년 이탈리아 전쟁으로 인해 겪었던 재정적 문제를 해결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 결혼 과정
이사벨은 카스티야 여왕 이사벨 1세와 아라곤 왕 페르난도 2세의 바람대로 스페인과 포르투갈 간의 강력한 동맹을 가져올 수 있는 매력적인 결혼 상대였다. 포르투갈은 대서양에서 스페인의 지배력에 도전할 수 있는 유일한 해군 강국이었으므로, 충돌을 일으키지 않고 해양 탐험을 지속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었다. 또한 카를 5세는 여러 왕국의 군주였으므로, 기독교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왕국인 포르투갈이 프랑스의 영향력 아래에 놓이는 대신 스페인의 영향력 아래에 놓이는 것이 필요했다.
그러나 18세의 카를 5세는 결혼을 서두르지 않았고, 대신 1518년에 여동생 오스트리아의 엘레오노르를 이사벨의 과부인 아버지와 결혼시켰다. 카를 5세의 플랑드르 출신 고문들은 그에게 포르투갈과의 동맹을 미루고 잉글랜드와의 동맹을 추진하도록 설득했다. 1521년, 카를 5세는 잉글랜드의 메리 1세와 약혼했지만, 메리는 카를 5세보다 16세나 어렸고 아직 어린아이였다.
1525년까지 카를 5세는 잉글랜드와의 동맹에 더 이상 관심이 없었고, 적자를 낳기로 결심했기 때문에 메리가 더 나이를 먹을 때까지 기다릴 수 없었다. 그의 약혼은 취소되었고, 잉글랜드와의 동맹은 포기되었으며, 그는 마침내 이사벨과 결혼하려 했다. 이사벨은 카를 5세와 나이가 비슷했고, 스페인어를 유창하게 구사했으며, 90만 포르투갈 크루자두(또는 카스티야 폴드)의 지참금을 제시했는데, 이는 카를 5세가 1521–1526년 이탈리아 전쟁으로 인해 겪었던 많은 재정적 문제를 해결하기에 충분했다.
카를 5세는 사촌 간의 결혼을 허가하는 교황의 특별 허가를 얻는 데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고, 포르투갈과의 동맹을 위한 결혼 계약이 체결되었다. 이사벨은 그와 결혼하고, 그녀의 오빠인 포르투갈 국왕 주앙 3세는 카를 5세의 막내 여동생인 오스트리아의 캐서린과 결혼할 것이었다. 1526년 1월, 이사벨은 스페인으로 여행을 떠났고, 세비야로 호송된 후, 카를 5세를 일주일 동안 기다렸다. 결국, 그들의 결혼식은 3월 11일 자정을 넘긴 직후 세비야 알카사르 궁전에서 거행되었다.
그들의 결혼은 정치적이었지만, 이사벨은 카를 5세를 매료시켰고, 그는 예상보다 그녀와 더 오래 함께 머물렀다. 그들은 그라나다의 알람브라 궁전에서 몇 달 동안 신혼여행을 보냈고, 카를 5세는 스페인에서 전에 본 적이 없는 페르시아 꽃의 씨앗을 주문했다.
; 결혼 생활
1526년 3월 10일, 이자벨라는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카를 5세와 결혼하였다. 두 사람의 결혼은 카스티야와 아라곤의 코르테스 (의회)에 의해 결정된 정략 결혼이었다. 카를 5세는 이사벨의 계모 레오노르의 남동생이며, 이사벨과는 사촌 관계였다. 이 결혼은 합스부르크 가문과 아비스 가문 (포르투갈 왕가)의 유대를 새롭게 할 의도가 있었다. 전년인 1525년에는 이사벨의 오빠 주앙 3세와 카를의 여동생 카타리나가 결혼하였다.
두 사람은 세비야의 알카사르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정략결혼이었지만, 부부 사이는 매우 좋았다고 알려져 있다. 신혼여행 당시, 주변에 사람이 있어도 카를로스와 이사벨은 개의치 않고 대화하고 미소를 지었다고 한다. 그들은 그라나다의 알람브라 궁전에서 몇 달 동안 신혼여행을 보냈고, 카를 5세는 이사벨을 위해 붉은 카네이션을 심도록 명했고, 이는 스페인의 꽃 문장이 되었다.
카를 5세의 잦은 부재로 이사벨은 힘든 시간을 보냈지만, 자녀 교육에 힘쓰고 남편에게 정기적으로 편지를 썼다. 유럽 전역을 순회하던 남편을 대신하여, 그 지성과 미모로 알려진 이사벨은 스페인에서 섭정을 맡았다 (1529년부터 1532년, 1535년부터 1539년).
이자벨과 카를 5세 사이에는 다음과 같은 자녀들이 있었다.
1539년, 남편 부재 중에 이사벨은 막내아들을 출산하다 난산으로 사망했다. 이후 카를 5세는 재혼하지 않고, 죽을 때까지 검은 상복을 입고 지냈다. 1556년 퇴위 후, 카를은 스페인의 수도원에 은거했지만, 1558년에 사망할 때까지 세상을 떠난 아내를 잊지 못했다고 한다.
3. 1. 정치적 배경
|thumb|right|1526년 이자벨 드 포르투갈과의 결혼을 기념하여 지어진 그라나다의 카를 5세 궁전 외부.]]
이자벨 드 포르투갈 왕녀와 카를 5세의 결혼은 스페인과 포르투갈 간의 강력한 동맹을 위한 정략결혼이었다. 포르투갈은 당시 스페인에 대적할 수 있는 유일한 해상 강국이었으므로, 양국 간의 충돌을 피하고 해양 탐험을 지속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었다. 카를 5세는 합스부르크 출신 이었기에 스페인 귀족들의 요구와 프랑스의 영향력을 견제하기 위해 이베리아 반도의 공주와 결혼해야 했다.
1518년에 카를 5세는 여동생 오스트리아의 엘레오노르를 이사벨의 과부인 아버지와 결혼을 시켰다.
1521년, 카를로스는 그의 또 다른 사촌인 잉글랜드의 메리 1세와 약혼을 했지만, 1525년에 이 약혼은 취소 되었고, 잉글랜드와의 동맹은 포기 되었으며, 그는 마침내 이사벨과 결혼하려 했다.
1525년 이사벨의 오빠 주앙 3세와 카를 5세의 여동생 카타리나가 결혼하면서 합스부르크 가문과 아비스 가문의 유대가 더욱 강화되었다. 카를 5세는 이사벨과의 결혼을 통해 90만 포르투갈 크루자두(또는 카스티야 폴드)의 지참금을 받았으며, 이는 1521–1526년 이탈리아 전쟁으로 인해 겪었던 재정적 문제를 해결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3. 2. 결혼 과정
이사벨은 카스티야 여왕 이사벨 1세와 아라곤 왕 페르난도 2세의 바람대로 스페인과 포르투갈 간의 강력한 동맹을 가져올 수 있는 매력적인 결혼 상대였다. 포르투갈은 대서양에서 스페인의 지배력에 도전할 수 있는 유일한 해군 강국이었으므로, 충돌을 일으키지 않고 해양 탐험을 지속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었다. 또한 카를 5세는 여러 왕국의 군주였으므로, 기독교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왕국인 포르투갈이 프랑스의 영향력 아래에 놓이는 대신 스페인의 영향력 아래에 놓이는 것이 필요했다.
그러나 18세의 카를 5세는 결혼을 서두르지 않았고, 대신 1518년에 여동생 오스트리아의 엘레오노르를 이사벨의 과부인 아버지와 결혼시켰다. 카를 5세의 플랑드르 출신 고문들은 그에게 포르투갈과의 동맹을 미루고 잉글랜드와의 동맹을 추진하도록 설득했다. 1521년, 카를 5세는 잉글랜드의 메리 1세와 약혼했지만, 메리는 카를 5세보다 16세나 어렸고 아직 어린아이였다.
1525년까지 카를 5세는 잉글랜드와의 동맹에 더 이상 관심이 없었고, 적자를 낳기로 결심했기 때문에 메리가 더 나이를 먹을 때까지 기다릴 수 없었다. 그의 약혼은 취소되었고, 잉글랜드와의 동맹은 포기되었으며, 그는 마침내 이사벨과 결혼하려 했다. 이사벨은 카를 5세와 나이가 비슷했고, 스페인어를 유창하게 구사했으며, 90만 포르투갈 크루자두(또는 카스티야 폴드)의 지참금을 제시했는데, 이는 카를 5세가 1521–1526년 이탈리아 전쟁으로 인해 겪었던 많은 재정적 문제를 해결하기에 충분했다.
카를 5세는 사촌 간의 결혼을 허가하는 교황의 특별 허가를 얻는 데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고, 포르투갈과의 동맹을 위한 결혼 계약이 체결되었다. 이사벨은 그와 결혼하고, 그녀의 오빠인 포르투갈 국왕 주앙 3세는 카를 5세의 막내 여동생인 오스트리아의 캐서린과 결혼할 것이었다. 1526년 1월, 이사벨은 스페인으로 여행을 떠났고, 세비야로 호송된 후, 카를 5세를 일주일 동안 기다렸다. 결국, 그들의 결혼식은 3월 11일 자정을 넘긴 직후 세비야 알카사르 궁전에서 거행되었다.
그들의 결혼은 정치적이었지만, 이사벨은 카를 5세를 매료시켰고, 그는 예상보다 그녀와 더 오래 함께 머물렀다. 그들은 그라나다의 알람브라 궁전에서 몇 달 동안 신혼여행을 보냈고, 카를 5세는 스페인에서 전에 본 적이 없는 페르시아 꽃의 씨앗을 주문했다.
3. 3. 결혼 생활
1526년 3월 10일, 이자벨라는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카를 5세와 결혼하였다. 두 사람의 결혼은 카스티야와 아라곤의 코르테스 (의회)에 의해 결정된 정략 결혼이었다. 카를 5세는 이사벨의 계모 레오노르의 남동생이며, 이사벨과는 사촌 관계였다. 이 결혼은 합스부르크 가문과 아비스 가문 (포르투갈 왕가)의 유대를 새롭게 할 의도가 있었다. 전년인 1525년에는 이사벨의 오빠 주앙 3세와 카를의 여동생 카타리나가 결혼하였다.
두 사람은 세비야의 알카사르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정략결혼이었지만, 부부 사이는 매우 좋았다고 알려져 있다. 신혼여행 당시, 주변에 사람이 있어도 카를로스와 이사벨은 개의치 않고 대화하고 미소를 지었다고 한다. 그들은 그라나다의 알람브라 궁전에서 몇 달 동안 신혼여행을 보냈고, 카를 5세는 이사벨을 위해 붉은 카네이션을 심도록 명했고, 이는 스페인의 꽃 문장이 되었다.
카를 5세의 잦은 부재로 이사벨은 힘든 시간을 보냈지만, 자녀 교육에 힘쓰고 남편에게 정기적으로 편지를 썼다. 유럽 전역을 순회하던 남편을 대신하여, 그 지성과 미모로 알려진 이사벨은 스페인에서 섭정을 맡았다 (1529년부터 1532년, 1535년부터 1539년).
이자벨과 카를 5세 사이에는 다음과 같은 자녀들이 있었다.
1539년, 남편 부재 중에 이사벨은 막내아들을 출산하다 난산으로 사망했다. 이후 카를 5세는 재혼하지 않고, 죽을 때까지 검은 상복을 입고 지냈다. 1556년 퇴위 후, 카를은 스페인의 수도원에 은거했지만, 1558년에 사망할 때까지 세상을 떠난 아내를 잊지 못했다고 한다.
4. 스페인 섭정
카를 5세는 자신이 이베리아 반도를 떠나 군사 작전을 수행하고, 다른 왕국을 통치하는 동안 이자벨을 스페인 섭정으로 임명했다. 이사벨은 1529년부터 1532년, 1535년부터 1539년까지 스페인의 섭정을 맡았다. 그녀는 정부 위원회 회의에 참석하고, 각료들과 상의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단순히 권고를 받아들이는 대신, 정책 결정 과정에 더욱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자신만의 해결책을 제시했다. 그녀의 남편은 그녀의 심의를 "매우 신중하고 잘 생각했다"고 평가했다.
4. 1. 섭정 임명
카를 5세(Charles V)는 자신이 이베리아 반도를 떠나 군사 작전을 수행하고, 다른 왕국을 통치하는 동안 이사벨(Isabella)을 스페인 섭정으로 임명했다. 이사벨은 1529년부터 1533년까지, 그리고 1537년부터 1539년까지 스페인 섭정을 맡았다. 그녀는 정부 위원회 회의에 참석하고, 각료들과 상의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녀는 단순히 권고를 받아들이는 대신, 정책 결정 과정에 더욱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자신만의 해결책을 제시했다. 그녀의 남편은 그녀의 심의를 "매우 신중하고 잘 생각했다"고 평가했다.
4. 2. 정치적 역량
이자벨은 정부 위원회 회의에 참석하고 각료들과 상의하는 등 정책 결정 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카를 5세는 그녀의 심의를 "매우 신중하고 잘 생각했다"고 평가했다.이자벨은 왕권을 효과적으로 수호했으며, 반도와 북아프리카 해안 방어에 힘써 귀금속 유입을 가능하게 했다. 섭정으로서 이자벨은 스페인이 제국의 군사 정책에서 벗어나 재정적 안정을 유지하는 데 기여했다. 그러나 카를 5세의 제국 통합 이후 카스티야는 높은 인플레이션을 겪었고, 이는 펠리페 2세 재위 기간의 파산 선언으로 이어졌다.
외교 정책에서 이자벨은 프랑스와 스페인 왕가 간의 혼인 동맹 협상에 적극적으로 개입했다. 그녀는 자신의 자녀들이 프랑수아 1세의 자녀와 결혼해야 하는 상황을 우려했다.
5. 죽음
이사벨라는 수년 동안 여러 도시를 여행하며 전염병 노출을 피하기 위해 이동했다. 결핵을 앓았다는 추측이 있으며, 한 동시대인은 그녀를 "황후는 세상에서 가장 안타까운 존재로, 너무 말라서 사람 같지 않다"고 묘사했다. 1539년 그녀는 일곱 번째 임신을 했지만 3개월 만에 또 다른 열병에 걸려 산전 합병증을 겪었고 사산한 아들을 낳았다. 그녀는 남편이 없는 상태에서 1539년 5월 1일 35세의 나이로 2주 후에 사망했다.
카를로스는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아 아내의 시신을 그라나다 왕실 예배당으로 함께 갈 수 없었다. 대신 그는 아들 펠리페에게 간디아 공작 프란시스코 보르하 4세와 함께 어머니의 시신을 동행하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이사벨라의 시신은 부패하여 간디아가 그녀를 알아볼 수 없었고, 사망이 그녀의 아름다움에 미친 끔찍함에 너무나 끔찍해 나중에 예수회원이 되어 산 프란시스코 데 보르하로 명성을 얻었다. 카를로스는 그녀의 죽음에 너무 슬퍼서 2개월 동안 수도원에 틀어박혀 고독 속에서 그녀를 위해 기도하고 슬퍼했다. 그는 그녀의 죽음에서 결코 회복되지 못했고, 슬픔을 나타내기 위해 남은 생애 동안 검은색 옷을 입었다. 그는 그녀가 죽은 지 오래된 후에 불륜을 저질러 사생아 오스트리아의 돈 후안을 낳았지만 재혼하지 않았다. 카를로스는 1558년 과부로 사망했으며, 그녀가 죽을 때 손에 들고 있던 것과 같은 십자가를 손에 들고 있었다.
1574년, 이사벨라의 시신은 아들에 의해 엘 에스코리알의 산 로렌소 데 엘 에스코리알 왕립 수도원으로 옮겨졌고, 그곳에서 그녀는 남편과 함께 왕립 예배당 제단 바로 아래의 작은 금고에 안치되었다. 이것은 그의 유언에 따라 이루어졌으며, 그는 새로운 종교 재단을 설립하여 부부가 "제단 아래 절반, 사제 발 아래 절반"으로 나란히 재매장될 것을 요청하는 유언 보충서를 남겼다. 그들은 유명한 수도원 대성당과 왕실 지하 묘지가 건설되는 동안 왕실 예배당에 머물렀다. 1654년, 증손자인 스페인 펠리페 4세의 통치 기간 동안 대성당과 왕실 지하 묘지가 마침내 완공된 후 부부의 유해는 대성당 바로 아래에 있는 왕의 왕실 판테온으로 옮겨졌다.
6. 사후 추모
카를 5세는 이사벨을 기리기 위해 1540년부터 예술과 음악을 통해 여러 헌사를 의뢰했다.[2] 플랑드르 작곡가 토마스 크레킬론에게 여제를 기리는 새로운 음악을 작곡하도록 의뢰했는데, 크레킬론은 ''Missa Mort m'a privé''를 작곡하여 남편의 슬픔과 사랑하는 아내와의 천상의 재회를 바라는 마음을 표현했다.[2] 니콜라스 파옌은 1545년에 ''Carole cur defles Isabellam''을 작곡했다.[2]
1543년, 카를 5세는 티치아노에게 이사벨의 사후 초상화를 그리도록 의뢰했다. 티치아노는 ''포르투갈의 이사벨 초상화''와 ''라 글로리아''를 포함한 그녀의 여러 초상화를 그렸다.[3] 피터 폴 루벤스가 모사한 황실 부부의 이중 초상화도 있는데, 카를 5세는 여행할 때마다 이 초상화를 소지했으며, 1555년 유스테 수도원에 은퇴한 후에도 소지했다.[4] 폼페오 레오니는 이사벨의 청동상을 제작했는데, 이 동상은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다.[2]
7. 자녀
1526년 3월 10일 이자벨은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카를 5세와 결혼하여 슬하에 7명의 자녀를 두었다. 이 중 펠리페 2세와 마리아만이 성년까지 생존했다.
이름 | 초상화 | 생애 | 비고 |
---|---|---|---|
펠리페 2세 | ![]() | 1527년 5월 21일 – 1598년 9월 13일 | 유일한 생존 아들이자, 스페인 왕위 계승자. 포르투갈 국왕 헨리 추기경 사후 포르투갈 왕위를 계승, 이베리아 연합을 수립했다. |
마리아 | ![]() | 1528년 6월 21일 – 1603년 2월 26일 |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막시밀리안 2세와 결혼했다. |
페르난드 | 1529년 11월 22일 – 1530년 7월 13일 | 유아기에 사망. | |
아들 | 1534년 6월 29일 | 사산. | |
후아나 | ![]() | 1535년 6월 26일 – 1573년 9월 7일 | 포르투갈의 주앙 마누엘과 결혼, 세바스티앙 1세의 어머니. |
후안 | 1537년 10월 19일 – 1538년 3월 20일 | 유아기에 사망. | |
아들 | 1539년 4월 21일 | 유산 및 사산. |
8. 가계
이자벨 드 포르투갈 왕녀는 마누엘 1세와 아라곤의 마리아 사이에서 태어났다.[5][6] 마리아는 아라곤 왕 페르난도 2세와 카스티야 여왕 이사벨 1세의 셋째 딸이었다.[6] 이자벨의 이름은 할머니 이사벨 여왕과 고모로부터 따온 것이다.
1세대 | 2세대 | 3세대 | 4세대 |
---|---|---|---|
1. 이자벨 드 포르투갈 | 2. 마누엘 1세 | 4. 비스 백작 페르난두[5] | 8. 포르투갈의 두아르르 1세[7] |
9. 아라곤의 엘레오노르[7] | |||
5. 포르투갈의 베아트리스[5] | 10. 포르투갈의 주앙[6] | ||
11. 바르셀루스의 이사벨[6] | |||
3. 아라곤의 마리아 | 6. 아라곤의 페르난도 2세[6] | 12. 아라곤의 후안 2세[8] | |
13. 후아나 엔리케스[8] | |||
7. 카스티야의 이사벨 1세[6] | 14. 카스티야의 후안 2세[9] | ||
15. 카스티야의 이사벨[9] |
이자벨은 합스부르크 가문과 아비스 가문 (포르투갈 왕가)의 유대를 강화하기 위해 1526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이자 스페인 왕인 카를 5세와 세비야의 알카사르에서 결혼하였다. 카를 5세는 이자벨의 계모 레오노르의 남동생으로, 이자벨과는 사촌 관계였다. 1525년에는 이자벨의 오빠 주앙 3세와 카를의 여동생 카타리나가 결혼하였다.
이자벨은 카를 5세와의 사이에서 펠리페 2세, 마리아, 후아나 등 5명의 자녀를 두었다. 펠리페 2세는 후에 스페인 왕위를 계승하였고, 마리아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막시밀리안 2세의 황후가 되었다. 후아나는 포르투갈 왕태자 주앙 마누엘과 결혼하여 세바스티앙 1세를 낳았다.
9. 문화적 묘사
TVE 드라마 ''카를로스, 레이 엠페라도르''에서 블랑카 수아레스가 이자벨 왕녀를 연기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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