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집트 제30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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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집트 제30왕조는 기원전 380년부터 기원전 343년까지 이집트를 통치한 왕조이다. 넥타네보 1세가 기원전 380년에 이집트 전역을 장악하며 시작되었으며, 페르시아의 침략에 맞서 스파르타와 아테네의 지원을 받아 격퇴했다. 넥타네보 1세의 아들 테오스가 공동 통치하다가 넥타네보 2세가 왕위를 이어받았으나,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의 침략으로 멸망했다. 이 왕조는 건축과 종교 분야에서 활발한 활동을 보였으며, 넥타네보 1세는 신전 건설을 통해 문화를 발전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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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 제30왕조 | |
---|---|
개요 | |
정식 명칭 | 이집트 제30왕조 |
존속 기간 | 기원전 380년 ~ 기원전 343년 |
정치 체제 | 절대 군주제 |
수도 | 세베니토스 |
공용어 | 이집트어 |
종교 | 고대 이집트 종교 |
역사 | |
시작 | 네파아루드 2세 폐위 |
종말 | 넥타네보 2세의 망명 |
통화 | |
통화 | 이집트 금 스타테르 |
주요 사건 | |
시작 사건 | 네파아루드 2세 폐위 |
종료 사건 | 넥타네보 2세의 망명 |
지도 | |
![]() | |
이전 및 이후 | |
이전 | 이집트 제29왕조 |
이후 | 이집트 제31왕조 |
2. 역사
이집트 제30왕조는 넥타네보 1세가 기원전 380년경 이집트 전역을 장악하면서 시작되었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이집트는 페르시아의 재정복 시도로부터 왕국을 방어하는 데 주력했으며, 때로는 스파르타나 아테네의 도움을 받기도 했다.[1] 넥타네보 1세는 페르시아의 침략을 성공적으로 막아내며 왕국의 안정을 다졌다.
기원전 365년, 넥타네보 1세는 아들 테오스를 공동 통치자이자 후계자로 삼았다. 그러나 테오스는 아버지 사후 왕위에 올랐으나, 시리아와 이스라엘 지역 원정 중 동생 차하피무의 계략으로 왕위를 빼앗기고 페르시아로 망명하게 되었다.[1][6][7]
차하피무의 아들인 넥타네보 2세가 기원전 360년 왕위에 올랐다. 그의 통치 기간 역시 페르시아의 끊임없는 침략 위협 속에서 이루어졌다. 페르시아의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는 초기 침공(기원전 351년 또는 기원전 350년)에 실패했으나,[1][8] 결국 기원전 343년 재침공에 성공했다. 이 침공으로 넥타네보 2세는 멤피스에서 남쪽 누비아로 도망쳐야 했고, 이는 사실상 독립 왕국으로서 이집트의 종말을 의미했다.[1] 비록 넥타네보 2세가 이집트 남부에서 잠시 더 통치했을 가능성이 있고,[1][9] 이후 카바바쉬가 잠시 저항을 이끌기도 했지만,[1][10] 넥타네보 2세는 이집트 출신 마지막 파라오로 기록된다. 그의 패배와 도주는 이집트가 독립적인 통치 체제를 잃게 되는 결정적인 사건이었다.[1][10]
2. 1. 넥타네보 1세
넥타네보 1세는 기원전 380년 11월까지 모든 이집트를 장악했다.[1] 그의 통치 기간 대부분은 페르시아의 재정복 시도로부터 왕국을 방어하는 데 사용되었으며, 때때로 스파르타나 아테네의 도움을 받았다.[1] 페르시아 내부의 불화나 지세를 잘 아는 이집트군의 전술 등이 효과를 발휘하여 침략을 막아낼 수 있었다. 넥타네보 1세 시대의 왕국은 안정되었으며, 문화면에서도 신전 건설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기원전 365년, 넥타네보는 아들 테오스 (제드호르)를 공동 왕이자 후계자로 임명했고, 기원전 363년 그가 사망할 때까지 아버지와 아들은 함께 통치했다.[1] 아버지의 죽음 이후 테오스는 왕위를 계승했으나, 친형제 차하피무 (차헤푸임)의 계략에 의해 왕위를 잃었다.[1][6] 차하피무는 테오스가 이집트 국내에서 인기가 없다는 점을 이용하여 자신의 아들이자 테오스의 조카인 넥타네보 2세를 왕으로 선포했다. 이집트 군대가 넥타네보 2세에게 집결하면서 테오스는 페르시아 왕의 궁정으로 망명해야 했다.[1][7]
2. 2. 테오스
기원전 365년, 넥타네보 1세는 아들 테오스(제드호르)를 공동 왕이자 후계자로 임명했고, 기원전 363년 아버지가 사망할 때까지 함께 통치했다.[1] 아버지의 사후, 테오스는 단독으로 왕위에 올라 당시 페르시아의 영토였던 현재의 시리아와 이스라엘 지역을 침공했다. 초기에는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으나,[6] 그의 동생 차하피무(차헤푸임)가 꾸민 음모로 인해 왕위를 잃게 되었다.[1] 차하피무는 테오스가 이집트 내에서 인기가 없다는 점을 이용하여 자신의 아들이자 테오스의 조카인 넥타네보 2세를 파라오로 선포했다. 이집트 군대가 넥타네보 2세를 지지하자 테오스는 결국 페르시아 왕의 궁정으로 망명해야 했다.[1][7]2. 3. 넥타네보 2세
테오스가 시리아와 이스라엘 지역 원정에 나선 사이, 그의 동생 차하피무는 테오스가 이집트 내에서 인기가 없다는 점을 이용하여 자신의 아들이자 테오스의 조카인 넥타네보 2세를 파라오로 추대했다.[1] 이집트 군대가 넥타네보 2세를 지지하자, 테오스는 결국 페르시아 왕궁으로 망명해야 했다.[1][7]넥타네보 2세의 통치는 페르시아의 재정복 시도에 맞서는 데 집중되었다. 페르시아의 통치자들에게 이집트의 독립은 마치 사트라프(지방 총독)의 반란과 같은 문제로 여겨졌다.[1] 그의 통치 초기 10년 동안, 페르시아의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는 제국 내부의 통제력을 강화하는 데 주력했기 때문에 이집트를 침공하지 못했다. 기원전 351년 또는 350년 겨울,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가 이집트를 침공했으나 실패로 돌아갔다. 이 패배는 키프로스, 페니키아, 킬리키아 등지에서 페르시아에 대한 반란을 촉발시키는 계기가 되었다.[1][8] 넥타네보 2세는 이러한 반페르시아 세력들을 지원했지만,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는 결국 이 반란들을 모두 진압하고 기원전 343년에 다시 이집트를 침공할 준비를 갖추었다.[1]
두 번째 침공은 성공적이었다. 넥타네보 2세는 나일 삼각주에서 방어선을 멤피스까지 후퇴시켜야 했고, 그곳에서 자신의 패배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결국 남쪽의 누비아로 도망쳤다.[1] 나파타의 왕 나스타센(Nastesen)에게 피신처를 찾았을 것으로 추정되지만,[1] 에드푸에서 발견된 그의 재위 18년을 기록한 문서를 근거로, 그가 이집트 남부에서 약 2년간 독립적인 통치를 더 유지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1][9]
넥타네보 2세는 선대 왕들보다 종교적인 면을 더 중시하여 많은 신전을 건설하고 뛰어난 조각상들을 남겼다. 이는 과거의 전통적인 가치를 중시하는 경향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비록 이후 카바바쉬(Khabash)라는 인물이 기원전 338년에서 335년경 페르시아에 대항해 잠시 왕을 자칭하기도 했지만,[1][10] 넥타네보 2세는 고대 이집트를 다스린 마지막 토착 파라오로 여겨진다. 그의 도주는 독립된 국가로서 이집트의 종말을 상징하는 사건이 되었다.[1][10]
3. 문화
이집트 제30왕조는 문화적으로도 번성했던 시기였다. 특히 넥타네보 1세는 이집트 전역에 걸쳐 신전을 복구하고 새로운 건축물을 세우는 등 활발한 건축 활동을 펼쳤다. 이러한 건축 활동은 후대 이집트 종교 신앙, 특히 이시스 숭배의 발전에 영향을 미쳤다. 왕조가 멸망한 이후에도 이 시기에 세워진 건축물들은 중요한 신앙 중심지로 남았다.
3. 1. 건축

넥타네보 1세는 수많은 기념비와 신전을 건립한 건축가로도 이름을 남겼다. 그는 이집트 전역에 있는 여러 신들의 황폐한 신전을 복구하고, 성스러운 섬 필레에 작은 키오스크를 세웠다. 또한 엘-카브, 멤피스, 사프트 엘-헤네프, 타니스에도 성소를 만들었다. 이러한 도시들, 특히 필레는 이후 고대 이집트에서 중요한 신앙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 시기의 신앙 활동은 이시스 숭배가 시작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헬리오폴리스에서는 람세스 2세의 탑문(필론) 앞에 뛰어난 '''석주'''를 세웠으며, 카르나크 신전에도 첫 번째 탑문을 건설했다.
이 왕조가 멸망한 후 이집트는 다시 페르시아의 지배하에 놓였지만, 제30왕조 시대에 세워진 건축물들은 남아 이집트 신들을 숭배하는 중심지로서의 역할을 이어갔다.
3. 2. 종교
넥타네보 1세는 무수한 기념비와 신전을 건립한 위대한 건축가로도 알려져 있다. 그는 이집트 전역에 있는 수많은 신들의 황폐한 신전을 복구하고, 성스러운 섬 필레에 작은 키오스크를 세웠다. 또한 엘-카브, 멘피스, 사프트 엘-헤네프, 타니스에도 성소를 만들었다. 이러한 도시들, 특히 필레는 이후 고대 이집트에서 중요한 신앙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 시기는 이시스 숭배가 시작되는 첫걸음이기도 했다. 헤르모폴리스에서는 람세스 2세의 필론(탑문) 앞에 뛰어난 '''석주'''를 세웠으며, 카르나크 신전에도 첫 번째 필론을 건설했다.
이 왕조가 멸망하고 다시 페르시아의 지배하에 놓인 후에도, 이 시기에 세워진 건조물들은 남아 이집트 신들을 숭배하는 중심지로서의 역할을 계속했다.
4. 역대 파라오
(왕위 이름)
(나크트네베프 1세)

(제드호르)

(나크트네베프 2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