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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령 키레나이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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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탈리아령 키레나이카는 이탈리아가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획득한 동부 리비아 지역으로, 이탈리아-튀르크 전쟁 이후 트리폴리타니아와 함께 형성되었다. 1920년대에는 이탈리아 식민 통치에 저항하는 리비아 반군과의 전투가 벌어졌으며, 1931년 반군 지도자 오마르 무크타르가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이탈리아 파시즘 정권은 강제 수용소를 운영하며 현지 주민들을 탄압했고, 1934년 이탈리아령 리비아에 통합되었다. 1930년대 후반에는 이탈리아인 정착민 유입과 대규모 경제 개발이 이루어졌으며, 제2차 세계 대전 중 연합군에 의해 점령된 후, 1951년 리비아 연합 왕국으로 독립하면서 리비아의 일부가 되었다.

2. 역사

1920년대 벵가지 시청


1927년에 지어진 ''팔라초 리토리오''는 이후 "키레나이카 의회"로 불렸다.


이탈리아령 키레나이카는 이탈리아령 트리폴리타니아와 함께 1911년 이탈리아-튀르크 전쟁에서 이탈리아 왕국오스만 제국으로부터 오스만령 트리폴리타니아 지역을 빼앗으면서 형성되었다.

1920년대에는 이탈리아의 식민 통치에 맞서 리비아 현지 주민들의 저항 운동이 거세게 일어났다. 특히 오마르 무크타르가 이끄는 저항군은 끈질기게 항전했으나, 이탈리아군은 이를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1931년 오마르 무크타르가 체포되어 처형되면서 저항 운동은 큰 타격을 입었다.

파시스트 정권 하에서 이탈리아는 리비아 저항 세력의 기반을 약화시키기 위해 제벨 아크다르 지역 주민들을 대규모로 강제 이주시키고 강제 수용소에 수감하는 등 잔혹한 정책을 시행했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리비아인들이 술루크, 엘 마그룬, 아비야르, 엘 아길라 등의 강제 수용소에서 열악한 환경과 스페인 독감과 같은 전염병으로 목숨을 잃었다. 저항이 약화된 1934년 이후 강제 수용소는 해체되었고, 이탈리아는 현지 아랍인에 대한 동화 정책을 추진했다. 또한 리비아 이탈리아 정착민의 이주를 장려하며 해안 지역을 중심으로 경제 개발을 시도했다.[4] 벵가지 등 주요 도시에는 소금 가공, 정유, 시멘트 제조 등 일부 산업 시설과 항만, 병원, 공항 등 인프라가 건설되기도 했다.

1934년, 이탈리아령 키레나이카는 이탈리아령 트리폴리타니아와 통합되어 이탈리아령 리비아 식민지의 일부가 되었다.

2. 1. 이탈리아-튀르크 전쟁과 식민지 성립 (1911-1912)

이탈리아령 키레나이카와 이탈리아령 트리폴리타니아의 성립은 1911년 이탈리아 왕국오스만 제국을 상대로 일으킨 이탈리아-튀르크 전쟁에서 비롯되었다. 이 전쟁 과정에서 이탈리아군은 키레나이카의 주요 도시인 토브루크, 데르나, 벵가지를 점령하였다.[6]

전쟁은 1912년 로잔 조약 체결로 마무리되었다. 이 조약에 따라 오스만 제국트리폴리타니아키레나이카 지역을 이탈리아에 공식적으로 할양하였고, 이를 통해 이탈리아의 식민지인 이탈리아령 키레나이카가 성립되었다.[6]

2. 2. 식민 통치 초기와 저항 운동 (1917-1931)

1920년대 키레나이카는 이탈리아 식민지 군대와 식민 통치에 맞서 독립을 위해 싸우는 리비아 저항 세력 간의 격렬한 전투 현장이었다.[17] 이 시기 저항 운동의 주요 사건들은 다음과 같다.

  • 1917년~1921년: 아크로마, 아르 라지마, 부 마리암 등지에서 이탈리아와 사이드 이드리스가 이끄는 세누시 교단 사이에 여러 차례 협정이 체결되어 분쟁이 일시적으로 중단되었다.[7][16]
  • 1923년: 이탈리아 총독 루이지 봉조반니는 세누시와의 조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한다고 선언했다. 이탈리아군은 세누시 토후국의 수도였던 아즈다비야를 점령하며 키레나이카 재정복을 시작했다.[8][17] 이에 오마르 무크타르를 중심으로 한 세누시 저항 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 1925년: 이탈리아-이집트 조약이 체결되어 키레나이카(후일 리비아)와 이집트 사이의 국경이 확정되었다.[9][18]
  • 1926년: 이탈리아군이 알자그부브를 정복했다.[6][15]
  • 1927년 겨울~1928년: 트리폴리타니아와 키레나이카 정부 간의 협력을 통해 "29도선 작전"이 개시되었다. 이 작전으로 시드라만이 정복되었고, 두 식민지가 지리적으로 연결되었다.[10][19]
  • 1929년: 피에트로 바돌리오가 트리폴리타니아와 키레나이카의 단일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바돌리오는 오마르 무크타르와 시디 루마에서 회담을 가졌으나, 협상은 결국 실패로 끝났다.[6][15]
  • 1931년: 이탈리아군은 쿠프라 오아시스를 점령했다. 또한 리비아-이집트 국경을 따라 철조망을 설치하여 저항군의 이동과 보급을 차단하려 했다. 같은 해, 저항 운동의 상징적 지도자 오마르 무크타르가 이탈리아군에 체포되어 처형되었다.[8][17] 이는 리비아 저항 운동에 큰 타격을 주었다.

2. 3. 파시스트 통치와 강제 이주 (1931-1934)

파시스트 이탈리아는 점령 초기 단계부터 동부 리비아에 여러 강제 수용소를 운영했다. 식민 행정부는 반군이 지역 주민들의 지원을 받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 1929년부터 제벨 아크다르 주민 대부분을 강제로 이주시키는 정책을 시행했다.

1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고향을 떠나 술루크, 엘 마그룬, 아비야르, 엘 아길라 등에 설치된 강제 수용소로 보내졌다. 수용소의 환경은 매우 열악했으며, 스페인 독감과 같은 전염병이 퍼지면서 수만 명의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이러한 비인간적인 조치는 리비아 저항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한 파시스트 정권의 의도적인 정책이었다. 1931년에는 저항 운동의 상징적인 지도자였던 오마르 무크타르가 이탈리아군에 체포되어 처형되면서 리비아의 독립 운동은 큰 타격을 입었다.[8][17]

키레나이카를 방문한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로돌포 그라치아니 총독 앞에서 열린 리비아 식민군의 퍼레이드 (1932년 2월)


1934년, 이탈리아 파시스트 정권이 키레나이카 지역에 대한 완전한 통제권을 확보했다고 판단하자 강제 수용소는 해체되었다. 이후 이탈리아는 현지 아랍인들에 대한 동화 정책을 시작했다. 이 정책은 표면적으로는 성공을 거두어, 1940년에는 아랍계 리비아인으로 구성된 두 개의 식민지 군사 사단이 창설될 정도였다. 같은 해(1934년), 키레나이카는 이탈리아령 트리폴리타니아와 통합되어 이탈리아령 리비아 식민지의 일부가 되었다.

2. 4. 이탈리아령 리비아 편입 (1934-1943)

1934년에 이탈리아령 키레나이카와 이탈리아령 트리폴리타니아이탈리아령 리비아의 일부가 되었다.

1930년대 후반 키레나이카 해안 지역을 중심으로 2만 명 이상의 리비아 이탈리아 정착민이 거주하게 되면서, 이탈리아는 대 이탈리아를 위한 경제 개발을 목적으로 리비아의 인프라에 대규모 투자를 진행했다.[4] 벵가지에서는 키레나이카 역사상 처음으로 제조 시설들이 설립되었다. 1930년대에 소금 가공, 정유, 식품 가공, 시멘트 제조, 무두질, 양조업을 비롯해 해면 및 참치 어업과 같은 산업들이 발전했다. 또한 벵가지 항구가 확장되었고 현대적인 병원이 건립되었으며, 인근에는 새로운 공항이 건설되었다.

2. 5. 제2차 세계 대전과 몰락

1939년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이탈리아는 다른 나라의 식민지를 침략하기 시작했다. 이탈리아령 키레나이카는 이집트그리스와 지리적으로 가까웠기 때문에, 이탈리아는 이곳을 발판 삼아 군사 작전을 펼쳤다. 1940년에는 키레나이카를 통해 이집트를 다시 침략하여 서부 지역을 점령했으며, 튀니지까지 침공하여 점령했다. 또한 키레나이카를 통해 그리스로 건너가 그리스-이탈리아 전쟁을 일으키기도 했다.

1941년, 이탈리아의 세력 확장은 절정에 달했다. 알제리 서부, 니제르 북부, 차드 북부까지 점령하여 식민지 영토를 크게 넓혔고, 동쪽에는 이탈리아령 동아프리카를 형성하며 아프리카에서 강력한 세력을 구축했다.

그러나 전쟁 말기로 접어들면서 이탈리아의 세력은 약화되었다. 1943년, 자유 프랑스 군대가 페잔 지역을 침략하여 망명 정부를 세웠다. 결국 같은 해 이탈리아는 연합군에 항복했고, 이로 인해 이탈리아의 모든 식민지 정부는 붕괴되었다.

2. 6. 키레나이카의 그 후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자 리비아는 승전국인 영국, 프랑스의 지배를 받았다. 1951년에 리비아 연합 왕국으로 독립하면서 키레나이카도 리비아의 일부가 되었다.

3. 인구

1930년대 후반 키레나이카의 인구는 리비아 원주민이 75% 이상을 차지하는 가운데, 주로 해안 지역에 2만 명이 넘는 이탈리아 식민지 주민이 거주하며 전체 인구의 약 15%를 구성했다.[4]

3. 1. 이탈리아의 식민지 정책

1930년대 후반, 키레나이카에는 주로 해안 지역을 중심으로 2만 명 이상의 이탈리아 식민지 주민이 거주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대규모 경제 개발 노력이 이루어졌다.

초기 이탈리아의 식민지 정책은 현지 리비아 주민들을 내륙의 변두리 지역으로 몰아내고, 이탈리아인들을 리비아의 가장 비옥한 땅에 재정착시키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그러나 1938년 새로운 총독으로 부임한 이탈로 발보는 원주민의 동의를 얻는 방향으로 정책을 일부 수정했다.[4]

하지만 이러한 변화에도 불구하고 식민 통치 하에서의 차별은 여전했다. 특히 교육 분야에서 이탈리아인과 리비아인 간의 불균형이 심각했는데, 발보 총독 부임 이전까지 이탈리아는 리비아인들에게 적절한 교육 기회를 제공하지 않았다. 1938년 기준으로 전체 인구의 약 15%를 차지하는 이탈리아인들을 위한 초등학교는 81개였던 반면, 전체 인구의 75% 이상을 차지하는 리비아인들을 위한 초등학교는 97개에 불과했다.[4]

이탈리아 벵가지의 파노라마. 비아 비토리아와 연결된 가톨릭 대성당과 베네치아 사자 및 카피톨린 늑대가 특징인 두 개의 기둥이 보인다.


또한, 이 시기 이탈리아는 식민지 주민들을 위한 정착촌 건설을 추진했다. 1938년에는 이탈리아 식민지 주민들을 위해 바라카(Baracca), 마달레나(Maddalena), 오베르단(Oberdan), 단눈치오(D’Annunzio), 바티스티(Battisti) 등의 농촌 마을이 세워졌고, 1939년에는 마멜리(Mameli)와 필치(Filzi) 마을이 추가로 건설되었다.

한편, 리비아인들을 위해서는 별도의 마을이 건설되었다. 당시 많은 리비아 남성들이 이탈리아-리비아 사단(제1 리비아 사단과 제2 리비아 사단)에 징집되었는데, 이들 가족 등을 위해 게디다-누오바(Gedida-Nuova), 나히다-리소르타(Nahida-Risorta), 자흐라-피오리타(Zahra-Fiorita), 엘-파게르-알바(el-Fager-Alba)와 같은 마을이 세워졌다.

4. 기반 시설



이탈리아는 주로 1930년대에 이탈리아령 키레나이카에서 주요 기반 시설 공사를 시행했다. 가장 중요한 사업으로는 트리폴리벵가지를 잇는 해안 도로 건설, 벵가지-바르체 및 벵가지-솔루크 철도 건설, 벵가지 항 확장 등이 있었다.

또한 1930년대 동안 키레나이카 해안 지역에는 이탈리아인과 리비아인을 위한 마을들이 건설되었으며, 이 마을들에는 필요한 통신 시설 및 기반 시설이 갖추어졌다.[5]

참조

[1] 문서 After Pietro Badoglio became the List of colonial governors of Italian TripolitaniaGovernor of Tripolitania and Cyrenaica in January 1929 the Governor of Cyrenaica became Vice-Governor.
[2] 웹사이트 Italian Benghazi https://dadfeatured.[...]
[3] 서적 The dark side of democracy: explaining ethnic cleansing Cambridge University Press
[4] 간행물 General History of Africa Unesco. International Scientific Committee for the Drafting of a General History of Africa
[5] 웹사이트 Chapter Libya-Cyrenaica http://www.fedoa.uni[...]
[6] 서적 “Mu’jam Ma’arik Al Jihad fi Libia1911-1931” Dar Ath Thaqafa
[7] 서적 “As Senussiya Deen wa Daula” Markaz ad Dirasat al Libiya
[8] 서적 "Cirenaica Pacificata" Al Ferjani publishing
[9] 서적 "La Question de Libye dans la Règlement de La Paix" Markaz Jihad al Libiyeen lid Dirasat at Tarikhiya
[10] 서적 "Cirenaica Verdi" ad Dar al Arabiya lil Kitab
[11] 문서 1929年1月にピエトロ・バドリオがトリポリタニア・キレナイカ総督に就任した後、キレナイカ総督は副総督となった。
[12] 서적 The dark side of democracy: explaining ethnic cleansing Cambridge University Press
[13] 간행물 General History of Africa Unesco. International Scientific Committee for the Drafting of a General History of Africa
[14] 웹사이트 Chapter Libya-Cyrenaica http://www.fedoa.uni[...]
[15] 서적 “Mu’jam Ma’arik Al Jihad fi Libia1911-1931” Dar Ath Thaqafa
[16] 서적 “As Senussiya Deen wa Daula” Markaz ad Dirasat al Libiya
[17] 서적 "Cirenaica Pacificata" Al Ferjani publishing
[18] 서적 "La Question de Libye dans la Règlement de La Paix" Markaz Jihad al Libiyeen lid Dirasat at Tarikhiya
[19] 서적 "Cirenaica Verdi" ad Dar al Arabiya lil Kita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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