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필주
1. 개요
이필주는 대한제국 군인 출신으로, 기독교에 입교하여 구국 계몽 운동에 참여한 인물이다. 한성부의 빈한한 가정에서 태어나 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군에 입대하여 동학농민운동에 참여했다. 이후 기독교에 귀의하여 상동청년학원 체육교사, 신민회 참여, 협성신학교 졸업 후 목사 안수를 받았다. 1919년 3·1 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의 한 명으로 참여하여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았으며, 출소 후 화성에서 목회 활동을 하다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헌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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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생 | 1869년 11월 1일 |
|---|---|
| 사망 | 1942년 10월 10일 |
| 국적 | 한국 |
| 직업 | 목사 |
| 종교 | 개신교 |
| 출생지 | 황해도 장연군 |
|---|---|
| 학력 | 배재학당 졸업 |
| 주요 활동 | 기독교 목회 신사참배 반대 운동 |
| 경력 | 승동교회 담임목사 대한민국 임시정부 고문 |
| 훈장 | 건국훈장 독립장 (2005년) |
|---|---|
| 가족 관계 | 이갑성 (사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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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리교신학대학교 동문 -
이윤영 (1890년)
3·1 운동 참여, 신사참배 저항 등의 활동을 한 일제강점기 목사이자 교육자이며 해방 후 조선민주당 창당, 제헌 국회의원, 무임소장관, 사회부 장관 등을 역임하고 신흥대학 학장을 지낸 정치인이다. -
감리교신학대학교 동문 -
현순
현순은 하와이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3·1 운동 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외무부 및 내무부 차장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하여 외교 활동과 임시정부 재정 지원을 위한 모금 활동을 펼친 독립운동가이자 목사이다. -
서울특별시 출신 -
정경심
정경심은 자녀 입시 비리 혐의로 징역 4년형이 확정되어 복역 후 가석방된 대한민국의 영문학자이자 대학교수였다. -
서울특별시 출신 -
서형원
서형원은 환경운동연합 활동을 거쳐 과천시의회 의원 및 의장을 역임하고 녹색당 풀뿌리정치지원단장으로 활동한 환경운동가 출신 정치인이다. -
한국 사람에 관한 -
한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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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람에 관한 -
김조국
김조국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인으로, 2019년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위원 겸 당 중앙군사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당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으로 임명되었다.
2. 생애
이필주는 한성부의 몰락한 가정에서 태어나 가난하게 성장했다. 젊은 시절에는 세상을 원망하며 방탕한 생활을 하기도 했다. 1890년 생계를 위해 군대에 들어갔고, 1894년에는 동학농민운동 진압에 참여했다.
1902년 늦게 얻은 자녀 남매가 모두 병으로 사망하는 사건을 겪고 상동교회에서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되었다. 윌리엄 스크랜튼 선교사와 전덕기 전도사에게 큰 감화를 받고 다음 해 세례를 받았다. 또한 동학농민운동 때부터 느꼈던 회의감 때문에 군 생활도 그만두었다.
1904년 상동교회가 주축이 되어 상동청년학원을 설립하자 체육 교사를 맡았다. 당시 교장은 이승만이었고, 교사진에는 주시경, 최남선, 남궁억 등 유명한 인사들이 있었다.
1907년에는 전덕기를 통해 양기탁, 이동녕, 안창호 등이 조직한 신민회에 참여했고, 이후 늦은 나이에 협성신학교(현재, 감리교신학대학교)에 입학해 1915년 목사 안수를 받았다.
1919년 2월 3·1 운동 거사 때 최남선이 기초한 기미독립선언서 초안을 논의하고자 이필주의 집에서 기독교 인사들이 모였고, 민족대표 33인으로 참여할 인물들이 정해졌다. 그는 1918년부터 감리교 대표 정동제일교회 목사였다. 민족대표 33인에는 최성모와 박동완도 있었다.
3·1 운동 참여로 체포되어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했으며, 이후 경기도 화성에서 목회 활동을 하다가 1942년 사망했다.
2.1. 초기 생애와 군 생활 (1869-1902)
이필주는 한성부의 몰락한 가정에서 태어나 가난하게 성장했다. 젊은 시절에는 세상을 원망하며 방탕한 생활을 하기도 했다. 1890년 생계를 위해 군대에 들어갔고, 1894년에는 동학농민운동을 진압하는 데 참여했다.
1902년 늦게 얻은 자녀 남매가 모두 병으로 사망하는 사건을 겪었다. 이를 계기로 상동교회에 나가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되었다. 상동교회에서 선교사 윌리엄 스크랜튼과 전도사 전덕기를 만나 큰 감화를 받았고, 이듬해 세례를 받았다. 또한, 동학농민운동 때부터 느꼈던 회의감 때문에 군 생활도 그만두었다.
2.2. 기독교 입문과 교육 활동 (1902-1918)
1902년 늦게 얻은 자녀 남매가 병으로 모두 사망하는 사건을 겪으면서 상동교회에 입교하여 기독교인이 된다. 이곳에서 선교사 윌리엄 스크랜튼과 전도사 전덕기와의 만남으로 큰 감화를 받고 다음 해 세례를 받았으며, 동학농민운동 때부터 느꼈던 회의 때문에 군인 생활도 그만두었다.
1904년 상동교회가 주축이 되어 상동청년학원을 설립하자 이 학교의 체육 교사를 맡았다. 당시 교장은 이승만이었고 교사진에는 주시경, 최남선, 남궁억 등 유명한 인사들이 모여들었다.
1907년에는 전덕기를 통해 양기탁, 이동녕, 안창호 등이 조직한 신민회에 참가하였고, 이후 늦은 나이에 협성신학교(현재, 감리교신학대학교)에 입학해 신학 교육을 거쳐 1915년 목사 안수를 받았다.
2.3. 3.1 운동과 투옥 (1919-1921)
1919년 2월 3·1 운동 거사 기운이 무르익고 최남선이 기초한 기미독립선언서 초안이 잡히면서, 이필주의 집에서 기독교 인사들이 회동을 가졌고, 그를 비롯하여 민족대표 33인에 참가할 인물들이 정해졌다. 그는 1918년부터 감리교 대표격인 정동제일교회 목사직을 맡고 있었다. 민족대표 33인에 참여한 사람들 중에는 상동교회 시절부터 오랜 친구인 최성모와 정동교회 전도사인 박동완도 있었다.
이 사건으로 체포되어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했으며, 이후 경기도 화성으로 내려가 목회 활동을 하다가 1942년 사망했다.
2.4. 은퇴 이후의 삶과 죽음 (1921-1942)
1919년 3·1 운동으로 체포되어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했으며, 이후 경기도 화성으로 내려가 목회 활동을 하다가 1942년 사망했다.
4. 평가 및 의의
이필주는 대한제국 군인 출신으로 개신교에 입교하여 구국 계몽 운동에 참여한 특이한 경력을 가지고 있다. 젊은 시절 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군에 입대했고, 동학 농민 운동에도 참여했다. 이후 상동교회에서 개신교 신앙을 받아들이고 이승만, 주시경, 최남선, 남궁억 등 유명 인사들이 교사로 있던 상동청년학원에서 체육 교사를 맡았다. 신민회에도 가입하여 활동했다.
1919년 3·1 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으로 참여하여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출소 후에는 경기도 화성에서 목회 활동을 하다가 1942년 사망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