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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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현순은 한국의 독립운동가이자 목사로, 1902년 미국 하와이로 건너가 기독교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 안수를 받았다. 1903년 하와이로 이민하여 교회를 설립하고, 1911년 귀국 후 선교 활동을 하다가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투옥되었다. 3·1 운동 당시에는 미국에서 독립운동에 참여했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외무부 차장, 내무차장 등을 역임하며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이후 미국으로 돌아가 목회 활동을 하다가 1968년 사망했으며, 독립운동에 기여한 공로로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다.

현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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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현순은 가명으로 송원상(宋元相)을 사용했으며, 한성부 옥인동(玉仁洞)에서 태어났다. 함경남도 함흥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냈으며, 1902년 배편으로 미국 하와이로 건너가 기독교회에서 성경을 연구하고 목사 안수를 받았다.

2.1. 초기 생애와 하와이 이민 (1879~1919)

현순은 한성부 옥인동(玉仁洞)에서 출생하였으며, 가명은 송원상(宋元相)이다. 함경남도 함흥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다. 1902년 배편으로 미국 하와이로 건너가 기독교회에서 성경을 연구하고 목사 안수를 받았다.

1903년 3월 하와이로 정식 이민, 하와이 카후쿠와 와이알루아농장에 교회를 설립하였다. 1911년 귀국하여 선교활동을 하다가 이승훈, 윤치호, 양기탁 등이 데라우치 마다사케 총독을 암살하려 했다는 누명을 쓰고 105인 사건이 발생하자, 연루되어 투옥되었다. 석방된 뒤 동대문 상동교회 목사 전덕기가 옥사하자, 손정도와 함께 정동제일교회에서 전도사로 활동하며, 담임목사 최병헌을 도와 교회 확장과 전도 활동에 참여하였다. 이어 손정도, 최병헌 등과 함께 협성회를 조직하는데 참여했다.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미국 현지에서 목사로서 적극 참여하였다.

2.2. 대한민국 임시정부 활동 (1919~1922)

1919년 3·1 만세 운동이 일어나자 현순은 미국 현지에서 적극 참여하였다. 상하이에서 3월 1일 만세운동이 벌어진 것을 듣고 3월 9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안창호에게 전보를 보내 재미교포들이 처음 만세운동 소식을 들을 수 있도록 하였다. 또한, 파리와의 통신 연락을 담당하고 미국에 있는 교포들에게 독립운동의 현황을 알려 주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원 기념 사진(1919년 10월 11일) - 아랫줄 맨 오른쪽이 현순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원 기념 사진(1919년 10월 11일) - 아랫줄 맨 오른쪽이 현순


국내외의 독립운동가들이 상하이에 모이자, 이광수, 선우 혁, 신규식 등과 함께 상하이 프랑스 조계 보정로(寶昌路)에 모여 임시독립사무소를 개설하고 총무로 위임받아 각국에 독립선언서를 발부하였다. 1919년 4월 경성부에서 한성 임시정부 등의 주도로 개최된 국내 13도 대표 국민대표자 대회에서 평정관(評政官)으로 선임되었다.

1919년 4월 10일 이동녕, 손정도 등과 함께 통합 임시정부 제1회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 회의에 참여하였으며, 임시헌법기초위원회에 참석하여 임시헌장 10개조를 작성하는데 참여했다. 4월 13일 외무부 차장이 되고 그 뒤 정부의 조직 개편으로 외무위원에 선임되었다. 제2회 의정원 회의에서 임시정부 외무위원에 선임되었고 후에 다시 내무차장이 되었다.

이승만이 미국에서 구미위원부를 설치하고 5개월 만에 임정과 불화를 빚어 사임하자 미국 워싱턴으로 건너가 구미위원회 위원장 대리직을 맡았으나 1년 만에 물러났다.

1919년 8월 5일 내무부 차장에 임명되었으며, 1919년 9월 7일 임정 내무부 차장 자격으로 비밀리에 만주 출장을 다녀왔다. 9월 20일 임시정부 특파원으로 노령(露領)에 파견되었다. 1920년 9월 23일 임정 내무차장으로 비밀리에 출장을 다녀왔다. 9월 중, 노령과 만주 등지에서 정탐 활동과 임정 홍보 활동을 전개하다가 11월 상하이로 귀환, 11월 14일 내무부 차장직을 사임하고 배편으로 미국으로 건너갔다.

임시정부의 유지와 해체, 개조를 놓고 상하이 독립운동가 간에 갈등이 발생하자 그는 다시 상하이로 돌아와 1922년 상하이의 임시의정원과 좌일 계열의 국민대표회의 주비위원회(籌備委員會) 사이의 갈등을 해소하기 위하여 안창호, 이시영, 김구 등과 같이 시사책진회의 조직에 참여, 여러 파벌의 의견 수렴과 좌우 통합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2.3. 후기 생애: 목회 활동과 임시정부 지원 (1922~1968)

1921년 4월 26일 사직서를 제출하고 구미위원부 위원장 대리 직을 사퇴, 5월 28일에 수리되었다.

1926년 하와이 카우아이섬 한인감리교회의 목사로 파송되어 목회 활동을 하였다. 1931년 4월 카우아이섬 카파아와 리후에 두 지방에 거류하는 한인들을 모아 단합회를 조직하였으며, 1933년 임시정부 외교위원으로 선임되었다. 1934년 9월 임시정부의 재정 지원을 목적으로 이진일(李晋一), 김경(金慶), 이용직(李容稷) 등과 함께 모금 활동에 참여, 인구세, 애국의연금 등을 모금하여 송금하였다. 이진일은 뉴욕, 김경은 시카고, 이용직은 호놀룰루에 파견되었고, 현순은 하와이의 카와이 섬과 호놀룰루를 제외한 나머지 하와이 지역 일대에서 모금활동을 전개하였다.

1940년까지 15년간 카우아이에서 목회활동을 하다가 은퇴한 후 로스앤젤레스에서 1968년 별세하였다.

독립운동에 기여한 공으로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다.

3. 가족 관계

현순은 8명의 자녀를 두었다고 한다. 그의 자녀들 중 일부는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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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출생-사망비고
앨리스 현1903년 ~ 1956년?사회주의 활동에 참여, 북조선으로 갔다가 미제 간첩으로 몰려 처형
피터 현1906년 ~ 1993년
데이빗 현1917년 ~ 2012년LA의 리틀도쿄를 설계한 건축가

4. 상훈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