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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센 선제후 요한 게오르크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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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요한 게오르크 1세는 30년 전쟁 시기 작센 선제후로, 중립적인 입장을 유지하려 했으나 신성 로마 제국과 스웨덴 사이에서 동맹을 변경했다. 그는 루터파 신앙을 지지하며 합스부르크 왕가와 협력하여 세력 확장을 견제했고,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선출에 기여했으나, 이후 개신교 탄압에 반발하여 스웨덴과 동맹을 맺었다. 그러나 뤼첸 전투 이후 스웨덴과 결별하고 프라하 조약을 통해 황제와 화해했으며, 베스트팔렌 조약에 참여했다. 그는 두 번 결혼하여 9명의 자녀를 두었으며, 장남 요한 게오르크 2세가 작센 선제후위를 계승했다. 그는 정치적 수완은 있었으나, 훌륭한 통치자는 아니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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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센 선제후 요한 게오르크 1세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1652년 요한 게오르크 1세의 초상화
1652년 요한 게오르크 1세의 초상화 (프란스 루익스 그림)
칭호작센 선제후
재위 기간1611년 6월 23일 – 1656년 10월 8일
종교루터교
출생일1585년 3월 5일
출생지신성 로마 제국, 작센 선제후국, 드레스덴
사망일1656년 10월 8일
사망지신성 로마 제국, 작센 선제후국, 드레스덴
매장지신성 로마 제국, 작센 선제후국, 프라이베르크 대성당
왕가베틴 가문
통치
이전 통치자크리스티안 2세
다음 통치자요한 게오르크 2세
결혼과 자녀
배우자지빌레 엘리자베트 폰 뷔르템베르크 (1604년 9월 16일 결혼, 1606년 1월 20일 사망)
막달레네 지빌레 폰 프로이센 (1607년 7월 19일 결혼)
자녀조피 엘레오노레, 헤센-다름슈타트 방백부인
마리 엘리자베트, 홀슈타인-고토르프 공작부인
요한 게오르크 2세, 작센 선제후
아우구스트, 작센-바이센펠스 공작
크리스티안 1세, 작센-메르제부르크 공작
막달레네 지빌레, 작센-알텐부르크 공작부인
마우리츠, 작센-자이츠 공작
가계
아버지크리스티안 1세
어머니조피 폰 브란덴부르크

2. 생애

드레스덴에서 태어난 요한 게오르크 1세는 크리스티안 1세의 차남으로, 베틴가의 알베르틴 계열에 속했다. 그는 루터교 신자였으나, 30년 전쟁 초기에는 중립적인 입장을 취했다. 브란덴부르크팔츠 선제후국의 세력 확장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1611년 형 크리스티안 2세가 사망하면서 작센 선제후 자리를 계승했다. 당시 작센은 독일 신교도들 사이에서 높은 지위를 누리고 있었기에, 그의 결정은 중요했다. 다른 개신교 제후들은 그가 신성 로마 제국 및 가톨릭과 연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619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선거에서 페르디난트 2세에게 투표하여 황제로 선출되도록 지원했다. 페르디난트 2세는 보헤미아 전쟁에서 요한 게오르크 1세의 영지를 보호하겠다고 약속하며 그의 지지를 확보했다. 황제의 지원으로 실레시아루사티아를 획득했고, 프리드리히 5세를 보헤미아에서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황제가 개신교 탄압 정책을 펼치자 점차 불안감을 느꼈다. 1629년 복위 칙령이 발표되자 두려움은 커졌고, 1631년 라이프치히에서 개신교 제후 회의를 소집했지만, 황제와의 동맹을 완전히 끊지는 못했다.

요한 게오르크의 동상.


1630년 구스타브 2세 아돌프가 독일에 상륙하자, 마그데부르크를 구원하기 위해 그와 동맹을 맺으려 했으나, 개신교 동맹 참여를 주저하여 논의가 결렬되었다. 요한 체르클라에스 폰 틸리 백작이 이끄는 황제군은 작센을 침공했고, 이는 1631년 9월 스웨덴과 동맹을 맺는 계기가 되었다.

브라이텐펠트 전투에서 작센 군은 황제군에게 패배했지만, 곧 공세를 취하여 프라하를 점령했다. 그러나 알브레히트 폰 발렌슈타인의 저항으로 평화 협상을 시작했고, 군대를 철수시켰다. 1632년 뤼첸 전투에서 구스타브 2세 아돌프가 전사하자, 스웨덴 주도의 개신교 동맹에 가입하지 않았다.

1635년 5월, 페르디난트 2세와 프라하 조약을 맺고 루사티아 등을 할양받았다. 그는 곧 스웨덴에 선전포고했지만, 1636년 비트스토크 전투에서 패배하여 불리한 위치에 놓였다. 1645년 9월, 스웨덴과 평화 협약을 맺고 라이프치히에 스웨덴 군 주둔을 허용했다.

1648년베스트팔렌 조약에서 작센은 영토를 인정받았다. 요한 게오르크 1세는 1656년 10월 8일 사망했고, 장남 요한 게오르크 2세가 뒤를 이었다.

2. 1. 초기 생애와 즉위

요한 게오르크 1세의 초상화


드레스덴에서 크리스티안 1세와 소피의 차남으로 태어난 요한 게오르크는 베틴 가문 중 알베르틴 가에 속했다. 1611년 6월 23일, 형 크리스티안 2세가 사망하자 요한 게오르크는 작센 선제후 직위를 계승했다. 30년 전쟁 당시 작센은 독일 신교도들 사이에서 높은 지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작센 선제후의 중요성이 부각되었다. 그러나 요한 게오르크는 임기 초기에 중립적인 입장을 취했다. 그는 루터파 신앙을 가지고 있었지만, 브란덴부르크 선제후나 팔츠 선제후국의 세력 확장을 원하지 않았다. 이에 작센 가문의 다른 개신교 지도자들은 작센 선제후가 중립적인 입장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했고, 그는 신성 로마 제국 및 가톨릭과 연합하려 했다.

1619년 8월, 요한 게오르크는 페르디난트 2세를 황제로 선출하는 데 찬성표를 던졌는데, 이는 개신교 선제후들의 반대를 무효화하는 조치였다. 페르디난트 2세는 보헤미아 정벌 동안 요한 게오르크의 영지를 건드리지 않겠다고 약속하며 그의 지지를 확보했다. 황제의 도움으로 요한 게오르크는 실레시아루사티아를 획득했고, 프리드리히 5세를 보헤미아에서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이후 그는 보헤미아 지역 내 신교도들을 탄압했다.

2. 2. 30년 전쟁 초기

드레스덴에서 크리스티안 1세의 차남으로 태어난 요한 게오르크는 베틴가 중 알베르틴 가 쪽에 속했다. 1611년 6월 23일 그의 형 크리스티안 2세가 죽은 후 요한 게오르크는 작센 선제후 직위를 물려받았다. 30년 전쟁 당시 독일 신교도들 사이에서 작센의 지도자는 중요하게 여겨졌는데, 이는 작센이 독일 신교도들 사이에서 높은 지위를 받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요한 게오르크는 임기 초기에 중립적인 위치를 취했다. 그는 루터파 신자였지만, 브란덴부르크 선제후나 팔츠 선제후국의 지위가 커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이에 작센 가문의 다른 개신교 지도자들은 작센 선제후가 그의 직위를 벗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그는 신성 로마 제국과 가톨릭과 연합하려고 하였다.

이에 따라 요한 게오르크는 페르디난트 2세를 황제로 선출하는 데 찬성했으며, 1619년 8월 개신교 선거인단의 예상되는 반대를 무시하고 페르디난트를 황제로 선출했다. 새로운 황제는 보헤미아 전역을 치르는 동안 요한 게오르크의 영지를 건드리지 않겠다고 약속함으로써 그의 도움을 확보했다. 황제의 도움으로 요한 게오르크는 실레시아루사티아를 획득했고, 프리드리히 5세를 보헤미아에서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그는 이후 보헤미아 지역 내의 신교도들을 탄압했다.

1618년 보헤미아에서 개신교 반란이 일어나 30년 전쟁이 시작되었고, 1619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선거에서 요한 게오르크 1세는 페르디난트 2세에게 투표하여 황제로 선출했다. 그는 개신교 신자였지만, 보헤미아 왕으로 선출된 팔츠 선제후 프리드리히 5세는 칼뱅파였고, 요한 게오르크 1세는 루터파로 제국의 질서 유지를 우선시하여 협력하지 않았다. 대신 페르디난트 2세로부터 보헤미아 북부의 라우지츠를 받는 조건으로 보헤미아 평정에 기여했다.

그러나 전쟁 후 1623년에 페르디난트 2세가 프리드리히 5세로부터 선제후위를 빼앗아 바이에른 공 막시밀리안 1세에게 주고, 보헤미아 영내의 개신교 탄압을 진행했기 때문에 협력 관계를 끊었다. 이후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게오르크 빌헬름과 함께 개신교 세력을 모아 중립화했다. 그는 페르디난트 2세의 정책에 반대하여 1628년에 페르디난트 2세가 용병대장 발렌슈타인을 메클렌부르크 공으로 임명한 것과 1629년에 개신교를 부정하는 복구령(Restitutionsedikt|복구칙령de)을 공포한 것에 항의하고, 1630년 레겐스부르크에서 열린 의회에서 발렌슈타인을 파면시켰다.

2. 3. 스웨덴과의 동맹과 결별

30년 전쟁 초기, 요한 게오르크 1세는 중립적인 입장을 취했다. 그는 루터파였지만, 브란덴부르크팔츠 선제후국의 세력 확장을 원치 않았다. 다른 개신교 제후들은 그가 신성 로마 제국 및 가톨릭과 연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619년, 요한 게오르크 1세는 페르디난트 2세를 황제로 선출하는 데 찬성했다. 페르디난트 2세는 보헤미아 왕국 전쟁에서 요한 게오르크 1세의 영지를 건드리지 않겠다고 약속하며 그의 지지를 확보했다. 황제의 지원으로 요한 게오르크 1세는 실레시아루사티아를 획득했고, 프리드리히 5세를 보헤미아에서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황제가 개신교를 탄압하는 정책을 펼치자, 요한 게오르크 1세는 점차 불안감을 느꼈다. 1629년 복위 칙령이 발표되자 그의 두려움은 커졌다. 그는 1631년 라이프치히에서 개신교 제후 회의를 소집했지만, 황제와의 동맹을 완전히 끊지는 못했다.

1630년 구스타브 2세 아돌프가 독일에 상륙하여 마그데부르크를 구원하려 했다. 요한 게오르크 1세는 구스타브 2세 아돌프와 동맹을 맺으려 했으나, 개신교 동맹 참여를 주저하여 논의가 결렬되었다. 요한 체르클라에스 폰 틸리 백작이 이끄는 황제군은 작센을 침공했고, 이는 요한 게오르크 1세가 1631년 9월 스웨덴과 동맹을 맺는 계기가 되었다.

브라이텐펠트 전투에서 작센 군은 황제군에게 패배했지만, 요한 게오르크 1세는 곧 공세를 취하여 프라하를 점령했다. 그러나 알브레히트 폰 발렌슈타인의 저항으로 평화 협상을 시작했고, 그의 군대를 철수시켰다. 1632년 뤼첸 전투에서 구스타브 2세 아돌프가 전사하자, 작센은 스웨덴 주도의 개신교 동맹에 가입하지 않았다.

1635년 5월, 요한 게오르크 1세는 페르디난트 2세와 프라하 조약을 맺고 루사티아 등을 할양받았다. 그는 곧 스웨덴에 선전포고했지만, 1636년 비트스토크 전투에서 패배하여 불리한 위치에 놓였다. 1645년 9월, 요한 게오르크 1세는 스웨덴과 평화 협약을 맺고 라이프치히에 스웨덴 군 주둔을 허용했다. 베스트팔렌 조약 이후, 작센은 영토를 인정받았고, 요한 게오르크 1세는 1656년 사망했다.

2. 4. 프라하 조약과 말년

30년 전쟁이 끝난 후 베스트팔렌 조약에서 작센은 영토를 인정받는 것 외에는 크게 달라진 것이 없었다. 요한 게오르크 1세는 그 후 8년 뒤인 1656년 10월 8일 사망했다.

1618년 보헤미아에서 개신교 반란이 일어나 30년 전쟁이 시작되었고, 1619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선거에서는 페르디난트 2세에게 투표하여 황제로 선출되었다. 종교는 개신교였지만, 보헤미아 왕으로 선출된 팔츠 선제후 프리드리히 5세는 칼뱅파였고, 요한 게오르크 1세는 루터파로 제국의 질서 유지를 우선하는 입장에서 협력하지 않았다. 페르디난트 2세로부터 보헤미아 북부의 라우지츠를 하사받는 조건으로 보헤미아에 출병하여 보헤미아 평정에 기여했다.

그러나 전쟁 후 1623년 페르디난트 2세가 프리드리히 5세로부터 선제후위를 빼앗아 바이에른 공 막시밀리안 1세에게 주었고, 보헤미아 영내의 개신교 탄압을 진행했기 때문에 협력 관계를 끊고,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게오르크 빌헬름과 함께 개신교 세력을 모아 중립화했다. 이후에는 페르디난트 2세의 정책에 반대하는 자세를 취하여, 1628년 페르디난트 2세가 용병대장 발렌슈타인을 메클렌부르크 공으로 서임한 것과 1629년 개신교를 부정하는 Restitutionsedikt|복구령de을 공포한 것에 항의하고, 1630년 레겐스부르크에서 열린 의회에서 발렌슈타인을 파면시켰다.

같은 해 스웨덴 왕 구스타브 2세 아돌프가 북독일에 상륙하자, 처음에는 스웨덴과는 별개로 개신교 제후를 중심으로 하는 제3 세력의 구축을 생각하고 방관했지만, 이듬해 1631년 황제군 사령관 틸리 백작이 마그데부르크 전투에서 일으킨 참극에 분개하여 스웨덴과 동맹을 맺었다. 작센을 침략한 틸리 백작을 스웨덴 군과 함께 맞아 브라이텐펠트 전투에서 스웨덴군이 황제군을 격파했지만, 작센군은 격파되어 요한 게오르크 1세는 전장에서 도망쳤다. 전쟁 후 구스타브 2세 아돌프가 남하하자 질서 회복과 스웨덴의 세력 확대 저지 때문에 페르디난트 2세와의 화해를 주장했지만 거부당했고, 부하 용병대장 한스 게오르크 폰 아르님-보이첸부르크를 파견하여 보헤미아를 점령했지만, 1632년 황제군 사령관으로 복귀한 발렌슈타인에게 설득되어 보헤미아에서 철수했다.

스웨덴과의 관계는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황제군에게 작센이 유린당하자 구스타브 2세 아돌프에게 구원을 요청했지만, 뤼첸 전투에서 구스타브 2세 아돌프가 전사하고, 1633년 스웨덴 주도의 하일브론 동맹이 맺어지자 개신교에 대한 주도권을 빼앗긴 것에 분노하여 스웨덴으로부터 이탈했다. 1634년 뇌르틀링겐 전투에서 하일브론 동맹이 패배·붕괴되자 황제에게 접근하여, 1635년 프라하 조약에서 라우지츠의 영유와 차남 아우구스트의 마그데부르크 대주교 취임을 조건으로 페르디난트 2세와 화해하고, 1636년 페르디난트 2세의 아들 페르디난트 3세를 로마 왕으로 선출했다.

그 후로는 황제 측으로 싸웠지만, 스웨덴으로부터 배신자로 낙인 찍혀 작센을 약탈당하고, 1636년 비트슈토크 전투에서 요한 바네르가 이끄는 스웨덴군에게 패배하고, 1639년 스웨덴의 장군 레나트 토르스텐손에게 켐니츠 전투에서 패배하고, 1642년에도 스웨덴군에게 패하여 열세가 되었다. 1645년 스웨덴과 휴전하고,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에 참여했다. 1656년 사망하고, 장남 요한 게오르크 2세가 뒤를 이었다.

3. 가족 관계

요한 게오르크 1세는 두 번 결혼하였다. 첫 번째 부인은 뷔르템베르크 공작 프리드리히 1세의 딸 시빌레 엘리자베트로, 1604년에 결혼했으나 1606년 사산 후 사망했다. 1607년에는 프로이센 공작 알브레히트 프리드리히의 딸 마그달레네 시빌레와 두 번째 결혼을 했다.

요한 게오르크 1세는 마그달레네 시빌레와의 사이에서 요한 게오르크 2세 외에도, 아우구스투스, 크리스티안 1세, 모리츠 등의 아들들을 두었다.

3. 1. 자녀

요한 게오르크 1세는 두 번 결혼했다. 1604년 드레스덴에서 뷔르템베르크 공작 프리드리히 1세의 딸 시빌레 엘리자베트와 첫 번째 결혼을 했으나, 1606년 사산 후 사망했다. 1607년 토르가우에서 프로이센 공작 알브레히트 프리드리히의 딸 마그달레네 시빌레와 두 번째 결혼을 했다.

두 번의 결혼을 통해 얻은 자녀는 다음과 같다.

배우자자녀출생 - 사망비고
시빌레 엘리자베트사산된 아들1606년 1월 20일 (드레스덴) - 1606년 1월 20일 (드레스덴)
마그달레네 시빌레사산된 아들1608년 7월 18일 (드레스덴) - 1608년 7월 18일 (드레스덴)
조피 엘레오노레1609년 11월 23일 (드레스덴) - 1671년 6월 2일 (다름슈타트)1627년 4월 1일 헤센-다름슈타트 방백 게오르크 2세와 결혼
마리 엘리자베트1610년 11월 22일 (드레스덴) - 1684년 10월 24일 (후줌)1630년 2월 21일 홀슈타인-고토르프 공작 프리드리히 3세와 결혼
크리스티안 알베르트1612년 3월 4일 (드레스덴) - 1612년 8월 9일 (드레스덴)유아 사망
요한 게오르크 2세1613년 5월 31일 (드레스덴) - 1680년 8월 22일 (프라이베르크)작센 선제후
아우구스투스1614년 8월 13일 (드레스덴) - 1680년 8월 4일 (할레)작센-바이센펠스 공작
크리스티안 1세1615년 10월 27일 (드레스덴) - 1691년 10월 18일 (메르제부르크)작센-메르제부르크 공작
마그달레네 시빌레1617년 12월 23일 (드레스덴) - 1668년 1월 6일 (알텐부르크 성)1634년 10월 5일 덴마크의 크리스티안 4세 국왕의 아들 크리스티안, 덴마크 선제후와 결혼, 1652년 10월 11일 작센-알텐부르크 공작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와 재혼
모리츠1619년 3월 28일 (드레스덴) - 1681년 12월 4일 (모리츠부르크)작센-차이츠 공작
하인리히1622년 6월 27일 (드레스덴) - 1622년 8월 15일 (드레스덴)유아 사망


4. 평가

요한 게오르크는 정치적 수완이 없지는 않았지만, 훌륭한 통치자는 아니었다. 그의 성격은 거칠고 호감이 가지 않았으며, 술과 사냥과 같은 오락에 빠져 있었다.[2] 발렌슈타인은 그를 경멸하여 여러 차례 "그가 어떻게 사는지 보았는가"라고 말했다.[2]

참조

[1] NDB Johann Georg I.
[2] 서적 Wallenstein : His life narrated by Golo Mann
[3] 웹사이트 Sibylle Elisabeth v.Württemberg in: Genealogy Database by Herbert Stoyan http://wwperson.info[...] 2014-10-04
[4] 웹사이트 Herzogin Magdalena Sibylla v.Preussen in: Genealogy Database by Herbert Stoyan http://wwperson.info[...] 2014-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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