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사티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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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루사티아는 역사적으로 상부 루사티아와 하부 루사티아로 나뉘는 지역으로, 현재 독일 작센주와 브란덴부르크주, 폴란드 돌니실롱스크주에 걸쳐 있다. 지리적으로 구릉 지형과 북유럽 평원에 속하며, 소르브족의 문화적 중심지이자, 다양한 건축 양식을 보여주는 곳이다. 갈탄 산업의 쇠퇴와 함께 관광 산업이 발전하고 있으며, 루사티아 호수 지구, 무스카우 공원 등이 관광 명소로 자리 잡고 있다. 8만 명 이상의 소르브족이 거주하며, 소르브어 보존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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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사티아 - [지명]에 관한 문서 | |
|---|---|
| 개요 | |
|  | |
| 최대 도시 | 코트부스-호셰부스 | 
| 주요 도시 | 괴를리츠 바우첸-부디신 자리 | 
| 명칭 | |
| 원어명 | 고지 소르브어: Łužica (우지차) 저지 소르브어: Łužyca (우지차) 독일어: Lausitz (라우지츠) 폴란드어: Łużyce (우지체) 체코어: Lužice (루지체) | 
| 지리 | |
| 위치 | 독일, 폴란드 | 
| 역사 | |
| 관련 지역 | 니더라우지츠 오버라우지츠 | 
| 교통 | |
| 고속도로 | A4 A18 A4 A13 A15 | 
2. 지리
루사티아는 경관과 역사에 따라 크게 상부 루사티아와 하부 루사티아 두 지역으로 나뉜다. 남부의 구릉지인 "상부 루사티아"와 북유럽 평원에 속하는 평탄한 "하부 루사티아"이다. 두 지역의 경계는 젠프텐베르크를 지나는 검은 엘스터강과 프제부즈로 향하는 루사티아 나이세강을 따라 이어진다.

'''상부 루사티아'''(Oberlausitzde, Łużyce Górnehsb 또는 Hornja Łužicahsb)는 현재 독일 작센주에 속하며, Lubań 주변 네이세강 동쪽 일부는 폴란드 돌니실롱스크주에 속한다. 남쪽으로는 체코 국경 근처 루사티아 고원까지 솟아오르는 구릉 지형이며, 루사티아 산맥의 북쪽인 츠비타우 언덕을 형성한다. 비옥한 토양, 완만한 언덕, 그리고 바우첸, 괴를리츠, 츠비타우, 뢰바우, 카멘츠, Lubań, 비스초프스베르다, 헤른후트, 호이어스베르다, 바트무스카우 등 역사적인 도시들이 특징이다. 남부 마을에는 "움게빈데호이저(Umgebindehäuser)"라는 프랑코니아와 슬라브 양식이 혼합된 목조 가옥들이 있다. 대표적인 마을로는 니더쿤너스도르프, 오버쿤너스도르프, 베어스도르프, 욘스도르프, 타우벤하임, 오파흐, 바른스도르프, 에버스바흐 등이 있다.
'''하부 루사티아'''(Niederlausitzde, Łużyce Dolnepl 또는 Dolna Łužycadsb)는 오늘날 독일 브란덴부르크주에 속하며, 숲과 초원이 특징이다. 19세기와 20세기에 걸쳐 갈탄 산업과 노천 채굴이 이 지역의 모습을 크게 바꾸었다. 코트부스, 아이젠휘텐슈타트, 뤼벤, 뤼베나우, 슈프렘베르크, 핀스터발데, 젠프텐베르크 (Zły Komorowdsb), 자리 등의 도시가 있다.[1]
상부 루사티아와 하부 루사티아 사이에는 ''Grenzwall''이라는 퇴적구릉 지역이 있다. 중세 시대에는 울창한 숲 때문에 사람과 군대의 이동에 큰 장애물이었다. 동독 시대에는 노천 갈탄 채굴로 인해 이 지역의 일부 마을이 파괴되기도 했다. 현재는 고갈된 노천 광산 일부가 인공 호수로 바뀌어 루사티아 호수 지구라 불리며 관광객을 유치하고 있다.
2. 1. 루사티아 호수 지구
Lausitzer Seenland|라우지처 젠란트de, Łužyska jazorina|우지스카 야조리나dsb, Łužiska jězorina|우지스카 예조리나hsb는 인공적으로 조성된 호수 지역이다. 2020년대 말까지 루사티아 갈탄 광산 지역의 사용하지 않는 갈탄 광산을 침수시켜 유럽 최대의 인공 수역과 독일에서 4번째로 큰 호수 지역을 만들 예정이다. 가장 큰 호수 중 일부는 항해 가능한 운하를 통해 호수 체인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새로운 호수 지대는 대부분 이전 갈탄 노천 광산에서 남은 구멍으로 만들어진다. 이 구멍들은 물에 잠겨 호수로 변환된다. 그 결과로 생긴 호수 중 일부는 이미 최종 수위에 도달했으며, 다른 호수는 몇 년 동안 완전히 침수되지 않을 것이다.
다른 호수는 인공적으로 댐으로 막은 호수이다. 퀴츠도르프 댐은 복스베르크 발전소에 충분한 공정 용수를 공급하기 위해 만들어졌지만, 슈프렘베르크 댐은 주로 호수 지구의 홍수 방지를 위해 계획되었지만, 발전소의 공정 용수로도 사용되었다. 바우첸 저수지 또한 복스베르크 발전소에 지속적으로 물을 공급하기 위해 인공적으로 만들어졌다.
호수 지구 지역에 위치한 상부 루사티아 헤스 앤 폰드 랜드스케잎 생물권 보전 지역의 연못은 중세 시대에 부분적으로 만들어졌지만, 농업적인 이유로 동독 시대에도 만들어졌다. 이는 이탄이 풍부한 토지를 재구조화하여 사용할 수 있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매우 얕은 수역은 주로 양식업에 사용된다.
무스카우 아치의 연못 또한 대규모 노천 광산 구멍 사이에 위치해 있다. 이들은 빙하기의 빙하의 말단 퇴적층의 단층으로 인해, 그리고 산업화 이전에도 모래, 점토, 석탄과 같은 토양 원자재를 채굴하면서 부분적으로 생겨났다. 일반적으로 이 연못들은 인간이 의도적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 배수가 잘 되지 않아 물이 채워진 것이다.
2. 2. 무스카우 아치
무스카우 모레인 아치는 엘스터 빙하기 동안 형성된 말단 퇴적구릉으로, 주변 지역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 지질공원 무스카우 모레인 아치" (Muskauer Faltenbogende, Mužakowski Zahorkdsb, Łuk Mużakowapl)를 형성한다.최대 500m 두께의 내륙 빙하가 40km가 넘는 길이에 걸쳐 그 앞과 아래의 모래와 갈탄층을 압축하여 최대 180m 높이, 700m 너비의 소규모 습곡 아치와 압축 말단 퇴적구를 형성했다. 이 구조는 현재 평평하고 물결치는 언덕 범위로 보존되어 있으며 세계적으로 거의 유일하다. 이후 말굽 안에서 나타난 용융수 호수는 점토로 채워졌다. 그 이후의 추운 시기의 빙하 전진은 말단 퇴적구릉의 더 높은 부분을 침식시켰다. 갈탄층 표면 근처 지역의 산화 및 이와 관련된 부피 감소로 인해 깊이 3m에서 5m, 최대 20m, 너비 10m에서 30m, 길이 수 킬로미터에 달하는 굴곡이 형성되었다. "기저(Gieser)"(호수를 뜻하는 소르브어 "jězor"에서 유래)라고 알려진 이들은 정체된 물로 채워지거나 종종 이탄으로 덮인 배수구가 없는 긴 구간을 형성한다.
이미 수 세기 동안 점토와 모래를 채취한 후, 무스카우 아치 지역에서는 19세기와 20세기에 갈탄이 채굴되었으며, 일부는 주상 채굴 방식으로, 일부는 노천 채굴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채굴된 매장층의 위치로 인해 채굴이 끝난 후 바이스바서 북쪽과 동쪽에 눈에 띄게 길어진 호수가 형성되었다.
2. 3. 상부 루사티아 황무지와 연못 풍경
상 루사티아 황무지와 연못 풍경(독일어: ''Oberlausitzer Heide- und Teichlandschaft'', Hornjołužiska hola a hatowa krajinahsb)은 독일에서 연못이 가장 풍부한 지역이며, 하 루사티아 연못 풍경과 함께 중부 유럽에서 가장 큰 연못 경관을 형성한다.[1]
3. 역사
루사티아 지역은 초기에는 켈트 부족이, 기원전 100년경에는 게르만족 셈노네스족이 정착했다. 600년경부터는 서슬라브 부족인 밀체니족과 루시치족이 이 지역에 영구 정착했다.
10세기에는 독일 왕국의 영향 아래 놓였고, 963년 작센 변경백 게로에게 정복당했다. 이후 루사티아 변경백령이 설립되어 신성 로마 제국에 속하게 되었으나, 983년 슬라브족 봉기로 일부 지역을 상실했다. 이후 상 루사티아 지역은 마이센 변경백령의 일부가 되었다.
11세기 초, 폴란드 공작 볼레스와프 1세가 루사티아를 차지하면서 독일과 폴란드 간의 분쟁이 발생했다. 1018년 바우첸 평화 조약으로 루사티아는 폴란드 영토가 되었으나, 이후에도 분쟁은 계속되었다. 1031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콘라트 2세의 원정으로 독일이 다시 이 지역을 차지했다.
1367년, 로어 루사티아는 보헤미아 왕국에 매각되어 보헤미아 왕관 영토가 되었다. 11세기 말부터 독일 왕 하인리히 4세는 상 루사티아 지역을 보헤미아 공작에게 봉토로 하사했고, 12세기 중반부터 상 루사티아 지역은 보헤미아 왕관령으로 발전했다. 13세기경부터 독일인 정착민들이 루사티아로 이주해 왔다. 중세 시대에는 무역이 번성하여 독일, 폴란드, 보헤미아를 연결하는 중요한 무역로가 루사티아를 통과했다.[2] 14세기 초에는 보헤미아 왕국과 폴란드 야보르 공국 사이로 분할되었다가, 이후 다시 보헤미아 왕관령에 속하게 되었다.
1346년, 여섯 개의 상 루사티아 도시들이 루사티아 동맹을 결성하여 강도 귀족들에 저항했다. 이 동맹은 후스 전쟁에서 지기스문트를 지원했다. 15세기 후반에는 헝가리 왕국에 속했다가, 다시 보헤미아 왕관령으로 반환되었다.[4]
루터교 종교 개혁 이후, 루사티아의 대부분 지역은 개신교가 되었으나, 일부 지역은 가톨릭 신앙을 유지했다. 16세기 초부터 30년 전쟁까지 루사티아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통치하에 보헤미아의 지배를 받았다.
1635년 프라하 평화 조약에 따라 루사티아의 대부분은 작센 선제후국의 주로 편입되었으나, 코트부스 주변 지역은 브란덴부르크가 소유했다. 17세기 말, 작센 선제후 아우구스투스 2세가 폴란드 왕으로 선출되면서 루사티아는 전략적으로 중요해졌다. 18세기에는 바르샤바와 드레스덴을 연결하는 주요 노선이 이 지역을 통과했으며, 폴란드 왕 아우구스투스 2세와 아우구스투스 3세가 자주 이용했다.[5] 폴란드 귀족들도 루사티아에 영지를 소유하는 등 폴란드와의 관계가 깊어졌다.[6] 이 시기에는 폴란드-소르브족 간의 교류가 증가하고, 계몽주의 시대에 소르브 민족 부흥 운동이 시작되었다.[7]
뢰바우와 지타우 사이에 위치한 헤른후트는 1722년 니콜라우스 진젠도르프 백작의 영지에서 모라비아 출신 종교적 난민들에 의해 설립되었으며, 1732년부터 조직적인 개신교 선교 운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1815년 빈 회의에서 루사티아는 분할되어, 로어 루사티아와 호이어스베르다, 로텐부르크, 괴를리츠, 라우반 주변의 오버 루사티아 북동부 지역은 프로이센 왕국에, 뢰바우, 카멘츠, 바우첸, 지타우를 포함한 오버 루사티아 남서부 지역은 작센 왕국에 할당되었다. 프로이센 통치하의 루사티아인들은 별개의 행정 구역을 요구했지만, 하 루사티아는 브란덴부르크 주에, 상 루사티아는 실레지아 주에 편입되었다.
19세기와 20세기 초는 소르브인의 문화 부흥기였다. 상 소르브어와 하 소르브어가 발전하고, 민족 문학이 번성했으며, 마치카 세르브스카와 도모비나와 같은 여러 민족 단체들이 설립되었다. 그러나 독일 정부는 슬라브족 기원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지명을 변경하는 정책을 추진했다.
나치 정권 시기에는 모든 소르브족 단체가 금지되고 소르브어 사용이 억압되었다. 소르브족 활동가들은 체포, 처형, 추방되거나 강제 수용소로 보내졌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루사티아 민족 위원회가 지하에서 활동했다.
전쟁 중 독일군은 루사티아에 여러 전쟁 포로 수용소와 강제 노동 수용소를 운영했다. 이곳에는 폴란드, 프랑스, 영국, 소련 등 다양한 국적의 포로들이 수용되었다.[10]
제2차 세계 대전 중 폴란드인들은 독일 패배 후 소르브족에게 독립적인 민족 발전을 허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16] 1945년 초, 동부 전선이 루사티아에 도달하면서 소련군과 폴란드군이 이 지역을 점령했다.
포츠담 협정에 따라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루사티아는 오데르-나이세 선을 기준으로 분할되었다. 폴란드 공산 정부는 나이세 강 동쪽 지역의 독일인과 소르브인을 추방했다. 루사티아 민족 위원회는 자치권과 루사티아 자유국 창설을 주장했지만, 소르브 지식인 대다수는 독일에 남기를 원했다. 1945년부터 1947년까지 루사티아 민족 운동은 여러 국가에 청원서를 제출했지만,[18]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945년, 나이세 강 서쪽의 상부 루사티아 북동부는 작센에 재결합되었고, 1952년 주가 행정 구역으로 나뉘면서 드레스덴 행정 구역의 일부가 되었다. 하부 루사티아는 1952년부터 1990년까지 코트부스 행정 구역에 속해 브란덴부르크에 속했다.
1950년, 소르브인은 당시 동독의 작센 주 내에서 언어 및 문화 자치권을 획득했다. 루사티아 학교와 잡지가 창간되고 도모비나 협회가 부활했지만, 독일 사회주의 통일당의 정치적 통제는 강화되었다. 1990년 독일 재통일 이후 루사티아 주 설립 시도는 실패했다. 작센과 브란덴부르크의 헌법은 소르브인에게 문화적 권리를 보장하지만, 자치권은 부여하지 않는다.
3. 1. 소르브인의 역사와 문화
루사티아는 단일 행정 구역이 아니었고, 지금도 그러하다. 상부 루사티아와 하부 루사티아는 서로 다르지만, 어떤 면에서는 유사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코트부스는 이 지역에서 가장 큰 도시이며, 하부 루사티아의 문화적 수도로 인정받고 있지만, 1445년부터는 브란덴부르크의 월경지였다. 역사적으로 하부 루사티아의 행정 중심지는 룩카우와 뤼벤이었고, 상부 루사티아의 역사적 수도는 바우첸이다. 1945년 이후, 오데르-나이세 선 동쪽의 루사티아의 작은 부분이 폴란드에 편입되면서, 자리는 폴란드 루사티아의 수도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1]가장 초기의 기록에 따르면, 이 지역은 켈트 부족에 의해 정착되었다. 이후 기원전 100년경에는 게르만족 셈노네스가 그 지역에 정착했다. 이 지역의 이름은 루기족의 이름에서 유래되었을 수 있다. 600년경부터 서슬라브 부족인 밀체니와 루시치가 이 지역에 영구적으로 정착했다.
10세기에는 독일 왕국의 영향 아래 놓이게 되었는데, 이는 928년 사냥꾼 하인리히 왕의 동부 원정에서 시작되었다. 963년까지 루사티아 부족은 작센 변경백 게로에 의해 정복되었고, 2년 후 그의 죽음 이후 현재의 로어 루사티아 영토에 루사티아 변경백령이 설립되어 신성 로마 제국에 남게 되었으며, 인접한 북부 변경백령은 983년 슬라브족 봉기에서 다시 잃었다. 이후의 상 루사티아 지역, 즉 크비사 강에 있는 실레지아 국경까지의 밀체니 영토는 처음에는 변경백 에카르트 1세 치하의 마이센 변경백령의 일부였다.
동시에, 이후 폴란드 왕국의 폴란 공작은 루사티아 영토에 대한 권리를 주장했고, 1002년 황제 오토 3세가 사망하자 변경백 게로 2세는 루사티아를 폴란드 공작 볼레스와프 1세에게 잃었다. 볼레스와프 1세는 정복 과정에서 이 지역을 차지했고, 하인리히 2세는 같은 해 메르제부르크에서, 그리고 1018년 바우첸 평화 조약에서 이를 인정하여 루사티아는 그의 영토가 되었다. 그러나 독일인과 폴란드인은 이 지역의 행정을 놓고 계속해서 다투었다. 1031년 황제 콘라트 2세의 원정으로 마이센의 작센 독일 통치자인 베틴 가문과 아스카니아 가문의 브란덴부르크 변경백령이 이 지역을 다시 차지했다. 아스카니아 가문은 1303년 로어 루사티아 변경백령을 매입했다.
1367년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비텔스바흐의 오토 5세는 마침내 로어 루사티아를 보헤미아 왕국의 카렐 4세 왕에게 매각하여 보헤미아 왕관 영토가 되었다.

마르크그라프 마이센의 에그베르트 2세가 서임권 분쟁 당시 대립왕 라인펠덴의 루돌프를 지지하자, 독일 국왕 하인리히 4세는 1076년 상 루사티아의 밀체니 지역을 보헤미아 공작 브라티슬라프 2세에게 봉토로 하사했다. 프리드리히 1세 황제가 1158년 공작 블라디슬라프 2세를 보헤미아 왕으로 격상시킨 후, 바우첸 주변의 상 루사티아 지역은 보헤미아 왕관령으로 발전했다. 1200년경, 슬라브족이 거주하지 않던 삼림 지역에 대규모 독일인 정착민들이 루사티아로 이주하여 ''동방 식민 운동''을 벌였다. 중세 시대부터 수 세기 동안 무역이 번성하여 여러 중요한 무역로가 루사티아를 통과하며 서쪽의 독일 국가, 동쪽의 폴란드, 남쪽의 보헤미아를 연결했다.[2] 1319년, 이 지역은 보헤미아 왕국과 분열된 피아스트 왕조 통치 폴란드의 최남서 공작령인 야보르 공국 사이로 분할되었으며, 최북단 지역은 이듬해 브란덴부르크 변경백령으로 넘어갔다.[3] 1368년부터는 완전히 보헤미아 왕관령에 속하게 되었다.
1346년, 여섯 개의 상 루사티아 도시들이 루사티아 동맹을 결성하여 강도 귀족들의 끊임없는 공격에 저항했다. 이 동맹은 후스 전쟁에서 지기스문트 왕을 지원하여 무력 공격과 황폐화를 초래했다. 이 도시들은 (상) 루사티아 ''란트타크'' 의회에 대표로 참여했는데, 거기서 귀족 국가들의 격렬한 반대에 직면했다. 1469년 이 지역은 헝가리 왕국으로 넘어갔고, 1490년에는 폴란드 왕자 블라디슬라우스 2세의 통치하에 있던 보헤미아 왕관령으로 반환되었다.[4]
루터교 종교 개혁 이후, 루사티아의 대부분은 바우첸, 카멘츠, 호이어스베르다 사이의 지역을 제외하고 개신교가 되었다. 루사티아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통치하에 1526년부터 30년 전쟁까지 보헤미아의 통치를 받았다.
1635년의 프라하 평화 조약에 따라, 루사티아의 대부분은 작센 선제후국의 주로 편입되었으며, 브란덴부르크가 소유한 코트부스 주변 지역은 제외되었다. 작센 선제후 아우구스투스 2세가 1697년 폴란드 국왕으로 선출된 후, 루사티아는 선제후-국왕들이 작센의 고향과 폴란드 영토 사이의 육로 연결을 만들고자 함에 따라 전략적으로 중요해졌다. 18세기에 바르샤바와 드레스덴을 연결하는 두 개의 주요 노선이 이 지역을 통과했으며, 강력왕 아우구스투스 2세와 아우구스투스 3세 국왕은 종종 이 노선을 이용했다.[5] 수많은 폴란드 고위 관리들도 여러 차례 루사티아를 통과했으며, 일부 폴란드 귀족은 루사티아에 영지를 소유했다.[6] 이 지역이 폴란드와 맺었던 관계의 독특한 잔재는 이 지역의 다양한 마을에 위치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문장으로 장식된 18세기의 마일 포스트이다. 이 시기에 폴란드-소르브족의 접촉이 증가했다. 계몽주의 시대에 소르브 민족 부흥이 시작되었고 독일화에 대한 저항이 나타났다.[7]
뢰바우와 지타우 사이에 위치한 헤른후트는 1722년 니콜라우스 진젠도르프 백작의 영지에서 모라비아 출신의 종교적 난민들에 의해 설립되었으며, 1732년 조직적인 개신교 선교 운동의 시작점이 되었고, 헤른후트의 모라비안 교회에서 선교사들이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전 세계로 파견되었다.
그러나 새로 설립된 작센 왕국은 나폴레옹의 편을 들었기에, 1815년 빈 회의에서 루사티아는 분할되었고, 로어 루사티아와 호이어스베르다, 로텐부르크, 괴를리츠, 라우반 주변의 오버 루사티아 북동부 지역은 프로이센 왕국에 할당되었다. 뢰바우, 카멘츠, 바우첸, 지타우를 포함한 오버 루사티아의 남서부 지역만이 작센의 일부로 남았다.
프로이센 통치하의 루사티아인들은 자신들의 지역이 별개의 행정 구역이 되기를 요구했지만, 하 루사티아는 브란덴부르크 주에 편입되었고, 상 루사티아 지역은 대신 실레지아 주에 귀속되었다.
실패한 폴란드 11월 봉기의 반란자들이 분할된 폴란드에서 대 이주로 탈출하는 주요 경로 중 하나는 뤼벤과 루카우를 통과했다.[8]
19세기와 20세기 초는 소르브족의 문화 부흥의 시대였다. 상 루사티아어와 하 루사티아어(또는 소르브어)의 현대어가 등장했고, 민족 문학이 번성했으며, 마치카 세르브스카와 도모비나와 같은 많은 민족 단체들이 설립되었다. 또한 루사티아에는 클레트비츠( , )와 같은 주목할 만한 폴란드인 공동체가 있었는데, 1930년대에는 약 550명의 폴란드인이 거주했다.[9]
전간기 동안 독일 정부는 슬라브족 기원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루사티아의 지명을 대대적으로 변경하는 캠페인을 벌였으며,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대부분의 역사적인 지명이 복원되었지만 일부는 유지되었다.
이 시대는 독일의 나치 정권 동안 종말을 고했는데, 이때 모든 소르브족 단체는 폐지되고 금지되었으며, 신문과 잡지가 폐쇄되었고, 소르브어 사용이 금지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일부 소르브족 활동가들은 체포, 처형, 추방되거나 정치범으로 강제 수용소로 보내졌다. 1942년부터 1944년까지 지하 루사티아 민족 위원회가 결성되어 독일 점령 바르샤바에서 활동했다.
전쟁 중 독일군은 전쟁 포로 수용소 여러 곳을 건설하고 운영했으며, 여기에는 오플라크 III-C, 오플라크 IV-D, 오플라크 8, 스탈라크 III-B, 스탈라크 IV-A, 스탈라크 VIII-A 등이 포함되었고, 이 지역에는 여러 개의 강제 노동 분과 수용소가 있었다. 포로에는 폴란드 전쟁 포로와 민간인, 프랑스, 벨기에, 영국, 호주, 뉴질랜드, 캐나다, 남아프리카, 네덜란드, 이탈리아, 소련, 세르비아, 슬로바키아, 미국 전쟁 포로가 포함되었다.[10] 또한 괴를리츠, 루카우, 치타우를 비롯해 여러 개의 나치 교도소와 여러 개의 강제 노동 분과 수용소가 있었고, 코트부스에는 여성만을 위한 교도소도 있었다.[11][12][13][14], 그로스-로젠 강제 수용소의 여러 분과 수용소가 있었으며, 이 수용소의 포로는 대부분 유대인, 폴란드인, 러시아인이었지만 프랑스인, 이탈리아인, 유고슬라비아인, 체코인, 벨기에인 등도 있었다.[15]
전쟁 중 폴란드인들은 독일이 패배한 후 소르브족에게 폴란드 또는 체코슬로바키아의 국경 내에서 또는 폴란드와 동맹을 맺은 독립적인 소르브족 국가로 자유로운 민족 개발을 허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16]
동부 전선은 1945년 초 루사티아에 도달하여 소련군과 폴란드군이 독일을 격파하고 이 지역을 점령했다. 1945년 4월 26일 호르카에서 독일군은 제9 폴란드 기갑 사단의 야전 병원 열차 학살을 감행하여 부상병과 의료진을 포함한 약 300명의 전쟁 포로를 살해했다(''폴란드 전쟁 포로에 대한 독일군의 잔학 행위'' 참조).[17]

포츠담 협정에 따라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루사티아는 연합국 점령 하의 독일(소련 점령 지역)과 폴란드 인민 공화국 사이의 오데르-나이세 선을 따라 분할되었다. 폴란드의 공산 정부는 포츠담 협정에 따라 1945년과 1946년에 나이세 강 동쪽 지역에서 남아 있던 모든 독일인과 소르브인을 추방했다. 프라하의 루사티아 민족 위원회는 자치권과 독일로부터의 분리, 루사티아 자유국의 창설 또는 체코슬로바키아와의 합병을 주장했다. 그러나 소르브 지식인 대다수는 도모비나에 조직되어 독일로부터 분리되기를 원치 않았다. 루사티아 민족 운동에 의해 주장된 주장은 루사티아를 폴란드 또는 체코슬로바키아에 합병하자는 것이었다. 1945년에서 1947년 사이에 그들은 미국, 소련, 영국, 프랑스,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에 약 10개의 기념물을 제작했지만,[18] 이는 아무런 결과를 가져오지 못했다. 1946년 4월 30일, 루사티아 민족 위원회는 또한 폴란드 정부에 파벨 치시 - 폴란드 장관이자 공식 소르브 대표가 서명한 청원을 제출했다. 루사티아 자유국을 선포하려는 계획도 있었는데, 이 자유국의 총리는 루사티아 출신의 폴란드 고고학자 보이치에흐 코치카가 맡을 예정이었다.
1945년, 나이세 강 서쪽의 상부 루사티아 북동부는 작센에 재결합했고, 1952년 주가 세 개의 행정 구역(''Bezirke'')으로 나뉘면서 상부 루사티아 지역은 드레스덴 행정 구역의 일부가 되었다. 동독의 1989년 혁명 이후, 1990년에 작센 주가 재설립되었다. 하부 루사티아는 1952년부터 1990년까지 코트부스의 ''Bezirk''에 남아 브란덴부르크에 속했다.
1950년에 소르브인은 당시 동독의 작센 주 내에서 언어 및 문화 자치권을 획득했다. 루사티아 학교와 잡지가 창간되었고 도모비나 협회가 부활했지만, 집권 공산당인 독일 사회주의 통일당 (SED)의 정치적 통제가 강화되었다. 동시에, 상부 루사티아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독일어 사용 인구는 상당한 수준의 지역적, '상부 루사티아' 애국심을 유지했다. 1990년 독일 재통일 이후 독일 연방 공화국 내에 루사티아 ''주''를 설립하려는 시도는 실패했다. 작센과 브란덴부르크의 헌법은 소르브인에게 자치권이 아닌 문화적 권리를 보장한다.

8만 명 이상의 소르브 슬라브 소수 민족이 이 지역에 계속 거주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그들의 조상은 엘베 강과 잘레 강 사이에 정착한 밀체니와 같은 서슬라브어를 사용하는 부족이다.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그들의 언어를 사용하지만 (그 수는 줄어들고 있으며 특히 하부 소르브어는 멸종 위기에 처한 것으로 간주된다), 도로 표지판은 일반적으로 이중 언어로 표기된다. 그러나 작센 동부 지역의 전체 인구는 급격히 감소하고 있으며, 지난 10~15년 동안 20% 감소했다. 소르브인들은 전통적인 민속 의상과 마을 집의 스타일로 나타나는 그들의 전통 문화를 보호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 지역의 석탄 산업 (광대한 토지가 필요한 슈바르체 펌프 발전소와 같은)은 과거에 수십 개의 루사티아 마을을 파괴했으며, 지금도 일부 마을을 위협하고 있다. 소르브어는 많은 초등학교와 일부 중등학교, 두 개의 대학교 (라이프치히와 프라하)에서 가르치고 있다. "Witaj" ("환영!") 프로젝트는 현재 수백 명의 루사티아 어린이들에게 소르브어가 주요 언어인 8개의 유치원 프로젝트이다.
소르브어 일간 신문 (''Serbske Nowiny'')이 있으며, 소르브어 라디오 방송국 (Serbski Rozhłós)은 하루에 몇 시간 동안 독일어를 사용하는 두 개의 라디오 방송국의 지역 주파수를 사용한다. 텔레비전 프로그램은 매우 제한적이며, 두 개의 지역 텔레비전 방송국 (RBB 및 MDR TV)에서 한 달에 한 번 소르브어로 방송된다.
2020년, 루사티아 대부분 지역에서 소르브어의 상실에도 불구하고, 오늘날까지도 살아있는 몇 가지 소르브 전통과 습관이 있다. 2월에는 많은 사람들 (대부분 독일인 또는 소르브인 조상에 관계없이 마을 사람들)이 여전히 소르브 전통인 ''Zampern'' (축제 행렬)에 참여할 것이다. 일부 소르브 음식 (아마씨 기름과 커드 치즈를 곁들인 삶은 감자)[19]는 여전히 널리 퍼져 있으며, 오늘날 베를린이나 작센 서부와 같은 독일의 다른 지역에서도 먹는다. ''Spreewälder Gurken'' (특별한 허브와 향신료 혼합물을 사용하여 절인 오이)는 종종 소르브인과 연관되지만, 오이 자체는 더 높은 내구성을 위해 오이를 절이기 시작한 네덜란드 이민자들에 의해 도입되었다. 소르브인들은 곧 절임을 채택했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레시피를 약간 변경했을 수 있다.[20]
전통적인 소르브 의상은 주로 관광 산업에서이지만, 여전히 슈프레발트 지역에서 착용된다. 최근, 일부 여성들은 원래 전통과는 다르지만, 웨딩드레스로 사용하여 전통 의상을 부활시키기 시작했다.
4. 행정 구역
루사티아는 단일 행정 구역이 아니었고, 지금까지도 그렇지 않기 때문에, 상부 루사티아와 하부 루사티아는 서로 다르지만, 어떤 면에서는 유사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코트부스는 이 지역에서 가장 큰 도시이며, 하부 루사티아의 문화적 수도로 인정받고 있지만, 1445년부터는 브란덴부르크의 월경지였다.[1] 역사적으로 하부 루사티아의 행정 중심지는 룩카우와 뤼벤이었고, 상부 루사티아의 역사적 수도는 바우첸이다. 1945년 이후, 오데르-나이세 선 동쪽의 루사티아의 작은 부분이 폴란드에 편입되면서, 자리는 폴란드 루사티아의 수도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1]
5. 인구
8만 명 이상의 소르브 슬라브 소수 민족이 이 지역에 계속 거주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그들의 조상은 엘베 강과 잘레 강 사이에 정착한 밀체니와 같은 서슬라브어를 사용하는 부족이다.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그들의 언어를 사용하지만 (그 수는 줄어들고 있으며 특히 하부 소르브어는 멸종 위기에 처한 것으로 간주된다), 도로 표지판은 일반적으로 이중 언어로 표기된다.[18] 그러나 작센 동부 지역의 전체 인구는 급격히 감소하고 있으며, 지난 10~15년 동안 20% 감소했다. 소르브인들은 전통적인 민속 의상과 마을 집의 스타일로 나타나는 그들의 전통 문화를 보호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 지역의 석탄 산업 (광대한 토지가 필요한 슈바르체 펌프 발전소와 같은)은 과거에 수십 개의 루사티아 마을을 파괴했으며, 지금도 일부 마을을 위협하고 있다. 소르브어는 많은 초등학교와 일부 중등학교, 두 개의 대학교 (라이프치히와 프라하)에서 가르치고 있다. "Witaj" ("환영!") 프로젝트는 현재 수백 명의 루사티아 어린이들에게 소르브어가 주요 언어인 8개의 유치원 프로젝트이다.
소르브어 일간 신문 (''Serbske Nowiny'')이 있으며, 소르브어 라디오 방송국 (Serbski Rozhłós)은 하루에 몇 시간 동안 독일어를 사용하는 두 개의 라디오 방송국의 지역 주파수를 사용한다. 텔레비전 프로그램은 매우 제한적이며, 두 개의 지역 텔레비전 방송국 (RBB 및 MDR TV)에서 한 달에 한 번 소르브어로 방송된다.
2020년, 루사티아 대부분 지역에서 소르브어의 상실에도 불구하고, 오늘날까지도 살아있는 몇 가지 소르브 전통과 습관이 있다. 2월에는 많은 사람들 (대부분 독일인 또는 소르브인 조상에 관계없이 마을 사람들)이 여전히 소르브 전통인 ''Zampern'' (축제 행렬)에 참여할 것이다. 일부 소르브 음식 (아마씨 기름과 커드 치즈를 곁들인 삶은 감자 (독일어: ''Quark mit Leineöl''))[19]는 여전히 널리 퍼져 있으며, 오늘날 베를린이나 작센 서부와 같은 독일의 다른 지역에서도 먹는다. ''Spreewälder Gurken'' (특별한 허브와 향신료 혼합물을 사용하여 절인 오이)는 종종 소르브인과 연관되지만, 오이 자체는 더 높은 내구성을 위해 오이를 절이기 시작한 네덜란드 이민자들에 의해 도입되었다. 소르브인들은 곧 절임을 채택했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레시피를 약간 변경했을 수 있다.[20]
전통적인 소르브 의상은 주로 관광 산업에서이지만, 여전히 슈프레발트 지역에서 착용된다. 최근, 일부 여성들은 원래 전통과는 다르지만, 웨딩드레스로 사용하여 전통 의상을 부활시키기 시작했다.
1900년 인구 조사 이후 루사티아의 세르비아인(소르브인)의 비율은 혼인, 독일화, 산업화 및 도시화와 관련된 문화 동화, 나치의 탄압과 차별, 민족 말살 그리고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주로 슐레지엔 남부와 보헤미아 북부에서 추방된 독일인들의 정착으로 인해 감소했다.[21]
| 도시 | 소르브인 비율(%) | 
|---|---|
| 코트부스(Chóśebuz) (브란덴부르크) | 55.8 | 
| 호이어스베르다(Wojerecy) (슐레지엔) | 37.8 | 
| 바우첸(Budyšin) (작센) | 17.7 | 
| 로텐부르크 (오버라우지츠)(Rózbork) (슐레지엔) | 17.2 | 
| 카멘츠(Kamjenc) (작센) | 7.1 | 
| 총 인구 | 93,032 | 
6. 산업과 관광
루사티아는 19세기와 20세기 대부분 동안 갈탄 산업과 대규모 노천 채굴로 형성되었다. 구 동독 시절 루사티아의 갈탄은 동독 에너지 산업의 중심이었으나, 독일 통일 이후 갈탄 수요 감소와 환경 문제로 산업이 축소되었다. 이로 인해 젠프텐베르크, 호이어스베르다 등 갈탄 산업 의존 도시들은 심각한 실업 및 인구 유출을 겪었다. 현재도 코트부스와 벨초우 주변에서 노천 채탄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루사티아는 숲과 호수 등 풍부한 자연 환경을 바탕으로 관광 산업을 육성하고 있다. 특히 고갈된 노천 광산들을 인공 호수로 전환하는 루사티아 호수 지구 프로젝트를 통해 유럽 최대의 인공 수역을 조성하고 있다. 이 호수들은 일부 항해 가능한 운하로 연결되어 휴양지로 개발되고 있다.
퀴츠도르프 댐, 슈프렘베르크 댐, 바우첸 저수지 등은 발전소 용수 공급 및 홍수 방지를 위해 인공적으로 조성되었다. 상부 루사티아 헤스 앤 폰드 랜드스케잎 생물권 보전 지역의 연못들은 농업적 목적으로 만들어졌으며, 무스카우 아치의 연못들은 빙하 작용과 토양 원자재 채굴로 형성되었다.
무스카우 아치는 유네스코 세계 지질공원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독특한 지형을 자랑한다.
슈프레발트(Spreewald)나 무스카우 공원 등은 루사티아의 대표적인 관광 명소이다. 특히 무스카우 공원은 바트 무스카우에 위치한 세계유산이다. 오버라우지츠의 괴를리츠와 바우첸은 구시가지 보존·보수를 통해 관광 도시로 자리매김했다.
2000년부터 2010년까지 브란덴부르크주 루사티아 지역에서는 IBA Fürst-Pückler-Land가 개최되어 산업 유산 보존, 산업 지역에서 관광 지역으로의 전환 등 지역 재생 프로젝트가 진행되었다. IBA 퓌르스트-퓌클러-란트의 본부는 그로스레셴에 있었다.
6. 1. 주요 도시
루사티아의 주요 도시는 다음과 같다.| 도시(독일어 또는 폴란드어) | 소르브어 | 인구 (2023년) | 국가 | 루사티아의 일부 | |
|---|---|---|---|---|---|
| 1. | 코트부스 (Cottbus) | Chóśebuz | 100,010 | ||
| 2. | 괴를리츠 (Görlitz) | Zhorjelc | 56,694 | ||
| 3. | 바우첸 (Bautzen) | Budyšin | 38,039 | ||
| 4. | 자리 (Żary) | 35,198 | |||
| 5. | 호이어스베르다 (Hoyerswerda) | Wojerecy | 31,404 | ||
| 6. | 즈고젤레츠 (Zgorzelec) | 29,313 | |||
| 7. | 치타우 (Zittau) | Žitawa | 24,710 | ||
| 8. | 아이젠휘텐슈타트 (Eisenhüttenstadt) | Pśibrjog | 24,447 | ||
| 9. | 젠프텐베르크 (Senftenberg) | Zły Komorow | 23,282 | ||
| 10. | 슈프렘베르크 (Spremberg) | Grodk | 21,497 | ||
| 11. | 루바인 (Lubań) | 19,756 | |||
| 12. | 포르스트 (Forst) | Baršć (Łužyca) | 17,721 | ||
| 13. | 카멘츠 (Kamenz) | Kamjenc | 16,861 | ||
| 14. | 보가티니아 (Bogatynia) | 16,245 | |||
| 15. | 구벤 (Guben) | Gubin | 16,210 | ||
| 16. | 구빈 (Gubin) | 15,798 | |||
| 17. | 핀스터발데 (Finsterwalde) | Grabin | 15,864 | ||
| 18. | 뤼베나우/슈프레발트 (Lübbenau/Spreewald) | Lubnjow/Błota | 15,774 | ||
| 19. | 바이스바서/O.L. (Weißwasser/O.L.) | Běła Woda | 14,992 | ||
| 20. | 뢰바우 (Löbau) | Lubij | 14,389 | 
코트부스는 이 지역에서 가장 큰 도시이며, 브란덴부르크주에 속한 하부 루사티아의 문화적 수도이다.[1] 바우첸은 작센주에 속한 상부 루사티아의 역사적 수도이다.[1] 오데르-나이세 선 동쪽, 즉 폴란드에 속한 루사티아 지역에서는 자리가 수도로 널리 알려져 있다.[1]
상부 루사티아에는 바우첸, 괴를리츠, 치타우, 뢰바우, 카멘츠, 루바니, 비스초프스베르다, 헤른후트, 호이어스베르다, 바트무스카우와 같은 역사적인 도시들이 있다.
하부 루사티아의 주요 도시로는 코트부스 외에 아이젠휘텐슈타트, 뤼벤, 뤼베나우, 슈프렘베르크, 핀스터발데, 젠프텐베르크 등이 있다.
독일 통일 이후 갈탄 산업이 축소되면서 젠프텐베르크나 호이어스베르다 등 갈탄 산업에 의존하던 도시들은 심각한 실업과 인구 유출 문제를 겪고 있다.
괴를리츠와 바우첸은 구시가지의 보전·보수가 잘 이루어져 관광 도시로 인기가 높다.
7. 문화
루사티아 지역은 체코, 폴란드, 독일, 헝가리 등 다양한 국가의 통치를 받았던 역사 덕분에 풍부한 건축물을 보유하고 있다. 건축 양식은 로마네스크 건축, 고딕 건축부터 르네상스 건축, 바로크 건축을 거쳐 현대 건축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코트부스와 바우첸에는 소르비아 박물관이 있다. 폴란드에는 즈고젤레츠의 "루사티아 박물관"(Muzeum Łużyckie)과 자리의 "실레지아-루사티아 국경 박물관"(Muzeum Pogranicza Śląsko-Łużyckiego) 등 여러 박물관이 있다.
즈고젤레츠에는 폴란드에서 가장 큰 전쟁 묘지 중 하나가 있다. 현재 트로피컬 아일랜드 리조트가 들어선 CargoLifter 비행선 격납고는 세계에서 가장 큰 자유 지지 홀이다. Saurierpark Kleinwelka는 독일에서 가장 큰 공룡 공원이다.
7. 1. 유네스코 세계유산
무스카우 공원(바트 무스카우, 루사티아어: ''Mužakow'')과 웽크니차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이자 폴란드의 역사 기념물이다.[22]헤른후트 또한 2024년부터 유네스코 세계유산이다.
참조
[1] 
웹사이트
 
STOLICA POLSKICH ŁUŻYC – Żary
 
http://www.zary.pl/P[...] 
2014-09-08
 
[2] 
논문
 
Związki handlowe Łużyc ze Śląskiem w dawnych wiekach
 
[3] 
서적
 
Rys dziejów serbo-łużyckich
 
[4] 
서적
 
Der Bund der Sechsstädte in der Ober-Lausitz: Eine Jubelschrift
 
G. Heinze & Comp.
 
[5] 
웹사이트
 
Informacja historyczna
 
http://www.dresden-w[...] 
2023-10-22
 
[6] 
논문
 
Kontakty kulturalne polsko-serbołużyckie w XVIII w.
 
Zakład Narodowy im. Ossolińskich
 
[7] 
문서
 
Matyniak, p. 241
 
[8] 
간행물
 
Losy internowanych na Pomorzu żołnierzy powstania listopadowego
 
[9] 
서적
 
Leksykon Polactwa w Niemczech
 
Związek Polaków w Niemczech
 
[10] 
서적
 
The United States Holocaust Memorial Museum Encyclopedia of Camps and Ghettos 1933–1945. Volume IV
 
Indiana University Press, United States Holocaust Memorial Museum
 
[11] 
웹사이트
 
Gefängnis Görlitz
 
https://www.bundesar[...] 
2023-11-25
 
[12] 
웹사이트
 
Zuchthaus Luckau
 
https://www.bundesar[...] 
2023-11-25
 
[13] 
웹사이트
 
Gerichtsgefängnis Zittau
 
https://www.bundesar[...] 
2023-11-25
 
[14] 
웹사이트
 
Frauenzuchthaus Cottbus
 
https://www.bundesar[...] 
2023-11-25
 
[15] 
웹사이트
 
Subcamps of KL Gross- Rosen
 
https://en.gross-ros[...] 
2023-11-25
 
[16] 
논문
 
Kwestia serbołużycka w polskiej myśli politycznej w latach 1939–1947
 
Zakład Narodowy im. Ossolińskich, Wydawnictwo [[Polish Academy of Sciences|Polskiej Akademii Nauk]]
 
[17] 
논문
 
Recenzja: Zbigniew Kopociński, Krzysztof Kopociński, Horka – łużycka Golgota służby zdrowia 2. Armii Wojska Polskiego
 
https://www.journals[...] 
2022
 
[18] 
웹사이트
 
Działalność Wojciecha (Wojcecha) Kócki w serbołużyckim ruchu narodowym w latach 1945 – 1950
 
http://www.prolusati[...] 
[19] 
웹사이트
 
The world of the Sorbs – Saxony – Germany's finest travel destination
 
https://www.saxony.i[...] 
[20] 
뉴스
 
Spreewaldgurken: Knack. Schnurps. Knack.
 
https://www.faz.net/[...] 
[21] 
문서
 
All figures from the 1900 census.
 
[22] 
법률
 
Rozporządzenie Prezydenta Rzeczypospolitej Polskiej z dnia 14 kwietnia 2004 r. w sprawie uznania za pomnik histor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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