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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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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종요는 후한 말부터 조위 시대까지 활동한 인물로, 옹주 내정 및 치안 유지, 서예, 관중 통치 등 다양한 분야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조조 휘하에서 옹주의 내정을 담당하며 상국까지 승진했고, 위나라 건국 후에는 태위, 태부 등을 역임했다. 서예가로서 해서체의 발전에 기여하여 "해서체의 아버지"로 불리며, 《선시표》, 《천계직표》 등 유명 작품을 남겼다. 관중 지역의 군 지휘권을 위임받아 마등, 한수 등을 설득하여 안정을 도모했으며, 곽원 토벌, 동관 전투 등에도 참여했다. 조비, 조예 시대에 걸쳐 삼공에 임명되었으며, 사형의 대체 형벌인 육형 부활을 주장하기도 했다. 80세에 사망하여 성후의 시호를 받았으며, 조조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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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요 - [인물]에 관한 문서
인물 정보
이름종요
원어 이름鍾繇
로마자 표기Jong-yo
다른 이름중유 (鍾繇)
원상 (元常)
시호성후 (成侯)
기본 정보
출생151년
출생지허난성 창거
사망230년 4월 또는 5월 (79세)
사망지뤄양
가족 관계
아버지종디 (鍾迪)
형제종연 (鍾演)
배우자손씨 (孫氏)
가씨 (賈氏)
장창포
자녀종육
종회
친척곽원 (조카)
순욱 (종손)
관직 및 직위
관직태부
태위
정위
상국 (조조 휘하)
대리 (조조 휘하)
봉작정릉후 (定陵侯)
후임사마의 (태부)
화흠 (상국)
경력
태부 임기 시작227년 1월 또는 2월
태부 임기 종료230년 4월 또는 5월
태위 임기 시작223년 9월 23일
태위 임기 종료227년 1월 또는 2월
정위 임기 시작220년
정위 임기 종료223년 9월 23일
상국 임기미상 – 220년
대리 임기213년 – 미상
군주
헌제 시기헌제
조조 시기조조
조비 시기조비
조예 시기조예
기타 정보
직업서예가, 정치인

2. 생애

종요는 조조 휘하에서 옹주의 내정과 치안 유지를 담당했다. 처음에는 후한의 신하로서 헌제를 섬겼으나, 헌제가 조조에게 의탁하면서 동향 출신 순욱의 천거로 조조를 섬기게 되었다. 장안 지역 통치와 치안 등 내정 면에서 장기와 함께 큰 공적을 세워 위나라 상국(재상)까지 승진했다.

219년 위풍의 반란 때 그를 천거한 사람이 종요였기에 문책을 받아 잠시 관직에서 물러났다. 220년 조비가 황제로 즉위하자 태위로 복귀했으나, 조비가 이혼한 아내와 재결합하라고 명하자 분개하여 자해하는 맘으로 산숙을 한꺼번에 먹어 인후에 지장이 초래해 입이 쉽게 열리지 않아 잘 말할 수가 없었다.

225년 75세에 늦둥이 아들 종회를 얻었으며, 230년 80세로 세상을 떠났다. 시호는 성후(成侯)이다. 조비가 죽고 조예가 왕위에 오르자, 종요는 226년에 위나라의 태부로 임명되었다.

해서체의 발전에 기여하여 "해서체의 아버지"로 알려져 있으며, 그의 유명한 작품으로는 《선시표(宣示表)》, 《천계직표(薦季直表)》, 《역명표(力命表)》 등이 필사본으로 전해진다.

종요의 가계와 관련하여, 할아버지 종호(鍾皓)는 후한 시대 저명한 학자였고, 아버지 종적(鍾迪)은 당고의 금으로 인해 정치에 참여하지 않았다. 형 종연(鍾演)은 제후 작위를 받았고, 누이는 곽원의 어머니였다.

종요는 적어도 세 명의 배우자가 있었는데, 첫 번째 부인 손씨(孫氏)는 질투심이 강하여 다른 첩들을 해치려 했다. 종요는 손씨가 당시 임신 중이던 첩 장창포를 독살하려 한 것을 알고 이혼했다. 조위 왕가는 이혼을 막으려 했으나, 종요가 항의의 표시로 자해를 시도하면서 실패했다. 종요는 손씨와 이혼한 후, 두 번째 부인인 가씨(賈氏)를 정식 부인으로 맞이했다. 장창포는 죽을 때까지 첩의 신분을 유지했다.

종요에게는 적어도 두 아들이 있었는데, 장남 종유는 위나라 정부에서 정위와 차기장군을 역임했고, 차남 종회는 장창포에게서 태어났다. 종회는 위나라 장군으로 촉한 정벌에 큰 공을 세웠으나, 264년 사마소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다가 실패하고 살해당했다.

종유의 아들 중 종옹(鍾邕)은 종회와 함께 반란 중에 사망했고, 종의(鍾毅)는 종회의 양자였기 때문에 처형되었다. 그러나 종준(鍾峻)과 종천(鍾辿)은 사마소가 중요와 종유의 공을 고려하여 사면받고 관직과 작위를 회복했다.

2. 1. 후한 말기 활동

젊은 시절, 족부 종유와 함께 뤄양으로 가는 길에 관상가를 만났는데, "귀인이 될 상이며 수난의 액이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라는 평을 들었다. 이후 효렴으로 천거되어 상서랑, 양릉현령을 역임했다. 병으로 관직을 떠난 후, 다시 삼공의 관저에 초빙되어 정위 정, 황문시랑을 역임했다.[1]

당시 헌제는 장안에 있었지만, 이각곽사 등의 전횡으로 관동과는 단절되어 있었다. 연주 목이 된 조조는 이때 처음 사자를 보내 상소를 올렸는데, 종요는 이각 등을 설득하여 조조가 사신을 왕래할 수 있게 하였다. 조조순욱으로부터 종요를 추천받은 데다가, 그가 이각 등을 설득했다는 소식을 듣고 더욱 종요에게 친밀감을 느꼈다.[1]

흥평 2년(195년) 헌제가 장안을 탈출하여 건안 원년(196년)에 조조에게 옹립되기까지, 종요는 헌제의 장안 탈출에 공헌했다. 이후 어사중승, 시중, 상서복야가 되었으며, 이전의 공적도 인정받아 동무정후에 봉해졌다.[1]

2. 2. 관중 통치

조조관중마등, 한수 등의 존재를 우려하여, 종요를 사예교위 겸무, 지절로 임명하여 관중 지역의 군 지휘권을 위임했다.[7] 종요는 장안에 도착하여 마등과 한수를 설득해 화해시키고, 그들의 자제들을 인질로 삼아 조정에 귀순시켰다.[7]

200년 관도 대전 당시, 종요는 조조에게 2000마리의 말을 지원했다. 조조는 종요에게 서신을 보내 "옛날 소하가 관중을 진수하며 군량을 보급한 공에 비견된다"며 칭찬했다.

202년[8] 평양에서 흉노 선우 호주천의 반란이 일어나자, 종요는 이를 포위했다. 원상 휘하 고간곽원이 지원군으로 나타났으나, 종요는 곽원의 경솔함을 간파하고 전투를 지속했다. 장기를 파견하여 마등을 아군으로 끌어들였고,[9] 마초가 이끄는 1만여 명의 원군을 얻었다.[10] 곽원은 분하를 건너다 마초 군의 공격을 받아 대패했고, 방덕에게 참수되었다. 종요는 "곽원은 조카이나 나라의 적"이라며 방덕을 질책하지 않았다.[11] 호주천과 고간은 항복했고, 평양의 반란은 진압되었다.[10] 이후 하동군에서 위고의 반란이 일어나자, 종요는 이를 진압했다.

211년, 종요는 장로 토벌을 명받고 관중 군벌들에게 압력을 가해 인질을 잡으려 했으나, 마초, 한수 등의 반발을 사 동관 전투가 발발했다.[12][13] 장안 천도 이후 인구가 감소한 낙양의 부흥을 위해 종요는 관중 주민, 도망자, 반란자 등을 이주시켰다.

2. 3. 위나라 건국 이후

213년 조조가 위공 취임과 구석 수여를 사퇴하려 하자, 이를 수락하도록 권하는 상주문에 이름을 올렸다. 위나라 건국 후 216년에 상국으로 승진했으나, 219년 위풍의 반역에 연루되어 면직되었다.[12]

220년 조비가 왕위에 오르자 대리로 복직했고, 황제 즉위 후 정위, 숭고향후가 되었다. 223년 태위로 승진하고 평양향후가 되었다. 226년 조예 즉위와 함께 태부로 승진하고 정릉후가 되었으며, 영읍 1800호를 받았다. 고령과 질병으로 인해 조회 시 수레를 타고 참내하고, 호분에 의해 전상에 앉는 특권을 받았다. 이는 이후 삼공에게 병이 있을 때의 관례가 되었다.

종요는 사형의 대체 형벌로 육형(신체형) 부활을 주장했으나, 왕랑 등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230년 80세로 사망했으며,[14][15] 시호는 성후(成侯)이다.

정시 4년(243년) 7월, 위 황제 조방 시대에 다른 공신 19명과 함께 조조의 묘정에 배향되었다.[16]

3. 서예

종요는 서예가로서 소해(小楷)에 뛰어났으며, 예서와 행서에도 능했다. 특히 해서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쳐 "해서체의 아버지"로 알려져 있다.[3] 그의 서체는 '종요체'라고 불리며, 왕희지를 비롯한 많은 서예가들이 이를 배우고 익혔다. 진수의 《삼국지》에 실린 호조의 전기에 따르면, 종요의 서예는 호조, 한단순, 위기(卫觊), 위단(韦诞)의 서예와 함께 당대에 널리 모방되었다.[4]

추석계는 종요의 《선시표》의 서체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 "... 초기 행서의 자궁에서 명확하게 나타난다. 초기 행서의 깔끔하게 쓰인 종류를 좀 더 위엄 있는 방식으로 쓰고, 가로획을 끝낼 때 이미 초기 행서에 나타나는 멈춤 기술(''둔'' 頓; 획의 시작이나 끝을 강화하는 데 사용)을 일관되게 사용하며, 굵은 발을 가진 오른쪽으로 떨어지는 획을 사용한다면, 그 결과는 "선시표"와 같은 서체의 서예가가 될 것이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선시표》, 《천계직표》, 《역명표》 등이 있으며, 필사본으로 전해진다.

종요의 해서 작품 《선시표》 송나라 탁본


종요의 해서 작품 《환시첩》 송나라 탁본

3. 1. 평가

조비는 종요, 화흠, 왕랑삼공(三公)에 임명하며 "이 삼공은 일대의 위인으로, 후세에 이를 따르기는 어려울 것이다"라고 칭찬했다.

종요는 정위로서 재판을 맡아 뛰어난 통찰력으로 법을 운용하여 왕랑과 함께 칭찬받았다.[17] 진수는 『삼국지』에서 종요를 "도리에 통달하고 사법의 재능이 있었다"라고 평가했다.

4. 가계

할아버지 종호(鍾皓)는 후한 시대 저명한 학자였다. 아버지 종적(鍾迪)은 당고의 금으로 인해 정치에 참여하지 않았다. 형 종연(鍾演)은 제후 작위를 받았고, 누이는 곽원의 어머니였다.[18]

종요는 적어도 세 명의 배우자가 있었다. 첫 번째 부인인 손씨(孫氏)는 다른 첩들을 질투하여 해를 입히려 했다. 종요는 손씨가 당시 임신 중이던 첩 장창포를 독살하려 한 것을 알고 이혼했다. 조위 왕가는 이혼을 막으려 했으나, 종요가 항의의 표시로 자해를 시도하면서 실패했다. 종요는 손씨와 이혼한 후, 두 번째 부인인 가씨(賈氏)를 정식 부인으로 맞이했다. 장창포는 죽을 때까지 첩의 신분을 유지했다.[18]

종요에게는 적어도 두 아들이 있었다. 장남 종유는 위나라에서 정위와 차기장군을 역임했다. 서자 종회장창포에게서 태어났으며, 263년 촉한을 정복한 위의 촉 정복에서 큰 역할을 했다. 그러나 264년 위나라 섭정 사마소에 대항하여 종회의 난을 일으켰지만 실패하고 살해당했다.[18]

종유에게는 네 아들 종준(鍾峻), 종옹(鍾邕), 종의(鍾毅), 종천(鍾辿)이 있었다. 종의는 종회가 독신이라 종회의 양자가 되었다. 종옹은 종회와 함께 반란 중에 사망했고, 가족은 처형되었다. 종회의 반란 실패 후, 종준, 종의, 종천은 연좌되어 사형 선고를 받았으나, 사마소는 종요와 종유의 공을 고려하여 종준과 종천을 사면하고 관직과 작위를 회복시켰다. 종의는 종회의 양자였기 때문에 사면 대상이 아니어서 처형되었다.[19]

5. 일화

순욱이 자신을 조조에게 천거한 것에 대해 안회에 비유하며 존경을 표했다. 조조가 큰 일이 있을 때마다 순욱과 상의하는 것을 보고 자신은 그에 미치지 못한다고 말했다.[20] 순욱의 종질(사촌) 순유와는 친구였지만, 순유의 식견을 높이 평가했다. 순유 사후 그의 가족을 돌보았으며, 순유의 기책을 편집하려 했으나 완성하지 못하고 사망했다.[21]

사도 조온의 장례식에 법을 어기고 참석한 길황을 처형했으나, 길황의 동생 길무를 천거했다. 길무는 종요의 천거에 응했고, 후에 길본의 난에 연좌되었으나 종요의 변호로 목숨을 건졌다.[22]

춘추좌씨전』을 좋아하여 『춘추공양전』을 좋아하는 엄간과 논쟁을 벌였다. 종요는 "공양고가 좌구명(각각의 책의 저자)에게 굴복했다"라고 득의양양했지만, 엄간은 "전 부하가 상사에게 복종했을 뿐, 공양은 머리를 숙이지 않았다"라고 반박했다.[23] 허정은 머리 회전이 빠른 장이를 칭찬하며 "종원상(종요)의 동료"라고 평가했다.[24]

어느 날, 미인 유령이 종요를 찾아왔고, 종요는 유령을 베었으나 허벅지에 상처만 입혔다. 유령의 혈흔을 따라가 보니 큰 무덤이 나왔고, 관 속에는 살아있는 듯한 미인이 있었다.[25]

6. 《삼국지연의》에서의 묘사

삼국지연의》에서 종요는 마초의 장안 침공 당시 그 지역의 태수로 등장한다. 마대와의 일기토에서 1합도 겨루지 못하고 패주한다. 그 후 수비에 전념하지만, 계략에 의해 방심하여 성내 침입을 허용하고 동관까지 철수한다. 서문을 담당한 가공의 동생 종진은 잠입해온 방덕에게 살해당하고 서문이 뚫려 장안을 빼앗기고 만다.[1] 조예 때에는 유능한 참모로 묘사되며, 예전에 좌천된 사마의를 등용하라고 진언한다. 제갈량의 북벌에 조진이 연패하여 위나라에 맞설 자가 없었지만, 종요는 일족의 목숨을 걸고 유언비어에 의해 실각했던 사마의의 재등용을 진언했다.[2]

참조

[1] 서적 Sanguozhi
[2] 웹사이트 A Narrative on Calligraphy http://vincentpoon.c[...] 2017-11-15
[3] 웹사이트 Models of Exemplary Masterpieces by Zhong Yao 臨鍾繇諸法帖 http://www.vincentpo[...] 2021-06-18
[4] 서적 Sanguozhi
[5] 서적 Sanguozhi
[6] 서적 Sanguozhi
[7] 서적 三国志
[8] 서적 資治通鑑
[9] 서적 鍾繇伝注の『戦略』
[10] 서적 三国志
[11] 서적 三国志
[12] 서적 三国志
[13] 서적 三国志
[14] 서적 三国志
[15] 서적 書断 https://zh.wikisourc[...]
[16] 서적 三国志
[17] 서적 三国志
[18] 서적 正史 三国志 ちくま学芸文庫
[19] 서적 三国志
[20] 서적 三国志
[21] 서적 三国志
[22] 서적 三国志
[23] 서적 三国志
[24] 서적 三国志
[25] 서적 捜神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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