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응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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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장응진은 황해도 장진군 출신의 교육자이자 독립운동가이다. 그는 개화 지식인인 아버지의 영향으로 신학문을 접하고 독립협회 만민공동회에 참여하며 계몽운동을 시작했다. 1898년 일본 유학 후 도쿄에서 태극학회 활동을 시작했으며, 기관지 발행인과 초대 회장을 맡았다. 안창호의 영향을 받았으며, '다정다한'이라는 소설을 집필하기도 했다. 대성학교 교무책임자와 신민회 방계 조직인 청년학우회 발기인으로 활동했으나, 105인 사건으로 투옥되었다. 이후 휘문고등보통학교 학감과 조선교육회 결성에도 참여했으나, 일제강점기 말기에는 친일 행적을 보였다. 광복 후 휘문고등학교 교장으로 재직 중 한국 전쟁 중 과로로 순직했으며,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으나 친일 행적으로 인해 서훈이 취소되었다.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 예정자 명단과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포함되었다.
장응진은 황해도 장진군 출신으로, 아버지 장의택의 영향으로 신학문을 일찍 접했다. 1897년 한성부로 유학하여 관립영어학교에 입학, 독립협회의 만민공동회에 참가하는 등 계몽운동에 힘썼다. 1898년 일본 유학길에 올라 1905년 도쿄에서 태극학회 평의원으로 사회 활동을 시작했고, 안창호에게 영향을 받았다. '백악춘사'의 〈다정다한〉은 그의 작품으로 추정된다.[2]
사망 후 105인 사건 관련 공적으로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가, 1996년 대한민국 국가보훈처가 뚜렷한 친일 행적이 있거나 허위 공적을 제출한 독립유공자를 가려내 서훈을 취소했을 때 여기에 포함되었다.[4][5]
[1]
웹인용
태극학회
http://100.empas.com[...]
엠파스 백과사전
2008-02-24
2. 생애
1907년 안창호가 평양에 설립한 대성학교 교무책임자를 맡았고, 1909년 청년학우회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1912년 105인 사건으로 투옥되었다. 1913년부터 1922년까지 휘문고등보통학교 학감으로 재직하며 조선교육회 결성에 참여했다.
일제강점기 말기에는 일제에 협조했으며, 광복 후 1950년 한국 전쟁 발발 직전까지 휘문고등학교 교장을 맡았다. 전쟁 중 학교를 부산으로 옮겼으나, 피난지에서 과로로 순직했다.
2. 1. 초기 생애와 계몽 운동 (1890년대 ~ 1910년대)
황해남도 장진군 출신으로, 개화 지식인이자 김구와 함께 활동했던 아버지 장의택의 영향으로 신학문을 일찍 접했다. 1897년 한성부로 유학하여 관립영어학교에 입학했다. 이 학교에 다니면서 독립협회의 만민공동회에 참가하는 등 계몽운동에 뜻을 두었다가 1898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1905년 일본 도쿄에서 조선인 유학생들이 결성한 태극학회 평의원으로 본격적인 사회 활동을 시작했다.[1] 당시 장응진은 도쿄 고등사범학교에 재학 중이었다. 태극학회는 주로 관서 지방 출신 유학생들이 중심이 된 단체로, 장응진은 태극학회 기관지 《태극학보》 발행인을 맡고 초대 회장에 올랐으며, 서북 지역 기독교 계열 청년들의 정신적 지도자 안창호가 도쿄를 방문했을 때 만나 영향을 받았다.
한편, 태극학보에 실린 '백악춘사'의 〈다정다한〉은 장응진의 작품으로 추정된다.[2] 이 소설은 국한문혼용체의 기독교 소설로, 굳건한 의지로 역경에도 굴하지 않는 개화기 계몽운동가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장응진이 동향인 황해도 출신 청년운동가 김정식의 행적을 소설화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07년 안창호가 평양에 설립한 대성학교 교무책임자를 맡았다. 초대 교장은 윤치호였다. 1909년에는 윤치호와 최남선 등이 조직한 신민회 방계 조직인 청년학우회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그러나 1912년 일제가 신민회 탄압을 위해 서북 지역 애국계몽 운동가들을 대거 체포한 105인 사건으로 투옥되었다.
2. 2. 교육 활동 (1910년대 ~ 1940년대)
1907년 안창호가 평양에 설립한 대성학교의 교무책임자를 맡았다. 초대 교장은 윤치호였다. 1909년에는 윤치호와 최남선 등이 조직한 신민회 방계 조직인 청년학우회에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그러나 1912년 일제가 신민회 탄압을 위해 서북 지역의 애국계몽 운동가들을 대거 체포한 105인 사건으로 투옥되었다.[1]
1913년부터 1922년까지 휘문고등보통학교의 학감으로 재직했다. 담당 과목은 이화학(理化學)이었다. 이광수와 최남선, 김기림의 예에서 보듯, 당시의 지식인들은 인문과학과 자연과학을 구분해 공부하지 않았다.[3]
1920년 조선교육회 결성 작업에 참여했다. 조선교육회는 3·1 운동 이후 일어난 교육계의 민족교육 운동과 관련이 있으며, 중앙고등보통학교 교장 최두선, 중동고등보통학교 교장 최규동, 동덕여자고등보통학교 교장 조동식, 조선기독교청년회연합회의 이상재 등이 주도한 단체였다.
일제강점기 말기, 기독교 청년운동과 애국계몽 운동 계열 인물들 대부분이 변절했을 때, 장응진도 일제에 협조한 행적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조선총독부 사학관 겸 편수관을 지냈고, 전쟁 지원을 선전하는 방송교화선전반 강사로 활동했다.
2. 3. 친일 행적 (1940년대)
일제강점기 말기에 장응진은 조선총독부 사학관 겸 편수관을 지냈고, 전쟁 지원을 선전하는 방송교화선전반 강사로 활동하는 등 일제에 협조한 행적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1]
2. 4. 광복 이후와 사망 (1945년 ~ 1950년)
1950년 6월 휘문고등학교 교장으로 근무하던 중 한국 전쟁이 발발했다. 장응진은 학교를 부산 임시교사로 옮겼으나, 피난지에서 과로로 순직했다.[1]
3. 사후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발표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중 교육/학술 부문에 선정되었으며,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포함되었다.
참조
[2]
서적
한국 근·현대 기독교문학 연구
국학자료원
2001-10-12
[3]
서적
대담 (인문학과 자연과학이 만나다)
휴머니스트
2005-11-14
[4]
뉴스
친일인사 15명 서훈/일제밀정·정신대 동원앞장
https://web.archive.[...]
한겨레
1993-10-19
[5]
뉴스
"[발굴] 주요 친일명단 120명 중 34명 해방후 훈·포장·표창 서훈 - 김성수는 2등급, 유관순은 3등급"
http://www.ohmynews.[...]
오마이뉴스
2005-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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