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민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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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정민태는 대한민국의 전 야구 선수로, 투수로서 선수 생활을 했다. 아마추어 시절 한양대학교 에이스로 활약하며 국가대표로도 활동했고, 1990년에는 MVP를 수상했다. 1991년 태평양 돌핀스에 입단하여 프로 선수 생활을 시작했으며, 현대 유니콘스로 이적하여 팀의 한국시리즈 우승을 이끌고 MVP를 수상하는 등 활약했다. 2000년 시즌 후 일본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이적했으나 부진한 성적으로 한국으로 복귀했다. 이후 현대 유니콘스, KIA 타이거즈에서 선수 생활을 이어갔으며, 은퇴 후에는 코치와 해설위원으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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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민태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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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정민태 |
로마자 표기 | Jeong Mintae |
한글 표기 | 정민태 |
한자 표기 | 鄭珉台 |
출생지 | 인천광역시 |
생년월일 | 1970년 3월 1일 () |
포지션 | 투수 / 코치 |
투타 | 우투우타 |
선수 경력 | |
KBO 리그 | 태평양 돌핀스 (1992–1995) 현대 유니콘스 (1996–2000, 2003–2007) KIA 타이거즈 (2008) |
NPB | 요미우리 자이언츠 (2001–2002) |
첫 출장 (KBO) | 1992년 4월 22일 |
마지막 출장 (KBO) | 2008년 4월 18일 |
첫 출장 (NPB) | 2001년 8월 12일 |
마지막 출장 (NPB) | 2002년 8월 30일 |
드래프트 | 1992년 KBO 1차 지명 (태평양 돌핀스) |
등번호 | 79 |
코치 경력 | |
KBO 리그 | 넥센 히어로즈 (2009–2012) 롯데 자이언츠 (2013–2014) 한화 이글스 (2015–2020) 삼성 라이온즈 (2024–) |
국가대표 경력 | |
올림픽 | 2000년 하계 올림픽 |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 | 2003년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 |
아시안 게임 | 1990년 아시안 게임 |
메달 | 2000 시드니 올림픽 동메달 2003 삿포로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 동메달 |
수상 | |
KBO 골든 글러브 | 1998년, 1999년, 2003년 |
한국시리즈 우승 | 2000년, 2003년, 2004년 |
한국시리즈 MVP | 2000년, 2003년 |
KBO 다승왕 | 1999년, 2000년, 2003년 |
KBO 승률왕 | 2003년 |
KBO 리그 기록 | |
승-패 | 124–96 |
평균자책점 | 3.48 |
탈삼진 | 1,278 |
2. 선수 시절
인천숭의초등학교, 동산중학교, 동산고등학교 야구부에서 투수로 활동했다.[9] 1988년 고등학교 졸업 후 연고 팀 태평양 돌핀스의 지명을 받았으나 거절하고 한양대학교 체육학과에 진학했다. 한양대학교 야구부에서는 좌완 구대성과 함께 에이스로 활약했으며[11], 아마추어 국가대표팀에 발탁되었다.[12] 1989년 IBA 회장배 아마추어 야구 대회에서 한국 국가대표팀을 우승으로 이끌며 투수 부문 베스트 9에 선정되었다.[13] 1990년에는 13승 3패, 평균자책점 1.26으로 아마추어 야구 대회 MVP를 수상했다.[14] 같은 해 LA 다저스의 입단 제의를 받았으나[15] 협상이 결렬되었고, 이후 태평양 돌핀스에 입단했다. 한양대학교 시절 대한민국 대표팀의 우완 에이스로서 1990년 아시안 게임 등 여러 국제 대회에서 활약했다.
1991년 말 팀 동료 김동기, 가내영과 함께 구단주가 허위 진단서를 작성하여 병역을 면제시켰다는 혐의로[16] 수감 위기에 처했으나,[17] 집행 유예로 풀려나 1.72억원의 계약금 및 연봉 조건으로 정식 선수가 되었다.[18] 그러나 부상과 컨디션 난조로 결장이 잦았고, 이듬해까지 부진이 이어졌다.[19][20][21]
1992년 프로에 데뷔했으나 1승 3패, 평균자책점 3.81로 부진했다. 1993년에는 부상으로 출전 기회가 적었다. 1994년 재활에 성공하여 8승을 기록하며 선발 투수로 자리 잡았고, 소속팀 태평양이 인천 연고 팀 중 최초로 한국시리즈에 진출하는 데 기여했다.[23][24] 1995년에는 8승(3완봉승, 2무사사구 완봉승) 13패, 평균자책점 3.69를 기록했고, 한화의 한용덕, 구대성과 함께 다패 타이 기록을 세웠다.[25]
1996년 현대그룹이 태평양 돌핀스를 인수하면서 소속 팀이 현대로 바뀌었다. 그해 15승을 거두며 팀의 한국시리즈 진출에 기여했다. 입단 5년 만에 처음으로 두 자릿수 승리를 거두면서 동시에 입단 당시 기대받던 에이스로서의 역량을 발휘하기 시작했다.[2] 이후 5년 연속 두 자릿수 승리와 200이닝 이상을 던지는 맹활약으로 한국을 대표하는 우완 투수로서 팀을 이끌었으며, 1998년, 2000년 한국시리즈 우승에 기여했다.[2]
1999년에는 20승 투수가 되었다. 시즌 20승은 그 후 2007년에 두산 베어스의 다니엘 리오스가 22승을 거둘 때까지 나오지 않았다. 20승을 거둔 1999년 시즌 오프에 일본 진출을 시도했지만, 해외 리그로 진출할 수 있는 자격을 얻는 데 1년이 부족했고, 우승을 놓친 현대 구단의 반대로 무산되었다.[2]
2000년 시즌 후 해외 진출을 원했던 정민태는 주니치 드래건스, 오릭스 블루웨이브, 요미우리 자이언츠 등 일본 프로야구 팀들의 관심을 받았다. 2001년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입단하여 2002년까지 일본 리그에서 활동했지만, 적응 실패와 실력 차이로 인해 큰 활약을 보여주지 못하고 계약 기간을 채우지 못한 채 현대 유니콘스로 복귀했다. 일본 리그 통산 성적은 27경기 등판, 6점대 평균자책점, 2승 1패이다.
2003년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방출된 후 한국 프로야구에 복귀했다. 복귀 첫 해인 2003년에는 뛰어난 성적으로 2003년 한국시리즈 우승을 이끌며 한국시리즈 MVP를 수상했다. 2004년부터는 부상과 노쇠화로 인해 부진을 겪었다.
2008년 현대 유니콘스가 해체되고 선수단을 인계하여 새로 창단한 우리 히어로즈와 계약 협상이 결렬되자, FA 신분으로 KIA 타이거즈로 이적했다. 그러나 2008년 한 경기에만 출전하고 은퇴를 선언했다.[82][83]
연도 | 구단 | 출장 | 선발 | 완투 | 완봉 | 승리 | 패전 | 세이브 | 홀드 | 승률 | 투구 이닝 | 평균자책점 |
---|---|---|---|---|---|---|---|---|---|---|---|---|
1992 | 태평양 돌핀스 | 7 | 2 | 0 | 0 | 1 | 3 | 0 | -- | .250 | 26.0 | 3.81 |
1993 | 태평양 돌핀스 | 5 | 0 | 0 | 0 | 0 | 0 | 0 | -- | ---- | 9.1 | 6.75 |
1994 | 태평양 돌핀스 | 25 | 25 | 5 | 0 | 8 | 9 | 0 | -- | .471 | 145.1 | 3.72 |
1995 | 태평양 돌핀스 | 28 | 28 | 8 | 3 | 8 | 14 | 0 | -- | .364 | 188.0 | 3.69 |
1996 | 현대 유니콘스 | 30 | 29 | 4 | 2 | 15 | 9 | 0 | -- | .625 | 210.1 | 2.44 |
1997 | 현대 유니콘스 | 31 | 31 | 8 | 1 | 13 | 13 | 0 | -- | .500 | 219.0 | 3.33 |
1998 | 현대 유니콘스 | 28 | 28 | 5 | 2 | 17 | 9 | 0 | -- | .654 | 200.2 | 2.83 |
1999 | 현대 유니콘스 | 33 | 29 | 7 | 0 | 20 | 7 | 3 | -- | .741 | 230.2 | 2.54 |
2000 | 현대 유니콘스 | 29 | 29 | 3 | 1 | 18 | 6 | 0 | 0 | .750 | 207.0 | 3.48 |
2003 | 현대 유니콘스 | 29 | 29 | 1 | 0 | 17 | 2 | 0 | 0 | .895 | 177.0 | 3.31 |
2004 | 현대 유니콘스 | 28 | 28 | 1 | 0 | 7 | 14 | 0 | 0 | .333 | 165.2 | 5.00 |
2005 | 현대 유니콘스 | 8 | 5 | 0 | 0 | 0 | 3 | 0 | 0 | .000 | 26.2 | 4.73 |
2006 | 현대 유니콘스 | 1 | 0 | 0 | 0 | 0 | 0 | 0 | 0 | ---- | 2.0 | 4.50 |
2007 | 현대 유니콘스 | 7 | 6 | 0 | 0 | 0 | 6 | 0 | 0 | .000 | 19.2 | 12.81 |
2008 | KIA 타이거즈 | 1 | 1 | 0 | 0 | 0 | 1 | 0 | 0 | .000 | 3.2 | 14.73 |
KBO 통산: 15년 | 290 | 270 | 42 | 9 | 124 | 96 | 3 | 0 | .564 | 1831.0 | 3.48 |
2. 1. 아마추어 시절
인천숭의초등학교, 인천 동산중학교, 동산고등학교 야구부에서 투수로 활동했다.[9] 1988년 고등학교 졸업 후 연고 팀 태평양 돌핀스의 지명을 받았으나 거절하고 한양대학교 체육학과에 진학했다. 한때 지역 연고 인하대[10], 연세대 진학설이 있었지만 감독과 뜻이 달라 불발됐다. 한양대학교 야구부에서는 좌완 구대성과 함께 에이스로 활약했으며[11], 아마추어 국가대표팀에 발탁되었다.[12] 1989년 IBA 회장배 아마추어 야구 대회에서 한국 국가대표팀을 우승으로 이끌며 투수 부문 베스트 9에 선정되었다.[13] 1990년에는 13승 3패, 평균자책점 1.26으로 아마추어 야구 대회 MVP를 수상했다.[14] 같은 해 LA 다저스의 입단 제의를 받았으나[15] 협상이 결렬되었고, 이후 태평양 돌핀스에 입단했다. 한양대학교 시절 대한민국 대표팀의 우완 에이스로서 1990년 아시안 게임 등 여러 국제 대회에서 활약했다.2. 2. 한국 프로야구 시절
정민태는 1991년 말 팀 동료 김동기, 가내영과 함께 구단주가 허위 진단서를 작성하여 병역을 면제시켰다는 혐의로[16] 수감 위기에 처했으나,[17] 집행 유예로 풀려나 1.72억원의 계약금 및 연봉 조건으로 정식 선수가 되었다.[18] 그러나 같은 해 부상과 컨디션 난조로 결장이 잦았고,[19][20] 이듬해까지 부진이 이어졌다.[21]1992년 프로에 데뷔했으나 1승 3패, 평균자책점 3.81로 부진했다. 1993년에는 부상으로 출전 기회가 적었다. 1994년 재활에 성공하여 8승을 기록하며 선발 투수로 자리 잡았고, 소속팀 태평양이 인천 연고 팀 중 최초로 한국시리즈에 진출하는 데 기여했다.[23][24] 1995년에는 8승(3완봉승, 2무사사구 완봉승) 13패, 평균자책점 3.69를 기록했고, 한화의 한용덕, 구대성과 함께 다패 타이 기록을 세웠다.[25]
1996년 현대그룹이 태평양 돌핀스를 인수하면서 소속 팀이 현대로 바뀌었다. 그해 15승을 거두며 팀의 한국시리즈 진출에 기여했다. 입단 5년 만에 처음으로 두 자릿수 승리를 거두면서 동시에 입단 당시 기대받던 에이스로서의 역량을 발휘하기 시작했다.[2] 이후 5년 연속 두 자릿수 승리와 200이닝 이상을 던지는 맹활약으로 한국을 대표하는 우완 투수로서 팀을 이끌었으며, 1998년, 2000년 한국시리즈 우승에 기여했다.[2]
1999년에는 20승 투수가 되었다. 시즌 20승은 그 후 2007년에 두산 베어스의 다니엘 리오스가 22승을 거둘 때까지 나오지 않았다. 20승을 거둔 1999년 시즌 오프에 일본 진출을 시도했지만, 해외 리그로 진출할 수 있는 자격을 얻는 데 1년이 부족했고, 우승을 놓친 현대 구단의 반대로 무산되었다.[2]
2. 2. 1. 태평양 돌핀스 시절
1991년 말 팀의 김동기, 가내영과 함께 구단주가 허위 진단서를 써 병역을 면제시켰다는 혐의로[16] 수감 위기에 처했으나[17], 집행 유예로 풀려나 1.72억원의 계약금 및 연봉 조건으로 정식 선수가 되었다.[18] 하지만 같은 해 부상과 컨디션 난조 등으로 결장이 심해졌고[19][20] 이듬해까지 계속 부진했다.[21] 1992년 프로 데뷔했으나 1승 3패, 평균자책점 3.81로 부진했다. 1993년에는 부상으로 출전 기회가 적었다. 1994년 재활에 성공하여 8승을 기록하며 선발 투수로 자리 잡았고, 팀이 인천 연고 팀 중 최초로 한국시리즈에 진출하는 데 기여했다.[23][24] 1995년에는 8승(이 중 3승은 완봉승, 2개는 무사사구 완봉승) 13패, 평균자책점 3.69를 기록했고, 한화의 한용덕, 구대성과 함께 다패 타이를 기록했다.[25]2. 2. 2. 현대 유니콘스 시절
1996년 현대그룹이 태평양 돌핀스를 인수하면서 소속 팀이 바뀌었다. 그해 15승을 거두며 팀의 한국시리즈 진출에 기여했다. 입단 5년 만에 처음으로 두 자릿수 승리를 거두면서 동시에 입단 당시 기대받던 에이스로서의 역량을 발휘하기 시작했다.[2]이후 5년 연속 두 자릿수 승리와 200이닝 이상을 던지는 맹활약으로 한국을 대표하는 우완 투수로서 팀을 이끌었으며, 1998년, 2000년 한국시리즈 우승에 기여했다.[2]
1999년에는 20승 투수가 되었다. 시즌 20승은 그 후 2007년에 두산 베어스의 다니엘 리오스가 22승을 거둘 때까지 나오지 않았다. 20승을 거둔 1999년 시즌 오프에 일본 진출을 시도했지만, 해외 리그로 진출할 수 있는 자격을 얻는 데 1년이 부족했고, 우승을 놓친 현대 구단의 반대로 무산되었다.[2]
2. 3. 일본 프로야구 시절
2000년 시즌 후 해외 진출을 원했던 정민태는 주니치 드래건스, 오릭스 블루웨이브, 요미우리 자이언츠 등 일본 프로야구 팀들의 관심을 받았다. 2001년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입단하여 2002년까지 일본 리그에서 활동했지만, 적응 실패와 실력 차이로 인해 큰 활약을 보여주지 못하고 계약 기간을 채우지 못한 채 현대 유니콘스로 복귀했다. 일본 리그 통산 성적은 27경기 등판, 6점대 평균자책점, 2승 1패이다.2. 3. 1. 요미우리 자이언츠 시절
2000년 시즌 후 해외 진출을 추진하여 일본 프로야구 팀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입단했다. 3년 계약에 이적료 약 5.5억엔, 계약금 1.5억엔, 연봉 1.3억엔으로 당시 최고 대우를 받았다.[1]2001년 일본 진출 첫 해에는 다리 부상으로 인해 2승 무패, 평균자책점 6.16으로 부진했다.[2] 2002년에는 구원 투수로만 등판하여 무승 1패, 평균자책점 6.41로 부진하며 퇴단했다.[2]
일본 입국 당시 디자이너 앙드레 김이 디자인한 의상을 입고 공항에 나타나 일본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3] 입단 당시 조성민, 정민철 두 선수가 이미 팀에 있었기 때문에, 한국인 투수 3명이 경쟁하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다.[3]
2. 4. 한국 프로야구 복귀
2003년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방출된 후 한국 프로야구에 복귀했다. 복귀 첫 해인 2003년에는 뛰어난 성적으로 2003년 한국시리즈 우승을 이끌며 한국시리즈 MVP를 수상했다. 2004년부터는 부상과 노쇠화로 인해 부진을 겪었다.2008년 현대 유니콘스가 해체되고 선수단을 인계하여 새로 창단한 우리 히어로즈와 계약 협상이 결렬되자, FA 신분으로 KIA 타이거즈로 이적했다. 그러나 2008년 한 경기에만 출전하고 은퇴를 선언했다.[82][83]
연도 | 구단 | 출장 | 선발 | 완투 | 완봉 | 승리 | 패전 | 세이브 | 홀드 | 승률 | 투구 이닝 | 평균자책점 |
---|---|---|---|---|---|---|---|---|---|---|---|---|
1992 | 태평양 돌핀스 | 7 | 2 | 0 | 0 | 1 | 3 | 0 | -- | .250 | 26.0 | 3.81 |
1993 | 5 | 0 | 0 | 0 | 0 | 0 | 0 | -- | ---- | 9.1 | 6.75 | |
1994 | 25 | 25 | 5 | 0 | 8 | 9 | 0 | -- | .471 | 145.1 | 3.72 | |
1995 | 28 | 28 | 8 | 3 | 8 | 14 | 0 | -- | .364 | 188.0 | 3.69 | |
1996 | 현대 | 30 | 29 | 4 | 2 | 15 | 9 | 0 | -- | .625 | 210.1 | 2.44 |
1997 | 31 | 31 | 8 | 1 | 13 | 13 | 0 | -- | .500 | 219.0 | 3.33 | |
1998 | 28 | 28 | 5 | 2 | 17 | 9 | 0 | -- | .654 | 200.2 | 2.83 | |
1999 | 33 | 29 | 7 | 0 | 20 | 7 | 3 | -- | .741 | 230.2 | 2.54 | |
2000 | 29 | 29 | 3 | 1 | 18 | 6 | 0 | 0 | .750 | 207.0 | 3.48 | |
2003 | 29 | 29 | 1 | 0 | 17 | 2 | 0 | 0 | .895 | 177.0 | 3.31 | |
2004 | 28 | 28 | 1 | 0 | 7 | 14 | 0 | 0 | .333 | 165.2 | 5.00 | |
2005 | 8 | 5 | 0 | 0 | 0 | 3 | 0 | 0 | .000 | 26.2 | 4.73 | |
2006 | 1 | 0 | 0 | 0 | 0 | 0 | 0 | 0 | ---- | 2.0 | 4.50 | |
2007 | 7 | 6 | 0 | 0 | 0 | 6 | 0 | 0 | .000 | 19.2 | 12.81 | |
2008 | KIA | 1 | 1 | 0 | 0 | 0 | 1 | 0 | 0 | .000 | 3.2 | 14.73 |
KBO 통산: 15년 | 290 | 270 | 42 | 9 | 124 | 96 | 3 | 0 | .564 | 1831.0 | 3.48 |
2. 4. 1. 현대 유니콘스 복귀
2003년에 복귀하여 투심 패스트볼을 새로 연마했고, 슬라이더, 직구, 특유의 슬로 커브를 통해 경기를 운영했다. 이 시즌에 177innings 17W 2L, 평균자책점 3.31, 122탈삼진을 기록하며 다시 리그 최정상급 투수로 군림했다. 또한, 이 해 2000년의 기록과 이어지는 선발 21연승을 달성해 세계 신기록을 세웠다.[2]이 시즌에는 다승 1위, 투구 이닝 4위, 평균자책점 3위, 탈삼진 3위, 승률 1위를 기록했으며 팀의 정규 리그 우승에 크게 기여했다. 2003년 한국시리즈에서는 SK 와이번스를 상대로 1, 4, 7차전에 선발 등판했는데 모두 승리를 기록했다. 특히 7차전에서는 허벅지 통증이 심한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테이핑을 감으면서까지 경기에 선발 등판해 완봉승을 거두며 팀의 3번째 한국시리즈 우승에 기여했다.[2]
2003년 한국시리즈에서 3승을 거둔 그는 1998년에 이어 2번째 한국시리즈 MVP, 1999년 ~ 2000년에 이어 3번째 다승왕, 데뷔 첫 승률왕이 됐다. 이러한 그의 활약과 공헌을 인정받아 시즌 후 연봉 7.4억원에 계약해 당시 프로 야구 선수 중 최대 연봉을 받았다.[2]
하지만 이듬해 2004년 4월 말 무렵에 노화와 허리 부상 등이 겹치며 악화되기 시작했다. 2004년에는 7W 14L, 평균자책점 5.00을 기록하며 부진했고, 2004년 한국시리즈에서 2차전, 7차전에 등판했을 때도 크게 부진했다. 이때부터 그는 '먹튀'라는 온갖 오명을 받아야만 했고, 그의 연봉은 그 이후에도 계속 대폭 삭감됐다. 2005년 ~ 2007년 사이에는 부상과 재활을 반복해 부상 후유증 등 부진으로 인해 단 1승도 못 거둔채 10패만 기록했다.[2]
연도 | 구단 | 출장 | 선발 | 완투 | 완봉 | 무사구 | 승리 | 패전 | 세이브 | 홀드 | 승률 | 타자 | 투구 이닝 | 피안타 | 피홈런 | 사사구 | 고의 | 사구 | 탈삼진 | 폭투 | 보크 | 실점 | 자책점 | 평균자책점 | WHIP |
---|---|---|---|---|---|---|---|---|---|---|---|---|---|---|---|---|---|---|---|---|---|---|---|---|---|
2003년 | 현대 | 29 | 29 | 1 | 0 | 0 | 17 | 2 | 0 | 0 | .895 | 741 | 177.0 | 179 | 17 | 42 | 1 | 5 | 122 | 3 | 0 | 76 | 65 | 3.31 | 1.25 |
2004년 | 28 | 28 | 1 | 0 | 0 | 7 | 14 | 0 | 0 | .333 | 721 | 165.2 | 193 | 21 | 42 | 0 | 8 | 123 | 9 | 0 | 109 | 92 | 5.00 | 1.42 | |
2005년 | 8 | 5 | 0 | 0 | 0 | 0 | 3 | 0 | 0 | .000 | 120 | 26.2 | 34 | 2 | 6 | 0 | 1 | 13 | 1 | 0 | 19 | 14 | 4.73 | 1.50 | |
2006년 | 1 | 0 | 0 | 0 | 0 | 0 | 0 | 0 | 0 | ---- | 9 | 2.0 | 2 | 1 | 1 | 0 | 0 | 1 | 0 | 0 | 1 | 1 | 4.50 | 1.50 | |
2007년 | 7 | 6 | 0 | 0 | 0 | 0 | 6 | 0 | 0 | .000 | 103 | 19.2 | 35 | 5 | 11 | 1 | 1 | 6 | 1 | 0 | 29 | 28 | 12.81 | 2.34 |
2. 4. 2. KIA 타이거즈 시절
2008년 3월에 현대 유니콘스가 해체되고 선수단을 인계해 새로 창단한 우리 히어로즈와 계약 협상을 진행했으나 입장 차이로 협상이 결렬돼 FA로 풀렸다. 그리고 70000000KRW에 계약하며 선수 생활 16년만에 처음으로 KIA 타이거즈로 이적했다.[82]2008년 4월 18일 한화전에 시즌 첫 선발 등판해 김태완의 장외 만루 홈런을 포함해 3.2이닝 5피안타, 6실점을 기록해 패전 투수가 됐다. 이 경기가 2008년 시즌 첫 경기이자 현역 마지막 경기였다.[82] 이후 2군에 내려가며 재활했으나 그 해 7월 8일 오른쪽 어깨 부상을 이유로 재활을 포기하고 은퇴를 선언했다.[83]
3. 야구선수 은퇴 후
은퇴 후 투수코치로 활동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초창기에는 자신이 마지막으로 선수 생활을 한 KIA에서의 투수코치 생활을 하고 싶어했고, 미국이나 일본에서의 코치 연수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해외 연수를 한다지만 실상은 MLB와 마이너 리그가 아닌 마이너 리그와 일본 2군 야구에서의 연수로 이루어지기 때문이었다. 이에 해외 연수라는 우회로를 이용하지 않고 곧바로 투수코치를 하겠다고 밝혔다.[84]
2008년 시즌 후 히어로즈의 신임 감독으로 선임된 김시진이 태평양 돌핀스 및 현대 유니콘스 시절 오랫동안 코치 및 감독과 선수로서 함께했던 그를 투수코치로 영입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고, 이를 수락해 2008년 10월 14일에 히어로즈와 6000만원에 투수코치로 계약했다. 히어로즈의 코치로 들어온 후 2009년 8월 2일에 목동야구장에서 은퇴식을 가졌다.[85] 은퇴식 때 정동진 전 태평양 돌핀스 감독 등 예전 태평양 돌핀스와 현대 유니콘스 시절에 함께한 선수 및 지도자들이 대거 참석했다.[86] 이후 2013년에 롯데 자이언츠의 감독으로 부임했던 김시진을 따라 이적했지만 투수진을 이끌지 못하고 2014년 도중 1군 투수코치에서 3군 투수코치로 보직이 변경됐고, 시즌 후 롯데 자이언츠와 재계약에 실패했다.
2014년 10월 31일 한화 이글스의 투수코치로 부임했고, 2020년에 사임했다. 2023년에 SPOTV의 야구 해설위원으로 영입되어 1시즌 동안 해설가로 첫 활동했고, 시즌 후 삼성 라이온즈의 투수코치로 영입되어 현장으로 복귀했으나 전반기를 5연패로 마감하자 전반기 종료 후 2군 투수코치로[87] 보직 변경됐다.
4. 논란 및 사건사고
정민태는 선수 시절 병역 비리 사건, 일본 진출 실패 및 구단과의 갈등 등 여러 논란과 사건사고를 겪었다.
4. 1. 병역 비리 사건
1991년 시즌 오프, 태평양 돌핀스의 지명을 받아 입단했으나, 입단 전 병역 기피를 시도한 것이 발각되어 체포되었다. 이후 석방되었지만, 중요한 캠프 기간을 구치소에서 보낸 탓에 훈련 부족 상태로 개막을 맞이했다.4. 2. 일본 진출 실패 및 구단과의 갈등
2000년 시즌 후 정민태는 해외 진출을 원했고, 주니치 드래건스, 오릭스 블루웨이브, 요미우리 자이언츠 등 일본 프로야구 팀들의 관심을 받았다. 특히 요미우리 자이언츠와는 3년 계약에 이적료 약 5.5억엔, 계약금 1.5억엔, 연봉 1.3억엔이라는 당시 최고 대우로 계약하며 2001년에 입단했다.[2] 그러나 1999년 시즌 오프에도 일본 진출을 시도했지만, 해외 리그 진출 자격 요건(KBO 7년 이상 활동)에 1년이 부족했고, 우승을 놓친 현대 유니콘스 구단의 반대로 무산된 바 있다.[2]2001년부터 2002년까지 일본 리그에서 활동했지만, 적응 실패와 실력 차이를 느끼며 27경기 등판, 6점대 평균자책점, 2승 1패라는 부진한 성적을 기록했다. 결국 계약 기간을 채우지 못하고 현대 유니콘스로 복귀했다.[2]
2008년 현대 유니콘스 해체 후 우리 히어로즈와 계약 협상 과정에서 연봉 문제로 갈등을 겪었다. 이후 SK 와이번스와 기아 타이거즈가 영입에 나섰고, 정민태는 강력한 투수진이 구축된 SK보다는 전년도 최하위로 등판 기회가 많을 것으로 보이는 기아 타이거즈를 선택, 연봉 7,000만 원에 계약했다.[2]
5. 수상
6. 출신 학교
7. 통산 기록
연도 | 소속 | 나이 | 승리 | 패전 | 승률 | 평균자책점 | 출장 | 선발 | 완투 | 완봉 | 세이브 | 홀드 | 이닝 | 피안타 | 피홈런 | 볼넷 | 고의4구 | 탈삼진 | 몸맞는볼 | 보크 | 폭투 | 실점 | 자책점 | 타자수 | WHIP |
---|---|---|---|---|---|---|---|---|---|---|---|---|---|---|---|---|---|---|---|---|---|---|---|---|---|
1992 | 태평양 | 23 | 1 | 3 | .250 | 3.81 | 7 | 2 | 0 | 0 | 0 | 0 | 26 | 21 | 3 | 13 | 0 | 21 | 0 | 0 | 1 | 13 | 11 | 110 | 1.31 |
1993 | 24 | 0 | 0 | ---- | 6.75 | 5 | 0 | 0 | 0 | 0 | 0 | 9.1innings | 11 | 0 | 4 | 0 | 7 | 0 | 0 | 0 | 7 | 7 | 41 | 1.61 | |
1994 | 25 | 8 | 9 | .471 | 3.72 | 25 | 25 | 5 | 0 | 0 | 0 | 145.1innings | 159 | 7 | 38 | 0 | 91 | 2 | 0 | 5 | 66 | 60 | 619 | 1.36 | |
1995 | 26 | 8 | 14 | .364 | 3.69 | 28 | 28 | 8 | 3 | 0 | 0 | 188innings | 187 | 8 | 58 | 3 | 115 | 4 | 0 | 7 | 92 | 77 | 796 | 1.30 | |
1996 | 현대 | 27 | 15 | 9 | .625 | 2.44 | 30 | 29 | 4 | 2 | 0 | 0 | 210.1innings | 180 | 15 | 45 | 4 | 127 | 3 | 1 | 4 | 67 | 57 | 834 | 1.07 |
1997 | 28 | 13 | 13 | .500 | 3.33 | 31 | 31 | 8 | 1 | 0 | 0 | 219innings | 189 | 15 | 51 | 2 | 159 | 7 | 1 | 3 | 97 | 81 | 886 | 1.10 | |
1998 | 29 | 17 | 9 | .654 | 2.83 | 28 | 28 | 5 | 2 | 0 | 0 | 200.2innings | 184 | 18 | 49 | 1 | 159 | 2 | 0 | 9 | 77 | 63 | 825 | 1.16 | |
1999 | 30 | 20 | 7 | .741 | 2.54 | 33 | 29 | 7 | 0 | 3 | 0 | 230.2innings | 208 | 24 | 63 | 3 | 178 | 4 | 0 | 5 | 69 | 65 | 936 | 1.18 | |
2000 | 31 | 18 | 6 | .750 | 3.48 | 29 | 29 | 3 | 1 | 0 | 0 | 207innings | 192 | 21 | 66 | 2 | 153 | 1 | 0 | 7 | 85 | 80 | 846 | 1.25 | |
2001 | 요미우리 | 32 | 2 | 0 | 1.000 | 6.16 | 10 | 3 | 0 | 0 | 0 | 0 | 19innings | 21 | 2 | 3 | 0 | 14 | 1 | 0 | 1 | 13 | 13 | 81 | 1.26 |
2002 | 33 | 0 | 1 | .000 | 6.41 | 17 | 0 | 0 | 0 | 0 | 0 | 19.2innings | 24 | 4 | 7 | 1 | 14 | 1 | 1 | 0 | 14 | 14 | 89 | 1.58 | |
2003 | 현대 | 34 | 17 | 2 | .895 | 3.31 | 29 | 29 | 1 | 0 | 0 | 0 | 177innings | 179 | 17 | 42 | 1 | 122 | 5 | 0 | 3 | 76 | 65 | 741 | 1.25 |
2004 | 35 | 7 | 14 | .333 | 5.00 | 28 | 28 | 1 | 0 | 0 | 0 | 165.2innings | 193 | 21 | 42 | 0 | 123 | 8 | 0 | 9 | 109 | 92 | 721 | 1.42 | |
2005 | 36 | 0 | 3 | .000 | 4.73 | 8 | 5 | 0 | 0 | 0 | 0 | 26.2innings | 34 | 2 | 6 | 0 | 13 | 1 | 0 | 1 | 19 | 14 | 120 | 1.50 | |
2006 | 37 | 0 | 0 | ---- | 4.50 | 1 | 0 | 0 | 0 | 0 | 0 | 2innings | 2 | 1 | 1 | 0 | 1 | 0 | 0 | 0 | 1 | 1 | 9 | 1.50 | |
2007 | 38 | 0 | 6 | .000 | 12.81 | 7 | 6 | 0 | 0 | 0 | 0 | 19.2innings | 35 | 5 | 11 | 1 | 6 | 1 | 0 | 1 | 29 | 28 | 103 | 2.34 | |
2008 | KIA | 39 | 0 | 1 | .000 | 14.73 | 1 | 1 | 0 | 0 | 0 | 0 | 3.2innings | 5 | 1 | 2 | 0 | 3 | 1 | 0 | 0 | 6 | 6 | 19 | 1.91 |
KBO 통산 : 15년 | 124 | 96 | .564 | 3.48 | 290 | 270 | 42 | 9 | 3 | 0 | 1831innings | 1779 | 158 | 491 | 17 | 1278 | 39 | 2 | 55 | 813 | 707 | 7606 | 1.24 | ||
NPB 통산 : 2년 | 2 | 1 | .667 | 6.28 | 27 | 3 | 0 | 0 | 0 | 0 | 38.2innings | 45 | 6 | 10 | 1 | 28 | 2 | 1 | 1 | 27 | 27 | 170 | 1.42 |
- 시즌 기록 중 '''굵은 글씨'''는 해당 시즌 리그 최고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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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07-30
[70]
뉴스
현대 정민태, 허벅지 근섬유 파열 재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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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1999-09-04
[71]
뉴스
승엽아, 그래도 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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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1999-10-08
[72]
뉴스
99' 한일 슈퍼 게임 대표 명단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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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1999-10-09
[73]
뉴스
日 프로 야구, 국내 투수에 '손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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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1999-10-16
[74]
뉴스
"정민태 일본행 불허" KBO, "국내 활동 7년 채우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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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1999-10-29
[75]
뉴스
정민태, "요미우리에서 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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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1999-11-08
[76]
뉴스
요미우리, 정민태에 '구애 공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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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1999-11-13
[77]
뉴스
美 메이저 리그, "정민철 영입 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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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1999-11-19
[78]
뉴스
KBO, 정민태 日 진출 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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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1999-11-17
[79]
뉴스
정민태, "선수 뜻 막는 '노예 규정', 해도 너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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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1999-11-19
[80]
뉴스
"일본 못 가면 3억 달라"…
http://newslibrary.n[...]
동아일보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1999-11-24
[81]
뉴스
이승엽, 최다 득표로 3년 연속 "황금 장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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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1999-12-16
[82]
뉴스
이완, '아…정민태'
http://www.hani.co.k[...]
한겨레
2008-04-19
[83]
뉴스
정민태. 전격 은퇴
http://www.hani.co.k[...]
한겨레
2008-07-09
[84]
뉴스
정민태 "KIA 투수코치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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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 서울
2008-09-23
[85]
뉴스
정민태 지각 은퇴식…영웅들 끈끈한 정에 뭉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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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2009-08-03
[86]
뉴스
정민태 코치 은퇴식, 현대 유니콘스 동창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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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간스포츠
null
[87]
뉴스인용
[공식발표] 삼성, 정대현 1군 수석+투수코치 승격... 이병규-정민태 2군 이동 "팀 쇄신 차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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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뉴스
2024-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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