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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동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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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선동열은 대한민국 프로 야구 선수이자 야구 감독으로, 한국 프로 야구 역사상 최고의 투수로 평가받는다. 1985년부터 1995년까지 해태 타이거즈에서 활약하며 3번의 정규 시즌 MVP와 6번의 골든글러브를 수상했으며, 7번의 평균자책점 타이틀을 차지했다. 통산 3번의 0점대 평균자책점을 기록했고, 1993년에는 마무리 투수로서 31세이브를 올리며 평균자책점 0.78을 기록했다. 1995년에는 일본 프로 야구 주니치 드래건스로 이적하여 1997년에는 38세이브를 기록하며 최다 세이브 투수 타이틀을 얻었다. 은퇴 후에는 삼성 라이온즈 감독을 맡아 2005년과 2006년 한국시리즈에서 우승을 이끌었으며,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2018년 아시안 게임에서 금메달을 획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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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동열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기아 타이거즈 감독 시절 (2014년 3월 28일)
이름선동열
한자宣銅烈
로마자 표기Seon Dongyeol
일본어 표기ソンドンニョル
본명ソン・ドンヨル
영어 표기Sun Dong-Yol
출생지광주광역시, 대한민국
생년월일1963년 1월 10일
포지션투수 / 감독
투구우투
타석우타
선수 경력
프로 입단 연도1985년
첫 출장 (KBO)1985년 7월 2일
첫 출장 (NPB)1996년 4월 5일
마지막 출장 (KBO)1995년 10월
마지막 출장 (NPB)1999년 10월 27일
소속 구단 (선수)해태 타이거즈 (1985년–1995년)
주니치 드래건스 (1996년–1999년)
코치 및 감독 경력
소속 구단 (코치)주니치 드래건스 (2003년)
삼성 라이온즈 (2004년)
소속 구단 (감독)삼성 라이온즈 (2005년–2010년)
KIA 타이거즈 (2011년–2014년)
국가대표팀 감독대한민국 (2017년–2018년)
기타 코치 경력대한민국 WBC 코치 (2006년, 2017년)
대한민국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 코치 (2007년)
대한민국 WBSC 프리미어 12 투수코치 (2015년)
대한민국 WBC 투수코치 (2017년)
kt 위즈 인스트럭터 (2021년~현재)
KBO 기록
승-패 기록146승 40패
평균 자책점1.20
탈삼진1,698
세이브132
노히터1
NPB 기록
승-패 기록10승 4패
평균 자책점2.70
탈삼진228
세이브98
수상 내역
KBO MVP3회 (1986년, 1989년, 1990년)
KBO 골든 글러브6회 (1986년, 1988년–1991년, 1993년)
KBO 올스타9회 (1986년–1994년)
KBO 승리4회 (1986년, 1989년–1991년)
KBO 평균 자책점8회 (1985년–1991년, 1993년)
KBO 탈삼진5회 (1986년, 1988년–1991년)
KBO 세이브2회 (1993년, 1995년)
KBO 트리플 크라운4회 (1986년, 1989년–1991년)
한국시리즈 우승6회 (1986년–1989년, 1991년, 1993년)
KIA 타이거즈 영구 결번18번
아마추어 월드 시리즈 MVP1982년
국제 대회 메달
아마추어 월드 시리즈금메달 (1982년 대한민국)
세계 주니어 야구 선수권 대회금메달 (1981년 뉴어크)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금메달 (1983년 서울)
은메달 (1985년 퍼스)
기타 정보
출신 학교광주제일고등학교
고려대학교

2. 선수 시절

2. 1. 한국 프로야구 시절

한국 프로야구 역대 최고의 투수로 손꼽힌다. 선발 투수로서 두 번, 마무리 투수로서 한번의 규정이닝을 채우며 통산 3번의 0점대 평균자책점을 기록하였다. 한국에서의 마지막 해인 1995년 당시 한국 프로야구 사상 최고 구속인 155km/h의 패스트볼과 수준급 슬라이더를 던지던 투수였다.[6]

고려대학교 경영학과(81학번)를 졸업 후 1985년 후기리그부터 출전하여 1995년까지 총 11시즌이 못 미치는 기간의 국내 프로리그 경력 중 7번의 평균자책점 타이틀을 차지하면서 6번의 한국시리즈 우승을 이끌었고, 총 3회의 정규시즌 MVP와 6회의 투수 부문 골든글러브를 수상했다.

통산 sWAR 101.29를 기록하여 전무후무한 수치를 보여준다. 한국프로야구에서 활약 당시 불펜에 나와 몸만 풀고 있어도 상대팀은 위축되었고 실제 등판하면 상대팀 응원 관중들도 경기 끝났다며 경기장을 나가는 사람이 있을 정도로 위력을 떨치던 투수였다.

그의 일본 진출 후 해태삼성에서 선발과 마무리를 통해 KBO를 대표하는 투수 중 하나로 성장한 임창용이 한국프로야구 18시즌 통산 sWAR이 54.70인 것으로 볼 때 선동열이 얼마나 리그를 압도하는 투수였는지 알 수 있다.

커리어 하이 시즌은 1986년의 262.2이닝을 던져 24승과 0.99의 평균자책점에 sWAR는 무려 14.89이었다. sWAR 10이상을 기록했던 해가 6회나 되는데 한국프로야구 역사상 투수로서 10이상을 두 번 이상 기록한 투수는 선동열이 유일하다.

1993년과 1995년에는 팀이 점수가 앞서면 7회부터 나와 9회까지 마무리하는 경우가 빈번했음에도 0점대 평균자책점을 기록할 정도로 상대에게 기회를 주지 않았다. 1992년 어깨부상을 겪고 마무리로 변신하여, 1993년도 49경기 출장하며 126.1이닝을 던져 마무리 투수임에도 규정이닝을 채워 0.78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하는 엽기적인 기록을 세우며 평균자책점 타이틀을 따는데도 모두가 그러려니 하였다.

1994년 박찬호가 미국에 진출하자 박탈감에 빠지며 부진했으나 1995년도 48경기 출장에 109.1이닝을 던져 0.49라는 믿기 어려운 평균자책점을 기록하였다.

그 당시 선동열과 같이 한국 프로야구에서 활약한 선수는 구대성, 이상훈, 양준혁, 이종범 등이다. 추후 구대성, 이상훈은 일본프로야구를 거쳐 미국프로야구인 MLB로도 진출한다.

선동열의 등번호 18번은 1996년 해태 타이거즈(Haitai Tigers)와 2002년 기아 타이거즈(Kia Tigers)에 의해 영구 결번으로 지정되었다.


해태 타이거즈에 입단한 선동열은 1985년 7월 2일 대구에서 삼성 라이온즈와의 경기에서 KBO 리그에 데뷔했다. 데뷔 시즌에 7승 4패, 1.70의 평균자책점, 103개의 탈삼진을 기록했다. 신인상은 수상하지 못했지만, 신인으로서 7년 연속 평균자책점 1위를 차지하는 기록을 세웠다.[6]

1986년에는 262.2이닝 동안 24승 6패, 0.99의 평균자책점, 214개의 탈삼진을 기록하며 리그를 지배했고, KBO 최초로 투수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한 박철순 이후 두 번째로 투수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했다.[6]

1987년에는 14승 2패, 0.89의 평균자책점, 144개의 탈삼진을 기록하며 다시 한번 평균자책점 1위를 차지했고, 승리 부문 2위, 탈삼진 부문 3위에 올랐다. 이 시즌에 그는 자신의 커리어 중 가장 뛰어난 경기 중 하나를 선보였다. 5월 16일 롯데 자이언츠와의 2대 2 동점 경기에서 선동열은 15이닝 무결정 완투 경기를 펼쳤는데, 총 232개의 공을 던졌다. 상대 투수 최동원 또한 리그 최고의 투수 중 한 명으로 평가받았는데, 이 경기에서 209개의 공을 던지며 완투를 기록했다. 두 한국 에이스 투수의 맞대결은 한국 야구 역사상 최고의 순간 중 하나로 여겨진다.

1988년에는 16승 5패, 200개의 탈삼진, 1.21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하며 평균자책점과 탈삼진 부문에서 1위를 차지했다.

1989년에는 두 번째 투수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하며 승리(21승), 평균자책점(1.17), 탈삼진(198개) 부문에서 1위를 차지했다. 1989년 7월 6일 삼성 라이온즈를 상대로 KBO 역사상 다섯 번째 노히트 노런 완봉승을 거두었다.

1990년에는 190.1이닝 동안 22승 6패, 1.13의 평균자책점, 189개의 탈삼진을 기록하며 단 한 개의 홈런만 허용하는 압도적인 기량으로 세 번째 투수 트리플 크라운을 차지했다.

1991년에는 19승 4패, 1.55의 평균자책점, 210개의 탈삼진을 기록하며 네 번째 투수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했다.

1992년 시즌에는 몇 달 동안 부상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당시 해태 타이거즈김응룡 감독은 그를 장기 투수(long reliever) 또는 마무리 투수로 기용할 계획이었고, 부상에서 복귀한 후 마무리 투수로서의 역할을 맡게 되었다. 1992년에는 32.2이닝 동안 8세이브, 0.28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했다.[8]

1993년, 구원 투수로서의 첫 번째 풀 시즌에서 선동열은 126.1이닝 동안 10승 3패, 31세이브(리그 1위), 164개의 탈삼진을 기록했다. 구원 투수가 충분한 이닝을 소화하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지만, 그는 0.78의 평균자책점으로 평균자책점 1위를 차지한 최초의 마무리 투수가 되었다.

1994년에는 KBO 커리어에서 유일하게 평범한 시즌을 보냈다. 102.1이닝 동안 6승 4패, 12세이브, 94개의 탈삼진을 기록했고, 2.73의 평균자책점은 그의 커리어 최고 기록이었다.

하지만 선동열은 1995년에 109.1이닝 동안 33세이브(KBO 리그 1위), 0.49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하며 강력하게 복귀했다.

2. 1. 1. 해태 타이거즈 시절

한국 프로야구 역대 최고의 투수로 손꼽힌다. 선발투수로서 두 번, 마무리 투수로서 한번의 규정이닝을 채우며 통산 3번의 0점대 평균자책점을 기록하였다. 한국에서의 마지막 해인 1995년 당시 한국 프로야구 사상 최고 구속인 155km/h의 패스트볼과 수준급 슬라이더를 던지던 투수였다.[6]

고려대학교 경영학과(81학번)를 졸업 후 85년 후기리그부터 출전하여 95년까지 총 11시즌이 못 미치는 기간의 국내 프로리그 경력 중 7번의 평균자책점 타이틀을 차지하면서 6번의 한국시리즈 우승을 이끌었고, 총 3회의 정규시즌 MVP와 6회의 투수 부문 골든글러브를 수상했다.

통산 sWAR 101.29를 기록하여 전무후무한 수치를 보여준다. 한국프로야구에서 활약 당시 불펜에 나와 몸만 풀고 있어도 상대팀은 위축되었고 실제 등판하면 상대팀 응원 관중들도 경기 끝났다며 경기장을 나가는 사람이 있을 정도로 위력을 떨치던 투수였다.

그의 일본 진출 후 해태삼성에서 선발과 마무리를 통해 KBO를 대표하는 투수 중 하나로 성장한 임창용이 한국프로야구 18시즌 통산 sWAR이 54.70인 것으로 볼 때 선동열이 얼마나 리그를 압도하는 투수였는지 알 수 있다.

커리어 하이 시즌은 1986년의 262.2이닝을 던져 24승과 0.99의 평균자책점에 sWAR는 무려 14.89이었다. sWAR 10이상을 기록했던 해가 6회나 되는데 한국프로야구 역사상 투수로서 10이상을 두 번 이상 기록한 투수는 선동열이 유일하다.

1993년과 1995년에는 팀이 점수가 앞서면 7회부터 나와 9회까지 마무리하는 경우가 빈번했음에도 0점대 평균자책점을 기록할 정도로 상대에게 기회를 주지 않았다. 1992년 어깨부상을 겪고 마무리로 변신하여, 1993년도 49경기 출장하며 126.1이닝을 던져 마무리 투수임에도 규정이닝을 채워 0.78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하는 엽기적인 기록을 세우며 평균자책점 타이틀을 따는데도 모두가 그러려니 하였다.

1994년 박찬호가 미국에 진출하자 박탈감에 빠지며 부진했으나 1995년도 48경기 출장에 109.1이닝을 던져 0.49라는 믿기 어려운 평균자책점을 기록하였다.

그 당시 선동열과 같이 한국 프로야구에서 활약한 선수는 구대성, 이상훈, 양준혁, 이종범 등이다. 추후 구대성, 이상훈은 일본프로야구를 거쳐 미국프로야구인 MLB로도 진출한다.

해태 타이거즈(Haitai Tigers)에 입단한 선동열은 1985년 7월 2일 대구에서 삼성 라이온즈(Samsung Lions)와의 경기에서 KBO 리그에 데뷔했다. 데뷔 시즌에 7승 4패, 1.70의 평균자책점, 103개의 탈삼진을 기록했다. 신인상은 수상하지 못했지만, 신인으로서 7년 연속 평균자책점 1위를 차지하는 기록을 세웠다.[6]

1986년에는 262.2이닝 동안 24승 6패, 0.99의 평균자책점, 214개의 탈삼진을 기록하며 리그를 지배했고, KBO 최초로 투수 트리플 크라운(Pitching Triple Crown)을 달성한 박철순(Park Chul-soon) 이후 두 번째로 투수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했다.[6]

1987년에는 14승 2패, 0.89의 평균자책점, 144개의 탈삼진을 기록하며 다시 한번 평균자책점 1위를 차지했고, 승리 부문 2위, 탈삼진 부문 3위에 올랐다. 이 시즌에 그는 자신의 커리어 중 가장 뛰어난 경기 중 하나를 선보였다. 5월 16일 롯데 자이언츠(Lotte Giants)와의 2대 2 동점 경기에서 선동열은 15이닝 무결정 완투 경기를 펼쳤는데, 총 232개의 공을 던졌다. 상대 투수 최동원 또한 리그 최고의 투수 중 한 명으로 평가받았는데, 이 경기에서 209개의 공을 던지며 완투를 기록했다. 두 한국 에이스 투수의 맞대결은 한국 야구 역사상 최고의 순간 중 하나로 여겨진다.

1988년에는 16승 5패, 200개의 탈삼진, 1.21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하며 평균자책점과 탈삼진 부문에서 1위를 차지했다.

1989년에는 두 번째 투수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하며 승리(21승), 평균자책점(1.17), 탈삼진(198개) 부문에서 1위를 차지했다. 1989년 7월 6일 삼성 라이온즈를 상대로 KBO 역사상 다섯 번째 노히트 노런 완봉승을 거두었다.

1990년에는 190.1이닝 동안 22승 6패, 1.13의 평균자책점, 189개의 탈삼진을 기록하며 단 한 개의 홈런만 허용하는 압도적인 기량으로 세 번째 투수 트리플 크라운을 차지했다.

1991년에는 19승 4패, 1.55의 평균자책점, 210개의 탈삼진을 기록하며 네 번째 투수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했다.

1992년 시즌에는 몇 달 동안 부상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당시 해태 타이거즈김응룡 감독은 그를 장기 투수(long reliever) 또는 마무리 투수(closer)로 기용할 계획이었고, 부상에서 복귀한 후 마무리 투수로서의 역할을 맡게 되었다. 1992년에는 32.2이닝 동안 8세이브, 0.28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했다.[8]

1993년, 구원 투수로서의 첫 번째 풀 시즌에서 선동열은 126.1이닝 동안 10승 3패, 31세이브(리그 1위), 164개의 탈삼진을 기록했다. 구원 투수가 충분한 이닝을 소화하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지만, 그는 0.78의 평균자책점으로 평균자책점 1위를 차지한 최초의 마무리 투수가 되었다.

1994년에는 KBO 커리어에서 유일하게 평범한 시즌을 보냈다. 102.1이닝 동안 6승 4패, 12세이브, 94개의 탈삼진을 기록했고, 2.73의 평균자책점은 그의 커리어 최고 기록이었다.

하지만 선동열은 1995년에 109.1이닝 동안 33세이브(KBO 리그 1위), 0.49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하며 강력하게 복귀했다.

광주제일고등학교 시절 전국대회 우승을 차지했고, 고려대학교 1학년 때 AAA 세계야구선수권대회에서 우승을 경험했다. 이후 실업야구단 한국화장품에 입단하여 1982년 IBAF 세계야구선수권대회에서 우승을 거머쥐며 최우수선수로 선정되었다. 19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에도 한국 대표팀의 4위를 기록한 멤버로 참가했다.

실업팀 선수는 2년간 프로 입단이 불가능하다는 규정이 있었지만, 한국야구위원회의 특례를 인정받아(단, 전반기는 출장 정지 처분을 받았다) 1985년 시즌 후반부터 한국 프로야구 해태 타이거즈에서 경기에 출전했다. 같은 해 25경기에 등판하여[6] 평균자책점 1.70을 기록하며 최우수 평균자책점 타이틀을 획득했다.

1986년에는 262⅔이닝을 던지고[6] 0.99의 평균자책점으로 2년 연속 평균자책점 1위[6]를 기록했으며, 24승을 거두며 다승왕에도 올랐다.[6] 또한 같은 해 214탈삼진으로 탈삼진왕을 차지, 투수 3관왕을 달성했을 뿐만 아니라, '''시즌 8완봉승이라는 KBO 연간 기록'''을 세웠다.

당시 "선이 던지면 못 친다"[6], "선동열의 선발 경기는 결과를 보지 않아도 안다"고 말할 정도로 압도적인 존재감을 보였다. 거의 홈런을 맞지 않았고, 그와의 대결에서 승리는 물론 홈런을 치는 것조차 기적이라고 여겨졌으며, 그에게 홈런을 맞으면 다음날 스포츠 신문 1면을 장식하는 것은 당연했다. 이러한 경향은 마무리로 전향한 후 더욱 두드러졌고, 그가 불펜에서 투구 연습을 시작하는 모습만 봐도 리드당한 상대팀은 경기를 포기했다고 할 정도였다.

최고 구속 155 km/h의 직구(1991년 한일 프로야구 슈퍼 게임 2차전에서 기록)와, 보기에는 직구와 구별이 안 될 정도의 두 종류의 고속 슬라이더, 뛰어난 제구력으로 압도적인 성적을 거두었다.

1988년부터 1991년까지 4년 연속 탈삼진왕(200탈삼진, 198탈삼진, 189탈삼진, 210탈삼진)을 기록했고,[8] 1989년부터 1991년까지 3년 연속 다승왕(21승, 22승, 19승)을 기록했다.[8] 프로 데뷔한 1985년부터 1991년까지 7년 연속 최우수 평균자책점을 기록하여 1989년~1991년에는 투수 3관왕(통산 4회)을 달성했다.[8]

1992년에는 발 부상으로 부진했고,[8] 11경기 등판(32⅔이닝)에 그쳤지만, 2승 0패 8세이브를 기록하며 평균자책점 0.28을 기록했다.[8]

하지만 이듬해인 1993년부터는 서서히 회복되었고,[8] 같은 해 리그 최다 31세이브를 기록하며, '''평균자책점 0.78, WHIP 0.54'''라는 '''한국 프로야구 역대 최고 기록'''을 세웠다. 한국에서의 마지막 해였던 1995년에도 33세이브로 2번째 최다 세이브를 기록했다.

한국 프로야구 시절 11년(1985년 - 1995년) 통산 성적은 367경기 등판, 146승 40패 132세이브, 1698탈삼진이며, '''완봉승(29), 평균자책점(1.20), WHIP(0.80)의 통산 기록은 모두 한국 프로야구 역사상 최고''' 기록이다.

2. 2. 일본 프로야구 시절

1995년 시즌 종료 후 선동렬은 헤테(해태) 구단에 "해외에서 뛰고 싶다"고 요청했고, NPB의 주니치 드래건즈(센트럴 리그)와 요미우리 자이언츠(센트럴 리그) 등이 그의 영입을 위해 경쟁했다.[7] 당시 한국 프로야구는 선수들의 해외 유출을 거부해왔지만, 노모 히데오의 활약과 여론 조사 결과에 힘입어 해외 진출 분위기가 고조되고 있었다.[8] 김인식, 김성근 등 라이벌 팀 감독들도 선동렬의 해외 진출이 한국 야구에 긍정적인 영향을 줄 것이라고 기대했다.[8]

주니치가 더 높은 조건(이적료 3억 엔, 연봉 1.5억 엔 × 2년)을 제시하며 공세를 펼쳤고,[11] 헤테는 주니치의 양국 친선 기여, 본인의 의사 등을 고려하여 주니치 이적을 결정했다.[7] 1995년 12월 20일, 헤테는 선동렬을 주니치에 금전 트레이드하는 것을 발표했고,[7] 12월 23일 계약이 체결되었다.[12] 계약 조건은 2년 계약으로 이적료 3억 엔, 계약금 5,000만 엔, 연봉은 1억 엔(+최대 5,000만 엔의 성과급)이었다.[12] 한국 프로야구 선수의 해외 이적은 선동렬이 처음이었다.[8][13]

당시 주니치는 마무리 투수 부재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고, 선동렬의 입단으로 다음 시즌 우승 후보로 떠오르며 한일 우호 증진에도 기여할 것을 기대했다.[12] 등번호는 '''20'''번으로 결정되었다.[16] 호시노 센이치 감독은 선동렬 영입에 성공한 것에 기뻐하는 태도를 보였다.[16] 선동렬은 인터뷰에서 주니치의 자유로운 팀 분위기에 호감을 느꼈고, 30세이브 정도는 무난하게 할 수 있을 것이라며 자신감을 보였다.[8]

한편, 헤테 구단 단장 이상국은 자이언츠 입단을 시사하며 논란을 일으켰고,[17] 자이언츠는 헤테의 제안으로 협상에 나섰기에 주니치 입단 결정에 이해할 수 없다는 담화를 발표했다.[8] 해태그룹은 헤테 구단의 구단 사장과 단장 두 간부를 동시에 경질했는데, 이는 이상국의 자이언츠 입단 시사에 대한 책임을 물은 것으로 보도되었다.[17]

1996년 1월 상순에 일본에 와서 2월 1일부터 캠프에 참가했다.[12] 4월 5일 히로시마 도요 카프와의 개막전에서 일본 첫 등판을 했지만, 루이스 로페스에게 동점타를 맞고 세이브에 실패했다. 4월 16일 거인(자이언츠)전에서는 셰인 맥과 낙합 박만에게 홈런을 맞고 세이브에 실패했다. 압박감 때문에 2군으로 떨어지는 등 일본 첫 해는 기대에 못 미치는 결과로 끝났다.

1997년에는 오프 시즌도 반납하는 등 배수진을 치고 임하여 대변신했다. 나고야 구장에서 넓은 나고야 돔으로 옮긴 덕분에 "인코스에 마음껏 던질 수 있는" 투구가 통했고, 마무리 투수의 핵심으로 세이브를 쌓아 올렸다.[18] 같은 해 올스타전에 출전했다. 같은 해에는 당시 일본 기록인 38세이브를 올리고, 사사키 가즈히로(요코하마 베이스타스)와 함께 최다 세이브 투수[19]가 되었다. 38세이브 중 첫 번째는 요코하마와의 개막전이었고, 나고야 돔에서의 첫 공식 경기였다. 나고야 돔에서 처음으로 세이브를 기록한 투수이다. 이 해는 팀이 최하위로 부진한 가운데, 최다승을 기록한 야마모토 마사와 함께 분투했다.

1998년에는 팀이 요코하마와 치열한 우승 경쟁을 펼쳤고, 선동렬도 마무리 투수로서 두 자릿수 세이브를 기록한 투수 중 유일하게 0패로 던지며 팀 2위에 기여했다.

1999년에는 개막 2경기째 9회에 등판했을 때 종아리 통증으로 긴급 강판하는 등 고령과 장기간 근무로 인한 컨디션 불량이 겹쳐 6월에 3연속 구원에 실패하고 재조정을 위해 2군으로 떨어졌다. 그 사이에는 이와세, 삼손, 오치아이 등이 번갈아가며 마무리를 맡았다. 복귀 후에는 감독의 배려로 마지막 1아웃이나 2아웃 상황에서 등판하며 컨디션을 회복했고, 이 해에도 마무리 투수의 핵심으로 28세이브를 올리며 주니치 드래곤즈의 11년 만의 리그 우승에 기여했다. 그러나 컨디션 불량으로 인해 시즌을 끝으로 현역 은퇴를 선언했다. 11월 22일에 열린 은퇴 기자회견에서는 6월 시점에서 이미 은퇴를 신청했지만 호시노 센이치에게 만류되었던 사실과, 선수 겸임 코치 제안도 있었지만 선수 생활을 위해 일본에 왔다는 이유로 거절했다는 사실을 밝히며, "이쯤에서 그만두는 것이 팬들에게 좋은 이미지를 남긴 채 선수 생활을 마무리할 수 있다고 결심했다"라고 말했다.[20] 주니치 드래곤즈의 리그 우승 시기에 헹가래 투수가 되었고, 다이에이와의 일본 시리즈 4차전에도 등판하는 등 화려한 은퇴를 맞았다.

2. 2. 1. 주니치 드래건스 시절

한국에서 선수 생활을 마친 뒤 일본에 진출해 구원 투수로 활약했다. 그는 한국 프로 야구 선수 중 일본에 진출한 최초의 선수였다.[36] 1995년 시즌 종료 후 선동렬은 헤테(해태) 구단에 "해외에서 뛰고 싶다"고 요청했고, NPB의 주니치 드래건즈(센트럴 리그)와 요미우리 자이언츠(센트럴 리그) 등이 그의 영입을 위해 경쟁했다.[7]

결국 주니치가 더 높은 조건을 제시하며 공세를 펼쳤고, 헤테는 선동렬의 희망을 받아들여 주니치 이적을 결정했다.[11] 계약 조건은 2년 계약으로 이적료 3억 엔, 계약금 5,000만 엔, 연봉은 1억 엔(+최대 5,000만 엔의 성과급)이었다.[12]

1996년 4월 5일 히로시마 도요 카프와의 개막전에서 1점 리드의 9회말에 일본 첫 등판을 했지만, 루이스 로페스에게 동점타를 맞고 곧바로 세이브에 실패했다. 첫 해에는 일본 야구 적응에 어려움을 겪으며 3세이브, 5.50의 평균자책점으로 부진했다.

하지만, 1997년에는 대변신을 했다. 좁은 나고야 구장에서 넓은 나고야 돔으로 옮긴 덕분에 "인코스에 마음껏 던질 수 있는" 투구가 통했고, 마무리 투수의 핵심으로 세이브를 쌓아 올렸다.[18] 같은 해 올스타전에 출전했다. 같은 해에는 당시 일본 기록인 38세이브를 올리고, 사사키 가즈히로(요코하마 베이스타스)와 함께 최다 세이브 투수[19]가 되었다.

1998년에도 정상급 마무리 투수로서 활약하며 29세이브, 1.48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했다.

1999년에는 39경기에 출전하여 28세이브(리그 2위)와 2.61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했고, 주니치 드래건스의 11년 만의 리그 우승에 기여했다. 헹가래 투수가 되었고, 다이에이와의 일본 시리즈 4차전에도 등판하는 등 화려한 은퇴를 맞았다. 1999년 11월 22일에 은퇴를 선언했다.[37]

3. 야구선수 은퇴 후

은퇴 후 주니치 드래건스에서 코치 연수를 받은 그는 2000년에 KBO의 홍보위원으로 위촉됐으며, 시드니 올림픽 국가대표팀 전력분석관으로 활동했다.[38] 2003년 시즌 후 두산 베어스 감독직 제의를 받았으나 조건에 이견을 보여 협상이 결렬됐다.[39] 이후 해태 시절 은사였던 김응용 감독의 부름을 받아 삼성 라이온즈의 1군 수석 코치로 부임했다.[40] 2004년 1시즌 동안 김응용 감독 밑에서 투수교체법을 배웠다. 2004년 한국시리즈 준우승 이후 선수단 인사에서 김응용이 1년 계약기간을 남기고 사퇴한 이후 구단 사장으로 승진하자 11월 9일 삼성 라이온즈의 감독으로 승격됐다.[41] 부임하자마자 박진만, 심정수를 FA로 영입해 "레알 삼성"으로 불렸다. 감독으로 부임한 첫 시즌인 2005년 정규 리그 1위, 2005년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했다. 2006년 한국시리즈에서도 우승하여 2년 연속 우승을 차지했다.[41]

2006년 개막 전 3월에 개최된 제1회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WBC)의 한국 대표팀 투수 코치를 역임했다. 일본 전에서 배영수가 이치로에게 사구를 맞힌 것에 대해, “거기서부터 흐름이 바뀌었으니 속으로 기뻤다”고 『조선일보』에 말했지만 “속으로 기뻤다”는 부분만 보도되었다.[21] 2008년 1월 2일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의 한국 대표팀 수석코치를 사임했다. 이유는 정신적인 스트레스 때문이라고 한다.

2009년에는 포스트 시즌 진출에 실패했으나 5년 재계약에 성공했다. 하지만 SK 와이번스와의 2010년 한국시리즈에서 4연패로 스윕당하며 준우승을 기록했다.[41] 때마침 삼성그룹의 조직 개편이 겹치면서 구단 사장과 단장이 전부 바뀌자 2010년 말 감독직에서 경질당했고 구단의 운영 위원으로 활동했다.[22] 2011년 10월 18일 조범현의 후임으로 고향이자 친정팀 KIA의 감독으로 부임했다. 등번호는 자신의 영구 결번 18번이 아닌 90번을 달았다.[42] 하지만 2012년 시즌 5위, 2013년 시즌과 2014년 시즌 8위로 성적이 부진했다. 2년 재계약에 성공했으나, 안치홍에게 임의 탈퇴를 공시하겠다는 발언을 한 사실이 드러나 재계약을 발표한 지 6일 만인 2014년 10월 25일 자진 사퇴했다.[42]

이후 2015년 WBSC 프리미어 12 국가대표팀 투수코치로 활동했고, 2017년 7월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의 전임 감독으로 선임됐다.[23] 2018년 아시안 게임에서 한국 대표팀을 대회 3연패로 이끌었지만, 아시안 게임 선수 선발 문제로 혼란을 야기하여, 2018년 11월 14일, 한국 대표팀 감독을 사임했다.[24]

4. 논란

2018년 아시안 게임 야구 결승전에서 오지환, 박해민의 군 면제를 위해 출전시킨 게 아니냐는 논란에 대해 국정감사의 증인 신분으로 출석했다.[43]

4. 1. 2018 아시안 게임 선수 선발 논란

2018년 아시안 게임 야구 결승전에서 오지환, 박해민의 군 면제를 위해 출전시킨 게 아니냐는 논란에 대해 국정감사의 증인 신분으로 출석했다.[43]

5. 기타

5. 1. 가수 데뷔

그는 1993년 같은 팀 후배였던 이종범과 가수 양수경과 함께 프로젝트 그룹 Two & One을 결성하여 앨범을 내기도 했다.[44][34]

5. 2. 등번호

선동열은 해태 타이거즈에서 1985년부터 1995년까지 등번호 '18'번을 사용했으며, 이는 현재 영구 결번으로 지정되어 있다. 1996년부터 1999년까지 주니치 드래건스에서는 '20'번을 사용했다. 삼성 라이온즈 코치 시절인 2004년에는 '82'번을, 2003년에는 '93'번을 달았다. 삼성 라이온즈 감독 시절(2005년~2010년)과 KIA 타이거즈 감독 시절(2012년~2014년), 그리고 2017년부터 2018년까지는 '90'번을 사용했다.

5. 3. 출신 학교

6. 통산 기록

통산 성적은 KBO와 NPB에서 모두 뛰어난 기록을 남겼다. KBO 통산 11시즌 동안 367경기에 출장하여 146승 40패 132세이브, 평균자책점 1.20, 탈삼진 1698개를 기록했다. 특히 평균자책점 1.20은 KBO 역대 최고 기록이다. 1986년에는 24승 6패 6세이브, 평균자책점 0.99, 214탈삼진을 기록하며 투수 부문 4관왕(다승, 평균자책점, 탈삼진, 승률)을 차지했다. 1987년에는 14승 2패 6세이브, 평균자책점 0.89를 기록하며 2년 연속 평균자책점 0점대를 기록했다. 1993년에는 10승 3패 31세이브, 평균자책점 0.78을 기록하며 한국 프로 야구 역사상 유일하게 0점대 평균자책점과 30세이브 이상을 동시에 달성했다.

NPB에서는 4시즌 동안 162경기에 출장하여 10승 4패 98세이브, 평균자책점 2.70을 기록했다. 특히 1997년에는 1승 1패 38세이브, 평균자책점 1.28을 기록하며 주니치 드래건스의 센트럴 리그 우승에 기여했다.

다음은 선동열의 통산 기록을 정리한 표이다.





































4














W
H
I
P
1985해태2374.6361.702531080111.074220410330330214240.85
198624246.8000.9939221960262.2153252521472338299720.78
198725142.8750.8931117460162.089247114431121166040.84
198826165.7621.21311291100178.1116335020071029246740.85
198927213.8751.1736128680169.082248019871427226180.77
199028226.7861.1335168640190.1121150118980535247240.90
199129194.8261.55352212360203.0135825021081142357610.79
199230201.0000.28112118032.220010042201111190.92
199331103.76949100310126.14822001646001111433
19943264.6002.7327830120102.18152109482331314041.00
19953353.6250.4948000330109.1491143140306963810.58
1996주니치3451.8335.50381003054.06242236730135332481.56
19973511.5001.284300038063.136012069110992320.76
199836301.0001.484200029048.231411058001881870.86
19993712.3332.613900028031.031110134004991311.32
KBO 통산 : 11년146403671096813201647.096828342141698628272742206114
NPB 통산 : 4년104.7142.70162100980197.0160955422841661597981.09


  • 시즌 기록 중 '''굵은 글씨'''는 해당 시즌 최고 기록, 는 한국 프로야구 역사상 최고 기록

7. 주요 기록


  • KBO
  • * 투수 3관왕: 4회 (1986년, 1989년-1991년)
  • * 최우수 평균자책점: 8회 (1985년-1991년, 1993년)
  • * 최다승: 4회 (1986년, 1989년-1991년)
  • * 최다 탈삼진: 5회 (1986년, 1988년-1991년)
  • * 최다 세이브: 2회 (1993년, 1995년)
  • * MVP: 3회 (1986년, 1989년, 1990년)
  • * 골든글러브: 7회 (1986년, 1988년 ~ 1993년)

  • NPB
  • * 최다 세이브: 1회 (1997년)
  • * 월간 MVP: 1회 (1997년 5월)
  • * JA 전농 Go・Go상: 1회 (구원상: 1997년 7월)
  • * 아이치 토요타토요타 크라운상: (1997년)

7. 1. KBO 리그

선동열은 KBO 리그에서 활동하며 여러 기록을 세웠다. 한국시리즈에서 선수로 6회(1986, 1987, 1988, 1989, 1991, 1993), 감독으로 2회(2005, 2006) 우승했다. 정규 시즌 MVP 3회(1986, 1989, 1990), 골든 글러브 6회(1986, 1988, 1989, 1990, 1991, 1993)를 수상했으며, 투수 부문 최다 및 최다 연속 기록이다. 선발 올스타에는 9회(1986~1994) 출전했다.

1986년부터 1995년까지 해태 타이거즈에서 활동하며, 1992년을 제외하고 매년 뛰어난 성적을 기록했다. 특히 1986년에는 24승(17선발승) 6패 6세이브, 평균자책점 0.99, 탈삼진 214개를 기록하며 투수 부문 주요 타이틀을 석권했다. 1987년에는 14승(5선발승) 2패 6세이브, 평균자책점 0.89를 기록했고, 1988년에는 16승(9선발승) 5패 10세이브, 평균자책점 1.21, 탈삼진 200개를 기록했다. 1989년에는 21승(9선발승) 3패 8세이브, 평균자책점 1.17, 탈삼진 198개를 기록하며 다승왕과 탈삼진왕을 차지했다. 1990년에는 22승(11선발승) 6패 4세이브, 평균자책점 1.13, 탈삼진 189개를 기록하며 2년 연속 다승왕과 탈삼진왕을 차지했다. 1991년에는 19승(15선발승) 4패 6세이브, 평균자책점 1.55, 탈삼진 210개를 기록하며 3년 연속 다승왕과 4년 연속 탈삼진왕을 차지했다.

1992년에는 부상으로 11경기에만 등판하여 2승(모두 선발) 8세이브, 평균자책점 0.28을 기록했다. 1993년부터 전업 마무리 투수로 전환하여 10승(모두 구원) 3패 31세이브, 평균자책점 0.78을 기록하며 세이브왕을 차지했다. 1994년에는 부상으로 27경기에 출전하여 6승(5선발) 4패 12세이브, 평균자책점 2.73을 기록했다. 1995년에는 5승(모두 구원) 3패 33세이브, 평균자책점 0.49를 기록하며 다시 한번 세이브왕을 차지했다.

선동열은 KBO 리그 통산 최저 평균자책점(1.20), 최저 WHIP(0.80), 최다 완봉승(29회) 등 투수 부문 주요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또한, 통산 1,647이닝 동안 146승 40패 132세이브, 1,698탈삼진을 기록했다.

7. 2. 일본 프로야구

선동열은 일본 프로 야구에서 통산 10승 4패 98세이브를 기록하여 개인 통산 세이브 부문 24위에 올랐다. 1999년에는 주니치 드래건스 소속으로 팀의 정규 시즌 우승에 기여했고, 그 해 외국인 세이브 부문 1위를 차지했다. 1997년에는 1승 38세이브(당시 일본 신기록)를 기록하며 구원 2위, 세이브 성공률 1위를 기록했다.

일본 프로 야구 첫 등판은 1996년 4월 5일 히로시마 도요 카프와의 1차전(히로시마 시민구장)에서 9회말 2번째 투수로 구원 등판하여 2이닝 1실점을 기록한 것이다. 같은 경기 9회말에 에토우 사토시를 상대로 첫 삼진을 잡았다. 첫 세이브는 1996년 4월 7일 히로시마 도요 카프와의 3차전(히로시마 시민구장)에서 9회말 7번째 투수로 구원 등판하여 1이닝 무실점으로 경기를 마무리하며 달성했다. 첫 승리는 1996년 4월 16일 요미우리 자이언츠와의 1차전(도쿄 돔)에서 8회말 2번째 투수로 구원 등판하여 2이닝 3실점을 기록하며 얻었다. 첫 선발 등판은 1996년 6월 6일 한신 타이거스와의 11차전(한신 고시엔 구장)이었고, 2이닝 4실점을 기록했다.

1997년에는 올스타전에 출전했다.

8. 국제대회 성적

선동열은 고려대학교 야구팀과 대한민국 국가대표팀 소속으로 여러 국제 대회에 참가하여 뛰어난 성적을 거두었다.[1]

년도개최지대회개인 기록
1981년세계 청소년 야구 선수권 대회파일:Gold medal icon.svg3승, 0.38 ERA (3경기, 24.0이닝, 1자책점, 36탈삼진)
방어율왕,MVP
1982년야구 월드컵파일:Gold medal icon.svg3승, 0.31 ERA (4경기, 29.0이닝, 1자책점, 30탈삼진)
MVP, 올스타 (P), 다승왕
1983년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파일:Gold medal icon.svg1승, 1.17 ERA (2경기, 15.1이닝, 2자책점, 3실점)
1983년대륙간컵5위방어율왕,올스타 (P)
1984년1984년 하계 올림픽4위1승 1패, 0.56 ERA (3경기, 16.0이닝, 1자책점, 10탈삼진)
1984년야구 월드컵5위1승 1패, 0.00 ERA (4경기, 17.1이닝, 0자책점, 20탈삼진)
방어율왕
1985년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파일:Silver medal icon.svg



1981년 세계 주니어 야구 선수권 대회에서 대한민국 대표팀은 미국을 꺾고 초대 챔피언에 올랐으며, 선동열은 토드 번스와 함께 MVP를 공동 수상했다.[1] 1982년 대한민국에서 개최된 야구 월드컵에서 선동열은 29이닝 동안 0.31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하며 3승을 모두 완투승으로 장식, 대표팀의 첫 우승을 이끌었다. 그는 MVP와 올스타(우완 투수)로 선정되었다.[2]

1983 인터컨티넨탈컵에서는 2경기 완봉승을 포함해 3승을 거두며 최우수 투수로 선정되었다.[1] 1984년 하계 올림픽에서는 1승 1패, 0.56의 평균자책점, 10탈삼진을 기록했고, 같은 해 야구 월드컵에서는 17.1이닝 동안 평균자책점 0.00으로 이 부문 1위를 차지했다.

9. 가족 관계

아버지 선판규(1921년~2006년)와 어머니 김금덕(1931년~1996년) 사이에서 태어났다. 큰누나 선숙자, 작은누나 선선자, 형 선형주(1957년~1974년)가 있다. 배우자는 김현미(1965년~)이며, 아들 선민우(1990년~)와 선민정(1992년~)을 두고 있다.

10. 선동열이 등장한 작품


2011년 영화 《퍼펙트 게임》에서 양동근이 선동열 역을, 조승우최동원 역을 맡았다.

참조

[1] 뉴스 School Spirit May Be Metaphysical for South Korean Baseball Players https://www.nytimes.[...] New York Times 2015-10-02
[2] 뉴스 Coach Sun Dong-yeol Confident of Victory Over Taiwan http://english.donga[...] The Dong-a Ilbo 2007-12-01
[3] 뉴스 宣銅烈コーチ「台湾戦で必ず勝利する」 北京五輪アジア予選 http://japanese.dong[...] 東亜日報 2007-11-29
[4] 간행물 이름, 바로 쓰고 바로 부르기 http://www.korean.go[...] 국립국어원
[5] Youtube 야구부장의 크보 핵인싸 '양키스 선동열' 통했을까? https://www.youtube.[...] 스포츠조선
[6] 간행물 null ベースボールマガジン 2011-11
[7] 뉴스 【ソウル20日末次秀行】宣投手 中日入り発表 null 中日新聞社 1995-12-20
[8] 뉴스 竜投 スーパー守護神 宣銅烈の中日入り プロ野球国際化へ風穴 野茂の活躍、バネ「宣投手と一問一答 中日に好感 30セーブ自信」「豪球抑え 宣に“四宝” 背筋 遠投調整 漢方薬 光州の魂 中日の勢い復活か」「英雄から名将へ 韓国球界夢を託す」「『待つのつらかった』球団社長 巨人『理解しかねる』」「【ソウル20日末次秀行】ファクスで発表」 中日新聞社 1995-12-21
[9] 뉴스 新世界事情 広がる白球版図 韓国 実力に自信 純血と決別 中日新聞社 1997-04-25
[10] 뉴스 スポーツニッポン 1995-12-16
[11] 뉴스 スポーツニッポン 1995-12-20
[12] 뉴스 【ソウル23日末次秀行】中日、ヘテと宣移籍契約 年俸1億 契約金5000万 1月上旬に来日 キャンプ2月参加 中日新聞社 1995-12-24
[13] 뉴스 【ソウル20日末次秀行】宣投手 中日入り決定 韓国球界スター 年俸など4億5000万円 中日新聞社 1995-12-21
[14] 뉴스 武田獲り ダイエー参戦 星野監督、王監督激突 『絶対あきらめん』出血覚悟で大勝負に 中日新聞社 1995-11-15
[15] 뉴스 武田、念願の中日入りならず 星野監督に励まされた 新天地で頑張れ 機会あったら一緒にやろう 中日新聞社 1995-11-17
[16] 뉴스 【ソウル20日末次秀行】宣投手に背番号「20番」贈る 星野監督ごきげん「Vの使者だ 喜ぶドラファン」 中日新聞社 1995-12-21
[17] 뉴스 【ソウル26日時事】ヘテ球団幹部更迭 宣の巨人入団示唆で引責か 中日新聞社 1995-12-27
[18] 웹사이트 どん底から復活。星野中日11年ぶりVに貢献した韓国の至宝・宣銅烈の野球人生/平成助っ人賛歌【プロ野球死亡遊戯】 https://column.sp.ba[...]
[19] null null
[20] 뉴스 中日・宣投手が引退 http://www.asahi.com[...]
[21] 뉴스 【WBC】イチローにぶつけた裴英洙が「烈士」扱い? http://www.chosunonl[...] 2006-03-11
[22] 뉴스 <野球>三星の宣銅烈監督が電撃辞任 https://japanese.joi[...] 2010-12-30
[23] 뉴스 KBO, 국가대표팀 전임감독에 선동열 전 WBC대표팀 투수코치 선임 http://www.koreabase[...] 2017-07-24
[24] 뉴스 [사진]선동열 감독,"야구대표팀 감독직에서 사퇴하겠습니다" https://www.koreabas[...] 2018-11-14
[25] 웹사이트 落合博満が「すごい投手を見た」と脱帽 「韓国の至宝」と呼ばれた親日家の剛腕は https://column.sp.ba[...] 2020-12-06
[26] Youtube 通算755試合登板 鉄腕リリーバー鹿取義隆 天性の柔らかさが生んだ投球術 【ピッチャーズバイブル】 フルタの方程式【古田敦也 公式チャンネル】 https://www.youtube.[...]
[27] 웹사이트 野球とと政治の衝突…「名古屋の太陽」宣銅烈氏が国政監査の証人に(1) https://s.japanese.j[...] 中央日報 2019-08-28
[28] 웹사이트 韓国代表 宣銅烈監督OA枠使わず 元中日・李鐘範の息子に注目 https://www.sponichi[...] スポニチ 2019-08-28
[29] 웹사이트 日本に慣れるな!阪神の新守護神・呉昇桓、157キロ「石直球」熟成に集中せよ https://www.iza.ne.j[...] サンスポ 2019-08-28
[30] 뉴스 宣銅烈「冷ややかさに耐えた李承燁」中央日報 https://japanese.joi[...]
[31] 뉴스 '95回顧取材余話 宣銅烈の故郷 軍靴に涙 反骨の光州 中日新聞社 1995-12-23
[32] 웹사이트 5.18 그때 광주에는 선동열이 있었다 https://www.pressian[...] www.pressian.com 2015-05-18
[33] 웹사이트 http://beijing2008.n[...]
[34] 서적 アジオン・ラヴァーズ 大村書店 1996-12
[35] 뉴스 宣銅烈, 3경기 연속 구원승 http://sports.news.n[...] 연합뉴스 2017-01-11
[36] 뉴스 <프로야구> 프로야구 해외진출사에 큰 획 https://sports.news.[...] 연합뉴스 2021-08-19
[37] 뉴스 선동열, 은퇴 공식 선언 http://sports.news.n[...] 연합뉴스
[38] 뉴스 프로야구 두산, 선동열 영입 포기 http://sports.news.n[...] 연합뉴스
[39] 뉴스 두산, 김경문 신임 감독과 계약 http://sports.news.n[...] 연합뉴스
[40] 뉴스 선동열, 삼성 투수코치 계약 http://sports.news.n[...] 연합뉴스
[41] 뉴스 '좋은 성적 내고도 경질된 프로야구 감독' 역대 베스트 5 http://sports.news.n[...] 스포츠조선
[42] 뉴스 선동열 안치홍 사태 후폭풍, 감독 재계약 6일만에 사퇴..임의탈퇴 협박? http://entertain.nav[...] 서울신문
[43] 뉴스 선동열 감독, 오지환 때문에 국정감사 불려가나? http://news.mk.co.kr[...] 매일경제 2018-09-28
[44] 뉴스 '특급 쌕쌕이' 이종범, 과자-앨범 제작 에피소드 공개! http://artsnews.medi[...] 아츠뉴스 2009-11-26
[45] 일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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