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종 (고려 3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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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정종은 고려의 제3대 왕으로, 태조 왕건의 셋째 아들이자 신명순성왕후의 아들이다. 혜종 사후 왕규의 난을 진압하고 즉위했으나, 개경 귀족들의 지지를 얻지 못했다. 서경 천도를 추진했으나 실패하고, 왕권 강화를 위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불안감 속에 재위 4년 만에 광종에게 양위하고 사망했다. 그의 치세 동안 불교를 지원하고 광군사를 조직하는 등 군사력 강화에도 힘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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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종 (고려 3대)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이름 | 정종 |
한자 표기 | 定宗 |
로마자 표기 | Jeongjong |
즉위명 | 문명대왕 (文明大王) |
로마자 표기 (즉위명) | Munmyeong Daewang |
휘 | 왕요 (王堯) |
로마자 표기 (휘) | Wang Yo |
자 | 천의 (天義) |
로마자 표기 (자) | Cheonui |
왕위 | |
왕조 | 고려 |
대수 | 제3대 국왕 |
재위 기간 | 945년 10월 23일 ~ 949년 4월 13일 |
즉위 | 945년, 개성 |
선대 국왕 | 혜종 |
후대 국왕 | 광종 |
생애 | |
출생 | 923년, 개성, 후삼국 시대 |
사망 | 949년 4월 13일 (25세 ~ 26세), 개경 제석원 |
가족 관계 | |
부왕 | 태조 |
모후 | 신명순성왕후 |
왕후 | 문공왕후 문성왕후 |
후궁 | 청주남원부인 |
자녀 | 경춘원군 공주 (이름 미상) |
묘호 및 시호 | |
묘호 | 정종 (定宗) |
시호 (원래) | 지덕장경정숙문명대왕 (至德章敬正肅文明大王) |
시호 (최종) | 장원간경영인정숙장경문명대왕 (莊元簡敬令仁正肅章敬文明大王) |
기타 | |
능묘 | 안릉 |
종교 | 불교 |
2. 생애
정종은 이복형 혜종이 사망한 후 왕위에 올랐으며, 왕규와 박술희 등 왕실 외척 세력의 권력을 줄이려 했다. 그러나 개성 엘리트들의 지지를 받지 못해 왕권 강화에 어려움을 겪었다.[1]
946년, 왕실 창고에서 의 곡식을 내어 불교를 지원했다. 947년에는 평양을 서경으로 삼고 요새를 건설했다. 정종은 태조가 바라던 대로 개성에서 평양으로 수도를 옮기려 했으나, 고구려의 옛 영토를 회복하려면 수도를 북쪽으로 더 옮겨야 한다는 그의 믿음과는 달리[1] 개성 귀족들의 반대로 성공하지 못했다.[2]
정종은 궁궐 내 암살 음모를 의심하여 편집증에 시달렸고, 정신이상 증세를 보였다. 재위 4년 만에 아들 대신 넷째 왕자 왕소를 후계자로 임명하는 칙서에 서명한 직후 사망했다.
2. 1. 즉위 전
정종은 태조 왕건의 셋째 아들이자 신명순성왕후의 차남이었다. 신명순성왕후는 충주의 유력 호족 유긍달의 딸로, 태조 왕건에게서 태자 태, 왕자 요, 왕자 소 등의 3남을 낳았으나 왕위계승권에서 밀렸고, 태자 태는 일찍 요절하였다.혜종 집권 시기에 왕위를 엿보았다. 945년 혜종의 측근 박술희를 제거하고, 왕규의 난을 진압하였다. 박술희를 강화도로 유배보낸 뒤 사살했고, 같은 해 9월 왕요는 왕식렴에게 왕규의 역모를 대비하라고 지시했다.[3]
왕규가 외손자를 왕위에 앉히려 하자, 정종은 서경의 왕식렴을 불러들여 대책을 세웠다.[3] 정종은 혜종 사후 왕식렴 세력을 등에 업고 왕위에 오르고자 했다. 왕식렴은 왕평달의 아들이며 태조의 종친이다. 태조 원년에 서경 (평양) 진수의 책임을 지고 945년까지 27년간 그 임무를 담당했다.[3]
왕식렴은 오랜 기간 서경에서 강력한 세력을 구축했다. 정종은 자신의 힘만으로는 왕위 계승이 힘들다고 판단,[3] 왕식렴을 개경으로 불렀다. 왕식렴이 군대를 거느리고 개경에 들어오자 왕규는 힘을 쓰지 못하였다.[4]
혜종이 병으로 눕자 왕식렴과 함께 왕규의 난을 진압하였다.[5] 왕규의 난은 혜종 지지파 왕규와 정종·광종 지지파이자 서경 귀족인 왕식렴 세력 간의 정쟁으로 보기도 한다. 곧이어 혜종이 병사하였다.
2. 1. 1. 생애 초반
정종은 태조 왕건의 셋째 아들이자 신명순성왕후의 차남이었다. 신명순성왕후는 충주의 유력 호족 유긍달의 딸이었다. 신명순성왕후는 태조 왕건에게서 태자 태, 왕자 요, 왕자 소 등의 3남을 낳았으나 왕위계승권에서 밀렸고, 태자 태는 일찍 요절하였다.혜종이 집권하던 시기에 왕위를 엿보았다. 945년 혜종의 측근이었던 박술희를 제거하고, 동시에 거병한 왕규의 난을 진압하였다.
2. 1. 2. 왕규와의 정쟁
혜종의 최측근인 박술희를 강화도로 유배보낸 뒤 사살했다. 그해 9월 왕요는 당숙 왕식렴에게 왕규의 역모를 대비하라고 지시했다.[3]왕규가 자신의 외손자를 왕위에 앉히려는 음모를 꾸미는 사이, 정종은 비밀리에 서경에 있던 왕식렴을 불러들여 대책을 세우고 있었다.[3] 정종은 혜종이 죽자 본격적으로 왕식렴 세력을 등에 업고 왕위에 오르고자 했다. 정종의 배후 세력인 왕식렴은 왕평달의 아들이며 태조의 몇 안 되는 종친이다. 그는 군부서리가 된 이래 많은 관직을 역임하였으며, 태조 원년에 서경 (평양) 진수의 책임을 지고 혜종이 사망한 945년까지 27년간 그 임무를 담당했다.[3]
왕식렴은 오랜 기간 서경에 있으면서 강력한 세력기반을 쌓고 있었다. 자신의 힘만으로는 왕위 계승이 힘들다고 판단한 정종은[3] 왕식렴의 세력을 끌어들이고자 하였다.[4] 정종은 서경에 있는 왕식렴을 개경으로 불러들였다. 왕식렴이 군대를 거느리고 개경에 들어오자 왕규는 힘을 쓰지 못하였다.[4]
혜종이 병으로 누웠을 때 왕식렴과 함께 왕규의 난을 진압하였다.[5] 그러나 왕규의 난에 관해서는 혜종 지지파였던 왕규와 정종·광종 지지파이자 서경 귀족인 왕식렴 세력 간의 정쟁으로 간주하기도 한다. 곧이어 혜종 역시 병사하였다.
2. 2. 즉위
혜종이 사망한 후 정종이 왕위에 올랐다. 정종은 왕규, 박술희 등 왕실 외척들의 권력을 줄이려 했으나, 개성 엘리트들의 지지를 받지 못해 왕권 강화에 어려움을 겪었다.946년, 왕실 창고에서 의 곡식을 내어 불교를 지원했다. 947년에는 평양에 요새를 건설하고 서경으로 삼았다. 고구려의 옛 영토를 회복하기 위해 수도를 평양으로 옮기려 했으나, 개성 귀족들의 반대로 성공하지 못했다.[1][2]
정종은 궁궐 내 암살 음모를 의심하여 편집증에 시달렸고, 재위 4년 만에 왕소를 후계자로 임명하는 칙서에 서명한 직후 사망했다.
2. 2. 1. 즉위 초
945년 즉위 직후 왕식렴을 시켜 왕규를 사살하였다. 정종은 즉위 후 반란 진압의 공을 치하하여 왕식렴에게 광국익찬공신(匡國翊贊功臣)을 서훈하고,[6] 대승(大丞)을 덧붙였다.946년 초, 정종은 재계하고 현릉에 성묘하였으며, 즉위 기념으로 대사면령을 내려 죄인을 방면하였다. 또한 개국사에 불사리를 봉행하는데 동참하였고, 불교 경전 간행을 위해 사원에 불명경보와 광학보를 설치하였다. 그러나 개경 귀족들의 호응이 없자 왕식렴의 근거지였던 서경으로 천도하려 한다.
정종은 이복 형 혜종이 사망한 후 왕위에 올랐으며, 왕규와 박술희를 포함한 여러 왕실 외척들의 권력을 줄이려고 했다. 그러나 개성 엘리트들의 지지를 받지 못하여 왕권을 실질적으로 강화할 수 없었다.
946년, 왕실 창고에서 의 곡식을 사용하여 불교를 지원했다. 947년에는 평양을 국가의 서경(西京)으로 삼아 요새를 건설했다. 정종은 부친이 바라던 대로 개성에서 평양으로 수도를 옮기려 했는데, 고구려의 옛 영토를 회복하려면 수도를 북쪽으로 더 옮겨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1] 그러나 개성 귀족들의 반대에 부딪혀 성공하지 못했다.[2]
2. 2. 2. 치세와 서경 천도
정종은 임금으로 즉위하자마자 고구려의 옛 땅을 회복하고 개경의 귀족 세력들을 견제하여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서경으로 천도할 것을 천명했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는 오히려 개성 호족들과 옛 공신들의 불만을 고조시키는 결과만을 초래했다. 그는 점점 불안해 했고 친동생인 왕소마저 의심하기 시작하였다. 서경 천도를 위해 장정을 징발, 시중 권직을 보내 궁궐 영건을 감독하게 하였다. 개성의 민호(民戶)를 서경의 역부로 삼아 백성들에게 원망을 사게 되었다.[1][2]947년 봄, 대광 박수문을 보내어 덕창진에 성을 쌓게 하고, 서경성과 철옹·박릉·삼척·통덕 등의 성을 축성, 정비하게 하였다. 같은 해 후진에서 유학하다 거란에 붙잡혀 그곳에서 벼슬하던 최광윤이 고려에 사신으로 왔다가, 거란이 고려를 침입할 준비를 한다고 보고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정종은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광군(光軍)사를 조직하고 군사 30만을 양성하기도 했다.
그해 가을, 대광 박수경을 보내어 덕성진에 성을 수축했고, 거란의 사신으로 귀성에 온 최광윤에게 정종의 서신을 전달하였으며, 동시에 유사에게 명하여 군사조직인 광군사(光軍司)를 신설하였다.
정종은 이복 형제인 혜종이 사망한 후 왕위에 올랐으며, 왕규와 박술희를 포함한 여러 왕실 외척들의 권력을 줄이려고 했다. 그러나, 개성 엘리트들의 지지를 받지 못하여 왕권을 실질적으로 강화할 수 없었다.
946년에 그는 왕실 창고에서 의 곡식을 사용하여 불교를 지원했다. 947년에는 평양을 국가의 서경(西京)으로 삼고 요새를 건설했다. 정종은 부친이 바라던 대로 개성에서 평양으로 수도를 옮기려 했는데, 고구려의 옛 영토를 회복하려면 수도를 북쪽으로 더 옮겨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성에 기반을 둔 귀족들의 반대에 부딪혀 시도에 성공하지 못했다.
정종은 궁궐 안에서 자신을 죽이려는 음모가 있다고 의심하여 편집증에 시달렸고, 정신이상이 시작되었다. 재위 4년 만에, 그는 아들 대신 넷째 왕자 왕소(훗날 광종)를 왕으로 임명하는 칙서를 서명한 직후 사망했다.
2. 3. 최후
949년 3월, 자신의 죽음을 예감한 정종은 동생 왕제 소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죽었다. 정종의 능은 개성에 있는 안릉(安陵)이다.[5] 고려사에는 정종의 죽음 소식에 노역에 시달리던 서경의 일꾼들이 기뻐 날뛰었다고 기록되어 있다.정종은 궁궐 안에서 자신을 죽이려는 음모가 있다고 의심하여 편집증에 시달렸으며, 정신이상 증세를 보였다. 재위 4년 만에, 아들 대신 넷째 왕자 왕소(훗날 광종)를 왕으로 임명하는 칙서를 서명한 직후 사망했다.
2. 4. 사후
그의 죽음으로 서경으로의 천도 계획은 그의 동생 광종에 의해 즉각 백지화되었다. 정종은 자신의 사후 동생 소의 왕위 찬탈을 염려하여 소에게 왕위를 넘기고 아들 경춘원군의 목숨을 유지하려 하였다. 하지만 광종은 이후 왕족 숙청 때 경춘원군을 이복형 혜종의 아들 흥화궁군과 함께 처형시켰다.[1]3. 평가
최승로는 정종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했다.
정종은 이복 형제인 혜종이 사망한 후 왕위에 올랐으며, 왕규와 박술희를 포함한 여러 왕실 외척들의 권력을 줄이려고 했다.[1] 그러나 개성 엘리트들의 지지를 받지 못하여 왕권을 실질적으로 강화할 수 없었다.[1]
946년, 정종은 왕실 창고에서 의 곡식을 사용하여 불교를 지원했다.[1] 947년에는 평양을 국가의 서경(西京)으로 삼아 요새를 건설했다.[1] 정종은 부친 태조가 바라던 대로 개성에서 평양으로 수도를 옮기려 했는데, 고구려의 옛 영토를 회복하려면 수도를 북쪽으로 더 옮겨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1] 그러나 정종은 개성에 기반을 둔 귀족들의 반대에 부딪혀 이 시도에 성공하지 못했다.[2]
정종은 궁궐 안에서 자신을 죽이려는 음모가 있다고 의심하여 편집증에 시달렸고, 정신 이상이 시작되었다.[1] 재위 4년 만에, 정종은 아들 대신 넷째 왕자 왕소(훗날 광종)를 왕으로 임명하는 칙서를 서명한 직후 사망했다.[1]
4. 가족 관계
4. 1. 부모
- 아버지: 고려 태조 (877년 1월 31일 ~ 943년 7월 4일)
- 어머니: 충주 유씨 신명순성왕후
4. 2. 왕후
시호 | 본관 | 생몰년 | 부모 | 비고 |
---|---|---|---|---|
문공왕후 박씨 | 순천 | 미상 | 박영규 국대부인 견씨 | 견훤의 외손녀 태조 비 동산원부인의 동생 |
문성왕후 박씨 | 순천 | 미상 | 박영규 국대부인 견씨 | 견훤의 외손녀 태조 비 동산원부인의 동생 |
청주 김씨 청주남원부인 | 청주 | 미상 | 김긍률 | 혜종의 비 청주원부인 김씨와 자매 |
문공왕후와 문성왕후는 모두 박영규의 딸이며, 태조의 제17비인 동산원부인과 자매이다. 문성왕후는 경춘원군과 왕씨 공주를 낳았다. 청주남원부인은 혜종의 비 청주원부인 김씨와 자매간이다.
4. 3. 후궁
부인 | 본관 | 비고 |
---|---|---|
문공왕후 | 순천 | 박영규의 딸. 태조 제17비 동산원부인과 자매. 소생 없음. |
문성왕후 | 순천 | 박영규의 딸. 태조 제17비 동산원부인과 자매. |
청주남원부인 | 청주 | 김긍률의 딸. 혜종의 비 청주원부인과 자매. 소생 없음. |
4. 4. 왕자
정종한국어은 아들 경춘원군과 딸 왕씨 공주를 두었다.
4. 5. 왕녀
문성왕후 박씨의 소생 왕녀는 작호가 소실되었으며, 효성태자와 혼인하였다.[7]5. 대중문화
참조
[1]
뉴스
고려 정종과 서경 천도
https://world.kbs.co[...]
2014-11-15
[2]
뉴스
고려 정종과 서경 천도
https://world.kbs.co[...]
2014-11-15
[3]
서적
고려왕조사 이야기
청아출판사
2007
[4]
서적
고려왕조사 이야기
청아출판사
2007
[5]
서적
고려명신전
성남 문화원
2004
[6]
서적
고려명신전
성남 문화원
2004
[7]
문서
태조의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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