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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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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견훤은 황간 견씨의 시조이자 아자개의 아들로, 신라의 장군으로 활약하다가 892년 반란을 일으켜 후백제를 건국했다. 완산주(전주)에 도읍을 정하고 스스로 왕을 칭하며 당나라와 외교 관계를 맺고 세력을 확장했으나, 고려 태조 왕건과의 대립에서 점차 세력이 약화되었다. 935년 아들 신검의 반란으로 금산사에 유폐되었다가 고려로 투항하여 상부의 칭호를 받았고, 이듬해 후백제가 멸망한 후 황산사에서 사망했다. 고려 시대에는 부정적인 평가를 받았으나, 현대에는 신라에 부정적인 사람들에게 긍정적인 평가를 받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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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훤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 (한글)견훤
이름 (한자)甄萱
다른 이름 (한글)진훤
다른 이름 (한자)眞萱
로마자 표기Gyeon Hwon
로마자 표기 (다른 이름)Jin Hwon
출생867년
출생지신라 사벌주 가은현
사망일936년 9월 27일 (음력 9월 9일) (약 69세)
사망지고려 웅천주 황산
매장지논산시
능묘덕은군 견훤릉
왕조견씨 (황간 견씨)
아버지아자개
어머니상원부인
종교불교
왕위
왕국후백제
즉위892년 ~ 935년
대관식900년
이전 통치자왕조 창건
이후 통치자견신검
연호정개 (正開)
연호 기간900년 ~ 935년
가족 관계
배우자박왕후
고비(古比)
자녀견신검
양검
용검
견씨
국대부인
애복
금강
능예
정치
섭정최승우(910년~912년)
금강(932년)
견신검(935년)

2. 생애

甄萱중국어867년 상주 (尙州) 가은현(지금의 문경시 가은읍)에서 아자개의 아들로 태어났다. 성장하여 군에 들어가 서남해 방면에서 신라군의 지휘관이 되었다.[8] 공을 세워 비장(裨將)이 되었으며,[12] 신라가 혼란한 틈을 타 892년(진성여왕 6년)에 반란을 일으켰다.

열흘 만에 5천 명의 병력이 모였고, 무진주(武珍州, 지금의 광주광역시)를 점령하여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했다.[8] 900년에는 완산주(完山州, 전주시)에 입성하여 스스로 후백제 왕을 칭하고, 과 외교 관계를 맺으며[1] 궁예후고구려와 대립하였다.

910년, 왕건이 나주를 점령하자, 견훤은 나주를 되찾으려 했으나 실패했다.[5] 918년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자, 오월과 외교 관계를 맺고[9] 고려와 대립하며 세력을 확장했다.

926년에는 신라의 수도 경주를 함락시키고 경애왕을 살해했으며, 경순왕을 옹립했다. 이 과정에서 경애왕의 왕비를 능욕하는 등 난행을 저질러 신라인들의 원한을 샀다.

929년, 고창에서 왕건의 군대에 패배한 후 점차 세력이 기울었다. 935년에는 장남 신검에 의해 금산사에 유폐되었다가 탈출하여 왕건에게 투항했다. 936년, 왕건에게 신검 토벌을 요청하여 후백제를 멸망시킨 후 황산의 절에서 등창으로 사망했다.

2. 1. 출생 및 가계

甄萱중국어867년 상주 (尙州) 가은현(지금의 문경시 가은읍)에서 태어났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견훤의 아버지 아자개는 원래 농사를 지으며 살았으나 광계(光啓) 연간(885년~887년)에 집안을 일으켜 장군을 칭했다고 한다. 견훤은 원래 이씨(李氏)였으나 후에 견씨(甄氏)로 고쳤다고 한다.[1]

삼국유사》는 아자개에 대해 《이제가기》를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지만, 이러한 계보에 대해서는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아자개는 신라 말 혼란기에 나타난 호족의 일원으로, 6촌성(혹은 경주 이씨) 출신으로 추정된다.[13]

삼국사기》는 견훤의 어린 시절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견훤이 아기였을 때, 아버지가 들에 나가 밭을 갈고 어머니가 식사를 가져다 주려고 견훤을 나무 아래 잠시 두었는데, 그 사이 범이 나타나 젖을 먹였다고 한다. 또한 자라면서 체격과 용모가 웅대하고 빼어났으며, 뜻과 기상이 활달하여 범상치 않았다고 한다. 비록 고려 태조 왕건의 적이었기에 부정적으로 묘사되었지만, 영웅적인 면모를 엿볼 수 있다. 《제왕운기》에는 "새가 와서 덮어주고 범이 와서 젖을 먹였다"는 기록이 있으며, 실제로 견훤이 태어났을 때 온갖 날짐승이 몇 년에 걸쳐 아이를 보호했다는 전설도 전한다.[12] 견훤이 태어난 상주 가은현은 지금의 경상북도 문경시 가은읍 갈전 2리 아차(아채) 마을로, 문경에는 견훤과 관련된 설화가 많이 남아 있다.

견훤은 원래 이씨 성을 가지고 태어났지만, 나중에 견씨로 바꾸었다.[1] 이는 후백제 건국 후 새로운 시작을 위한 것으로 추정된다. 견훤은 황간 견씨의 시조이며, 아들 신검, 양검, 용검, 금강은 견(혹은 진)씨 성을 사용했다.

견훤의 어머니는 광주광역시 출신이었으나, 정확한 신원은 알려져 있지 않다.[3] 아자개는 상원부인과 남원부인 두 명의 부인을 두었는데, 견훤은 첫 번째 부인에게서 태어났다.[4][5] 전설에 따르면, 그의 어머니는 광주 출신이며, 남자로 변장한 지렁이와 신체적 접촉을 한 후 첫 아들을 낳았고, 견훤은 호랑이 젖을 먹고 자랐다고 한다.

진성여왕 시기 신라 조정은 부패와 정치적 혼란에 휩싸였다. 기근이 전국을 휩쓸었고, 많은 사람들이 반란군에 가담했다. 촌장과 군사 세력이 등장하여 전국에 권력 기반을 만들었다. 정부는 강압적인 과세 계획을 시행하려 했으나, 도적, 지방 귀족, 반란 지도자들의 저항에 직면했다. 이 시기에 견훤의 아버지 아자개는 지방 농민 반란을 이끌고 상주시에 근거지를 마련했다.[5][6][7]

2. 2. 신라의 장군

견훤은 장성하여 군대를 따라 왕경(王京)에 들어갔고, 서남해(西南海)의 방수(防戍)에 배정되었다. 《삼국사기》는 견훤이 서남해에서 군 생활을 할 때의 모습을 "잘 때도 창을 베고 적을 대비했다. 그의 용기는 항상 다른 신라 병사들을 앞섰으므로."라고 적었고, 이후 "이러한 공로로 비장(裨將)이 되었다."고 적어서 그가 서남해에서 신라군 생활을 했을 때 장군의 자질을 보였다고 인정했고, 또 실제 전투에서도 공로를 세웠음을 간접적으로 인정했다.[12]

견훤이 임명된 신라의 '비장'이라는 지위에 대해서는 전통적으로 장군의 보좌관을 가리키는 것으로 여겨져 왔지만, 단순히 보좌관을 가리킨다기보다는 장군 예하의 부장(副將)이나 장군 자체를 가리키는 것이라고도 한다. 견훤이 복무한 서남해에 대해서도, 견훤이 처음 반란했을 때 무진주 동남쪽의 군현이 일제히 그에게 항복하여 따랐다는 기록이나, 견훤 자신의 측근 세력이자 혼인 관계까지 맺은 인척이었던 무진주(武珍州) 성주 지훤(池萱)과 순천 출신 박영규, 그리고 인가별감(引駕別監) 김총(金摠) 등이 모두 전라도 광주와 순천 지역 출신이었다는 점을 감안해보면 대체로 순천과 여수를 중심으로 하는 전라남도 지역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순천은 신라 시대에는 승평(昇平)이라고도 불리며 남단 내륙 교통의 요충지이자 대중국 교역의 주요 항로였으며, 광주 및 나주, 목포 지역과 지금의 경상남도 연안을 연결하는 위치로 무진주(지금의 광주광역시)에서 왕경인 서라벌(지금의 경주시)로 가기 위해 통과해야 하는 땅이기도 했다.[12]

견훤은 15세에 집을 떠나 신라 군에 입대하여 전라 지역 신라군의 지휘관이 되었다고 전해진다.[8]

2. 3. 후백제 건국

892년(진성여왕 6년), 신라에서 원종과 애노의 난이 일어나자, 견훤은 이 난을 진압한다는 명분으로 군사적 독립을 이루었다. 열흘 만에 5천 명의 병력이 모였고, 무진주를 점령하여 독자적인 정부 체제를 수립하였다.[8] 견훤은 스스로 왕이라 칭하지 않고 '신라 서면도통지휘병마제치 지절도독전무공등주군사 행전주자사 겸 어사중승 상주국 한남군개국공 식읍이천호'라는 긴 직함을 사용했다. 이는 당시 신라의 혼란한 상황에서 섣불리 왕을 칭하기보다 실질적인 권력을 확보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견훤은 중국 강남의 오월과 외교 관계를 맺으며 국제적인 인정을 받으려 노력했다.[9] 900년에는 완산주를 수도로 정하고 스스로 후백제 왕을 칭하며, 과도 외교 관계를 맺었다.[1] 이후 후고구려궁예와 대립하며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

2. 4. 후백제의 발전과 대외 관계

910년, 궁예가 세운 태봉의 장수였던 왕건이 견훤이 반란을 일으킨 나주를 공격하여 점령하자, 견훤은 왕건에게서 나주를 되찾으려 했으나 실패했다.[5]

918년, 공포 정치를 펼치던 궁예는 자신의 군대 지휘관들에게 폐위당하고 살해되었다. 그의 장수이자 최고 재상이었던 왕건이 새로운 군주로 추대되어 고려가 시작되었다.[10]

920년, 견훤은 다시 대규모 원정군을 합천에 보내 마침내 이 지역을 점령했고, 경명왕은 고려와 동맹을 맺게 되었다. 그 후 그는 현재의 안동 지역을 침공했으나, 그의 군대는 현지 신라군에게 패배했다. 견훤은 이 전투 이후 고려와 화친을 맺기 위해 왕족을 인질로 교환했다. 그러나 그의 조카 진호가 죽자, 그는 고려 인질이었던 왕건의 사촌 왕신을 죽이고 고려와의 전쟁을 재개했다.[5]

927년, 견훤은 직접 군대를 이끌고 신라의 수도 경주를 공격했다. 경애왕은 이 공격에 대비하지 못했고, 후백제군의 포로가 되는 대신 자결했다. 견훤은 김부(이후 경순왕)를 다음 신라 왕으로 옹립했다. 돌아가는 길에 그는 왕건이 이끄는 군대와 마주쳤고, 고려군을 손쉽게 격파하여 왕건의 많은 저명한 장군과 전사들을 죽였다. 왕건은 장수 신숭겸김낙의 과감한 희생으로 간신히 탈출했다. 1년 후 그는 신라로부터 진주를 점령했다.[5]

견훤은 그의 경쟁자 궁예와는 달리 외교에 적극적이었다. 그는 오월후당으로부터 후백제의 정당한 통치자로 공식 인정받았다. 게다가 그는 북쪽에서 새롭게 부상한 요나라와 동맹을 맺으려 했다. 요나라는 거란족에 의해 건국되었으며, 이는 고려를 남북으로 포위하려는 의도였다. 견훤은 또한 통치 기간 동안 주로 상업적인 이유로 헤이안 시대의 일본에 사절을 파견했다. 견훤이 왕국을 세운 전라도 지역은 당시 동아시아 무역의 중심지였으며, 이미 장보고와 같은 상인들의 기반이 되었다.[5]

2. 5. 고려와의 전쟁

903년, 태봉의 해군 기습에 의해 금성(錦城, 나주) 일대의 10여 군현을 빼앗겼다. 하지만 이도학은 저서 '궁예, 진훤, 왕건과 열정의 시대'에서 이 사실에 의문을 제기했다. 정말로 왕건이 903년에 나주 지역을 점령했으면 어째서 견훤이 6년간 탈환을 시도하지 않다가 왕건이 909년에 다시 나주를 칠 수 있냐는 것이다. 이에 대해 박종기는 '고려사의 재발견'에서 왕건이 903년에 나주를 점령했지만 중간에 견훤이 다시 탈환해 왕건이 909년 나주를 재점령한 것으로 보고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의 궁예편과 왕건편에서는 명확한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궁예편에서는 909년, 왕건편에서는 903년으로 다르게 표기했다.

906년에는 상주 사화진 일대에서 궁예의 명을 받고 정기장군(精騎將軍) 검식(黔式) 등을 거느리고 온 왕건과 여러 차례 싸운 끝에 결국 패했다. 하지만 907년 견훤은 일선군 이남의 10여 성을 장악하였다. 나주 지역을 태봉에게 빼앗겼다는 것은 후방이 노출되어 태봉과 신라 방면으로 세력을 확장하기 어렵다는 것 외에, 태봉에게 충청남도 북부 지역과 나주 지역을 통한 대규모 동시 협공을 받을 수 있다는 최악의 상황을 초래할 수 있었다. 또한, 바다를 통해 중국과 외교 교섭과 무역을 하고, 더 나아가 중국과 일본 사이의 중계 무역으로 큰 이익을 얻고 있는 후백제로서는 중국과의 외교 및 무역 거래, 나아가 중국과 일본과의 중계 무역까지 무산될 수 있다는 것은 국가 존망이 걸린 중대한 문제였다. 실제로 909년 영광군 염해현(鹽海縣) 앞바다에서 견훤이 오월에 보내는 선박이 왕건에게 나포되어 후백제의 사신은 물론 가지고 있던 물건들까지 모두 빼앗기기도 했다.[14] 나아가 왕건이 이끄는 2,500여 명의 수군은 진도를 지나 고이도를 장악하였다. 이어 덕진포에서 왕건의 화공에 패하고 견훤 자신은 작은 배를 타고 겨우 도주하였다고 한다. 이후 왕건은 궁예의 명을 받고 나주를 거쳐 무진주로 진격했지만, 견훤의 지원을 받는 견훤의 사위 지훤의 필사적인 방어에 패해 물러나야 했다. 몽탄(夢灘)면의 지명 유래에서 알 수 있듯이 왕건은 '나주 공략'에서 이겼다고는 해도 역사서들과는 달리 견훤과 싸우면서 고전했음을 알 수 있다.

909년부터 910년까지 견훤은 나주를 놓고 마진(摩震)과 육지에서, 그리고 바다에서 치열한 공방전을 펼쳤는데, 910년에는 견훤 자신이 몸소 보병과 기병 3천을 거느리고 열흘 동안 나주를 포위 공격했으나 궁예가 지원군을 보내는 바람에 패배했다.

912년 덕진포(德津浦)에서 왕건을 대동하고 해군을 이끌고 친정한 궁예와 견훤이 해전을 벌여 궁예에게 패했다고 선각국사비(형미의 비석)에 나와 있고, 현재 학계의 유력한 학설로 떠오르고 있다.[15] 궁예와 왕건의 나주 지역 점령은 고려 및 조선 시대는 물론이고, 현대의 한국 역사학자들에게서 왕건의 고려 통일의 초석을 다진 사건으로 대단히 높게 평가받고 있으나, 이후의 태봉, 고려와 후백제의 쟁패 과정을 보면 그 효과는 상당히 제한적이었다. 후백제가 가장 두려워하는 충청남도 북부 지역과 나주 지역을 통한 대규모 동시 협공은 없었고, 해상 봉쇄를 통한 후백제의 외교적, 경제적 고립 및 충청남도 북부 지역과 나주 지역을 통한 대규모 동시 협공 우려를 견훤에게 심어줘 후백제의 신라 및 후고구려 진출을 억제해 국력을 확장하지 못하게 하는 효과 외에, 기존 후백제의 국력을 쇠퇴시키는데 실패했다.

왕건고려 건국 이후, 후백제는 궁예 시절과는 달리 중국과의 자유로운 교역에 성공했고, 심지어 중국뿐만 아니라 북방의 거란과도 자유롭게 교역을 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는 나주 지역 점령의 가장 중대한 목적 중 하나였던 후백제의 외교적, 경제적 고립이라는 목표 달성에 실패했음을 보여준다. 여전히 나주 지역을 고려에 빼앗겼는데도 불구하고 궁예 시절보다 국력이 강해져서 신라 지역으로 활발히 진출해 경주까지 함락시켰고, 이후 신라를 구원하기 위해 출정한 왕건의 친정군까지 927년 팔공산 전투에서 전멸시켰다. 929년 후백제가 나주 지역을 탈환했음에도 불구하고, 고려는 930년 고창(지금의 안동)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어 후삼국 통일 전쟁에서 결정적인 우위를 보였고, 후백제는 나주를 수복했음에도 불구하고 고창 전투 대패 이후 급속도로 몰락하기 시작했다. 고려는 929년에 나주를 후백제에 빼앗겼는데도, 935년 왕건의 명을 받은 유금필이 신검의 쿠데타로 금산사에 유폐되어 있던 견훤을 구출해 고려로 데려오기 위해 나주 지역을 공격해 탈환하기 전까지 6년 동안 나주 지역 탈환 시도를 하지 않았다. 936년, 왕건이 견훤을 대동하고 고려의 국력을 총동원해 신라의 낙동강 지역을 통한 최후의 후백제 공격 때 1년 전에 점령한 나주 지역을 이용해 낙동강 지역과의 대규모 동시 협공 공격을 시도하지 않은 점 등으로 봐서 궁예와 왕건의 나주 지역 점령의 군사적, 경제적 효과는 상당히 제한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918년 6월 태봉(泰封)에서 궁예가 쫓겨나고 왕건이 즉위하여 고려(高麗)를 건국하자, 견훤은 일길찬 민합(閔合)을 보내 축하하고 공작 깃털로 만든 부채와 지리산 대나무로 만든 화살을 왕건에게 선물로 보냈다. 한편으로 오월에도 즉각 사신을 보내 말을 바쳤고, 오월은 답례로 견훤에게 중대부(中大夫)의 벼슬을 더해주었다. 궁예 휘하의 이흔암이 지키고 있던 웅주(熊州)는 이흔암이 철원(鐵圓)으로 상경한 사이 운주(運州) 등 10여 개 주현과 함께 후백제에 귀부하였다. 9월에는 상주의 아자개(阿慈蓋)가 왕건에게 항복하고 있다.[16]

920년 9월, 견훤은 아찬 공달(功達)을 고려에 보내 공작 깃털로 만든 부채와 지리산 대나무 화살을 바치며 우호적인 제스처를 취했다. 10월에는 1만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신라를 공격하여 오랜 숙원이었던 대야성 공략에 성공한다. 과거 대야성을 공격했다가 패배한 지 19년 만이었다. 대야성은 중요한 요충지로, 후백제군은 대야성을 빼앗음으로써 신라 본토를 습격할 수 있는 길을 열게 된 것이다. 견훤은 승세를 타고 구사성(仇史城)까지 함락시켰고, 진례성까지 공격하려 하였으나 신라 왕의 구원 요청을 받은 왕건이 군사를 움직이자 물러났다. 고려사 박수경 열전을 보면 이때의 고려 지휘관은 박수경으로 추정되며, 박수경 열전에는 왕건의 명령을 받아 신라로 간 박수경이 거듭해서 견훤군을 패배시켰다고 적고 있어 이때 견훤군은 박수경에게 패해 물러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견훤은 왕건의 쿠데타에 동조하지 않는 고려의 혼란을 이용하여 웅진(오늘날의 공주)까지 진출했다. 삼국사기에서는 이를 두고 견훤이 겉으로는 왕건과 화친하였으나 속뜻은 완전히 달랐다고 비판하였다.

921년 여름, 도선의 제자인 동진대사 경보(慶甫)가 중국에서 유학을 마치고 후백제의 수도 완산에서 멀지 않은 임피군에 도착했고, 견훤은 경보를 맞아들여 남복선원(南福禪院)으로 올 것을 청했다가 다시 경보가 스승의 옛 거처인 백계산 옥룡사로 가는 것을 허락하였다. 이 해 말에 후백제의 궁창과 명권이 고려로 투항하고 있다.

924년 7월, 견훤은 아들 수미강과 양검을 보내 대야성과 문소성(의성) 두 성의 군사로 조물성을 공격하게 했다. 이들은 고려에서 구원군으로 보낸 애선과 왕충을 전사시켰지만, 조물성 사람들의 거센 저항으로 성을 함락시키는데는 실패했다. 견훤은 8월에 절영도(絶影島)의 총마 한 필을 왕건에게 보냈다(후술). 한편 신라에서는 경명왕이 죽고 경애왕이 즉위하였으며, 925년 9월부터 발해에서 대규모 망명자들이 고려로 넘어오기 시작했다. 10월에 견훤은 다시 3천 기(騎)를 이끌고 친히 조물성을 내습하였고 왕건은 반격에 나섰다. 이 싸움의 초기는 견훤의 군사가 매우 날랜 관계로 왕건이 불리한 지경으로 몰렸다. 고려사 박수경 열전에도 나오듯이 왕건은 자신의 친정군 이외에 군대를 상군, 중군, 하군, 셋으로 나누어 후백제군과 겨뤘으나 상군, 중군은 모두 패하고 박수경과 은영의 하군만이 승리를 거두어 이 하군과 왕건의 친정군만으로 버티고 있는 사이 유금필군이 왕건군을 지원하러 도착하면서 전세가 뒤바뀌게 되었다고 한다.

이 싸움에서 서로 승부를 내기 힘들어지자 양측은 왕건의 사촌아우 왕신(王信)과 견훤의 외조카 진호(眞虎)를 인질로 교환함으로써 화친이 성립되었다. 12월에 견훤은 다시 거창 등 신라의 20여 성을 공격하여 차지하고, 후당에 사신을 보내 후당으로부터 검교태위 겸 시중 판백제군사 지절도독 전무공등주군사 행전주자사 해동서면도통지휘병마제치등사 백제왕 식읍 2천 5백 호의 관작을 제수받았다.[12]

926년 음력 4월 고려에 볼모로 보낸 조카가 급사하였다. 사서들에서는 병사로 적혀 있지만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는 것을 감안해 최근에는 견훤이 왕건과 '조물성 전투'에서 맺은 화친 약속 조건인 신라 침공 중단을 어기고 신라 지역 각지를 공격해 함락시킨 것에 대한 보복과 더 이상의 견훤의 신라 공략을 막기 위해서 일부러 죽였다는 설이 나오고 있다. 견훤도 이에 대응하여 왕신을 죽이고 웅진 방면에서 진격하였다. 왕건이 웅진 방면의 성주들에게 성을 고수할 것을 명했지만 견훤은 웅주와 운주, 그리고 주변 일대를 모두 점령한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기록에는 없지만 고려사, 고려사절요, 동국통감을 보면 왕건은 927년 3월 '운주'를 쳐서 함락시키고 이어서 웅주까지 공격했으나 실패했다고 나오기 때문이다. 그리고 934년 '운주전투'에서 대승리를 거둔 후 웅진 이북의 30여성이 고려에게 투항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이때 견훤의 출정은 운주와 웅주 지역을 빼앗았음을 알 수 있다.

전투에 앞서 견훤은 자신이 보냈던 절영도의 총마를 돌려달라고 고려에 요구하였고, 이에 왕건은 웃으며 견훤이 보낸 절영도의 총마를 돌려주었다. 이는 견훤이 “절영도의 명마가 고려에 가면 백제가 멸망한다.”는 도참을 들었기 때문이라 한다.[17] 이는 궁예나 왕건만큼은 아니지만 견훤 역시 도참설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후백제 군주 견훤은 군대를 이끌고 현재의 합천으로 진격했지만 실패하고 후퇴했다. 그 후 910년, 궁예가 세운 태봉의 장수였던 왕건이 견훤이 반란을 일으킨 나주를 공격하여 점령하자, 견훤은 왕건에게서 나주를 되찾으려 했으나 실패했다.[5]

918년, 공포 정치를 펼치던 궁예는 자신의 군대 지휘관들에게 폐위당하고 살해되었다. 그의 장수이자 최고 재상이었던 왕건이 새로운 군주로 추대되어 고려가 시작되었다.[10]

견훤은 920년에 다시 대규모 원정군을 합천에 보내 마침내 이 지역을 점령했고, 경명왕은 고려와 동맹을 맺게 되었다. 그 후 그는 현재의 안동 지역을 침공했으나, 그의 군대는 현지 신라군에게 패배했다. 견훤은 이 전투 이후 고려와 화친을 맺기 위해 왕족을 인질로 교환했다. 그러나 그의 조카 진호가 죽자, 그는 고려 인질이었던 왕건의 사촌 왕신을 죽이고 고려와의 전쟁을 재개했다.[5]

927년, 견훤은 직접 군대를 이끌고 신라 수도 경주를 공격했다. 경애왕은 이 공격에 대비하지 못했고, 후백제군의 포로가 되는 대신 자결했다. 견훤은 김부(이후 경순왕)를 다음 신라 왕으로 옹립했다. 돌아가는 길에 그는 왕건이 이끄는 군대와 마주쳤고, 고려군을 손쉽게 격파하여 왕건의 많은 저명한 장군과 전사들을 죽였다. 왕건은 장수 신숭겸김낙의 과감한 희생으로 간신히 탈출했다. 1년 후 그는 신라로부터 진주를 점령했다.[5]

2. 6. 신검의 정변과 후백제의 멸망

935년 3월, 견훤은 여러 아들들 가운데 총애하던 넷째 아들 금강에게 왕위를 물려주려 하였다. 그러나 맏아들 신검과 변방에서 도독직을 역임하여 군무에 경험이 많던 양검 · 용검은 이에 불만을 품게 되었다.[22]삼국사기》에 따르면, 양검과 용검은 각각 강주도독과 무주도독으로서 군을 이끌고 나가 있었고 신검만 완산주에 남아 있었는데, 이찬 능환이 양검 및 용검과 음모를 꾸며 군을 움직였고, 이어 파진찬 신덕영순과 더불어 쿠데타를 일으켰다고 한다. 견훤의 나이 69세 때의 일이었다.

삼국유사》에는 신검의 쿠데타가 일어나던 때의 모습에 대해, 미처 잠에서 깨어나지 못한 혼미한 상태에서 멀리 대궐의 뜰에서 고함소리가 울리는 것을 들은 견훤이 "이것이 무슨 소리냐?"라고 물었고, 신검이 견훤에게 "왕께서 연로하시어 군무와 국정에 혼미하므로 맏아들 신검이 부왕의 자리를 대신하게 된 것에 여러 장수들이 축하하는 소리입니다."라고 대답했다는 일화를 전하고 있다.

결국 견훤은 금산사(金山寺)에 유폐되어 파달 등 장사 30명의 감시를 받게 되었다.[22]

《삼국유사》에서는 4월에 견훤이 금산사를 탈출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삼국사기》와 《고려사》에서는 6월에 금산사를 탈출하여 나주시로 가서 고려에 입조를 요청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해 4월에 유금필이 후백제 신검 형제들의 반란 직후 나주를 기습적으로 다시 점령한 것이 견훤의 도주에 결정적인 도움을 주게 되었던 점으로 미루어 보아 《삼국유사》의 4월 탈출 기록이 맞다면, 고려의 935년 4월 나주 재탈환은 견훤을 고려로 데려오려는 데에 목적이 있었던 것 같다. 또는 《삼국사기》의 6월 탈출 기록이 맞다면, 견훤이 망명신청을 위해 나주시가 고려의 영토임을 인지하고 의도적으로 간 것이다. 유금필과 왕만세 등이 수군을 이끌고 견훤의 망명을 도왔다. 송악에 도착하자 왕건은 견훤이 자신보다 10살이 더 많다하여 견훤을 상부(尙父)로 부르고 별궁인 남궁을 주었으며 '정승'으로 봉해 직위를 백관들은 물론 심지어 태자인 왕무보다 위에 두었고 양주를 식읍으로 주었으며[23] 그보다 먼저 항복해온 신강을 그 아관으로 삼았다고 한다.

견훤의 망명은 후백제를 붕괴로 이끄는데 가장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936년 2월에는 견훤의 사위였던 박영규도 내응할 뜻을 밝혀왔다. 6월에는 견훤이 직접 후백제 정벌을 왕건에게 요청하였고, 왕건은 태자 무(武)와 박술희로 하여금 천안부로 1만 명을 거느리고 나아가게 하였다. 왕건은 3군을 이끌고 9월에 천안부로 나아가 군을 합쳐 일리천(선산)으로 나아가 신검과 대치하였다. 왕건이 동원한 군세는 《삼국사기》에 따르면 총 10만 7천 5백 명(《삼국사기》), 또는 총 8만 6천 8백 명(《고려사》)이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견훤은 왕건과 함께 전군을 사열했으나 전투에 앞장섰다는 내용은 없으며, 《고려사》에는 기병 1만을 친히 견훤이 이끌었다고 되어 있다. 고려의 군세가 엄정한 것과 견훤이 함께 출정한 것을 본 후백제의 장군 효봉, 덕술, 애술, 명길이 병기를 던지고 항복하였고, 이로 인해 후백제군의 사기는 크게 저하되었던 것 같다. 이때 이 '일리천 전투'에서는 고려 2대 황제가 되는 혜종 왕무(王武)와 강공훤과 명주를 오랫동안 지배해 온 김순식이 크게 활약했다. 특히 명주의 김순식이 고려군에 들어와 싸운 것은 기록상 이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왕건은 장군 공훤에게 명해 투항한 후백제 장군들이 원수 신검이 있다고 말한 중군으로 전군을 돌격하게 하였다. 후백제군의 흔강(昕康), 견달(見達), 은술(殷述), 금식(今式), 우봉(又奉) 등을 비롯하여 3천 2백명을 사로잡고 5천 7백명의 목을 베었으며 후백제군 내부에서는 자신들끼리 서로 치고받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후백제군은 황산으로 퇴각하였으나 고려군은 재빠르게 기동하여 탄현을 넘어 마성에 주둔하였다. 신검은 강주도독 양검, 무주도독 용검 및 문무신료를 대동하고 항복하였다. 왕건은 반란을 주동한 능환을 참수하였고, 포로가 된 병졸들은 모두 풀어주었으며 항복해온 문무신료들은 능환을 제외하고는 위로하고 송악으로 올라오는 것을 허락하였다. 양검과 용검은 진주로 귀양보냈다가 조금 뒤에 죽였으며 신검에게는 본심이 아닌 능환과 양검, 용검 등의 협박(?)에 의해 왕위를 찬탈하였고, 또한 항복해 왔기 때문에 벼슬을 제수했다고 하지만, 2000년~2002년까지 KBS 1TV에서 최고의 인기리에 방영되었던 드라마 '태조 왕건'의 마지막회의 나래이션에서도 나왔듯이 학계에서는 신검이 비록 벼슬을 제수받았다고는 하지만 동생들인 양검과 용검이 항복한 이후, 왕건에 의해 진주로 귀양갔다가 얼마 뒤에 모두 처형된 점, 신검 자신도 왕건에게 투항해서 벼슬을 받은 이후의 행적이 《삼국사기》, 《삼국유사》, 《고려사》, 《고려사절요》, 《동국통감》 같은 고려시대를 다룬 권위 있는 역사서들에서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은 것들을 고려하면 신검 역시 동생들과 마찬가지로 왕건에게 투항한 지 얼마 후 동생들의 죽음 이후에 따로 처형되었다는 것에 무게를 두고 있다.

2. 7. 최후

후백제를 멸망시킨 견훤은 극도의 고뇌와 우울함에 휩싸여 등창이 생겨 며칠 만에 황산(논산)의 절에서 사망했다고 한다. 그 날짜가 남아있는 유일한 기록은 《삼국유사》로 936년 음력 9월 8일인데, 대전투가 벌어지고 사후처리까지 마무리되기에는 8일은 좀 짧은 기간이므로 완전히 신뢰할 만한 기록은 아니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하지만 중국의 경우 항우와 손권의 참모였던 범증과 육손의 경우를 비롯해 극도의 분노와 울분으로 인해 단기간에 건강이 극도로 악화되어 사망한 사례들이 있고, 우리나라에서도 고려 무신 정권기의 청렴하고 유능한 무신 권력자였던 두경승과 구한말의 이준 등의 경우들이 있어서 실제로 있었음직하다는 것이 더 맞을 것이다.[5] 일각에서는 왕건에 의해 암살당했다고 하나 증거는 전혀 없다. 견훤이 쓸쓸하게 사망한 곳은 연산현에서 동쪽으로 5리에 있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개태사로 추정되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공주목 은진현조에는 현의 남쪽 12리 되는 풍계촌에 왕묘라 불리는 무덤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곳은 충청남도 논산시 연무읍 금곡리 산18번지로 왕묘를 견훤의 묘로 비정하고 있다.

3. 가족 관계

관계이름비고
아버지아자개[28][29]
어머니상원부인
왕후상원부인
장남신검재위: 935~936
차남양검
3남용검
미상
사위지훤무주(武州) 성주(城主)[31]
국대부인[32]
사위박영규승평군(昇平郡) 호족
애복[33]
후궁미상
4남금강
5남종우
7남위흥
8남청구[34]
후궁고비녀[35]
6남능예



삼국유사》에는 8남 1녀의 자식을 두었다고 전해진다. 그 가운데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것은 신검, 양검, 용검, 금강[24], 그리고 고려로 함께 망명한 막내아들 능예와 딸 애복의 이름이 알려져 있다. 시대적 정황상 29명의 부인을 두었던 왕건처럼 혼인정책을 펼쳤을 가능성이 크지만 견훤의 부인이 몇 명인지는 정확히 알려져있지 않으며, 금산사 유폐 기록에서 고비녀의 이름이 등장할 뿐이다.[25][26][27] 신검, 양검, 용검금강이 서로 배다른 형제라는 것은 이름의 유사성과 금강을 제거하는 데 세 형제가 합심하고 견훤은 물론 고비녀 및 그녀의 소생을 금산사에 유폐한 행적 때문에 제기되는 추정이다.

4. 평가

현존하는 견훤 관련 기록은 거의 대부분 고려시대에 작성되었다. 신라계 대학자 김부식삼국사기에서 견훤을 원래 신라의 백성이었고 신라의 벼슬을 하던 그가 신라 말의 위태로움을 기회로 삼아 수도 서라벌을 쳐서 군신을 짐승이나 잡초 대하듯 죽인 천하의 원악(元惡)이자 대죄(大罪)를 저질렀다고 비판하였다. 또한 견훤이 결국 아들 신검에게 쫓겨난 것도 자업자득의 결과이며, 궁예와 사실상 마찬가지로 「(숱한 악을 행하느라) 태조(왕건)를 위해 백성을 몰아다 주었을 뿐」이라며 조소하고 있다.

조선시대에도 견훤에 대한 평가는 부정적이었다.

다만 현대에 이르러서는 신라에 대해 부정적인 사람들에게는 매우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5. 대중문화 속 견훤

KBS1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 서인석이 연기한 견훤은 초반에는 참모 최승우의 합리적 전략을 무시하고 저돌적으로 전쟁을 수행하려 하다가 많은 실패를 맛보는 군주로 묘사되었으며, 후반에는 현실적 힘을 중시하는 군주로 묘사되었다.[1]


6. 관련 문화재

참조

[1] 웹사이트 Gyeon Hwŏn https://terms.naver.[...]
[2] 웹사이트 Gyeon Hwon http://100.nate.com/[...] 2011-06-10
[3] 웹사이트 견훤 https://terms.naver.[...] 2018-05-26
[4] 서적 Samguk Yusa: Legends and History of the Three Kingdoms of Ancient Korea Silk Pagoda 2006
[5] 웹사이트 Kyŏn Hwŏn http://100.nate.com/[...] 2011-06-10
[6] 웹사이트 Ajagae http://100.naver.com[...]
[7] 서적 Annals of the Silla Dynasty (신라왕조실록) Woongjin 2004
[8] 서적 Korean History in One Night (하룻밤에 읽는 한국역사) Paper Road 2008
[9] 서적 New History of Korea Jimoondang 2005
[10] 웹사이트 Taejo http://100.naver.com[...]
[11] 문서 신검의 처형
[12] 서적 원문과 함께 읽는 삼국유사 한국인문고전연구소 2012
[13] 문서 견훤의 출생지 논쟁
[14] 웹사이트 한국지명유래집 전라, 제주편 지명 '몽탄면'
[15] 문서 912년 전투의 위치 논쟁
[16] 문서 아자개의 신분 논쟁
[17] 서적 고려사 934
[18] 문서 팔공산 인근 지명 및 대구 지하철 1호선 역명 참조
[19] 문서 최근 이도학 교수의 견해: 개경 점령설
[20] 문서 삼국사기와 고려사의 기록 차이: 영주 순흥 점령 시기 논쟁
[21] 문서 고려사 유금필 열전, 고려사절요, 동국통감의 기록에 대한 비판
[22] 문서 견훤 정변의 원인에 대한 논쟁: 근왕파와 강경파의 대립
[23] 문서 경순왕에게 식읍으로 양주를 하사한 이유 추측
[24] 문서 수미강과 견훤의 동일인물 가능성
[25] 서적 한국고중세사사전 한국사사전편찬회 2007
[26] 문서 삼국유사 이제가기의 8남 1녀 목록에 대한 신뢰도 문제
[27] 문서 이병도의 삼국사기 주석에서 제기된 주장
[28] 문서 이제가기의 아자개 자녀 목록 및 그에 대한 추정
[29] 서적 한국 고대 인명사전 도서출판 역락 2007
[30] 문서 상원부인과 고려 태조 부인의 원호 비교 및 이제가기의 기록에 대한 애매함
[31] 문서 고려사 지 권제11 지리2 전라도 해양현 조의 기록: 지훤과 견훤의 사위 관계
[32] 문서 박영규의 부인 국대부인의 칭호에 대한 추정
[33] 문서 935년 6월 견훤과 함께 고려에 투항한 딸
[34] 문서 견훤의 자녀들의 추봉 및 관등에 대한 분석
[35] 문서 삼국사기의 금산사 탈출 장면에 등장하는 인물들과 그에 대한 추정
[36] 문서 동사강목 제5상 진성 여주 6년, 당 소종 경복(景福) 원년 8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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