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충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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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정충신은 1576년 전라도 광주에서 태어난 조선 중기의 무신이다. 임진왜란 때 권율 휘하에서 종군하여 무관의 길을 걷기 시작했으며, 이항복의 도움으로 노비 신분에서 벗어나 무과에 급제했다. 광해군 때 여진족 정세를 파악하고, 인조반정 이후 이괄의 난을 진압하는 데 기여했다. 청나라와의 화의를 주장하다 유배되기도 했으며, 병자호란 직전 사망했다. 그는 무술뿐 아니라 천문, 지리, 의학 등 다방면에 능통했고, 사후 충무의 시호를 받았다. 저서로는 《만운집》, 《백사북천일록》 등이 있으며, 금남로가 그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
1602년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점차 세력을 확장하는 여진족의 정세를 파악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1608년 조산보만호에 임명되어 무관으로 활동했다.
鄭忠信중국어은 1636년 5월 병이 심해져 왕이 의관을 보내 치료했으나 효험을 보지 못하고 사망하였다. 그는 천문, 지리, 복서, 의술 등 다방면에 해박하고 청렴하기로 이름이 높았다. 사후 광주의 경렬사에 배향되었다.[4] 무술에 뛰어났으며 천문, 지리, 의학, 복서에도 밝았다. 광주광역시의 금남로는 그의 이름을 딴 것이다.[5] 시호는 이순신, 김시민처럼 충무(忠武)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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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1636년 3월, 정충신이 우려했던 대로 조선 조정에서는 청나라를 배척하는 주전론이 득세하여 청과 단교하는 사신을 보냈고, 이는 후일 병자호란을 촉발하는 계기가 되었다.
2. 1. 출생과 임진왜란
1576년 전라도 광주에서 아버지 정윤(鄭綸)과 나주의 노비 출신인 어머니 영천 이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조선 시대 노비 신분 세습은 '일천즉천(一賤則賤)'에 따라 부모 중 한 명이 천인이면 자녀는 노비가 되어 면천이 매우 어려웠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17세에 권율 휘하에 들어가 종군하였다. 나이는 어렸지만 민첩하고 영리하여 권율의 신임을 받았으며, 적진 정찰과 연락 임무를 수행했다. 권율의 장계를 가지고 의주에 갔다가 이항복의 주선으로 학문을 배우면서 무관의 길을 걷게 되었다. 이항복이 '충신(忠臣)'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고, 선조는 정충신을 노비에서 면천시켜 주었다.[1] 정충신은 이항복의 집에 머물면서 학업을 익혔고, 그해 무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2. 2. 광해군 대 활동
1614년 8월 27일 위성원종공신 2등(衛聖原從功臣二等)에 책록되었다.[1] 1617년(광해군 9) 임진왜란 직후 덕천가강(德川家康)[2]가 정이대장군에 오른 후 일본의 강화 교섭 요청이 심해지자 회답겸쇄환사(回答兼刷還使[3])의 일원으로 2차 쇄환사절단(정사 오윤겸(吳允謙) 외 428명)으로 일본을 다녀왔다. 당시 일본 정세를 파악하기 위해 일부 무관들도 사절단에 섞여 문관으로 파견되었는데, 종사관 이경직이 남긴 <부상록>에는 에도 막부의 집정대신 안도 시게노부가 "사신 일행이 모두 문관이 맞느냐?"고 묻자 역관 최의길이 당황하여 '모두 문관이 맞다'고 답했고, 이에 안도 시게노부가 정충신을 가리키며 "저 이를 내가 전장에서 알았으니, 분명 무관이 맞을 것이오"라고 해 이경직을 놀라게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1618년 인목대비 폐모론에 반대하였고, 스승인 이항복이 북청으로 유배를 떠나자 동행하여 유배 당시 중풍으로 거동이 불편한 스승을 간병하였다.
1619년 명나라의 요청으로 도원수 강홍립이 출병하였으나 후금에 대패하자, 여진족의 정황에 밝았던 정충신이 다시 등용되었다. 1621년 만포첨사로 국경 수비를 정비하였고, 후금에 사신으로 다녀온 후 후금의 침략에 대비하고 조선의 정치적 중립을 주장하였다.
2. 3. 인조반정 이후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났으나 직접 가담하지는 않았다. 이듬해 절친했던 이괄이 난을 일으키자, 한때 의심을 받기도 하였지만 전부대장으로 나서 이괄의 난을 진압하는 데 앞장섰다.[1] 황주와 서울 안현에서 싸워 이겨 진무공신 1등에 책록되어 금남군에 봉해지고, 이어 평안도병마절도사 겸 영변대도호부사가 되었다.
광해군 시절부터 정충신이 없으면 국방 업무가 중단될 정도로 유능했으며, 인조 시절에는 그를 조금만 더 중용했더라면 아쉬움을 표하던 인조에 대한 사관들의 평가가 있다.[1]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에 따르면, 관리들은 천출이라는 이유로 이괄의 난을 계속 거론하며 정충신을 한직으로 보내버렸고, 이는 그를 더 크게 중용할 수 없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1] 정충신은 병을 얻어 관직에서 물러나 요양하였다가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부원수에 임명되었다. 1633년 조정에서 후금과 단교하려는 데 반대하여 청나라와 화의를 주장하다 당진에 유배되었고, 후에 장연에 이배된 뒤 풀려났다. 이듬해 포도대장·경상도병마절도사를 지냈다.
2. 4. 사망
鄭忠信중국어은 1636년 병이 깊어져 왕이 의관에게 치료를 명했으나 효험을 보지 못하고 5월에 사망하였다.[4] 천문, 지리, 복서, 의술 등 다방면에 정통했고, 청렴하기로도 이름이 높았다. 사후 광주의 경렬사에 배향되었다.[4] 문집으로 《만운집》이 있고, 저서로는 스승 이항복의 유배일지를 기록한 《백사북천일록》, 《금남집》 등이 있다.[4]
그는 무술에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천문, 지리, 의학, 복서에도 밝았다.[5] 광주광역시의 옛 전남도청 앞에서 유동 4거리로 가는 길인 금남로는 그의 이름을 딴 것이다.[5] 시호는 이순신, 김시민과 같은 충무(忠武)이다.
3. 사후
4. 사상과 평가
5. 저서
6. 관련 문화재
- 금남군 정충신 영정각은 전라북도 장수군에 있으며,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33호로 지정되었다.
- 진충사는 충청남도 서산시 지곡면 대요리에 있으며,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206호로 지정되었다.
- 정충신묘는 충청남도 서산시 지곡면 대요리 마힐산에 있으며,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210호로 지정되었다.
7. 관련 작품
1981년 KBS 드라마 대명에서 남성우가 정충신 역을 연기했다.
7. 1. 드라마
1981년 KBS 드라마 대명에서 남성우가 정충신 역을 연기했다.참조
[1]
웹사이트
노비에서 최고 무신이 된 정충신
http://people.aks.ac[...]
[2]
문서
도쿠가와 이에야스
[3]
문서
일본의 요청으로 1607년(선조 40)·1617년(광해군 9)·1624년(인조 2)에 막부장군에게 파견된 조선의 국왕사절. 일본 막부장군이 먼저 국서를 보낸 데 대하여 조선이 ‘회답’하고, 임진·정유왜란 때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인을 데려오는 ‘쇄환’한다는 두 가지 목적을 띠고 파견된 사행.
[4]
웹사이트
금남군 정충신의 졸기
http://sillok.histor[...]
인조실록
1636-05-04
[5]
웹인용
남구 왜 효향인가 - 사직공원 충무공 정충신 시비
http://news.namgu.gw[...]
광주광역시 남구 통합웹진서비스
2008-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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