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대 섀프츠베리 백작 앤서니 애슐리쿠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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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앤서니 애슐리쿠퍼(1621-1683)는 잉글랜드의 정치인으로, 제1대 섀프츠베리 백작으로도 알려져 있다. 17세기 잉글랜드의 정치적 격변기에 활동하며 청교도 혁명, 가톨릭 음모 사건, 명예 혁명 등 굵직한 사건에 연루되었다. 그는 가톨릭교도에 대한 반대와 왕위 계승 문제에 적극적으로 관여했으며, 훗날 휘그당으로 발전하는 정치 사상의 형성에 영향을 미쳤다. 찰스 2세 치하에서 추밀원 의원, 대법관 등을 역임했으나, 가톨릭 왕위 계승 반대와 프랑스 정책 비판으로 인해 찰스 2세와 결별했다. 이후 왕위 배제 법안을 주도하며 휘그당의 지도자로 활동했으나, 실패하고 네덜란드로 망명하여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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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대 섀프츠베리 백작 앤서니 애슐리쿠퍼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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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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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앤서니 애슐리 쿠퍼 |
출생일 | 1621년 7월 22일 |
출생지 | 도싯 주윔본 세인트 자일스 |
사망일 | 1683년 1월 21일 |
사망지 | 네덜란드 공화국암스테르담 |
학력 | 옥스퍼드 대학교엑서터 칼리지 |
배우자 | 마거릿 코번트리 (1639년–1649년, 사별) 프랜시스 세실 (1650년–1654년, 사별) 마거릿 스펜서 (1655년–1683년, 사별) |
자녀 | 앤서니 애슐리쿠퍼, 제2대 섀프츠베리 백작 (1652년–1699년) |
계급 | 대령 |
참전 | 제1차 영국 내전 웨어햄 점령 애벗츠베리 점령 샤프츠베리 점령 톤턴 구원 |
경력 | |
의원 | 윌트셔 |
윌트셔 주 고등 보안관 | 1647년–1648년 |
아일오브와이트 주 지사 | 1660년–1661년 |
재무 장관 | 1661년 5월 13일 – 1672년 11월 22일 |
국璽尚書 | 1672년 |
무역 위원회 의장 | 1672년 9월 16일 – 1676년 |
도싯 주주지사 | 1672년–1674년 |
추밀원 의장 | 1679년 4월 21일 – 1679년 10월 15일 |
잉글랜드 국무원 | 1653년 7월 – 1654년 12월 |
수훈 | |
추밀원 | 추밀원 |
왕립 학회 | 왕립 학회 |
2. 시대적 배경
17세기 중후반 잉글랜드는 정치, 종교적으로 매우 혼란스러운 시기였다. 청교도 혁명(잉글랜드 내전, 1642년), 왕위 배제 법안이 제출된 1679년의 이른바 가톨릭 음모 사건과 배제 위기, 명예 혁명 (1688년) 등 굵직한 사건들이 연이어 발생했다. 섀프츠베리 백작은 가톨릭 음모 사건과 배제 위기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으며, 그의 주장은 훗날 휘그로 불리는 정치 사상의 조류를 형성하는 데 영향을 주었다.
당시 잉글랜드는 산업 자본이 거의 발달하지 못한 농촌 사회였다. 인구 증가와 식량 부족으로 인한 인플레이션은 사회 불안을 야기했다. 네덜란드에서 도입된 개량 농법으로 잉글랜드 동남부 지역에서는 상황이 점차 개선되었지만, 종교적 갈등은 여전히 심각했다. 네덜란드에서 전래된 개혁 장로교 등 칼뱅주의는 잉글랜드 국교회를 사이에 두고 가톨릭에 대한 강한 적대감을 조성했다. 비국교도 개신교와 가톨릭 간의 대립은 국교회 중심의 잉글랜드 지배 체제를 위협했고, 섀프츠베리 백작은 이러한 비국교도 개신교도 중 한 사람이었다.
3. 초기 생애와 교육 (1621-1640)
앤서니 애슐리 쿠퍼는 1621년 7월 22일 도싯주 윈본 세인트 자일스에서 햄프셔 록본의 초대 준남작 존 쿠퍼 경과 그의 아내 앤 애슐리의 장남으로 태어났다.[1] 외할아버지 애슐리 1대 준남작 앤서니 애슐리 경과의 약속 때문에 앤서니 애슐리 쿠퍼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1]
쿠퍼의 아버지 존 쿠퍼 경은 1622년 준남작이 되었으며,[1] 1625년과 1628년 의회에서 풀을 대표하여 윈체스터 주교 리처드 네일을 아르미니우스주의 성향으로 공격하는 것을 지지했다.[1] 앤서니 애슐리 경은 청교도 성향의 아론 거든을 쿠퍼의 첫 번째 가정교사로 임명했다.[1]
1628년 어머니가 사망하고 이듬해 아버지는 런던의 부유한 직물 상인의 딸이자 재산의 공동 상속인인 메리 모리슨과 재혼했다.[1] 쿠퍼는 계모를 통해 에식스 백작 가문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1]
1630년 아버지 존 쿠퍼 경이 사망하자, 앤서니는 막대한 빚과 함께 부유한 고아가 되었고, 아버지의 준남작 작위를 상속받아 앤서니 애슐리 쿠퍼 경이 되었다.[1] 아버지의 빚은 약 35,000 파운드였고, 호적원은 존 경의 빚을 갚기 위해 토지 판매를 명령했다. 이 과정에서 쿠퍼는 호적원을 부패한 기관으로 혐오하게 되었다.[1]
쿠퍼는 아버지의 수탁자인 대니얼 노턴 경과 함께 햄프셔 사우스윅 ( 포츠머스 근처)에서 살았고, 노턴은 플레처라는 청교도 성향의 사람을 쿠퍼의 가정교사로 선택했다.[1] 1636년 대니얼 경이 사망한 후, 쿠퍼는 아버지의 다른 수탁자인 에드워드 투커와 함께 솔즈베리 근처 매딩턴으로 보내졌고, 옥스퍼드 대학교 오리엘 칼리지 출신의 가정교사에게 교육받았다.[1]
1637년 3월, 15세의 나이로 옥스퍼드 대학교 엑서터 칼리지에 입학하여[2] 신학 정교수 존 프라이도 밑에서 공부했는데, 그는 칼뱅주의자로서 아르미니우스주의에 격렬하게 반대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1] 1638년 2월에는 링컨 법학원에 입학하여[3][4] 에드워드 레이놀즈와 조셉 캐릴 채플린의 청교도 설교를 접했다.[1]
1639년 2월 25일, 19세의 쿠퍼는 당시 영국 찰스 1세의 대인장관으로 재직 중이던 토머스 코번트리 1대 남작 코번트리의 딸 마거릿 코번트리와 결혼했다. 쿠퍼는 아직 미성년자였기 때문에 젊은 부부는 런던 스트랜드에 있는 더럼 하우스와 이즐링턴에 있는 캐넌버리 하우스에 있는 코번트리 경의 저택으로 이사했다.[1]
3. 1. 출생과 가문
앤서니 애슐리 쿠퍼는 1621년 7월 22일 도싯주 윈본 세인트 자일스에서 햄프셔 록본의 초대 준남작 존 쿠퍼 경과 그의 아내 앤 애슐리 사이에서 태어났다.[1] 그의 외할아버지 앤서니 애슐리 경은 엘리자베스 1세 여왕 시절 전쟁 장관을 지낸 명망 있는 인물이었다.[1] 섀프츠베리 백작은 외할아버지의 이름을 따 앤서니 애슐리 쿠퍼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1]
쿠퍼의 아버지는 1622년 준남작이 되었으며, 1625년과 1628년 의회에서 풀을 대표하여 윈체스터 주교 리처드 네일을 아르미니우스주의 성향 때문에 공격하는 것을 지지했다. 앤서니 애슐리 경은 청교도 성향의 아론 거든을 쿠퍼의 첫 번째 가정교사로 선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1]
쿠퍼의 어머니는 1628년에 사망했고, 그의 아버지는 1630년에 사망하여 그는 부유한 고아가 되었다.[1] 그의 아버지가 사망하자 그는 아버지의 준남작 작위를 상속받았다.[1]
쿠퍼는 아버지의 수탁자인 대니얼 노턴 경과 함께 햄프셔 사우스윅 ( 포츠머스 근처)에서 살게 되었다. 노턴은 플레처라는 청교도 성향의 사람을 쿠퍼의 가정교사로 선택했다.[1] 대니얼 경은 1636년에 사망했고, 쿠퍼는 아버지의 다른 수탁자인 에드워드 투커와 함께 솔즈베리 근처 매딩턴으로 보내졌다.[1]
쿠퍼는 1637년 3월 24일, 15세의 나이로 엑서터 칼리지에 입학하여[2] 칼뱅주의자로서 아르미니우스주의에 격렬하게 반대하는 성향을 가진 존 프라이도 밑에서 공부했다.[1] 1638년 2월, 쿠퍼는 링컨 법학원에 입학하여[3][4] 에드워드 레이놀즈와 조셉 캐릴 채플린의 청교도 설교를 접했다.[1]
1639년 2월 25일, 19세의 쿠퍼는 토머스 코번트리 1대 남작 코번트리의 딸 마거릿 코번트리와 결혼했다.[1]
3. 2. 유년 시절과 청교도 교육
앤서니 애슐리쿠퍼는 1621년 7월 22일 도싯주 윈본 세인트 자일스에서 햄프셔 록본의 초대 준남작 존 쿠퍼 경과 그의 아내 앤 애슐리의 장남으로 태어났다.[1] 외할아버지 애슐리 1대 준남작 앤서니 애슐리 경과의 약속 때문에 앤서니 애슐리 쿠퍼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1]
쿠퍼의 아버지 존 쿠퍼 경은 1622년 준남작이 되었으며,[1] 1625년과 1628년 의회에서 풀을 대표하여 윈체스터 주교 리처드 네일을 아르미니우스주의 성향으로 공격하는 것을 지지했다.[1] 앤서니 애슐리 경은 청교도 성향의 아론 거든을 쿠퍼의 첫 번째 가정교사로 임명했다.[1]
1628년 어머니가 사망하고 이듬해 아버지는 런던의 부유한 직물 상인의 딸이자 재산의 공동 상속인인 메리 모리슨과 재혼했다.[1] 쿠퍼는 계모를 통해 에식스 백작 가문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1]
1630년 아버지 존 쿠퍼 경이 사망하자, 앤서니는 막대한 빚과 함께 부유한 고아가 되었고, 아버지의 준남작 작위를 상속받아 앤서니 애슐리 쿠퍼 경이 되었다.[1] 아버지의 빚은 약 35,000 파운드였고, 호적원은 존 경의 빚을 갚기 위해 토지 판매를 명령했다. 이 과정에서 쿠퍼는 호적원을 부패한 기관으로 혐오하게 되었다.[1]
쿠퍼는 아버지의 수탁자인 대니얼 노턴 경과 함께 햄프셔 사우스윅 ( 포츠머스 근처)에서 살았고, 노턴은 플레처라는 청교도 성향의 사람을 쿠퍼의 가정교사로 선택했다.[1] 1636년 대니얼 경이 사망한 후, 쿠퍼는 아버지의 다른 수탁자인 에드워드 투커와 함께 솔즈베리 근처 매딩턴으로 보내졌고, 옥스퍼드 대학교 오리엘 칼리지 출신의 가정교사에게 교육받았다.[1]
1637년 3월, 15세의 나이로 엑서터 칼리지에 입학하여[2] 신학 정교수 존 프라이도 밑에서 공부했는데, 그는 칼뱅주의자로서 아르미니우스주의에 격렬하게 반대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1] 1638년 2월에는 링컨 법학원에 입학하여[3][4] 에드워드 레이놀즈와 조셉 캐릴 채플린의 청교도 설교를 접했다.[1]
3. 3. 옥스퍼드 대학교와 법학원
앤서니 애슐리 쿠퍼는 아버지 존 쿠퍼 경이 사망한 후, 아버지의 수탁자인 대니얼 노턴 경과 함께 햄프셔 사우스윅에서 살았다.[1] 노턴은 청교도 성향의 플레처를 쿠퍼의 가정교사로 선택했다.[1] 1636년 노턴이 사망하자, 쿠퍼는 다른 수탁자인 에드워드 투커와 함께 솔즈베리 근처 매딩턴으로 보내졌다.[1]
1637년 3월, 15세의 쿠퍼는 옥스퍼드 대학교 엑서터 칼리지에 입학하여[2] 칼뱅주의 신학자인 존 프라이도 학장 밑에서 공부했다.[1] 그는 작은 폭동을 일으키고 학위를 받지 않고 떠났다. 1638년 2월, 쿠퍼는 링컨 법학원에 입학하여[3][4] 에드워드 레이놀즈와 조셉 캐릴 채플린의 청교도 설교를 접했다.[1]
4. 초기 정치 경력 (1640-1660)
4. 1. 의회 진출과 내전 발발 (1640-1642)
1640년 3월, 섀프츠베리 백작은 미성년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장인 토머스 코벤트리 제1대 코벤트리 남작의 영향으로 단기 의회에서 글로스터셔의 테우크스베리 선거구의 국회의원으로 선출되었다.[4] 1640년 10월, 여론이 국왕 지지자에게 불리하게 기울면서, 섀프츠베리 백작은 장기 의회에서 테우크스베리 선거구에 출마하지 못했다.[1] 그는 다운턴 선거구(윌트셔)의 보궐 선거에 출마하여 승리했지만, 덴질 홀리스가 그의 의회 입성을 막았다.[1] 이는 섀프츠베리 백작이 국왕의 대법관의 딸과 결혼하여 국왕에게 동정적일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1]1642년, 국왕 찰스 1세와 장기 의회의 대립이 심화되었지만, 섀프츠베리 백작은 의회파와 왕당파 중 어느 쪽에 설지 명확히 하지 않았다. 1642년 8월에 제1차 잉글랜드 내전/First English Civil War영어이 시작되자 국왕을 따라 런던을 떠났지만, 그는 나중에 "구경하러 갔을 뿐이다"라고 변명했다.
4. 2. 왕당파 활동 (1642-1644)
1642년 잉글랜드 내전이 시작되자 섀프츠베리 백작은 처음에는 국왕 찰스 1세를 지지했다.[1] 그는 사비를 들여 국왕을 위해 보병 연대와 기병 부대를 소집하여 각각 대령과 대장으로 복무했다.[1] 1643년 7월 13일 기사당의 라운드웨이 다운 전투 승리 이후, 섀프츠베리 백작은 도체스터의 항복을 협상하기 위해 임명된 세 명의 위원 중 한 명이었다. 그는 마을이 약탈과 처벌을 면하는 대가로 항복하기로 합의하는 협상을 벌였다.[1] 그러나 모리스 공 휘하의 군대가 도착하여 도체스터와 웨이머스를 약탈하여 섀프츠베리 백작과 모리스 공 사이에 격렬한 언쟁이 벌어졌다.[1]
윌리엄 시모어, 허트퍼드 후작은 섀프츠베리 백작을 웨이머스 및 포틀랜드의 지사로 임명할 것을 추천했지만, 모리스 공은 그의 젊음과 경험 부족을 이유로 임명을 막기 위해 개입했다.[1] 섀프츠베리 백작은 재무장관인 에드워드 하이드에게 호소했고, 하이드는 그가 지사로 임명되되 체면을 잃지 않고 가능한 한 빨리 사임하는 것으로 타협했다.[1] 섀프츠베리 백작은 지사직에서 사임하면 도싯 주 고위 보안관과 도싯 군사 위원회 회장으로 임명될 것이라는 약속을 받았는데, 이는 모두 지사직보다 더 권위 있는 직책이었다. 그는 1643년의 나머지 기간을 웨이머스 및 포틀랜드 지사로 보냈다.[1]
4. 3. 의회파 전향과 재혼 (1644-1652)
1644년 초, 섀프츠베리 백작은 국왕 밑에서 모든 직책을 사임하고 헐스트 성으로 가서 의회파의 본부를 방문했다.[1] 양원 위원회에 소환된 그는 찰스 1세가 로마 가톨릭의 영향(가톨릭은 찰스 궁정에서 점점 두각을 나타내고 있었고, 그는 최근 아일랜드 가톨릭 반군과 휴전을 맺었다)을 받고 있으며, 찰스가 "프로테스탄트 종교와 왕국의 자유를 증진하거나 보존할" 의사가 없다고 믿었으며, 따라서 그는 의회파의 대의가 정당하다고 믿고 엄숙한 동맹 및 서약을 받아들일 것을 제안했다.[1]1644년 7월, 잉글랜드 하원은 쿠퍼에게 런던을 떠날 허가를 내주었고, 그는 곧 도싯에서 의회군에 합류했다.[1] 8월에 캠페인에 참여한 후, 의회는 그를 도싯 군대를 통치하는 위원회에 임명했다.[1] 쿠퍼는 1644년 한 해 동안 전투에 참여했다.[1] 1645년, 자기 부인 조례가 통과되자 쿠퍼는 다운턴의 정당한 의원 자격을 유지하기 위해 의회 군대에서 자신의 위임을 사임하기로 결정했다(어쨌든 이는 뉴 모델 군대의 창설로 대체되고 있었다).[1] 그는 민간 위원으로서 도싯 위원회에서 계속 활동했다.[1]
1640년대 후반, 섀프츠베리 백작은 장로교를 독립교에 대항하여 지지했고, 찰스 1세의 국왕 살해에 반대했다고 추정된다.[1] 그는 새로운 정권과 협력할 의지가 있었고, 1649년 2월에는 윌트셔와 도싯의 치안 판사로 임명되었으며, 1647년에는 윌트셔 고위 보안관으로 활동했다.[1] 1650년 2월에는 새로운 정권에 대한 충성 서약을 했을 뿐만 아니라, 서약을 제안하는 위원회의 구성원이기도 했다.[1] 이 시기에 그는 해외 플랜테이션에 처음 관심을 보였고, 1646년에 영국 식민지 바베이도스에 있는 플랜테이션에 투자했다.[1][5]
섀프츠베리 백작의 첫 번째 부인 마가렛은 1649년 7월 10일에 사망했으며, 부부에게는 자녀가 없었다.[1] 1년도 채 안 되어 1650년 4월 15일, 섀프츠베리 백작은 17세의 프랜시스 세실 부인(1633–1652), 즉 데이비드 세실, 엑서터 백작 3세의 딸과 재혼했다.[1] 부부에게는 두 자녀가 있었는데, 그 중 한 명인 앤서니는 성인이 될 때까지 살았다.[1] 프랜시스는 1652년 12월 31일에 1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1]
4. 4. 공화정 및 호국경 시대 (1652-1660)
1652년 1월 17일, 럼프 의회는 매튜 헤일 경이 의장을 맡은 법 개혁 위원회에 앤서니 애슐리쿠퍼를 임명했다.[1] 1653년 3월, 럼프 의회는 그가 왕당파로 활동했던 시기에 대한 완전한 사면을 발표하여 공직 복귀의 길을 열었다. 1653년 4월 럼프 의회가 해산된 후, 올리버 크롬웰과 육군 평의회는 쿠퍼를 베어본의 의회의 윌트셔 대표로 임명했다. 7월 14일, 크롬웰은 쿠퍼를 영국 국무원에 임명했고, 그는 헤일 위원회의 개혁 사업을 계속하려는 목적으로 설립된 법률 사업 위원회의 위원이었다.[1] 쿠퍼는 베어본의 의회 내에서 온건파와 뜻을 함께하며 십일조 폐지에 반대표를 던졌다.[1] 그는 1653년 12월 12일 십일조 폐지에 동의하기보다는 베어본의 의회를 해산하는 데 찬성표를 던진 의원 중 한 명이었다.[1]
정부 규정에 따라 잉글랜드에 새로운 헌법이 제정되자, 쿠퍼는 다시 국무원에 임명되었다.[1] 1654년 여름 제1 보호령 의회 선거 기간 동안 쿠퍼는 에드먼드 러들로가 이끄는 10명의 공화당 국회의원과 맞서 윌트셔에서 출마한 10명의 후보자 명단을 이끌었다.[1] 선거 당일 너무 많은 유권자가 참여하여 투표소가 윌튼에서 스톤헨지로 변경되어야 했다.[1] 쿠퍼의 후보자 명단이 승리했지만, 러들로는 자신의 정당이 다수였다고 주장했다. 같은 선거에서 쿠퍼는 테우크스베리와 풀의 국회의원으로도 선출되었지만[4] 윌트셔를 선택했다. 쿠퍼는 일반적으로 제1 보호령 의회 기간 동안 크롬웰을 지지했지만, 크롬웰이 의회가 아닌 군대를 통해 통치하려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는 데 우려를 품게 되었다.[1] 이로 인해 쿠퍼는 크롬웰과 결별하게 되었다. 1655년 1월 초, 그는 평의회 출석을 중단하고 의회에서 의회에서 승인하지 않은 수입을 징수하거나 지불하는 것을 불법으로 만드는 결의안을 제출했다. 크롬웰은 1655년 1월 22일 이 의회를 해산했다.[1]
망명 중이던 찰스 2세는 쿠퍼가 크롬웰과 결별했다는 소식을 듣고 쿠퍼에게 서신을 보내 쿠퍼가 왕위에 반대하여 싸운 것에 대해 사면할 것이며 이제 그가 왕정 복고를 가져오는 데 도움을 줄 것이라고 말했다.[1] 쿠퍼는 응답하지 않았으며, 1655년 3월 페네루덕 반란에도 참여하지 않았다.[1] 1655년 8월 30일, 쿠퍼는 윌리엄 스펜서, 웜레이턴의 제2대 스펜서 남작의 딸이자 헨리 스펜서, 선덜랜드 제1대 백작의 여동생인 마가렛 스펜서(1627–1693)와 결혼했다.[1]
쿠퍼는 제2 보호령 의회에서 다시 윌트셔의 의원으로 선출되었지만[4] 1656년 9월 17일 의회가 열렸을 때 쿠퍼는 국무원이 의회에서 제외한 100명의 의원 중 한 명이었다.[1] 쿠퍼는 조지 부스 경이 전달한 제외에 항의하는 청원에 서명한 65명의 제외된 의원 중 한 명이었다.[1]

쿠퍼는 크롬웰이 제외된 의원들이 의회로 돌아갈 수 있도록 규정하는 겸손한 청원과 권고의 수정된 버전을 수락한 후, 1658년 1월 20일 의회에 복귀했다. 하원으로 돌아온 쿠퍼는 크롬웰의 또 다른 하원에 반대하여 발언했다.[1] 1659년 초 제3 보호령 의회에서 윌트셔 의원으로 선출된 쿠퍼는[4] 리처드 크롬웰을 호국경으로 인정하는 법안에 반대하며 공화당 측에 섰다.[1] 그는 겸손한 청원과 권고에 반대하고, 호국경의 민병대에 대한 통제를 제한하고 보호령의 입법 거부 능력을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1] 쿠퍼는 다시 새로운 귀족으로 구성된 또 다른 하원에 반대하고 옛 귀족원의 복원을 지지하여 발언했다.[1]
리처드 크롬웰이 1659년 4월 22일 의회를 해산하고 럼프 의회(1653년 올리버 크롬웰에 의해 해산됨)를 소집했을 때, 쿠퍼는 다운턴의 의원 자격을 주장하려 했다. 그는 또한 이 시기에 국무원에 재임명되었다.[1] 이 기간 동안 많은 사람들이 쿠퍼가 왕당파적 성향을 품고 있다고 비난했지만 쿠퍼는 이를 부인했다.[1] 1659년 8월, 쿠퍼는 조지 부스 경의 장로교 왕당파 반란에 연루된 혐의로 체포되었지만, 9월에 평의회는 그가 어떤 연루도 없다는 것을 발견했다.[1]
1659년 10월, 뉴 모델 육군은 럼프 의회를 해산하고 국무원을 자체 영국 안전 위원회로 대체했다.[1] 쿠퍼, 공화당원 아서 해즐리그 경과 헨리 네빌, 그리고 국무원의 다른 6명의 의원들은 비밀리에 계속 모임을 갖고 자신들을 정당한 국무원이라고 지칭했다.[1] 이 비밀 국무원은 조지 몽크 경, 스코틀랜드 군대의 사령관을 럼프를 복원할 수 있는 최고의 희망으로 여기게 되었고, 쿠퍼와 해즐리그는 몽크의 위원들과 만나 럼프를 복원할 것을 촉구했다. 쿠퍼는 친럼프 반란을 일으키려는 여러 음모에 관여했다.[1] 이는 1659년 12월 23일 군대가 럼프와 국무원을 지지하고 안전 위원회에 복종하지 않기로 결정하면서 불필요해졌다.[1] 럼프 의회는 1659년 12월 26일에 다시 소집되었고, 1660년 1월 2일 쿠퍼는 국무원에 선출되었다.[1] 1659년 1월 7일, 특별 위원회가 분쟁 중인 1640년 다운턴 선거에 대해 보고했고 쿠퍼는 마침내 다운턴의 의원 자격을 얻게 되었다.[1]

몽크 장군이 런던으로 진군하자, 몽크는 럼프 의회가 그를 군대의 총사령관으로 확인하려 하지 않자 불쾌해했다.[1] 쿠퍼의 권유로 몽크의 군대가 런던으로 진군했고, 몽크는 의회에 럼프 의회의 공석을 보궐 선거로 채워야 한다고 주장하는 서한을 보냈다.[1] 럼프가 이러한 보궐 선거에서 출마할 수 있는 사람에 대한 제한을 가하겠다고 주장하자, 쿠퍼는 몽크에게 그 대신 프라이드의 숙청으로 제외된 롱 의회의 의원들을 복귀시키라고 주장했고 몽크는 1660년 2월 21일에 이에 응했다.[1] 이틀 후, 복원된 롱 의회는 다시 쿠퍼를 국무원으로 선출했다. 1660년 3월 16일, 롱 의회는 마침내 자체 해산을 투표했다.
1660년 봄부터 쿠퍼는 왕당파에 더 가까이 다가갔다. 4월 중순까지 그는 조건부 복고만을 선호했던 것으로 보인다. 1660년 4월 그는 관습 의회에서 윌트셔의 국회의원으로 재선되었다.[4] 4월 25일 그는 무조건적 복고에 찬성표를 던졌다.[1] 5월 8일, 관습 의회는 쿠퍼를 헤이그로 가서 찰스 2세에게 잉글랜드로 돌아오도록 초청할 12명의 위원 중 한 명으로 임명했다.[1]
5. 왕정복고와 정치 활동 (1660-1683)
1660년, 섀프츠베리 백작은 찰스 2세에게 잉글랜드로 돌아오도록 초청하는 위원 중 한 명으로 임명되었다.[1] 그는 찰스 2세의 추밀원에 임명되었고, 1661년 애슐리 남작으로 서임되었다.[1] 쿠퍼는 5월 말 찰스와 함께 영국으로 돌아왔으며, 찰스는 몽크 장군과 쿠퍼 부인의 삼촌인 토머스 리즐리의 추천으로 1660년 5월 27일 쿠퍼를 추밀원에 임명했다.[1] 쿠퍼는 브레다 선언을 이용하여 1660년 6월 27일 잉글랜드 연방 지지에 대한 공식적인 사면을 받았다.[1] 이 기간 동안 그는 추밀원의 무역 위원회를 재편성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1]
그리하여 쿠퍼는 소집 의회에서 정부의 대변인이 되었다.[1] 그러나, 사면 및 망각 법안에 대한 토론에서 쿠퍼는 잉글랜드 내전 동안 의회 편에 섰거나 크롬웰 정권과 협력한 사람들에 대한 관대함을 촉구했다.[1] 그는 찰스 1세를 처형하기로 한 결정에 개인적으로 관여하여 그의 재판과 처형에 참여한 사람들만 일반 사면에서 제외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1] 이 견해가 우세했다. 1660년 8월 29일 사면 및 망각 법안이 법으로 제정된 후, 쿠퍼는 레지사이드를 재판하는 특별 위원회에 참여했으며, 이 자격으로 잉글랜드 공화정 시대에 협력했던 동료들, 즉 휴 피터스, 토머스 해리슨, 토머스 스콧 등 여러 명에게 사형을 선고하는 데 참여했다.[1] 오랫동안 육군 궁정의 적이었던 쿠퍼는 보유 폐지 법안에 대한 토론에서 롱 의회가 궁정 폐지에 따른 수입 손실을 보상하기 위해 부과한 소비세를 유지하는 것을 지지했다.[1]
1661년 4월 20일,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대관식을 하기 3일 전, 찰스 2세는 대관식 영예를 발표했으며, 그 영예에서 쿠퍼를 윈본 세인트 자일스의 '''애슐리 남작'''으로 만들었다.[1]
5. 1. 왕정복고 초기 (1660-1672)
1660년, 섀프츠베리 백작은 찰스 2세에게 잉글랜드로 돌아오도록 초청하는 위원 중 한 명으로 임명되었다.[1] 그는 찰스 2세의 추밀원에 임명되었고, 1661년 애슐리 남작으로 서임되었다.[1] 애슐리 경은 기사 의회에서 정부 대변인으로 활동하며, 사면 및 망각 법안 토론에서 관용을 촉구했다.[1] 그는 찰스 1세 처형에 관여한 사람들만 일반 사면에서 제외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아서 헤즐리지 등 몇몇의 목숨을 구했다.1661년 5월 11일, 국왕은 애슐리를 재무부 장관 겸 부재무관으로 임명했다.[1] 1666년 런던 대화재가 발생하고, 애슐리는 요양을 위해 옥스퍼드를 방문하여 존 로크를 만나 그의 사상에 감명을 받아 사설 비서로 두었다.[1]
1661년~1662년, 애슐리는 찰스가 브라간사 여왕 카타리나와 결혼하는 것을 반대했는데, 그 이유는 이 결혼이 포르투갈 왕국을 지원하고, 프랑스 왕국을 합스부르크 스페인에 맞서도록 하는 결과를 낳을 것이기 때문이었다.[1] 애슐리는 잉글랜드를 프랑스 영향권으로 옮기는 정책에 반대했다.[1] 이 논쟁은 클래런던 백작 에드워드 하이드가 설계한 정책에 반대하는 결과를 가져와 클래런던과의 오랜 정치적 경쟁의 시작을 알렸다.[1]

기사 의회가 클래런던 법전을 제정하려 할 때, 애슐리는 개신교 이탈자들에 대한 온건한 정책을 지지했다.[1] 1662년 7월, 애슐리는 통일령에 대한 수정안을 후원하여 개신교 비국교도들이 늦게나마 서명할 수 있도록 허용하고, 온건한 이탈자들에게 복종할 수 있는 추가적인 기회를 제공했다.[1] 1662년 후반, 애슐리는 헨리 베넷 경, 브리스톨 백작, 로버츠 경과 함께 찰스에게 평화로운 개신교 비국교도와 충성스러운 가톨릭 신자들을 통일령에서 면제해 줄 것을 촉구했다.[1] 이로 인해 찰스는 1662년 12월 26일 최초의 관용 선언을 발표했으나, 1663년 2월 철회해야 했다.[1] 애슐리는 이후 로버츠 경의 면제 법안을 지지했는데, 이 법안은 가톨릭 신자가 아닌 개신교 비국교도들을 통일령에서 면제하는 것이었다.[1]
1663년 5월, 애슐리는 북미의 광대한 토지에 대한 소유권을 부여받은 8명의 영주 소유주 중 한 명이 되었고, 이 토지는 결국 캐롤라이나 주가 되었다.[1] 애슐리와 그의 조수 존 로크는 캐롤라이나 주를 위한 대모델로 알려진 식민지에 대한 계획을 작성했다.

1664년 초, 애슐리는 로더데일 공작 존 메이틀랜드의 측근이었으며, 그들은 클래런던 경에 반대하는 입장에 섰다. 1664년 5월 비밀 집회 법안에 대한 논쟁에서, 애슐리는 하원에서 처음 제안한 벌금의 가혹함을 완화할 것을 제안했다.[1] 1665년 8월, 국왕은 윔본 세인트 자일스에서 애슐리를 깜짝 방문했고, 이후 방문에서 애슐리에게 자신의 사생아 아들 먼머스 공작 제임스 스코트를 소개했다.[1]
제2차 영국-네덜란드 전쟁은 1665년 3월 4일에 시작되었다.[1] 1666년~1667년 의회 회기 동안 애슐리는 버킹엄 공작 조지 빌리어스가 제안한 아일랜드 소의 잉글랜드 수입을 막는 것을 목표로 하는 아일랜드 가축 법안을 지지했다.[1]
1667년 5월 사우스햄튼이 사망했을 때, 부재무관으로서 애슐리는 대재무경이 될 것으로 예상되었으나, 찰스 국왕은 사우스햄튼을 알버말 공작 조지 멍크가 재무부의 제1경으로 있는 9명의 재무 위원회로 교체하기로 결정했고 애슐리는 이 시기에 9명의 재무 위원 중 한 명으로 임명되었다.[1]
제2차 영국-네덜란드 전쟁에서 잉글랜드의 실패로 인해 찰스 2세는 1667년 8월 31일 클래런던 백작을 대법관에서 해임했다.[1] 궁정은 클래런던을 탄핵하려 했으나, 애슐리는 클래런던에 맞서는 싸움에 합류하는 것을 거부하고, 클래런던을 런던탑에 반역죄로 구금하려는 동의에 반대했다.[1]
1667년 클래런던 경이 몰락한 후, 애슐리 경은 카발 내각의 저명한 구성원이 되었다.[1] 그러나, 실제로는 카발의 구성원들은 일관된 장관 팀을 구성하지 않았다.[1] 애슐리는 국왕의 가장 강력한 고문단인 추밀원의 외교 문제 위원회에 합류하지 못했다.[1] 1668년 1월, 추밀원의 위원회가 개편되었지만, 애슐리는 무역 및 식민지 위원회에서 두드러진 지위를 유지했다.[1]
1668년 5월, 애슐리는 병에 걸렸는데, 낭종인 것으로 보인다.[1] 그의 비서인 존 로크는 수술을 권했고, 이는 거의 확실히 애슐리의 생명을 구했다.[1]
1669년, 애슐리는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왕국의 정치적 연합에 대한 알링턴과 버킹엄의 제안을 지지했지만, 이 제안은 스코틀랜드가 의회에서 잉글랜드와 동등한 대표성을 주장했을 때 좌초되었다.[1]
애슐리는 캐롤라이나 주의 8명 영주 소유주 중 한 명으로서, 비서인 존 로크와 함께 1669년 3월 8명의 영주 소유주가 채택한 캐롤라이나의 기본 헌장을 작성했다.[1]
이 시점에서 캐서린 왕비가 불임이고 결코 상속자를 낳지 못할 것이라는 것이 분명해졌고, 찰스 왕의 형제인 요크 공작 제임스가 왕위 계승자가 되었는데, 이는 애슐리가 제임스가 로마 가톨릭교도라고 의심했기 때문에 그를 걱정시켰다.[1] 애슐리와 버킹엄은 찰스에게 그의 사생아 아들 먼머스 공작을 합법으로 선언하도록 촉구했고, 카알라일 백작 찰스 하워드도 그렇게 했다.[1] 국왕이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 분명해지자, 그들은 그에게 캐서린과 이혼하고 재혼하라고 촉구했다.[1] 1670년 3월, 로스 경은 의회에 재혼을 허용해 달라고 요청했고, 애슐리는 결혼이 성사가 아닌 시민 계약이라고 주장하며 로스 이혼 법안을 강력히 옹호했다.[1]

애슐리는 1670년 5월 22일에 서명된 도버 비밀 조약에 대해 알지 못했는데, 이 조약에 따라 찰스 2세는 네덜란드 공화국에 대항하여 프랑스의 루이 14세와 동맹을 맺었다.[1] 애슐리, 버킹엄, 로더데일의 편의를 위해 찰스 2세는 프랑스와 동맹을 맺는 모의 조약(''traité simulé'')을 주선했다.[1] 프랑스를 의심했음에도 불구하고, 애슐리는 또한 네덜란드 상업 경쟁에 경계했고, 따라서 1670년 12월 21일 모의 도버 조약에 서명했다.[1]
1671년 내내 애슐리는 식민지 설탕 재배자들에게 불리한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설탕 수입에 대한 관세를 줄이는 것을 옹호했다.[1] 1671년 9월, 애슐리와 클리포드는 잉글랜드의 관세 제도를 대대적으로 개혁하여 관세 농부를 관세를 징수할 책임이 있는 왕실 위원으로 대체했다.[1] 애슐리는 재무부 대정지에 대해 널리 비난을 받았지만, 클리포드가 실제로 재무부 정지를 가장 옹호했고 애슐리는 실제로 그 조치에 반대했다.[1]
1672년 초, 제3차 영국-네덜란드 전쟁이 임박함에 따라 정부 내 많은 사람들이 잉글랜드의 개신교 반대자들이 제5열을 형성하고 그들의 네덜란드 동족을 잉글랜드에 대항하여 지원할 것을 두려워했다.[1] 비국교도들을 회유하려는 시도로, 1672년 3월 15일 찰스 2세는 왕립 관용 선언을 발표하여 잉글랜드 교회 예배에 불참하는 사람들을 처벌하는 형법을 중단했다. 애슐리는 이 선언을 강력히 지지했다.[1]
도버 조약의 조건에 따라 잉글랜드는 1672년 4월 7일 네덜란드 공화국에 선전포고하여 제3차 영국-네덜란드 전쟁을 시작했다.[1] 전쟁 개시와 함께 찰스는 새로운 명예 수여식을 발표했는데, 그 일환으로 애슐리는 1672년 4월 23일 '''샤프츠버리 백작'''과 '''쿠퍼 남작'''으로 임명되었다.[1]
1672년 가을, 샤프츠버리는 바하마 모험가 회사를 설립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6]
5. 2. 카발 내각과 대법관 시절 (1672-1673)
1667년 클래런던 백작이 몰락한 후, 섀프츠베리 백작은 찰스 2세의 카발 내각에서 주요 구성원으로 활동했다.[1] 카발은 클리퍼드, 알링턴, 버킹엄, 애슐리, 로더데일의 다섯 명으로 구성되었으며, 이들의 머리글자를 따서 "카발(Cabal)"이라고 불렀다. 섀프츠베리는 무역 위원회 위원장으로서 허드슨 만 회사 설립 및 정비에 힘썼고, 13개 식민지 중 노스캐롤라이나, 사우스캐롤라이나 식민을 추진하여, 현지에 "애슐리 강", "쿠퍼 강"이라는 지명을 남겼다.[1] 또한 잉글랜드 농업 보호를 위해 아일랜드산 소의 수입을 제한했으며, 스코틀랜드와의 의회 합동을 모색했으나 스코틀랜드 의회의 반대로 좌절되었다.[1]
1672년 11월 17일, 섀프츠베리는 대법관에 임명되었다.[1] 그는 보통법에 대한 훈련을 받지 않고 이 직위에 임명된 마지막 사람이었다.[7] 1673년 기사 의회 개회 연설에서 섀프츠베리는 의회에 전쟁 수행에 충분한 자금 투표를 촉구하며, 네덜란드를 잉글랜드의 주된 무역 경쟁자로 규정하고 파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델렌다 에스트 카르타고''").[1]
그러나 섀프츠베리는 자일스 스트랭웨이즈 대령이 주도한 하원의 선거 영장 공격으로 어려움을 겪었다.[1] 스트랭웨이즈는 섀프츠베리가 자신의 지지자들로 하원을 채우려 한다고 주장했고, 하원은 이에 동의하여 선거를 무효화했다.[1] 또한 하원은 찰스 2세의 관용 선언을 공격하고 철회를 요구했으며, 결국 왕은 관용 선언을 취소했다.[1]
하원은 1673년 심사법을 통과시켜 잉글랜드 내 모든 문무관직 보유자가 성변화의 가톨릭 교리를 부인하는 선언을 하도록 규정했다.[1] 섀프츠베리는 심사법을 지지했으며,[1] 제임스 스콧, 1대 몬머스 공작과 함께 성찬을 받았다.[1]
요크 공작이 1673년 부활절에 성공회 성찬을 받지 않자, 섀프츠베리는 그가 비밀리에 가톨릭 신자라는 우려를 하게 되었다.[1] 섀프츠베리는 요크 공작의 모데나의 메리와의 결혼으로 가톨릭 군주 계승 가능성이 제기되자, 의회에서 이 결혼을 비난하는 동의안을 통과시키도록 했다.[1] 섀프츠베리, 알링턴 등은 찰스 2세에게 브라간사의 캐서린과 이혼하고 개신교 공주와 재혼할 것을 촉구했다.[1] 요크 공작은 섀프츠베리를 비난했고, 찰스 2세는 1673년 11월 9일 섀프츠베리를 대법관직에서 해임했다.[1]
5. 3. 가톨릭 반대와 찰스 2세와의 결별 (1673-1674)
1672년 찰스 2세가 신앙 자유 선언을 발표하여 종교적 단속을 완화하자, 국교도들은 이에 반발했다. 하원은 신앙 자유 선언 철회를 요구했고, 1673년 심사법을 통과시켜 공직 임명 시 국교회식 선서를 의무화했다. 섀프츠베리는 심사법에 소극적으로 찬성했지만, 비국교회 프로테스탄트에게도 적용되자 복잡한 심경을 느꼈다.1674년 1월 7일, 기사 의회 회기에서 섀프츠베리는 잉글랜드를 교황주의로부터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1] 그는 가톨릭교도 왕위 계승에 반대하는 덴질 홀리스, 초대 홀리스 남작등 여러 귀족들과 협력했다.[1]

섀프츠베리는 요크 공작 제임스(훗날 제임스 2세)가 가톨릭 신자라는 소문이 돌자, 그를 왕위 계승에서 제외하려는 움직임을 주도했다. 찰스 2세에게는 적자가 없었고, 섀프츠베리는 서자인 먼머스 공작을 후계자로 옹립하려 했다. 이를 위해 찰스 2세와 왕비 카탈리나의 이혼을 주장하기도 했다. 2월, 반대파 귀족들은 요크 공작을 영국의 대역죄로 고발하려 했고, 찰스 2세는 동생을 보호하기 위해 의회를 휴회시켰다.[1]
섀프츠베리는 프랑스와의 도버 밀약(1670년)에 따라 찰스 2세가 가톨릭으로 개종할 가능성에 대해 우려했다. 그는 친프랑스 정책에 반대하며 스페인 파와 동맹을 맺고 네덜란드와의 평화를 촉구했다.[1] 1673년 11월, 프랑스 대사는 섀프츠베리에게 친프랑스 정책 지지를 대가로 뇌물을 제안했지만, 섀프츠베리는 이를 거절했다.[1]
섀프츠베리의 이러한 행동은 찰스 2세를 분노하게 했다. 1674년 5월 19일, 섀프츠베리는 추밀원에서 추방되고 도싯 주 지사에서 해임되었으며, 런던을 떠나라는 명령을 받았다.[1] 한편, 섀프츠베리의 정적 댄비 백작 토머스 오스본이 찰스 2세의 측근으로 새롭게 부상하게 된다.
5. 4. 댄비 백작 반대와 휘그당 형성 (1674-1678)

찰스 2세는 카발 내각이 몰락한 이후 토머스 오스본, 댄비 백작에게 의지하게 되었으며, 댄비는 이전의 기사당원과 확립된 잉글랜드 교회의 지지자들로부터 지지를 받았다.[1] 댄비는 가톨릭교도와 개신교 비국교도 모두에게 징벌법을 엄격하게 적용하는 것을 선호하는 잉글랜드 교회의 옹호자였다.[1]
1675년, 섀프츠베리 백작은 댄비의 서약 법안에 반대하며, 특정 상황에서는 국왕의 장관에게 저항하는 것이 합법적이며, 프로테스탄트 종교 개혁의 경우처럼 교회를 복원하기 위해 때때로 교회를 변경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1] 그의 견해는 의회에서 소수였고, 법안 통과를 막기 위해 국왕은 의회를 연기해야 했다.[1]

섀프츠베리 백작은 존 로크와 함께 댄비의 정책을 비판하는 15,000단어 분량의 팸플릿 ''A Letter from a Person of Quality to his Friend in the Country''를 작성, 출판했다.[1] 이 팸플릿은 잉글랜드 왕정 복고 이후 "고위 감독교회 신자들과 옛 기사당원"이 "정부를 절대 군주제적이고 자의적으로" 만들려고 공모했다고 주장하며, 왕권신수설과 왕권신수적 주교제를 확립하려 한다고 비판했다.[1] 이 팸플릿은 1675년 11월 익명으로 출판되어 베스트셀러가 되었다.[1]
1675년 10월-11월 의회에서 섀프츠베리는 ''A Letter from a Person of Quality''의 주장을 반복했다. 그는 모든 국왕은 귀족을 통해서만 통치할 수 있거나 상비군을 통해서만 통치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귀족의 권력을 제한하려는 시도는 상비군을 통해 국가를 통치하려는 음모의 일부라고 경고했다.[1]
1677년, 섀프츠베리 백작은 장기 의회 해산을 주장하며 런던탑에 투옥되었다.[1] 그는 인신 보호 영장을 킹스벤치 법원에 제출했지만, 법원은 상위 법원인 의회가 회기 중이라는 이유로 관할권이 없다고 결정했다.[1] 찰스는 프랑스와의 전쟁을 위해 군대를 모집하는 척했지만, 섀프츠베리는 찰스가 실제로는 의회를 폐지하고 루이 14세의 모델에 따라 상비군으로 국가를 통치할 준비를 하고 있다고 우려했다.[1] 1678년 2월, 섀프츠베리는 국왕과 의회에 사과하고 석방되었다.[1]

1678년, 타이터스 오츠가 주장한 가톨릭 음모는 큰 파장을 일으켰다. 섀프츠베리는 가톨릭 음모에 대처하기 위해 만들어진 상원 위원회에서 활동하며, 1678년 심사법을 지지하여 가톨릭교도를 의회에서 배제했다.[1] 런던 시민들은 섀프츠베리를 보호하기 위한 경비대를 지불할 정도로 그를 개신교 영웅으로 여겼다.[1]
1678년 12월, 댄비 백작 탄핵 논의가 시작되자 찰스 2세는 의회를 연기했고, 1679년 1월에는 기사당 의회를 해산했다.[1]
5. 5. 배제 위기와 휘그당 지도자 (1679-1683)
1678년 타이터스 오츠의 가톨릭 음모 폭로는 반가톨릭 정서를 고조시켰고, 섀프츠베리 백작은 이를 최대한 활용하여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했다. 런던 각지의 술집에서 "휘그"라고 불리기 시작한 사람들을 조직했을 뿐만 아니라, "사악한 가톨릭"과 "암흑의 전제 정치"의 이중 공포가 잉글랜드를 삼키려 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 전략은 성공하여 1679년 총선에서 휘그당이 압승했고, 댄비는 프랑스와의 밀약을 비난받아 실각, 런던 탑에 투옥되었다.찰스 2세는 의회를 런던을 피하여 옥스퍼드에서 열었고, 섀프츠베리 백작은 요크 공작 제임스의 왕위 계승권을 박탈하는 왕위 배제 법안을 제출했다. 이 법안은 1679년부터 1681년에 걸쳐 하원 가결, 상원 부결, 의회 해산, 재소집, 재제출을 반복했다. 찰스 2세는 샤프츠베리가 배제법안에 열성적인 이유를 관직에 오르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고, 추밀원 의장에 임명했지만, 샤프츠베리는 찰스 2세에게 왕비 캐서린과의 이혼을 강요하며 물러서지 않았다.
옥스퍼드에서 법안 통과가 실패하자, 섀프츠베리는 런던 시민들의 여론을 등에 업고 배제법안 통과를 시도했지만, 찰스 2세의 반격으로 대역죄 혐의를 받고 런던탑에 투옥되었다. "가톨릭의 여러 음모 뒤에서 요크 공작 제임스가 배후 조종을 하고 있다"는 소문은 사실이었지만, 정부는 그것을 섀프츠베리에게 뒤집어씌우려 했다.
1682년, 섀프츠베리 백작은 몬머스 공작을 옹립하는 무장 봉기를 계획했으나, 실행 방법을 두고 내부 갈등을 겪는 사이에 당국에 발각되어 실패했다. 섀프츠베리 등 관계자는 수배자가 되었고, 제임스의 국왕 즉위는 기정사실이 되었다. 섀프츠베리는 망명과 죽음, 두 가지 선택에 직면하여 1682년 11월 말경, 빚을 아내와 손자 앤서니에게 떠넘기고 몰래 고국을 떠나 네덜란드로 망명했다. 12월 2일 암스테르담에 도착한 후, 건강이 급속도로 악화되어, 1683년 1월 21일, 61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6. 유산
쿠퍼 강[11]과 애슐리 강은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애슐리강은 탐험가 로버트 샌드포드에 의해 현재의 이름을 얻었다.[12]
섀프츠베리는 프레데릭 페이즐리가 출연한 ''더 퍼스트 처칠스''(1969), 마틴 프리먼이 출연한 ''찰스 2세: 권력과 열정''(Charles II: The Power and The Passion) 그리고 머레이 멜빈이 출연한 ''잉글랜드, 마이 잉글랜드''(England, My England)(1995)에서 스크린으로 묘사되었다. 섀프츠베리는 문학계에서는 호의적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했지만, 토리당에서는 "얄팍한 기회주의자"로 여겨졌다. 시세를 파악하는 데 민감하고 강자에게 굴종하는 일도 적지 않았기 때문에 이러한 지적은 여전히 많다. 그러나 초창기 휘그 세력을 제한적으로나마 조직화한 것은 사실이며, 이 세력이 후에 명예 혁명을 일으키게 되었다.
더욱이 섀프츠베리가 가톨릭 왕위 계승을 어떻게든 막으려고 분주하게 움직인 것은 단순한 기회주의자라는 것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 이 점에 있어서 19세기의 성직자이자 섀프츠베리를 연구한 버넷은 "자신의 사상을 펼쳐야 할 시기와 방법에 뛰어난 수완을 발휘했고, 그 때문에 인간 관계를 저버리는──개인적인 수준에서 '배신하는'──일도 꺼리지 않았다", "무언가를 구축하는 것이 아니라, 비판하고 파괴하는 데 있어서는 위대한 지도자였다"[13]라고 평가했다.
7. 관련 작품
섀프츠베리 백작은 존 딕슨 카의 추리 소설 「에드먼드 고드프리 경 살해 사건」(국서간행회, 1991)에 등장인물로 나온다. 이 소설은 가톨릭 음모 사건과 관련된 미해결 살인 사건을 주제로 한다. 또한, 섀프츠베리는 프레데릭 페이즐리(Frederick Peisley)가 출연한 ''더 퍼스트 처칠스''(The First Churchills, 1969), 마틴 프리먼(Martin Freeman)이 출연한 ''찰스 2세: 권력과 열정''(Charles II: The Power and The Passion), 머레이 멜빈(Murray Melvin)이 출연한 ''잉글랜드, 마이 잉글랜드''(England, My England, 1995)에서 스크린으로 묘사되었다.
참조
[1]
서적
"Cooper, Anthony Ashley"
Oxford University Press
2004–2007
[2]
웹사이트
'Alumni Oxonienses, 1500–1714: Colericke-Coverley'
http://www.british-h[...]
2011-06-14
[3]
문서
[4]
웹사이트
History of Parliament Online – Cooper, Sir Anthony Ashley
http://www.historyof[...]
[5]
웹사이트
Cooper, Anthony Ashley (First Earl of Shaftesbury)
https://www.ncpedia.[...]
2020-06-09
[6]
서적
The Royal African Company
https://www.worldcat[...]
Routledge/Thoemmes Press
1999
[7]
서적
An Introduction to English Legal History
https://books.google[...]
Oxford University Press
2023-08-26
[8]
논문
The First Earl of Shaftesbury's Resolute Conscience and Aristocratic Constitutionalism
2021-09-03
[9]
논문
The First Earl of Shaftesbury's Resolute Conscience and Aristocratic Constitutionalism
2021-09-03
[10]
웹사이트
Anthony Shaftsbury (supplementary material)
https://www.oldbaile[...]
2019-01-26
[11]
서적
The History of South Carolina Under the Proprietary Government, 1670-1719, Volume 1
Heritage Books
1897
[12]
간행물
A Relation of a Voyage on the Coast of the Province of Carolina, 1666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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