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모리 내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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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2차 모리 내각은 2000년 4월 5일부터 2001년 4월 26일까지 일본의 총리 모리 요시로에 의해 조직된 내각이다. 오부치 게이조 총리의 갑작스러운 사임으로 인해 제1차 모리 내각이 직무 대행 내각의 성격을 띠면서, 모리 총리가 실질적인 인사권을 행사한 제2차 내각이 사실상 첫 번째 모리 내각으로 여겨진다. 자유민주당, 공명당, 보수당의 연립 내각이었으며, 하시모토 류타로 내각에서 시작된 행정 개혁을 이어받아 여러 부처의 통폐합, 개칭, 신설을 추진했다. 잦은 실언과 스캔들, 그리고 정부 관계자들의 사퇴로 인해 지지율이 하락했고, 2001년 봄 모리 총리는 자민당 총재 선거를 앞당기겠다고 발표하며 사퇴를 선언, 고이즈미 준이치로가 후임으로 선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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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모리 내각 | |
---|---|
개요 | |
![]() | |
내각 명칭 | 제2차 모리 내각 |
내각 종류 | 해당 없음 |
내각 번호 | 86대 |
관할 | 일본 |
출범일 | 2000년 7월 4일 |
해산일 | 2000년 12월 5일 |
정부 수반 | 모리 요시로 |
부총리 | 해당 없음 |
국가 원수 | 아키히토 천황 |
각료 수 | 해당 없음 |
이전 각료 수 | 해당 없음 |
총 수 | 해당 없음 |
정당 | 자민당-공명당-보수신당 연립 |
의회 현황 | 다수 연립 |
야당 내각 | 해당 없음 |
야당 | 민주당 |
야당 대표 | 하토야마 유키오 |
선거 | 2000년 총선 |
마지막 선거 | 해당 없음 |
의회 임기 | 해당 없음 |
예산 | 해당 없음 |
자문 및 동의 1 | 해당 없음 |
이전 내각 구성 | 해당 없음 |
다음 내각 구성 | 해당 없음 |
이전 내각 | 제1차 모리 내각 |
다음 내각 | 제2차 모리 내각 (2001년 중앙 정부 개혁 이전 개각) |
2. 성립 배경 및 과정
제1차 모리 내각은 오부치 게이조 전 총리의 갑작스러운 병환으로 사임하면서 급하게 조직된 내각으로, 사실상 직무 대행 성격이 강했다. 따라서 모리 요시로 총리가 실질적인 인사권을 행사하여 구성한 제2차 모리 내각이 사실상의 첫 모리 내각이라고 할 수 있다.[1] 이 내각은 자유민주당, 공명당, 보수당의 연립 내각이었다.
2. 1. 오부치 게이조 총리의 갑작스러운 사임
오부치 게이조 총리의 갑작스러운 사임으로 제1차 모리 내각이 출범했지만, 이는 사실상 임시 내각의 성격이 강했다. 제2차 모리 내각은 모리 총리가 독자적인 인사권을 행사하여 구성한 첫 내각이라는 의미를 가진다.[1] 이 내각은 자유민주당, 공명당, 보수당의 연립 내각이었다.[1]2. 2. 2000년 중의원 선거와 제2차 모리 내각 출범
제1차 모리 내각은 '모리 내각'이라는 이름을 가졌지만, 오부치 게이조 전 총리의 병환으로 인한 사임으로 급하게 조직된 직무 대행 내각의 성격이 강했다. 따라서 모리 총리가 실질적인 인사권을 행사한 것은 제2차 모리 내각부터였기에, 이 내각이 사실상의 초대 모리 내각이라고 할 수 있다. 자유민주당, 공명당, 보수당의 연립 내각이었다.[3][4]이 내각은 내각 개조가 이루어진 2000년 12월 5일까지 존속했다. 이른바 신의 나라 해산으로 불리는 총선거 이후 조각 과정에서, 모리 총리는 미야자와 기이치 재무상, 코노 요헤이 외상, 사카이야 타이치 경제기획청 장관 등 주요 각료를 유임시켰다. 내각관방장관은 아오키 미키오에서 모리 총리의 측근이자 간사장 대리였던 나카가와 히데나오로 교체되었다.[19][20]
전임 오부치 내각 개조 및 당직 인사에서 오부치에게 거부당했던 가토파의 코자토 사다토시가 총무회장에 임명되었고, 야마자키파의 호오카 코우지가 입각하는 등 가토파와 야마자키파에 대한 일정한 배려가 이루어졌다.
민간 출신인 카와구치 준코의 기용이 화제가 되었고, 히라누마 타케오, 쓰시마 유지 등 실력자들이 입각했지만, 전체적으로는 중앙성청 재편 이전까지의 잠정적인 진용이라는 성격이 강해, 입각 희망자를 많이 모은 "재고 일소" 내각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금융재생위원회 위원장이었던 쿠세 공요는 참의원 비례 선거에서 대형 맨션 회사로부터 당비를 대신 납부받고 자민당 비례 명부 상위에 등재되어 당선된 사실이 드러나, 26일도 채 되지 않아 경질되었다. 후임으로는 아이자와 히데유키가 취임했다.
10월에는 나카가와 관방장관의 "여성 문제"가 주간지에 보도되어 사임하게 되었다. 후임으로 고이즈미 준이치로가 거론되었으나, 고이즈미는 "나는 부인 역할에는 맞지 않는다"라며 고사했고, 같은 모리파의 후쿠다 야스오를 추천하여 후쿠다가 취임했다.[20] 후쿠다는 제2차 고이즈미 내각에서 연금 미납 문제로 사임할 때까지 관방장관을 역임하여, 스가 요시히데에 이어 역대 2위의 기록을 가지고 있다.
직명 | 성명 | 담당 사항 | 소속 등 | |
---|---|---|---|---|
내각관방부장관 | ||||
아베 신조(安倍晋三) | 정무 담당 | 중의원 자유민주당 (모리파) | ||
![]() | 우에노 코세이(上野公成) | 참의원 자유민주당 (모리파) | ||
후루카와 테이지로(古川貞二郎) | 사무 담당 | 후생 사무차관 | ||
내각위기관리감 | ||||
안도 타다오(安藤忠夫) | 경찰 관료 | |||
내각법제국장관 | ||||
츠노 오사무(津野修) | 대장 관료 |
중의원 절대 다수 (480석 중 241석) 필요 | |||
---|---|---|---|
후보 | 1차 투표 | ||
득표수 | |||
width="1" bgcolor="green"| | 모리 요시로 | ||
bgcolor="red"| | 하토야마 유키오 | ||
bgcolor="red"| | 오자와 이치로 | ||
bgcolor="red"| | 후와 테쓰조 | ||
bgcolor="red"| | 도이 타카코 | ||
bgcolor="red"| | 카키자와 고지 | ||
bgcolor="red"| | 토쿠다 토라오 | ||
bgcolor="red"| | 시이나 모토오|椎名素夫일본어 | ||
bgcolor="gray"| | 기권 (무효표 포함) |
하시모토 류타로 총리 시절부터 추진된 중앙 성청 재편은 모리 요시로 내각에서 본격적으로 시행되었다.[3][4] 2000년 12월, 제2차 모리 내각은 대대적인 개각을 단행하여 장관들을 교체하고, 정부 조직 개편에 대비해 각료 포트폴리오를 재분배했으며,[5] 하시모토 류타로는 행정 개혁을 완수하기 위해 다시 내각에 합류했다.[5]
3. 주요 정책 및 활동
이듬해인 2001년 1월, 제2차 모리 내각은 부처 및 기관 개편을 시행했다. 총리실 권한이 강화되었고, 부처 통폐합을 통해 장관 수가 줄었다. 내무성, 총무청, 우정청이 통합되어 총무성이 신설된 것이 대표적인 사례이다.[6]
2001년 1월 23일에는 경제재정담당상 누카가 후쿠시로가 뇌물 수수 의혹으로 사임하고, 아소 다로가 그 자리를 이어받았다.[18]
3. 1. 중앙 성청 재편
하시모토 류타로 총리 시절 시작된 행정 개혁은 모리 요시로 정권의 두 번째 임기 동안 시행되어 여러 부처와 각료직의 통폐합, 개칭 또는 신설이 이루어졌다.[3][4] 2000년 12월에 이루어진 첫 번째 개각에서는 다수의 장관이 교체되었고 정부 조직 개편을 예상하여 각료 포트폴리오가 재분배되었다. 하시모토 류타로는 정부 개혁을 더욱 추진하기 위해 내각에 복귀했다.[5] 한 달 후 두 번째 개각이 있었지만 장관 교체는 없었고 대신 부처와 기관의 개편이 시행되었다. 총리실의 권한이 강화되었고 부처 통폐합을 통해 장관 수가 감소했다. 예를 들어, 내무성, 총무청, 우정청은 통합되어 총무성이 되었다.[6]
3. 1. 1. 주요 부처 개편 내용
하시모토 류타로 총리 시절 시작된 행정 개혁은 모리 정권의 두 번째 임기 동안 시행되어 여러 부처와 각료직의 통폐합, 개칭 또는 신설이 이루어졌다.[3][4]
2000년 12월, 제2차 모리 내각의 첫 번째 개각에서 다수의 장관이 교체되었고 정부 조직 개편을 예상하여 각료 포트폴리오가 재분배되었다. 하시모토는 정부 개혁을 더욱 추진하기 위해 내각에 복귀했다.[5] 한 달 후 두 번째 개각에서는 장관 교체 없이 부처와 기관의 개편이 시행되었다. 총리실의 권한이 강화되었고 부처 통폐합을 통해 장관 수가 감소했다. 예를 들어, 내무성, 총무청, 우정청은 통합되어 총무성이 되었다.[6]
2000년 12월 5일부터 2001년 1월 6일까지의 제2차 모리 내각은 다음과 같다.
담당 | 장관 | 임기 |
---|---|---|
총리 | 모리 요시로 | 2000년 4월 5일 - 2001년 4월 26일 |
법무대신 | 고무라 마사히코 | 2000년 12월 5일 - 2001년 4월 26일 |
외무대신 | 고노 요헤이 | 1999년 10월 5일 - 2001년 4월 26일 |
재무대신 | 미야자와 기이치 | 1998년 7월 30일 - 2001년 4월 26일 |
문부과학대신 겸 과학기술청 장관 | 마치무라 노부타카 | 2000년 12월 5일 - 2001년 1월 6일 |
보건복지대신 겸 노동대신 | 사카구치 치카라 | 2000년 12월 5일 - 2001년 1월 6일 |
농림수산대신 | 야쓰 요시오 | 2000년 12월 5일 - 2001년 4월 26일 |
통산대신 | 히라누마 타케오 | 2000년 7월 4일 - 2001년 1월 6일 |
운수대신 겸 건설대신 겸 홋카이도 개발청 청장 겸 국토청 장관 | 오기 치카게 | 2000년 7월 4일 - 2001년 1월 6일 |
우정대신 겸 내무대신 겸 관리조정청 장관 | 가타야마 도라노스케 | 2000년 12월 5일 - 2001년 1월 6일 |
관방장관 | 후쿠다 야스오 | 2000년 10월 27일 - 2004년 5월 7일 |
공안위원회 위원장 | 이부키 분메이 | 2000년 12월 5일 - 2001년 4월 26일 |
금융재건위원회 위원장 | 야나기사와 하쿠오 | 2000년 12월 5일 - 2001년 1월 6일 |
방위청 장관 | 사이토 도시쓰구 | 2000년 12월 5일 - 2001년 4월 26일 |
경제기획청 장관 | 누카가 후쿠시로 | 2000년 12월 5일 - 2001년 1월 6일 |
환경청 장관 | 가와구치 요리코 | 2000년 7월 4일 - 2001년 1월 6일 |
행정개혁 담당 국무대신 겸 오키나와 개발청 장관 | 하시모토 류타로 | 2000년 12월 5일 - 2001년 1월 6일 |
국무대신 (과학기술정책) | 사사가와 다카시 | 2000년 12월 5일 - 2001년 1월 6일 |
차관 | ||
관방부차관 (정무 - 중의원) | 아베 신조 | 2000년 7월 4일 - 2003년 9월 22일 |
관방부차관 (정무 - 참의원) | 우에노 코세이 | 2000년 7월 4일 - 2003년 9월 22일 |
관방부차관 (관료) | 후루카와 테이지로 | 1995년 2월 24일 - 2003년 9월 22일 |
2001년 1월 6일부터 2001년 4월 26일까지의 제2차 모리 내각은 다음과 같다.
직책 | 장관 | 임기 |
---|---|---|
총리 | 모리 요시로 | 2000년 4월 5일 - 2001년 4월 26일 |
재무대신 | 미야자와 기이치 | 1998년 7월 30일 - 2001년 4월 26일 |
총무대신 | 가타야마 도라노스케 | 2001년 1월 6일 - 2003년 9월 22일 |
법무대신 | 고무라 마사히코 | 2000년 12월 5일 - 2001년 4월 26일 |
외무대신 | 고노 요헤이 | 1999년 10월 5일 - 2001년 4월 26일 |
문부과학성 대신 | 마치무라 노부타카 | 2001년 1월 6일 - 2001년 4월 26일 |
후생노동대신 | 사카구치 치카라 | 2001년 1월 6일 - 2004년 9월 27일 |
농림수산대신 | 야쓰 요시오 | 2000년 12월 5일 - 2001년 4월 26일 |
경제산업대신 | 히라누마 타케오 | 2001년 1월 6일 - 2003년 9월 22일 |
국토교통대신 | 오기 치카게 | 2001년 1월 6일 - 2003년 9월 22일 |
환경대신 | 가와구치 요리코 | 2001년 1월 6일 - 2002년 2월 8일 |
내각관방장관 겸 여성부 장관 | 후쿠다 야스오 | 2000년 10월 27일 - 2004년 5월 7일 |
방위청 장관 | 사이토 도시츠구 | 2000년 12월 5일 - 2001년 4월 26일 |
국가공안위원회 장관 겸 재해 담당 대신 | 이부키 분메이 | 2000년 12월 5일 - 2001년 4월 26일 |
과학기술 담당 국무대신 | 사사가와 다카시 | 2001년 1월 6일 - 2001년 4월 26일 |
금융 담당 국무대신 | 야나기사와 하쿠오 | 2001년 1월 6일 - 2002년 9월 30일 |
경제재정 담당 국무대신 | 누카가 후쿠시로 | 2001년 1월 6일 - 2001년 1월 23일 |
아소 다로 | 2001년 1월 23일 - 2001년 4월 26일 | |
오키나와 및 북방 영토 담당 국무대신 겸 규제개혁 담당 국무대신 | 하시모토 류타로 | 2001년 1월 6일 - 2001년 4월 26일 |
차관 | ||
내각관방부장관 (정무 - 중의원) | 아베 신조 | 2000년 7월 4일 - 2003년 9월 22일 |
내각관방부장관 (정무 - 참의원) | 우에노 코세이 | 2000년 7월 4일 - 2003년 9월 22일 |
내각관방부장관 (관료) | 후루카와 테이지로 | 1995년 2월 24일 - 2003년 9월 22일 |
3. 2. IT 정책 추진
2001년 1월 23일 경제재정담당상 누카가 후쿠시로가 뇌물 수수 스캔들에 연루되어 사임하고, 아소 다로가 후임으로 임명되었다.[18]4. 내각 구성
제2차 모리 내각의 내각 구성은 다음과 같다.
신의 나라 해산으로 인한 총선거 이후 조각에서, 모리 총리는 미야자와 기이치 재무상, 고노 요헤이 외상, 사카이야 다이치 경제기획청 장관 등 주요 각료를 유임시켰고, 내각관방장관은 아오키 미키오에서 모리 총리 측근이자 간사장 대리인 나카가와 히데나오로 교체되었다.[19][20]
전임 오부치 내각 개조·당직원 인사에서 오부치에게 거부당했던 가토파의 코자토 사다토시가 총무회장에, 야마자키파의 호오카 코우지가 입각하여, 가토파·야마자키파에 일정 부분 배려를 보였다.
민간 출신 가와구치 요리코의 기용이 화제가 된 것 외에, 히라누마 다케오, 쓰시마 유지 등 실력자가 입각하기도 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는 중앙성청 재편까지의 잠정적인 진용이라는 색채가 강하여, 입각 희망자를 많이 모은 "재고 일소" 내각 등으로 불렸다.
금융재생위원회 위원장 구제 기미타카는 참의원 비례 선거에서 대형 맨션 회사로부터 당비를 대신 지불받고 자민당 비례 명부 상위에 등재되어 당선된 것이 발각되어 26일 만에 경질되었다. 후임에는 아이자와 히데유키가 취임했다.
10월에는 나카가와 관방장관의 "여성 문제"가 주간지에 보도되어 사임했고, 후임에 고이즈미 준이치로가 거론되었지만, "나는 부인 역할에는 맞지 않는다"며 고사하여, 같은 모리파의 후쿠다 야스오를 추천하여 후쿠다가 취임했다.[20] 후쿠다는 제2차 고이즈미 내각에서 연금 미납 책임으로 사임할 때까지 관방장관을 역임하여 스가 요시히데에 이어 역대 2위의 기록을 세웠다.
2000년 7월 18일부터 내각총리대신 보좌관(교육개혁 담당)은 나카소네 히로후미였다.[16]
4. 1. 각료 명단 (2000년 7월 4일 ~ 2000년 12월 5일)
과학기술청 장관홋카이도 개발청 장관
국토청 장관
공안위원회 장관
오키나와 개발청 장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