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카가와 히데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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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나카가와 히데나오는 일본의 정치인으로, 1944년 도쿄에서 태어났다. 게이오기주쿠 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니혼케이자이 신문 기자로 활동하다가 정계에 입문했다. 신자유클럽 소속으로 중의원에 당선되었으나 탈당 후 자민당에 입당하여 국토정무차관, 통산정무차관 등을 역임했다. 과학기술청 장관, 내각관방장관, 자민당 간사장을 거쳐 중의원 의원과 자유민주당 정무조사회장을 지냈다. 2012년 정계 은퇴를 선언했으며, 재정 건전화에 대한 확장적 입장을 보였다. 통일교회와의 관계, 정치자금 문제, 여성 문제 등 여러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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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카가와 히데나오 | |
---|---|
기본 정보 | |
이름 | 히데나오 나카가와 |
원어명 | 中川秀直 |
로마자 표기 | Nakagawa Hidenao |
출생일 | 1944년 2월 2일 |
출생지 | 도쿄 |
사망일 | 해당사항 없음 |
사망지 | 해당사항 없음 |
자녀 | 나카가와 도시나오 |
![]() | |
학력 | |
출신 학교 | 게이오기주쿠 대학 법학부 졸업 |
경력 | |
이전 직업 | 니혼게이자이신문 기자 |
소속 정당 | 신자유클럽 (과거) 무소속 (과거) 자유민주당 (町村파 → 무파벌) |
직책 | 제66대 내각관방장관 제40대 오키나와 개발청 장관 남녀 공동 참여 담당 대신 오키나와 담당 대신 정보통신기술(IT) 정책 담당 대신 |
총리 | 모리 요시로 |
임기 시작 | 2000년 7월 4일 |
임기 종료 | 2000년 10월 27일 |
전임 | 아오키 미키오 |
후임 | 후쿠다 야스오 |
직책2 | 제54대 과학기술청 장관 제54대 원자력위원회 위원장 |
총리2 | 하시모토 류타로 |
임기 시작2 | 1996년 1월 11일 |
임기 종료2 | 1996년 11월 7일 |
전임2 | 우라노 야스오키 |
후임2 | 치가오카 리이치로 |
국회의원 | 중의원 의원 |
선거구 | 구 히로시마 2구 히로시마 4구 비례 추고쿠 블록 |
당선 횟수 | 10회 |
임기 시작3 | 1976년 12월 10일 - 1979년 9월 7일 1980년 6월 23일 - 1990년 1월 24일 1993년 7월 19일 |
임기 종료3 | 2012년 12월 16일 |
기타 직책1 | 자유민주당 간사장 |
총재 | 아베 신조 |
임기 시작4 | 2006년 9월 20일 |
임기 종료4 | 2007년 8월 27일 |
기타 직책2 | 자유민주당 정무조사회장 |
총재2 | 고이즈미 준이치로 |
임기 시작5 | 2005년 10월 31일 |
임기 종료5 | 2006년 9월 20일 |
기타 직책3 | 자유민주당 국회대책위원장 |
총재3 | 고이즈미 준이치로 |
임기 시작6 | 2002년 |
임기 종료6 | 2005년 10월 31일 |
기타 정보 | |
배우자 | 나카가와 가쓰코 |
자녀 | 나카가와 도시나오 (차남) |
친족 | 사토 유타카 (아버지) 나카가와 도시시 (장인) |
상훈 | [[파일:JPN Kyokujitsu-sho 1Class BAR.svg|40px]] 욱일대수장 |
기타 | 중의원 영년재직의원 법학사 (게이오기주쿠 대학, 1966년) |
웹사이트 | 전 중의원 의원 나카가와 히데나오 공식 웹사이트 (2013년 7월 18일 아카이브) |
2. 약력
1944년 2월 2일 도쿄도 신주쿠구에서 태어났다.[4] 1962년 도쿄도립 이구사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66년 게이오기주쿠 대학 법학부를 졸업했다.[4] 같은 해 니혼케이자이 신문에 정치부 기자로 입사했다.[4]
장인인 중가와 준시의 뒤를 이어 정계에 입문했지만, 정치인의 세습 출마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1976년 장인의 뒤를 이어 히로시마에서 신자유클럽 공인으로 중의원 총선거에 출마해 첫 당선되었으나,[4] 1979년 낙선과 함께 신자유클럽을 탈당했다.[4] 1980년 다시 당선되어 정계에 복귀하고, 자민당에 입당하여 국토정무차관, 통산정무차관 등을 역임했다.[4]
1989년 자민당 상공부 회장으로서 소비세 도입의 선봉에 섰다.[4] 1990년 중의원 총선거에서 낙선하였으나,[4] 1993년 다시 당선되어 복귀했다.[4] 1994년 무라야마내각에서 총리의 보좌로, 일본사회당 출신 총리와 자민당 간의 연락 역할을 했다.[5]
1996년 제1차 하시모토내각에서 과학기술청 장관으로 첫 입각했다.[4]
2000년 7월 제2차 모리내각에서 내각관방장관 겸 오키나와 개발청 장관으로 취임했으나,[1] 10월 애인의 방문이나 우익과의 회식 등 불미스러운 일이 자주 일어나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취임 3개월 만에 사임 위기에 몰렸다.[4] 이 사임은 모리 내각의 지지율 하락을 부추겼으며, 가토의 난이 일어나는 데에도 영향을 주었다.[4]
2002년 10월 자민당 국회대책위원장으로 취임해 복귀했다.[4]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의 신임이 깊어, 측근 중의 측근으로 알려졌다.[4] 정치 수완도 높이 평가받아 이례적인 장기 유임을 통해, 2005년 7월에는 무라오카 가네조 전 중의원 의원의 국회대책위원장 최장기간 재직 기록인 1023일을 갱신했다.[4]
2005년 10월 자유민주당정무조사회장으로 취임했고,[4] 2006년 9월 자유민주당간사장으로 취임했다.[2] 2007년 참의원 선거에서 자민당이 참패하자 책임을 지고 간사직에서 물러났다.[4]
2009년 중의원 총선거에서 낙선했으나, 비례대표로 부활 당선되었다.[4] 이후 파벌 정치 탈피를 선언하며 마치무라 파를 탈퇴했다.[6]
2012년 4월, 우정 민영화법 개정안에 반대했고,[7] 같은 해 9월, 다음 중의원 선거에 불출마하고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8] 그의 아들인 나카가와 도시나오는 이후 중의원 의원 및 경제산업성 차관을 역임했다.[3]
2016년 욱일대수장을 수상했다.[10]
3. 정책 및 주장
2009년 4월 23일 강연에서 히데나오는 세습 후보자를 둘러싼 논쟁에 대해 언급하며 "저에게는 아들이 둘 있지만, 제 선거구(중의원 히로시마 4구)를 물려줄 생각은 전혀 없다"고 단언했다.[17] 같은 해 5월 13일 발매된 『주간 분슌』에는 아들 슌쵸쿠와 함께 등장하여 히데나오는 "자신의 선거구에서 아들을 내세우지 않겠다", 슌쵸쿠도 "아버지의 선거구에서 출마하지 않겠다"고 말하며 "세습 포기 선언"을 했다.[18] 그러나 아들의 세습을 부정했음에도 불구하고, 장인으로부터 지반을 물려받은 히데나오 자신은 종전대로 출마하겠다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에, 국토교통대신 가네코 가즈요시로부터 "‘세습 금지’라고 한다면 현직도 (출마를) 그만두어야 한다. 자신의 안전은 확보하면서 다음 세대는 안 된다는 것은 국민이 납득할 수 있을까 생각한다" [19]는 지적을 받는 등 의문을 제기하는 의견이 잇따르고 있다.
또한, 슌쵸쿠는 2006년 히데나오의 선거구 최대 표밭인 히가시히로시마 시 시장 선거에 출마했지만 낙선했다.[20] 2010년 1월에는 슌쵸쿠가 참의원 히로시마현 선거구 출마를 목표로 자유민주당의 공모 선고에 응모할 것을 표명[21]하고, 응모자 5명이 참여하는 예비선거에 임했지만[22] 당원의 지지를 얻지 못하고 전 중의원의원 미야자와 요이치가 공인 후보로 결정되었다.[23]
슌쵸쿠는 아버지 히데나오의 은퇴 선언 후 자민당 공모에 응모하여 아버지의 뒤를 이어 히로시마 4구에서 출마가 결정되어, 2012년 제46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 출마하여 전 회 선거에서 아버지를 누른 소라모토 세이키를 물리치고 초선에 성공했으나,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애인 문제를 일으켜 사임하고 탈당했다.[24]
나카가와 히데나오는 재정건전화에 대해 확장파로 여겨진다.[12] 소비세 증세보다는 정부의 낭비성 지출을 줄이고, 유럽 및 북미 지역 수준의 명목 경제성장률로 재정 문제를 최대한 해소해야 한다는 입장을 저서 등을 통해 꾸준히 주장해 왔다.[12] 이러한 주장은 요시노 케이를 필두로 하는 재정건전화 중시파와 대립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12] 2012년 6월 26일 중의원 본회의에서의 소비세 관련 법안 표결에서는 자민당 의원 중 유일하게 반대 의사를 표명하기 위해 불참했다.[12]
3. 1. 경제 정책
나카가와 히데나오는 재정건전화에 대해 확장파로 여겨진다.[12] 소비세 증세보다는 정부의 낭비성 지출을 줄이고, 유럽 및 북미 지역 수준의 명목 경제성장률로 재정 문제를 최대한 해소해야 한다는 입장을 저서 등을 통해 꾸준히 주장해 왔다.[12] 이러한 주장은 요시노 케이를 필두로 하는 재정건전화 중시파와 대립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12] 2012년 6월 26일 중의원 본회의에서의 소비세 관련 법안 표결에서는 자민당 의원 중 유일하게 반대 의사를 표명하기 위해 불참했다.[12]
3. 2. 외교 및 안보 정책
3. 3. 사회 정책
자유민주당 국제인재의원연맹(外国人材交流推進議員連盟) 회장으로서 이민 수용에 적극적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본의 미래 노동력 부족 문제 해결 방안으로 총인구의 10%(약 1,000만 명)를 이민자가 차지하는 "다민족 공생 국가"를 50년에 걸쳐 만들겠다고 선언했다. 일본을 “이민 국가”로 정의하고, 「이민법」 제정과 「이민청」 설치를 제안하고 있다.[13][14]
외무성 아시아국 북동아시아과 과원이었던 조자이 미노루가 문부과학성에働きかけた[15] 대학입학자격시험 외국어 과목에 한국어를 도입하는 것에 당시 관방장관의 입장에서 관여했다고 여겨진다.[16]
4. 논란 및 비판
- 일본신문판매협회의 고문을 지냈고, 고액의 정치 헌금을 받고 있다.
- 신문기자 출신으로, 자신의 홈페이지[https://web.archive.org/web/20061205031057/http://nakagawahidenao.jp/]에 칼럼 연재를 하루도 빠뜨렸던 적이 없다. 여러 신문의 사설이나 논설을 평가하고, 자신의 논리를 전개할 때가 많다.
- 2008년 자유민주당 총재 선거에서는 소속된 마치무라파(町村派)의 베테랑들이 아소 다로를 지지하는 가운데, 고이즈미 개혁 노선의 계승을 내걸고 여성 후보인 고이케 유리코를 지지하는 분파 행동에 나선다. 총재 선거 결과 아소 내각(麻生政権)이 발족하자 비주류의 급선봉이 되는 동시에 마치무라파 내 아소 지지 그룹과도 대립한다. 2009년 7월 아소 몰아내기(麻生おろし)에서는 주도적인 역할을 맡지만 아소 내각 하에서 중의원 해산·총선거가 결정되자 아소와 화해했다. 그러나 이 총선거에서는 소선거구에서 패배하고 비례대표 부활로 재선되었기 때문에 구심력이 저하되었다. 같은 해 10월, 마치무라파(町村派)를 탈퇴했다.
- 2000년, 사진 주간지 등에 나카가와가 애인과 함께 촬영한 사진과 비디오가 게재되어 내각관방장관 사임으로 몰렸다. 직무상 알게 된 비밀을 수사 대상자에게 누설하는 행위는 국가공무원법 위반, 수사 방해 혐의에 해당할 가능성이 있으며, 야당으로부터 추궁을 받았다. 2000년 10월 26일 중의원 내각위원회에서는 센고쿠 유토와 나가츠마 아키라 등이 나카가와에게 직접 질문하는 등, 국회 심의에서도 다루어졌다. 나가츠마가 제시한 녹음 테이프의 내용에 따르면, 나카가와로 추정되는 인물이 "어쨌든, 뭔가, 각성제 관련해서 경찰도 움직이고 있어, 약간", "경시청 보안과가 움직이고 있으니까. 각성제 움직임이 확실히 있어. 정말…", "아니, 네 관계를 내사하고 있다고"라고 여성에게 발언하고 있으며, 정보의 출처에 대해서는 나카가와로 추정되는 인물이 "그건 경찰 정보야", "그래, 내 정보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 테이프 내용에 대해 나가츠마는 "어떻게 생각해도 당신 목소리입니다, 말투까지 포함해서"라고 주장했지만, 나카가와는 "그런 대화를 한 기억이 없습니다. 기억도 없습니다. 그리고 또, 그런 정보를 얻어 그런 것을 전달한다는 등, 그런 경로도 없고, 그런 일도 없습니다"라고 답변하며 명확히 부정했다.[36] 또한, 나카가와의 침실에서 촬영한 애인으로 추정되는 여성의 사진도 국회에서 다루어졌다. 당시 나카가와의 답변에 따르면, 나카가와의 운전기사에게 낯선 여성이 나카가와 저택을 보고 싶다고 졸랐기 때문에, 운전기사가 여성의 요구에 따라 침실로 안내한 적이 있으며, 잡지에 공개된 사진은 그때 촬영한 것이 아닌가 하고 있다. 나카가와의 설명에 대해 나가츠마는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이상하다", "불가사의한 이야기"라고 지적하고 있다.[36] 그 후, 일련의 사건에 대한 책임을 지는 형식으로 내각관방장관 사임을 발표했다.
- 2005년 5월 16일, 재일 한국인계 신용조합 "킨키산교신조합"(近畿産業信組)의 아오키 사다오(MK택시 회장) 회장과 간부들이 본점 부장과 지점장에게 지시하여, 자민당 국회대책위원장 나카가와 히데나오(中川秀直) 중의원 의원의 정치자금 파티 티켓을 판매시켰던 것이 발각되었다. 아오키 회장이 오너로 있는 택시 회사 MK가 나카가와 사무소로부터 티켓을 인수하여, 킨키산교신조합 직원에게 판매시켰다. 매수에 대해 나카가와 사무소는 "MK에 100매", 아오키 회장은 "킨키산교신조합에서 70~110매"라고 하고 있다. 정치적 중립을 요구한 중소기업 등 협동조합법에 저촉될 가능성이 있다고 보도된다.[37]
- 2007년 2월 22일, 나카가와의 자택과 후원회 사무소가 재단법인 소유의 토지에 지어져 있다는 것이 발각되었다. 재단법인은 공익법인이며, 정치인의 후원회나 개인의 자택으로 사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문제시되고 있다.
4. 1. 통일교와의 관계
2006년 6월, 일본 공산당의 기관지 신문 아카하다는 나카가와 히데나오가 통일교회의 집단 결혼식(천주평화연합 조국향토환원 일본대회)에 축전을 보냈다고 보도했다.[25]2013년 2월, 통일교회 전 홍보위원장이자 세계전략종합연구소 회장인 아베 마사토시는 에마누엘 아베 아리쿠니라는 필명으로 『아베 정권의 강점이 보인다 ― 일본 [정신]의 힘』을 출판했다. 같은 달 7일, 헌정기념관에서 열린 출판 기념 파티에 시모무라 하쿠분, 기이에 히로스케, 이소자키 히토히코, 우에노 미치코와 함께 참석했다.[26][27][28][29]
4. 2. 여성 문제
2000년, 사진 주간지 등에 나카가와가 애인과 함께 촬영한 사진과 비디오가 게재되어 내각관방장관 사임으로 몰렸다.[36] 직무상 알게 된 비밀을 수사 대상자에게 누설하는 행위는 국가공무원법 위반, 수사 방해 혐의에 해당할 가능성이 있으며, 야당으로부터 추궁을 받았다. 국회 심의에서도 다루어졌는데, 중의원 내각위원회에서 센고쿠 유토(仙谷由人)와 나가츠마 아키라(長妻昭) 등이 나카가와에게 직접 질문했다.[36]나가츠마가 제시한 녹음 테이프에 따르면, 나카가와로 추정되는 인물이 각성제 관련 경찰의 움직임과 경시청 보안과의 내사 정보를 여성에게 전달하고 있었다. 정보 출처에 대해서는 "경찰 정보", "내 정보"라고 언급했다. 나카가와는 이러한 대화를 한 기억이 없으며 정보 전달 경로도 없다고 부인했다.[36] 또한, 나카가와의 침실에서 촬영한 애인으로 추정되는 여성의 사진도 국회에서 다루어졌다. 나카가와의 운전기사에게 낯선 여성이 나카가와 저택을 보고 싶다고 졸랐기 때문에 침실로 안내했으며, 잡지에 공개된 사진은 그때 촬영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나가츠마는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이상하다"고 지적했다.[36]
2005년 5월 16일, 재일 한국인계 신용조합 "킨키산교신조합"(近畿産業信組)의 아오키 사다오(青木定雄)(MK택시 회장) 회장과 간부들이 자민당 국회대책위원장 나카가와 히데나오 중의원 의원의 정치자금 파티 티켓을 판매시킨 것이 발각되었다. 정치적 중립을 요구한 중소기업 등 협동조합법에 저촉될 가능성이 있다고 보도된다.[37]
2007년 2월 22일, 나카가와의 자택과 후원회 사무소가 재단법인 소유의 토지에 지어져 있다는 것이 발각되었다. 재단법인은 공익법인이며, 정치인의 후원회나 개인 자택으로 사용하는 것은 문제시되고 있다.
4. 3. 재일 한국인 정치자금 문제
나카가와 히데나오는 재일 한국인 관련 정치자금 문제로 논란이 된 바 있다.[37]2005년 5월, 재일 한국인계 신용조합인 "킨키산교신조합"의 아오키 사다오(MK택시 회장) 회장 등이 자민당 국회대책위원장이었던 나카가와 히데나오 의원의 정치자금 파티 티켓을 직원들에게 판매하도록 지시한 사실이 드러났다.[37] 아오키 회장이 소유한 택시 회사 MK가 나카가와 사무소로부터 티켓을 구매하여 킨키산교신조합 직원에게 판매했다.[37] 나카가와 사무소는 "MK에 100매", 아오키 회장은 "킨키산교신조합에서 70~110매"를 구매했다고 밝혔다.[37] 이는 정치적 중립을 요구하는 중소기업 등 협동조합법에 위반될 수 있다는 지적이 제기되었다.[37]
또한, 나카가와는 대부업계의 정치단체인 전국대부업정치연맹으로부터 정치자금을 받았다는 사실이 일본공산당 기관지 신문 아카하다를 통해 보도되기도 했다.[38] 실업가 만이 타다오로부터 헌금을 받았다는 사실도 일부 언론에 보도되었다.[39]
4. 4. 기타 논란
나카가와 히데나오는 외무성 아시아국 북동아시아과 과원이었던 조자이 미노루가 문부과학성에働きかけた[15] 대학입학자격시험 외국어 과목에 한국어를 도입하는 것에 당시 관방장관의 입장에서 관여했다고 여겨진다.[16] 장인인 중가와 준시의 뒤를 이어 정계에 입문했지만, 정치인의 세습 출마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17][18] 그러나 국토교통대신 가네코 가즈요시는 "‘세습 금지’라고 한다면 현직도 (출마를) 그만두어야 한다. 자신의 안전은 확보하면서 다음 세대는 안 된다는 것은 국민이 납득할 수 있을까 생각한다" [19]는 지적을 하기도 했다.같은 성을 가진 동시에 자민당 당 삼역을 지낸 적이 있는 중의원 의원 중가와 쇼이치(中川昭一)와 자주 비교되었지만, 두 사람 사이에는 혈연 관계가 없다. 정치 사상은 중가와 쇼이치(中川昭一)와 대조적이며, 야스쿠니 신사를 대신할 국립추도시설 건설을 자신의 주장으로 내세웠다.[30][31][32]
2008년 자유민주당 총재 선거에서는 고이케 유리코(小池百合子)를 지지하는 분파 행동에 나섰다.[33] 총재 선거 결과 아소 내각(麻生政権)이 발족하자 비주류의 급선봉이 되는 동시에 마치무라파 내 아소 지지 그룹과도 대립한다. 2009년 7월 아소 몰아내기(麻生おろし)에서는 주도적인 역할을 맡지만 아소 내각 하에서 중의원 해산·총선거가 결정되자 아소와 화해했다. 그러나 이 총선거에서는 소선거구에서 패배하고 비례대표 부활로 재선되었기 때문에 구심력이 저하되었다. 같은 해 10월, 마치무라파(町村派)를 탈퇴했다.[34][35]
; 애인에 대한 수사 정보 유출
2000년, 사진 주간지 등에 중가와가 애인과 함께 촬영한 사진과 비디오가 게재되어 내각관방장관 사임으로 몰렸다. 직무상 알게 된 비밀을 수사 대상자에게 누설하는 행위는 국가공무원법 위반, 수사 방해 혐의에 해당할 가능성이 있으며, 야당으로부터 추궁을 받았다. 국회 심의에서도 다루어졌으며, 중가와는 "그런 대화를 한 기억이 없습니다. 기억도 없습니다. 그리고 또, 그런 정보를 얻어 그런 것을 전달한다는 등, 그런 경로도 없고, 그런 일도 없습니다"라고 답변하며 명확히 부정했다.[36]
; 재일 한국인에게 파티 티켓 판매
2005년 5월 16일, 재일 한국인계 신용조합 "킨키산교신조합"(近畿産業信組)의 아오키 사다오(青木定雄)(MK택시 회장) 회장과 간부들이 본점 부장과 지점장에게 지시하여, 자민당 국회대책위원장 중가와 히데나오(中川秀直) 중의원 의원의 정치자금 파티 티켓을 판매시켰던 것이 발각되었다. 정치적 중립을 요구한 중소기업 등 협동조합법에 저촉될 가능성이 있다고 보도된다.[37]
; 재단법인 자택 제공 문제
2007년 2월 22일, 중가와의 자택과 후원회 사무소가 재단법인 소유의 토지에 지어져 있다는 것이 발각되었다. 재단법인은 공익법인이며, 정치인의 후원회나 개인의 자택으로 사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문제시되고 있다.
5. 소속 정당 및 파벌
나카가와 히데나오는 자유민주당 소속으로, 모리 요시로 총리 밑에서 내각관방장관을 역임했으며,[1] 2006년에는 당 사무총장으로 임명되었다.[2] 신도정치연맹 국회의원 간담회, 담배와 건강을 생각하는 의원연맹, 활자문화의원연맹 회장, 일본-칠레 친선의원연맹 회장, 일본-멕시코 친선의원연맹 회장, 일한의원연맹 부회장, 일본-우주 의원연맹 회장, 앰네스티 의원연맹 회장, 지역폐기물 적정처리 추진 의원연맹 회장, 변리사제도 추진 의원연맹 회장, 중소기업과 지역재생 의원연맹 회장, 자동차 의원연맹 간사장, 베이징 올림픽을 지원하는 의원의 모임 등 다양한 의원 연맹에서 활동했다. 외국인재 교류 추진 의원연맹 회장을 맡았으며, 집속탄 금지 추진 의원연맹 발기인으로도 참여했다.
6. 같이 보기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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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Japanese official resigns following bizarre cover-up
http://www.abc.net.a[...]
2011-01-05
[2]
뉴스
Abe Names Hidenao Nakagawa LDP Secretary-General (Update3)
https://www.bloomber[...]
2011-01-05
[3]
뉴스
Vice Trade Minister Nakagawa resigns, admits to extramarital affair on Facebook
https://mainichi.jp/[...]
2017-06-23
[4]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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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平成史への証言 政治はなぜ劣化した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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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뉴스
自民、中川秀直元幹事長が町村派を退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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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川、小泉進次郎氏ら造反 郵政改正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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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川秀直氏が引退表明 衆院選不出馬、世代交代理由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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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国新聞
2012-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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選挙:衆院選・広島4区 自民、中川俊直氏擁立へ 秀直氏の次男、県連「党員大会で承認」 /広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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秋の叙勲4055人 江田元参院議長に桐花大綬章
https://www.nikkei.c[...]
日本経済新聞
2016-11-03
[11]
문서
旧広島2区は必ず前職の誰かが落選する激戦区で、当時の中川は主に同じ自民党の池田行彦・谷川和穂・増岡博之、社会党の森井忠良等と定数4議席を争っていた。
[12]
뉴스
自民、造反は中川元幹事長のみ 消費増税法案採決を欠席
http://www.asahi.com[...]
[13]
뉴스
自民党「移民1000万人受け入れ」の実現性日本語の壁、少ない職場・・・課題は山積み。
http://business.ni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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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뉴스
自民、外国人定住へ基本法・「移民庁」設置など検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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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本経済新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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在日外国人の地方参政権問題 城内実オフィシャルサイ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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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英語は不利? センター試験外国語 平均点8年連続で最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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自民・中川元幹事長が『子供に世襲させない』宣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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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지
わが『世襲放棄』宣言――『二世天国』自民に捨て身の提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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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襲ダメなら『世襲党作る』!?――立候補制限自民賛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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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選挙に弱い中川政調会長子息が東広島市長選で惨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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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川俊直氏が「参院選」応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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自民・広島県連、候補者選びで党員投票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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選挙:参院選 選挙区の公認候補に宮沢洋一氏を擁立へ--自民党県連 /広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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地盤引き継ぎ 4区・中川氏、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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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統一協会・集団結婚に祝電 小坂文科相・中川政調会長も 安倍官房長官、広島大会にも送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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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지
統一教会の闇 自民党工作をスッパ抜く!
2022-08-04
[27]
웹사이트
統一教会(家庭連合)のダミー団体が参議院会館で講演会、会場を借りたのはあの女性議員
https://dailycult.bl[...]
やや日刊カルト新聞
2022-07-29
[28]
웹사이트
安倍首相主催の「桜を見る会」、統一教会関係者も招待客に<政界宗教汚染〜安倍政権と問題教団の歪な共存関係・第23回>
https://hbol.jp/pc/2[...]
扶桑社
2022-0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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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統一教会は反社的」自ら起こした訴訟でそう論じていた世耕参議院議員
https://jbpress.isme[...]
JBpress
2022-07-29
[30]
문서
時事通信や朝日新聞などは昭一の文部科学大臣就任内定を報じていたほか、政治評論家の末延吉正も昭一の文部科学大臣就任を予想していた。
[31]
문서
安倍は当初、麻生太郎の幹事長就任を考えていたものの、元首相・森喜朗や中川秀直自身の横槍によって、それを断念したともいわれる。
2015-04
[32]
문서
昭一は、「本当は文化大革命と言いたかったが、誤って天安門事件と発言した」としている。
2015-04
[33]
뉴스
「反麻生」議連旗揚げへ 12月、中川秀、小池両氏ら
https://web.archive.[...]
[34]
뉴스
政界再編「総選挙後に判断」 中川元幹事長
http://www.asahi.com[...]
[35]
뉴스
中川秀直氏「人心一新を」 麻生首相の面前で退陣求める
産経新聞
2008-07-14
[36]
간행물
第150回国会 内閣委員会 第2号(平成12年10月26日(木曜日))
http://www.shugiin.g[...]
衆議院
2000-10-26
[37]
뉴스
(제목 없음)
産経新聞
2005-05-16
[38]
뉴스
パーティ券リストの面々
https://www.jcp.or.j[...]
しんぶん赤旗
2003-09-12
[39]
간행물
(제목 없음)
週刊新潮
2007-0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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