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덕해
1. 개요
지덕해는 조선 인조 때의 문신으로, 생원시에 합격하고 관직에 진출하여 여러 요직을 거쳤다. 인목대비 폐위에 반대하여 고향으로 돌아갔다가 인조반정 이후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정묘호란 때 왕세자를 호위하고, 병자호란 때는 의병을 모집하여 항쟁하려 했으나 강화가 이루어지자 고향으로 돌아가 북벌론을 주장했다. 사간원 정언, 영해 부사 등을 역임했으며, 1641년에 59세로 사망하여 도승지에 추증되었다. 저서로는 《뇌봉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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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 지씨 -
지상욱
지상욱은 연세대학교와 스탠퍼드 대학교, 도쿄 대학에서 토목공학 및 건축공학 학위를 취득하고 한국건설기술연구원, 연세대학교 연구교수를 거쳐 자유선진당 대변인으로 정계에 입문, 제20대 국회의원, 바른미래당 정책위원회 의장, 새로운보수당 공동대표, 여의도연구원 원장을 역임하고 현재 국민의힘 서울특별시당 수석부위원장을 맡고 있는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
충주 지씨 -
지영서
지영서는 동양방송 아나운서로 시작해 KBS 아나운서, 한국외국어대학교 겸임교수를 거쳐 현재 한라대학교 조교수 및 KBS 한민족방송 진행자로 활동 중인 대한민국의 방송인이자 언론학자이다. -
과거 급제자 -
방우정
방우정은 조선 후기 무신으로 홍경래의 난 진압에 참여하여 서정군의 좌초관으로 활약했으며, 난에 대한 경험을 바탕으로 《서정일기》를 저술하여 홍경래의 난 연구에 중요한 사료를 남겼다. -
과거 급제자 -
정여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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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41년 사망 -
광해군
광해군은 조선 제15대 국왕으로, 임진왜란 중 세자로 책봉되어 전란 수습에 기여하고 즉위 후 대북파를 등용, 일본과 기유약조를 맺고 후금과의 관계 개선을 추진했으나 인조반정으로 폐위되었으며, 대동법 시행, 『동의보감』 편찬 등의 업적과 폐모살제 등의 논란으로 역사적 평가가 엇갈린다. -
1641년 사망 -
안토니 반 다이크
안토니 반 다이크는 1599년 벨기에에서 태어나 1641년 런던에서 사망한 플랑드르 출신 화가로, 찰스 1세의 궁정 화가로 활동하며 영국 초상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2. 생애
1632년(인조 10년) 지평(持平)이 되어 권신(權臣)을 탄핵하는 등 양사(兩司)에서 활동하였다. 같은 해 사친추숭(私親追崇)을 반대한 박동선(朴東善)·권도(權濤) 등이 처벌받자, 대간을 벌함은 잘못이라며 이들을 변호하다 왕의 미움을 샀다.
이후 병조 정랑(兵曹正郞)으로 춘추관 기주관(春秋館記注官)을 겸임하였고, 강원도 경차관(江原道敬差官)·성균관 사예(成均館司藝)를 역임하였다. 장령(掌令)으로 재직 시 인목대비 폐위 논의 참여자 처벌과 왕자(王子) 이늑(李玏)의 죄를 다스릴 것을 주장하였다.
1636년(인조 14년) 병자호란 때 충청좌도 소모관(忠淸左道召募官)으로 의병을 모집하고 군량을 확보했다. 1637년(인조 15년) 항쟁을 계속하려 했으나, 강화 소식에 고향으로 돌아가 북벌론을 주장했다.
1641년(인조 19년) 59세로 세상을 떠났으며, 승정원 도승지(承政院都承旨)에 추증(追贈)되었다. 송시열이 묘비를 짓고 송준길이 글씨를 썼다.
2.1. 초기 생애와 관직 진출
1606년(선조 39년) 24세 때 생원(生員)시에 합격하여 태학(太學)에서 유학하였으나, 유생들이 인목대비 폐위(廢位)에 가담하는 것으로써 출세하려고 하자 고향으로 돌아갔다. 이때 명성이 나 승문원(承文院) 정자(正字)를 거쳐 저작(著作)으로 전직되었다.
인조반정 후 1624년(인조 2년) 증광 문과에 급제하여 봉상시직장(奉常寺直長)으로 있다가 휴가를 얻어 향리에 머물던 중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왕세자를 호남(湖南)으로 배위(陪衛)하며 『분조일기(分朝日記)』 네 권을 편수하여 올렸다.
그 뒤 전적(典籍)으로 승진하였다가 외직으로 나가 양재도 찰방(良才道察訪)이 되어 폐단을 제거하니, 역졸(驛卒)들이 비석을 세워 칭송하였다. 병조 좌랑(兵曹佐郞)이 되었을 때 조정에서 문신(文臣)의 수령을 써야 한다고 의논하자, 용강 현령(龍岡縣令)이 되어 백성을 교화하는 도리에 주력하여 따르는 고을 백성들이 많았다. 이후 공조 좌랑(工曹佐郞)에 임명되어 춘추관 기사관(春秋館記事官)을 겸임하였다가 예조 정랑(禮曹正郞), 병조 정랑(兵曹正郞)으로 전직되었고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에 임명되었다.
2.2. 양사 활동과 소신
1632년(인조 10년) 지평(持平)이 되어 권신(權臣)을 탄핵하는 등 양사(兩司)에서 활동하였다. 같은 해 사친추숭(私親追崇)을 반대한 대사헌 박동선(朴東善), 집의 권도(權濤) 등이 처벌받자, 대간을 벌함은 잘못이라며 이들을 변호하다 왕의 미움을 사 청요직(淸要職)에 오르지 못했다.
이후 장령(掌令)으로 있으면서, “지난날 인목대비 폐위 논의에 참여한 자들은 인륜에 죄를 지었음에도 성상께서 너그러이 죽음을 면해주었지만, 지금 다시 유배 명단에서 삭제할 수는 없습니다.”라고 주장하였다. 또한, “왕자(王子) 이늑(李玏, 선조의 왕자)이 임금의 숙부임을 믿고 노복을 풀어 악행을 저질렀으니, 그의 죄를 다스리고 그 노복은 빨리 처형하여 조리돌려야 합니다.”라고 하는 등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이후 영해 부사(寧海府使)를 역임하였다.
2.3. 호란과 의병 활동
1636년(인조 14년) 병자호란 당시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이었던 지덕해는 남한산성으로 피난 간 왕을 호위하려다 체찰사(體察使) 종사관(從事官) 박서(朴遾)의 추천으로 충청좌도 소모관(忠淸左道召募官)이 되었다. 그는 여러 고을에 격문(檄文)을 보내 의병과 군량을 모집하는 데 힘썼다. 격문에는 "외로운 성이 포위되어 성상이 내린 교지가 애통하였으니, 혈기(血氣)가 있는 사람치고 그 누가 북쪽으로 가 앞을 다투어 목숨을 바치려고 하지 않겠는가?"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으며, 짧은 기간에 병사와 식량을 모집할 수 있었다.
1637년(인조 15년) 의병을 일으켜 항쟁하려 하였으나, 강화가 이루어져 왕세자가 인질이 되어 북쪽으로 갔다는 소식을 듣고 북쪽을 바라보며 통곡하며 고향으로 돌아갔다. 이후 명나라 인사들과 교류하며 북벌론을 주장하였다.
2.4. 은거와 북벌론
1636년(인조 14년) 10월 8일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이 되었다. 인조가 적병을 피해 남한산성으로 들어갔다는 소식을 듣고 곧바로 달려갔다. 도중에 체찰사(體察使) 종사관(從事官) 박서(朴遾)를 만나 충청좌도 소모관(忠淸左道召募官)으로 임명되었다. 지덕해는 여러 고을에 격문(檄文)을 보냈는데, 그 격문에 "외로운 성이 포위되어 성상이 내린 교지가 애통하였으니, 혈기(血氣)가 있는 사람치고 그 누가 북쪽으로 가 앞을 다투어 목숨을 바치려고 하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이러한 노력으로 짧은 기간에 병사와 식량을 모집할 수 있었다. 1637년(인조 15년) 의병을 일으켜 항쟁하려 하였으나, 강화가 이루어져 왕세자가 인질이 되어 북쪽으로 갔다는 소식을 듣자, 북쪽을 바라보며 통곡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이후 명사와 교유하고 북벌론을 주장하였다.
1641년(인조 19년) 8월 13일에 향년 59세로 세상을 떠나자, 승정원 도승지(承政院都承旨)에 추증(追贈)되었다. 그의 어질고 깨끗한 절개를 기리고자 송시열이 묘비를 짓고 송준길이 글씨를 썼다.
3. 가족 관계
4. 저서
뇌봉집을 저술하였다. 3권 1책으로 국립중앙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