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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적십자·적신월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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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국제 적십자·적신월 운동은 1863년 앙리 뒤낭의 인도주의적 제안으로 시작되어, 전쟁과 재해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한 구호 활동을 펼치는 국제적인 조직이다. 이 운동은 국제 적십자 위원회(ICRC), 국제 적십자·적신월사 연맹(IFRC), 각국 적십자사 및 적신월사, 그리고 이스라엘의 마겐 다비드 아돔으로 구성된다. 핵심 가치인 인도, 공정성, 중립성, 독립성, 자발적 봉사, 단일성, 보편성을 바탕으로 활동하며, 적십자, 적신월, 적수정 등의 표장을 사용한다. 4년마다 국제 회의를 개최하고, 평시에는 IFRC가, 분쟁 시에는 ICRC가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하지만, 전장에서는 적십자 표장이 공격받는 경우도 발생한다.

2. 운동의 역사

적십자·적신월 운동은 국제 적십자 위원회(ICRC), 국제 적십자사·적신월사 연맹(IFRC), 그리고 각국의 적십자 또는 적신월사라는 세 개의 독립적인 조직으로 구성된 국제적인 인도주의 운동이다. 흔히 "국제 적십자(IRC)"라고 불리는 것은 이 운동 전체를 지칭한다. 각 조직은 재정 및 정책 면에서 독립성을 유지하며 고유한 임무(ICRC는 분쟁, IFRC는 자연재해, 각국 협회는 주로 국내 활동)를 수행하지만, 활동 시에는 서로 긴밀히 연계한다. 예를 들어 대한 적십자사는 분쟁 지역에서의 ICRC 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직원을 파견하기도 한다.[62]

이 운동의 핵심 목표는 국가 안팎을 불문하고 전쟁, 대규모 사고, 재해 발생 시 적과 아군을 구별하지 않고 중립적인 입장에서 인도적 지원을 제공하는 것이다. 이러한 활동은 제네바 협약과 이를 근거로 한 각국의 국내법에 의해 특수한 법적 지위와 권한을 부여받아 수행된다. 운동의 활동은 인도, 공평, 중립, 독립, 봉사, 단일, 보편성이라는 7가지 기본 원칙에 기반한다[63][64]

2. 1. 창립

19세기 중반까지 군대의 의료 체계는 현대와 달리 미비했으며, 전장에서 부상자를 안전하게 보호하고 치료할 기관도 부족했다. 1859년 6월, 스위스의 사업가 앙리 뒤낭은 사업 문제로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3세를 만나기 위해 이탈리아로 향했다. 당시 이탈리아는 이탈리아 통일 전쟁 중이었는데, 6월 24일 솔페리노 근처에서 그는 솔페리노 전투의 참혹한 결과를 목격하게 된다. 단 하루 만에 약 4만 명의 군인이 부상을 입거나 사망한 채 전장에 방치된 광경에 뒤낭은 큰 충격을 받았다. 그는 원래의 여행 목적을 완전히 포기하고 며칠간 지역 주민들과 함께 부상병들을 국적에 상관없이 치료하고 돌보는 구호 활동에 헌신했다.

앙리 뒤낭, ''솔페리노의 회상''의 저자


제네바로 돌아온 뒤낭은 1862년 자신의 경험을 담은 책 『솔페리노의 회상』(Un souvenir de Solférino프랑스어)을 자비로 출판했다. 그는 이 책을 유럽의 주요 정치 및 군사 지도자들에게 보내며 두 가지 중요한 제안을 했다. 첫째, 전쟁 시 부상병을 돌볼 국가별 자원봉사 구호 단체를 평시에 미리 조직할 것. 둘째, 부상자와 그들을 돌보는 의료진 및 시설의 안전을 보장하는 국제적인 조약을 체결할 것.[2] 이 책은 큰 반향을 일으켰다.

1863년 2월, 제네바 공공 복지 협회 회장이었던 변호사 귀스타브 모이니에는 뒤낭의 책을 읽고 협회에서 논의를 시작했다. 그 결과 뒤낭의 제안을 검토하고 실행 방안을 모색하기 위한 5인 위원회가 구성되었다. 위원회에는 뒤낭과 모이니에 외에 야전 외과의 경험이 풍부한 의사 루이 아피아, 그의 동료 의사인 테오도르 모노아, 그리고 스위스군 장군 기욤 앙리 뒤푸르가 참여했다. 이들은 곧 위원회 명칭을 '부상병 구호를 위한 국제 위원회'(현 ICRC)로 정했다. 위원들은 각자의 전문성을 바탕으로 적십자 운동의 초석을 다졌다. 뒤낭은 아이디어를 제시하고 각국에 지지를 호소했으며, 뒤푸르는 명성과 인맥으로 위원장을 맡아 운동을 이끌었다. 모이니에는 법률가로서 운동의 이론화와 조직화에 기여했고, 아피아와 모노아르는 의학적 조언과 구호 활동에 힘썼다.[83]

제1차 제네바 협약, 1864년의 원본 문서


1863년 10월, 위원회의 노력으로 제네바에서 국제 회의가 개최되었다. 스위스,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네덜란드, 스웨덴, 러시아,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등 16개국 대표가 참석한 이 회의에서는 각국에 민간 구호 단체를 설립하기로 결정하고, 흰 바탕에 붉은 십자 모양의 표장(적십자 표장)을 사용하는 것 등을 포함한 '적십자 규약'이 채택되었다.[84] 이때 네덜란드 대표의 제안으로 구호 단체의 중립 원칙 또한 확립되었다. 이 회의 직후 각국에서 적십자사 설립 움직임이 본격화되어, 같은 해 12월 뷔르템베르크 왕국에서 세계 최초의 적십자사가, 1864년 2월에는 벨기에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적십자사가 설립되었다.[85]

1864년 8월, 스위스 정부 주도로 다시 제네바에서 외교 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에서는 12개국(스위스, 바덴, 벨기에, 덴마크, 스페인, 프랑스, 헤센, 이탈리아, 네덜란드, 포르투갈, 프로이센, 뷔르템베르크)이 육전(陸戰)에서의 부상병 상태 개선에 관한 최초의 제네바 협약 (제1차 제네바 협약)에 서명했다.[86] 이 협약은 국제 인도법의 시작으로 평가받으며, 이후 유럽 각국과 오스만 제국 등 비기독교권 국가로도 확산되었다. 빅토리아 시대 영국 적십자사 역시 이러한 초기 운동 속에서 인류 복지에 기여했다.

2. 2. 구성

"국제적십자사"라는 표현이 종종 쓰이지만, 실제로 이 이름을 가진 공식 기관은 없다. 이 명칭은 같은 원칙과 목적, 상징을 공유하는 여러 독립 단체로 이루어진 국제 적십자·적신월 운동 전체를 가리킨다.

이 운동은 다음과 같은 주요 조직들로 구성된다.

  • 국제 적십자 위원회(ICRC, International Committee of the Red Cross): 주로 분쟁 지역에서의 활동을 담당한다.
  • 국제 적십자사·적신월사 연맹(IFRC, International Federation of Red Cross and Red Crescent Societies): 주로 자연재해 구호 활동을 담당한다.
  • 각국의 적십자사 및 적신월사: 주로 자국 내에서의 활동을 전개한다. 이스라엘의 마겐 다비드 아돔도 여기에 포함된다.


이 조직들은 재정 및 정책 면에서 독립적이지만, 활동 시 서로 긴밀하게 연계한다. 예를 들어 ICRC는 각국 적십자사와 협력하여 임무를 수행하며, 대한 적십자사와 같은 국가 조직은 분쟁 지역의 ICRC 활동에 인력을 파견하기도 한다. 또한 세계적인 추적 사업 등에서도 ICRC와 각국 적십자·적신월사의 네트워크가 함께 활용된다.

운동의 최고 결정 기관은 원칙적으로 4년마다 열리는 '적십자·적신월 국제 회의'이다. 이 회의에는 제네바 협약 체결국 정부 대표, ICRC 대표, IFRC 대표, 각국 적십자·적신월사 대표가 참여한다[62]

국제 적십자·적신월 운동은 국가 안팎에서 전쟁, 대규모 사고, 재해 발생 시 적과 아군을 구별하지 않고 중립적인 입장에서 인도적 지원을 제공한다. 제네바 협약과 이를 바탕으로 한 각국 국내법에 따라 특수한 법적 지위와 권한을 부여받는다. 2011년 12월 1일 기준으로, 152개국에 적십자사가, 34개국에 적신월사가 설립되어 활동 중이며, 이스라엘의 마겐 다비드 아돔을 포함하면 총 187개국이 참여하고 있다.

모든 활동은 다음의 7가지 기본 원칙에 따라 이루어진다[63]

# '''인도''': 인간의 고통을 예방하고 경감시키며 생명과 건강을 보호하고 인간의 존엄성을 존중한다.

# '''공평''': 국적, 인종, 종교, 계급, 정치적 견해에 따라 어떠한 차별도 두지 않고, 오직 필요에 따라 고통받는 개인을 돕는다.

# '''중립''': 모든 사람의 신뢰를 얻기 위해 적대 행위 발생 시 어느 편에도 서지 않으며, 정치적, 인종적, 종교적, 이념적 성격의 논쟁에 개입하지 않는다.

# '''독립''': 운동은 자율적이다. 각국 적십자·적신월사는 자국 정부의 인도주의 활동을 보조하고 자국 법률의 적용을 받지만, 항상 운동의 원칙에 따라 행동할 수 있는 자율성을 유지해야 한다.

# '''봉사''': 이익을 추구하지 않는 자발적인 구호 활동이다.

# '''단일''': 한 나라에는 오직 하나의 적십자사 또는 적신월사만이 존재할 수 있다. 해당 조직은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어야 하며, 자국 영토 전체에서 인도주의 활동을 수행해야 한다[64]

# '''보편성''': 모든 사회가 동등한 지위를 가지며 서로 도울 동등한 책임과 의무를 공유하는 세계적인 운동이다.

2. 3. 국제 적십자 위원회 (ICRC)

19세기 중반까지 군대의료 지원 체계는 매우 미흡했으며, 전투 현장에서 부상당한 병사들을 체계적으로 보호하고 치료할 수 있는 안전한 기관이 부재했다. 1859년 스위스의 사업가 앙리 뒤낭이 이탈리아 통일 전쟁 중 솔페리노 전투의 참상을 목격한 경험은 국제 적십자 위원회(ICRC) 설립의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2. 3. 1. 솔페리노, 앙리 뒤낭, 그리고 ICRC 설립



19세기 중반까지 전쟁터에서 부상당한 군인들을 위한 체계적인 간호 시스템이나 안전한 치료 시설은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국제 적십자 운동의 씨앗이 뿌려졌다.

스위스 제네바 출신의 사업가이자 독실한 칼뱅주의 신자였던 앙리 뒤낭1859년 6월, 사업 문제 논의를 위해 당시 이탈리아 통일 전쟁에 개입하고 있던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3세를 만나러 이탈리아로 향했다. 그는 오스트리아-사르데냐 전쟁의 격전지였던 솔페리노에 전투가 끝난 6월 24일 저녁 도착했다. 단 하루의 전투로 양측에서 약 4만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고, 부상자들은 거의 아무런 의료 지원 없이 고통 속에 방치되어 있었다. 뒤낭은 이 끔찍한 광경에 큰 충격을 받았다. 그는 원래의 여행 목적을 완전히 잊고 며칠간 현장에 머물며 지역 주민들과 함께 국적을 가리지 않고 부상자들을 돌보는 구호 활동에 헌신했다.

제네바로 돌아온 뒤낭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1862년 자비로 ''솔페리노의 회상''(Un souvenir de Solférinofra)이라는 책을 출판했다. 그는 이 책을 유럽의 주요 정치 및 군사 지도자들에게 보내 자신의 구상을 알렸다. 책에는 솔페리노 전투의 참상과 부상자들의 고통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었으며, 뒤낭은 기독교적 박애 정신에 입각하여 두 가지 중요한 제안을 내놓았다. 첫째, 전쟁 시 부상병 간호를 위한 국가별 자원봉사 구호 단체를 평시에 미리 조직할 것. 둘째, 부상병과 그들을 돌보는 의료진 및 시설의 안전을 보장하는 국제적인 조약을 체결할 것이었다.[2]

뒤낭의 책은 큰 반향을 일으켰다. 1863년 2월, 제네바 공공 복지 협회 회장이자 변호사였던 귀스타브 모이니에는 이 책을 읽고 협회 회의에서 논의를 제안했다. 그 결과, 뒤낭의 제안의 실현 가능성을 검토하고 국제 회의를 조직하기 위한 조사 위원회가 설립되었다. 이 위원회는 처음에는 '국제 부상 군인 구호 상설 위원회'로 불렸으며, 곧 '부상자를 위한 국제 구호 위원회'로 명칭을 변경했다. 이 위원회는 훗날 적십자 국제 위원회(ICRC)의 모태가 된다. 위원회는 앙리 뒤낭을 포함한 5명의 제네바 시민으로 구성되었다.

이름주요 역할 및 경력
앙리 뒤낭적십자 운동의 창시자, 솔페리노의 회상 저자, 각국에 적십자 필요성 역설
귀스타브 모이니에변호사, 제네바 공공 복지 협회 회장, 적십자 운동의 이론화 및 조직화 기여, 장기간 위원회 활동 주도
기욤 앙리 뒤푸르스위스군 장군, 존더분트 전쟁 당시 인도적 지휘 경험, 위원회 초대 위원장, 명성과 인맥 활용
루이 아피아의사 (야전 외과 경험), 전상 외과 권위자, 의학적 조언 및 구호 활동 참여
테오도르 모노아의사 (외과), 아피아의 동료, 제네바 위생 및 보건 위원회 소속, 일반 시민 대상 홍보 중시[83]



이 5인 위원회는 각국에 민간 구호 단체를 설립하는 방향으로 활동 목표를 정하고, 1863년 10월 제네바에서 국제 회의를 개최했다. 이 회의에는 스위스,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네덜란드, 스웨덴, 러시아,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바덴, 바이에른, 하노버, 헤센 카셀, 작센, 뷔르템베르크 등 16개국 대표가 참석했다. 회의 결과 각국에 구호 단체를 설립하기로 결정하고, 흰 바탕에 붉은 십자 모양의 적십자 표장 사용 등을 포함한 '적십자 규약'이 채택되었다.[84] 또한, 네덜란드 대표의 제안으로 구호 단체의 중립 원칙이 확립되었다.

회의 이후 각국에서 적십자사 설립 움직임이 본격화되었다. 같은 해 12월 뷔르템베르크 왕국에서 세계 최초의 적십자사가 탄생했고, 1864년 2월에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적십자사인 벨기에 적십자사가 설립되었다.[85] 이듬해인 1864년 8월, 스위스 정부 주도로 제네바에서 외교 회의가 열려 16개국 대표가 참석했다. 이 회의에서는 육군 군대의 부상자 상태 개선에 관한 최초의 제네바 협약 (제1차 제네바 협약)이 채택되었고, 스위스, 프랑스, 이탈리아, 프로이센, 네덜란드, 덴마크, 스페인, 포르투갈, 벨기에, 바덴, 헤센 카셀, 뷔르템베르크 12개국이 즉시 서명했다.[86] 이 협약은 부상병과 의료 요원의 중립을 보장하는 내용을 담고 있으며, 국제 인도법 발전의 중요한 시작점으로 평가받는다. 이후 유럽 각국뿐 아니라 1865년 오스만 제국 등 비기독교 국가들도 이 협약에 가입하고 구호 단체를 설립하면서 적십자 운동은 전 세계로 확산되었다.

2. 3. 2. 제네바 협약, 국가 협회, 그리고 ICRC

1863년 10월 26일부터 29일까지 국제 위원회가 조직한 국제 회의가 제네바에서 열려, 전장에서 의료 서비스를 개선하기 위한 가능한 조치들을 논의했다.[3] 이 회의에는 총 36명이 참석했는데, 오스트리아 제국, 바덴 대공국, 바이에른 왕국, 프랑스 제국, 하노버 왕국, 헤센 대공국, 이탈리아 왕국, 네덜란드 왕국, 프로이센 왕국, 러시아 제국, 작센 왕국, 스페인 왕국, 스웨덴-노르웨이 연합 왕국, 대영 제국 등 14개 국가 정부 대표 18명, 비정부 기구 대표 6명, 비공식 외국 대표 7명, 그리고 국제 위원회 위원 5명이었다.

"5인 위원회": 구스타브 모이니에, 기욤 앙리 뒤푸르, 앙리 뒤낭, 루이 아피아, 테오도르 모누아


10월 29일에 채택된 최종 결의안에는 다음과 같은 제안이 담겼다:[3]

  • 부상병을 위한 국가 구호 단체 설립
  • 부상병에 대한 중립성과 보호
  • 전장에서 구호 지원을 위한 자원 봉사 병력 활용
  • 이러한 개념을 시행하기 위한 추가 회의 조직
  • 현장의 의료진을 위한 공통적인 보호 상징 도입, 즉 적십자가 새겨진 흰색 완장.


1864년 듀뵐 전투 (덴마크)에서 무력 충돌 시 적십자 상징의 첫 사용을 기념하는 기념비; 1989년 덴마크와 독일의 적십자사에서 공동으로 건립


1년 뒤인 1864년, 스위스 정부는 모든 유럽 국가와 미국, 브라질 제국, 멕시코 제국에 공식 외교 회의 참석을 초청했다. 16개국에서 총 26명의 대표가 제네바에 모였고, 8월 22일 회의는 "전장에서 부상당한 군인의 상태 개선을 위한" 최초의 제네바 협약을 채택했다. 스위스, 바덴 대공국, 벨기에, 덴마크, 스페인, 프랑스 제국, 헤센 대공국, 이탈리아 왕국, 네덜란드 왕국, 포르투갈-알가르브 왕국, 프로이센 왕국, 뷔르템베르크 왕국 등 12개 국가와 왕국의 대표가 협약에 서명했다. 이 협약은 10개의 조항을 담고 있었으며, 무력 충돌 시 부상병, 야전 의료진, 특정 인도주의 단체의 중립성과 보호를 보장하는 법적 구속력이 있는 규칙을 처음으로 제정했다.

제네바 협약이 제정된 직후, 벨기에, 덴마크, 프랑스, 올덴부르크, 이탈리아, 프로이센, 에스파냐, 뷔르템베르크에 최초의 국가 협회가 설립되었다. 또한 1864년, 루이 아피아와 네덜란드 육군 대위 찰스 반 데 벨데는 무력 충돌에서 적십자 기호 아래 활동하는 최초의 독립적이고 중립적인 대표가 되었다.

1865년 7월 5일, 오스만 제국 정부는 제네바 협약을 비준했다. 1868년에는 크림 전쟁(1853-1856) 당시 질병으로 인해 전투 사상자보다 더 많은 터키 군인이 사망하고 고통받았던 경험을 바탕으로 터키 적신월사가 설립되었다. 이는 무슬림 세계 최초의 적신월사였으며, 해당 지역에서 가장 중요한 자선 단체 중 하나로 자리매김했다.

한편, 적십자 운동의 창시자인 앙리 뒤낭1867년 알제리에서의 사업 실패로 파산을 선언해야 했다. 이는 국제 위원회 활동에 몰두하느라 사업에 소홀했기 때문이었다. 사업 실패로 인한 부정적인 여론과 위원회 내 주요 인물이었던 귀스타브 모이니에와의 계속된 갈등은 결국 뒤낭이 위원회 회원 및 사무총장직에서 해임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사기 파산 혐의로 체포 영장까지 발부되자, 그는 제네바를 떠나 다시는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뒤낭의 퇴장 이후에도 적십자 운동은 꾸준히 발전했다. 1876년 위원회는 현재의 공식 명칭인 '국제 적십자 위원회'(ICRC)를 채택했다. 5년 후인 1881년에는 클라라 바튼의 노력으로 미국 적십자사가 설립되었다. 점점 더 많은 국가가 제네바 협약에 서명하고 이를 존중하면서, 적십자는 국제적으로 존경받는 운동으로 성장했고 국가 협회는 자원봉사 활동의 장으로 인기를 얻었다.

1901년, 최초의 노벨 평화상이 수여되었을 때, 노르웨이 노벨 위원회는 이를 앙리 뒤낭과 평화주의 운동가 프레데릭 파시에게 공동으로 수여하기로 결정했다. 이 상은 뒤낭의 늦어진 명예 회복을 알리고, 적십자 운동 창설에 대한 그의 핵심적인 역할을 기리는 중요한 의미를 가졌다. 뒤낭은 9년 후 스위스의 작은 휴양지 하이덴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오랜 경쟁자였던 귀스타브 모이니에는 뒤낭이 사망하기 불과 두 달 전에 세상을 떠났으며, 위원회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회장직을 역임한 인물로 기록되었다.

1906년에는 1864년 제네바 협약이 처음으로 개정되었다. 이듬해인 1907년, 헤이그에서 열린 제2차 국제 평화 회의에서는 헤이그 협약 X가 채택되어 제네바 협약의 적용 범위가 해상 전쟁으로까지 확대되었다.

2. 3. 3. 제1차 세계 대전

1914~1918년 전쟁. 제네바, 라트 박물관. 국제 전쟁 포로 기구. 연구 부서. 독일 섹션. 가족에게 보내는 특급 메시지 및 통신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국제 적십자 위원회(ICRC)는 각국 적십자사와의 긴밀한 협력을 통해서만 해결할 수 있는 거대한 도전에 직면했다. 미국일본을 포함한 전 세계의 적십자 간호사들이 전쟁에 참여한 유럽 국가들의 군 의료 지원을 위해 파견되었다.[7] 1914년 8월 15일, 전쟁 발발 직후 ICRC는 전쟁 포로를 추적하고 그들의 가족과 연락을 재개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 국제 전쟁 포로 기구(International Prisoners-of-War Agency, IPWA)를 설립했다. 오스트리아의 작가이자 평화주의자인 슈테판 츠바이크는 당시 제네바 ICRC 본부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첫 타격이 가해지자마자 모든 땅에서 고통의 외침이 스위스에서 들려오기 시작했다. 전장에서 아버지, 남편, 아들의 소식을 알 수 없는 수천 명의 사람들이 절망적인 팔을 허공으로 뻗었다. 수백 명, 수천 명, 수만 명의 편지와 전보가 유일한 국제 집결지인 제네바의 적십자 소규모 건물로 쏟아져 들어왔다. 폭풍 바다제비처럼 고립되어, 실종된 친척에 대한 첫 번째 문의가 왔다. 그러자 이 문의 자체가 폭풍이 되었다. 편지가 자루로 도착했다. 이러한 비참함의 범람에 대처하기 위한 준비는 아무것도 없었다. 적십자에는 공간도, 조직도, 시스템도, 무엇보다도 도우미도 없었다."

1914년 라트 박물관 앞에서 자원봉사자들(대부분 여성)의 단체 사진


그러나 1914년 말까지 IPWA에는 약 1,200명의 자원 봉사자가 모여 제네바의 라트 박물관에서 활동했다. 이들 중에는 프랑스의 작가이자 평화주의자인 로맹 롤랑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1915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을 때 상금의 절반을 IPWA에 기부했다. 당시 자원봉사자의 대부분은 여성이었으며, 마르그리트 고티에-반 베르켐, 마르그리트 프릭-크라머, 수잔 페리에 등 일부 여성들은 남성 중심의 조직 내에서 중요한 직책을 맡으며 성 평등의 선구자 역할을 했다.

전쟁이 끝날 무렵까지 IPWA는 약 2천만 통의 편지와 메시지, 190만 개의 소포, 그리고 약 1800만스위스 프랑 상당의 기부금을 전쟁 포로들에게 전달했다. 또한 IPWA의 중재를 통해 약 20만 명의 포로가 교전국 간에 교환되어 석방 후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IPWA가 1914년부터 1923년까지 축적한 카드 색인에는 약 700만 건의 기록이 담겨 있으며, 이를 통해 약 200만 명의 전쟁 포로 신원을 확인하고 가족과 연락을 도왔다. 이 카드 색인 전체는 현재 ICRC에서 제네바의 국제 적십자·적신월 박물관에 대여 중이며, 접근 권한은 여전히 ICRC에 의해 엄격히 관리되고 있다.

1917년 적십자 구급차


전쟁 기간 동안 ICRC는 교전 당사자들이 1907년에 개정된 제네바 협약을 준수하는지 감시하고, 위반 사항에 대한 불만을 해당 국가에 전달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역사상 처음으로 화학 무기가 사용되자 ICRC는 그 사용에 대해 강력히 항의했다. 제네바 협약에 명시적인 위임 조항이 없었음에도 ICRC는 민간인들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노력했다. 특히 공식적으로 "점령지"로 지정된 지역에서는 1907년 헤이그 협약의 "육전 법규 및 관례에 관한 협약"을 근거로 민간인을 지원할 수 있었다.[7] 이 협약은 전쟁 포로에 대한 ICRC 활동의 법적 근거이기도 했다. ICRC는 IPWA 활동 외에도 전쟁 포로 수용소를 직접 방문하여 실태를 조사했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유럽 전역의 총 524개 수용소를 41명의 ICRC 대표가 방문했다.

1915년경 뉴욕 항구의 MV ''적십자''


1917년 7월 4일 파리에 도착한 미국 보병의 제16 보병 및 제1 사단에 적십자 간호사가 빵과 커피를 제공하고 있다.


1916년부터 1918년 사이에는 전쟁 포로 수용소의 모습을 담은 여러 종류의 엽서를 발행했다. 이 엽서들은 포로들이 집에서 온 편지를 받거나 일상적인 활동을 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포로 가족들에게 희망과 위안을 주고 그들의 안위에 대한 불안감을 덜어주려는 의도였다. 전쟁이 끝난 후 1920년부터 1922년까지 ICRC는 약 50만 명의 포로를 고국으로 송환하는 작업을 지원했다. 1920년, 이 송환 임무는 새로 설립된 국제 연맹으로 이관되었고, 노르웨이의 외교관이자 과학자인 프리드쇼프 난센이 "전쟁 포로 송환 고등 판무관"으로 임명되었다. 그의 역할은 이후 국제 연맹의 "난민 고등 판무관"으로 확대되어 전쟁 난민과 실향민 지원까지 포함하게 되었다. 난센은 난센 여권을 고안한 공로 등으로 1922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으며, ICRC 대표 두 명을 그의 부관으로 두었다.

전쟁이 끝나기 1년 전인 1917년, ICRC는 제1차 세계 대전 중의 뛰어난 활동을 인정받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이는 1914년부터 1918년 사이에 수여된 유일한 노벨 평화상이었다. 1923년에는 ICRC 위원 선임 정책이 변경되어, 기존의 제네바 시민에게만 국한되었던 자격이 모든 스위스 시민으로 확대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의 참혹한 경험은 1925년 질식성 또는 유독성 가스 및 생물학적 작용제의 전쟁 중 사용을 금지하는 의정서(제네바 의정서) 채택으로 이어졌다. 4년 후인 1929년에는 기존의 제네바 협약이 개정되었고, "해상에 있는 군대의 부상자, 병자 및 난파자의 상태 개선에 관한 제네바 협약"(현행 제2 제네바 협약)이 새로 제정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에서의 활동을 통해 ICRC는 국제 사회에서 명성과 권위를 크게 높였으며 조직의 역량 또한 확장되는 계기가 되었다.

2. 3. 4. 제2차 세계 대전



국제 적십자 위원회(ICRC)의 홀로코스트에 대한 대응은 상당한 논란과 비판을 받아왔다. 1944년 5월부터 ICRC가 유대인들의 고통과 죽음에 무관심하다는 비판이 제기되었고, 전쟁 후 홀로코스트의 참상이 드러나면서 비판은 더욱 거세졌다.

이에 대해 ICRC는 나치 독일의 내부 문제로 여겨지는 사안에 개입하지 않음으로써 중립성과 공정성을 유지하려 했다고 설명한다. 또한 ICRC는 제네바 협약 서명국의 전쟁 포로 보호를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1929년 개정된 제네바 협약은 제2차 세계 대전 중 ICRC 활동의 법적 토대가 되었다. ICRC는 제1차 세계 대전 때와 유사하게 포로 수용소 방문 및 감시, 민간인 구호 지원 조직, 포로 및 실종자 메시지 교환 관리 등의 활동을 수행했다. 전쟁이 끝날 무렵, 179명의 대표가 41개국에서 12,750회 포로 수용소를 방문했다. 전쟁 포로 중앙 정보국(Agence centrale des prisonniers de guerre|아장스 상트랄 데 프리조니에 드 게르fra)은 3,000명의 직원을 두었으며, 포로 추적용 카드 색인에는 4,500만 장의 카드가 있었고, 1억 2천만 건의 메시지를 교환했다. 한 가지 주요 장애물은 나치즘 통제하의 독일 적십자사가 독일 내 유대인 추방과 홀로코스트에서 자행된 나치 강제 수용소에서의 대량 학살 등 노골적인 위반을 포함하여 제네바 규약에 협력하기를 거부했다는 점이다.

1939–45년 전쟁. 제네바, 전쟁 포로 중앙 정보국, 선거 건물/총회 의사당


분쟁의 다른 두 주요 당사자인 소련일본은 1929년 제네바 협약의 당사자가 아니었으며, 협약의 규칙을 따를 법적 의무가 없었다.

전쟁 중에 ICRC는 나치 독일강제 수용소의 수감자 처우에 대한 합의를 얻을 수 없었고, ICRC는 결국 압력을 가하는 것을 포기했으며, 나중에 전쟁 포로와의 업무를 방해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그렇게 했다고 설명했다. ICRC는 또한 절멸 수용소와 유럽 유대인, 로마인 등의 대량 학살에 대한 신뢰할 만한 정보에 대한 답변을 얻을 수 없었다. 1943년 11월 이후, ICRC는 이름과 소재지가 알려진 강제 수용소 수감자에게 적십자 소포를 보낼 수 있는 허가를 받았다. 이 소포에 대한 영수증은 다른 수감자들이 서명했기 때문에, ICRC는 이를 통해 강제 수용소에서 약 10만 5천 명의 수감자의 신원을 등록할 수 있었고, 주로 다하우 강제 수용소, 부헨발트, 라벤스브뤼크, 작센하우젠 강제 수용소에 약 110만 개의 소포를 전달했다.

마르셀 주노, ICRC 대표, 독일에서 전쟁 포로 방문


모리스 로셀은 국제 적십자의 대표로 베를린에 파견되었고, 1944년 테레지엔슈타트 게토를 방문했다. 경험이 부족한 로셀을 이 임무에 선택한 것은 그의 조직이 "유대인 문제"에 무관심하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으로 해석되었으며, 그의 보고서는 홀로코스트 기간 동안 유대인을 옹호하지 못한 "ICRC의 실패의 전형"으로 묘사되었다. 로셀의 보고서는 나치 독일의 선전을 비판 없이 수용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리비아 로트키르헨은 덴마크 대표의 보고서와 달리 로셀의 보고서는 긍정적인 표현으로 작성되었으며, 독일 선전에 부합했다고 지적했다. 루시 다비도비츠는 로셀이 자신이 본 모든 것과 들은 모든 것을 완전히 순순히 받아들였으며, 그의 보고서는 적십자 상부에 독일이 바랐던 그대로, 즉 그들의 선전에 대한 완전히 비판 없는, 심지어 긍정적인 확인이었다고 평가했다. 그는 유대인이 테레지엔슈타트에서 추방되지 않았다고 잘못 진술했다. 클로드 란즈만은 1979년에 로셀과의 인터뷰를 통해 그의 경험을 기록하여 ''살아있는 자로부터의 방문객''이라는 다큐멘터리를 제작했다.[9]

1945년 3월 12일, ICRC 회장 야코프 부르크하르트는 SS 장군 에른스트 칼텐브루너로부터 ICRC 대표가 강제 수용소를 방문하도록 허가한다는 메시지를 받았다. 이 합의는 이 대표들이 전쟁이 끝날 때까지 수용소에 머물러야 한다는 조건에 묶여 있었다. 루이 하플리거(마우트하우젠-구젠), 폴 뒤낭(테레지엔슈타트), 빅토르 마우러(다하우 강제 수용소)를 포함한 10명의 대표가 이 임무를 수락하고 수용소를 방문했다. 루이 하플리거는 미국 군대에 경고하여 마우트하우젠-구젠의 강제 퇴거 또는 폭파를 막는 데 기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히로시마에 원자 폭탄 투하 3주 후 ICRC 대표 프리츠 빌핑거의 전보


프리드리히 본 (1903–1963)은 헝가리 부다페스트의 ICRC 대표로서 약 11,000명에서 15,000명에 달하는 유대인의 생명을 구하는 데 기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마르셀 주노 (1904–1961)는 제네바 출신의 의사로 원자 폭탄이 투하된 후 히로시마를 방문한 최초의 외국인 중 한 명이었다.

1944년, ICRC는 두 번째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제1차 세계 대전과 마찬가지로 1939년부터 1945년까지 전쟁 기간 동안 유일하게 수여된 평화상을 받았다. 전쟁이 끝날 무렵, ICRC는 가장 심각한 영향을 받은 국가에 대한 구호 지원을 조직하기 위해 각국 적십자사와 협력했다. 1948년, 위원회는 1939년 9월 1일부터 1947년 6월 30일까지의 전쟁 기간 활동을 검토하는 보고서를 발표했다. ICRC는 1996년 제2차 세계 대전 아카이브를 공개했다.

2. 3. 5.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20세기

1945년 부다페스트. 이탈리아인 전쟁 포로 2,000명의 송환


1949년 8월 12일, 기존의 두 제네바 협약에 대한 추가 개정이 채택되었다. "해상에서 부상, 질병 또는 난파된 군대 구성원의 상태 개선을 위한" 추가 협약은 현재 제2 제네바 협약으로 불리며, 1907년 헤이그 협약 X의 후속 조치로 제네바 협약의 범위에 포함되었다. 1929년 제네바 협약 "전쟁 포로의 대우에 관한" 협약은 역사적으로는 두 번째 제네바 협약이었을 수 있지만(실제로 제네바에서 제정되었기 때문), 1949년 이후 헤이그 협약보다 연대기적으로 늦게 나왔기 때문에 세 번째 협약으로 불리게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의 경험을 반영하여, "전시 민간인 보호에 관한" 새로운 협약인 제4 제네바 협약이 제정되었다. 또한, 1977년 6월 8일의 추가 의정서는 협약이 내전과 같은 국내 분쟁에도 적용되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오늘날, 4개의 협약과 추가 의정서는 600개 이상의 조항을 포함하고 있으며, 이는 첫 번째 1864년 협약에 10개 조항만 있었던 것과 비교된다.

1963년 창립 100주년을 기념하여, ICRC는 적십자사 연맹과 함께 세 번째 노벨 평화상을 공동으로 수상했다.

제네바의 ICRC 본부


1990년 10월 16일, 유엔 총회는 ICRC에 총회 회의 및 소위원회 회의에 대한 옵서버 지위를 부여했는데, 이는 사설 기관에 부여된 최초의 옵서버 지위였다. 이 결의안은 138개 회원국이 공동으로 제안했으며, 솔페리노 전투에서 조직의 기원을 기리기 위해 이탈리아 대사가 제안했다. 1993년 3월 19일에 서명된 스위스 정부와의 협정은 스위스의 어떠한 간섭으로부터도 위원회의 완전한 독립이라는 오랜 정책을 확인했다. 이 협정은 본부와 기록 보관소를 포함한 스위스 내 모든 ICRC 재산의 완전한 신성함을 보호하고, 회원과 직원에 대한 법적 면책 특권을 부여하며, ICRC에 모든 세금과 수수료를 면제하고, 상품, 서비스 및 자금의 보호되고 면세된 이전을 보장하며, 외국 대사관과 동일한 수준의 안전한 통신 특권을 ICRC에 제공하고, 위원회의 스위스 출입을 단순화한다.

냉전 종식과 함께 ICRC의 활동은 더욱 위험해졌다. 1990년대에는 특히 지역 및 내부 무력 분쟁에서 활동할 때 그 어느 때보다 많은 대표가 사망했다. 이러한 사건들은 제네바 협약의 규칙과 그 보호 상징에 대한 존중이 부족함을 보여주는 경우가 많았다. 사망한 대표들 중에는 다음과 같은 사람들이 있었다.

  • 낸시 몰로이 (캐나다)와 다른 5명: 1996년 12월 17일, 체첸 노비 아타기 근처 그로즈니에 있는 ICRC 야전 병원에서 잠을 자던 중 백병전으로 사살되었다. 살인범들은 잡히지 않았다.
  • 리카르도 뭉기아 (엘살바도르): 아프가니스탄에서 물 엔지니어로 일했으며, 2003년 3월 27일 현지 동료들과 함께 차량을 타고 이동하던 중 신원 미상의 무장 세력에 의해 차량이 멈춰 세워졌다. 그는 총에 맞아 숨졌고, 그의 동료들은 탈출하도록 허용되었다. 그의 살해로 인해 ICRC는 아프가니스탄 전역에서 일시적으로 활동을 중단했다.[10]
  • 바체 아르슬라니안 (캐나다): 이라크 ICRC 미션의 물류 코디네이터로 일했다. 2003년 4월 8일 이라크 적신월사 회원들과 함께 바그다드를 지나던 중 차량이 우발적으로 교전의 십자포화에 휘말려 사망했다.

2. 3. 6. 21세기

21세기에 들어 국제 적십자 위원회(ICRC)의 활동 환경은 더욱 위험해졌다. 특히 지역 분쟁 및 내부 무력 충돌 현장에서 활동하는 대표들의 희생이 증가했는데, 이는 제네바 협약 규범과 보호 표장에 대한 존중 부족을 드러내는 사례였다.

  • 리카르도 뭉기아(엘살바도르): 아프가니스탄에서 물 관련 기술자로 활동하던 중, 2003년 3월 27일 동료들과 이동하다 신원 미상의 무장 괴한에게 살해되었다. 이 사건으로 ICRC는 아프가니스탄 내 활동을 일시적으로 중단해야 했다.[10]
  • 바체 아르슬라니안(캐나다): 이라크 ICRC 대표단의 물류 담당관으로, 2003년 4월 8일 바그다드에서 이라크 적신월사 회원들과 함께 이동하던 중 우발적인 교전에 휘말려 사망했다.


2002년 1월 27일, 팔레스타인 적신월사 자원봉사 구급대원이자 자살 폭탄 테러범이었던 와파 이드리스는 적신월사 구급차를 이용해 예루살렘으로 이동, 자파 스트리트 폭탄 테러를 감행했다.[11][12] 이드리스는 적신월사 제복 차림으로 자파 로드의 신발 가게 앞에서 폭탄을 터뜨려 자신과 81세 노인 1명을 숨지게 하고 100명 이상에게 부상을 입혔다.[13][14][15][16][17] 이 사건 이후, 이스라엘 당국은 팔레스타인 무장 단체가 구급차를 테러리스트 및 무기 수송에 이용한다는 이유를 들어, 팔레스타인 구급차의 검문소 통과 시 철저한 검색을 요구하게 되었다.[23][24][25][26] 이스라엘 보건부는 과거 적십자사 구급차가 테러리스트 운송에 사용된 사례가 있었다고 발표하기도 했다.[27]

2000년대 아프가니스탄 분쟁 지역에서 ICRC는 지뢰 피해자를 위한 물리 치료 재활 센터 6곳을 설립하는 등 활발히 활동했다. 이들의 지원은 정부군, 국제군, 민간인은 물론 무장 반군에게까지 공평하게 제공되었다. ICRC는 아프가니스탄 정부 및 국제군이 관리하는 구금 시설의 수감자들을 정기적으로 면회했으며, 2009년부터는 탈레반 측 구금자들에게도 접근할 수 있었다.[18] ICRC는 "전쟁 피해를 입은 모든 당사자를 가능한 한 공정하게 대우해야 한다"는 조직의 헌장에 따라 아프가니스탄 보안군과 탈레반 양측 모두에게 기본적인 응급처치 훈련과 구호품을 제공했다.[19] 2021년 8월 NATO 주도 군대가 철수한 이후에도 ICRC는 아프가니스탄에 남아 분쟁 피해자 지원 및 보호 임무를 지속하기로 결정했다. 2021년 6월부터 ICRC 지원 시설에서는 무력 충돌로 부상당한 4만 명 이상을 치료했다.[20]

우크라이나에서의 활동은 ICRC의 10대 주요 파견 임무 중 하나로, 2014년부터 우크라이나 적십자사와 긴밀히 협력하며 주로 돈바스도네츠크 분쟁 지역의 부상자들을 지원해왔다. 2022년 2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전투는 동부, 북부, 남부의 인구 밀집 지역으로 확산되었다. 키이우 주재 ICRC 대표단장은 주요 도시들이 최전선이 되면서 어린이, 환자, 노인 등 민간인들이 심각한 위험에 처했다고 경고하며, 모든 분쟁 당사자들에게 국제 인도법상 의무인 민간인 및 기반 시설 보호, 난민과 전쟁 포로의 존엄성 존중을 긴급히 촉구했다.[21] 이러한 분쟁 양상에 대응하여, ICRC는 민간 해커를 위한 교전 규칙을 발표하기도 했다.[22]

2023년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이 발발하자, ICRC는 수천 명의 민간인 사상자를 낳은 폭력 사태를 "혐오스럽다"고 규탄하며 양측에 민간인의 고통 완화를 간청했다. ICRC는 팔레스타인 적신월사(PRCS)와 협력하여 중립적이고 독립적인 인도주의 활동을 펼치며, 모든 당사자에게 민간인의 생명 보호와 존엄성 존중을 촉구했다.[28] ICRC와 PRCS는 격렬한 교전 속에서도 이집트를 통해 대규모 구호품 수송대를 조직하여 가자 지구 내 병원들을 지원했으나, 의료 시설과 구급차에 대한 공습으로 심각한 피해를 겪기도 했다.[29] ICRC는 11월 성명을 통해 팔레스타인 지역과 이스라엘에서의 전투로 민간인들이 "압도적인 고통"을 겪고 있다고 밝혔다. 이스라엘군의 파괴적인 공습과 지상 작전으로 인해 민간인을 포함하여 25,000명 이상이 사망했으며, 여기에는 이스라엘인과 하마스 대원도 포함되었다.[30][31][32]

11월 말, ICRC 팀은 가자 지구에 억류된 인질과 서안 지구로 이송될 팔레스타인 수감자들의 석방 및 이송 작전을 지원했다.[33] 12월 초, 미국 국무장관 토니 블링컨은 ICRC가 남은 인질들에게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ICRC는 직접적인 협상 권한은 없으나, 11월 카타르에서 하마스 고위 지도자 이스마일 하니예와 직접 만나 남은 인질들에 대한 접근을 요구한 바 있다.[34]

2. 4. 국제 적십자사·적신월사 연맹 (IFRC)

국제 적십자사·적신월사 연맹(IFRC)은 전 세계 각국 적십자사 및 적신월사들의 활동을 조정하고 지원하는 국제 기구이다. 1919년에 설립된 이래, 전쟁 이외의 자연재해나 인재 발생 시 국제적인 구호 활동을 펼치고, 각국 협회의 재난 대응 능력 향상과 지역사회 보건 및 개발 사업을 지원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 국제 적십자 위원회(ICRC)와 함께 국제 적십자·적신월 운동을 구성하는 핵심 요소 중 하나이다.

2. 4. 1. 역사

헨리 데이비슨, 적십자사 연맹 창립자


1919년,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일본, 미국의 적십자사 대표들은 파리에서 모여 "적십자사 연맹"(League of Red Cross Societies, 이후 IFRC로 발전)을 창설했다. 이 구상은 당시 미국 적십자사 회장이었던 헨리 포머로이 데이비슨에게서 비롯되었다. 미국 적십자사가 주도한 이 움직임은 국제 적십자 위원회(ICRC)의 엄격한 임무 범위를 넘어, 전쟁 이외의 비상사태(인재 또는 자연재해)에 대한 구호 지원까지 포함하도록 적십자 운동의 국제 활동을 확장하려는 목적을 가졌다. 미국 적십자사는 창립 이후 재난 구호 임무에서 풍부한 경험을 쌓아왔다.

ICRC와 별도로 연맹이 설립되는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ICRC는 두 조직 간의 경쟁 가능성을 우려했으며, 이는 어느 정도 타당한 걱정이었다. 연맹의 설립은 운동 내에서 ICRC의 주도적 위치를 약화시키고, 점차 대부분의 임무와 권한을 다자간 기구로 이전하려는 시도로 비춰질 수 있었다. 또한, 연맹 창립 회원국은 모두 삼국 협상 국가 또는 관련 파트너 국가의 국립 협회였다. 1919년 5월 연맹의 초기 정관에는 5개 창립 협회에 특권을 부여하고, 중앙 강국(독일, 오스트리아, 헝가리, 불가리아, 터키) 및 러시아의 국립 적십자 협회를 영구적으로 배제할 권리를 포함하는 규정이 있었다. 이는 모든 국립 협회 간의 보편성과 평등이라는 적십자 원칙에 위배되어 ICRC의 우려를 더욱 키웠다.

연맹이 조직한 첫 구호 활동은 폴란드에서 발생한 기근과 발진티푸스 유행 피해자를 위한 것이었다. 설립 5년 만에 연맹은 34개국에서 47건의 기부 호소를 진행했으며, 이는 이러한 유형의 적십자 활동 필요성을 보여주는 지표였다. 모금된 총액은 6.85억스위스 프랑에 달했으며, 러시아, 독일, 알바니아의 기근 피해자, 칠레, 이란, 일본, 콜롬비아, 에콰도르, 코스타리카, 터키의 지진 피해자, 그리스와 터키의 난민에게 비상 물품을 제공하는 데 사용되었다. 연맹의 첫 대규모 재난 구호 활동은 약 20만 명의 사망자를 낸 1923년 일본 지진 이후에 이루어졌다. 연맹의 조정을 통해 일본 적십자사는 다른 회원 협회로부터 총 1억달러 상당의 물품을 지원받았다. 연맹은 또한 국립 협회 내 청소년 적십자 조직 창설이라는 새로운 분야를 개척했다.

1917년부터 1922년까지 이어진 러시아 내전에서 ICRC와 연맹의 공동 임무는 적십자 운동이 내전에 참여한 첫 사례였으나, 당시에는 제네바 협약에 명시적인 근거가 없었다. 연맹은 25개 이상의 국립 협회 지원을 받아 기근과 질병으로 고통받는 민간인을 위해 구호품을 배포했다. ICRC는 러시아 적십자사 및 이후 소비에트 연방 협회와 협력하며 중립성을 강조했다. 1928년에는 ICRC와 연맹 간의 협력을 조정하기 위해 "국제 협의회"가 설립되었고, 이 역할은 나중에 "상설 위원회"로 이관되었다. 같은 해, 운동 내에서 ICRC와 연맹의 역할을 정의하는 공동 정관이 처음으로 채택되었다.

1935년부터 1936년까지의 제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 동안 연맹은 약 170만스위스 프랑 상당의 구호 물품을 기부했다. 그러나 베니토 무솔리니 치하의 이탈리아 파시스트 정권이 적십자와의 협력을 거부하여 구호품은 에티오피아 측에만 전달되었다. 전쟁 중 적십자 표장을 단 인원 약 29명이 이탈리아군의 공격으로 사망하는 비극도 발생했다. 1936년부터 1939년까지의 스페인 내전에서는 연맹이 41개의 국립 협회의 지원을 받아 다시 ICRC와 협력했다. 1939년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직전, 연맹은 스위스의 중립성을 활용하기 위해 본부를 파리에서 제네바로 이전했다.

1963년 노벨 평화상 시상식. 왼쪽부터: 노르웨이의 하랄 왕세자, 노르웨이의 올라프 5세 국왕, ICRC 회장 레오폴드 보이시에, 연맹 회장 존 A. 맥컬리.


1952년, 1928년에 제정된 운동의 공동 정관이 처음으로 개정되었다. 1960년대1970년대탈식민지화 시기에는 새로 독립한 국가들의 적십자 및 적신월 협회가 대거 승인받으면서 회원 수가 크게 증가하여, 1960년대 말에는 전 세계적으로 100개가 넘는 협회가 활동하게 되었다. 1963년 12월 10일, 연맹과 ICRC는 공동으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1983년, 적신월 표장을 사용하는 국립 협회의 수가 증가함에 따라 연맹은 "적십자 및 적신월사 연맹"(League of Red Cross and Red Crescent Societies)으로 명칭을 변경했다. 1986년에는 1965년에 채택된 운동의 7가지 기본 원칙이 정관에 포함되었다. 1991년에는 연맹의 명칭이 현재의 공식 명칭인 "국제 적십자·적신월사 연맹"(International Federation of Red Cross and Red Crescent Societies, IFRC)으로 다시 변경되었다. 1997년, ICRC와 IFRC는 세비야 협정에 서명하여 운동 내에서 양 기관의 책임을 더욱 명확히 했다. 2004년, IFRC는 남아시아의 쓰나미 재해 이후 역대 최대 규모의 구호 활동을 전개했다. 40개 이상의 국립 협회와 22,000명 이상의 자원봉사자가 협력하여 식량과 쉼터를 잃고 전염병 위험에 처한 수많은 피해자에게 구호를 제공했다.

3. 활동

국제 적십자·적신월 운동은 인도주의적 목표 달성을 위해 세계 곳곳에서 다양한 활동을 수행한다. 주요 활동 영역은 무력 충돌이나 자연 재해 발생 시 피해자 보호 및 지원으로, 부상자 치료, 전쟁 포로 지원, 이재민 구호 등이 포함된다.

또한 평시에는 보건 증진, 질병 예방, 재난 대비 활동 등을 통해 지역사회의 회복력 강화에 힘쓴다. 국제 인도법과 운동의 기본 원칙을 널리 알리고 교육하는 것 역시 중요한 활동이다.

이러한 활동은 국제 적십자 위원회(ICRC), 국제 적십자사·적신월사 연맹(IFRC), 그리고 전 세계 190여 개국의 적십자사 및 적신월사가 협력하여 수행한다. 각 기구는 고유한 역할과 책임을 지니면서도 운동의 기본 원칙 아래 공동 목표를 추구한다. 예를 들어, ICRC는 주로 무력 충돌 상황에서 활동하고, IFRC는 자연 재해 구호 및 각국 협회 지원에 중점을 두며, 각국 협회는 자국 내에서 다양한 인도주의 사업을 펼친다.

3. 1. 조직

“국제적십자사”라는 표현이 종종 쓰이지만, 실제로 이 이름을 가진 공식 기관이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운동은 같은 원칙과 목적, 상징을 공유하는 여러 독립 단체로 이루어져 있다.

제네바 국제 적십자·적신월 박물관 입구


어린이를 위한 활동을 수행하는 터키 적신월사 직원


전 세계적으로 ICRC, 국제 연맹 및 각국 적십자사에서 봉사하는 사람은 약 8천만 명이며, 그 중 대다수가 각국 적십자사에서 활동한다.[35]

3. 2. 기본 원칙

1965년 10월 2일부터 9일까지 오스트리아 의 노이에 호프부르크에서 열린 제20차 국제 회의에서 대표자들은 운동의 모든 구성 요소가 공유하는 7가지 기본 원칙을 "선포"했으며, 이 원칙들은 1986년에 운동의 공식 규약에 추가되었다.[36] 이 원칙들이 지속적인 효력과 보편적인 수용을 얻게 된 것은 그것들이 형성된 과정 덕분이다. 이는 합의에 도달하려는 노력보다는 지난 100년간 성공적인 운영과 조직 단위가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을 발견하려는 시도였다. 그 결과, 적십자 및 적신월의 기본 원칙은 제시된 것이 아니라, 의도적이고 참여적인 발견 과정을 통해 '찾아진' 것이다.

각 원칙에 대해 제시된 정의는 해당 원칙의 필수적인 부분이며, 시간과 장소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해석이 아니라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활동에 임해서는 다음의 7원칙을 내걸고 이에 근거한 행동을 하고 있다.[63]

적십자 및 적신월 운동의 기본 원칙
원칙정의
인도주의국제 적십자 및 적신월 운동은, 전장에서 부상자에게 차별 없이 도움을 주려는 열망에서 시작되었으며, 국제적 및 국가적 역량으로 어디에서든 인간의 고통을 예방하고 완화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 목적은 생명과 건강을 보호하고 인간 존엄성을 보장하는 것이다. 모든 사람 간의 상호 이해, 우정, 협력 및 지속적인 평화를 증진한다.
공평성국적, 인종, 종교적 신념, 계급 또는 정치적 견해에 따라 차별하지 않는다. 오직 개인의 필요에 따라 인도주의적 활동을 수행하며, 가장 긴급한 고통의 경우를 우선적으로 돕는다.
중립성모든 사람의 신뢰를 지속적으로 얻기 위해, 운동은 적대 행위에서 어느 한 편을 들거나, 정치적, 인종적, 종교적 또는 이념적 성격의 논쟁에 관여할 수 없다.
독립성운동은 독립적이다. 각국 적십자사는 자국 정부의 인도주의적 활동의 보조 기관으로서 자국 법률의 적용을 받지만, 항상 자율성을 유지하여 언제든지 운동의 원칙에 따라 행동할 수 있어야 한다.
자발적 봉사영리 추구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인 구호 운동이다.
통일성한 국가에는 하나의 적십자사 또는 하나의 적신월사만 존재할 수 있다.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어야 한다. 해당 국가 전역에서 인도주의적 활동을 수행해야 한다.[64]
보편성모든 적십자사가 동등한 지위를 가지고 서로 돕는 데 동등한 책임과 의무를 공유하는 국제 적십자 및 적신월 운동은 전 세계적이다.


3. 3. 국제 회의와 상임 위원회

4년에 한 번 열리는 국제 적십자·적신월 회의는 운동의 최고 기관이다. 이 회의에는 모든 국제 적십자 위원회(ICRC), 국제 적십자·적신월 연맹(IFRC) 및 제네바 협약의 서명 국가뿐만 아니라 모든 국가 협회의 대표단이 모인다. 회의가 열리지 않는 기간 동안에는 적십자·적신월 상임 위원회가 최고 기구로서 회의의 결의 사항의 이행 및 준수를 감독한다.[37] 또한, 상임 위원회는 ICRC와 IFRC 간의 협력을 조정한다. 상임 위원회는 ICRC의 대표 2명(회장 포함), IFRC의 대표 2명(회장 포함), 그리고 국제 회의에서 선출된 5명의 개인으로 구성된다. 상임 위원회는 평균적으로 6개월마다 소집된다.

또한, 운동의 대표자 회의 협약은 국제 적십자·적신월 연맹의 총회 회의 중에 2년마다 열린다. 대표자 회의는 운동을 위한 공동 활동을 계획하고 조정한다.

3. 4. ICRC의 임무 및 법적 지위

국제 적십자 위원회(ICRC)의 주요 임무는 다음과 같다.

  • 분쟁 및 재해 발생 시 부상자에 대한 구호 활동 전개
  • 전쟁 포로에 대한 인도적 지원 제공 (포로 명부 작성, 포로 대우 감시, 중립국 경유 위문품 배포 및 포로 가족과의 통신 중개 등 포함)
  • 적십자의 기본 원칙 및 국제 인도법 보급 및 촉진
  • 평시 재해 대책, 의료 보건, 청소년 육성 등의 업무 수행


이처럼 ICRC는 매우 광범위한 활동을 수행한다.

3. 5. IFRC의 임무 및 법적 지위

IFRC 엠블럼


국제 적십자·적신월 연맹(IFRC)은 전 세계 각국 적십자·적신월사 간의 협력을 조정하고, 공식적인 적십자사가 없는 국가에서 새로운 적십자사의 설립을 지원한다. 국제 무대에서 IFRC는 자연 재해, 인적 재해, 전염병, 대규모 난민 이동 및 기타 비상 사태와 같은 긴급 상황 발생 시 구호 지원 임무를 조직하고 이끈다.

1997년 세비야 협정에 따라 IFRC는 무력 충돌의 일부로 발생하지 않는 모든 비상 사태에서 운동의 주도 기관이다. IFRC는 영향을 받은 국가의 적십자사(각각 '운영 국가 적십자사(ONS)')뿐만 아니라 지원을 제공하려는 다른 국가의 적십자사('참여 국가 적십자사(PNS)')와 협력한다. 국제 연맹 총회에 정회원 또는 옵서버로 가입한 187개의 적십자사 중 약 25~30개가 다른 국가에서 정기적으로 PNS로 활동한다.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는 곳은 미국 적십자사, 영국 적십자사, 독일 적십자사와 스웨덴 적십자사, 노르웨이 적십자사이다.

최근 몇 년 동안 주목받은 IFRC의 또 다른 주요 임무는 지뢰 사용에 대한 전 세계적인 성문화된 금지 조치를 위해 노력하고 지뢰로 부상당한 사람들에게 의료, 심리적, 사회적 지원을 제공하는 데 전념하는 것이다.

IFRC의 임무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임무 내용
인도주의적 원칙과 가치 증진
자연 재해와 같은 대규모 긴급 상황 발생 시 구호 지원 제공
자원 봉사자 교육 및 장비 및 구호 물품 제공을 통해 재난 대비를 위한 각국 적십자사 지원
지역 보건 프로젝트 지원
청소년 관련 활동을 통한 각국 적십자사 지원


3. 6. 각국 적십자사 및 적신월사

제네바 협약이 제정된 직후, 여러 국가에서 국가 차원의 적십자 및 적신월 협회가 설립되기 시작했다. 1864년에는 벨기에, 덴마크, 프랑스, 올덴부르크, 이탈리아, 프로이센, 에스파냐, 뷔르템베르크에 최초의 국가 협회가 세워졌다. 같은 해, 루이 아피아와 네덜란드 육군 대위였던 찰스 반 데 벨데는 제2차 슐레스비히 전쟁에서 적십자 기호 아래 활동한 최초의 독립적이고 중립적인 대표단이 되었다.

오스만 제국은 1865년 7월 5일 제네바 협약을 비준했으며, 크림 전쟁(1853-1856) 당시 질병으로 인한 군인들의 큰 피해를 경험한 후 1868년 터키 적신월사를 설립했다. 이는 최초의 적신월사 중 하나였으며, 무슬림 세계에서 중요한 자선 단체로 자리 잡았다.

이후 몇 년 동안 유럽의 거의 모든 국가에 국가 협회가 설립되었다. 이러한 움직임은 19세기 말 고조되던 애국심과 맞물려, 각국의 도덕적 우월성을 상징하는 것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1881년에는 클라라 바튼의 노력으로 미국 적십자사가 설립되었다. 점점 더 많은 국가가 제네바 협약에 서명하고 이를 준수하면서 적십자 운동은 국제적으로 큰 영향력을 얻었고, 국가 협회는 자원봉사 활동의 중요한 장이 되었다.

1905년 일본 육군 공격을 막은 미카미 고타로의 적십자 깃발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직전인 1914년까지 국제 적십자 위원회(ICRC) 설립 50주년을 맞아 전 세계적으로 45개의 국가 구호 협회가 활동하고 있었다. 운동은 유럽과 북미를 넘어 중앙 및 남아메리카(아르헨티나, 브라질, 칠레, 쿠바, 멕시코, 페루, 엘살바도르, 우루과이, 베네수엘라), 아시아(중화민국, 일본 제국, 시암), 아프리카(남아프리카 연방)로 확장되었다.

각국의 적십자 및 적신월사는 분쟁 지역에서 인도주의적 활동을 수행하지만, 때로는 논란에 직면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2023년 이스라엘-하마스 전쟁 이전, 이스라엘 당국은 팔레스타인 구급차가 검문소를 통과할 때 철저한 수색을 요구했는데, 이는 과거 팔레스타인 단체가 구급차를 이용해 무장대원이나 무기를 수송한 사례가 있다는 주장에 근거한 것이었다.[23][24][25][26] 이스라엘 보건부는 2002년 4월까지 마겐 다비드 아돔(MDA)과 적십자사가 긴밀히 협력했으나, 당시 이스라엘 방위군(IDF)이 적십자 구급차가 테러리스트 수송에 이용되었다고 주장하면서 관계가 영향을 받았다고 밝혔다.[27]

2023년 이스라엘-하마스 전쟁 발발 이후, ICRC는 팔레스타인 적신월사(PRCS)와 협력하여 가자 지구에 대한 인도주의적 지원을 제공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들은 이집트를 통해 구호품을 전달하고, 의료 시설과 구급차가 공격받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활동을 이어갔다.[29] ICRC는 분쟁으로 인해 민간인들이 압도적인 고통을 겪고 있다고 지적하며[30][31][32], 양측에 민간인 보호와 인도주의적 접근 보장을 지속적으로 촉구했다.[28] 2023년 11월 말에는 가자 지구에 억류된 인질과 서안 지구로 이송될 팔레스타인 수감자들의 석방 및 이송 작전을 지원했다.[33] ICRC는 협상 당사자는 아니지만, 카타르에서 하마스 지도부와 직접 만나 남아있는 인질에 대한 접근을 요구하기도 했다.[34]

4. 표장

국제 적십자·적신월 운동의 표장은 전쟁과 같은 무력 충돌 상황에서 의료 인력, 시설, 구호품 등을 식별하고 보호하기 위한 중요한 상징이다. 이 표장들은 제네바 협약에 따라 국제적인 보호를 받으며, 오용은 엄격히 금지된다.

가장 널리 알려진 표장은 흰 바탕에 붉은 십자가 모양의 적십자이다. 이는 운동 창립 초기부터 사용되었으며, 스위스 국기의 색상을 반전시킨 디자인이라는 설명이 널리 퍼져 있다. 그러나 이슬람 문화권에서는 십자가가 특정 종교를 연상시킨다는 이유로, 붉은 초승달 모양의 적신월 표장을 사용한다. 적신월 표장은 오스만 제국에서 처음 사용하기 시작하여 여러 이슬람 국가로 확산되었다.

표장의 종교적·문화적 중립성에 대한 논의 끝에, 2005년에는 붉은 마름모 모양의 적수정이 세 번째 공식 표장으로 채택되었다. 이는 특정 상징에 거부감을 느끼는 국가나 단체도 사용할 수 있도록 고안된 중립적인 표장이다. 적수정의 도입으로 이스라엘의 마겐 다비드 아돔과 같이 기존 표장 사용에 어려움을 겪던 단체들의 국제 운동 참여가 용이해졌다.

과거 이란에서 사용되었던 '적사자·태양' 표장 또한 제네바 협약에 따라 공식적으로 인정된 표장이었으나, 현재 이란에서는 이 표장을 사용하지 않지만, 조약상으로는 여전히 유효한 표장으로 남아있다.[70] 한편, 이스라엘의 마겐 다비드 아돔이 사용하는 '다윗의 붉은 방패'는 국제적으로 공인된 보호 표장은 아니다.

이러한 표장들은 명확한 형태나 색조가 엄격하게 규정되어 있지는 않다. 이는 실제 현장에서 표지의 세부적인 차이로 인해 보호받지 못하는 상황을 방지하기 위함이다.[73] 표장의 사용은 법률로 정해진 조직과 개인에게만 엄격히 허용된다.[74]

4. 1. 적십자

적십자 표장전쟁 발생 시 군대가 환자 구호 차량 등을 식별하여 공격을 피하도록 돕는 역할을 한다. 흰 바탕에 붉은색 십자 모양의 상징이며, 지역에 따라 다양한 변형이 존재한다.

적십자 표장은 1863년 적십자 규약 제정 시 결정되었으며, 창립 초기부터 여러 국가에서 사용되었다. 당시에는 단체 이름이 통일되지 않았으나, 1867년부터 네덜란드 구호사가 통칭으로 마크의 이름을 사용하기 시작했고, 이후 1872년 스페인을 시작으로 1870년대에 걸쳐 각국 구호 단체들이 '적십자사'로 명칭을 변경했다.[65] 일반적으로 '적십자사'로 불리지만, 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홍십자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적십자회'라는 명칭을 사용한다.

적십자 표장의 기원에 대해서는, 앙리 뒤낭의 모국인 스위스 국기의 색상을 반전시킨 것이라는 설명이 널리 알려져 있으며, 제네바 협약에도 '스위스를 존중하기 위해 스위스 연방의 국기 배색을 반전시켜 제작한 흰색 바탕에 붉은 십자가의 문장'이라는 문구가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1863년 창립 당시 기록에는 루이 아피아가 흰색 완장을 제안하고, 앙리 뒤푸르로 추정되는 인물이 붉은 십자 마크 추가를 제안했다는 내용만 있을 뿐, 스위스 국기에 대한 언급은 없다. 스위스 국기와의 연관성은 1870년 귀스타브 모아니에의 발언에서 처음 언급되었다.[67]

제네바 협약에 스위스 국기 관련 문구가 삽입된 것은 초기 가맹국 중 하나인 오스만 제국의 영향이 컸다. 오스만 제국은 1865년 제네바 협약에 가입했지만, 이슬람교도가 대다수인 자국 군인에게 기독교의 상징인 십자가 표지를 사용하는 것이 부적절하다는 이유로, 1876년 붉은 초승달 모양의 '적신월'(Red Crescent) 표장을 새로 제정하고 이를 사용하겠다고 스위스 정부에 통보했다. 이는 페르시아, 태국 등 다른 국가에서도 새로운 표장 제정 움직임을 촉발했고, 표장의 통일성을 중시하던 국제 적십자 위원회(ICRC)와의 갈등을 야기했다. 결국 1906년 제네바 협약 개정 시, 적십자 표장이 기독교와 무관하며 스위스에 대한 존중의 표시임을 강조하여 비기독교 국가, 특히 이슬람 국가의 적십자 표장 사용을 유도하고자 앞서 언급된 문구가 삽입되었다.[68] 하지만 오스만 제국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이듬해 적신월 표장 사용을 조건으로 가입했으며, 이후 여러 이슬람 신생 독립국들도 적신월을 채택했다.[66] (단, 인도네시아는 이슬람교도가 다수임에도 '적십자사'를 사용하며, 파키스탄, 말레이시아, 방글라데시 등은 초기 '적십자사'에서 '적신월사'로 변경했다). 이란의 '적사자 해'(Red Lion with Sun) 표장도 한때 공인되었다.[69]

그러나 ICRC는 다른 표장 채택에 소극적인 입장을 유지했다. 제2차 세계 대전 후 유대교를 국교로 하는 이스라엘이 독립하여 마겐 다비드 아돔(붉은 다윗의 방패사)을 설립하고 '다윗의 붉은 방패'(Red Star of David)를 표장으로 제안했을 때, ICRC는 이를 승인하지 않았다. 이란의 적사자 해 표장 역시 현재는 사용되지 않는다 (조약상으로는 유효함).[70]

적십자·적신월 외 여러 표장이 난립하는 혼란을 막기 위해, 종교적으로 중립적인 세 번째 공통 표장 도입이 논의되었다. 오랜 논의 끝에 2005년 12월 8일, 적십자·적신월 국제회의 총회에서 투표를 통해 붉은 마름모 모양의 '적수정'(Red Crystal) 표장이 채택되었다. 이는 제네바 협약 제3 추가 의정서로서 서명이 개방되었고, 2007년 1월 14일 발효되었으며, 기존 표장과 동일한 법적 효력을 지닌다. 적수정 채택으로 이스라엘의 마겐 다비드 아돔은 국제 적십자 운동에 가입할 수 있게 되었다. 다만, '다윗의 붉은 방패' 표장은 이스라엘 국내(분쟁 지역 제외)에서만 사용하는 '표시 표장'이며, 제네바 협약의 '보호 표장'으로는 인정되지 않는다. 에리트레아 등 국내 종교적 균형 때문에 적십자·적신월 병용을 원했던 국가들도 적수정 사용을 통해 가입을 기대하고 있다.[71] 적수정 표장은 단독 사용 외에, 국제 활동 시 해당 국가의 승인이 있으면 내부 흰색 부분에 독자적인 마크를 넣어 사용할 수도 있다.[72]

한편, 적십자·적신월·적수정 표장의 명확한 형태나 색조는 규정되어 있지 않다. 이는 특정 규격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난 표지가 적십자 표장으로 인정받지 못해 공격받는 상황을 방지하기 위함이다.[73] 이 표장들은 법률로 정해진 조직 및 단체만이 사용할 수 있다.[74]

4. 2. 적신월

이슬람 국가에서는 적십자 표장의 십자가가 기독교를 의미하고 십자군을 연상시킨다는 이유로 거부감을 나타냈다. 이에 따라 흰색 바탕에 붉은 초승달을 그린 '적신월'(Red Crescent) 표장을 사용하며, 관련 단체는 '적신월사'라고 부른다.[66] 적신월 표장은 터키 국기인 월성기를 색 반전시킨 것을 모티브로 제작되었다.

오스만 제국은 1865년 제네바 협약에 가입했지만, 자국 군인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이슬람교도가 기독교의 상징인 십자가 표지를 사용하는 것이 부적절하다고 판단했다. 결국 1876년에 붉은 초승달 모양의 적신월 표장을 새롭게 제정하고, 1876년-1878년 러시아-투르크 전쟁에서 이를 사용하기 시작했으며, 이후 오스만 제국의 구호 부대에는 적십자 대신 적신월을 사용하겠다고 스위스 정부에 통보했다.

오스만 제국의 이러한 움직임은 다른 비기독교 국가에도 영향을 미쳐, 페르시아태국 등에서도 새로운 표장을 만들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이는 세계적으로 동일한 표장을 사용하기를 원했던 국제 적십자 위원회(ICRC)와의 갈등을 유발했다. 1906년 제네바 협약 개정 당시, 적십자 표장이 스위스 국기에서 유래했으며 기독교와 무관함을 강조하여 이슬람 국가들의 적십자 사용을 유도하려 했으나[68], 오스만 제국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국 오스만 제국은 이듬해 적신월 표장의 사용을 조건으로 가입했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여러 이슬람 국가들이 신생 독립하면서, 이들 국가 역시 적신월을 자국 구호 단체의 표장으로 채택했다. 다만, 이슬람교도가 다수인 인도네시아는 예외적으로 '적십자사' 명칭과 표장을 사용한다. 반면 파키스탄, 말레이시아, 방글라데시 등은 처음에는 '적십자사'였으나 나중에 '적신월사'로 변경했다.[69]

4. 3. 적수정



기존의 적십자나 적신월 외에도 여러 표장이 사용되면서 혼란이 발생하자, 이를 대체할 수 있는 공통의 세 번째 표장을 채택하자는 제안이 나왔다. 2005년 12월 8일, 적십자·적신월 국제회의 총회에서는 투표를 통해 찬성 다수로 붉은 마름모 형태의 종교적으로 중립적인 세 번째 표장인 '''적수정'''(en)을 채택했다. 이는 제네바 협약의 제3 추가 의정서(en)로서 서명이 개방되었고, 2007년 1월 14일에 공식 발효되었다. '적수정' 표장은 그 의미와 법적 효력 면에서 기존의 적십자 및 적신월 표장과 완전히 동일하다.

'적수정' 표장의 도입으로 이스라엘의 마겐 다비드 아돔(붉은 다윗의 방패사)은 국제 적십자·적신월 운동에 정식으로 가입할 수 있게 되었고, 국제 적십자 위원회(ICRC)로부터 승인을 받았다. 그러나 다윗의 붉은 방패(en) 표장 자체는 이스라엘 국내(국경 분쟁 중인 서안 지구와 동예루살렘 지역 제외)에서만 사용하는 '표시 표장'으로 인정될 뿐, 제네바 협약 상의 '보호 표장' 지위는 갖지 못한다.

또한, 에리트레아와 같이 국내의 종교적 상황 때문에 적십자와 적신월 표장을 함께 사용하기를 원했던 국가들도 '적수정' 표장을 사용함으로써 국제 적십자·적신월 운동 가입의 길이 열리기를 기대하게 되었다.[71] '적수정' 표장은 단독으로 사용하는 것 외에도, 국제 활동 시 해당 활동이 이루어지는 국가의 승인을 받으면 표장 안의 흰색 부분에 각국의 독자적인 상징을 넣어 사용할 수도 있다.[72]

한편, 적십자·적신월·적수정 각 표장의 정확한 형태나 색상에 대한 규정은 명확하게 정해져 있지 않다. 이는 전쟁과 같은 상황에서 표장의 형태나 색상이 약간 다르더라도 해당 표지를 단 구호 인력이나 시설이 공격받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조치이다.[73]

4. 4. 적사자·태양

이란의 '적사자·태양'(en) 표장 역시 과거 국제 적십자·적신월 운동에서 공인된 표장이었다.[69] -- 현재 이란에서는 이 표장을 사용하지 않지만, 제네바 협약 상으로는 여전히 유효한 표장으로 남아있다.[70]

4. 5. 승인되지 않은 표장; 붉은 다윗의 별과 붉은 만자

이스라엘이 독립하면서 유대교를 기반으로 마겐 다비드 아돔(MDA, 다윗의 붉은 방패사)이 설립되었다. MDA는 고유 표장으로 '다윗의 붉은 방패'(Red Star of David)를 제안했으나, 국제 적십자 위원회는 이를 제네바 협약에 따른 공식 보호 표장으로 인정하는 것을 거부했다.[69] 이로 인해 '다윗의 붉은 방패'는 국제적으로 승인된 표장이 되지 못했다.[70]

이러한 상황은 2005년 12월 8일, 종교적으로 중립적인 제3의 표장인 '적수정'(Red Crystal)이 채택되면서 변화를 맞이했다. 적수정 표장의 도입은 마겐 다비드 아돔이 국제 적십자·적신월 운동에 정식으로 가입하고 국제 적십자 위원회(ICRC)의 승인을 받는 길을 열어주었다.[71]

그러나 '다윗의 붉은 방패' 자체는 여전히 제네바 협약 상의 '보호 표장' 지위를 갖지 못한다. 사용은 이스라엘 국내(국경 분쟁 지역 제외)에서의 '표시 표장'으로 한정된다.[71] 국제 활동 시에는 적수정 표장을 사용해야 하며, 적수정 표장은 단독으로 사용하거나, 활동하는 국가의 승인이 있을 경우 표장 안의 흰색 부분에 '다윗의 붉은 방패'와 같은 고유 마크를 넣어 사용할 수도 있다.[72]

5. 보호 표장

적십자 표장은 전쟁 시 군대가 부상자 구호 차량을 식별하여 공격을 피하도록 돕는 역할을 한다. 흰 바탕에 붉은색 십자 모양이 기본이며, 지역에 따라 다양한 변형이 존재한다.

적십자 표장은 스위스 국기의 색을 반전시킨 것이고, 적신월 표장은 터키 국기인 월성기의 색을 반전시킨 것을 모티브로 한다. 종교적 의미가 없는 제3의 표장인 적수정 표장도 있지만, 이스라엘 외에는 거의 사용되지 않는다.

적십자 및 적신월 표장(및 유사 표장)은 1949년 8월 12일자 제네바 제1협약(부상병 보호 협약) 제44조 및 제네바 협약 제1추가의정서(1977년) 제8조에 따라 보호된다. 이 표장은 군대 의료·위생 부대의 인원·시설·자재, 그리고 군인·민간인을 불문한 의료 조직, 의료용 수송 수단, 의료 요원, 의료 기기, 의료품, 종교 요원 및 관련 용품을 보호하기 위해 사용된다. 이는 적십자·적신월 관계자 및 시설·자재가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전시·분쟁 지역의 모든 공격으로부터 무조건 보호받아야 할 대상임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 표장이 단순히 의료 시설을 나타내는 것이 아님이 엄격히 규정되어 있다. 다만, 각국 적십자사·적신월사의 허가를 받아 구급차나 구호소 등에서 평시에 사용하는 것은 예외적으로 인정된다(제1협약 제44조 제4항).

일본 세이난 전쟁. 오른쪽에서 두 번째 병사의 배낭에 적십자가 그려져 있다 (1877년)


일본 국내에서는 「적십자 표장 및 명칭 등의 사용 제한에 관한 법률」에 따라, 제1조에 명시된 적십자, 적신월, 적사자 및 태양 표장[75]과 명칭의 사용은 일본 적십자사 (제2조) 및 그 허가를 받은 자 (제3조)에게만 허용된다. 이를 위반하여 함부로 사용할 경우 징역 또는 벌금형에 처해질 수 있다(제4조). (상황에 따라 공기호 위조죄·공기호 부정 사용죄가 적용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일반 병원, 약국, 텔레비전 프로그램, 광고 등에서 잘못 사용하는 사례가 끊이지 않아, 일본 적십자사는 오용 방지를 지속적으로 호소하고 있다.[76][77]

한편, 2002년 제정된 일본의 지도 기호에서는 병원을 나타내는 기호로 오각형 안에 십자가가 들어간 모양, 보건소를 나타내는 기호로 원 안에 십자가가 들어간 모양을 사용한다.[78] 이 기호들의 유래는 병원 기호가 구 일본 육군 위생대의 마크였던 것에서 비롯되었으며[79], 보건소 기호는 병원 기호를 변형한 것이다.[80]

의료나 복지 분야 외의 사례로는, 킥복서 라사다가 2005년부터 2009년까지 사용했던 링네임 "적십자룡(赤十字竜)"에 대해 일본 적십자사가 항의하여 링네임을 변경한 일이 있다.[81]

또한, 일본의 무력 공격 사태 등에 있어서 국민의 보호를 위한 조치에 관한 법률 제157조 제2항은 무력 공격 사태 등 발생 시, 지정 행정 기관의 장 또는 도도부현 지사가 의료기관이나 의료 관계자에게 적십자 표장 등을 사용하게 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상표법 제4조 제1항 제4호에 따라, 적십자 표장 및 명칭 등의 사용 제한에 관한 법률 제1조의 표장 및 명칭은 상표로 등록할 수 없다.[82]

6. 전장에서의 효과와 실제

제네바 협약 등에 의해 표장을 게양한 시설이나 직원은 공격받지 않도록 보호받지만, 실제 전장에서는 이러한 원칙이 반드시 지켜지는 것은 아니다.


  •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미국군은 병원선 부에노스아이레스마루를 격침시키거나, 오야마구치 열차 공습과 같이 기관총 사격을 가하는 사건을 일으켰다.
  • 1945년 8월 22일, 당시 일본령이었던 남사할린의 도요하라역(현 유즈노사할린스크역)은 적십자기를 게양했음에도 불구하고 소련군의 폭격을 받았으며, 이후 점령되었다. 이는 정전 협정이 이미 성립된 후의 일이었다.
  • 2003년10월 27일, 이라크 바그다드에 위치한 국제 적십자 위원회 사무소가 자살 테러 공격을 받았다. 이는 비정규 군사 조직이 제네바 협약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경우가 있음을 보여주며, 적십자 조직의 실효성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는 계기가 되었다.
  • 아프가니스탄에서는 적십자 깃발이 있는 구호 거점이 미국군에 의해 공격받는 일이 발생했다.[94]
  • 2006년 이스라엘군의 레바논 침공 당시 헤즈볼라와의 전투에서는 레바논 적십자 직원들이 집요한 공격을 받았다.
  • 2008년부터 2009년까지 가자 지구에서는 11대 이상의 구급차가 이스라엘군의 공격으로 파괴되었고, 많은 의료 직원이 희생되었다[95]
  • 시리아 내전 중 호무스 구 시가지에서는 2012년 이후 치안 악화로 고립된 주민에 대한 적신월사의 구호 물자 수송이 불가능해졌다. 2014년 2월, 정부군과 반정부군 간의 제한적 정전 하에 구호 물자 수송이 재개되었으나, 수송 트럭 일부가 총격을 받아 직원이 부상하는 사건이 발생했다[96]
  • 2018년8월 14일, 아프가니스탄탈레반국제 적십자 위원회(ICRC)에 대한 불만을 이유로 안전 보장 합의 파기를 선언하며, ICRC에 대한 공격도 불사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97]
  • 2022년3월 30일, 국제 적십자 위원회우크라이나 남부 마리우폴의 적십자 시설이 러시아군의 공격을 받았다고 발표했다[98]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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