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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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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착융은 양주 단양군 출신으로, 도겸을 섬기며 군수 물자 수송을 감독했으나 백성을 착취하고 사리사욕을 채웠다. 그는 불교 사원을 짓고 석가탄신일 행사를 여는 등 불교를 후원했지만, 조조의 서주 침공 이후 광릉 태수 조욱을 살해하고 재물을 약탈하는 등 군벌로 활동했다. 이후 손책과의 대립에서 패배하여 도주하던 중 백성들에게 살해당했으며, 긍정적 평가와 부정적 평가가 공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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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융
기본 정보
이름笮融 (쭤룽)
다른 이름자오롱
생몰년? ~ 195년
출신지양주 단양군
주군도겸 → 유요
직위하비국상
활동 시기후한 말기
상세 정보
주요 활동군벌 활동, 불교 사원 건설
사망 년도건안 2년 (197년)

2. 초기 생애 및 도겸 휘하 활동

착융은 양주 단양군 출신으로, 처음에는 서주도겸을 섬겼다. 그는 광릉, 팽성, 하비에서 군량 수송을 감독하는 직책을 맡았으나, 군량과 물자를 빼돌려 백성들을 착취하고 사리사욕을 채웠다.

착융은 빼돌린 물자로 불교 사원을 크게 짓고 황금 불상을 만드는 등 호화로운 생활을 했다. 욕불일에는 대규모 행사를 열어 많은 사람들을 끌어모았는데, 이는 훗날 중국 불교 전파에 기여한 측면도 있지만, 백성들에게는 큰 부담이었다.

2. 1. 도겸과의 관계

착융은 처음에 도겸을 섬겨 광릉, 팽성, 하비에 양식을 실어나르는 일을 감독했다. 그러나 수송 업무를 중단하고 함부로 사람을 죽이며 물자를 착복하고, 불교 사원을 크게 일으켰다.[1] 사원은 누각이 겹겹이 있고 각도를 만들어 3천 명이 들어갈 수 있을 정도였다. 그는 황금으로 사람 형상을 만들어 비단 옷을 입히고, 근처 지방에서 불교에 관심 있는 사람들을 모아 불경을 듣고 불교를 받아들이게 하여 그 수가 5천 명에 이르렀다. 매번 욕불할 때마다 엄청난 비용을 들여 술과 음식을 많이 차리고 수십 리 길에 자리를 깔아 백성들을 먹이니 1만 명이 와서 보고 먹었다.[2]

조조가 도겸을 공격하여 서주 일대가 혼란스러워지자, 착융은 남녀 1만 명과 말 3천 필을 거느리고 광릉으로 도주했다.[1] 조욱 광릉태수는 착융을 손님으로 대접했으나, 착융은 광릉의 재물을 탐내어 조욱을 술에 취하게 한 후 죽이고 병사를 풀어 광릉을 약탈했다.[3]

2. 2. 군수 물자 횡령과 불교 후원

착융은 도겸을 섬겨 광릉, 팽성, 하비에 양식을 실어나르는 일을 감독하였다. 그러나 수송 업무를 끊고 함부로 사람을 죽이며 물자를 착복하였으며, 불교 사원을 크게 일으켰다.[1] 사원은 누각이 겹겹이 있고 각도를 만들어 3천 명이 들어갈 수 있었다. 또 황금으로 사람의 형상을 만들어 비단 옷을 입혔다. 근처 지방에서 불교에 관심이 있는 자들로 불경을 듣고 불교를 받아들이게 하니 그 수효는 5천 명에 이르렀다. 매번 욕불할 때마다 엄청난 비용을 들여 술과 음식을 많이 차리고 수십 리 길에 자리를 깔아 두니 1만 명이 와서 보고 먹었다.[2]

이는 훗날 중국 대륙에서 불교가 널리 퍼지는 기초를 다진 포교 활동으로, 중국 불교에는 공로자라고 할 수 있는 측면도 있다. 하지만 백성들에게는 큰 고통을 안겨주었다.

3. 독립 세력화와 군벌 활동

조조도겸을 공격하여 서주 일대가 혼란에 빠지자, 당시 하비상이었던 착융은 남녀 1만 명과 말 3천 필을 거느리고 광릉으로 도주했다.[1] 이후 독립적인 세력을 구축한 착융은 주변 지역을 침략하고 약탈하는 군벌 활동을 시작했다.

흥평 2년(195년), 착융은 팽성상 설례와 함께 양주자사 유요를 맹주로 받들었다. 그러나 원술손책을 보내 유요를 공격하자, 착융은 손책에게 패배하고 유요를 따라 예장으로 도주했다.

3. 1. 광릉 약탈

도겸을 섬기던 착융은 광릉태수 조욱에게 손님으로 대접받았다. 그러나 착융은 광릉의 재물을 탐내어 조욱을 술 취한 틈에 죽이고 병사를 풀어 광릉을 약탈했다.[1]

3. 2. 유요와의 관계

착융은 일시적으로 유요에게 의탁하였으나, 곧 배신하고 그를 공격하여 세력을 확장하려 하였다. 그는 예장태수 주호와 설례를 살해하고 예장군을 점거하는 등 배신과 폭력을 일삼았다.[3][4]

195년, 팽성상 설례와 함께 양주자사 유요를 맹주로 받들고 있었는데, 원술손책을 보내 유요를 공격했다. 설례는 말릉성을 지키고, 착융은 현 남쪽에 주둔했다. 손책은 먼저 착융을 공격했고, 착융은 맞서 싸웠으나 패배하여 성으로 들어가 농성했다. 손책이 번능과 싸우다 화살에 상처를 입자, 착융은 손책이 죽었다는 오보를 듣고 장수 우자(于慈)를 보내 손책을 공격했다가 크게 패했다. 착융이 다시 견고히 농성하자 손책은 착융을 내버려두고 유요를 공격하여 완전히 무찔렀다.[3] 유요가 예장으로 도주하여 팽택에 주둔하자 착융은 이를 좇았다.

착융은 설례와 예장태수 주호를 죽이고 예장군을 점거했다.[3][4] 《헌제춘추》(獻帝春秋)에 따르면, 당시 예장에서는 후한 조정이 임명한 태수 주호와 유표가 임명한 태수 제갈현이 대립하고 있었다. 유요는 주호를 지원해 주호가 남창에 들어가고 제갈현은 서성으로 물러났었다. 유요는 착융에게 주호를 도와 제갈현을 토벌하게 했는데, 착융은 주호를 속여 죽였다.[4]

착융은 공격해 온 유요를 한 번 물리쳤으나, 유요가 다시 공격해 오자 패배하여 도주했다가 백성들에게 살해당했다.[5]

4. 손책과의 대립과 최후

착융은 도겸 사후 광릉 태수 조욱을 살해하고 광릉을 차지했으며, 이후 설례와 함께 유요를 맹주로 받들었다. 195년, 손책강동 지역을 정벌하면서 유요를 공격하자, 착융은 설례와 함께 유요를 지원하여 손책에 맞섰다. 그러나 손책이 죽었다는 오보를 듣고 공격했다가 크게 패했고, 결국 유요와 함께 예장으로 도주했다.[3]

예장에서 착융은 유요의 명을 받아 제갈현을 공격하여 죽였으나, 이후 주호와 설례를 살해하고 예장군을 차지하려는 야심을 드러냈다. 이에 유요가 착융을 공격했으나 처음에는 격퇴당했다. 하지만 유요는 병사를 더 모아 착융을 격파했고, 착융은 산으로 도망쳤다가 산월족에게 살해당했다.[5]

4. 1. 손책과의 전투

착융은 손책과의 전투에서 초반에는 우세를 점하기도 하였다. 흥평 2년(195년), 팽성 설례와 함께 양주자사 유요를 맹주로 받들고 있었는데 원술손책을 보내 유요를 치게 했다. 설례는 말릉성을 지키고, 착융은 현 남쪽에 주둔했다. 손책은 먼저 착융을 공격했고, 착융은 맞서 싸웠으나 이롭지 못하여 성으로 들어가 나오지 않았다. 손책이 번능과 싸우다 화살에 상처를 입었는데, 착융은 손책이 죽었다는 말을 곧이듣고 장수 우자(于慈)를 보내 손책을 치게 했다가 크게 졌다.[3] 착융이 다시 견고히 농성하니 손책은 착융은 내버려두고 유요를 공격하여 완전히 무찔렀다.

그러나 결국 착융은 패배하고 세력을 잃었다. 유요가 도주하다가 예장으로 향해 팽택에 주둔하자 착융은 이를 좇았다.[4]

4. 2. 비참한 최후

착융은 유요에게 패배한 후 도주하다가 백성들에게 붙잡혀 살해당했다.[5] 유요는 처음에 착융에게 격퇴당했으나, 주변 현에서 병사를 더 모아 군대를 강화하고 결국 착융을 격파했다. 착융은 산으로 도망쳤으나, 산월족에게 살해당했다.[5]

5. 평가

착융은 후한 말기의 인물로, 초기에는 도겸을 섬겼으나 이후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했다. 그는 불교 진흥에 기여한 공로가 있으나,[2] 그의 잔혹한 행위와 백성 수탈은 비판받아 마땅하다.[1][3]

착융은 도겸 휘하에서 광릉, 하비, 팽성의 물자 수송을 감독하는 임무를 맡았으나, 이를 이용하여 물자를 횡령하고 백성들을 착취했다.[1] 그는 횡령한 자금으로 대규모 불사를 일으키고 불교를 장려했지만, 이 과정에서 백성들에게 과도한 부담을 지웠다.

또한, 착융은 자신에게 호의를 베푼 광릉태수 조욱을 살해하고 광릉을 약탈했으며,[3] 설례주호를 살해하고 예장군을 점거하는 등 배신과 살인을 일삼았다.[4] 결국 그는 유요에게 패배하고 도주하던 중 백성들에게 살해당했다.[5]

5. 1. 긍정적 평가

착융은 대규모 불사를 일으키고 불경을 보급하는 등 초기 불교 발전에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는 영내에 3,000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수용할 수 있는 웅장한 누각을 갖춘 가람을 건립했다.[1] 또한 매년 음력 4월 8일 불탄절에는 성대한 법회를 거행하여, 절에 이르는 자가 5,000명에 달했다고 전해진다.[2] 훗날 중국 대륙에서 불교가 널리 퍼지는 기초를 다진 포교자이며, 중국 불교에게는 공로자라고 할 수 있는 측면도 있다.

5. 2. 부정적 평가

착융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살인, 약탈, 배신을 서슴지 않았으며, 백성들을 수탈하고 억압하여 큰 고통을 안겨주었다.[1][3] 그의 잔혹함과 탐욕은 불교의 가르침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으로, 그의 불교 후원이 진정성을 의심받는 이유이기도 하다.[2]

남송지반은 『불조통기』에서 "불교도란 선행을 행하는 자여야 하지 않겠는가. 사대부로서도 역사학자에게 간사하고 망령되고 탐욕스럽다고 평가받고 있으니, (유교 윤리의 면에서도) 불충하고 불효스러운 부끄러운 자이다. 그렇다면 선행을 행해야 할 불교도에게는 더욱 부끄러운 일일 것이다."라며, 착융이 폭력적이고 비도덕적인 행위를 하면서 불교의 공로자로 여겨지는 것에 대해 비난했다.

6. 삼국지연의에서의 묘사

삼국지연의에서 착융은 유요의 부하 장수로 등장하며, 사서에서의 잔혹한 모습은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오히려 손책과의 전투에서 패주한 탓에 유요에게 처형당할 뻔한 동료 장영을 변호하기도 한다. 그러나 결국에는 손책에게 패배한 유요와 함께 유표를 의지하여 도주한다. 이후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참조

[1] 서적 Sanguozhi vol. 49
[2] 서적 Sanguozhi vol. 49
[3] 서적 Sanguozhi vol. 49
[4] 서적 Xiandi Chunqiu annotation in Sanguozhi vol. 49
[5] 서적 Sanguozhi vol. 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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