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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용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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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처용무는 신라 시대에 발생하여 고려와 조선 시대를 거쳐 전승된 한국 전통 무용이다. 헌강왕 때 용왕의 아들 처용이 역신을 물리친 설화에 기원하며, 궁중 나례 등에서 연행되었다. 5방색 의상을 입고 춤을 추는 특징이 있으며, 1928년 김영제 등에 의해 재안무되었다. 2009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으며, 김용 등이 보유자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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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용무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개요
기사계첩에 실린 처용무
기사계첩에 실린 오방처용무의 춤사위 모습
종류한국의 춤
기원신라 시대
유래처용설화
특징벽사 의식무, 오방색 의상 착용
전승국립국악원
문화재 지정국가무형문화재 제39호 (1971년 1월 8일 지정)
유네스코 지정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2009년 등재)
상세 정보
다른 이름처용가무 (處容歌舞)
영어 이름Cheoyongmu (Dance of Cheoyong)
설명처용설화에 등장하는 처용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한국의 춤
역할악귀를 쫓고 복을 불러들이는 벽사의식
복장오방색의 의상
채화관
가면
반주향피리, 대금, 해금 등의 관악기 및 장구
춤사위학춤, 연화대, 오방처용무 등 다양한 춤사위로 구성됨
관련 유적서울특별시
참고문화재청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정보
원제Cheoyongmu
지역아시아 및 태평양
등재 연도2009년
참조 번호189
등재 기준미제공 (UNESCO 지정 정보 참조)
링크미제공 (UNESCO 지정 정보 참조)

2. 역사

처용무는 신라 헌강왕 때 처음 나타난 이후 고려조선 시대를 거치며 변화, 발전해 왔다.

삼국유사》 기록에 따르면 처용은 처용가를 불러 역신을 물리쳤다고 전해지며, 이를 바탕으로 처용무가 신라 때부터 추어졌음을 짐작할 수 있다.[1]고려사》에는 '처용희'라는 기록이 있으며, 성현의 《용재총화》에는 고려 시대 처용무가 한 사람이 붉은 가면을 쓰고 춤을 춘 형태로 묘사되어 있다.[1] 세종 대에는 다섯 명이 추는 오방처용무로 발전했고, 성종 대 《악학궤범》에는 학무, 연화대무와 함께 공연되는 형태로 기록되었다.[1] 연산군 대에는 김처선 사건으로 인해 처용무의 이름이 풍두무로 바뀌기도 했다.[1]

조선 말기에는 전승이 단절되었으나, 1928년 김영제, 함화진, 이수경 등이 《악학궤범》 등을 참고하여 처용무를 복원하였다.[1]

2. 1. 기원 및 설화

처용무의 '처용'이라는 명칭은 《삼국유사》, 《동경잡기》, 《익재난고(益齋亂藁)》, 《소악부(小樂府)》, 《용재총화》,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 《동국세시기》, 《경도잡지(京都雜志)》 등의 문헌에 기록되어 있다. 처용무는 신라 시대(875-886)에 발생한 춤으로 알려져 있다.

삼국유사》에는 헌강왕이 개운포(開雲浦)에서 만난 용왕의 아들이 처용이며, 처용은 자신의 아내를 범한 역신(疫神) 앞에서 처용가를 지어 불러 역신을 물리치는 기적을 일으켰다는 내용이 있다. 이를 통해 처용무는 신라 때부터 추어졌음을 알 수 있다. 《고려사》 충혜왕조와 신우조에는 《처용희》(處容戱)에 대한 기록이 있다. 성현의 《용재총화》에 따르면, 고려시대 처용무는 원래 한 사람이 검은 옷을 입고 흑사모(黑沙帽)에 흑대(黑帶)를 두르고 붉은 가면을 쓰고 여러 놀이와 함께 공연했다. 이것이 세종 때에는 다섯 사람이 추는 오방처용무(五方處容舞)로 발전하여, 무용극 형태로 크게 변화하여 합설·학춤(鶴舞)·처용무·연화대무(蓮花臺舞)로 공연되었으며 궁중 나례와 향연에서 의례적으로 공연되었다.

성종 때 편찬된 《악학궤범》에는 처용무가 학무(鶴舞)와 연화대무(蓮花臺舞)를 함께 공연하는 학연화대처용무(鶴蓮花臺處容舞)합설 형태로 나례에서 연행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연산군 때에는 환관 김처선이 연산군에게 충언을 하다가 처형된 후, 연산군이 그의 이름인 "처(處)"와 "선(善)"에 대해 금자령을 내리면서 처용무가 잠시 풍두무(豊頭舞)로 이름이 바뀌기도 하였다.

처용무는 궁중 나례를 비롯하여 관아의 연향에서 공연되었으나, 조선 말기에 전승이 끊어졌다. 1928년에 《구황궁아악부》(舊皇宮雅樂部)의 김영제(金甯濟), 함화진, 이수경(李壽卿)이 《악학궤범》과 장악원에서 사용하던 정재홀기(呈才笏記)를 참고하여 새롭게 안무하였다.

2. 2. 고려 시대

삼국유사》에 따르면, 헌강왕이 개운포(開雲浦)에서 만난 용왕의 아들 처용은 자신의 아내를 범한 역신(疫神) 앞에서 처용가를 불러 벽사의 기적을 보였다고 한다. 이를 통해 처용무는 신라 때부터 추어졌다고 볼 수 있다.[1]고려사》 충혜왕조와 신우조에는 《처용희》(處容戱)의 기록이 있다.[1] 성현의 《용재총화》에는 처용무가 고려시대에 원래 한 사람이 검은 옷을 입고 흑사모(黑沙帽)에 흑대(黑帶)를 두르고 붉은 가면을 쓰고 가무백희 중에 연희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1]

2. 3. 조선 시대

삼국유사》에 따르면 헌강왕이 개운포(開雲浦)에서 만난 용왕의 아들 처용은 자신의 아내를 범한 역신(疫神) 앞에서 처용가를 지어 불러 벽사의 기적을 보였다. 이를 통해 처용무는 신라 때부터 추어졌다고 할 수 있다. 《고려사》 충혜왕조와 신우조에는 《처용희》(處容戱)의 기록이 있다. 성현의 《용재총화》에는 고려시대 처용무는 원래 한 사람이 검은 옷을 입고 흑사모(黑沙帽)에 흑대(黑帶)를 두르고 붉은 가면을 쓰고 가무백희 중에 연희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세종 때에는 다섯 사람이 추는 오방처용무(五方處容舞)로 발전하여, 합설·학춤(鶴舞)·처용무·연화대무(蓮花臺舞)를 포함하는 무용극으로 크게 변천하였으며, 궁중 나례와 향연에서 의례적으로 연희되었다.

성종 때 편찬된 《악학궤범》에는 처용무가 학무(鶴舞)와 연화대무(蓮花臺舞)를 합설한 학연화대처용무(鶴蓮花臺處容舞)합설 형태로 나례에서 연행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연산군 때에는 환관 김처선이 연산군에게 충언을 하다 처형된 뒤, 연산군이 그의 이름인 "처(處)"와 "선(善)"에 대해 금자령을 내리면서 한때 처용무가 풍두무(豊頭舞)로 불리기도 하였다.

처용무는 궁중 나례를 비롯하여 관아의 연향에서 연행되었으나, 조선 말기에 전승이 끊어졌다. 1928년 《구황궁아악부》(舊皇宮雅樂部)의 김영제(金甯濟), 함화진, 이수경(李壽卿)이 《악학궤범》과 장악원에서 쓰던 정재홀기(呈才笏記)를 참고하여 새로 안무하였다.

3. 특징

처용무는 용(龍) 설화, 시가(詩歌) 발생, 불사(佛寺) 창건, 음악 발생, 제액(除厄), 역신(疫身)을 막는 풍습 등을 파생시켰다. 오행설에 따라 방위에 맞춘 5가지 색깔(오방색)의 의상을 입는 것이 이 춤의 특징이다.

3. 1. 가면과 의상

처용무의 가면은 모시나 옻칠한 삼베로 껍질을 만들고 붉은색으로 채색하여 후덕한 모습으로 만든다. 사모는 대나무로 망을 얽어 종이를 바르고, 두 귀에는 주석 고리와 납주를 걸고 복숭아 열매와 가지를 단다.[1]

춤을 출 때는 다섯 명의 무용수가 오방색에 맞춰 청(동), 홍(남), 황(중앙), 흑(북), 백(서)의 단의를 입는다. 처용가면과 사모를 쓰고, 홍록흉배, 초록천의, 남오군, 홍방슬, 황초상, 금동혁대를 착용한다. 또한 백한삼을 끼고 백피혜를 신는다.[1]

3. 2. 음악과 춤사위

처용무의 춤은 다섯 명의 무용수(무원(舞員))가 오방에 맞추어 청(동), 홍(남), 황(중앙), 흑(북), 백(서)의 단의(緞衣)를 입고 춘다. 이들은 처용탈과 사모를 쓰고, 홍록흉배(紅綠胸背), 초록천의(草綠天衣), 남오군(藍襖裙), 홍방슬(紅方膝), 황초상(黃綃裳), 금동혁대(金銅革帶)를 띠고 백한삼(白汗衫)을 끼고 백피혜(白皮鞋)를 신고 춤을 춘다.[1]

수제천(壽齊天, 빗가락 정읍)에 맞추어 두 팔을 허리에 붙이고 청·홍·황·흑·백의 차례로 들어와 일렬로 북향하여 서서 처용가를 가곡 언락(言樂)가락에 맞추어 부른다. 향당(鄕唐) 교주(交奏)하면 처용 5인이 모두 허리를 굽힌 다음 5방으로 마주 서서 춤춘다.[1]

춤사위는 다음과 같다.[1]

  • 홍정(紅程) 도돔춤: 소매를 들어 안으로 낀다.
  • 발바딧춤: 발을 올려 걸으며 무릎을 굽힌다.
  • 발바딧작대무[作隊舞]: 오방무원이 각기 무진무퇴(舞進舞退)하여 다른 방향으로 들어선다.
  • 무릎디피춤: 황은 북을 향하여 방향을 바꾸어 춘다. 청, 홍, 흑, 백은 중앙을 향하여 춘다.
  • 대무(對舞): 처음에 흑과 황이 대무하고 청·홍·백이 차례로 대무한 다음 중앙을 등지고 춘다.
  • 회선(回旋)·우선(右旋): 흑(黑)이 먼저 나오고 황은 백과 홍 사이에 들어가 모두 제자리로 돌아왔을 때, 흑은 뒤로 물러서고 홍은 앞으로 나간다.


처용 5인이 가지런히 서면 일제히 북향하고 선 다음 노래를 한다. 창사(唱詞)를 가곡 우편(羽編)에 맞추어 부른다. 윗도드리가 시작되면 한삼을 좌우 어깨에 차례로 매었다가 뿌리는 동작으로 낙화유수를 추다가 청·홍·황·흑·백·처용의 순서로 퇴장한다.[1]

4. 구성

처용탈은 모시 또는 옻칠한 삼베로 껍질을 만들고 채색은 붉은색에 윤기를 내어 후덕한 모습으로 만든다. 사모는 대나무로 망을 얽어 종이를 바르며, 두 귀에는 주석 고리와 납 구슬을 걸고 복숭아 열매와 가지를 단다.[1]

춤은 다섯 명의 무용수가 각각 파랑(동쪽), 빨강(남쪽), 노랑(중앙), 검정(북쪽), 하양(서쪽)의 비단옷을 오방색에 맞추어 입고 처용 가면과 사모를 쓴다. 붉은색과 녹색의 흉배, 초록색 천의, 남색 오군, 붉은색 방슬, 황초상, 금동혁대를 착용하고 백한삼을 끼고 흰색 가죽신을 신고 춤을 춘다. 수제천(빗가락 정읍)에 맞추어 두 팔을 허리에 붙이고 청, 홍, 황, 흑, 백의 차례로 들어와 일렬로 북쪽을 향하여 서서 "신라성대소성대(新羅盛代昭盛代) 천하태평나후덕(天下太平羅候德)…"하고 처용가를 가곡 언락 가락에 맞추어 부른다.[1]

향당 교주가 연주되면 처용 5인이 모두 허리를 굽힌 다음 5방으로 마주 서서 춤을 춘다. 소매를 들어 안으로 끼는 홍정 도돔춤을 추고 나서 발을 올려 걸으며 무릎을 굽히는 발바딧춤을 춘다. 북쪽을 향하여 섰다가 가운데 황색과 사방은 반대로 향하여 춤을 춘다. 오방무원은 각기 춤을 추며 나아가고 물러나며 다른 방향으로 들어서는 발바딧작대무를 춘다. 황색은 북쪽을 향하여 방향을 바꾸어 무릎디피춤을 추고 청색, 홍색, 흑색, 백색은 중앙을 향하여 춤을 춘다. 처음에는 흑색과 황색이 마주 보고 춤을 추고 청색, 홍색, 백색이 차례로 마주 보고 춤을 춘 다음 중앙을 등지고 추다가 제자리를 향하여 춘다.[1]

회선, 우선으로 흑색이 먼저 나오고 황색은 백색과 홍색 사이에 들어가 모두 제자리로 돌아왔을 때, 흑색은 뒤로 물러서고 홍색은 앞으로 나가 처용 5인이 가지런히 서면 일제히 북쪽을 향하고 선 다음 노래를 한다. "산하천리국(山河千里國)에 가기울총총(佳氣鬱葱葱) 하샷다 / 금전구중(金殿九重)에 명일월(明日月)하시니 / 군신천재(君臣千載)에 회운룡(會雲龍)이 샷다 / 희희서속(熙熙庶俗)은 춘대상(春臺上)이어늘…"하고 창사를 가곡 우편에 맞추어 부른다. 윗도드리가 시작되면 한삼을 좌우 어깨에 차례로 매었다가 뿌리는 동작으로 낙화유수를 추다가 청, 홍, 황, 흑, 백, 처용의 순서로 퇴장한다.[1]

5. 현대의 처용무

현대의 처용무는 궁중무용과 민속무용의 형태로 전승되고 있다. 궁중무용으로서의 처용무는 1923년 순종황제 탄신 50주년을 기념하는 공연에서 이왕직아악부 단원들에 의해 처음으로 무대에 올려졌으며, 당시 공연은 김영제(金英濟)가 지도하였다.[6] 민속무용으로서의 처용무는 1930년대 최완옥, 김준홍, 방태진, 김정섭, 김기수, 정금돌, 이근성 등에 의해 권번을 중심으로 전승되었다.[7]

1971년 12월 21일 대한민국의 국가무형문화재 제39호로 지정되었으며,[7] 2009년 9월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선정되었다. 보유자로는 김용, 김중섭, 전수조교로는 이진호, 인남순이 활동하고 있다.[7]

5. 1.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

2009년 9월에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선정되었다. 보유자로는 김용, 김중섭, 전수조교로는 이진호, 인남순이 활동하고 있다.[7]

5. 2. 보유자 및 전수 활동

2009년 9월 처용무는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선정되었다. 김용, 김중섭이 보유자로, 이진호, 인남순이 전수조교로 활동하고 있다.[7]

참조

[1] 웹사이트 Cheoyongmu (Dance of Cheoyong) http://www.ncktpa.go[...] The National Center for Korean Traditional Performing Arts
[2] 웹사이트 UNESCO - Cheoyongmu https://ich.unesco.o[...] 2020-04-13
[3] 웹사이트 Intangible Cultural Heritage of Humanity https://english.cha.[...] 2020-04-13
[4] 웹사이트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http://www.heritage.[...]
[5] 문서 동해 용왕(龍王)의 아들로 사람 형상을 한 처용(處容)이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어 천연두를 옮기는 역신(疫神)으로부터 인간 아내를 구해냈다는 한국 설화
[6] 문서 《[[글로벌 세계대백과사전]]》
[7] 웹사이트 http://www.unesco.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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