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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로이 줄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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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카로이 줄러는 헝가리 귀족 출신으로, 1931년부터 1932년까지 헝가리 총리를 역임했다. 그는 법학을 전공하고 정계에 입문하여 아라드 주 이슈판을 지냈다.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후 반혁명 정부를 조직했으며, 대공황 시기 총리로 취임하여 긴축 정책을 추진했으나 경제 위기를 해결하지 못했다. 공산주의자 탄압으로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반유대주의와 나치즘에 반대하고 헝가리 독립을 지지한 점은 긍정적으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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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로이 줄러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카로이 줄러
원래 이름nagykárolyi gróf Károlyi Gyula
로마자 표기Karólyi Gyula
출생1871년 5월 7일
출생지박털로란트하자, 오스트리아-헝가리 헝가리 왕국
사망1947년 4월 23일
사망지부다페스트, 헝가리 제2공화국
국적헝가리
정치 경력
소속 정당자유당, 통일당
직업정치인
주요 직책
헝가리 총리시작: 1931년 8월 24일
종료: 1932년 10월 1일
섭정미클로시 호르티
이전이슈트반 베틀렌
이후줄러 굄뵈시
귀족원 의원시작: 1927년 1월 31일
종료: 1945년 3월 28일
이전데네시 베린케이
이후데죄 퍼턴추시-아브라함
가족 관계
배우자멀린다 카로이
자녀알 수 없음

2. 초기 생애 및 경력

그는 유서 깊은 귀족 가문 출신으로, 니르박타(현재: ''박탈로란트하저'')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1898년부터 1900년까지 귀족원 의장을 지낸 티보르 카로이 백작이고, 어머니는 엠마 데겐펠트-숌부르크 백작부인이었다. 티보르 카로이는 훗날 헝가리의 초대 총리이자 대통령이 되는 미하이 카로이의 후견인이기도 했다.

카로이 줄러는 문법 학교 졸업 후 부다페스트 대학교 법학부에 입학했고, 이후 베를린 대학교와 본 대학교에서도 법학을 공부했다. 학업을 마치고 헝가리로 돌아와 귀족원 의원으로 정치 활동을 시작했다. 1906년부터 1910년까지는 아라드 주의 ''이슈판''(주지사 격)을 역임했다.

이후 정계에서 물러나 아라드 주에 있는 가문의 넓은 영지에서 농사를 지었다. 1915년에는 헝가리 과학 아카데미의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3. 반혁명 활동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후 자원하여 동부 전선에서 후사르 소위로 참전했다. 전쟁이 끝나고 영지로 돌아왔으나, 미하이 카로이가 이끈 별꽃 혁명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붕괴되는 등 혼란한 상황이었다. 새로 들어선 지도부는 군비를 축소했으나, 이는 루마니아체코슬로바키아 같은 인접 국가들에게 영토 확장의 빌미를 주었다. 특히 루마니아는 1919년 봄 트란실바니아와 파르티움을 점령했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1919년 3월 21일 헝가리 소비에트 공화국이 수립되었다.

헝가리 소비에트 공화국의 수립과 붉은 공포를 피해 많은 헝가리 정치인들이 으로 이주했다. 빈에서는 이슈트반 베틀렌을 중심으로 볼셰비키 정권에 대항하는 반볼셰비키 위원회가 조직되었다. 이와 동시에 줄러 카로이는 아라드에서 독자적인 반혁명 정부를 구성했다. 그러나 1919년 5월, 루마니아군이 아라드를 점령하면서 카로이와 그의 각료 다수가 구금되었다.

석방된 카로이는 프랑스군의 통제 하에 있던 세게드로 이동하여 반혁명 활동을 재개했다. 그는 이곳에서 공산주의 통치를 종식시키기 위한 정부를 재구성했으며, 1919년 7월 12일 데죄 파탄티우스-아브라함을 총리로 임명했다. 빈과 세게드의 반혁명 세력은 공동 목표를 위해 협력했다. 카로이는 자신의 정부에서 국방부 장관으로 미클로시 호르티 제독을 임명했고, 호르티는 국민군을 창설했다. 이 과정에서 카로이와 호르티는 가까운 관계를 맺게 되었다.

4. 헝가리 총리

이슈트반 베틀렌 총리가 대공황으로 인한 경제 위기 속에서 인기가 없는 정책 추진을 피하고자 1931년 8월 19일 사임하자, 호르티 미클로시 섭정은 줄러 카로이를 후임 총리로 임명했다. 새로운 내각은 1931년 8월 24일에 구성되었으나, 이전 내각과 비교해 큰 변화는 없었다.

총리 재임 기간 동안 헝가리는 장기적인 농업 및 신용 위기로 극심한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주요 수출품인 농산물 가격이 폭락하면서 농민들의 생활은 파탄 지경에 이르렀고, 산업무역 역시 큰 타격을 받았다. 카로이는 국가 지출을 줄이기 위해 공무원 급여 삭감 등 대규모 긴축 정책을 시행했지만, 이는 심각한 경제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역부족이었다.

1931년 9월 13일 비아토르바지에서 발생한 열차 폭파 사건을 계기로 카로이는 계엄령을 선포하고, 이를 공산주의 운동 탄압의 빌미로 삼아 관련자들을 투옥하고 정치 활동을 금지했다. 공산주의 운동 지도자였던 임레 살라이와 샨도르 퓌르스트는 이 시기 체포되어 쇼 재판을 거쳐 1932년에 처형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들에도 불구하고 경제 위기는 계속되었고, 정치 엘리트 사이에서도 불만이 커져갔다. 결국 전임 총리였던 베틀렌마저 카로이의 사임을 요구하기에 이르렀고, 처음부터 총리직을 망설였던 카로이는 1932년 9월 21일 사임했다. 그의 뒤를 이어 줄러 굄뵈스가 총리직을 계승했다.

4. 1. 경제 정책

이슈트반 베틀렌 총리는 대공황으로 인한 경제 위기 상황에서 지지율 하락을 우려하여 총리직에서 물러났고, 이에 호르티 미클로시 섭정은 1931년 8월 24일 줄러 카로이를 후임 총리로 임명했다. 당시 헝가리 경제는 장기적인 농업 및 신용 위기로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주요 수출품이었던 농산물의 가격이 세계 경제 침체의 여파로 50~70%까지 폭락하면서 농민들의 생활은 파탄 지경에 이르렀고, 산업무역 부문 역시 심각한 타격을 받았다.

새 총리가 된 카로이는 국가 재정 지출을 줄이기 위해 대규모 긴축 정책을 단행했다. 철도원, 우체부, 사무원 등 공무원을 비롯하여 헝가리 육군 군인, 헌병, 하천 부대원, 세관 노동자들의 급여가 삭감되었으며, 사회적 혜택과 연금 지급액도 축소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긴축 정책은 깊어지는 경제 위기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 못했다. 카로이 총리 자신이 관용차 사용을 중단하고 페슈트에 있는 아파트에서 부다 성의 집무실까지 걸어서 통근하는 등 개인적인 절약을 실천했지만, 국가 경제 상황을 개선하는 데는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경제 위기가 계속되면서 헝가리 사회의 불만은 정치 엘리트 사이에서도 점차 커져갔다. 야당 세력은 선거권 확대, 예비 선거 및 비밀 투표 도입, 임금 노동자에 대한 보다 효과적인 보호 조치를 요구했고, 농업 관련 이익 단체들은 농산물 시장 확대와 농민 보호 정책 강화를 주장했다. 이러한 요구들이 실질적인 성과로 이어지지 않자 카로이 총리에 대한 반대 여론이 높아졌고, 결국 전임 총리였던 베틀렌마저 1932년 9월 카로이의 사임을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처음부터 총리직을 맡는 것을 주저했던 카로이는 이 요구를 받아들여 1932년 9월 21일 사임했고, 그의 뒤를 이어 줄러 굄뵈스가 새로운 총리로 취임했다.

4. 2. 내무 정책

1931년 9월 13일, 실베스테르 마투스카가 부다페스트 근처 비아토르바지의 철도 다리 일부를 폭파하여 열차가 추락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줄러 카로이 총리는 즉시 계엄령을 선포하는 두 가지 명령을 내렸다. 그는 이 비극적인 사건을 공산주의 운동 탄압의 명분으로 삼아, 관련자들을 투옥하고 모든 정치 집회와 행진을 금지하는 등 강압적인 조치를 취했다. 특히, 공산주의 운동의 지도자였던 임레 살라이와 샨도르 퓌르스트가 체포되었고, 이들은 쇼 재판을 거쳐 1932년에 처형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비상 조치들은 당시 헝가리가 겪고 있던 사회경제적 어려움을 해결하는 데는 실질적인 도움이 되지 못했으며, 실제적인 대규모 시위나 운동의 위협은 크지 않았다는 평가도 있다.

5. 총리직 사임 이후

그는 총리직에서 물러난 후 정계에서 은퇴했다. 이후 미클로시 호르티의 측근 자문 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으며, 1936년에는 비밀 고문이 되었다.

카로이 줄러는 정치 경력 내내 모든 형태의 반유대주의에 반대하는 입장을 견지했다. 이러한 신념에 따라 그는 1939년 제2차 유대인법이 제정되자 이에 항의하며 모든 공직과 상원 의원직에서 사임했다.[1] 그는 또한 당시 헝가리 정치계에 만연했던 친독일 성향을 강하게 비판했다.

제2차 세계 대전 기간 동안에는 미클로시 셜러이의 정책을 지지했다. 카로이 줄러는 75세의 나이로 부다페스트에서 사망했다.

6. 사망

카로이 줄러는 75세의 나이로 부다페스트에서 사망했다.

7. 평가

총리직에서 물러난 후 정계에서 은퇴했으나, 호르티의 측근 자문 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으며 1936년에는 비밀 고문이 되었다.[1]

7. 1. 긍정적 평가

그는 정치 경력 동안 모든 형태의 반유대주의에 항의했다. 그는 1939년 제2차 유대인법에 항의하여 모든 직위와 상원 의원직에서 사임했다.[1] 그는 또한 헝가리 정치의 친독일 성향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그는 미클로시 셜러이의 정책을 지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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