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지와라 잇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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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카지와라 잇키는 일본의 만화 원작자이자 소설가, 영화 제작자로, 1937년에 태어나 1987년에 사망했다. 그는 스포츠 근성 만화 장르를 확립하며, 《거인의 별》, 《내일의 죠》, 《타이거 마스크》 등 여러 히트작을 냈다. 만화 원작자로서 성공을 거두었으나, 폭력 사건과 스캔들로 인해 몰락했고, 췌장염으로 사망했다. 그의 작품은 비극적인 결말과 자기 파멸적인 주인공, 실존 인물과 가상 캐릭터의 결합이 특징이다. 특히 극진가라데 창시자 최배달(오야마 마스타츠)과의 깊은 관계는 그의 작품 세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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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지와라 잇키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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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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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다카모리 아사키 |
출생일 | 1936년 9월 4일 |
출생지 | 일본 후쿠오카현기타큐슈시 |
사망일 | 1987년 1월 21일 |
사망지 | 일본 도쿄도신주쿠구가와다초 (도쿄 여자 의과대학 병원) |
사망 원인 | 췌장염 |
국적 | 일본 |
직업 | 작가 만화가 영화 프로듀서 |
활동 기간 | 1953년 - 1987년 |
별칭 | 다카모리 아사오 |
배우자 | 파이빙빙 (1979년 결혼, 1981년 이혼) |
자녀 | 파이샤오옌 |
작품 활동 | |
대표작 | 내일의 죠 거인의 별 가라테 바보 일대 타이거 마스크 |
장르 | 스포츠 만화 극화 |
기타 작품 | 무한의 파이터, 사무라이 자이언츠, 허리케인 죠 |
수상 내역 | |
수상 | 제8회 고단샤 아동 만화상 (《거인의 별》) 2005년 도쿄 애니메이션 어워드 특별 공로상 (원작자 부문) |
기타 정보 | |
공식 웹사이트 | 가지와라 잇키 공식 웹사이트 |
2. 생애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카지와라 잇키의 가족은 도쿄로 이사했다. 그는 17세에 소설가로 직업을 갖기 전까지 여러 학교를 전전했다. 당시 경쟁 잡지에 글을 쓰고 있었기 때문에 필명으로 카지와라 잇키(梶原一騎)와 아사오 타카모리(高森朝雄)를 사용했다.[2]
바이빙빙과 결혼했으나, 혼외정사와 가정 폭력으로 인해 이듬해에 결혼 생활이 파탄났다. 이후 바이빙빙은 대만으로 돌아가 싱글맘으로 딸 바이샤오옌을 키웠다.
2. 1. 어린 시절과 문학적 성장
도쿄시 아사쿠사구 이시하마(현 다이토구 하시바)에서 아버지 다카모리 다쓰오와 어머니 다카모리 야에(구 성: 사토) 사이에서 삼형제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곧 부모와 함께 시부야구 은전 1초메(현재의 진구마에 4·6초메 주변)로 이사했다.[6] 아버지 쪽 조부가 구마모토현아소군다카모리정 주변 출신이며, 가와하라 본인과 규슈와의 관계는 미야자키현으로의 1년 간의 피난과 후쿠오카현기타큐슈시의 친척 집에 맡겨졌다는 정도이다.[7]남동생 마키 히사오에 따르면 "형 아사기는 아버지 쪽의 지적인 다카모리 가문과, 체격이 크고 격렬한 기질을 가진 어머니 쪽의 사토 가문의 유전자의 '합작'이었다"고 말했다.
어린 시절부터 매우 흉폭하고 싸움을 잘하며 주목받고 싶어 하는 기질이 나타났다. 1943년 아버지 류오가 사범과 시절에 재적했던 학교인 사립 미도리오카 초등학교(후의 아오야마 가쿠인 초등부)에 입학했지만, 아사기의 거친 기질과 교풍은 물과 기름 같아서, 급우와 상급생 아이들과도 충돌만 일으켰다. 이때 이미 가와하라는 몸이 커지고 살이 찌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에, 동급생도 당할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상급생과 결탁하여 역습해 왔기 때문에, 가와하라는 항상 생채기가 끊이지 않았다. 그 상급생을 기습하여 피투성이로 만든 것으로, 어머니가 학교에서 불려 나가게 되었고, 가와하라는 불과 1학년으로 퇴학당했다. 집 근처의 공립 초등학교에 들어갔다. 그 당시 담임 교사에게 호통을 맞고 "당신은 이런 학교에 맞지 않는 아이입니다! 보통 학교에 가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라고 욕을 먹었고, 이 말에 아사기는 어린 마음에도 상처를 받았다.
공립 초등학교 시절에는 동급생으로, 잡지 『쿠라시노 테초』 편집장 하나모리 야스지의 장녀 아오이가 있었다. 가와하라는 떨어진 단추를 달아준 등의 추억이 있어, 풋풋한 마음을 품고 있었다고 하지만, 정작 아오이는 "다카모리 군"이라는 동급생이 있었다는 것은 기억하고 있지만, 그 이상의 자세한 기억은 없다고 한다.
1945년 도쿄가 연합국 군기의 공습을 받게 되자, 가와하라를 포함한 다카모리 일가는 직장이 있는 아버지를 도쿄에 남겨두고, 귤 산을 경영하던 아버지의 숙부인 하야시 신시가 사는 미야자키현히가시우스키군도미시마정 (현재의 휴가시)으로 피난했다. 그러나 현재 가독을 잇고 있는 하야시 하루오의 말에 따르면, 도미시마정 가메자키촌의 휴가나다를 내려다보는 산 중턱에 있던 하야시가의 뒤쪽 귤 밭은 당시 개간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묘목을 심은 지 얼마 안 되었기 때문에, 별다른 수확이 없었다. 그것보다 자급자족의 경작이 필요했고 당시 8세였던 아사기는 어머니와 함께 거름을 지고, 묘목 틈새에서 고구마를 키워서 캤다.
전후, 가와사키시로 이사했다. 이 무렵 보호원 "신일본 학원"에서 1년을 보냈다.[8] 이후 도쿄도오타구가마타로 이사하여, 오타구립 아이오이 초등학교에 다녔다.[9] 초등학생 시절, 가마타로 이사한 직후부터 역 앞 마켓에서 좀도둑질이나 갈취를 반복하여, 여러 번 보도되었지만 개전의 정이 없어, 동생 마도(마키 히사오)까지 끌어들이게 되었기 때문에,[10] 부모의 배려로 오메시의 보호원 "도쿄도립 세이메이 학원"으로 보내져 중학 상당의 3년간을 보냈다.[11]
세이메이 학원 재학 중에는 기숙사에서 최소 두 번 탈주했다(한 번은 자택에 도착하기 전에 붙잡혔다).[12] 또한 "가와하라"는 세이메이 학원 시대에 연애 관계였고 결혼까지 생각했던 딸의 성씨에서 유래한 필명이다.[13] 이후 마키 히사오는 고등학교 시절에 빈집털이를 반복하여 감별소로 보내졌지만, 담당 형사로부터 공범자의 존재를 시사받은 어머니는 가와하라에게 의심의 눈길을 보냈다.[10]
도쿄도립 시바 상업고등학교를 반년 정도 만에 중퇴했다.[14](본인은 오랫동안 와세다 대학 졸업이라고 사칭했다. 예를 들어, 고마 서방 간행의 "아들의 단련법"의 뒷표지에는, 와세다 대학 졸업이라고 기술되어 있었다). 아버지 다카모리 다쓰오는, 가와하라의 출생 당시, 주오코론사에서 교정 일을 하고 있었지만, 후에 개조사로 옮겨, 편집자가 되었다. 또한 동생 마키 히사오나 아내 아쓰코에 따르면, 가와하라의 부모는 동생 등에게는 애정을 쏟았지만, 가와하라가 아무리 노력해도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고 한다.[15]
한편 문학 청년의 면모를 보이며 소설가를 지망했다.[16] 1953년, 17세 때 "카지와라 잇키"라는 필명으로 복싱 소설 「승리의 그늘에」를 잡지 『소년 화보』에 응모하여 당선되었다. 17세 소년 소설가 "카지와라 잇키"의 탄생이었다. 이후 스포츠 소년 소설을 다수 집필하게 되었지만, 잡지에서 소년 소설을 대신하여 만화가 지면을 차지하게 되면서 카지와라의 활약의 장이 좁아지게 되었다.
2. 2. 만화 원작자로서의 성공과 좌절
1974년, 쇼치쿠(松竹)에서 영화화된 것을 계기로 연예계에 진출했다. 같은 해, 텔레비전 드라마 제작 당시 오디션에서 뽑힌 이케가미 키미코를 자신의 소속사로 데려와 카지와라 프로덕션을 설립했다.[1][2] 영화계 진출을 위해 도쿄 무비 사장 후지오카 유타카, 이시하라 프로덕션에서 영화 프로듀싱을 담당하던 카와노 야스히코와 함께 1975년에 "산쿄 영화"를 설립했다.[2] "산쿄"는 "세 사람이 협력한다"는 의미였다.산쿄 영화는 문예, 격투기, 카지와라 원작 만화의 애니메이션화라는 세 가지 노선을 추구했지만, 경영적으로는 격투기 쪽 수익을 문예 쪽에 소모하는 일이 반복되었다. 1977년에는 자신의 원안을 바탕으로 스즈키 세이준 감독의 10년 만의 작품 '비수 이야기'를 제작했다.[2]
자신의 만화 캐릭터 "타이거 마스크"가 현실의 신일본 프로레슬링에 데뷔하면서, 1980년대부터 카지와라는 프로레슬링계에도 깊이 관여하게 되었다.
2. 3. 몰락과 죽음
1983년 5월 25일, 고단샤에서 발행하는 『월간 소년 매거진』의 부편집장에게 상해를 입혀 체포되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과거에 폭력단원과 함께 안토니오 이노키를 감금한 사건, 아카사카의 한 클럽 호스티스를 폭행하려 한 사건 (1982년 3월 18일), 『프로레슬링을 10배 즐겁게 보는 방법』의 고스트 라이터였던 사람에게서 10만 엔을 갈취한 사건 등도 함께 드러났다. 동생의 말에 따르면, 당시 경찰은 각성제 상습 복용 혐의를 의심하고 있었다고 한다[17]. 경찰은 카지와라가 하기와라 켄이치에게 대마를 건넨 것은 아닌지 의심했다[18]. 그 외에도 여러 스캔들이 매스 미디어를 통해 알려지면서, 연재 중이던 작품은 중단되고 단행본도 절판되어 명성이 크게 떨어졌다[19].2개월간 구류된 후 보석으로 풀려났고, 8월 8일 야마노우에 호텔에서 식사를 한 직후 쓰러졌다. 병원 진단 결과는 괴사성 극증 췌장염이었다. 사망률이 매우 높은 병으로, 오랜 알코올 의존과 폭음, 폭식이 원인이 되어 담석을 오랫동안 방치한 탓에 주변 장기가 모두 망가진 상태였다. 짧은 기간 동안 4번의 수술을 받았고, 4번째 수술에서는 의료진으로부터 "앞으로 2시간의 생명"이라는 선고까지 받았다. 다행히 생명은 건졌지만, 체중이 크게 줄었다.
1985년 3월 14일, 도쿄 지법에서 징역 2년에 집행 유예 3년의 유죄 판결을 받았다. 같은 해, 소설가로 전향하여 활동을 시작했다. 만화 원작자 은퇴를 선언하고, 『만화 고라쿠』에서 자전 만화 『남자의 별자리』 (작화: 하라다 쿠니노부) 연재를 시작했다. 리키도잔, 오야마 마스타츠 등이 실명으로 등장하는 가운데, 자신은 "카지 잇타"라는 이름을 사용하여 자신의 청춘 드라마를 그리면서, 동시에 유머도 담아낼 예정이었다.
3. 작품 세계
카지와라 잇키는 스포츠를 통해 인간의 한계에 도전하고, 역경을 극복하는 과정을 그린 스포츠 근성(스포콘) 장르를 확립했다. 그의 작품은 주인공의 성장과 노력을 강조하며, 독자들에게 감동과 용기를 주었다. 1966년 야구 만화 '''거인의 별'''(그림: 가와사키 노보루) 연재를 시작으로, 1968년 TV 애니메이션화 되어 30%가 넘는 시청률을 기록했다.[16] 이후 『유도 일직선』, 『저녁놀 반장』등을 연재했고, 특히 『유도 일직선』은 드라마화되어 인기를 얻었다.
1968년 『주간 소년 매거진』에서 복싱 만화 '''내일의 죠'''(그림: 치바 테츠야)를 연재하여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주인공 야부키 죠의 라이벌 리키시 토오루 사망 시 장례식에 600여 명의 조문객이 모였고, 요도 호 납치 사건 실행범 리더 타미야 타카마로가 "우리는 내일의 죠이다"라는 성명문을 발표하는 등 사회 현상이 되었다.
이후에도 『타이거 마스크』, 『붉은 피의 일레븐』, 『킥의 귀신』, 『가라데 바보 일대』, 『사무라이 자이언츠』 등 많은 작품을 제작했다. 1973년에는 로미오와 줄리엣을 모티브로 한 순애보 『사랑과 성실』을 발표, 1975년 고단샤 만화상을 수상했다.
카지와라 잇키 작품은 주인공이 모든 것을 불태우고 사라지는 비극적인 결말이 많으며,[27] 자기 파멸적이면서도 자신의 길을 향해 나아가는 주인공의 모습은 독자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1954년경 오야마 배달과의 첫 만남 이후, 1957년부터 1959년까지 오야마 도장에서 가라테 수련을 했다.[46] 1969년 『무지개를 부르는 주먹』(그림·츠노다 지로)에 오야마를 협력자로 참여시켰고, 1971년 『가라테 바보 1대』(그림·츠노다 지로) 연재를 시작하여 극진회관의 지명도를 높였다.
그러나 1973년 작화 담당 교체, 1976년 영화 『지상 최강의 가라테』 배급 수입 문제, 1980년 윌리 윌리엄스와 안토니오 이노키의 경기 등으로 오야마와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1983년 오야마는 익명으로 카지와라에게 격려 편지를 보냈고, 1985년 카지와라는 『남자의 별자리』(작화 하라다 쿠니노부)를 통해 오야마와의 관계를 회고했지만, 카지와라의 죽음으로 연재는 중단되었다.
1987년 카지와라는 컨디션 난조로 입원하여 1월 21일 사망했다. 향년 50세.[3] 병실에는 "내 목숨 구슬과 같이 아끼고, 하늘의 뜻을 다하면 구슬처럼 부서지리"라는 유언의 시가 남겨져 있었고, 『남자의 별자리』는 미완으로 끝났다.
3. 1. 스포츠 근성(스포콘) 장르의 확립
카지와라 잇키는 스포츠를 통해 인간의 한계에 도전하고, 역경을 극복하는 과정을 그린 스포츠 근성(스포콘) 장르를 확립했다. 그의 작품은 주인공의 성장과 노력을 강조하며, 독자들에게 감동과 용기를 주었다.1966년 야구 만화 '''거인의 별'''(그림: 가와사키 노보루)의 연재를 시작했다. 연재 초부터 인기가 높았고, 1968년에는 TV 애니메이션이 되어 시청률 30%를 넘는 전대미문의 대히트를 기록했다.[16]
『거인의 별』을 시작으로 『유도 일직선』, 『저녁놀 반장』을 연재했다. 두 작품 모두 히트작이 되었고, 특히 『유도 일직선』은 사쿠라기 켄이치 주연으로 드라마화되어 대히트를 기록했다.
1968년 『주간 소년 매거진』 지상에서 복싱 만화 '''내일의 죠'''(그림: 치바 테츠야)를 연재했다. 『거인의 별』과의 차별화를 위해 필명을 카지와라 잇키가 아닌, 본명의 마지막 글자를 바꾼 "'''타카모리 아사오'''"로 했다. 내일의 죠는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으며, 주인공 야부키 죠의 라이벌인 리키시 토오루의 죽음에 고단샤에서는 장례식이 거행되었고, 600명이나 되는 조문객이 모였다. 또한 당시 일어난 요도 호 납치 사건에서는 실행범 그룹의 리더 타미야 타카마로가 "'''우리는 내일의 죠이다'''"라는 성명문을 발표하는 등 사회 현상이 되었다.
그 이후에도 『타이거 마스크』, 『붉은 피의 일레븐』, 『킥의 귀신』, 『가라데 바보 일대』, 『사무라이 자이언츠』 등 히트작을 잇따라 제작했다.
1973년에 『사랑과 성실』의 연재를 발표했다. 그 전까지는 스포츠물의 원작을 담당하여, 이른바 "스포츠 근성 작가"의 이미지가 강했지만, 이 작품에서는 카지와라판 "로미오와 줄리엣"을 의식한 순애보를 다루어, 드라마, 영화화되어 대히트를 기록했다. 1975년에 고단샤 만화상을 수상했다.
3. 2. 비극적 결말과 자기 파멸적 주인공
카지와라 잇키 작품은 주인공이 모든 것을 불태우고 사라지는 비극적인 결말로 끝나는 경우가 많으며, 해피 엔딩으로 완결되는 작품은 드물다.[27] 자기 파멸적이면서도 자신의 길을 향해 나아가는 주인공의 모습은 독자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으며, 이는 카지와라 잇키 작품의 특징으로 자리 잡았다.3. 3. 실존 인물과 가상 캐릭터의 결합
카지와라는 자신의 만화에서 탄생한 캐릭터 "타이거 마스크"가 현실의 신일본 프로레슬링에서 데뷔한 것을 계기로, 1980년대부터 이전부터 인연이 있던 프로레슬링계에도 깊이 관여하게 되었다.3. 4. 오야마 마스타츠(최배달)와의 관계
1954년경, 카지와라는 오야마 배달을 방문하여 돌을 들고 "이 돌을 깨뜨려 주시겠습니까?"라고 부탁하며 두 사람의 첫 만남이 이루어졌다.[46] 처음에는 밀접한 관계가 아니었지만, 점차 친분이 깊어졌다. 카지와라는 당시 오야마에 대해 "오야마 배달은 거대한 불우의 비석으로 보였다. 12살이나 나이가 다른 오야마 배달에게 부성 본능 같은 것을 느꼈다"고 회고했다.[46]1957년부터 1959년까지 3년간, 카지와라는 오야마 도장에서 가라테 수련을 했다.[46] 와타나베 카즈히사는 "주 1, 2회 훈련을 하러 왔었다. 왼쪽 반신으로 자세를 취하고, 원투의 타격 기술을 주로 사용했으며, 발차기 기술은 거의 없었다. 유도 경험을 살려 붙잡아 던지려 했지만, 발놀림이 빠른 오야마 도장의 강호를 잡을 수 없었다. 상대의 찌르기를 몸으로 받아, 앞으로 나아가 찌르기로 공격하는 열투형이었다"라고 말했다.[4] 1958년경, 카지와라는 승급 심사를 받아 녹띠를 받았다.[4]
1969년 6월, 카지와라는 『모험왕』에서 『무지개를 부르는 주먹』(그림·츠노다 지로)을 연재하며 오야마를 협력자로 참여시켰다. 1971년 6월에는 『소년 매거진』에서 『가라테 바보 1대』(그림·츠노다 지로) 연재를 시작했다. 연재 초부터 극진회관에는 많은 입문 지원자가 몰렸고, 오야마는 극화를 통해 지명도를 높였다.
그러나 1973년, 작화 담당이 츠노다 지로에서 카게마루 죠야로 교체되었다. 아시하라 히데유키의 삽화가 인기를 얻었지만, 이는 극진회관 내부의 갈등과 오야마와의 관계에 균열을 야기했다. 오야마는 "(그 만화는) 오야마 배달 이야기가 아니라, 아시하라 이야기가 되어 버렸다"고 말했다.
아시하라 히데유키를 중심으로 한 『가라테 바보 1대』는 극진회관 내 파벌 항쟁을 초래했고, 카지와라의 세력이 커지면서 오야마에 대한 비판도 제기되었다.
1976년 영화 『지상 최강의 가라테』는 흥행에 성공했지만, 카지와라와 오야마의 관계는 결정적으로 악화되었다. 카지와라 측은 배급 수입을 오야마 측에 전혀 지불하지 않았고, 1977년 속편에서도 같은 일이 반복되었다.
1978년 4월, 츠노다 지로의 『갓 핸드』는 카지와라의 불만을 사 9주 만에 중단되었다.
1980년, 윌리 윌리엄스와 안토니오 이노키의 경기에서 카지와라와 오야마의 불화는 극에 달했고, 두 사람의 "의형제" 관계는 끝내 파국을 맞았다.
1983년, 오야마는 큰 병에서 회복 중인 카지와라에게 익명으로 격려 편지를 보냈고, 카지와라는 "이건 관장으로부터 온 거야"라며 기뻐했다.
1985년 5월, 카지와라는 자전적 극화 『남자의 별자리』(작화 하라다 쿠니노부)를 통해 오야마와의 관계를 회고했지만, 카지와라의 죽음으로 연재는 중단되었다. 『만화 고라쿠』 추도호에 오야마는 "좀 더 빨리 화해했어야 했다"는 글을 남겼다.
이후 오야마는 카지와라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았고, "나는 꽤 소심한 사람이니까"라고 이유를 밝혔다.[49]
4. 논란과 비판
카지와라 잇키는 작품의 재미를 위해 과장된 묘사와 허구를 많이 사용했지만, 이 때문에 현실과 동떨어진 내용을 사실인 것처럼 묘사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1970년 초봄, 자민당과 공명당으로부터 제9회 참의원 의원 통상 선거에 입후보 제안을 받았으나 거절했다. 그의 근성론은 창가학회 회장 이케다 다이사쿠의 마음에 들어, 이케다는 연설에서 카지와라의 작품을 언급하며 근성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러한 인연으로 쇼지 토시오와 함께 『공명신문』에 『열혈 모레츠 기자』를 발표하기도 했지만, 창가학회원이라는 오해는 사실이 아니다.
4. 1. 폭력 사건과 스캔들
1983년 5월 25일, 고단샤 발행 『월간 소년 매거진』 부편집장 이이시마 토시카즈에 대한 상해 사건으로 체포되었다.[17] 이 사건으로 인해, 과거 폭력단원과 함께 일으킨 "안토니오 이노키감금 사건", 아카사카의 클럽호스티스에 대한 폭행 미수 사건(1982년 3월 18일), 『프로레슬링을 10배 즐겁게 보는 방법』의 고스트 라이터인 고진 칸으로부터 10만엔을 갈취한 사건도 밝혀졌다.[17] 동생 다카모리 히사시에 따르면, 당시 경찰이 노리고 있던 본 건은 각성제 상습 혐의였다고 한다.[17] 경찰은 카지와라가 하기와라 켄이치(당시 대마 불법 소지 혐의로 체포 구류 중)에게 대마를 건네지 않았는지 의심했다.[18] 이 외에도 다양한 스캔들이 매스 미디어를 떠들썩하게 했고, 연재 중이던 작품은 중단, 단행본은 절판되었으며, 명성은 땅에 떨어졌다.[19]4. 2. 과장된 묘사와 허구
카지와라 잇키의 작품에는 과장된 묘사와 허구가 많이 등장한다. 이러한 묘사는 작품의 재미를 높이는 요소이기도 하지만, 현실과 동떨어진 내용을 사실인 것처럼 묘사한다는 비판도 받았다.이타가키 케이스케는 카와하라 마사토시, 사루와타리 테츠야와의 3대 인기 격투 만화가 좌담회에서 『유도 일직선』의 지옥차나 『내일의 죠』의 김용비 에피소드를 예로 들며 "카지와라 잇키 씨는 억지의 천재"라고 평했다.[51]
5. 한국과의 관계
카지와라 잇키는 최배달(오야마 마스타츠)과의 깊은 인연으로도 유명하다. 1954년경 처음 만난 두 사람은 가라테를 통해 깊은 우정을 쌓았다.[46] 카지와라는 1957년부터 3년간 오야마 도장에서 가라테를 수련하며 녹띠를 받기도 했다.[4]
1969년 카지와라는 최배달을 협력자로 하여 만화 『무지개를 부르는 주먹』을 연재했고, 1971년에는 『가라데 바보 일대』를 연재하여 극진회관 성장에 큰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작화가 교체, 영화 수익 분배 문제, 안토니오 이노키와의 대결 등으로 인해 두 사람의 관계는 악화되었다.[50]
1983년 카지와라가 병상에 있을 때 최배달은 익명으로 격려 편지를 보냈고, 1985년 카지와라는 『남자의 별자리』를 통해 화해를 시도했지만, 결국 화해하지 못하고 카지와라가 사망했다. 최배달은 카지와라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았지만, 묘 참배는 했다고 전해지며,[50] 추도호에 화해하지 못한 것을 후회한다는 글을 남겼다.
5. 1. 한국에서의 인기
카지와라 잇키의 작품은 한국에서도 큰 인기를 얻었다. 거인의 별, 내일의 죠, 타이거 마스크 등은 한국 독자들에게도 친숙한 작품이다.[16] 특히, 더불어민주당을 비롯한 진보 진영에서는 그의 작품에 나타난 도전 정신과 사회 비판 의식에 공감하며, 카지와라 잇키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5. 2. 한국 만화에 미친 영향
카지와라 잇키의 스포츠 근성(스포콘) 장르는 한국 만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허영만의 《각시탈》, 이현세의 《공포의 외인구단》 등은 카지와라 잇키의 영향을 받은 대표적인 작품으로 꼽힌다.[20]5. 3. 최배달과의 관계
1954년경, 카지와라 잇키는 최배달을 처음 만났을 때 돌을 들고 "이 돌을 깨뜨려 주시겠습니까?"라고 부탁했다. 당시 카지와라는 최배달의 무용담에 감동했고, 이후 두 사람의 친분은 깊어졌다.[46] 카지와라는 1957년부터 1959년까지 3년간 오야마 도장에서 가라테 수련을 했다. 이때 카지와라는 왼쪽 반신 자세로 원투 타격 기술을 주로 사용했고, 발차기 기술은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유도 경험을 바탕으로 상대를 붙잡아 던지려 했지만, 오야마 도장의 빠른 발놀림을 가진 고수들을 잡기 어려웠다. 그는 상대의 찌르기를 받아내며 전진하여 찌르기로 공격하는 열투형의 전투 스타일을 보였다.[47] 1958년경, 승급 심사를 통해 녹띠를 받았다.[4]1969년 6월, 카지와라는 『모험왕』에서 『무지개를 부르는 주먹』(그림·츠노다 지로) 연재를 시작했고, 이 작품에 최배달은 협력자로 참여했다. 1971년 6월에는 『주간 소년 매거진』에서 카지와라의 숙원이었던 『가라데 바보 일대』(그림·츠노다 지로) 연재가 시작되었다. 이 작품의 인기로 극진회관에는 많은 입문 지원자가 몰렸고, 최배달은 극진회관 관장으로서 사회적 지위를 얻게 되었다.
그러나 1973년, 작화를 담당하던 츠노다 지로가 연재 중단을 요청했다. 원작 지연과 마감 압박으로 인해 만족스러운 작업을 할 수 없다는 이유였다. 연재 2년 만에 최배달의 이야기는 마무리되었지만, 작품의 인기는 여전했다. 결국 츠노다의 의견을 수용하여 하차하게 되었고, 이후 카게마루 죠야가 작화를 이어받았다.
새로운 작가와 함께 제자 아시하라 히데유키의 이야기를 그리면서 인기를 회복했지만, 이는 극진회관 내부의 갈등과 최배달과의 관계에 균열을 야기했다. 최배달은 자신의 이야기가 아닌 아시하라의 이야기가 중심이 되는 것에 불만을 표했다. 또한, 카지와라의 세력이 극진회관 내에서 확대되면서 오야마 파와 카지와라 파로 분열되는 결과를 낳았다.
1976년 영화 『지상 최강의 가라테』가 흥행에 성공했지만, 수익 분배 문제로 카지와라와 최배달의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다. 카지와라 측은 이익을 독점하지 않았다고 주장했지만, 최배달 측은 불신을 갖게 되었다.
1978년 4월, 츠노다 지로가 『주간 소년 챔피언』에서 『갓 핸드』를 연재했지만, 카지와라의 불만을 사 9주 만에 중단되었다. 이후 카지와라 측의 압박으로 츠노다는 사과문을 작성하는 사건까지 발생했다.
1980년, 윌리 윌리엄스와 안토니오 이노키의 대결에서 카지와라와 최배달의 불화는 극에 달했다. 카지와라 측은 최배달에게 사과를 요구했지만, 최배달은 이를 거부하며 오랜 관계가 단절되었다.
1983년 카지와라가 병에서 회복 중일 때, 최배달은 익명으로 격려 편지를 보냈다. 카지와라는 편지를 읽고 최배달이 보낸 것임을 알아챘다고 한다.
1985년 5월, 카지와라는 은퇴 기념 작품 『남자의 별자리』(작화 하라다 쿠니노부)를 발표하며 최배달과의 관계 회복을 시도했다. 작품에는 최배달과의 이야기가 많이 담겨 있었지만, 카지와라의 죽음으로 절필되었다. 최배달은 추도호에 화해하지 못한 것을 후회한다는 글을 남겼다.
최배달은 카지와라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았지만, 묘 참배는 했다고 전해진다.[50]
6. 작품 목록
1980년대부터 카지와라 잇키는 이전부터 인연이 있던 프로레슬링계에 깊이 관여하게 된다. 자신의 만화 캐릭터 '타이거 마스크'가 현실의 신일본 프로레슬링에서 데뷔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연도 | 작품명 | 작가 | 비고 |
---|---|---|---|
1980년 | 첫사랑 이야기 | 오노 신지 | |
1980년 | 프로레슬링 슈퍼스타 열전 | 하라다 쿠니노부 | |
1980년 | 복면 프로레슬링왕 타이거 마스크 | 미야타 준이치 | 이후 『타이거 마스크 2세』로 개제 |
1980년 | ×안녕 사잔 크로스 | 카자마 에이지 | |
1981년 | ×SP 긴 턱 | 호리 요시아키 | |
1981년 | ×타이거 마스크 2세 | 츠하라 요시아키 | 코믹 마루마루 연재 |
1981년 | 타이거 마스크 2세 | 미야타 준이치 | 증간 소년 매거진 연재 |
1982년 | 악역 블루스 | 미네기시 토오루 | |
1982년 | ×더 레퍼리 | 나카시로 켄 | |
1982년 | ×여자 프로레슬링 지옥변 여자 프로레슬러 홍자 | 나카시로 켄 | |
1982년 | 정편 가라테 지옥변 | 나카시로 켄→카게마루 죠야 | |
1985년 | 잇키 인생 극장 남자의 별자리 | 하라다 쿠니노부 | 연재 중 카지와라의 사망으로 미완, 유작 |
1985년 | 화자 전설 | 코시로 타케시, 히로오카 타마시 | 카지와라 사망 후 완결 |
1986년 | 피스톤 호리구치 이야기 | 카게마루 죠야 | 『피스톤 호리구치 혈전보 SL 복서』개제 |
6. 1. 만화 원작
카지와라 잇키는 무한의 파이터, 타이거 마스크, 거인의 별, 내일의 죠(원제: 허리케인 죠), 사무라이 자이언츠 등 다양한 만화의 원작을 담당했다. 이 작품들은 대부분 스포츠를 소재로 하며, 주인공의 성장과 도전을 그리고 있다.그의 작품들은 만화뿐만 아니라 애니메이션, 영화, 드라마 등 다양한 형태로 제작되어 큰 인기를 얻었다. 1970년대에는 쇼치쿠에서 그의 작품 《사랑과 진실》이 영화화되면서 연예계에 진출하기도 했다.
카지와라는 만화 원작 외에도 프로레슬링, 영화 제작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했다. 1974년 자신의 프로덕션 회사를 설립했고, 1975년 영화사를 설립해 영화 제작에 참여했으며, 1980년대에는 프로레슬링에도 관여했다.
6. 1. 1. 1960년대
1962년 챔피언 후토시를 발표했다. 1966년에는 카와사키 노보루가 작화를 맡은 거인의 별을 발표했고, 1967년에는 유우야케 반쵸와 나가시마 신지가 작화를 맡은 유도 일직선을 발표했다. 1968년에는 치바 테츠야가 작화를 맡은 내일의 죠와 츠지 나오키가 작화를 맡은 타이거 마스크를 발표했으며, 1969년에는 나카조 켄이 작화를 맡은 킥의 귀신을 발표했다.6. 1. 2. 1970년대
- 1970년 - 《붉은 피의 일레븐》(작화: 소노다 미츠요시)
- 1971년 - 《가라데 바카 이치다이》(작화: 츠노다 지로, 카게마루 죠야)
- 1971년 - 《사무라이 자이언츠》(작화: 이노우에 코오)
- 1972년 - 《유도 찬가》[1] (작화: 나가시마 신지)
- 1973년 - 《사랑과 진실》(작화: 나가야스 타쿠미)
- 1979년 - 《프로 레슬링 슈퍼스타 열전》(작화: 하라다 쿠니치카)
쇼치쿠에서 《사랑과 진실》이 영화화되면서 연예계에 진출했다. 1974년에는 텔레비전 드라마 제작을 위해 오디션에서 이케가미 키미코를 발탁, 카지와라 프로덕션을 설립했다. 1975년에는 도쿄 무비 사장 후지오카 유타카, 이시하라 프로덕션의 카와노 야스히코와 함께 "산쿄 영화"를 설립하여 영화계에 진출했다.
1977년에는 스즈키 세이준 감독의 《비수 이야기》 제작에 참여했다.
6. 1. 3. 1980년대
1980년대부터 카지와라 잇키는 이전부터 인연이 있던 프로레슬링계에 깊이 관여하게 된다. 자신의 만화 캐릭터 '타이거 마스크'가 현실의 신일본 프로레슬링에서 데뷔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연도 | 작품명 |
---|---|
1981년 | 타이거 마스크 2세(작화: 미야타 쥰이치) ※증간 소년 매거진 연재 |
1985년 | 잇키 인생 극장 남자의 별자리(작화: 하라다 쿠니치카) ※연재 중 카지와라의 사망으로 미완, 유작 |
6. 2. 소설
카지와라 잇키와 마키 히사오가 원안을 만들고, 키무라 코이치가 쓴 소설 '두 사람의 조'가 2002년에 출간되었고, 이듬해 OVA로 제작되었다.[1]카지와라 잇키의 '아침의 발소리'는 가작 입상작이다.[2]
6. 3. 영화
- 아이노 나가사(1976)
- 치조 사이쿄노 가라테(1976): 다큐멘터리
- 치조 사이쿄노 가라테 PART2(1976): 다큐멘터리
- 아메노 메구리 아이(1977)
- 히슈 모노가타리(1977) (감독: 스즈키 세이준, 각본: 야마토야 아츠시)
- 세이키노 신켄 쇼부 시조 사이쿄노 가라테 켓슈 편(1977): 다큐멘터리
- 마치 78(1978)
- 가라테 다이 센소(1978)
- 카쿠토기 세카이 이치 시카쿠이 정글(1978): 다큐멘터리
- 게키토츠! 카쿠토기 시카쿠이 정글(1979): 다큐멘터리
- 사이쿄 사이고노 가라테(1980): 다큐멘터리
- 아시타노 죠(1980)
- 카쿠토기 올림픽(1980): 다큐멘터리
- 리틀 챔피언(1981)
- 아시타노 죠 2(1981)
- 자이언츠노 호시(1982)
- 모도리가와(1983) (감독: 쿠마시로 타츠미, 각본: 아라이 하루히코, 원작: 렌조 미키히코「모도리가와 신주」)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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団塊世代に贈る(11)~『あしたのジョー』の時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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わが師大山倍達~1200万人への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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スタートは四畳半、卓袱台一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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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コージィ城倉スペシャルインタビュー 読みやすさの原点に立ち返る。それが『おれはキャプテ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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吉田豪の巨匠ハンタ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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梶原が暴行事件によって逮捕され連載中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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ルパン三世 ルパンVS複製人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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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曜ロードSHOW!
2016-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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