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랏고원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코랏고원은 태국 북동부에 위치한 고원으로, 면적은 약 155,000km²이며 평균 고도는 200m이다. 접시 모양의 지형으로, 메콩강으로 흘러드는 문강과 치강에 의해 깎여 라오스 쪽으로 열려 있다. 펫차분산맥, 동렉산맥, 푸판 산맥 등이 고원의 경계를 이루며, 몬순의 영향으로 강수량이 적고 토양 배수가 잘 되지 않아 홍수와 가뭄의 영향을 받기 쉽다. 선사 시대 유적과 크메르 제국의 유적 등 다양한 고고학적 유물이 발견되며, 반 치앙 유적은 청동기 시대의 증거를 보여준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코랏고원 - [지명]에 관한 문서 | |
---|---|
지리 정보 | |
위치 | 태국 북동부 |
면적 | 약 155,000 제곱킬로미터 |
고도 | 평균 200 미터 |
개요 | |
별칭 | 이산 |
지형 | 사암 기반의 완만한 경사면 |
주요 강 | 치 강 문강 |
지질 | 메소조생대 사암 |
행정 구역 | |
구성 지역 | 태국 북동부의 대부분 주 (이산) |
주요 도시 | 나콘랏차시마 (코랏) 콘깬 우본랏차타니 우돈타니 |
경제 및 산업 | |
주요 산업 | 농업 (주로 쌀농사) |
기타 산업 | 견직물 생산 소금 생산 축산업 |
특징 | 건조한 기후로 인해 농업 생산성이 낮음 |
문화 및 사회 | |
주민 | 주로 라오족 계통의 이산인 |
언어 | 이산어 (라오어 방언) |
문화적 특징 | 라오스 문화와 유사 |
기타 정보 | |
특이 사항 | 람팡의 아시아 코끼리 보호 센터가 위치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반치앙 유적이 위치 |
2. 지리
코랏고원은 평균 고도 200m로, 문강과 치강이 흘러 메콩강으로 합류한다. 고원 서쪽에는 펫차분산맥이, 남쪽에는 캄보디아와의 국경을 이루는 동렉산맥이 위치한다. 이 산맥들은 코랏고원을 태국 중부와 분리하며, 역사적으로 접근을 어렵게 만들었다.[1]
2. 1. 지형
코랏고원은 평균 고도가 200m이고, 면적은 155000km2이다. 고원은 접시형으로 약간 경사져 있으며, 메콩강으로 흘러드는 문강과 치강에 의해 깎여 방콕 반대쪽인 라오스 쪽으로 열려 있다. 고원 서쪽에는 펫차분산맥이 뻗어 있어 코랏고원과 태국 중부 및 북부의 경제적 지위를 다르게 한다.[1] 고원의 북쪽과 동쪽은 메콩강이 경계를 이루고, 남쪽은 캄보디아와의 국경선인 동렉산맥이 고원 남부 경계를 이룬다.접시 모양의 코랏 고원은 푸판 산맥에 의해 북쪽의 사콘나콘 분지와 남쪽의 코랏 분지로 나뉜다. 고원은 북서쪽의 해발 약 213m에서 남동쪽의 해발 62m까지 기울어져 있다. 북동쪽 구석의 몇몇 언덕을 제외하면 이 지역은 주로 완만한 구릉지이며, 대부분 해발 90m에서 180m 사이에서 펫차분 산맥에서 메콩강으로 기울어져 있다.[1] 이 고원은 문강과 치강에 의해 배수되는데, 이 강들은 북동쪽 경계를 형성하는 메콩강의 지류이다. 서쪽의 펫차분 산맥과 동파야옌 산맥, 남서쪽의 상캄팽 산맥, 남쪽의 동렉산맥은 태국 중부와 고원을 분리하며, 역사적으로 고원에 접근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이 산맥들은 북동쪽의 쯔엉선 산맥과 함께 많은 강수량을 잡아내어 남서쪽 몬순의 강도가 다른 지역보다 훨씬 낮다. 나콘랏차시마의 연평균 강수량은 약 1150mm인 반면, 태국 중부 지역은 1500mm이다. 건기와 우기의 차이가 훨씬 커서 이 지역은 쌀 재배에 덜 적합하다. 퉁 쿨라 롱 하이로 알려진 지역은 한때 매우 건조했다.
2. 2. 수계
코랏고원의 평균 고도는 200m이며, 면적은 약 155000km2이다. 접시 모양의 고원은 푸판 산맥으로 나뉘어 북쪽의 사콘나콘 분지와 남쪽의 코랏 분지 두 개의 분지로 구분된다. 고원은 북서쪽(해발 약 213m)에서 남동쪽(해발 약 62m)으로 기울어져 있다. 북동쪽 구석의 몇몇 언덕을 제외하고, 이 지역은 주로 완만한 구릉지이며, 대부분 해발 90m에서 180m 사이에서 펫차분 산맥에서 메콩강으로 기울어져 있다.[1] 이 고원은 문강과 치강에 의해 배수되는데, 이 강들은 이 지역의 북동쪽 경계를 형성하는 메콩강의 지류이다.2. 3. 주변 산맥
코랏 고원의 서쪽에는 펫차분산맥이 펼쳐져 있어 코랏 고원과 태국 중부, 북부의 경제적 지위를 다르게 하고 있다. 고원 남쪽에는 캄보디아와의 국경선이기도 한 동렉산맥이 고원 남부의 경계선을 이루고 있다.[1] 펫차분 산맥과 동파야옌 산맥, 남서쪽의 상캄팽 산맥, 남쪽의 당렉 산맥은 태국 중부와 코랏 고원을 분리하며, 역사적으로 고원에 접근하기 어렵게 만들었다.이 산맥들은 북동쪽의 쯔엉선 산맥과 함께 많은 강수량을 잡아내어, 남서쪽 몬순의 강도가 다른 지역보다 훨씬 낮다.
3. 기후
코랏 고원은 서남쪽에서 오는 몬순을 고원의 동쪽과 남쪽의 산지가 막고 있어 강우량이 적다. 태국 중부의 연간 평균 강수량이 1500mm인 반면, 고원의 남서부에 위치하는 나콘랏차시마주에서는 연간 평균 강수량이 1150mm이다. 게다가 코랏 고원은 태국의 다른 지역에 비해 배수가 잘 되지 않는 토양이어서 홍수와 가뭄의 영향을 쉽게 받는 특징이 있다. 이것은 최근 개발이 진행되어 농업 기술이 갖추어질 때까지 코랏 고원(혹은 이산)에 큰 영향을 계속 주어 이산을 빈곤 지역으로 만든 요인이었다.
4. 지질
코랏 고원은 킴메리아 미세 대륙의 잔해와 샨-타이 지괴와 같은 지괴로 구성된 광대한 평야에서 융기되었다. 이 융기는 플라이스토세 후기 또는 홀로세 세 초, 즉 대략 홀로세 달력 1년에 일어났다.[2] 고원 표면의 많은 부분은 한때 라테라이트로 분류되었으며, 벽돌 모양의 블록으로 쉽게 잘라낼 수 있는 층은 여전히 그렇게 불리고 있지만, 토양을 다양한 유형의 옥시졸로 분류하는 것이 농업에 더 유용하다. 로딕 페랄솔 또는 야소톤 주 토양이라고 불리는 옥시졸은 초기 제3기에 습한 열대 조건에서 형성되었다.
4. 1. 토양
코랏 고원은 서남쪽에서 불어오는 몬순의 영향을 적게 받아 강우량이 적다. 태국 중부의 연간 평균 강수량이 1500mm인 반면, 고원 남서부의 나콘 랏차시마 주는 연간 평균 강수량이 1150mm에 불과하다. 또한, 배수가 잘 되지 않는 토양 때문에 홍수와 가뭄의 피해를 쉽게 겪는다. 이러한 환경은 농업 기술이 발달하기 전까지 코랏 고원 지역을 빈곤하게 만드는 주요 원인이었다.[2]고원 표면의 많은 부분은 한때 라테라이트로 분류되었으나, 현재는 다양한 유형의 옥시졸로 분류하는 것이 농업에 더 유용하다. 로딕 페랄솔 또는 야소톤 주 토양이라고 불리는 옥시졸은 초기 제3기에 습한 열대 기후에서 형성되었다. 밝은 적색을 띠는 이 잔류토는 남쪽 가장자리의 고지대에 넓게 분포한다. 이 토양은 밭 흰개미에 의해 모래가 제거된 자갈 토양층 위에 놓여 있으며, 이는 장기간 지속되는 생물교란 과정이다.[3] 코랏 및 우본 계열의 잔틱 페랄솔은 밝은 황색에서 갈색을 띠며, 유럽의 브라운 어스와 유사한 저지대 토양을 형성한다.[3]
5. 역사
앙코르 시대 이후 수 세기에 걸쳐 정보가 부족하지만, 이 시기 이후 고원 지대는 대부분 인구가 감소한 것으로 보이며[7], 13세기에서 15세기까지 오랜 기간 가뭄이 이어졌다. 라오족 정착지는 메콩강 유역과 농부아람푸, 러이, 농카이와 같은 북부의 습윤한 지역에서만 발견되었으며, 인구 대부분은 더 습윤한 강 서안에 거주했다.
수리냐봉사(สุริยวงศา|수리야웡사tts) (1637-1694) 통치하의 라오족 번영과 문화적 성취의 황금기는 왕위 계승 분쟁으로 끝났다. 그의 손자들은 시암의 개입으로 1707년에 각자 분리된 왕국을 건설했다. 그 잿더미에서 루앙프라방, 비엔티안, 그리고 나중에 1713년에 참파삭 왕국이 일어났다.
일련의 가뭄 이후 산림이 파괴되고 인구가 감소한 건조한 내륙 지역은, 아마도 크메르 제국의 붕괴로 이어졌으며, 소규모의 오스트로아시아족 집단과 라오족 ''므앙''의 흩어진 전초 기지만 북부 외곽에 자리 잡고 있었다. 1718년, 코랏 고원 내륙, 즉 치 계곡에 최초의 라오족 무앙이 오늘날의 로이엣 주에 있는 수완나품 구에 참파삭 왕국의 녹사랏 왕을 섬기는 관리에 의해 건설되었다.[7]
5. 1. 선사 시대
코랏 고원에는 선사 시대 태국의 여러 유적이 있으며, 동선 문화의 청동 유물도 일부 발견되었다. 1966년에 발견된 세계 유산 반 치앙 고고학 유적지는 기원전 2000년경부터 청동 생산을 시작했다는 증거를 보여주지만, 유럽 및 세계 다른 지역의 청동기 시대와 관련된 무기에 대한 증거는 부족하다.[4] 이 유적지는 한때 더 광범위한 문화의 일부였던 것으로 보이며, 기원후 200년경에 버려졌다가 19세기 초까지 다시 정착되지 않았다. 콘깬주의 푸 위앙 군에 있는 논 녹 타에서는 기원전 1420년부터 기원후 50년경까지의 철기 시대 정착지의 증거가 발견되었다.5. 2. 고대 왕국 시대
코랏 고원에는 많은 선사 시대 태국 유적이 있으며, 일부 동선 문화의 청동 유물이 발견되었다. 1966년에 발견된 세계 유산 반 치앙 고고학 유적지는 기원전 2000년경부터 시작된 청동 생산의 증거를 보여주었지만, 유럽과 세계 다른 지역의 청동기 시대와 자주 연관되는 무기에 대한 증거는 부족했다.[4] 이 유적지는 한때 더 광범위한 문화의 일부였던 것으로 보이며, 기원후 200년경에 버려졌다가 19세기 초까지 재정착되지 않았다. 콘깬 주의 푸 위앙 군에 있는 논 녹 타에서는 기원전 1420년부터 50년경까지의 철기 시대 정착지의 증거가 발견되었다.이 지역은 한때 드바라바티 왕국의 종주권 아래 있었고, 이후 크메르 제국의 지배를 받았다. 이 지역에는 25km 간격으로 위치한 크메르 휴게소의 유적이 점재해 있는데, 이는 편안한 하루의 도보 거리에 해당하며, 고대 크메르 고속도로를 따라 위치해 있다. 이러한 휴게소는 단순한 휴식 장소가 아니라 호스피스와 도서관이었으며, 일반적으로 바라이 (연못)가 포함되었다.[5] 고고학자 찰스 하이엄은 "7세기부터 11세기까지 코랏 고원의 유적지 간의 관계와 국가의 존재 여부에 대해 우리는 대체로 알지 못한다"고 말했다. 므앙 세마와 므앙 파 데트는 세마 석을 포함한 종교적 구조물로 유명하다.[6]
5. 3. 앙코르 시대 이후
앙코르 시대 이후 수 세기에 걸쳐 정보가 부족하지만, 이 시기 이후 고원 지대는 대부분 인구가 감소한 것으로 보이며[7], 13세기에서 15세기까지 오랜 기간 가뭄이 이어졌다. 라오족 정착지는 메콩강 유역과 농부아람푸, 러이, 농카이와 같은 북부의 습윤한 지역에서만 발견되었으며, 인구 대부분은 더 습윤한 강 서안에 거주했다. 이 상황은 수리냐봉사(tts: สุริยวงศา|수리야웡사tts) (1637-1694) 통치하의 라오족 번영과 문화적 성취의 황금기가 왕위 계승 분쟁으로 끝나면서 바뀌기 시작했다. 그의 손자들은 시암의 개입으로 1707년에 각자 분리된 왕국을 건설했다. 그 잿더미에서 루앙프라방, 비엔티안, 그리고 나중에 1713년에 참파삭 왕국이 일어났다. 일련의 가뭄 이후 산림이 파괴되고 인구가 감소한 건조한 내륙 지역은, 아마도 크메르 제국의 붕괴로 이어졌으며, 소규모의 오스트로아시아족 집단과 라오족 ''므앙''의 흩어진 전초 기지만 북부 외곽에 자리 잡고 있었다. 1718년, 코랏 고원 내륙, 즉 치 계곡에 최초의 라오족 무앙이 오늘날의 로이엣 주에 있는 수완나품 구에 참파삭 왕국의 녹사랏 왕을 섬기는 관리에 의해 건설되었다.[7]6. 고고학
코랏 고원에는 선사 시대 태국 유적이 많으며, 일부 동선 문화의 청동 유물이 발견되었다. 세계 유산 반 치앙 고고학 유적지에서는 기원전 2000년경부터 청동 생산이 시작되었지만, 유럽 등 다른 지역의 청동기 시대와 관련된 무기류는 발견되지 않았다.[4] 콘깬 주 푸 위앙 군의 논 녹 타에서는 기원전 1420년부터 기원후 50년경까지의 철기 시대 정착지 흔적이 발견되었다.
이 지역은 드바라바티 왕국과 크메르 제국의 지배를 받았다. 고대 크메르 고속도로를 따라 25km 간격으로 크메르 휴게소 유적이 있는데, 호스피스와 도서관 역할도 했으며 바라이 (연못)가 있었다.[5]
고고학자 찰스 하이엄은 7세기부터 11세기까지 코랏 고원의 유적지 간 관계와 국가 존재 여부는 알 수 없다고 말했다. 므앙 세마와 므앙 파 데트는 세마 석을 포함한 종교적 구조물로 유명하다.[6]
6. 1. 주요 유적
코랏 고원에는 많은 선사 시대 태국 유적이 있으며, 일부 동선 문화의 청동 유물이 발견되었다. 1966년에 발견된 세계 유산 반 치앙 고고학 유적지는 기원전 2000년경부터 시작된 청동 생산의 증거를 보여주었지만, 유럽과 세계 다른 지역의 청동기 시대와 자주 연관되는 무기에 대한 증거는 부족했다.[4] 이 유적지는 한때 더 광범위한 문화의 일부였던 것으로 보이며, 기원후 200년경에 버려졌다가 19세기 초까지 재정착되지 않았다. 콘깬 주의 푸 위앙 군에 있는 논 녹 타에서는 기원전 1420년부터 50년경까지의 철기 시대 정착지의 증거가 발견되었다.이 지역은 한때 드바라바티 왕국의 종주권 아래 있었고, 이후 크메르 제국의 지배를 받았다. 이 지역에는 25km 간격으로 위치한 크메르 휴게소의 유적이 점재해 있는데, 이는 편안한 하루의 도보 거리에 해당하며, 고대 크메르 고속도로를 따라 위치해 있다. 이러한 휴게소는 단순한 휴식 장소가 아니라 호스피스와 도서관이었으며, 일반적으로 바라이 (연못)가 포함되었다.[5]
고고학자 찰스 하이엄은 "7세기부터 11세기까지 코랏 고원의 유적지 간의 관계와 국가의 존재 여부에 대해 우리는 대체로 알지 못한다"고 말했다. 므앙 세마와 므앙 파 데트는 세마 석을 포함한 종교적 구조물로 유명하다.[6]
참조
[1]
서적
Cornell Thailand Project; Interim Reports Series, No. 10
https://ecommons.cor[...]
Department of Asian Studies, Cornell University
2019-08-16
[2]
간행물
Geotectonics and Geologic Evolution of Thailand
http://library.dmr.g[...]
1992-11-17
[3]
논문
Landform Development and Bioturbation on the Khorat Plateau, Northeast Thailand
https://www.research[...]
2016-04-02
[4]
웹사이트
Ban Chiang, Thailand Bronze Age Village and Cemetery
http://archaeology.a[...]
About.com
2010-12-28
[5]
웹사이트
Thailand's Ancient Civilizations, Isaan Heartland
http://thailandcultu[...]
2016-04-02
[6]
서적
Early Mainland Southeast Asia
River Books Co., Ltd.
2014
[7]
서적
Contributions to Asian studies
Brill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