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콜마르 폰 데어 골츠 남작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콜마르 폰 데어 골츠 남작은 1843년 프로이센에서 태어나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오스만 제국 군 개혁,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여한 독일 군인이자 군사 이론가이다. 그는 군사 학교 교수로 재직하며 저술 활동을 했고, 특히 《무장한 국민》을 통해 군대와 민간의 융합을 주장했다. 1883년 오스만 제국에 파견되어 12년간 군 개혁을 이끌었으며, 제1차 세계 대전 중에는 벨기에 군정 장관으로 활동하며 벨기에 저항에 강경하게 대처했다. 그는 아르메니아 집단 학살에 소극적으로 대처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2급 1870년형 철십자장 수훈자 - 페르디난트 폰 체펠린 백작
    페르디난트 폰 체펠린 백작은 독일의 장군이자 항공기 제조자로, 특히 체펠린 비행선 개발로 명성을 얻었으며, 루프트쉬프바우 체펠린을 설립하고 제1차 세계 대전 중 독일군에 비행선을 공급하는 등 항공기 산업 발전에 기여했다.
  • 칼리닌그라드주 출신 - 세르게이 스크리팔
    러시아의 전직 군 정보국 대령 세르게이 스크리팔은 영국 비밀 정보국에 포섭되어 간첩 활동을 한 혐의로 러시아에서 유죄 판결을 받았으나, 첩보 교환으로 석방 후 영국으로 이주, 신경작용제 노비촉에 의해 독살 시도를 당했다.
  • 호엔촐레른 후작가 명예십자장 수훈자 - 베르너 폰 블롬베르크
    베르너 폰 블롬베르크는 제1차 세계 대전 참전과 바이마르 공화국 시대의 군 경력을 거쳐, 아돌프 히틀러 정권에서 국방장관을 역임하며 군의 나치화에 협력했으나 결혼 스캔들로 실각하고 뉘른베르크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한 독일 군인이다.
  • 호엔촐레른 후작가 명예십자장 수훈자 - 프란츠 폰 에프 기사
    프란츠 폰 에프 기사는 군국주의적 성향으로 비판받는 독일 군인이자 정치인으로, 의화단 운동 진압, 헤레로족 학살 연루,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자유군단 조직 및 바이에른 소비에트 공화국 진압, 나치당 활동 등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콜마르 폰 데어 골츠 남작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콜마르 폰 데어 골츠
콜마르 폰 데어 골츠
별칭골츠 파샤
출생일1843년 8월 12일
출생지프로이센 왕국, 동프로이센 주, 아들리히 빌켄펠트
현재 러시아, 칼리닌그라드 주, 이바노프카
사망일1916년 4월 19일
사망지오스만 제국, 바그다드
군사 경력
소속프로이센 왕국
독일 제국
오스만 제국
복무 기간1861년 – 1911년
1914년 – 1916년
최종 계급원수 (프로이센 왕국)
파샤 (오스만 제국)
참전 전투오스트리아-프로이센 전쟁
보불전쟁
제1차 세계 대전
작위
작위남작

2. 생애

1843년 동프로이센의 몰락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2] 1861년 프로이센 육군에 입대하여 군 경력을 시작했으며, 1866년 베를린육군대학에 입학했다. 그러나 같은 해 발발한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종군하여 부상을 입었다. 이후 참모본부에서 근무하고 프로이센-프랑스 전쟁(1870년-1871년)에도 참전했다. 전쟁 후에는 포츠담의 군사학교 교관과 참모본부 전사부 근무를 거쳐, 1878년부터 베를린 육군대학에서 전사 교관으로 활동하며 여러 군사 관련 저술을 남겼다.

1883년 오스만 제국의 요청으로 파견되어 약 12년간 오스만 제국군의 근대화 개혁에 크게 기여했으며, 이 공로로 오스만 제국 육군 원수의 명예 칭호를 받았다. 1896년 독일로 귀국한 뒤에는 사단장 등을 역임했고, 1911년 독일 제국 육군 원수 계급으로 승진하며 퇴역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현역으로 복귀하여 독일군 점령 하의 벨기에 군정 총독을 맡았다. 이 시기 그는 벨기에의 저항 운동에 대해 인질 처형 등 가혹한 방식으로 대응하여 논란이 되었으며, 이는 훗날 아돌프 히틀러가 긍정적으로 언급하기도 했다.[32] 이후 다시 오스만 제국에 군사 고문으로 파견되어 술탄의 군사 고문으로 활동했다. 1915년에는 오스만 제국 육군 제1군 사령관으로서 메소포타미아 작전을 지휘했으나, 1916년 바그다드에서 발진티푸스로 사망했다. 청년 투르크당에 의한 암살설도 있다.

2. 1. 초기 생애와 군 경력

골츠는 가난한 귀족 가문인 폰 데어 골츠 가문의 아들로, 1843년 동프로이센 아들리히 비엘켄펠트(Adlig Bielkenfeldde, 후에 골츠하우젠(Goltzhausende)으로 개명, 현재 칼리닌그라드주 폴레스크구의 이바노브카)에서 태어났다.[2] 그의 부모는 에르하르트 빌헬름 "오토" 자유 남작 폰 데어 골츠(1802-1849)와 팔미네 슈베르트(1815-1893)였다. 그는 1844년 아버지가 구입한 프로이센 아이라우 근처 파비안스펠데(Fabiansfeldede) 영지에서 자랐다.[3] 그의 아버지는 프로이센 육군에서 약 19년을 복무했지만 소위 계급 이상으로 진급하지 못했고, 농업 경영에도 성공하지 못했다. 결국 콜마르가 여섯 살 때 단치히(현재 그단스크)로 여행을 갔다가 콜레라로 사망했다.[4]

골츠는 1861년 쾨니히스베르크(현재 칼리닌그라드)에서 제5 동프로이센 보병 연대 41번 부대 소속의 소위로 프로이센 보병대에 입대했다.[5] 1864년에는 토룬에서 국경 경비를 맡았고, 1866년 베를린육군대학(Kriegsakademie)에 입학했다. 그러나 같은 해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이 발발하자 학업을 잠시 중단하고 종군하여 트라우테나우 전투에서 부상을 입었다. 1867년에는 참모본부 지형학 부서(지리측량부)에 합류했다.

1870년부터 약 1년 동안 이어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기간에는 프로이센 제2군 사령관인 프리드리히 카를 공작의 참모진에 배속되었다. 그는 비옹빌 전투, 그라블로트 전투, 메츠 포위전에 참전했다. 메츠 함락 후에는 프리드리히 카를 공작 휘하에서 루아르 전역에 참전하여 오를레앙 전투와 르망 전투에 참여했다.

전쟁이 끝난 1871년, 골츠는 포츠담의 육군 학교 교수로 임명되었고 대위로 진급하여 참모 본부의 역사 부서에 배치되었다. 이 시기에 그는 『메츠 항복까지의 제2군 작전』(Die Operationen der II. Armee bis zur Capitulation von Metzde)과 『르망의 7일』(Die Sieben Tage von Le Mansde)을 저술하여 1873년에 출판했다. 1874년에는 제6사단의 제1참모장교(Ia)로 임명되었으며, 재직 중 『루아르 강 제2군 작전』(Die Operationen der II. Armee an der Loirede, 1875년 출판)과 『레옹 감베타와 그의 군대』(Léon Gambetta und seine Armeende, 1877년 출판)를 저술했다. 특히 『레옹 감베타와 그의 군대』는 같은 해 프랑스어로 번역되었으며, 많은 역사가들이 그의 군사 문헌 중 가장 독창적인 기여로 평가한다.

골츠는 『레옹 감베타와 그의 군대』에서 세당 전투에서의 초기 승리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공화국이 국가적 의지를 동원하여 Volkskrieg|인민 전쟁de을 수개월 더 지속할 수 있었음을 강조했다. 그는 독일군 후방에서의 파리 포위전, 루아르 전역, 그리고 독일군 병력의 20%를 묶어둔 게릴라 활동 등을 예로 들며, 미래 전쟁에서 프랑스를 상대로 빠른 승리를 기대하는 것은 비현실적이라고 지적했다. 또한 1870년 9월 이후 새로운 군대를 일으키려 했던 레옹 감베타의 노력을 공개적으로 칭찬하며, 만약 감베타가 새로운 군대를 더 잘 훈련시킬 수 있었다면 프랑스의 "인민 전쟁"이 성공했을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6] 이러한 견해는 기득권 세력에게는 달갑지 않은 것이었고, 이로 인해 골츠는 잠시 연대 임무로 복귀하기도 했으나, 곧 군사 역사 부서로 돌아왔다.

1878년 골츠는 베를린 육군사관학교에서 군사사 강사로 임명되어 5년간 재직하며 소령 계급을 받았다. 그는 1883년에 『로스바흐와 예나』(Roßbach und Jenade, 1906년 『로스바흐에서 예나와 아우어슈테트까지』(Von Roßbach bis Jena und Auerstedtde)로 개정)와 『무장한 국민』(Das Volk in Waffende)을 출판했는데, 두 책 모두 빠르게 군사 고전의 반열에 올랐다. 특히 『무장한 국민』은 이후 아르헨티나 육군의 이론적 지침서가 되기도 했다. 베를린에 거주하는 동안 골츠는 군사 저널에도 많은 글을 기고했다.

골츠는 『무장한 국민』에서 『레옹 감베타와 그의 군대』에서 제시했던 아이디어를 더욱 발전시켰다. 그는 "내각 전쟁의 시대는 끝났다. 더 이상 단일 지도자의 약점이 아니고, 지배 정당이 결정적인 것이 아니라, 단지 교전국의 소모일 뿐이다."[8]라고 주장하며, 미래 전쟁은 국가의 모든 자원과 국민을 동원하는 형태, 즉 오늘날 총력전이라고 불릴 만한 양상이 될 것이라고 예견했다.[7] 따라서 그는 미래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현재의 위대한 문명 국가들이 군사 조직을 더욱 완벽하게 만들어야" 하며,[9] 이를 위해 사회가 평시에도 전례 없는 수준으로 군사화되어 "군대와 민간의 완전한 융합"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10] 골츠는 전쟁이 필요하고, 바람직하며, 불가피하다고 믿는 군국주의자이자 사회 진화론, 초국가주의자였다.[11] 그는 자연에서 "적자 생존"이 우세하듯, 국제 관계에서도 "강한" 국가가 "약한" 국가를 정복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보았다.[12] 전쟁의 참화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으로 여긴 그는 "그것[전쟁]은 국가가 가진 에너지와 자존심의 표현이다.... 영원한 평화는 영원한 죽음을 의미한다!"[13]라고 쓰기도 했다.

2. 2. 오스만 제국 군사 고문

러시아-튀르크 전쟁 (1877–1878)에서 패배한 오스만 제국술탄 압둘하미드 2세는 독일의 도움을 받아 오스만 군대를 재편성하여 러시아 제국의 남하를 막고자 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콜마르 폰 데어 골츠 남작이 1883년 오스만 제국에 파견되었다. 그는 이후 12년 동안 오스만 군대의 개혁 작업에 헌신했으며, 이 경험은 그의 여러 저술 활동에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

오스만 제국에 머무는 동안 골츠는 압둘하미드 2세에 대해 매우 부정적인 견해를 가졌다. 그는 "아버지께서 술탄 하미드의 충성에 대한 보상으로 급여가 좋은 부서를 맡으시고, 좋은 삶을 마음껏 누리시는 '이스탄불 에펜디'는 생존을 위한 투쟁을 알지 못했고, 전장에서 훌륭한 지도자가 될 수 없었습니다. 술탄 압뒬하미드와 현재 집권 계급이 계속 지휘권을 잡는 한, 터키를 구원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라고 쓰며 술탄과 당시 집권 계급이 군대를 효과적으로 지휘할 능력이 부족하며, 이들이 권력을 유지하는 한 터키(오스만 제국)의 미래는 불투명하다고 평가했다.[14] 그럼에도 불구하고 골츠는 군사 학교의 교육 기간을 연장하고 참모 과정에 새로운 교과 과정을 도입하는 등 실질적인 개혁을 추진했다.[15] 1883년부터 1895년까지 그는 훗날 '골츠 세대'로 불리게 될 오스만 장교들을 집중적으로 훈련시켰고, 이들은 이후 오스만 군사와 정치 분야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16]

골츠는 유창한 터키어를 구사했으며, 생도들에게 '아버지와 같은 존재'로 여겨질 만큼 깊은 존경을 받았다. 생도들은 그를 '영감'으로 여기며 따랐고,[16] 특히 그가 강조한 '국민군' 철학 강의는 제자들에게 큰 자부심과 동기 부여가 되었다.[16] 결과적으로 골츠의 '국민군' 사상은 독일군보다 오히려 오스만 군대에서 전쟁에 대한 이해의 기초로 더 깊이 받아들여졌다.[17] 오스만 제국에서의 공로를 인정받아 그는 파샤라는 칭호를 수여받았고(이는 비무슬림에게는 매우 이례적인 영예였다), 1895년 독일로 돌아가기 직전에는 무쉬르(야전 원수)로 임명되었다. 그의 군 개혁 노력은 그리스-터키 전쟁 (1897)에서 결실을 보았다. 당시 오스만 군대는 그리스군을 압도하며 진격했고, 러시아 제국니콜라이 2세 황제가 아나톨리아 동부 공격을 위협하며 개입한 후에야 테르모필레 앞에서 진격을 멈출 정도였다.

1895년 독일로 돌아온 후에도 골츠는 오스만 제국의 제자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지속적으로 조언을 제공했다.[18] 1899년 제자 중 한 명인 페르테프 베이 대령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터키의 모든 희망은 젊은이, 즉 당신이 속한 세대에 달려 있으며, 그 세대가 정점에 도달하면 나라를 구할 수 있습니다."라고 격려했다.[19]

골츠는 평범한 터키 병사들의 강인함, 용기, 그리고 고통을 감내하는 인내심에 대해 깊은 존경심을 표했다.[20] 반면, 당시 독일의 젊은이들에 대해서는 쾌락주의, 도시화, 산업화 등으로 인해 나약해지고 있다며 비판적인 시각을 보였다.[21] 그는 20세기 초 마케도니아 문제에 대해 오스만 제국의 입장을 적극적으로 옹호했으며, 오스만이 마케도니아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다.[21] 또한 제자들에게 내부 마케도니아 혁명 기구를 지원하는 불가리아를 응징하기 위해 침공할 것을 종종 촉구하기도 했다.[21] 골츠는 영국에 대해 강한 적대감을 가지고 있었으며, 20세기에는 세계 패권을 둘러싼 영국과 독일 간의 전쟁이 불가피하다고 예측했다.[21] 그는 세계가 영국과 독일 제국이 공유하기에는 너무 좁아 어느 한쪽이 사라져야 한다고 생각했다.[21] 1899년부터 골츠는 오스만 제자들에게 수에즈 운하를 점령하기 위한 이집트 침공 계획과 인도 침공의 서곡으로 페르시아 침공 계획을 세우도록 요청했다.[22] 골츠는 또한 유럽의 지배 시대가 20세기에 끝나갈 것이라고 믿었으며, 미국, 일본, 그리고 결국 중국과 같은 새로운 강국의 부상을 지적했다.[23] 골츠는 러일 전쟁에서 일본의 승리에 깊은 인상을 받았고, 전쟁에서 궁극적으로 승리하려는 의지가 차이를 만들고, 더 강한 의지를 가진 쪽이 항상 승리한다는 그의 이론을 확인하는 것으로 보았다.[23] 자신의 정부가 내세운 아시아계 혐오적인 "황화론" 선전과는 대조적으로 골츠는 아시아인들을 상당히 존경했고, 1905년 페르테프에게 "동방이 깨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일단 깨어나면 다시 잠들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썼다.[24] 이는 독일 정부의 견해가 아니라 자신의 견해임을 강조하면서 골츠는 언젠가 미래에 일본인, 중국인, 몽골인과 같은 "황인종"과 미국과 영국과 같은 "앵글로색슨" 강대국 간의 전쟁이 시작될 것이라고 추측했다.[24] 골츠는 독일과 오스만 제국 모두 이 전쟁에 무관심할 수 없으며, 독일은 "동아시아의 떠오르는 민족"을 이해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고 주장했다.[24] 골츠는 페르테프에게 보낸 편지를 "우리가 앞으로 동방에서 더 많은 일을 하게 될 것이기 때문에, 그들에게 자연이 부여한 특별한 힘을 배우는 것이 현명할 것입니다."라고 결론지었다.[24]

1908년의 청년 투르크 혁명을 골츠는 환영했는데, 이는 혁명을 이끈 장교의 대부분이 그가 직접 훈련시킨 사람들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놀라운 일이 아니다.[25] 골츠는 1908년의 이 혁명에 대해 "1908년의 위대한 혁명은...청년 투르크, 특히 젊은 장교들의 작품입니다. 그들 대부분은 30대 초반 또는 그보다 더 젊었습니다...그들은 조국의 구원자였습니다."라고 썼다.[26]

골츠의 혁명 칭찬 기사에 대한 응답으로 한 연합주의자 알리 푸아드 소령은 그의 글을 모든 병사가 읽고 지침으로 삼아야 한다며 존경하는 스승의 조언을 따를 것을 확신한다고 화답했다.[25] 골츠는 "오랜 친구"로부터의 애정에 매우 기뻐하며 기꺼이 조언을 해 줄 것이라고 답했다.[25]

1908년 7월 24일 기사에서 골츠는 서방에서 흔히 제기하는 오스만 당국이 마케도니아의 기독교인을 억압하고 체계적인 인권 침해를 저질렀다는 비난을 부인했다.[25] 골츠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방 사람들이 터키 정부에 대해 쓰는 내용은 정직하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그들 자신의 국민들에게 끔찍한 경험을 한 그리스인, 불가리아인, 세르비아인들이 터키의 보호를 요청합니다. 그들은 터키인들이 관대함과 연민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압니다. 그들은 잊고 용서합니다. 약자에게 연민을 베푸는 것은 그들의 국가 전통의 일부이며 그들은 그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라고 썼다.[25] 골츠는 기독교인에 대한 광범위한 인권 침해 혐의를 부인하며 "현재, 그곳의 오스만 행정부는 생각보다 훨씬 좋습니다. 그곳의 오스만 총독, 장군이나 민간인 직원들은 젊고 건강하며 지식이 풍부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혼자 내버려 둔다면, 그들은 평화를 완벽하게 보호할 수 있습니다."라고 썼다.[25] 어쨌든, 골츠는 유럽인들이 "마케도니아에서 다수를 차지하는 터키인, 즉 그 나라의 진짜 주인을 결코 생각하지 않는다...1887년부터 제 지휘 아래 오스만 참모 장교들은 오스만 발칸 반도의 지도를 준비했고, 슬라브와 그리스 마을 외에도 다른 지도에 표시되지 않은 많은 터키 마을을 발견했습니다. 요컨대, 터키인들은 마케도니아에 있을 큰 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라고 주장했다.[27] 골츠는 통일진보위원회의 제자들에게 "부당함에 시달리지 않도록 강해지십시오."라고 조언했다.[28] 1910년 골츠는 페르테프에게 "젊은이들에게 애국심과 군인다운 정신을 불어넣고, 터키의 명성과 위대함에 기쁨을 느끼게 하며, 동시에 군사 직업을 준비하는 건강한 신체 훈련을 제공할" 준 군사 청소년 단체를 만들 것을 조언했다.[29]

골츠는 또한 청소년 교육의 목적은 "애국심, 조국에 대한 사랑, 군인다운 덕목 형성, 신체 강화이며, 젊은 세대의 기술적 준비는 덜 중요하다"라고 덧붙였다.[30]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골츠는 다시 오스만 제국에 파견되어 군사 고문으로서 술탄의 최고 통수부에 취임했다. 1915년 오스만 제국 육군 제1군 사령관으로서 메소포타미아 작전을 지휘 통솔했으며, 이듬해 1916년 바그다드에서 사망했다. 공식적인 사인은 발진티푸스였으나, 청년 투르크당에 의한 암살이라는 설도 있다.

2. 3. 독일 귀국 및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골츠 원수


1896년 오스만 제국에서의 임무를 마치고 독일로 귀국한 뒤에는 사단장을 역임했으며, 1911년에는 원수 계급으로 승진하며 퇴역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골츠는 현역으로 다시 소환되어 독일 제국 점령 하의 벨기에 군정 총독으로 임명되었다.[31] 그는 이 직위에서 독일 점령에 대한 벨기에의 저항, 특히 저격 행위나 철도 및 전신선 파괴 등에 대해 가혹하게 대처했다. 마틴 길버트의 저서 《제1차 세계 대전》에 따르면, 1914년 9월 초 골츠는 "적대 행위에 대한 처벌은 유죄인 자뿐만 아니라 무고한 자에게도 적용되는 것이 전쟁의 엄중한 필요성이다"라고 선언했다. 같은 해 10월 5일에는 "앞으로 철도 및 전신선이 파괴된 장소 인근의 마을은 (유죄 여부와 관계없이) 가차 없이 처벌받을 것이다. 이를 위해 공격 위협이 있는 철도 노선 근처 모든 마을에서 인질을 잡았으며, 철도, 전신 또는 전화선을 파괴하려는 첫 시도가 있으면 즉시 총살될 것"이라는 명령을 내리며 강경한 입장을 분명히 했다.

골츠의 이러한 벨기에에서의 통치 방식은 훗날 아돌프 히틀러에 의해 긍정적으로 평가받기도 했다. 히틀러는 1941년 9월, 동유럽에서 자행된 나치의 잔혹 행위를 언급하며 골츠가 벨기에에서 취했던 조치를 다음과 같이 인용했다.

"구 제국은 이미 점령 지역에서 단호하게 행동하는 법을 알고 있었다. 벨기에에서 철도에 대한 사보타주 시도는 콘트 폰 데어 골츠 백작에 의해 처벌받았다. 그는 모든 시장을 총살하고, 남자들을 투옥하고, 여자와 아이들을 대피시킨 후, 수 킬로미터 반경 내의 모든 마을을 불태웠다."[32]

벨기에 군정 총독 이후, 골츠는 다시 오스만 제국으로 파견되어 술탄의 최고 군사 고문 역할을 맡았다. 1915년에는 오스만 제국 육군 제1군 사령관으로서 메소포타미아 작전을 지휘했으며, 이듬해인 1916년 바그다드에서 사망했다. 공식적인 사인은 발진티푸스로 알려져 있으나, 일각에서는 청년 투르크당에 의한 암살이라는 설도 제기된다.

3. 군사 사상

골츠는 당대의 주요 군사 이론가였던 클라우제비츠조미니의 사상을 모두 받아들여 자신만의 군사 사상을 발전시켰다. 그는 전쟁의 보편적 원칙을 인정하면서도 마찰이나 우연 등 현실적 요인으로 인해 원칙 적용이 어려울 수 있음을 인지했다. 특히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에 나타난 방어 우위론에 반론을 제기하며, 공격이야말로 더 우월한 전투 방식이라고 주장했다.

3. 1. 무장한 국민

골츠는 당대의 주요 군사 사상가였던 클라우제비츠조미니의 이론을 모두 받아들여 자신만의 군사 사상을 정립하고자 했다. 그는 전쟁에 보편적인 원칙이 존재한다는 조미니의 주장을 인정하면서도, 실제 전쟁에서는 클라우제비츠가 강조한 마찰이나 우연과 같은 예측 불가능한 요소들 때문에 이러한 원칙을 적용하기 어렵다고 보았다. 이를 바탕으로 골츠는 두 학파의 견해를 절충하고 통합하려는 시도를 했다.

특히 골츠는 클라우제비츠의 대표 저서인 『전쟁론』에서 제시된 "방어는 공격보다 강력한 전투 형식이다"라는 명제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다. 그는 오히려 공격이야말로 전쟁에서 가장 효과적이고 우월한 행동 방식이라고 주장했으며, 만약 클라우제비츠가 『전쟁론』을 최종적으로 완성했다면 방어의 우위에 대한 내용도 수정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공격 중심 사상은 이후 그의 군사 전략 구상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4. 논란

(내용 없음)

4. 1. 벨기에 민간인 학살 방조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골츠는 독일 제국군에 소환되어 벨기에 군정 장관으로 임명되었다.[31] 그는 이 직위에서 독일 점령에 대한 벨기에 저항, 특히 저격 행위와 철도 및 전신선 파괴에 대해 가차 없이 대처했다. 마틴 길버트의 저서 《제1차 세계 대전》에 따르면, 1914년 9월 초 새로 임명된 골츠는 "적대 행위에 대한 처벌은 유죄인 자뿐만 아니라 무고한 자에게도 적용되는 것이 전쟁의 엄중한 필요성이다"라고 선언하며 민간인에 대한 무차별적 보복을 정당화했다.

1914년 10월 5일, 그는 다음과 같은 명령을 내리며 더욱 분명하게 입장을 밝혔다. "앞으로 철도 및 전신선이 파괴된 장소 인근의 마을은 (해당 행위에 대한 유죄 여부와 관계없이) 가차 없이 처벌받을 것이다. 이를 위해 그러한 공격의 위협을 받는 철도 노선 근처의 모든 마을에서 인질을 잡았다. 철도, 전신 또는 전화선을 파괴하려는 첫 번째 시도가 있으면 즉시 총살될 것이다." 이러한 조치는 벨기에 민간인들에게 큰 고통을 안겨주었다.

골츠의 이러한 잔혹한 통치 방식은 훗날 아돌프 히틀러에 의해 긍정적으로 평가받았다. 히틀러는 1941년 9월, 나치가 동유럽에서 자행한 만행을 정당화하면서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골츠가 벨기에에서 벌인 행위와 연결시켰다. 히틀러는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 구 제국은 이미 점령 지역에서 단호하게 행동하는 법을 알고 있었다. 벨기에에서 철도에 대한 사보타주 시도는 콜마르 폰 데어 골츠 백작에 의해 처벌받았다. 그는 모든 시장을 총살하고, 남자들을 투옥하고, 여자와 아이들을 대피시킨 후, 수 킬로미터 반경 내의 모든 마을을 불태웠다.[32]

이는 골츠의 행위가 후대 독재 정권의 잔혹 행위에 영향을 미쳤음을 시사한다.

5. 저서

1870년대부터 제1차 세계 대전까지 콜마르 폰 데어 골츠 남작의 저서는 클라우제비츠보다 영국 및 미국의 군사 지도자들에게 더 널리 읽혔다. 그는 수많은 군사 정기 간행물에 기고했으며, 《전쟁 수행》(1895, 이후 《전쟁과 군대 지휘》로 개칭), 《테살리아 전쟁》(1898), 《마케도니아 여행》(1894), 《아나톨리아 기행》(1896), 《예나에서 프로이센 아일라우까지》(1907) 등을 포함한 다수의 저서를 남겼다. 또한 콘스탄티노플 주변 지도 및 설명 등도 제작했다.

그의 주요 저서는 다음과 같다.

주요 저서 목록
연도원제한국어 번역 제목출판 장소
1873Die Operationen der II. Armee bis zur Capitulation von Metzde1870-71년 전역. 제2군 작전베를린
1877Angelinede안젤린슈투트가르트
1877Léon Gambetta und seine Armeende레옹 감베타와 그의 군대베를린
1883Roßbach und Jenade로스바흐와 예나. 18세기에서 19세기로 넘어가는 시대의 프로이센 군대의 상황과 정신 생활에 대한 연구베를린
1883Das Volk in Waffende무장한 민중, 우리 시대의 군사 및 전쟁 수행에 관한 책베를린
1894Ein Ausflug nach Macedoniende마케도니아로의 소풍 (마케도니아 여행)베를린
1895Kriegführung. Kurze Lehre ihrer wichtigsten Grundsätze und Formende전쟁 수행. 주요 원칙과 형태에 대한 간략한 가르침 (《전쟁의 수행》)베를린
1896Anatolische Ausflügede아나톨리아 여행베를린
1897Stärke und Schwäche des türkischen Reichesde터키 제국의 강점과 약점 (기고문)도이체 룬트샤우
1898테살리아 전쟁
1901Krieg- und Heerführungde전쟁과 군사 지도 (《전쟁 수행》 개정판)베를린
1906Von Roßbach bis Jena und Auerstedtde로스바흐에서 예나와 아우어슈테트까지; 프로이센 군대의 역사에 대한 기여베를린
1907Von Jena bis Pr. Eylaude예나에서 프로이센 아일라우까지, 옛 프로이센 군대의 수치와 명예 회복베를린
1910–1912Kriegsgeschichte Deutschlands im neunzehnten Jahrhundertde19세기의 독일 전쟁사베를린
1911Jung-Deutschlandde젊은 독일; 청소년 관리 문제에 대한 기여베를린
19131813; Blücher und Bonapartede1813; 블뤼허와 보나파르트슈투트가르트, 베를린
1929Denkwürdigkeitende회고록 (프리드리히 폰 데어 골츠와 볼프강 푀르스터 편집)베를린 (사후 출판)


참조

[1] German title Freiherr
[2] Google Maps Google Maps https://maps.google.[...]
[3] 서적 Der Kreis Pr. Eylau Verden/Aller 1983
[4] 간행물 1957
[5] 간행물 1957
[6] 서적 The Birth of Modern Turkey The Ottoman Military and the March to World I I.B. Tauris
[7] 서적 The Birth of Modern Turkey The Ottoman Military and the March to World I I.B. Tauris
[8] 서적 The Birth of Modern Turkey The Ottoman Military and the March to World I I.B. Tauris
[9] 서적 The Birth of Modern Turkey The Ottoman Military and the March to World I I.B. Tauris
[10] 서적 The Birth of Modern Turkey The Ottoman Military and the March to World I I.B. Tauris
[11] 서적 The Birth of Modern Turkey The Ottoman Military and the March to World I I.B. Tauris
[12] 서적 The Birth of Modern Turkey The Ottoman Military and the March to World I I.B. Tauris
[13] 서적 The Birth of Modern Turkey The Ottoman Military and the March to World I I.B. Tauris
[14] 서적 The Birth of Modern Turkey The Ottoman Military and the March to World I I.B. Tauris
[15] 서적 The Birth of Modern Turkey The Ottoman Military and the March to World I I.B. Tauris
[16] 서적 The Birth of Modern Turkey The Ottoman Military and the March to World I I.B. Tauris
[17] 서적 The Birth of Modern Turkey The Ottoman Military and the March to World I I.B. Tauris
[18] 서적 The Birth of Modern Turkey The Ottoman Military and the March to World I I.B. Tauris
[19] 서적 The Birth of Modern Turkey The Ottoman Military and the March to World I I.B. Tauris
[20] 서적 The Birth of Modern Turkey The Ottoman Military and the March to World I I.B. Tauris
[21] 서적 The Birth of Modern Turkey The Ottoman Military and the March to World I I.B. Tauris
[22] 서적 The Birth of Modern Turkey The Ottoman Military and the March to World I I.B. Tauris
[23] 서적 The Birth of Modern Turkey The Ottoman Military and the March to World I I.B. Tauris
[24] 서적 The Birth of Modern Turkey The Ottoman Military and the March to World I I.B. Tauris
[25] 서적 The Birth of Modern Turkey The Ottoman Military and the March to World I I.B. Tauris
[26] 서적 The Birth of Modern Turkey The Ottoman Military and the March to World I I.B. Tauris
[27] 서적 The Birth of Modern Turkey The Ottoman Military and the March to World I I.B. Tauris
[28] 서적 The Birth of Modern Turkey The Ottoman Military and the March to World I I.B. Tauris
[29] 서적 The Birth of Modern Turkey The Ottoman Military and the March to World I I.B. Tauris
[30] 서적 The Birth of Modern Turkey The Ottoman Military and the March to World I I.B. Tauris
[31] EB1922
[32] 서적 Hitler's Secret Conversations Farrar, Straus and Young
[33] 간행물 2005
[34] 간행물 2005
[35] 웹사이트 Goltz-Pascha, Colmar Freiherr von der – Deutsche Biographie https://www.deutsche[...] 2021-07-13
[36] 서적 The First Iraq War: 1914-1918, Britain's Mesopotamian Campaign Enigma Books 2009
[37] 웹사이트 Colmar Freiherr von der Goltz http://prussianmachi[...] 2014-01-05
[38] 간행물 Königlich Preussische Ordensliste https://babel.hathit[...] Gedruckt in der Reichsdruckerei 1886
[39] 간행물 Königlich Preussische Ordensliste (supp.) Gedruckt in der Reichsdruckerei 1886
[40] 간행물 Königlich Preussische Ordensliste (supp.) Gedruckt in der Reichsdruckerei 1895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