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르트 슈투덴트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쿠르트 슈투덴트는 독일의 군인으로, 제1차 세계 대전과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다. 그는 1913년 조종사 자격을 취득하고 제1차 세계 대전에서 공군으로 복무했으며, 전간기에는 공수부대 창설에 기여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낙하산 부대를 지휘하여 노르웨이, 덴마크, 네덜란드 침공 작전에 참여했으며, 헤이그 전투와 에벤에마엘 요새 기습 작전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또한 크레타 전투와 무솔리니 구출 작전에도 참여했다. 종전 후 전쟁 범죄 혐의로 재판을 받았으며, 5년형을 선고받았지만 건강상의 이유로 조기 석방되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나치 독일의 4성장군 - 상급대장
상급대장은 독일어권 국가에서 사용된 군대 계급으로, 현대적인 의미의 대장에 해당하며 독일 제국군, 바이마르 공화국 국방군, 나치 독일 국방군, 동독 국가인민군 등에서 운용되었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서는 야전 원수 다음가는 계급이었다. - 나치 독일의 4성장군 - 독일 국방군
독일 국방군은 1935년 아돌프 히틀러에 의해 창설되어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주요 역할을 수행했으나, 전쟁 범죄 연루 및 패전 이후 1946년 해산되었다. - 독일 국방군 공군 상급대장 - 알렉산더 뢰어
알렉산더 뢰어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출신 나치 독일의 항공대장이었으나,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폴란드와 유고슬라비아 폭격 지휘로 전쟁 범죄자가 되어 유고슬라비아에서 사형당했다. - 독일 국방군 공군 상급대장 - 한스 예쇼네크
한스 예쇼네크는 독일 군인으로, 제1차 세계 대전과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여 제2차 세계 대전 중 독일 공군 참모총장으로서 주요 작전을 지도했으나 전략적 판단에 대한 비판 속에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쿠르트 슈투덴트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이름 | 쿠르트 슈투덴트 |
출생일 | 1890년 5월 12일 |
사망일 | 1978년 7월 1일 (향년 88세) |
출생지 | 독일 제국 비르크홀츠 (현재 폴란드 루부시주 보루프) |
사망지 | 서독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 렘고 |
![]() | |
별명 | |
별명 | 강하 엽병의 아버지 |
소속 | |
소속 | 독일 제국 (1910년~1918년) 바이마르 공화국 (1918년~1933년) 나치 독일 (1933년~1945년) |
군사 경력 | |
군종 | 프로이센 육군 국방군 육군 독일 공군 |
복무 기간 | 1910년~1945년 |
최종 계급 | 상급대장 |
지휘 | 제7 항공 사단 제11 항공 군단 제1 강하군 |
주요 전투 | |
주요 전투 | 제1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 |
수상 | |
수상 | 백엽 기사철십자 훈장 |
전범 재판 | |
재판 시작일 | 1947년 5월 |
피해자 | 크레타 민간인 연합군 전쟁 포로 |
범죄 발생일 | 1941년 5월 |
범죄 발생 국가 | 그리스 |
범죄 발생 지역 | 크레타 |
죄목 | 전쟁 범죄 |
형량 | 5년 징역형 |
석방 | 1948년 |
기타 | |
훈장 | 호엔촐레른 왕가 훈장 |
2. 초기 생애 및 경력
작센안할트주 출신으로, 11세에 군사 학교에 입학했다. 1910년 프로이센 육군에 사관후보생으로 입대하여 군 경력을 시작했으며, 1913년에는 비행기 조종 면허를 취득했다. 이후 제1차 세계 대전과 전간기를 거치며 독일군 항공 분야에서 경력을 쌓아 나갔다.
2. 1. 제1차 세계 대전
슈투덴트는 1910년 프로이센 육군 소위(Fähnrich|페른리히deu)로 입대하여 1911년 3월 중위(Leutnant|로이트난트deu)로 임관되었다. 그는 1913년 조종사 자격을 취득하고 제1차 세계 대전 중 복무했다.1916년 7월, 슈투덴트는 첫 공중전 승리를 거두며 폭커의 재앙의 창립 멤버 중 한 명이 되었다. 그는 적기인 뉴포트 11 1324호기를 독일군 진영 뒤편에 불시착하게 만들었다.[1] 이후 서부 전선에서 제3군의 공중 부대에서 복무했으며, 1916년 10월 5일부터 1917년 5월 2일 부상을 입을 때까지 전투비행대 제9중대(''Jasta 9'')를 지휘했다. 그는 1916년부터 1917년까지 프랑스 항공기 6대를 격추했으며, 그중 2대는 부상 이후에 격추한 기록이다. 1918년 3월 14일 ''Jasta 9''를 떠났고,[2] 같은 해 대위로 진급했다.
2. 2. 전간기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슈투덴트는 군사 연구 개발 분야에 배치되었다. 당시 베르사유 조약은 독일의 항공기 보유를 금지했지만, 활공기(글라이더)는 제재 대상이 아니었기에 그는 1922년부터 1928년까지 육군 장비국에서 항공 기술 개발에 참여하며 군용 활공기 개발에 관여했다. 또한 소련 적군 공군의 군사 훈련을 참관하면서 공수 작전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접했다.1933년 아돌프 히틀러가 정권을 장악한 후, 독일은 비밀리에 공군(Luftwaffe) 재건을 추진했다. 슈투덴트는 육군에서 공군으로 소속을 옮겨 교육 부문에 속했으며, 항공학교 감찰관을 역임했다. 이후 헤르만 괴링에 의해 공군 훈련학교의 책임자로 임명되었다.
1938년 4월 1일, 제3항공사단장에 임명됨과 동시에 소장으로 진급했다. 같은 해 여름, 그는 독일 최초의 낙하산 부대 편성을 명령받았고, 7월에는 공수 및 공중 강하 부대의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그해 가을, 독일 최초의 공수사단인 제7 공군 사단(7. Flieger-Division)이 창설되었고, 9월에 슈투덴트가 초대 사단장으로 취임했다. 이는 이후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군 공수부대가 수행할 역할의 기반을 마련한 것이었다.
3. 제2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이 1939년 9월 폴란드 침공으로 시작된 후, 쿠르트 슈투덴트가 이끄는 독일 낙하산부대(Fallschirmjäger)는 본격적으로 활동했다. 이들은 1940년 4월 베저 연습 작전 당시 덴마크와 노르웨이 침공에서 처음으로 실전에 투입되어, 스토르스트룀 다리와 올보르 공군기지, 오슬로 인근 비행장 등을 성공적으로 점령하는 데 기여했다.
1940년 5월 서부 전선에서는 역사상 최초의 대규모 공중 강습 작전인 헤이그 전투를 지휘했으나, 네덜란드군의 격렬한 저항으로 상당한 손실을 입었다. 같은 시기 벨기에의 에벤에마엘 요새를 소수의 병력으로 기습 점령하는 데 성공하여 철십자훈장 기사십자장을 받았다. 로테르담 전투 중에는 독일군의 오인 사격으로 머리에 중상을 입기도 했다.
1941년 1월, 새로 창설된 공중 강습 부대 사령부인 XI. Fliegerkorpsde의 사령관이 되었고, 같은 해 5월에는 크레타 전투(메르쿠리 작전)를 지휘했다. 이 전투는 독일 낙하산부대의 가장 큰 승리로 기록되었지만, 예상치 못한 현지 주민들의 저항과 연합군의 방어로 막대한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로 인해 히틀러는 이후 대규모 공수 작전을 금지하게 되었다. 슈투덴트는 크레타 점령 후 임시 사령관으로서 헤르만 괴링의 명령에 따라 콘도마리 학살 등 민간인에 대한 보복 작전을 지시하여 전쟁범죄에 연루되었다.[10]
1943년에는 이탈리아 독재자 베니토 무솔리니를 구출하는 그란 사소 기습 작전(오크 작전)의 계획을 지시하여 성공시켰고, 이 공로로 철십자훈장 기사십자장 참엽을 받았다.
전쟁 후반기에는 이탈리아와 프랑스에서 활동했다. 1944년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후 독일 제1 낙하산군을 지휘했으며, 연합군의 마켓 가든 작전을 저지하는 데 참여했다. 1945년 초 동부 전선에 잠시 배치되었다가, 비스툴라 집단군 사령관으로 임명되기 직전인 4월 말 슐레스비히홀슈타인에서 영국군에게 포로가 되었다.
3. 1. 초기 작전
제2차 세계 대전의 시작을 알린 1939년 9월 폴란드 침공에는 낙하산부대(Fallschirmjäger)가 직접 참여하지 않았다. 슈투덴트는 1940년 1월 1일 중장으로 진급했다.낙하산부대는 1940년 4월 베저 연습 작전 당시 덴마크와 노르웨이 침공에서 처음으로 실전에 투입되었다. 덴마크에서는 소규모 부대가 마스네되 섬에 낙하하여 팔스터와 셸란을 잇는 스토르스트룀 다리를 장악했으며, 독일 공군의 노르웨이 작전에 중요했던 올보르 공군기지에도 낙하했다. 노르웨이에서는 낙하산부대 1개 중대가 방어가 허술했던 오슬로 외곽의 포르네부 공항에 낙하했다. 1940년 4월 9일 오전과 이른 오후 동안 독일군은 공수를 통해 수도 오슬로를 장악하기에 충분한 증원 병력을 투입했지만, 노르웨이 정부는 이미 수도를 벗어나 피신한 상태였다.

1940년 5월, 나치 독일의 프랑스 침공(서부 전격전)이 시작되면서 슈투덴트의 부대는 네덜란드 침공과 벨기에 침공에 참여했다. 낙하산부대의 첫 번째 주요 작전이자 역사상 최초의 대규모 공중 강습 작전은 5월 10일 헤이그 전투였다. 독일 낙하산부대는 헤이그 인근의 세 비행장에 착륙했으나, 이 중 이펜뷔르흐 비행장에서는 융커스 Ju 52 수송기로 도착한 첫 증원 병력이 네덜란드군의 대공포 사격과 격렬한 저항으로 큰 피해를 입고 격퇴되었다. 나머지 두 비행장(오켄뷔르흐, 팔켄뷔르흐)도 네덜란드군에 의해 탈환되었다. 동시에 소규모 낙하산부대가 네덜란드 중심부로 향하는 주요 다리들을 점령하여 제9 기갑사단의 진격로를 확보했다. 이 작전으로 네덜란드군의 방어는 하루 만에 어려워졌지만, 독일군은 수송기에 상당한 손실을 입었으며, 헤이그 인근에서 포로가 된 독일 Luftlandekorpsde 소속 정예 병력 1,200명은 네덜란드가 항복하기 직전 영국으로 이송되었다.[3][4][5][6][7]
같은 날인 1940년 5월 10일, 낙하산부대는 당시 세계 최대 규모의 요새로 알려진 벨기에의 에벤에마엘 요새를 성공적으로 기습했다. 1,200명의 벨기에군이 주둔한 이 요새를 불과 85명의 낙하산부대원이 몇 시간 만에 점령했다.[8] 이 성공적인 작전은 독일 B 집단군의 벨기에 침공을 용이하게 만들었다.
로테르담 전투(1940년 5월 10일~14일) 중 슈투덴트는 독일군의 오인 사격으로 머리에 총상을 입어 중상을 입었다. 그의 부상은 5월 14일 로테르담 폭격과 이후 네덜란드의 항복으로 이어졌다.
네덜란드와 벨기에 점령 작전에서 슈투덴트가 훈련시킨 낙하산부대가 다리와 국경 요새 점령에 크게 기여한 공로로, 슈투덴트는 1940년 5월 12일 철십자훈장 기사십자장을 수여받았고, 약 2주 후에는 항공대장(General der Fliegerde, 이후 공수대장(General der Fallschirmtruppede)으로 개칭)으로 진급했다.
3. 2. 네덜란드 및 벨기에 침공
1940년 1월 1일 중장으로 진급한 슈투덴트는 같은 해 5월 나치 독일의 프랑스 침공(서부 전격전)의 일환으로 자신의 낙하산부대(Fallschirmjäger)를 이끌고 네덜란드와 벨기에 침공에 참여했다.1940년 5월 10일, 슈투덴트는 헤이그 전투에서 독일 낙하산부대를 지휘하며 역사상 최초의 대규모 공중 강습 작전을 수행했다. 독일 낙하산부대는 헤이그 인근 세 곳의 비행장에 착륙했으나, 한 곳에서는 융커스 Ju 52 수송기로 도착한 첫 증원 병력이 네덜란드군의 격렬한 저항과 대공포 사격으로 격퇴당했으며, 나머지 두 비행장도 결국 네덜란드군에게 탈환되었다. 동시에 소규모 낙하산부대가 네덜란드 중심부로 이어지는 중요 다리들을 장악하여 제9 기갑사단의 진격로를 열었다. 이 작전으로 네덜란드의 방어는 사실상 무력화되었지만, 독일군 역시 수송기 등에서 큰 손실을 입었다. 특히 헤이그 인근에서 포로가 된 독일 정예 공수부대(Luftlandekorpsde) 1,200명은 네덜란드가 항복하기 직전 영국으로 이송되었다.[3][4][5][6][7]
같은 날인 5월 10일, 슈투덴트의 낙하산부대는 벨기에의 에벤에마엘 요새 기습 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당시 세계 최대 규모로 알려진 이 요새는 1,200명의 벨기에군이 주둔하고 있었으나,[8] 단 85명의 독일 낙하산부대원이 몇 시간 만에 요새를 점령했다. 이 성공적인 작전은 B 집단군의 벨기에 침공을 가능하게 했다.
한편, 5월 10일부터 14일까지 이어진 로테르담 전투에서 슈투덴트는 네덜란드군을 항복시키는 과정에서 거의 포로로 잡힐 뻔했으며, 독일군의 총격으로 머리에 중상을 입었는데, 일부 자료에서는 무장친위대 부대에 공격 중지를 명령하려다 유탄에 맞은 것으로 설명한다. 그의 포로 위기는 5월 14일 로테르담 폭격과 뒤이은 네덜란드의 항복으로 해소되었다.
네덜란드와 벨기에 점령 작전에서의 공로를 인정받아 슈투덴트는 5월 12일 철십자훈장 기사십자장을 수여받았고, 5월 말에는 항공대장(General der Fliegerde, 이후 공수대장(General der Fallschirmtruppede)으로 개칭)으로 진급했다.
3. 3. 크레타 전투
1941년 1월, 쿠르트 슈투덴트는 새로 창설된 독일 공중 강습 부대 사령부인 제11항공군단의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이 부대를 이끌고 1941년 5월 크레타 전투(메르쿠리 작전, Unternehmen Merkur|운터네멘 메르쿠어de)를 지휘했다. 이 작전은 영국, 그리스, 연합군이 방어하던 크레타 섬에 대한 대규모 공중 침공이었다.
메르쿠리 작전은 1941년 5월 20일에 시작되었다. 약 1만 명의 독일 낙하산병과 750명의 글라이더 부대가 강하하여 비행장을 점령하고, 이후 5,000명의 산악병이 융커스 Ju 52 수송기를 통해 착륙하는 계획이었다. 아돌프 히틀러는 크레타 섬이 루마니아의 유전 지대를 위협하는 연합군 폭격기 기지가 될 것을 우려하여 이 작전을 승인했다. 그러나 당시 크레타 섬에는 42,640명의 연합군 병력(그중 1만 명은 그리스군)이 주둔하고 있었고, 현지 주민들의 강력한 지원을 받고 있었다.
독일 군사 정보부인 아브베어(Abwehr)는 크레타 주민들이 강한 공화주의 정서와 반왕정 감정 때문에 독일군을 해방자로 환영할 것이라고 잘못 예측했다.[9] 그러나 실제로는 독일군은 예상치 못한 크레타 주민들의 격렬한 저항에 부딪혔다. 일부 독일 낙하산병들은 칼이나 곤봉 등으로 무장한 민간인들에게 살해당하기도 했다. 이에 독일군은 처음에는 놀라움을, 나중에는 분노를 느꼈다.
치열한 전투 끝에 독일군은 크레타 섬을 점령하는 데 성공했지만, Fallschirmjäger|팔schirm예거de는 막대한 사상자를 냈다. 이 전투는 독일 낙하산 부대의 가장 큰 승리로 기록되었지만, 동시에 너무나 큰 피해를 남겨 히틀러가 이후 대규모 공수 작전을 금지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1941년 5월 31일, 크레타 섬이 항복하자 슈투덴트는 섬의 임시 사령관이 되었다. 그는 헤르만 괴링의 명령에 따라 현지 주민들에 대한 잔혹한 보복 작전을 개시했다. 슈투덴트는 공격을 받는 경우에 한해 보복을 허가한다는 명령을 내렸지만, 이는 실제로는 무차별적인 마을 방화와 민간인 남성 학살로 이어졌다. 콘도마리 학살, 알리키아노스 처형, 칸다노스 파괴 등은 이러한 보복 작전의 대표적인 사례이다.[10]
3. 4. 무솔리니 구출 작전
1943년 7월 25일, 동맹국 이탈리아의 베니토 무솔리니 정권이 붕괴되자, 히틀러는 슈투덴트에게 체포되어 구금된 독재자 무솔리니를 구출하라고 명령했다. 이에 슈투덴트는 하랄트 모어스 소령에게 특수 낙하산부대를 이용한 기습 작전 계획을 지시했다. 이 작전은 그란 사소 기습 작전(Operation Oak, Unternehmen Eiche|운터네멘 아이헤de)으로 명명되었다.1943년 9월 12일, 독일 특수부대는 군용 활공기와 단거리 이착륙기를 이용하여 무솔리니가 감금된 산 정상 호텔에 착륙하여 그를 성공적으로 구출했다. 슈투덴트는 이 작전의 공로를 인정받아 철십자훈장 기사십자장 참엽을 수여받았다.
이 작전의 2단계로 연합국에 항복한 이탈리아에서 쿠데타를 일으키고 독일 측이 '배신자'로 간주한 인물들을 체포하려는 계획도 있었다. 슈투덴트는 로마 근교에 2만 명의 낙하산병을 집결시키고 이탈리아 왕족 납치까지 계획했으나, 이는 실행되지 않았다.
3. 5. 이후 활동
1944년 3월부터 11월까지 제1공수여단군(제1 낙하산군) 사령관을 지냈으며, 이후 1945년 1월까지 제2차 세계 대전 서부 전선에서 H집단군 사령관을 맡았다. 1945년 1월에는 공군 공수여단 부대 사령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종전 약 1주일 전, 비스툴라 집단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었으나, 실제로 지휘권을 인수하기 전에 슐레스비히홀슈타인에서 영국군에게 포로로 잡혀 전쟁이 끝났다.연합군에 체포된 후, 1946년 5월 영국군 군사재판에 회부되었다. 크레타 전투 당시 발생한 전쟁범죄 혐의로 징역 5년을 선고받았으나, 1948년에 석방되었다.
전후에는 독일 국방군 출신들이 모인 전우회에서 지도적인 역할을 했으며, 매년 5월 20일에 열리는 "크레타의 날" 행사에 명예 손님으로 초청받았다. 1978년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 렘고에서 88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사후 독일연방군 내에서는 그의 이름을 딴 도로나 시설이 있는 등 한때 기념의 대상이었으나, 크레타 전투 당시의 전쟁범죄 행적이 문제가 되어 1998년 가을에 관련 기념물은 모두 철거되었다.
4. 전범 재판 및 말년
1947년 5월, 슈투덴트는 크레타에서 자신의 부하들이 저지른 포로 학대 및 살인 8건과 콘도마리 학살, 알리키아노스 처형, 칸다노스 파괴 등 크레타 민간인에 대한 범죄 혐의로 재판에 회부되었다. 그는 포로와 관련된 3가지 혐의에 대해 유죄 판결을 받았지만, 뉴질랜드 제4여단 사령관인 린지 메릿 잉글리스 준장의 증언으로 민간인에 대한 범죄 혐의는 무죄를 선고받았다.[11] 슈투덴트는 징역 5년을 선고받았으나, 1948년 건강상의 이유로 조기 석방되었다.[12]
전후 슈투덴트는 독일 국방군 전우회의 지도적 위치에 있었고, 매년 5월 20일에 열리는 "크레타의 날" 행사에 명예 손님으로 초청되었다. 그는 1978년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 렘고에서 88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마지막까지 생존한 독일 공군 Generaloberst|게네랄오버스트de였다.
슈투덴트의 이름은 전후 독일연방군에서도 한때 기념 대상이 되어 그의 이름을 딴 도로나 시설이 존재했지만, 크레타섬에서의 전쟁 범죄를 고려하여 1998년 가을 모두 삭제되었다.
5. 진급 내역
계급 | 진급일 |
---|---|
소위 | 1910년 3월 3일 |
중위 | 1911년 3월 20일 |
대위 | 1915년 6월 18일 |
소령 | 1918년 6월 20일 |
중령 | 1930년 1월 1일 |
상급중령 | 1934년 1월 1일 |
대령 | 1935년 10월 1일 |
소장 | 1938년 4월 1일 |
중장 | 1940년 1월 1일 |
공군 대장 | 1940년 5월 29일 |
상급대장 | 1944년 7월 13일 |
6. 서훈 내역
참조
[1]
서적
Early German Aces of World War I
[2]
서적
Franks et al 1993
[3]
서적
Het Koninkrijk der Nederlanden in de Tweede Wereldoorlog
RIOD
1969
[4]
서적
De Nederlandse Cavalerie in de Meidagen van 1940
https://books.google[...]
Stichting Museum Nederlandse Cavalerie
1998
[5]
서적
Herleefd verleden: Strijd om Valkenburg ZH in mei 1940
https://books.google[...]
Academic Publishers Eburon
1995
[6]
서적
Het Koninkrijk der Nederlanden in de Tweede Wereldoorlog, Deel 3: Mei '40
:file:L. de Jong - H[...]
Martinus Nijhoff Publishers
1970
[7]
간행물
Netherlands Institute for Military History
Ministry of Defence (Netherlands)
[8]
서적
[9]
서적
[10]
서적
2015
[11]
서적
2013
[12]
서적
2013
[13]
서적
1998
[14]
서적
2007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