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누드 4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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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크누드 4세는 1080년부터 1086년까지 덴마크를 통치한 국왕으로, 에스트리센 가문 출신이며 스벤 2세의 아들이다. 그는 덴마크 국왕 중 최초로 기독교 세례를 받았으며, 교회의 권위를 강화하고 십일조를 징수하는 등 친교회 정책을 펼쳤다. 잉글랜드 정복을 시도했으나 실패했으며, 1086년 오덴세에서 반란군에 의해 살해당했다. 1101년 로마 가톨릭 교회에 의해 덴마크의 수호성인으로 시성되었으며, 덴마크 최초의 시성자이다. 그의 유해는 오덴세의 성 크누드 대성당에 안치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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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누드 4세 | |
---|---|
기본 정보 | |
![]() | |
칭호 | 덴마크 국왕 |
통치 기간 | 1080년–1086년 |
이전 통치자 | 하랄 3세 |
다음 통치자 | 올라프 1세 |
왕가 | 에스트리센 가문 |
배우자 | 플랑드르의 아델라 |
자녀 | 플랑드르 백작 샤를 1세 세실리아 크누츠다테르 잉에게르 크누츠다테르 |
아버지 | 스벤 2세 |
출생일 | 기원후 1042년경 |
사망일 | 1086년 7월 10일 |
사망 장소 | 오덴세, 성 알반 수도원 |
매장지 | 오덴세, 성 카누트 대성당 |
종교 | 로마 가톨릭교 |
다른 이름 |
2. 생애
크누드 4세는 에스트리센가 출신으로 스벤 2세의 아들로 태어났다. 1080년 스벤 2세의 뒤를 이어 덴마크의 국왕으로 즉위했으며, 덴마크 국왕으로는 최초로 기독교 세례를 받았다.
크누드 4세는 재위 기간 동안 왕권을 강화하고 로마 가톨릭 교회를 지지하며 덴마크에 기독교를 전파하는 데 힘썼다. 십일조 징수를 강요하여 교회의 재정적 기반을 강화하고, 달비, 오덴세, 로스킬레, 비보르, 특히 룬에 있는 교회에 많은 선물을 주었다. 1085년 5월에는 룬 대성당에 스코네, 셸란, 아마게르의 광대한 토지를 기증하고 룬 대성당 학교를 설립하기도 했다.
크누트 대왕의 후손으로서 잉글랜드 왕위를 자신의 것이라 여겼던 크누드 4세는 1085년 장인 플랑드르 백작 로베르 1세와 노르웨이의 올라프 3세의 지원을 받아 잉글랜드 침공을 계획하고 림피오르드에 함대를 소집하기도 했다. 그러나 신성 로마 제국 하인리히 4세의 위협으로 인해 슐레스비히에 발이 묶이면서 잉글랜드 정복은 성사되지 않았다.
크누드 4세는 왕권 강화를 위해 귀족을 억압하고 공유지 소유권, 난파선에서 나온 물품에 대한 권리 등을 주장하는 칙령을 발표했다. 또한 자유민, 외국 성직자, 상인을 보호하는 법률을 제정했지만, 이러한 정책은 왕권에 익숙하지 않은 신하들의 불만을 샀다.
결국 1086년 초 벤쉬셀에서 농민 반란이 일어났고, 크누드 4세는 오덴세의 성 알반 수도원으로 피신했다가 그해 7월 10일 반란군에 의해 살해당했다.[1] 연대기 작가 캔터베리의 앨노스에 따르면, 크누드 4세는 창에 옆구리를 찔려 사망했다고 한다.[10] 그의 시신은 오덴세의 성 크누드 대성당에 안치되었으며, 1101년 로마 가톨릭 교회에 의해 덴마크의 수호성인으로 추대되었다.
2. 1. 초기 생애
크누드 4세는 1042년경 에스트리센가 출신 스벤 2세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알려지지 않은 첩이었다.[1] 그는 1069년 스벤의 잉글랜드 습격에 참여하면서 처음으로 역사에 등장했다.[2] 앵글로색슨 연대기는 크누드가 1075년 잉글랜드를 상대로 한 또 다른 습격의 지도자 중 한 명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1075년 잉글랜드에서 돌아오는 길에 덴마크 함대는 플랑드르 백작령에 정박했다.[3] 잉글랜드의 윌리엄 1세에 대한 적대감 때문에 플랑드르는 덴마크의 자연스러운 동맹이었다. 시인 칼프 마나손에 따르면 셈버와 에스터에 대한 원정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고 한다.[2]
2. 2. 덴마크 왕위 계승
에스트리센가 출신 스벤 2세의 아들로 태어났다.[1] 스벤 2세가 사망하자 크누드의 형제 하랄 3세가 왕으로 선출되었고, 크누드는 스웨덴으로 망명하여 하랄 3세에 대한 반대 활동을 벌였다.[3] 1080년 4월 17일 하랄 3세가 사망하자,[4] 크누드는 그의 뒤를 이어 덴마크 왕위에 올랐다. 즉위 후 플랑드르 백작 로베르 1세의 딸 아델라와 결혼했다. 슬하에 1084년에 태어난 아들 샤를과, 그의 죽음 직전에 태어난 쌍둥이 딸 세실리아(나중에 에리크 야를과 결혼)와 잉에리드(나중에 폴케 더 패트와 결혼)를 두었다(ca. 1085/86년).[2][5] 잉에리드의 후손인 비엘보 가문은 스웨덴과 노르웨이의 왕위에 올랐으며, 크누드 4세의 혈통은 덴마크의 올라프 2세의 형태로 덴마크 왕위로 돌아왔다.2. 3. 덴마크 통치
크누드 4세는 에스트리센가 출신으로 스벤 2세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1080년 스벤 2세의 뒤를 이어 덴마크의 국왕으로 즉위했다. 크누드는 야심 차고 독실한 왕으로, 교회의 권위를 강화하고 교회 휴일 준수를 요구했다.[2] 그는 달비, 오덴세, 로스킬레, 비보르, 특히 룬에 있는 교회에 많은 선물을 주었으며,[2] 십일조 징수를 강요하여 교회의 재정적 기반을 강화했다.[1]1085년 5월, 크누드는 건설 중이던 룬 대성당에 스코네, 셸란, 아마게르의 광대한 토지를 기증하고,[6] 룬 대성당 학교를 설립했다.[2] 크누드는 주로 추방자들의 사면 대가로 땅을 모았고, 룬의 성직자들은 토지에 대한 확장된 특권을 얻어 그곳의 농민들에게 세금을 부과하고 벌금을 부과할 수 있었다. 그러나 크누드는 추방자들을 사면하고, 그의 전쟁 소집인 ''레딩''에 응하지 않은 신하에게 벌금을 부과하며, 그의 수행원의 수송을 요구하는 보편적인 왕의 권리를 유지했다.[6]
크누드는 왕권 강화를 위해 귀족을 억압하고 법 집행을 강화하는 정책을 펼쳤다.[2] 공유지 소유권, 난파선에서 나온 물품에 대한 권리, 외국인 및 혈연관계 없는 사람들의 재산을 상속할 권리를 주장하는 칙령을 발표했다. 또한, 자유민, 외국 성직자, 상인을 보호하는 법률을 제정했다.[1] 이러한 정책은 왕권에 익숙하지 않은 신하들의 불만을 야기했다.[2]
2. 4. 잉글랜드 왕위 주장과 침공 계획
크누트 대왕의 후손인 크누드 4세는 잉글랜드 왕위를 정당하게 자신의 것으로 여겼고, 윌리엄 1세를 찬탈자로 간주했다.[2] 1085년, 장인인 플랑드르 백작 로베르 1세와 노르웨이의 올라프 3세의 지원을 받아 잉글랜드 침공을 계획하고 림피오르드에 함대를 소집했다.[2]그러나 신성 로마 제국의 하인리히 4세의 잠재적 위협으로 인해 크누드는 슐레스비히에서 발이 묶였다.[2] 하인리히 4세의 적대자였던 라인펠덴의 루돌프가 덴마크로 피신했기 때문에 크누드는 하인리히 4세의 침공을 두려워했다.[2]
함대의 전사들은 대부분 수확철에 집에 가야 하는 농민들이었고, 기다림에 지쳐 크누드의 동생 올라프(후일의 덴마크의 올라프 1세)를 선출하여 자신들의 입장을 대변하게 했다. 이 일로 크누드는 올라프를 체포하여 플랑드르로 보냈다. 결국 함대는 해산되었고 농민들은 수확에 전념했다.[2]
2. 5. 죽음과 시성
벤쉬셀에서 1086년 초 농민 반란이 일어나자, 크누드 4세는 슐레스비히를 거쳐 오덴세로 피신했다.[1] 1086년 7월 10일, 크누드 4세와 그의 부하들은 오덴세의 성 알반 수도원에 피신했으나, 반란군이 교회로 들이닥쳐 제단 앞에서 크누드 4세와 그의 형제 베네딕트, 그리고 그를 따르던 17명을 살해했다.[1] 연대기 작가 캔터베리의 앨노스에 따르면, 크누드 4세는 창에 옆구리를 찔려 사망했다고 한다.[10] 그의 뒤를 이어 올라프 1세가 덴마크 왕위에 올랐다.크누드 4세는 순교했고 교회를 옹호했기 때문에 곧 성인으로 여겨지기 시작했다. 올라프 1세 통치 기간 동안 덴마크는 흉작으로 고통받았는데, 이는 크누드 4세의 신성모독적인 살해에 대한 신의 징벌로 여겨졌다. 곧 그의 무덤에서 기적이 일어났다는 보고가 있었고,[7] 올라프 1세의 통치 기간 동안 이미 그의 시성식이 추진되었다.[1]
1101년 4월 19일, 덴마크의 에릭 1세의 사절단에 설득된 교황 파스칼 2세는 발생한 "크누드 숭배"를 확인했고, 크누드 4세는 시성되었다.[6] 그는 시성된 최초의 덴마크인이었다.[1] 7월 10일은 가톨릭 교회에서 그의 축일로 기념된다. 그러나 스웨덴과 핀란드에서는 역사적으로 그의 조카의 죽음을 기리는 날인 성 크누트의 날과 부분적으로 연관되어 있다.[8][9]
1300년, 그의 유해와 그의 형제 베네딕트의 유해는 그를 기리기 위해 지어진 성 크누드 대성당에 안치되었으며, 그의 유해는 전시되어 있다.[1]
3. 유산
크누드 4세의 통치는 덴마크 역사에서 왕권 강화와 기독교 확산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의 종교 정책과 사회 개혁은 덴마크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의 시성은 덴마크 왕권에 신성한 정당성을 부여하는 데 기여했다.[1] 룬 대성당에 대한 기증 문서는 바이킹 시대 이후 덴마크 사회에 대한 귀중한 정보를 제공한다.[6]
크누드 4세는 사후 로마 가톨릭교회에 의해 덴마크의 수호성인으로 추대되었으며, 덴마크에서 인기 있는 성인은 아니었지만, 그의 성인 지위는 덴마크 군주국에 왕권신수설의 분위기를 부여했다.[12] 그의 아들 샤를은 플랑드르 백작이 되었고, 그 역시 교회에서 살해된 후 복자로 시성되었다.[13] 코펜하겐 대학교의 중세사 강사인 닐스 룬에 따르면, 크누드 4세의 실패한 잉글랜드 침공은 "바이킹 시대의 종말을 알렸다."
크누드를 살해한 반란의 원인은 알려져 있지 않지만, 로스킬레 연대기에 명시된 1085년의 ''레딩''(leding)을 위반한 농민들에게 부과된 벌금에서 비롯되었거나, 그의 강력한 십일조 정책의 결과로 추측된다.[14]
2008년, 크누드에 대한 X선 컴퓨터 단층 촬영이 실시되었는데, 이는 그가 오른손잡이였고 호리호리한 체격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또한 그의 사망 원인을 복부를 통해 천골에 가해진 자상으로 특정하여, 엘노스의 설명을 반박했다. 그는 여러 적과 싸운 것을 나타내는 부상을 입지 않았으며, 이는 그가 저항 없이 죽음을 맞이했다는 설명에 힘을 실어주는 것으로 볼 수 있다.[21]
4. 대중문화
스페인 일부 지역에서는 크누드 4세의 축일이 대마초 합법화 운동을 위한 해학적인 "공휴일"로 기념된다고 한다. 이는 그의 스페인어 이름인 ''카누토''(Canuto)를 차용한 것인데, 공교롭게도 이 단어는 대마초 담배를 뜻하기도 한다.[11][22]
5. 평가
크누드 4세의 통치는 시대에 따라 다르게 평가된다. 백성을 억압한 폭군으로 평가되기도 하고,[3] 로마 가톨릭 교회를 헌신적으로 지원하고 정의를 위해 싸운 엄격하지만 공정한 통치자로 평가되기도 한다.[3]
크누드 4세는 덴마크에서 큰 인기를 얻은 성인은 아니었지만, 그의 성인 지위는 덴마크 군주국에 신성한 정당성을 부여했다.[1] 크누드 4세를 살해한 반란의 원인은 명확하지 않지만, 로스킬레 연대기에 기록된 1085년의 군역을 어긴 농민들에게 부과된 벌금이나 그의 강력한 십일조 정책 때문으로 추정된다.[3]
룬 대성당에 대한 그의 기증 문서는 덴마크에서 가장 오래된 포괄적인 문서로, 바이킹 시대 이후 덴마크 사회에 대한 통찰력을 제공한다.[6] 이 기증은 스벤 2세의 바람대로 덴마크 룬 대교구를 설립하기 위한 목적이었을 수 있으며,[2] 이는 1104년에 달성되었다.
2008년 실시된 X선 컴퓨터 단층 촬영 결과, 크누드 4세는 오른손잡이였고 호리호리한 체격이었으며, 복부를 통해 천골에 가해진 자상으로 사망했음이 밝혀졌다. 그는 여러 적과 싸운 흔적이 없어 저항 없이 죽음을 맞이했다는 설명에 힘을 실어준다.[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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