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티안 7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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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크리스티안 7세는 1749년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태어난 덴마크와 노르웨이의 국왕이었다. 그는 정신 질환을 앓았고, 이는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정부 결정에 영향을 미쳤다. 그는 영국 공주 캐롤라인 마틸다와 결혼했지만, 결혼 생활은 불행했고, 독일 출신 의사 요한 프리드리히 슈트루엔제를 주치의로 삼아 국정을 맡겼다. 슈트루엔제는 권력을 강화하며 개혁을 추진했지만, 쿠데타로 인해 처형되었고 왕비는 유폐되었다. 크리스티안 7세는 이후 명목상의 국왕으로 남았으며, 아들 프레데리크 6세가 섭정 역할을 수행했다. 그는 1808년 뇌졸중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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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티안 7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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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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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호 | 덴마크 국왕 및 노르웨이 국왕 |
통치 기간 | 1766년 1월 14일 – 1808년 3월 13일 |
대관식 | 1767년 5월 1일 크리스티안스보르 궁전 교회 |
선임자 | 프레데리크 5세 |
후임자 | 프레데리크 6세 |
섭정 | 프레데리크 왕세자 (1772–1784) 프레데리크 왕세자 (1784–1808) |
주요 각료 | 요한 하르트비히 에른스트 폰 베른스토르프 백작 요한 프리드리히 스트루엔세 오베 회에그-굴드베르 안드레아스 페터 베른스토르프 크리스티안 귄터 폰 베른스토르프 |
배우자 | 캐롤라인 마틸다 (1766년 결혼, 1772년 이혼) |
자녀 | 프레데리크 6세 루이세 아우구스타, 슐레스비히-홀슈타인-존더부르-아우구스텐부르 공작부인 |
왕가 | 올덴부르크 가 |
아버지 | 프레데리크 5세 |
어머니 | 루이즈 |
출생일 | 1749년 1월 29일 |
출생지 | 크리스티안스보르 궁전, 코펜하겐, 덴마크 |
사망일 | 1808년 3월 13일 |
사망지 | 렌츠부르크, 홀슈타인 공국 |
매장지 | 로스킬레 대성당 |
종교 | 루터교 |
서명 | Signature of Christian VII of Denmark.svg |
2. 생애
1749년 1월 29일 코펜하겐의 크리스티안스보르 성에서 프레데리크 5세와 영국의 루이세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프레데리크 5세는 아내를 잃은 슬픔에 방탕한 생활을 했고, 의붓어머니인 브라운슈바이크의 율리아네 마리와도 사이가 좋지 않았다. 크리스티안은 부모의 무관심 속에서 가정교사 레벤틀로프 백작에게 폭력적인 대우를 받으며 자랐다.[22]
1766년 1월 14일 덴마크와 노르웨이의 국왕으로 즉위한 크리스티안 7세는 프레더릭 루이스의 유복녀이자 조지 2세의 손녀인 사촌 캐롤라인 마틸다와 결혼했다. 그러나 곧 아내에게 싫증을 느끼고 매춘부 안나 카테리네 벤타겐을 애인으로 삼아 총애했다. 이로 인해 왕비와 사이가 멀어지고 국민들의 신망도 잃었다.
크리스티안 7세는 유럽 순방 중 요한 프리드리히 슈트루엔제를 만났고, 이후 그를 주치의로 삼았다. 슈트루엔제는 왕비와 가까워지고 왕의 신임을 얻어 큰 권력을 쥐게 되었다. 크리스티안 7세는 정신 질환이 악화되어 프레데리크 5세의 아들이 아니라고 주장하기도 하고, 왜소한 체격에 대한 콤플렉스로 몸을 단련했으며, 궁궐의 창문과 가구를 부수는 등 폭력적인 성향을 보였다.[22]
1772년 의붓어머니 율리아네 마리의 주도로 쿠데타가 일어나 슈트루엔제는 처형되고 왕비는 유폐되었다. 이후 크리스티안 7세는 건강 악화로 명목상의 국왕이 되었고, 1784년까지는 율리아네 마리와 이복동생 프레데리크가, 1808년까지는 아들 프레데리크 6세가 섭정을 맡았다. 1808년 3월 13일 렌츠부르크에서 뇌졸중으로 사망하여 로스킬레 대성당에 안치되었다.
1773년 러시아 제국의 예카테리나 2세와 영지를 교환하여 올덴부르크 백국을 넘기고 홀슈타인인고토르프 공국을 덴마크령으로 합병했다.
2. 1. 탄생과 가족
1749년 1월 29일 이른 아침, 코펜하겐의 왕실 거처인 크리스티안스보르 성의 여왕 침실에서 프레데리크 5세와 그의 첫 번째 부인 영국의 루이세의 넷째이자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3] 같은 날 오후에 왕실 고해 신부 요하네스 바르톨로메우스 블루메에 의해 세례를 받았으며, 그의 돌아가신 할아버지인 크리스티안 6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4] 그의 대부모는 국왕 프레데리크 5세(아버지), 조피 마그달레네 태후 (아버지의 할머니), 루이즈 공주 (고모)와 샤를로테 아말리에 공주 (할머니의 자매)였다.[4]이전 왕위 계승자가 1747년에 유아기에 사망했기에, 새로 태어난 왕자는 태어나면서부터 왕세자였다. 당시 왕실 오페라 단체의 지휘자였던 크리스토프 빌리발트 글루크는 ''라 콘테사 데이 누미''("신들의 다툼")라는 오페라를 작곡했는데, 여기서 올림포스 신들이 그레이트 벨트 해협 강가에 모여 새 왕자를 특히 누가 보호해야 할지에 대해 논의한다.[5]
크리스티안이 태어났을 때, 그의 누나들은 조피 마그달레네 공주와 빌헬미나 카롤리네 공주였고, 1750년에는 또 다른 딸 루이즈 공주가 태어났다. 1751년, 그의 어머니 루이즈 여왕은 여섯 번째 임신 중에 27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했다.[6] 이듬해, 그의 아버지는 율리아네 마리 여공작과 결혼했고, 1753년 크리스티안의 이복 동생인 프레데리크 왕자를 낳았다.[7]


아버지 프레데리크 5세는 아내 루이세를 잃은 후 크게 상심해 방탕한 생활을 하게 되었고, 의붓어머니인 브라운슈바이크의 율리아네 마리와의 관계 또한 좋지 않았다. 부모의 무관심 속에 크리스티안은 자신의 교육을 담당했던 레벤틀로프 백작에게 폭력적인 대우를 받았다.[22]
2. 2. 어린 시절과 교육
1749년 1월 29일 이른 아침, 코펜하겐의 왕실 거처인 크리스티안보르 궁전의 여왕 침실에서 프레데리크 5세 국왕과 그의 첫 번째 부인 영국의 루이세의 넷째이자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3] 같은 날 오후에 왕실 고해 신부 요하네스 바르톨로메우스 블루메에 의해 세례를 받았으며, 그의 돌아가신 할아버지인 크리스티안 6세 국왕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4] 그의 대부모는 국왕 프레데리크 5세(아버지), 조피 마그달레네 태후 (아버지의 할머니), 루이즈 공주 (고모)와 샤를로테 아말리에 공주 (할머니의 자매)였다.[4]크리스티안이라는 이름의 이전 왕위 계승자가 1747년에 유아기에 사망했기에, 새로 태어난 왕자는 태어나면서부터 왕세자였다. 따라서 새로운 왕위 계승자의 미래에 대한 기대가 높았다. 당시 왕실 오페라 단체의 지휘자였던 크리스토프 빌리발트 글루크는 ''라 콘테사 데이 누미''("신들의 다툼")라는 오페라를 작곡했는데, 여기서 올림포스 신들이 그레이트 벨트 해협 강가에 모여 새 왕자를 특히 누가 보호해야 할지에 대해 논의한다.[5]

크리스티안이 태어났을 때, 그의 누나들은 조피 마그달레네 공주와 빌헬미나 카롤리네 공주였고, 1750년에는 또 다른 딸 루이즈 공주가 태어났다. 1751년, 크리스티안이 태어난 지 거의 3년 만에 그의 어머니 루이즈 여왕은 여섯 번째 임신 중에 27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했다.[6] 이듬해, 그의 아버지는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의 율리아네 마리 여공작과 결혼했고, 1753년 크리스티안의 이복 동생인 프레데리크 왕자를 낳았다.[7]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신 후, 왕자는 부모의 애정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 계모인 줄리아네 마리 왕비는 그에게 관심이 없었고, 자신의 친아들인 프레데리크 세습공을 더 편애했다. 방탕에 빠지기 쉽고 알코올 중독의 영향도 점점 심해지면서, 아버지 또한 수줍고 예민한 아이에게 점점 무관심해졌다. 게다가 이 아이는 간질 발작도 겪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기 역사가들은 크리스티안에게 매력적인 성격과 상당한 재능이 있었지만,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고, 잔혹한 가정교사인 크리스티안 디틀레프 레벤틀로 백작에게 체계적으로 공포에 시달리고, 심지어 매질까지 당했다고 말한다. 그는 지적인 면모를 보였고 명석한 시기를 겪기도 했지만, 심각한 정서적 문제를 겪었으며, 정신 분열증일 가능성도 있었다고 닥터 비고 크리스티안센은 그의 저서 ''크리스티안 7세의 정신 질환'' (1906)에서 주장했다.[22]
2. 3. 즉위
1766년 1월 14일, 아버지 프레데리크 5세가 오랜 병환 끝에 42세의 나이로 사망하면서, 크리스티안은 17번째 생일을 불과 몇 주 앞두고 덴마크와 노르웨이의 여섯 번째 절대 군주로 즉위했다. 같은 날 크리스티안은 크리스티안보르 궁전의 발코니에서 국왕으로 선포되었다.[22] 그의 통치는 정신 질환[8]으로 얼룩졌으며, 이는 정부 결정에 영향을 미쳤고, 그의 통치 기간 대부분 동안 크리스티안은 형식적인 국왕에 불과했다. 그의 측근 의사들은 그의 잦은 자위 행위에 특히 우려했다.[9] 그의 왕실 고문들은 왕위를 둘러싼 권력 투쟁에서 누가 이기느냐에 따라 바뀌었다.
2. 4. 결혼

1766년, 15세의 사촌 캐롤라인 마틸다 공주와 왕실 결혼을 했다. 이들은 이미 1765년에 약혼했다. 캐롤라인 마틸다의 오빠인 영국 국왕 조지 3세는 이 결혼을 걱정했지만, 신랑(크리스티안 7세)이 정신 질환을 앓고 있다는 사실은 알지 못했다. 1766년 10월 1일 런던 세인트 제임스 궁전의 왕실 예배당에서 대리 결혼이 이루어졌고, 캐롤라인 마틸다의 오빠인 요크와 올버니 공작 에드워드가 신랑을 대신했다. 코펜하겐에 도착한 후, 1766년 11월 8일 왕실 예배당에서 크리스티안보르 궁전에서 또 다른 결혼식이 거행되었다. 결혼 축하와 무도회는 한 달 동안 이어졌다. 1767년 5월 1일, 크리스티안 7세와 캐롤라인 마틸다는 크리스티안보르 궁전의 왕실 예배당에서 덴마크와 노르웨이의 국왕과 여왕으로 대관했다.[10]

결혼 생활은 불행했고, 결혼 후 크리스티안 7세는 최악의 방탕함, 특히 문란한 성생활에 빠졌다. 1767년, 궁정 여성 스토블렛-캐서린과 관계를 맺었다. 그는 결국 정신 쇠약 상태에 빠졌으며, 피해망상, 자해, 환각 등의 증상이 나타났다.[11] 국왕은 여왕에게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마지못해 그녀의 침실을 방문했다. 그의 신뢰받는 스위스 가정교사 엘리 살로몬 프랑수아 레베르딜은 국왕의 이름으로 쓰여진 연애 편지 등을 통해 결혼 생활이 임신으로 이어져 왕위 계승자를 낳도록 시도했다. 1768년 1월 28일, 캐롤라인 마틸다 여왕은 크리스티안보르 궁전에서 훗날 프레데리크 6세 국왕이 되는 아들을 낳았다.
크리스티안 7세는 프레데릭 루이스의 딸이자 사촌인 캐롤라인 마틸다와 결혼한 후, 최악의 불절제를 탐닉했는데, 특히 난잡한 유흥이 심했다. 그는 캐롤라인 마틸다 왕비를 사랑할 수 없다고 공공연히 선언했는데, "한 명의 아내를 사랑하는 것은 '구식'(unfashionable)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편집증이나 정신 분열증, 환각 등의 증상으로 보이는 광기에 빠져 있었다. 크리스티안 7세는 요한 프리드리히 스트루엔세를 기용하자 그의 꼭두각시가 되었다. 스트루엔세는 1760년대 말부터 권력을 늘려갔다. 왕에게 무시당한 고독한 왕비 캐롤라인 마틸다는 스트루엔세와 관계를 맺었다.
이 결혼으로 두 자녀가 태어났는데, 훗날 프레데리크 6세와 루이세 아우구스타 공주이다. 그러나 루이세 아우구스타는 스트루엔세의 자식이라고 믿어지며, 초상화가 그 설을 뒷받침한다.
1772년, 쿠데타가 일어나 왕과 캐롤라인 마틸다의 결혼은 해소되었다.
2. 5. 슈트루엔제
요한 프리드리히 슈트루엔제는 진보적이고 급진적인 사상을 가진 인물로, 크리스티안 7세의 주치의이자 조언자였다. 1760년대 후반부터 권력을 꾸준히 확대하여 사실상 국가의 섭정이 되었고, 광범위한 진보적 개혁을 도입했다. 그는 계몽주의 귀족 집단의 후원을 받았으며, 유능한 의사로서 왕의 건강을 어느 정도 회복시켜 총애를 얻었다.[22] 1768년 4월 5일 여행 주치의로 고용되었고, 같은 해 5월 12일 국무회의 의원 직함을 받았다. 그는 1768년 5월 6일부터 1769년 1월 12일까지 국왕의 해외 여행에 수행했다.[22]
소외되고 외로운 캐롤라인 마틸다 왕비는 슈트루엔제와 불륜 관계를 맺었다. 1770년부터 1772년까지 슈트루엔제는 사실상 국가의 섭정이었으며, 크리스티안 7세가 서명한 진보적 개혁을 도입했다.
그러나 1772년 쿠데타로 슈트루엔제는 폐위되어 체포되었고, 참수형을 당한 뒤 시신은 능지처참되었다.[22] 이러한 잔혹한 처형에 유럽 각국은 비난의 목소리를 높였다. 이후 국가는 크리스티안의 계모인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의 율리아네 마리, 그의 이복 동생 프레데릭, 그리고 덴마크 정치인 오베 호에그-굴드베르가 통치했다.
2. 6. 슈트루엔제의 몰락과 이혼
요한 프리드리히 스트루엔제는 계몽주의 사상가로, 1760년대 말부터 권력을 꾸준히 늘려 크리스티안 7세의 주치의이자 조언자가 되었다. 사실상 국가의 섭정이 된 그는 광범위한 진보적 개혁을 도입했다. 스트루엔제는 코펜하겐 궁정에서 거부된 계몽주의 귀족 집단의 후원을 받았다. 그는 유능한 의사였으며,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지역을 방문하여 국왕의 건강을 어느 정도 회복시킨 후 국왕의 총애를 얻었다.[22] 1768년 4월 5일 여행 주치의(Livmedikus hos Kong Christian VII)로 고용되었고, 1768년 5월 6일부터 1769년 1월 12일까지 하노버를 거쳐 파리와 런던으로 가는 국왕의 해외 여행에 수행했다. 알토나를 떠난 지 1주일도 채 되지 않은 1768년 5월 12일 국무회의 의원(etatsråd) 직함을 받았다. 소외되고 외로운 캐롤라인 마틸다 왕비는 스트루엔제와 불륜 관계를 맺었다.1772년 쿠데타가 일어나 왕과 캐롤라인 마틸다의 결혼은 해소되었다. 같은 해 스트루엔제는 체포되어 참수 후 시신은 능지처참되었다. 중세와 같은 잔혹하고 사적인 원한이 얽힌 처형 방법에 유럽 각국은 비난의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불의를 범한 왕비에 대한 동정의 목소리는 없었다. 크리스티안 7세는 스트루엔제의 체포 영장에 서명하는 데 무관심했지만, 부계 조모 소피 마그달레네 왕태후가 압력을 가했다. 그녀는 왕의 이혼을 추진했다.
크리스티안 7세는 1772년 이후 명목상의 왕이 되었다. 1772년부터 1784년까지, 크리스티안의 계모 율리아네 마리에, 신체 장애가 있는 이복 동생 프레데리크 왕자와 정치가에 의해 통치되었다.
2. 7. 섭정 시대와 사망
1772년 요한 프리드리히 슈트루엔제는 크리스티안 7세의 의붓어머니 율리아네 마리의 주도로 일어난 쿠데타로 체포되어 처형되었고, 왕비는 딸과 함께 유폐되었다.[22]크리스티안 7세는 1772년부터 건강 악화로 명목상의 국왕이 되었으며, 공식 석상에는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1784년까지는 율리아네 마리와 이복동생 프레데리크가 섭정을 맡았고, 1808년까지는 아들이자 왕세자였던 프레데리크 6세가 섭정을 맡았다.
1772년에서 1784년 사이 덴마크-노르웨이는 크리스티안 7세의 계모 율리아네 마리와 이복 동생 프레데리크, 그리고 덴마크 정치인 오베 호에그-굴베르가 통치했다. 1784년부터는 그의 아들 프레데리크 6세가 섭정으로서 영구적으로 통치했다. 이 섭정 기간은 자유주의적, 사법적, 농업 개혁으로 특징지어졌지만, 동시에 극장 전쟁, 프랑스 혁명 전쟁, 나폴레옹 전쟁의 재앙과 노르웨이 독립 운동의 시작으로 특징지어졌다.[15]

크리스티안 7세는 1808년 3월 13일 슐레스비히의 렌츠부르크에서 뇌졸중으로 5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스페인 지원군을 적대적으로 보고 놀란 나머지 뇌졸중이 발병했다는 소문이 있었지만, 울리크 랑엔은 국왕의 전기에 외부적인 요인이 있었다는 점을 언급하지 않았다. 그는 로스킬레 대성당에 묻혔으며, 그의 아들 프레데리크 6세가 왕위를 계승했다.[16]
1773년에는 동맹 관계에 있는 러시아의 예카테리나 2세로부터 슐레스비히-홀슈타인 공작 지위를 반환받았지만, 이것도 명목상이었다.
크리스티안 7세는 의외로 국민들에게 큰 인기를 얻었다. 슈트루엔세가 체포되고 크리스티안 7세가 해방되었을 때, 그는 시민들의 환호성으로 맞이받았다.
3. 과학에 대한 기여
1769년, 크리스티안 7세는 헝가리 천문학자 미크사 헬을 바르되로 초청했다.[17][18][19] 헬은 금성의 태양면 통과를 관측했고, 그의 계산은 당시까지 지구-태양 거리(약 1.51억km)에 대한 가장 정확한 계산을 제공했다. 헬의 동료인 야노시 쇼이노비치는 사미, 핀란드 및 헝가리인의 언어 간의 유사성을 연구했는데, 이들은 모두 핀-우그리아어족에 속한다.[17][18][19]
4. 유산
1769년, 크리스티안 7세는 헝가리 천문학자 미크사 헬을 바르되로 초청했다. 헬은 금성의 태양면 통과를 관측했고, 그의 계산은 당시까지 지구와 태양 사이의 거리(약 1억 5100만 킬로미터)에 대한 가장 정확한 계산 결과를 제공했다. 헬의 동료인 야노시 쇼이노비치는 사미족, 핀란드인, 헝가리인의 언어 간 유사성을 연구했는데, 이들은 모두 핀-우그리아어족에 속한다.[17][18][19]
크리스티안 7세, 그의 결혼, 그리고 그의 아내와 요한 프리드리히 스트루엔제의 불륜은 여러 예술 작품에서 소재로 다뤄졌다.
4. 1. 문학
크리스티안 7세와 그의 결혼, 그리고 그의 아내와 요한 프리드리히 스트루엔제의 불륜은 많은 예술 작품에서 다루어졌다.- Die Gefangene von Celle|첼레의 죄수de - 엘제 폰 홀란더-로소의 1935년 소설
- Struensee: Doktor, Diktator, Favorit und armer Sünder|스트루엔제: 의사, 독재자, 총신, 불쌍한 죄인de (후일 ''Der Favorit der Königin''여왕의 총애de) - 로베르트 노이만의 1935년 소설
- 여왕의 의사 - 에드가 마스의 1948년 소설
- Samtale om natten i København|코펜하겐의 밤 대화da - 카렌 블릭센의 1953년 소설
- 영국 공주이자 덴마크 여왕 캐롤라인 마틸다 - 제프리 본 블랙스톤의 1955년 소설
- 잃어버린 여왕 - 노라 로프츠의 1969년 소설
- 첼레의 편지 - 에드워드 로우리의 1985년 극시
- Livläkarens besök|왕실 의사의 방문sv - 페르 올로프 엔퀴스트의 1999년 소설
- Prinsesse af Blodet – en roman om Caroline Mathilde|피의 공주 - 캐롤라인 마틸드에 대한 소설da - 보딜 스테센-레트의 2000년 소설
- C'è un re pazzo in Danimarca|덴마크에는 미친 왕이 있다it - 다리오 포의 2015년 전기 소설
- Sigurverkið|걸작is - 아르날두르 인드리다손의 2021년 소설
4. 2. 연극 및 영화
크리스티안 7세와 그의 결혼, 왕비 캐롤라인 마틸다와 요한 프리드리히 스트루엔제의 불륜은 많은 예술 작품의 소재가 되었다.분야 | 연도 | 작품명 및 설명 |
---|---|---|
소설 | 1935년 | 엘제 폰 홀란더-로소의 Die Gefangene von Celle |
1935년 | 로베르트 노이만의 여왕의 총애자 (Struensee: Doktor, Diktator, Favorit und armer Sünderde; 후일 Der Favorit der Königin) | |
1948년 | 에드가 마스의 여왕의 의사 | |
1953년 | 카렌 블릭센의 코펜하겐의 밤 대화 (Samtale om natten i Københavnda) | |
1955년 | 제프리 본 블랙스톤의 영국 공주이자 덴마크 여왕 캐롤라인 마틸다 | |
1969년 | 노라 로프츠의 잃어버린 여왕 | |
1999년 | 페르 올로프 엔퀴스트의 왕실 의사의 방문 (Livläkarens besöksv) | |
소설 | 2000년 | 보딜 스테센-레트의 Prinsesse af Blodet – en roman om Caroline Mathilde |
소설 | 2015년 | 다리오 포의 덴마크에는 미친 왕이 있다 (C'è un re pazzo in Danimarcait) |
소설 | 2021년 | 아르날두르 인드리다손의 Sigurverkið |
희곡 | 1827년 | 미하엘 베어의 슈트루엔제 (무대 음악: 자코모 마이어베어)[20] |
시 | 1985년 | 에드워드 로우리의 첼레의 편지 |
발레 | 1991년 | 플레밍 플린트 안무, 피터 맥스웰 데이비스 음악의 로열 덴마크 발레단 공연 카롤린 마틸데 |
오페라 | 2008년 | 보 홀텐 작곡, 엥퀴스트의 소설을 바탕으로 한 로열 덴마크 오페라 공연 어의의 방문(Livlægens besøgda) |
영화 | 1923년 | 루드비히 볼프 감독, 발터 얀센 주연의 독일 무성 영화 여왕의 사랑 (Die Liebe einer Königinde) |
1935년 | 빅터 사빌 감독, 엠린 윌리엄스 주연의 영국 영화 독재자 | |
1957년 | 하랄트 브라운 감독, 호르스트 부흐홀츠 주연의 서독 영화 그림자 속의 왕 (Herrscher ohne Kronede) | |
2010년 | 덴마크 영화 Caroline – den sidste rejseda | |
2012년 | 니콜라이 아르셀 감독, 미켈 보 폴스가르 주연의 덴마크 영화 로얄 어페어 (En kongelig affæreda) |
5. 자녀
크리스티안 7세는 왕비 캐롤라인 마틸데와의 사이에서 1남 1녀를 두었다.
이름 | 출생 | 사망 | 비고 |
---|---|---|---|
프레데리크 6세 | 1768년 | 1839년 | 덴마크 국왕 |
루이세 아우구스타 | 1771년 | 1843년 | 1786년, 슐레스비히홀슈타인존더부르크아우구스텐부르크 공작 프레데리크 크리스티안 2세와 결혼 |
하지만 루이세 아우구스타의 생부는 요한 프리드리히 스트루엔제로 여겨진다.
6. 가계
크리스티안 7세는 왕비 캐롤라인 마틸데와의 사이에서 1남 1녀를 두었다. 하지만 루이세 아우구스타의 생부는 요한 프리드리히 스트루엔제로 여겨진다.[21]
이름 | 출생 | 사망 | 비고 |
---|---|---|---|
프레데리크 6세 | 1768년 | 1839년 | 덴마크 국왕 |
루이세 아우구스타 | 1771년 | 1843년 | 1786년, 슐레스비히홀슈타인존더부르크아우구스텐부르크 공작 프레데리크 크리스티안 2세와 결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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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books.google[...]
Frederic Guillaume Birnsti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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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과 광기
말글빛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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