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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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크리스푸스는 300년경 동로마 제국에서 태어난 콘스탄티누스 1세의 장남이다. 317년 부제로 임명되어 갈리아를 통치하며 군사적 재능을 발휘했고, 324년 헬레스폰토스 해전에서 승리하여 아버지의 권력 강화에 기여했다. 그러나 326년, 계모 파우스타와의 간통 혐의로 체포되어 처형당했다. 그의 죽음에는 파우스타의 모함, 권력 투쟁, 콘스탄티누스의 질투 등 다양한 설이 존재하며, 기억말살형으로 인해 정확한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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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26년 사망 - 파우스타
파우스타는 로마 황제 막시미아누스의 딸이자 콘스탄티누스 1세의 아내로 로마 제국의 황후였으나, 간통 혐의로 처형되었고 그녀의 죽음에는 여러 의혹이 있다. - 로마 제국의 황자 - 브리타니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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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티누스 1세는 로마 황제로, 군사 경험을 바탕으로 황제가 되었고, 밀라노 칙령으로 기독교를 공인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건설했으며, 니케아 공의회를 통해 기독교 교리 정립에 기여했다. - 콘스탄티누스 왕조 - 콘스탄티우스 2세
콘스탄티우스 2세는 콘스탄티누스 1세의 아들로, 동로마 제국을 통치하며 아리우스주의를 옹호하고 사산 제국과의 전쟁과 내전을 겪었으며, 율리아누스의 반란으로 사망했다.
크리스푸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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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플라비우스 율리우스 크리스푸스 |
칭호 | 카이사르 (317년 3월 1일 - 326년) |
로마자 표기 | Peullabibeoseu Yulliuseu Keuriseupuseu |
출생 | 기원후 300년경 |
출생지 | 폴라, 이스트라 반도 |
사망 | 기원후 326년 (약 26세) |
사망지 | 폴라, 이스트라 반도 |
배우자 | 헬레나 |
자녀 | 플라비우스 |
아버지 | 콘스탄티누스 1세 |
어머니 | 미네르비나 |
종교 | 그리스-로마 종교 |
정치 | |
직위 | 카이사르 |
통치 기간 | 317년 - 326년 |
소속 왕조 | 콘스탄티누스 가문 |
기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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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크리스푸스는 콘스탄티누스 1세의 장남으로, 어머니는 미네르비나이다.[4] 출생년도와 장소는 불분명하지만, 307년 이전에 출생한 것은 확실하다. 락탄티우스에게 교육을 받아 교양 있는 청년으로 성장했다.[1][5]
317년 부제로 임명되어 갈리아를 통치했으며, 야만족과의 전투에서 군사적 재능을 발휘했다.[5] 324년 헬레스폰토스 해전에서는 함대를 이끌고 리키니우스 함대를 격파하는 큰 공을 세웠다.[6] 이러한 군사적 성공으로 콘스탄티누스의 후계자로 여겨졌으나, 아버지의 질투와 이복 동생 콘스탄티누스 2세와의 갈등으로 인해 궁정 내에서 연금 상태에 놓이기도 했다.[7]
326년, 콘스탄티누스 치세 20주년 기념식 때 체포되어 이스트리아의 폴라로 보내져 처형되었다.[8] 처형 이유는 명확하지 않으나, 계모 파우스타의 모함이나 콘스탄티누스의 질투 등이 원인으로 추정된다.[9]
2. 1. 초기 생애
크리스푸스의 출생년도와 장소는 알려져 있지 않다. 아마도 299년에서 305년 사이, 동로마제국 어딘가에서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어머니 미네르비나는 콘스탄티누스 1세의 첫 번째 부인이었으나, 그 법적인 지위는 확실하지 않다.[1] 307년 콘스탄티누스가 막시미아누스의 딸 파우스타와 결혼할 때 이미 정식 부인이었다면 이혼을 해야 했겠지만, 그러한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물론, 그 이전에 미네르비나가 이미 사망하여 이혼 기록을 남길 필요가 없었을 가능성도 있다.[1]크리스푸스는 기독교 저술가이자 교사인 락탄티우스에게서 교육을 받았다.[1][5]
317년 3월 1일, 콘스탄티누스는 리키니우스와 함께 세 명의 부제(''caesar'', 副帝)를 임명했는데, 이때 크리스푸스도 부제가 되었다. 크리스푸스는 갈리아 지역을 통치했다.[5] 318년, 320년, 323년에는 야만족 토벌 작전에서 큰 공을 세워 군사적 재능을 인정받았다.
이후 콘스탄티누스와 리키니우스 사이에 두 번째 전쟁이 벌어지자, 크리스푸스는 아버지를 도와 전투에 참가했다. 그는 헬레스폰토스 해협(지금의 다르다넬스 해협)에서 함대를 이끌고 출정해 거의 두 배가 넘는 리키니우스의 해군을 격파하여 중요한 승리를 거두었다.[6] 이 승리로 콘스탄티누스는 로마의 유일한 권력자가 되었고, 크리스푸스는 그의 후계자로 자리를 굳히는 듯 보였다.
2. 2. 부제 임명과 군사적 활약
317년 3월 1일, 콘스탄티누스는 리키니우스와 함께 세 명의 부제(''caesar'')를 임명했는데, 이때 크리스푸스도 부제가 되어 갈리아 지역을 통치하게 되었다.[5] 318년, 320년, 323년 프랑크족과 알레만니족을 상대로 한 군사 작전에서 뛰어난 활약을 펼쳐 군사적 재능을 인정받았다.[5] 병사들은 그의 전략적 능력과 그가 로마 군단을 이끌었던 승리에 감탄했다.이후 콘스탄티누스와 공동 황제였던 리키니우스 사이에 전쟁이 벌어지자, 크리스푸스는 아버지를 도와 전투에 참가했다. 324년 헬레스폰트 해전에서 크리스푸스는 함대를 이끌고 보스포러스 해협에서 리키니우스의 해군을 격파하는 중요한 승리를 거두었다. 크리스푸스가 지휘하는 200척의 배는 최소 두 배나 되는 적군을 결정적으로 격파하여 그의 뛰어난 장군으로서의 명성을 더욱 확고히 했다. 해군 활동 이후, 크리스푸스는 아버지에게 충성하는 군단의 일부를 배정받았고, 리키니우스 군대에 맞서 또 다른 승리인 크리소폴리스 전투를 벌였다.
이 두 번의 승리는 아버지의 리키니우스에 대한 최종 승리에 기여했다. 콘스탄티누스는 제국에 남은 유일한 '아우구스투스'가 되었다. 그는 자신의 지원과 성공을 기리기 위해 황제의 동전, 조각상, 모자이크, 카메오 등에 그의 얼굴을 새겼다. 유세비우스는 크리스푸스에 대해 "그는 신에게 가장 사랑받는 황제이며 모든 면에서 그의 아버지와 견줄만하다"고 썼으며, 그들의 관계를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님 아들에 비유하기까지 했다.
2. 3. 갑작스러운 처형
326년 크리스푸스는 아버지 콘스탄티누스의 명령으로 갑자기 체포되어 풀라의 감옥에 투옥되었고 고문을 받은 뒤 처형당했다.[8] 죄목은 계모인 파우스타와 간통을 했다는 것이었다. 콘스탄티누스의 명령이 너무나 갑작스러웠기 때문에 그 이유에 대해 많은 논란이 일어났다. 크리스푸스가 처형당하고 몇 달 후에 파우스타도 죽임을 당했다. 목욕탕에 갇혀서 뜨거운 물에 죽은 것으로 알려졌다.유력한 것은 계모 파우스타의 '음모론'인데 자신의 아들들(콘스탄티누스 2세, 콘스탄티우스 2세, 콘스탄스)을 권좌에 세우기 위해 크리스푸스가 자신을 강간했다고 모함했다는 것이다. 나중에 그것이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지자 분노한 콘스탄티누스가 파우스타도 죽였다는 설이다. 다른 설들은 크리스푸스가 반란을 꾀했다는 설, 콘스탄티누스가 크리스푸스를 잠재적인 경쟁자로 보아 죽였다는 설이 있다.
조시무스와 조나라스의 기록에 따르면 크리스푸스는 파우스타와의 불륜에 연루되었다는 의혹 때문에 처형되었다고 한다.[1] 그러나 일부 학자들은 이러한 설명에 대해 회의적이다. 예를 들어, T. D. 바네스는 크리스푸스가 트리어에, 파우스타가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머물렀기 때문에 그들이 불륜을 저지를 기회가 없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크리스푸스는 콘스탄티누스의 장남이자 콘스탄티누스의 첫 번째 부인 미넬비나(307년경 사망?)의 아들이다.[4]
3. 처형의 원인과 배경
326년 크리스푸스는 아버지 콘스탄티누스 1세의 명령으로 갑자기 체포되어 풀라의 감옥에 투옥되었고, 고문을 받은 뒤 처형되었다.[2] 죄목은 계모인 파우스타와 간통을 했다는 것이었다. 콘스탄티누스의 명령이 너무나 갑작스러웠기 때문에 그 이유에 대해 많은 논란이 일어났다. 크리스푸스가 처형당하고 몇 달 후에 파우스타도 죽임을 당했다. 목욕탕에 갇혀서 뜨거운 물에 죽은 것으로 알려졌다.[1]
이러한 죽음의 이유는 여전히 불분명하며, 여러가지 설이 존재한다.
- 파우스타의 음모: 파우스타가 자신의 아들들(콘스탄티누스 2세, 콘스탄티우스 2세, 콘스탄스)을 권좌에 세우기 위해 크리스푸스가 자신을 강간했다고 모함했다는 설이다.
- 크리스푸스의 반란: 크리스푸스가 반란을 꾀했다는 설이다.
- 경쟁자 제거: 콘스탄티누스 1세가 크리스푸스를 잠재적인 경쟁자로 보아 제거했다는 설이다.
조시무스와 조나라스는 크리스푸스가 파우스타와의 불륜에 연루되었다는 의혹 때문에 처형되었다고 기록했다.[1] 그러나 T. D. 바네스 등 일부 학자들은 크리스푸스와 파우스타가 지리적으로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불륜이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주장하며 이러한 설명에 의문을 제기한다.[1] 데이비드 우즈는 두 사람이 관계를 가졌을 가능성을 제시하면서도, 크리스푸스는 자살했고 파우스타는 낙태 시도로 사망했을 수 있다는 이론을 제시했다.[1]
결론적으로, 크리스푸스와 파우스타의 죽음에 대한 진실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으며, 여러 가지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3. 1. 파우스타와의 관계
326년 크리스푸스는 아버지 콘스탄티누스 1세의 명령으로 갑자기 체포되어 폴라의 감옥에 투옥되었고, 고문을 받은 뒤 처형당했다. 죄목은 계모인 파우스타와 간통을 했다는 것이었다.[2] 콘스탄티누스의 명령이 너무나 갑작스러웠기 때문에 그 이유에 대해 많은 논란이 일어났다. 크리스푸스가 처형당하고 몇 달 후에 파우스타도 목욕탕에서 뜨거운 물에 죽은 것으로 알려졌다.[1]계모 파우스타가 자신의 아들들(콘스탄티누스 2세, 콘스탄티우스 2세, 콘스탄스)을 권좌에 세우기 위해 크리스푸스가 자신을 강간했다고 모함했다는 '음모론'이 유력하다. 나중에 그것이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지자 분노한 콘스탄티누스가 파우스타도 죽였다는 설이다.
조시무스와 조나라스의 기록에 따르면 크리스푸스는 파우스타와의 불륜에 연루되었다는 의혹 때문에 처형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일부 학자들은 이러한 설명에 대해 회의적이다. 예를 들어, T. D. 바네스는 크리스푸스가 트리어에, 파우스타가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머물렀기 때문에 그들이 불륜을 저지를 기회가 없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한스 폴젠더는 크리스푸스가 충분히 오랫동안 동방에 있었기 때문에 바네스의 주장이 타당하지 않다고 여기면서, 조시무스의 이야기가 파이드라와 히폴리토스의 신화와 유사하다는 점을 들어 그 진실성에 의문을 제기한다. 그는 그러나 콘스탄티누스가 같은 해에 간통에 관한 여러 법률을 통과시켰으며, 이는 크리스푸스와 파우스타의 죽음과 관련이 있을 수 있다고 언급한다. 반면에 데이비드 우즈는 두 사람이 관계를 가졌다고 믿는 것을 받아들이면서, 실제로는 처형되지 않았을 가능성을 제시한다. 그의 이론에 따르면, 크리스푸스는 간통죄로 처벌받아 폴라로 유배되었고, 그곳에서 독극물로 자살했으며, 파우스타의 죽음은 불륜으로 인한 원치 않는 임신을 없애기 위한 낙태 시도로 인해 발생했다.
3. 2. 파우스타의 모함
326년 크리스푸스는 아버지 콘스탄티누스 1세의 명령으로 갑자기 체포되어 폴라의 감옥에 투옥되었고 밤낮으로 고문을 받은 뒤 처형당했다. 죄목은 계모인 파우스타와 간통을 했다는 것이었다.[2] 콘스탄티누스의 명령이 너무나 갑작스러웠기 때문에 그 이유에 대해 많은 논란이 일어났다. 크리스푸스가 처형당하고 몇 달 후에 파우스타도 목욕탕에 갇혀 뜨거운 물에 죽임을 당했다.유력한 설은 계모 파우스타가 자신의 아들들(콘스탄티누스 2세, 콘스탄티우스 2세, 콘스탄스)을 권좌에 세우기 위해 크리스푸스가 자신을 강간했다고 모함했다는 것이다. 나중에 그것이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지자 분노한 콘스탄티누스가 파우스타도 죽였다는 것이다.
다른 설로는 크리스푸스가 반란을 꾀했다는 설, 콘스탄티누스가 크리스푸스를 잠재적인 경쟁자로 보아 죽였다는 설이 있다. 조시무스와 조나라스의 기록에 따르면 크리스푸스는 파우스타와의 불륜에 연루되었다는 의혹 때문에 처형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일부 학자들은 이러한 설명에 대해 회의적이다.
3. 3. 콘스탄티누스 1세의 질투
326년 크리스푸스는 아버지 콘스탄티누스 1세의 명령으로 갑자기 체포되어 풀라의 감옥에 투옥되었고, 결국 처형당했다.[2] 죄목은 계모인 파우스타와 간통을 했다는 것이었다. 콘스탄티누스의 명령이 너무나 갑작스러웠기 때문에 그 이유에 대해 많은 논란이 일어났다. 크리스푸스가 처형당하고 몇 달 후, 파우스타도 목욕탕에서 뜨거운 물에 죽임을 당했다.[2] 이 두 사람은 ''기억말살형''을 당해, 비문에서 이름이 지워졌다.[2]이러한 죽음의 이유는 불분명하다. 조시무스와 조나라스는 크리스푸스가 파우스타와의 불륜에 연루되었다는 의혹 때문에 처형되었다고 기록했다.[1] 그러나 일부 학자들은 이들이 불륜을 저지를 기회가 없었을 것이라며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2]
유력한 설 중 하나는 계모 파우스타가 자신의 아들들(콘스탄티누스 2세, 콘스탄티우스 2세, 콘스탄스)을 권좌에 세우기 위해 크리스푸스가 자신을 강간했다고 모함했다는 '음모론'이다. 나중에 그것이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지자 분노한 콘스탄티누스가 파우스타도 죽였다는 것이다.
다른 설로는 크리스푸스가 반란을 꾀했다는 설, 콘스탄티누스가 크리스푸스를 잠재적인 경쟁자로 보아 죽였다는 설 등이 있다.
3. 4. 권력 투쟁
326년 크리스푸스는 아버지 콘스탄티누스의 명령으로 갑자기 체포되어 풀라의 감옥에 투옥되었고, 고문을 받은 끝에 처형당했다.[2] 죄목은 계모인 파우스타와 간통을 했다는 것이었다. 콘스탄티누스의 명령이 너무나 갑작스러웠기 때문에 그 이유에 대해 많은 논란이 있었다.크리스푸스가 처형당하고 몇 달 후 파우스타도 죽임을 당했다. 그녀는 목욕탕에 갇혀 뜨거운 물에 죽은 것으로 알려졌다.[1]
이러한 죽음의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설이 존재한다.
- 파우스타의 음모론: 계모 파우스타가 자신의 아들들(콘스탄티누스 2세, 콘스탄티우스 2세, 콘스탄스)을 권좌에 세우기 위해 크리스푸스가 자신을 강간했다고 모함했다는 것이다. 나중에 그것이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지자 분노한 콘스탄티누스가 파우스타도 죽였다는 설이다.
- 크리스푸스의 반란: 크리스푸스가 반란을 꾀했다는 설이 있다.
- 경쟁자 제거: 콘스탄티누스가 크리스푸스를 잠재적인 경쟁자로 보아 죽였다는 설이 있다.
조시무스와 조나라스의 기록에 따르면 크리스푸스는 파우스타와의 불륜에 연루되었다는 의혹 때문에 처형되었다고 한다.[1] 그러나 일부 학자들은 이러한 설명에 대해 회의적이다. 예를 들어, T. D. 바네스는 크리스푸스가 트리어에, 파우스타가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머물렀기 때문에 그들이 불륜을 저지를 기회가 없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1] 한스 폴젠더는 크리스푸스가 충분히 오랫동안 동방에 있었기 때문에 바네스의 주장이 타당하지 않다고 여기면서, 조시무스의 이야기가 파이드라와 히폴리토스의 신화와 유사하다는 점을 들어 그 진실성에 의문을 제기한다.[1] 그는 그러나 콘스탄티누스가 같은 해에 간통에 관한 여러 법률을 통과시켰으며, 이는 크리스푸스와 파우스타의 죽음과 관련이 있을 수 있다고 언급한다.[1] 반면에 데이비드 우즈는 두 사람이 관계를 가졌다고 믿는 것을 받아들이면서, 실제로는 처형되지 않았을 가능성을 제시한다. 그의 이론에 따르면, 크리스푸스는 간통죄로 처벌받아 폴라로 유배되었고, 그곳에서 독극물로 자살했으며, 파우스타의 죽음은 불륜으로 인한 원치 않는 임신을 없애기 위한 낙태 시도로 인해 발생했다.[1]
크리스푸스는 콘스탄티누스의 장남이자 콘스탄티누스의 첫 번째 부인 미넬비나의 아들이다.[4] 락탄티우스의 가르침을 받아 교양 있는 청년으로 성장했다.[5] 17세에 부제가 된 크리스푸스는 아버지에 의해 갈리아 속주의 통치권을 부여받았고, 이곳에서 야만족과의 전투에서 군사적 재능을 발휘했다.[5] 그 후 콘스탄티누스와 리키니우스의 전쟁에서 크리스푸스는 아버지 밑에서 싸워 그 군사적 재능을 크게 발휘하여 324년의 헬레스폰토스 해전에서 함대를 이끌고 리키니우스 함대를 격파했다.[6] 이러한 공적에 의해 노경에 접어든 콘스탄티누스에 대한 인기는 크리스푸스에게 쏠리게 되었다.[5] 그러나 이것이 아버지의 질투와 시기를 불러일으켜, 이복 동생 콘스탄티누스 2세가 부제가 되어 갈리아 통치에 보내지자 크리스푸스는 궁정 내에 연금 상태에 놓였다.[7]
크리스푸스는 콘스탄티누스 치세 20주년을 기념하는 기념식 때, 축전의 혼란을 틈타 체포되어 이스트리아의 폴라로 보내져 처형되었다.[8] 계모의 유혹을 크리스푸스가 거절했기 때문에, 그녀가 콘스탄티누스의 시기를 부추겨 살해했다는 말도 있다.[9] 또한, 이 콘스탄티누스의 비도덕적인 행위에 대해 그의 전기를 쓴 유세비우스는 변명의 여지가 없었기 때문인지 그 안에서 묵살하고 있다.[10] 같은 시기에는 크리스푸스가 격파한 리키니우스의 외아들이자 유일한 친아들인 리키니아누스(리키니우스 2세, 315년 - 326년)도 10~11세에 살해되었다. 이 두 사람의 살해는 콘스탄티누스 왕조의 내부 항쟁의 일부라는 견해가 유력하다.
크리스푸스와 파우스타 모두 ''기억말살형''을 겪었고, 그들의 이름은 비문에서 지워졌다.[2]
4. 가족 관계
307년 이전, 콘스탄티누스 1세는 미네르비나와 혼인 관계를 맺었다.[1] 미네르비나는 콘스탄티누스와의 사이에서 아들 크리스푸스를 낳았다. 미네르비나는 콘스탄티누스가 막시미아누스의 딸 파우스타와 결혼하기 이전에 사망했거나 이혼한 것으로 추정된다. 콘스탄티누스는 크리스푸스의 교육을 락탄티우스에게 맡겼다.[1]
322년 10월, 크리스푸스는 헬레나와 결혼하여 아들을 얻었다. 테오도시우스 법전에는 콘스탄티누스가 이 사건을 축하하는 기록이 남아있다.[1] 그러나 이 아들의 이름과 운명은 알려져 있지 않다.
발렌티니아누스 1세의 후처 유스티나가 크리스푸스의 손녀 또는 증손녀라는 주장이 있지만, 실제로는 콘스탄티누스 1세의 이복 동생 율리우스 콘스탄티우스의 손녀일 가능성이 높다.
5. 문학 작품에서의 등장
크리스푸스는 베르나르디노 스테포니오의 신고전주의 라틴 비극 《크리스푸스》의 성공 이후 인기 있는 비극적 영웅이 되었다. 이 작품은 1597년 예수회 콜레지오 로마노에서 공연되었다.[3] 세네카의 《파이드라》를 모델로 한 이 작품은 예수회 비극의 모델이 되었으며, 알레산드로 도나티의 1631년 《Ars Poetic》과 타르퀴니오 갈루치의 1633년 《크리스푸스 변호》의 주요 기반이 되었다. 이 연극은 프랑수아 드 그르나이유에 의해 《불쌍한 죄인》(1639)으로, 트리스탄 르미트에 의해 《크리스페의 죽음 또는 위대한 콘스탄틴의 불행》(1645)으로 프랑스 무대에 각색되었다. 이 작품은 로마(1720)와 런던(1721)에서 오페라로 공연되었으며, 제목은 《크리스포: 드라마》였으며, 도니체티의 1832년 오페라 《파우스타》도 언급할 가치가 있다.[3] 또한, 이 이야기는 월터 스콧 경의 소설 《파리의 로베르 백작》의 31장에서 재구성되고 윤색되었다. 이블린 워가 그의 소설 《헬레나》(1950)에서 이 이야기를 재구성했을 때, 크리스푸스는 결백하다.
참조
[1]
웹사이트
Crispus Caesar (317-326 A.D.)
http://www.roman-emp[...]
[2]
서적
History of the Franks
[3]
서적
Heros et orateurs. Rhetoriques et dramaturgie corneliennes
Droz
[4]
서적
[5]
서적
[6]
서적
[7]
서적
[8]
서적
[9]
서적
[10]
서적
[11]
문서
Crispus Caesar (317-326 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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