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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바리스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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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타바리스탄은 오늘날의 마잔다란주와 길란주를 포함하는 지역으로, 기원전 1000년경 하이카니아 왕국이 건국된 곳이다. 파르티아 제국에 의해 타푸리족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으며, 사산 왕조 시기에는 자치를 누렸다. 645년 이슬람의 침공 이후에도 저항하며 독립을 유지했으나, 761년 아바스 왕조의 봉신이 되면서 칼리프의 지배를 받았다. 이후 바반드 왕조, 알라비드인들이 시아파 왕국을 세우는 등 여러 왕조의 지배를 받았으며, 마잔다라니어라는 고유의 언어와 문화를 유지했다. 근대에는 사파비 왕조와 카자르 왕조에 편입되었고, 아르메니아인 등 여러 민족이 이주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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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바리스탄
지도
일반 정보
다른 이름마잔다란
위치이란 북부
중심 도시사리
언어마잔다란어 (타바리어)
역사
성립기원전 3000년경
왕조바반드 왕조
잘라비드 왕조
카렌 왕조
주요 사건이슬람 정복
몽골 제국 침공
문화
언어마잔다란어
종교이슬람교 (주로 시아파)
조로아스터교 (일부)
지리
주요 지역카스피해 연안
알보르즈 산맥
현대의 타바리스탄
현재 지역마잔다란주
길란주
골레스탄주
테헤란주 (일부)
셈난주 (일부)
알보르즈주 (일부)
로마자 표기
로마자 표기Ṭabarestān

2. 태초

지금의 마잔다란길란 지방에 처음으로 정착한 이주민은 아마드인으로 여겨진다. 이곳에 큰 왕국이 들어선 시기는 기원전 1000년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하이카니아 왕국이 사드라카르타 (오늘날 사리 부근)를 수도로 삼고 건국되었는데, 수백 년간 카스피해를 하이카니아 해로 불렀을 정도로 하이카니아 왕국의 영역은 컸다. 최초의 왕조는 파라타티아 왕조로 기원전에 몇 세기 동안 이 지역을 다스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편 파르티아인이 세를 넓히면서 대부분의 아마드인들은 엘부르즈산맥의 남쪽 지대 (오늘날의 바라민과 가름사르)로 쫓겨나게 되었고, 아마드인이 살던 자리에는 타바리인[2]이 들어와 정착하게 되었다.

3. 중세

사산 왕조가 몰락한 이후, 타바리스탄은 페르시아에서 이슬람의 침공에 마지막까지 저항했던 지역이다. 타바리스탄의 쿠르쉬드가 왕위에 있었던 761년까지 저항을 계속하다가, 아바시드 칼리프의 봉신이 되면서 끝났다.[3] 하지만 이후에도 타바리스탄은 칼리프의 직접 통치에서 거의 벗어나 독립된 채로 존재했고, 수많은 난과 권력 투쟁을 겪었다.[4]

9세기 초, 마자르라는 조로아스터교 신자가 반란을 일으켜 타바리스탄의 권력을 쥐고 무슬림들을 탄압하다가 839년에 처형되었다. 이후 타바리스탄은 대부분 바반드 왕조의 지배를 받았다. 바반드 왕조는 셀주크 튀르크, 화레즘 샤 왕조, 몽골 제국 등 여러 대제국과 군신 관계를 맺어 타바리스탄을 지배했다.

이후 타바리스탄 지역은 시아파를 빠르게 수용했고, 900년경에는 알라비드인들이 자이드파 왕국을 세웠다.[5] 타바리스탄에서 다부이드 왕조는 평야 지방을, 소흐라야인들은 산지 지방을 지배했다. 1034년까지 반다드 호르무즈가 약 50년간 이 지역을 지배했다. 1125년 마지아르가 암살당한 후 이슬람 개종이 늘어났는데, 이는 이슬람 제국 칼리프가 아닌 이맘의 사신들에 의한 것이었다.

마잔다란인과 길라크인은 이슬람교 시아파로 바로 개종한 최초의 이란 민족이기도 하다.

3. 1. 사산 제국 시대

사산 왕조가 몰락하면서 645년 국왕 야즈데게르드 3세는 이 지역의 영토를 길 가브바라 장군에게 넘기라고 아드하르 발라시에게 명했다. 이렇게 길 장군에게 있던 영토에 서부-남부 길란 지방이 더해지면서 타푸리아라는 이름의 지방이 되었다. 길 가브바라는 647년 아몰을 타푸리아 통일 왕국의 수도로 정하고 건국했다. 이렇게 창건된 길 왕조는 길란 지방에서 가브바레흐 왕조로, 동타푸리아에서는 다부이드 왕조라고 불렀다.

타푸리아의 은도금 접시. 7~8세기. 사산 제국의 전통 양식으로 아랍 침공 이후에도 전승되었다. 테두리를 따라 기대고 있는 문양 속에 팔라비 문자로 '아누자드' (Anuzhad)라고 새겨져 있다. 대영 박물관 소장.


사산 왕조 하에서 타바리스탄은 상당한 자치를 누렸다. 그들은 대부분의 문제를 지역 주민들에게 맡겼을 가능성이 높다. "AM"의 주조 서명은 일반적으로 이 지역의 주요 도시인 아몰의 약자로 추정된다. 이 서명으로 주화를 주조한 최초의 사산 왕은 바흐람 5세였으며, 마지막 왕은 보란이었다.

3. 2. 이슬람 시대

사산 왕조가 몰락한 이후, 타바리스탄은 페르시아에서 이슬람의 침공에 마지막까지 저항했던 지역이다. 761년 타바리스탄의 쿠르쉬드가 아바시드 칼리프의 봉신이 되면서 저항이 끝났다.[3] 그러나 이후에도 타바리스탄은 칼리프의 직접 통치에서 거의 벗어나 독립된 채로 존재했고, 수많은 난과 권력 투쟁을 겪었다.[4]

9세기 초, 마자르라는 조로아스터교 신자가 반란을 일으켜 타바리스탄의 권력을 쥐고 무슬림들을 탄압하다가 839년에 처형되었다. 이후 타바리스탄은 대부분 바반드 왕조의 지배하에 들어갔으며, 이들은 셀주크 튀르크, 화레즘 샤 왕조, 몽골 제국 등 여러 대제국과 군신 관계를 맺어 타바리스탄을 지배했다.

타바리스탄 지역은 시아파를 빠르게 수용했고, 900년경에는 알라비드인들이 자이드파 왕국을 세웠다.[5] 타바리스탄에서 다부이드인들은 평야 지방을, 소흐라야인들은 산지 지방을 지배했다. 1034년까지 반다드 호르무즈가 약 50년간 이 지역을 지배했다. 1125년 마지아르가 암살당한 이후 이슬람 개종이 늘어났는데, 이는 이슬람 제국 칼리프가 아닌 이맘의 사신들에 의한 것이었다.

마잔다란인과 길라크인은 이슬람교 시아파로 바로 개종한 최초의 이란 민족이기도 하다.

3. 2. 1. 다부이드 왕조

사산 왕조가 몰락하면서 645년 국왕 야즈데게르드 3세는 이 지역의 영토를 길 가브바라 장군에게 넘기라고 아드하르 발라시에게 명했다. 길 장군에게 있던 영토에 서부-남부 길란 지방이 더해지면서 타푸리아라는 이름의 지방이 되었다. 길 가브바라는 647년 아몰을 타푸리아 통일 왕국의 수도로 정하고 건국했다. 이렇게 창건된 길 왕조는 길란 지방에서 가브바레흐 왕조, 동타푸리아에서는 다부이드 왕조라고 불렸다.[3]

640년대 다부이드 왕조의 군주 길 가브라는 샤한샤pal 자마프의 증손자로, 데일람과 길란을 모두 정복하고 타바리스탄으로 정복을 확대할 계획을 세웠다. 타바리스탄의 총독 아다르 발라시는 샤한샤pal 야즈데게르드 3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반란을 진압할 수 없었던 야즈데게르드 3세는 길 가브라를 이 지역의 통치자로 인정하여 그가 독립 왕국을 세우는 것을 막으려 했다. 길 가브라는 '파다슈와르가르샤'(파디쉬콰르가르의 샤)와 "호라산의 ''이스파바드''"라는 칭호를 받았는데, 이는 아마도 다부이드의 통치가 이란 동부 지역에 미쳤음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인다. 길 가브라는 이란의 아랍 침공 동안 그의 왕국의 독립을 유지했으며, 이 침공은 사산 제국의 붕괴를 초래했다.

그의 아들 바두스판 1세는 665년에 루얀(타바리스탄 서부를 포괄하는 지구)에 대한 통제권을 부여받았고, 이로써 바두스파니드 왕조가 형성되어 1590년대까지 이 지역을 통치하게 되었다. 타바리스탄 산악 지역의 통치는 다부이드의 두 개의 봉신 왕국인 카린반디드와 바반디드에 의해 유지되었다. 716년 다부이드의 통치자 파루칸 대왕은 우마이야 왕조의 장군 야지드 이븐 알-무할라브의 대규모 침공을 성공적으로 막아냈다.

파루칸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다드부르즈미르는 그의 주화 부족으로 미루어 볼 때 아랍에게 타바리스탄에 대한 통제권을 일시적으로 잃었을 수 있다. 그러나 이는 다부이드가 왕국 전체에 유통할 자금이 부족했음을 의미할 수도 있다. 마지막 다부이드 통치자 코르시드는 우마이야 왕조에 대항하여 그의 왕국을 지켜냈지만, 아바스 칼리파조로 대체된 후 760년 아바스 왕조의 장군 아부 알-카십 마르주크에게 결국 패배했다. 타바리스탄은 그 후 칼리파국의 정규 주로 편입되어 아물에서 아랍 총독이 통치했지만, 다부이드의 지배를 받던 바반디드, 카린반디드, 자르미히리드, 바두스파니드의 토착 왕조는 아바스 정부의 조공 봉신으로 산악 지역을 계속 통제했다. 이 통치자들은 대체로, 아니면 완전히 자치적이었다.

3. 2. 2. 칼리파조 시대

타바리스탄은 페르시아에서 이슬람의 침공에 마지막까지 저항했던 지역으로, 761년 타바리스탄의 쿠르쉬드가 아바시드 칼리프의 봉신이 되면서 저항이 끝났다.[3] 그러나 이후에도 타바리스탄은 칼리프의 직접 통치에서 거의 벗어나 독립적인 상태를 유지했고, 수많은 난과 권력 투쟁을 겪었다.[4]

9세기 초, 마자르라는 조로아스터교 신자가 반란을 일으켜 타바리스탄의 권력을 쥐고 무슬림들을 탄압하다가 839년에 처형되었다. 이후 타바리스탄은 대부분 바반드 왕조의 지배하에 들어갔으며, 이들은 셀주크 튀르크, 화레즘 샤 왕조, 몽골 제국 등 여러 대제국과 군신 관계를 맺어 타바리스탄을 지배했다.

이후 타바리스탄 지역은 시아파를 빠르게 수용했고, 900년경에는 알라비드인들이 자이드파 왕국을 세웠다.[5]

칼리파조 시대에 아물은 타바리스탄의 주요 도시였으며, 비단 직물 생산지로 유명했다. 무함마드 이븐 자리르(923년 사망)는 ''타프시르 알-타바리''와 ''타리크 알-루술 와 알-물루크''(''예언자와 왕들의 역사'')를 저술했는데, ''니스바'' ''알-타바리''를 가진 대표적인 인물이다.

아부 알-카시브 마르주크는 타바리스탄의 초대 아바스 왕조 총독으로, 사리에 대규모 모스크를 건설했다. 두 번째 총독 칼리드 이븐 바르마크는 도시를 건설하고 카린반드 통치자 완다드 후르무즈와 친분을 맺어 아바스 왕조의 영향력을 확대하려 했다. 그러나 그가 떠난 후 바반드 통치자 샤르윈 1세가 그의 건축물을 파괴했다.

781년, 완다드 후르무즈와 샤르윈 1세는 칼리프 알-마흐디에게 충성을 맹세했지만, 2년 후 미얀루드의 마스무간과 함께 반이슬람 반란을 일으켰다. 현지 기록은 반란군이 하루 만에 모든 무슬림 거주민을 학살했다고 전하지만, 현대 역사학자 윌퍼드 매델롱은 학살이 고지대와 저지대 일부에서만 발생했다고 주장한다. 반란군은 초기에 성공하여 무슬림 군대를 격파했고, 알-마흐디는 783/4년에 아들 무사를 대군과 함께 보냈다.

다음 해, 사'이드 알-하라시가 이끄는 40,000명의 병력이 반란군을 격파했다. 완다드 후르무즈는 부상을 입고 체포되었지만 곧 사면되어 영토로 돌아갔다. 이후 무슬림 총독과 타바리스탄 지역 통치자들 간의 관계는 한동안 우호적으로 변했다. 완다드 후르무즈는 사리 외곽의 토지를 총독 자리드 이븐 야지드로부터 매입했다. 칼리프 하룬 알-라시드 재위 말, 바반드와 카린반드는 무슬림 매장을 불허하고, 샤르윈 1세의 병사들이 칼리파 대리인을 살해하면서 긴장이 고조되었다. 805년, 완다드 후르무즈의 형제 빈다스파간은 무슬림 세금 징수인을 살해했다.

레이에 있던 하룬 알-라시드는 두 통치자를 소환하여 충성을 맹세받고 토지세를 약속받았다. 하룬 알-라시드는 타바리스탄 총독을 교체했지만, 새 총독은 지역 통치자의 권한을 고지대로 제한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완다드 후르무즈의 아들 카린과 샤르윈 1세의 아들 샤흐리야르는 바그다드로 인질로 잡혀갔다가, 809년 하룬 알-라시드 사후 타바리스탄으로 돌아갔다. 샤흐리야르 1세는 817년 이전에 아버지의 뒤를 이어 삼촌의 도움을 받아 카린반드 통치자 마지야르를 추방했다.

4. 근대

아바스 1세는 마잔다란 지역을 사파비 왕조에 편입시키고, 수많은 아르메니아인, 시르카시아인, 조지아인, 쿠르드족, 카자르 튀르크족들을 이곳에 강제 이주 정착시켰다. 피에트로 델라 발레는 마잔다란인 여성들은 절대로 베일을 쓰지 않고 외국인과 거리낌 없이 대화하며, 이 지역 내에는 셀 수 없이 많은 시르카시아인과 조지아인들이 살고 있고, 마잔다란인만큼 예의를 갖추는 사람은 본 적이 없었다고 피루즈쿠 부근의 어느 마을 방문기에 적었다.[1]

피에트로 델라 발레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1]

오늘날 페르시아 고유의, 카스피해 마잔다란 지방에 있는 파르스 지역과 이 제국 내의 여러 지역에는 조지아인과 시르카시아인 주민들이 가득 모여 살고 있다. 이들 중 대부분은 지금까지도 기독교 신자로 살고 있으나 치루는 의식은 매우 투박한데, 이들을 인도해줄 신부나 목사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사파비 왕조가 멸망한 후, 카자르 왕조의 아가 무함마드 칸이 1782년 마잔다란 지역을 편입하고 남하하기 시작했다. 1782년 3월 21일, 아가 모하마드 샤는 사리 시를 제국의 수도로 삼겠다고 선포했다. 이후 몇 년간 사리에서 수차례의 전쟁이 벌어지면서, 파트 알리 샤의 명으로 카자르 왕조의 수도는 사리에서 테헤란으로 이전되었다.[1]

5. 문화

타바리스탄 지역 언어인 마잔다라니어는 초기 무슬림 지리학자들의 저술에서 처음 언급되었으며, ''타바리''라고 불렸다. 이 언어의 지리적 분포는 오늘날까지 거의 동일하게 유지되고 있다. 서쪽으로는 탐미샤까지, 동쪽 경계는 말라트까지 이르렀다. 주민들은 아스타라바드의 "''로타라''"와 고르간의 페르시아어를 사용했다. 타바리어의 문어 전통은 신 페르시아어와 거의 비슷하다. 이는 '이스파흐바드'가 통치하는 오랫동안 독립적이고 반독립적인 지역 왕국 때문이었다. 타바리어로 된 가장 오래된 작품은 바반디드 '이스파흐바드' 알-마르주반이 10세기 말 또는 11세기 초에 쓴 ''마르즈반-나마''이며, 페르시아어 번역본으로만 전해진다.[1]

이슬람은 9세기와 10세기에 자이디 시아파가 등장하면서 타바리스탄(길란과 데일람과 마찬가지로)에 처음으로 제대로 정착되었다.[2] 타바리스탄에는 기독교 부족들도 거주했으며, 660년경 아랍인들과 싸웠지만 격렬한 저항 끝에 패배하여 이슬람으로 개종하지 않은 자들은 살해되거나 노예가 되었다.[3] 팔레비 문자를 석비와 기념물 제작, 그리고 아마도 관청에서도 사용하던 전통은 카스피해 지역에서 더 오래 지속되었다. 바반디드 '이스파흐바드'는 11세기 초까지 팔레비 문자를 사용했다.[4] 사산 왕조 시대에도 널리 인기가 있었던 사냥은 이란인들 사이에서 특히 인기가 있었다. 후르시드는 멧돼지, 토끼, 늑대, 표범으로 가득한 공원을 가지고 사냥터로 사용했다.[5]

특정 기간 동안 이란의 카스피해 연안은 고대 이란 민족 의식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783년, 타바리스탄에서 반란이 일어났을 때, 현지인들은 아랍인 남편을 반군에게 넘겨주었다. 바반디드 왕조와 지야리드 왕조와 같은 왕조는 노루즈와 메레간과 같은 전통적인 이란 축제가 타바리스탄에서 계속 존재하는 등 이슬람 이전의 배경을 기념했다.

참조

[1] 세계대백과사전 タバレスターン【Tabarestān】 https://kotobank.jp/[...]
[2] 문서 Tabaris
[3] 웹인용 Islam and poetry in Iran http://www.iranchamb[...] Iran Chamber Society 2011-03-01
[4] 웹인용 Tabaristan http://www.gutenberg[...] Project Gutenburg 2011-03-01
[5] 서적 A concise history of the Middle East https://archive.org/[...] Westview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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