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즈데게르드 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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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야즈데게르드 3세는 사산 제국의 마지막 군주로, 호스로 2세의 손자이다. 그는 사산 제국이 내전과 이슬람 세력의 발흥으로 쇠퇴하는 시기에 즉위했다. 야즈데게르드 3세는 이슬람 세력과의 전투에서 패배하고 도망하는 과정에서 651년 메르브에서 살해당했으며, 그의 죽음으로 사산 제국은 멸망했다. 그의 아들 페로즈 3세는 당나라로 망명하여 사산 왕조 부흥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야즈데게르드 3세의 치세는 제국의 내부 분열과 외부 침략으로 얼룩졌으며, 그의 이름은 조로아스터교 달력의 기준 연도로 사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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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푸르 2세는 사산 왕조 페르시아의 10번째 샤한샤로, 태어나기 전 왕으로 선포되어 즉위하여 중앙 집권화를 이룩하고 로마 제국과의 전쟁 및 영토 확장을 통해 아르메니아에 대한 지배력을 확립했다.
야즈데게르드 3세 | |
---|---|
기본 정보 | |
![]() | |
칭호 | 이란과 비(非)이란의 샤한샤 |
왕조 | 사산 왕조 |
종교 | 조로아스터교 |
통치 | |
즉위 | 632년 6월 16일 |
퇴위 | 651년 |
대관식 | 이스타크르 |
선임자 | 보란 |
후임자 | 관직 폐지 |
개인 정보 | |
출생 | 624년 |
출생지 | 이스타크르 |
사망 | 651년 (27세) |
사망지 | 마르브 |
아버지 | 샤흐리야르 |
자녀 | 페로즈 3세 바흐람 7세 샤흐르바누 (추정) 이즈둔다드 |
2. 어원
야즈데게르드라는 이름은 고대 이란어의 ''yazad yazata''("신성한 존재")와 ''-karta''("만들어진")의 조합으로, "신이 만든"을 의미한다. 이는 이란어의 ''Bagkart''나 그리스어의 ''Theoktistos''와 비슷한 의미이다.
야즈데게르드라는 이름은 다른 언어에서 다음과 같이 표기된다.
언어 | 표기 |
---|---|
중세 페르시아어 | Yazdekert |
신 페르시아어 | Yazd(e)gerd |
시리아어 | Yazdegerd, Izdegerd, Yazdeger |
아르메니아어 | Yazkert |
탈무드 | Izdeger, Azger |
아랍어 | Yazdeijerd |
그리스어 | Isdigerdes |
야즈데게르드 3세는 사산 왕조의 제24대 군주 호스로 2세(590년~628년 통치)의 손자이며, 아버지는 샤흐리야르 왕자였다. 그의 즉위는 극심한 혼란 속에서 이루어졌다.
야즈데게르드 3세는 호스로 2세 사후 4년간 이어진 파괴적인 내전 끝에, 632년 8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파르시그와 파흘라브 양대 귀족 파벌의 타협으로 추대되었으나, 실질적인 권력은 없었고 제국은 이미 심각한 내분과 셰로의 역병으로 약화된 상태였다. 그의 치세는 즉위 초부터 이슬람 세력의 침공과 돌궐, 하자르 등 외부의 위협에 직면했다.
3. 즉위 배경
628년, 할아버지인 호스로 2세가 자신의 아들 카바드 2세에 의해 폐위되고 처형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카바드 2세는 왕위를 확보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 형제와 이복형제를 살해했는데, 여기에는 야즈데게르드 3세의 아버지인 샤흐리야르도 포함되었다. 이 사건은 사산 제국에 큰 충격을 주었으며, 이후 제국은 회복하기 어려운 길을 걷게 된다.
호스로 2세의 몰락은 곧바로 4년간의 내전으로 이어졌다. 이 시기 동안 유력 귀족들은 완전한 자율성을 확보하고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특히 페르시아계 귀족(''Parsig'')과 파르티아계 귀족(''Pahlav'') 사이의 오랜 반목이 다시 격화되면서 국론은 분열되고 국력은 크게 약화되었다. 설상가상으로 몇 달 후, 셰로의 역병이라 불리는 치명적인 역병이 제국 서부 지역을 휩쓸었고, 이로 인해 카바드 2세를 포함한 인구의 절반 가량이 목숨을 잃었다.
카바드 2세가 사망하자 그의 8살 난 아들 아르다시르 3세가 왕위에 올랐으나, 혼란은 계속되었다. 아르다시르 3세는 즉위 2년 만에 사산 제국의 유력 장군이었던 샤흐르바라즈에게 살해당했다. 샤흐르바라즈 역시 왕위를 차지했지만, 40일 만에 파흘라브 귀족 세력의 지도자 파루흐 호르미즈드가 일으킨 쿠데타로 살해되었다. 파루흐 호르미즈드는 호스로 2세의 딸인 보란을 여왕으로 추대했다. 보란 여왕은 1년 만에 폐위되었고, 이후 여러 인물들이 짧은 기간 동안 왕위를 차지하며 혼란이 극에 달했다. 631년에 보란이 다시 복위했으나, 이듬해 ''파르시그'' 귀족 세력의 지도자 피루즈 호스로에게 살해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처럼 극심한 혼란 속에서 제국 내 가장 강력한 두 귀족 세력, 즉 파흘라브의 지도자 로스탐 파로흐자드(파루흐 호르미즈드의 아들)와 파르시그의 지도자 피루즈 호스로는 자신들의 입지가 불안해지자 서로 협력하기로 결정했다. 이들은 내전을 종식시키고 질서를 회복하기 위해 당시까지 살아남은 거의 유일한 왕족이었던 야즈데게르드 3세를 새로운 왕으로 추대하기로 합의했다.
야즈데게르드 3세는 내전 기간 동안 이스타크르에 있는 아나히드 불사원에 숨어 지내다가 그곳에서 즉위식을 올렸다. 이 사원은 사산 왕조의 창건자인 아르다시르 1세(224년~242년 통치)가 즉위했던 역사적인 장소로, 이곳에서 즉위한 것은 혼란에 빠진 제국의 부활을 염원하는 상징적인 의미를 담고 있었다. 그는 사산 왕조의 거의 마지막 생존자였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야즈데게르드 3세가 즉위할 당시 8세의 어린 나이였다는 데 동의한다. 하지만 어린 나이에 즉위한 그는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하기 어려웠고, 제국은 이미 쇠락의 길을 걷고 있었다.
4. 치세
내부적으로는 귀족 간의 갈등과 총독들의 독립 움직임으로 통제력을 상실해 갔으며, 특히 아라비아 반도에서의 영향력은 급격히 축소되었다. 633년 히라 함락을 시작으로 이슬람 군대와의 충돌이 본격화되었고, 636년 알카디시야 전투와 642년 나하반드 전투에서의 결정적인 패배는 제국의 군사력을 와해시켰다. 수도 크테시폰마저 637년 함락되자 야즈데게르드 3세는 동쪽으로 도피하며 저항을 이어가려 했다.[1]
그는 미디아, 이스파한, 에스타크르, 케르만, 사카스탄 등지를 전전하며 군대를 모으려 했으나 번번이 실패하고 내부 배신과 지지 상실을 겪었다.[9] 마지막으로 메르브에서 투르크족과 당나라에 도움을 요청했으나[3] 실질적인 지원을 받지 못한 채 651년 암살당했다. 그의 사후 아들 페로즈 3세 등이 당나라의 지원을 받아 제국 부흥을 시도했지만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3] 야즈데게르드 3세의 치세는 사산 제국의 혼란과 멸망 과정 그 자체였다.
4. 1. 제국의 상황
호스로 2세가 그의 아들 카바드 2세에게 살해된 후, 사산 제국은 4년간의 파괴적인 내전에 휩싸였다. 이 기간 동안 귀족 세력은 완전한 자율성을 얻어 자체 정부를 수립하기 시작했으며, 페르시아계(파르시그)와 파르티아계(파흘라브) 귀족 가문 간의 오랜 적대 관계가 다시 불거져 제국의 부를 분열시켰다. 게다가 셰로의 역병이 서부 지역을 휩쓸어 카바드 2세를 포함한 인구의 절반이 사망하는 등 제국은 큰 타격을 입었다. 여러 차례 왕위 계승자가 바뀌는 혼란 끝에, 제국의 가장 강력한 두 인물인 파흘라브의 지도자 로스탐 파로흐자드와 파르시그의 지도자 피루즈 호스로는 서로의 위협을 느껴 결국 협력하기로 합의하고, 내전을 종식시키기 위해 호스로 2세의 손자인 야즈데게르드 3세를 왕위에 앉혔다. 그는 내전 기간 동안 숨어 지내던 이스타크르의 아나히드 불사원에서 즉위했는데, 이는 제국의 시조인 아르다시르 1세가 즉위했던 장소로, 제국 부활에 대한 희망을 상징하는 행위였다. 당시 그는 8세의 어린 나이였다.
그러나 어린 야즈데게르드 3세는 광대한 제국에 안정을 가져올 실질적인 권위를 갖지 못했다. 제국은 군 지휘관, 궁정 관리, 그리고 서로 싸우며 권력을 다투는 강력한 귀족들 사이의 끊임없는 내부 갈등으로 인해 빠르게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제국의 많은 총독들이 독립을 선포하고 자신만의 왕국을 세웠다. 특히 마준과 예멘의 총독들은 이미 628년에서 632년 사이의 내전 기간 동안 독립을 주장했으며, 이는 아라비아 반도에서 이슬람 세력 아래 통합이 진행되는 가운데 사산 왕조의 영향력이 붕괴하는 결과를 낳았다. 제국의 상황은 파르티아 제국 말기의 봉건 제도와 유사한 모습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야즈데게르드 3세는 파르시그와 파흘라브 양대 파벌 모두에게 정통 군주로 인정받기는 했지만, 제국 전체에 그의 영향력이 미치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그의 통치 초기 몇 년 동안 주화는 주로 파르시그 세력의 기반인 남서부(파르스, 후제스탄)와 남동부(사카스탄) 지역에서만 주조되었다. 제국 북부를 기반으로 한 파흘라브 귀족들은 그의 주화를 주조하는 것을 거부했다. 심지어 남부 지역에서도 야즈데게르드 3세의 통치는 불안정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또 다른 사산 왕조의 왕위 요구자인 호스로 4세가 이 무렵 후제스탄의 수사에서 636년까지 독자적인 주화를 발행했다. 일부 학자들은 야즈데게르드 3세가 수도 크테시폰을 포함한 메소포타미아 지역조차 제대로 통치하지 못했을 가능성을 제기하기도 한다.
설상가상으로 제국은 모든 전선에서 동시에 외부의 침략을 받았다. 동쪽에서는 돌궐족이, 서쪽에서는 하자르족이 각각 아르메니아와 아두르바다간 지역을 습격했다. 사산 제국의 군대는 오랫동안 지속된 비잔티움 제국과의 전쟁과 계속되는 내부 갈등으로 인해 심각하게 약화된 상태였다. 당시 제국의 상황은 매우 혼란스러웠고 국가의 위기는 심각하여, 페르시아인들 사이에서는 제국의 임박한 멸망에 대한 이야기가 공공연하게 나돌았으며 자연재해 속에서 그 징조를 찾으려 했다고 전해진다.
4. 2. 이슬람 세력과의 초기 충돌
633년 5월, 이슬람 군대는 사산 왕조의 중요한 전략적 도시인 히라 근처에서 아자드베가 이끄는 사산 군대를 격파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도시를 점령했다. 히라가 함락된 후, 야즈데게르드 3세는 이슬람 세력에 대해 더 큰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로스탐 파로흐자드는 페르시아 군 장교 바흐만 자두이와 아르메니아 군 장교 잘리누스 휘하의 군대를 이슬람 군대에 대항하여 보냈다. 로스탐은 바흐만에게 비밀리에 "만약 잘리누스가 패배한 채로 돌아온다면, 그의 머리를 베어라."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사산 군대는 다리 전투에서 이슬람 군대를 격파하는 데 성공했다.
636년, 야즈데게르드 3세는 로스탐 파로흐자드에게 침략하는 아랍인들을 제압하라고 명령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오늘날 당신은 이란인들 중 [가장 뛰어난] 사람입니다. 당신은 이란 사람들이 아르다시르 1세 가문이 권력을 잡은 이후 이런 상황에 직면한 적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후 사절들이 야즈데게르드 3세에게 와서 로스탐을 해임하고 백성들이 뭉칠 수 있는 사람으로 교체하는 것을 고려해 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야즈데게르드 3세는 로스탐에게 카디시야에 주둔한 아랍 군대에 대한 평가를 요청했다. 로스탐 파로흐자드는 아랍인들을 "의심하지 않는 양치기들에게 달려들어 그들을 전멸시키는 늑대 무리"라고 묘사했다. 야즈데게르드 3세는 로스탐에게 이렇게 대답했다.
: 그렇지 않다. 아랍인과 페르시아인은 독수리와 같아서 밤에 새들이 둥지를 틀고 산기슭에 머무는 산을 바라보았다. 아침이 되자 새들은 주변을 둘러보았고 독수리가 그들을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새 한 마리가 다른 새들로부터 떨어져 나오면 독수리가 그를 낚아챘다. 그들에게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일은 한 마리를 제외하고 모두 도망가는 것이다.
4. 3. 최후의 항전
636년, 사산 왕조 군대는 알카디시야 전투에서 참패를 겪었다. 이 전투에서 로스탐 파로흐자드, 바흐만 자두야, 잘리누스를 포함한 주요 지휘관들과 아르메니아 왕자 그리고르 2세 노비라크, 무셰그 3세 마미코니안 등이 사망했다. 이 패배 이후 아랍 군대는 별다른 저항 없이 사산 왕조의 수도인 크테시폰으로 진격했다.
야즈데게르드 3세는 국고를 챙겨 종복 1,000명과 함께 미디아의 훌완으로 도망쳤고, 크테시폰 방어는 로스탐 파로흐자드의 동생인 파로흐자드에게 맡겨졌다. 그러나 파로흐자드 역시 제대로 저항하지 않고 훌완으로 후퇴했다. 결국 아랍인들은 크테시폰에 도착하여 도시 서부를 포위한 후 곧 도시 전체를 점령했다.[1] 이 전투에서의 패배는 종종 아랍의 이란 침공의 결정적인 전환점으로 여겨지지만, 실제로는 이란 군대 내부에 만연했던 분파주의가 파멸을 초래할 수 있다는 경각심을 일깨우는 계기가 되었다. 역사가 알-타바리는 크테시폰 함락 이후 "사람들은... 각자의 길을 가려 했지만, 서로를 자극하기 시작했다: '만약 지금 흩어진다면, 다시는 함께할 수 없을 것이다; 이곳은 우리를 서로 다른 방향으로 보내는 곳이다.'"라고 기록하며 당시의 혼란과 위기의식을 전한다.
637년 4월, 아랍인들은 잘룰라 전투에서 또 다른 사산 왕조 군대를 격파했다. 이 패배 이후 야즈데게르드 3세는 미디아 지역 깊숙이 도망쳤다. 그는 크테시폰을 탈환하고 더 이상의 무슬림 진격을 막기 위해 새로운 군대를 일으켜 나하반드로 보냈다. 야즈데게르드가 보낸 군대는 상당한 위협으로 간주되었고, 이에 정통 칼리파 우마르는 쿠파와 바스라의 아랍 군대를 알-누만 이븐 무크린의 지휘 아래 통합하고 시리아와 오만에서 증원군을 받아 사산 왕조에 맞서게 했다.
642년 벌어진 나하반드 전투는 며칠간 지속되었으며, 양측 모두 큰 손실을 입었다. 사산 왕조 측에서는 장군 마르단샤와 피루즈 코스로가 전사했고, 아랍 측 지휘관 알-누만 이븐 무크린도 사망했다. 이 전투는 알-카디시야 전투 이후 사산 왕조에게 두 번째로 겪는 군사적 재앙이었으며, 사실상 제국의 저항 능력을 크게 약화시켰다.
4. 4. 도피
알카디시야 전투에서 패배하고 아랍 세력에게 수도 크테시폰이 함락되자, 야즈데게르드 3세는 동쪽으로 도피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메디아 지역으로 이동한 것으로 보인다.[9]
이후 이스파한으로 가서 아랍인에게 재산을 잃었다고 주장하는 군 장교 시야 휘하의 소규모 군대를 모으려 했으나, 시야와 그의 군대는 야즈데게르드 3세를 배신하고 아랍 측에 합류했다.
야즈데게르드 3세는 다시 에스타크르로 이동하여 파르스주를 거점으로 저항을 조직하려 했다. 하지만 650년, 바스라의 총독 압둘라 이븐 아미르가 이끄는 아랍군이 파르스를 침공하여 페르시아의 저항은 완전히 분쇄되었다. 이 과정에서 에스타크르는 심하게 파괴되었고, 많은 페르시아 귀족을 포함한 4만 명의 방어군이 사망했다고 전해진다.
아랍군의 추격을 피해 야즈데게르드 3세는 케르만으로 도망쳤다. 도중에 비만드에서는 눈보라 덕분에 간신히 추격자들을 따돌리기도 했다. 그러나 케르만에 도착해서도 그곳의 ''마르즈반''(변경 지역 총독)과 사이가 틀어져 결국 사카스탄으로 떠나야 했다. 야즈데게르드 3세가 떠난 후 케르만의 마르즈반은 아랍군과의 전투에서 패배하고 사망했다.
사카스탄에 도착한 야즈데게르드 3세는 지역 총독에게 무리하게 세금을 요구하다가 그마저의 지지도 잃고 말았다. 사카스탄 역시 650년에서 652년 사이에 아랍군에게 점령되었다.
야즈데게르드 3세는 투르크족의 지원을 얻기 위해 메르브로 향했다. 대호라산 지역에 이르렀을 때, 현지 주민들은 계속된 전쟁에 지쳐 아랍과의 평화를 원했지만 야즈데게르드 3세는 이를 거부했다. 그는 차가니안 공국에도 도움을 요청하여 군대를 지원받기도 했다.
그러나 메르브에 도착해서도 그곳의 ''마르즈반''에게 세금을 요구하다가 관계가 악화되었다. 결국 야즈데게르드 3세는 바드기스주의 에프탈족 지배자인 네자크 타르칸과 동맹을 맺었다. 네자크 타르칸은 야즈데게르드 3세를 도와 메르브의 마르즈반을 물리치는 데 도움을 주었다.
4. 5. 당나라의 지원
사산 제국이 이슬람 세력(정통 칼리파 시대)의 침공으로 어려움을 겪자, 야즈데게르드 3세는 동쪽의 당나라에 도움을 요청하기 시작했다. 639년, 그는 처음으로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을 바쳤다".[3] 그러나 이슬람 군대의 공세는 계속되었고, 636년 카디시아 전투에서의 패배와 수도 크테시폰 함락, 642년 니하반드의 전투에서의 대패로 제국의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계속되는 패배 속에서 야즈데게르드 3세는 647년과 648년에 다시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새로운 군대를 형성하기 위해 중국 조정의 지원을 구했다".[3] 하지만 실질적인 도움은 그가 사망한 후인 661년에야 이루어졌다. 당나라는 토카리스탄의 자볼(疾陵城 ''Jilingcheng'')에 "페르시아 도독부"(波斯都督府)를 설치하고, 이미 당나라로 망명해 있던 야즈데게르드 3세의 아들 페로즈 3세를 도독(都督 ''Dudu'')으로 임명했다.[3]
679년, 당나라 군대는 페로즈 3세의 아들인 나르시에를 사산 제국의 왕위에 복위시키기 위해 동행했지만, 군대는 토카리스탄에서 서돌궐 카간국의 칸 아시나 두즈지의 침략을 격퇴하는 데 그쳤다. 이후 나르시에는 20년 동안 이슬람 세력과 싸워야 했다.[3] 페로즈 3세를 비롯한 사산 제국의 황족들은 파미르 고원을 넘어 당나라로 망명하여 저항을 이어갔으나, 사산 제국의 부흥은 이루지 못했다.
5. 죽음
아랍 세력에게 이라크와 수도 크테시폰을 점령당한 후, 야즈데게르드 3세는 동쪽으로 도망쳤다. 642년 니하반드의 전투에서의 결정적인 패배 이후 제국의 영토는 계속 잠식당했고, 그는 호라산의 메르브까지 밀려났다.
결국 651년, 야즈데게르드 3세는 메르브 근처에서 살해당했다. 그의 죽음에 대해서는 몇 가지 다른 설명이 전해진다. 한 가지 설은 그가 피신해 있던 방앗간 주인이 야즈데게르드의 지갑을 노리고 살해했다는 것이다.[9] 다른 설은 메르브의 총독이었던 마후이 수리(:en:Mahuy Suri)가 방앗간 주인을 보내 살해했다는 것이다.[10] 피르다우시는 그의 서사시 《샤나메》에서 마후이 수리가 방앗간 주인에게 야즈데게르드를 살해하라고 명령했으며, 이를 거부하면 목숨과 가문이 위태로울 것이라고 협박했다고 기록했다. 피르다우시에 따르면, 조로아스터교의 모베드(mobad) 라두이를 포함한 일부 인사들이 왕의 살해를 반대했으나, 방앗간 주인은 결국 야즈데게르드를 칼로 찔렀다. 이후 마후이의 병사들은 왕의 옷과 장신구를 벗기고 시신을 버려두었으며, 많은 귀족들은 마후이를 저주했다고 한다.[11][4]
야즈데게르드 3세의 죽음은 400년 이상 지속된 사산 제국의 완전한 종말을 고하는 사건이었다. 그의 죽음으로 아랍 세력은 이란의 나머지 지역을 정복하는 데 있어 구심점을 잃은 저항 세력을 쉽게 제압할 수 있게 되었다. 호라산 전역이 곧 아랍인들에게 정복되었고, 이곳은 이후 트란스옥시아나 지역을 공격하기 위한 발판이 되었다.
전설에 따르면, 야즈데게르드의 시신은 기독교 수도승들에 의해 수습되어 메르브 근처 정원에 비단과 사향으로 장식된 무덤에 안치되었다고 한다. 그의 장례와 묘소 건설은 네스토리우스파 주교 엘리야가 주관했는데, 이는 야즈데게르드의 할머니인 시린이 기독교인이었던 것을 기리기 위함이었다고 전해진다. 수도승들은 마후이를 저주하고 야즈데게르드에게 찬가를 바쳤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제국 말기 사산 왕조와 기독교 공동체 간의 관계가 비교적 우호적이었으며, 일부 기독교인들이 조로아스터교를 믿는 왕에게 이란 귀족들보다 더 충성스러웠을 수 있음을 시사한다. 실제로 야즈데게르드의 아내와 아들 페로즈 3세도 기독교와 관련이 있었다는 전승이 있으며, 페로즈 3세는 망명지인 당나라에 교회를 짓기도 했다. 야즈데게르드 3세는 후대에 비운의 마지막 황제이자 순교한 왕자로 기억되었으며, 이후 이슬람화된 이란의 여러 통치 가문들이 그의 후손임을 주장하기도 했다. 한편, 야즈데게르드 살해에 연루된 마호 수리는 나중에 튀르크족에게 붙잡혀 처형되었다고 전해진다.[5]
야즈데게르드 3세는 교양 있는 인물이었으나, 그의 오만함과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는 성격은 제국의 위기 상황에서 내부 결속을 다지는 데 실패하게 만들었다. 그는 아랍 군대에 쫓겨 여러 도시를 전전하는 망명자 신세였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절대 군주처럼 행동하려 했고, 이는 지역 총독들과의 불화와 고립을 심화시켜 결국 그의 비극적인 죽음으로 이어지는 한 요인이 되었다.[6] 그의 아들 페로즈 3세를 비롯한 일부 황족들은 파미르 고원을 넘어 당나라로 망명하여 재기를 도모했으나, 사산 제국의 부흥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6. 유산
야즈데게르드 3세는 순교한 왕자로 역사에 기억되었으며, 많은 통치자와 관리들이 나중에 이슬람 이란에서 그의 후손임을 주장했다.[12][13]
그의 아들인 페로즈 3세는 당나라로 망명하여 사산 왕조의 부흥을 위해 노력했지만 실패했다.[12][13] 페로즈 3세는 기독교 신자였으며, 망명지인 당나라에 교회를 짓기도 했다. 야즈데게르드의 딸인 샤흐르바누는 후사인 이븐 알리 (Husayn ibn Ali|영어)와 결혼하였으며,[12][13] 다른 딸인 이즈둔다드(Izdundad)는 유대교 지도자인 부스타나이 벤 하니나이 (Bustanai ben Haninai|영어)와 혼인하였다.[12][13] 또한 바하이 신앙의 창시자로 알려진 바하올라는 야즈데게르드의 자손인 것으로 여겨진다.[12][13]
전설에 따르면 야즈데게르드는 메르브 근처에서 기독교 수도승들에 의해 비단과 사향으로 장식된 정원의 높은 무덤에 묻혔다고 한다. 그의 장례식과 묘소 건설은 네스토리우스파 주교 엘리야가 조직했는데, 이는 야즈데게르드의 할머니인 시린이 기독교인이었던 사실을 기리기 위해서였다. 수도승들은 야즈데게르드를 살해하는 데 관여한 마호 수리를 저주하고 "호전적인" 왕과 "아르다시르 1세의 가문"의 몰락을 슬퍼하며 야즈데게르드에게 찬가를 바쳤다고 전해진다. 이 이야기는 당시 사산 제국 내 기독교인들이 조로아스터교를 믿는 사산 왕조에 대해, 심지어 야즈데게르드를 버린 이란 귀족들보다 더 큰 충성심을 보였음을 시사한다. 실제로 야즈데게르드의 아내가 기독교인이었다는 민간 전승이 있으며, 그의 아들 페로즈 3세가 기독교 신자였던 점 등 후기 사산 왕조와 기독교인들 사이에는 비교적 긴밀한 관계가 있었다.
7. 조로아스터교 달력
조로아스터교 달력은 오늘날에도 사용되고 있으며, 야즈데게르드 3세의 재위년을 기준 연도로 사용한다.[7] 이 역법(연도 표기 체계)에는 Y.Z. 접미사가 붙는다.
마기교에서는 야즈데게르드 3세의 죽음을 조로아스터의 천 년의 종말이자 오쉐다르의 천 년이 시작되는 시점으로 간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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