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베이 대공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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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타이베이 대공습은 1945년 5월 31일, 제2차 세계 대전 중 미국 제5공군이 타이베이를 공격한 사건이다. 117대의 B-24 중폭격기가 투입되어 타이베이의 군사 시설과 정부 시설에 3,800발의 폭탄을 투하했다. 이 공습으로 인해 3,000명 이상의 사망자가 발생하고, 수만 명이 집을 잃었으며, 타이완 총독부, 룽산사를 비롯한 많은 건물들이 파괴되었다. 2009년에는 공습 당시 투하된 불발탄이 발견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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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베이 대공습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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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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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 1945년 5월 31일 |
장소 | 일본령 타이완 다이호쿠 주다이호쿠 시 (현재의 타이베이) |
결과 | 연합군의 승리 |
교전 세력 | |
병력 규모 | |
일본 제국 | 사실상 없음 |
미국 | B-24 117기 |
피해 규모 | |
일본 제국 | 민간인 사망자: 3,000명 이상, 부상자/이재민: 수만 명 |
미국 | 없음 |
관련 전쟁 | |
전쟁 | 제2차 세계 대전, 태평양 전쟁 |
2. 배경
1943년 초부터 미국 육군 항공대의 제14공군과 미국, 중화민국 연합 공군은 일본령 대만의 군사 및 산업 목표물에 대한 여러 차례의 공습을 가했다. 이보다 앞서 소련 의용군과 중국 및 인도 연합 공군은 타이호쿠(臺北, 현재의 타이베이) 주변의 군사 기지를 공격했으나, 대부분 소규모로 진행되었다. 미국 지상군이 필리핀의 수빅 만을 점령한 후, 연합군 공군은 대만 섬의 목표물에 대해 더 크고 체계적인 공습을 시작했다. 1944년 10월 12일 이후, 연합군 공군은 헤이토, 코비, 타카오 항구에 위치한 공장과 타카오 외곽의 전투기 생산 시설에 대한 정기적인 공습을 시작했으며, 대만의 수도이자 정치 및 금융 중심지인 타이호쿠는 연합군의 지속적인 공습을 받았다.
2. 1. 제2차 세계 대전 이전
1938년 (쇼와 13년) 2월 23일, 태평양 전쟁 발발 이전에 소련 의용군과 중화민국 공군 제1대대가 쑹산 비행장을 공격한 것이 타이베이가 처음으로 공습을 받은 사례이다.[1]2. 2. 제2차 세계 대전
1943년 초부터 미국 육군 항공대의 제14공군과 미국, 중화민국 연합 공군은 일본령 대만의 군사 및 산업 목표물에 대한 여러 차례의 공습을 가했다. 소련 의용군과 중국 및 인도 연합 공군은 타이호쿠(臺北, 현재의 타이베이) 주변의 군사 기지를 공격했으나, 대부분 작은 목표물을 대상으로 소규모로 진행되었다. 미국 지상군이 필리핀의 수빅 만을 점령한 후, 연합군 공군은 대만 섬의 목표물에 대해 더 크고 체계적인 공습을 시작했다. 1944년 10월 12일 이후, 연합군 공군은 헤이토, 코비, 타카오 항구에 위치한 공장과 타카오 외곽의 전투기 생산 시설에 대한 정기적인 공습을 시작했다. 또한, 대만의 수도이자 정치 및 금융 중심지인 타이호쿠는 그 이후로 연합군의 지속적인 공습을 받았다.
타이완이 공습을 받은 것은 타이베이 대공습이 처음이 아니며, 태평양 전쟁 개시 전인 1938년 2월 23일에도 소련 의용군과 중화민국 공군 제1대대에 의한 쑹산 비행장 공격이 있었다.[1]
1943년 11월 25일에는 미국 육군 항공군의 제14공군 제11폭격중대에 소속된 8기와 미중 혼성 군단 제1대대 제2중대의 6기, 총 14기의 B-25가 제14공군 제23전투대대의 P-51 및 P-38 각 8기의 지원을 받아 중국 쑤이촨 기지를 이륙하여 타이완의 신주 비행장을 폭격, 일본군기 52기에 피해를 입힌 신주 공습을 감행했다. 하지만 이들은 모두 소규모에 군사 거점을 목표로 한 것이었다.[1]
미국군에 의한 본격적인 타이완 공습은 태평양 전쟁 말기, 필리핀 전투를 위해 제38임무부대의 함상기가 내습한 1944년 10월 12일에 시작되었다. 비슷한 시기에 타이완 해전이 전개되었다. 루손섬 점령 후에는 육상기도 빈번하게 내습하여, 핑둥과 후웨이의 제당 알코올 생성 공장, 가오슝 항, 강산 항공창을 목표로 삼았다. 그리고 타이베이도 미국군의 공습 범위에 포함되어 빈번한 공격을 받게 되었다. 당초 타이완에 230기 있던 일본군 전투기는 타이완 해전 이후 전투로 거의 괴멸 상태가 되었다.[1]
미국군의 타이베이 공습으로 가장 피해가 컸던 것은 1945년 5월 31일의 공습이었다. 필리핀의 수빅 만에 주둔한 미국 제5공군은 4개 항공 대대의 총 117대의 B-24를 이 임무에 투입했다. 3대의 B-24를 한 편대로 한 파상 공격으로 5월 31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1시까지 타이베이를 목표로 공습을 가했다.[1]
목표가 된 곳은 대공포가 남아있던 타이베이 성내(현재의 타이베이시 중샤오시루, 중화로, 아이궈시루, 중산난루에 둘러싸인 지역), 성 밖의 타이완 보병 제1연대, 야포병 제48연대(현재의 중정기념당) 등의 군사 시설을 시작으로 타이완 총독부를 포함한 융정, 징정, 원우정, 서원정, 명석정, 욱정 등의 주요 관청가였다. 3,800발의 강력한 폭탄이 투하되었다.[1]
3. 타이베이 대공습 (1945년 5월 31일)
1945년 5월 31일, 제5공군 소속 117대의 B-24 중폭격기가 타이완 역사상 최대 규모의 공습을 위해 출격했다. 이 폭격은 오전 10시경부터 오후 1시까지 계속되었으며, 미군은 대만-오키나와 항공전에서 일본 공군이 소모된 탓에 거의 저항을 받지 않았다. 연합군은 타이호쿠(臺北, 현재의 타이베이)의 군사 및 정부 시설에 약 3,800발의 폭탄을 투하했고, 시내와 일본인 거주 지역의 많은 건물들도 피해를 입었다.[1]
미국은 타이베이 시내의 군사 및 경제 활동 거점을 주요 목표로 삼았지만, 일반 시민 주택도 상당한 피해를 보았다. 당시 시민들의 방공 시설, 성모 무원죄 주교좌 성당, 다다오청의 新舞台|단수이 희관중국어 등이 완전히 불타 없어졌고, 룽산사의 정전 및 좌랑도 폭격으로 소실되었다.[1]
이 공습으로 타이베이 시민 3,000여 명이 당일 사망했는데, 이는 이전까지의 미군 공습으로 인한 타이완 전체 사망자 수와 맞먹는 숫자였다. 이 외에도 수만 명이 부상을 당하고 많은 건물이 피해를 입었다.[1]
피해 시설로는 타이완 총독부 외에도 부총독 관저, 타이완 철도 호텔, 총독부 도서관, 육군 본부, 타이호쿠 제국대학, 타이호쿠 역, 대만은행, 타이호쿠 고등법원, 타이호쿠 신공원 등이 있었다.[1]
3. 1. 주요 피폭 시설
1945년 5월 31일, 미군은 타이베이에 대규모 공습을 감행하여 타이완 총독부를 비롯한 주요 시설들이 큰 피해를 입었다.




- 타이완 총독부: 위장까지 했지만 직격탄을 맞아 건물이 심하게 파손되고 화재가 발생했다. 이로 인해 기능을 상실했고, 중화민국에 인수될 때까지 수리되지 못했다.[1] 엘리베이터와 계단이 붕괴되고, 지하로 피난했던 사람들이 생매장되는 참사도 발생했다.[1]
- 총무 장관 관저, 타이완 철도 호텔, 타이완 총독부 도서관, 타이완 전력 주식회사, 타이완군 사령부, 타이베이 제국대학 부속 병원, 타이베이역, 고등 법원, 도량형소 등의 관청도 피해를 입었다.[1]
- 성모 무원죄 주교좌 성당 (펑라이 주좌 천주당), 다다오청의 新舞台|단수이 희관중국어 등이 전소·소실되었다.[1] 당시 시민들의 방공 시설이었던 성모 무원죄 주교좌 성당도 폭격으로 파괴되었다.[1]
- 룽산사 정전 및 좌랑도 폭격으로 소실되고, '석가출산'도 화재에 휘말렸다.[1]
4. 피해
1945년 5월 31일, 제5공군 부대는 117대의 컨솔리데이티드 B-24 리버레이터 중폭격기를 동원하여 타이베이 대공습을 감행했다. 오전 10시부터 오후 1시까지 이어진 폭격으로, 미군은 타이베이의 군사 및 정부 시설에 약 3,800발의 폭탄을 투하했다. 대만-오키나와 항공전에서 일본 공군이 큰 피해를 입어, 대만 내 일본 전투기 부대가 거의 전멸했기 때문에, 미군은 일본군의 저항을 거의 받지 않았다.[2]
타이완 총독부는 짙은 위장에도 불구하고 직격탄을 맞아 화재로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이 외에도 부총독 관저, 타이완 철도 호텔, 총독부 도서관, 육군 본부, 타이호쿠 제국대학, 타이호쿠 역, 대만은행, 타이호쿠 고등법원, 타이호쿠 신공원 등 여러 시설이 피해를 입었다.
타이호쿠 현립 타이호쿠 제1여자고등학교, 타이호쿠의 화산 가톨릭 교회, 룽산 사 등 민간 시설도 폭격을 받았다. 특히 룽산 사는 본당과 왼쪽 복도가 공격받고 화재로 인해 많은 귀중한 유물과 예술 작품이 소실되었다.[2]
이 공습으로 3,000명이 넘는 사망자가 발생했는데, 이는 이전까지 연합군의 대만 공습으로 인한 사망자 수를 모두 합친 것보다 많은 수치였다. 수만 명의 사람들이 집을 잃거나 피난했으며, 많은 건물들이 파괴되었다.
2009년 7월 15일, 중정기념당 근처 타이베이 첩운 신이선 건설 현장에서 이 공습 때 투하된 것으로 추정되는 불발탄 두 개가 발견되어 중화민국 국군 폭탄 처리반이 제거했다.
타이완 총독부 청사는 가장 큰 물적 피해를 입은 곳 중 하나였다. 위장이 실시되었지만, 건물 우익이 피탄되었고, 중앙 탑 옆의 엘리베이터와 계단, 그 사이에 있던 사무실이 붕괴되었다. 발생한 화재는 진화에 수일이 걸릴 정도로 대규모였으며, 결과적으로 대 가옥 면적의 83%가 피해를 입어 사용 불가능하게 되었다. 당시 건물 내에 있던 사람들이 지하로 피난했는데, 계단이 잔해로 메워져 전원 생매장되는 참사도 발생했다.
타이베이 대공습은 미국군이 타이베이 시내의 군사·경제 활동 거점을 주요 목표로 했다고 하지만, 일반 시민의 주택 피해도 적지 않았다. 당시 시민의 방공 시설이었던 성모 무원죄 주교좌 성당과 다다오청의 新舞台|단수이 희관중국어 등이 전소·소실되었고, 룽산사의 정전 및 좌랑도 폭격되어 소상 '석가출산'도 전재에 휘말렸다.
타이베이 대공습으로 타이베이 시민 3,000여 명이 당일 사망했다. 이는 종전의 미국군 공습에 의한 전 타이완에서의 사망자 수에 필적하는 것이었다. 이 외에 수만 명의 부상자와 많은 건물의 피해가 있었다.
5. 결과 및 영향
이 공습으로 3,000명이 넘는 사망자가 발생했으며, 이는 연합군의 대만 공습으로 인한 이전의 모든 사망자 수를 초과하는 것이었다. 수만 명의 사람들이 피난을 가거나 집을 잃었고, 많은 건물들이 공격이나 그로 인한 화재로 파괴되었다.[1] 공습은 타이베이 시가 연합군의 공중 공격에 취약하다는 것을 드러냈으며, 총독은 학교 및 기타 시설을 대피시키고 더 많은 공습 훈련을 실시하도록 명령했다.[1]
이 공습으로 0식 함상 전투기, 자전, 뇌전, 질풍 등의 전투기 및 92식 중기관총, 93식 중기관총, 96식 고사포, 88식 7cm 야전 고사포, 150mm 고사포 등 방공 체제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이 밝혀졌고, 그 후 대만 총독부에 의해 각종 학교에 대한 집단 대피 및 방공 훈련이 추진되었다.[1]
2009년 7월 15일, 이 공습 중에 투하된 것으로 추정되는 두 개의 불발탄이 중정기념당 근처 타이베이 첩운 신이선 건설 현장(항저우난루, 중정기념당 인접 지역) 지하 1미터 지점에서 작업자에 의해 발견되었지만, 무사히 처리되었다.[1] 중화민국 국군의 폭탄 처리반이 이를 제거했다.[1]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미국의 동맹국이었던 중화민국 정부는 매스 미디어 및 역사 교과서에서 이 공습을 배제하는 등 비판을 약화시켰다.[1]
6. 역사적 평가 및 논란
이 공습으로 0식 함상 전투기, 자전, 뇌전, 질풍 등의 전투기 및 92식 중기관총, 93식 중기관총, 96식 고사포, 88식 7cm 야전 고사포, 150mm 고사포 등 방공 체제가 기능 부전에 빠진 것이 판명되었고, 그 후 대만 총독부에 의해 각종 학교에 대한 집단 대피 및 방공 훈련이 추진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미국의 동맹국이었던 중화민국 정부는 매스 미디어 및 역사 교과서에서 이 공습을 배제하는 등 비판을 약화시켰다.
2009년 7월 15일 타이베이 첩운 신이선 항저우난루 공사 현장 (중정기념당 인접 지역) 지하 1미터 지점에서 이 공습 당시의 것으로 보이는 불발탄 2발이 작업자에 의해 발견되었지만, 무사히 처리되었다.
참조
[1]
문서
臺北大空襲
[2]
웹사이트
THE INTRODUCTION OF LUNGSHAN TEMPLE
http://www.lungshan.[...]
2019-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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