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문센의 남극점 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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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문센의 남극점 원정은 노르웨이의 탐험가 로알 아문센이 1911년 12월 14일, 5명의 대원과 함께 남극점에 도달한 역사적인 탐험이다. 아문센은 북극점 정복을 목표로 했으나, 경쟁 상황을 고려하여 남극점으로 방향을 전환했다. 그는 '프람호'를 이용하여 남극 대륙에 기지를 건설하고, 썰매 개와 스키를 활용한 효율적인 이동 전략을 통해 남극점 정복에 성공했다. 이 탐험은 남극점 도달 경쟁에서 영국 탐험가 로버트 팰컨 스콧보다 앞선 성과였으며, 탐험 이후 아문센은 세계적인 영웅으로 칭송받았다. 하지만 스콧의 비극적인 죽음으로 인해 아문센의 업적은 한동안 가려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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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문센의 남극점 원정 | |
---|---|
탐험 개요 | |
이름 | 아문센의 남극점 탐험 |
지도자 | 로알 아문센 |
시작 위치 | 프람헤임, 대빙벽 |
시작 날짜 | 1911년 10월 19일 |
종료 위치 | 지리적 남극점 |
종료 날짜 | 1911년 12월 14일 |
선박 | 프람 호 |
대원 | 로알 아문센 헬메르 한센 스베레 하셀 오스카르 위스팅 올라프 비알란 (해안 근무 14명 추가) |
주요 성과 | |
업적 | 최초의 남극점 도달 에드워드 7세 랜드 최초 탐험 악셀 헤이베르크 빙하 발견 |
![]() | |
참고 | |
날짜 | 일부 출처에서는 12월 15일로 표기함. 서반구와 동반구, 날짜 변경선이 남극점에서 만나기 때문에 두 날짜 모두 맞다고 볼 수 있음. 아문센은 호바트에 도착하여 처음 전보로 보낸 보고서와 상세 기록인 "남극" 모두에서 12월 14일을 언급함. |
2. 배경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는 여러 국가들이 극지 탐험에 경쟁적으로 나섰던 시기였다. 특히 남극 탐험 영웅 시대라고 불리는 이 시기에는 영국, 스웨덴, 독일, 프랑스 등 유럽 열강들이 남극 탐험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4]
노르웨이는 오랜 해양 탐험 전통을 가진 국가였다. 아문센 역시 이러한 배경에서 성장했다. 그는 프리드쇼프 난센과 같은 노르웨이 탐험가들의 업적에 영향을 받아 극지 탐험가의 꿈을 키웠다.
1906년 11월, 미국의 로버트 피어리는 북극점 탐험에 실패하고 돌아와 새로운 최북단 기록을 세웠다고 주장했지만, 이 기록은 논란의 여지가 있었다.[2] 1907년 7월에는 아문센의 동료였던 프레데릭 쿡 박사가 북극점 정복을 시도했다는 소문이 돌았다.[4] 같은 시기, 어니스트 섀클턴의 님로드 원정대가 남극으로 출발했고, 로버트 팰컨 스콧은 섀클턴의 실패에 대비하여 추가 탐험을 준비하고 있었다.[5] 아문센은 영국에 우선권을 양보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지만, 여전히 북극 탐험을 우선적인 목표로 생각했다.[6]
2. 1. 초기 생애와 탐험 경험
아문센은 1872년 노르웨이 프레드릭스타에서 선주의 아들로 태어났다. 1893년 오슬로 대학교 의학 공부를 중단하고 물개잡이 배 '마그달레나'호의 선원이 되어 북극 항해를 시작했다.[1] 여러 항해를 통해 2등 항해사 자격을 얻었고, 노르웨이 하당에르비다 고원에서 크로스컨트리 스키 실력을 키웠다.[2]1896년, 프리드쇼프 난센의 극지 탐험에 영감을 받아 아드리앵 드 게를라슈가 이끄는 벨기에 남극 탐험에 1등 항해사로 합류, ''벨지카''호에 승선했다.[3] 1898년 초, ''벨지카''호는 남극 해빙에 갇혀 거의 1년간 갇히게 되었고, 탐험대는 의도치 않게 남극에서 월동한 최초의 탐험대가 되었다. 이 시기 선원들은 우울증, 기아, 정신 이상, 괴혈병에 시달렸다.[4] 아문센은 이 경험을 통해 극지 탐험 기술, 특히 보조 장비, 의복, 식단에 대한 중요한 교훈을 얻었다.[5]
''벨지카''호의 항해는 남극 탐험 영웅 시대의 시작을 알렸고, 이후 영국, 스웨덴, 독일, 프랑스 등에서 탐험대가 파견되었다.[4] 1899년 노르웨이로 돌아온 아문센은 북서 항로 탐험을 계획했다. 선장 면허를 취득하고, 작은 슬루프 ''요아''호를 구입하여 북극 항해에 적합하도록 개조했다.[6] 스웨덴과 노르웨이의 오스카르 2세 국왕의 후원과 난센의 지원을 받아 1903년 6월 6명의 선원과 함께 출발했다.[6] 1906년까지 이어진 항해는 성공적이었고, 수 세기 동안 항해자들을 좌절시켰던 북서 항로를 정복했다.[7] 34세의 아문센은 국가적 영웅이자 최고의 극지 탐험가로 인정받았다.[6]
2. 2. 북서 항로 탐험
1909년 3월, 어니스트 섀클턴이 남위 88도 23분, 남극점에서 97nmi 떨어진 지점까지 도달했다가 돌아왔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아문센은 이를 두고 남극점에 "작은 구석이 남아 있다"고 표현했다.[1] 그는 섀클턴의 업적을 높이 평가하며, 섀클턴은 남극의 프리드쇼프 난센과 같다고 칭송했다.[2] 섀클턴의 탐험 이후, 로버트 팰컨 스콧은 즉시 남은 "작은 구석"을 탐험하여 대영 제국의 영광으로 만들겠다는 의지를 밝히며 테라 노바 원정을 준비했다.[3]2. 3. 남극 탐험 영웅 시대
''벨지카''호의 항해는 남극 탐험 영웅 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사건이었으며,[1] 곧 영국, 스웨덴, 독일, 프랑스에서 잇따라 탐험대가 파견되었다.[1]1906년 11월, 미국의 로버트 피어리는 북극점 탐험에 실패하고 돌아와 새로운 최북단 87° 6′를 기록했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후대 역사학자들에 의해 논란이 되었다.[2] 그는 즉시 추가 탐험 자금을 모으기 시작했다.[3] 1907년 7월, 아문센의 ''벨지카''호 동료였던 프레데릭 쿡 박사는 겉으로는 사냥 여행인 척했지만 북극점 정복을 시도했다는 소문이 돌면서 북쪽으로 출발했다.[4] 한 달 후, 어니스트 섀클턴의 님로드 원정대가 남극으로 출항했고, 로버트 팰컨 스콧은 섀클턴이 실패할 경우를 대비하여 추가 탐험을 준비하고 있었다.[5]
3. 준비
아문센은 1896년 프리초프 난센의 극지 탐험에 영향을 받아 벨기에 남극 원정대에 1등 항해사로 합류했다.[1] 1898년 초, 탐험선 ''벨기카''호는 벨링스하우젠 해에서 유빙에 갇혀 거의 1년 동안 남극해에서 월동했다. 이 기간 동안 선원들은 우울증, 기아, 광기, 괴혈병에 시달렸지만, 아문센은 이 경험을 극지 탐험 기술, 특히 보조 기구, 의류, 식량에 대한 교재로 삼았다.[2]
''벨기카''호의 항해 이후, 아문센은 1899년 노르웨이로 돌아와 북서 항로 완주 계획을 세웠다. 1903년 6월, ''요아호''를 타고 6명의 승무원과 함께 출항하여 1906년 항해에 성공, 국민적 영웅이 되었다.[3]
1909년, 프레더릭 쿡과 로버트 피어리의 북극점 도달 소식에 아문센은 남극점 정복으로 계획을 변경했다. 후원자들의 반대와 프람호 사용 취소, 노르웨이 의회의 탐험 중단 가능성 때문에 이 사실을 비밀에 부쳤다.[4] 그는 형 레온과 부사령관 닐센에게만 알렸다.[5]
수정된 탐험 일정에 따라 ''프람''호는 1910년 8월 노르웨이를 출발, 마데이라 제도를 거쳐 로스해의 고래 만에 기지를 설치할 계획이었다. 고래 만은 스콧의 기지보다 극점에 더 가까웠다.[8] 어니스트 섀클턴은 고래 만의 얼음이 불안정하다고 했지만, 아문센은 안전하다고 판단했다.[9]
출항 전 자금 확보가 어려워지자 아문센은 집을 담보로 잡았다. 1910년 9월 6일 마데이라의 푼샬에 도착, 3일 후 승무원들에게 계획을 알리고 동의를 얻었다. 9월 9일 푼샬을 떠나기 전, 스콧에게 계획 변경을 알리는 전보를 보냈지만, 목적지는 언급하지 않았다.
아문센은 개썰매를 주 운송 수단으로 선택, 100마리의 그린란드 썰매개를 주문했다. 이 개들은 짐 운반, 식량으로도 사용되었다.[1] 스키 부츠는 아문센이 직접 디자인했고,[2] 극지 의류로는 바다표범 가죽 수트와 네칠릭 이누이트 스타일의 옷이 포함되었다.[3] 썰매는 노르웨이산 물푸레나무와 미국산 히코리 나무로 만들었고, 스키판은 히코리 나무로 제작했다.[4] 괴혈병을 막기 위해 썰매 여행 식단에 물범 고기를 추가하고, 채소가 든 페미칸을 준비했다.[8][9]
3. 1. 난센과 프람호
1893년, 프리초프 난센은 자신의 배 프람호를 시베리아 북해안 근처의 북극해 유빙 속으로 들어가게 하여 그린란드 방향으로 표류시켜 그 과정에서 북극점을 통과하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표류는 북극점에 가까워지지 못했고, 난센과 얄마르 요한센이 도보로 북극점에 도달하려는 시도 역시 실패했다.[1] 그럼에도 난센의 전략은 아문센의 북극 계획의 기초가 되었다. 아문센은 베링 해협을 통과하여 북극해에 들어가면 난센이 출발한 지점보다 상당히 동쪽이므로, 배가 더 북쪽으로 표류하여 북극점 근처를 통과할 것이라고 생각했다.아문센은 난센과 상의했는데, 난센은 ''프람호''가 그러한 임무에 유일하게 적합한 배라고 주장했다. ''프람호''는 1891년부터 1893년까지 노르웨이의 주요 조선업자이자 조선 기술자인 콜린 아처가 난센의 엄격한 요구에 따라 설계하고 건조했다. 이 배는 장기간 북극해의 가장 혹독한 기상 조건에 노출되어도 견딜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이 배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둥글게 처리된 선체였으며, 난센에 따르면 "얼음에 갇히더라도 뱀장어처럼 미끄러져 떠오른다"는 것이었다. 선체의 강도를 높이기 위해, 구할 수 있는 가장 단단한 목재인 남아메리카의 그린하트재로 덮여 있었고, 가로대와 버팀목이 그 전 길이에 걸쳐 고정되어 있었다. 배의 너비는 약 10.97m인 반면, 길이는 약 39.01m로, 상당히 뭉툭한 외관을 가지고 있었다. 이 형태는 얼음 속에서 강도를 높였지만, 대양에서는 항해 성능이 좋지 않아 느리게 움직이고, 멀미를 악화시키는 롤링이 일어나기 쉬웠다. 그러나 외관, 속도, 항해 성능은 몇 년에 걸칠지도 모르는 항해 동안 승무원을 위해 튼튼하고 따뜻한 대피소를 제공하는 것에 비하면 부차적인 것이었다.
''프람호''는 난센의 원정에서 북극의 얼음에 3년 가까이 잠겨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무사한 상태였다. 돌아온 후 재정비되었고, 오토 스베르드루프의 지휘 아래 4년 동안 캐나다 북부 섬의 무인 지역 약 258997.52km2의 지도 제작과 탐험에 사용되었다. 스베르드루프의 항해가 1902년에 끝난 후, ''프람호''는 크리스티아니아에 묶여 있었다. 이 배는 사실상 국가 소유였지만, 난센이 처음 사용했다는 것이 암묵적으로 이해되었다. 난센은 1896년에 북극해에서 돌아온 후, ''프람호''로 남극에 원정하기를 열망했지만, 1907년까지 그런 희망이 시들해졌다. 그해 9월 말, 아문센은 난센의 집에 불려가 배를 양도받았다.
3. 2. 탐험대 구성
로알 아문센은 장거리 탐험에서 경험이 풍부하고 서로 잘 협력할 수 있는 동료를 선택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3] 그는 이전 탐험 경험을 바탕으로 안정적이고 호환 가능한 팀을 구성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아문센은 원정대 장교로 세 명의 해군 중위를 선택했다. 토르발 니센은 부사령관이 되었고, 히알마르 프레드릭 예르트센은 의학적 경험이 없음에도 원정대 의사로 임명되어 외과 및 치과 분야의 속성 교육을 받았다.[3] 크리스티안 프레스트루드 또한 장교로 합류했다. 해군 포병 오스카 위스팅은 프레스트루드의 추천으로 합류했는데, 그는 여러 일에 능숙했고 썰매 개를 다루는 자신만의 방식을 개발하여 유용한 아마추어 수의사가 되었다.
스키 챔피언이자 숙련된 목수, 스키 제작자인 올라브 비아알란이 초기에 선발되었다. 비아알란은 스키 실력이 뛰어난 노르웨이 텔레마르크 지방 모르게달 출신이었다. 아문센은 스키와 썰매 개가 극지 운송에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라고 믿고 가장 숙련된 개 썰매꾼을 모집하고자 했다. ''Gjøa'' 원정에서 능력을 증명한 헬메르 한센이 다시 합류하기로 동의했고, 개 전문가이자 스베르드루프의 1898~1902년 ''프람'' 항해 베테랑인 스베레 하셀도 합류했다. 목수 예르겐 스투베루드는 원정대 기지로 사용될 휴대용 건물을 지었다. 유능한 요리사의 중요성을 고려하여 아문센은 ''Gjøa''호에서 요리사로 일했던 아돌프 린드스트룀을 영입했다.
히알마르 요한센은 프리드쇼프 난센의 요청으로 합류했다. 난센과의 탐험 이후 요한센은 정착하지 못하고 술과 빚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난센은 그에게 마지막 기회를 주고 싶어했고, 아문센은 이를 거절하지 못하고 요한센을 탐험대에 포함시켰다.
원정대에는 러시아 해양학자 알렉산드르 쿠친과 스웨덴 엔지니어 크누트 순드벡, 두 명의 외국인이 포함되었다.
이처럼 아문센은 남극점 정복이라는 목표를 향해 나아가기 위해 경험 많고 다양한 기술을 가진 인물들을 중심으로 탐험대를 구성했다.
3. 3. 계획 변경
1909년 9월, 프레더릭 쿡과 로버트 피어리가 각각 북극점에 도달했다는 소식이 신문을 통해 보도되었다. 쿡은 1908년 4월에, 피어리는 1년 뒤에 도달했다고 주장했다. 아문센은 이들의 주장에 대한 논평을 피하면서도 "아마도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1] 그는 경쟁적인 주장에 대한 논란을 피했지만, 북극점 정복이라는 매력이 사라지면 대중의 관심과 자금 지원을 유지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는 "탐험을 구제하려면... 나에게 남은 것은 마지막 큰 문제, 즉 남극점을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것뿐이었다"라고 기록했다. 결국 아문센은 남극으로 향하기로 결정했으며, 북극 탐험은 남극점이 정복될 때까지 "1~2년" 기다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2]아문센은 이러한 계획 변경을 공개적으로 알리지 않았다. 스콧의 전기 작가 데이비드 크레인에 따르면, 탐험대의 공적 및 사적 자금은 북극에서의 과학 연구를 위해 모금된 것이었기 때문에 후원자들이 이러한 갑작스러운 변경을 이해하거나 동의할 것이라는 보장이 없었다.[3] 또한, 변경된 목표는 프리드쇼프 난센이 ''프람''호 사용을 취소하게 하거나, 노르웨이 의회가 스콧의 탐험을 방해하고 영국을 불쾌하게 할 것을 우려하여 탐험을 중단시킬 수도 있었다.[4] 아문센은 자신의 형 레온과 부사령관 닐센을 제외한 모든 사람에게 자신의 의도를 숨겼다.[5] 이러한 비밀주의는 여러 문제를 야기했다. 스콧은 아문센에게 두 탐험대가 지구 반대편에서 비교 판독을 할 수 있도록 기기를 보냈지만,[6] 스콧이 자신의 모터 썰매를 시험하기 위해 노르웨이에 머물면서 협력을 논의하기 위해 아문센에게 전화를 걸었을 때, 아문센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7]
수정된 탐험 일정에 따라 ''프람''호는 1910년 8월 노르웨이를 출발하여 대서양의 마데이라 제도로 항해해야 했다. 이곳이 유일한 기항지였다. 그곳에서 배는 남극의 로스해로 직행하여 고래 만으로 향할 예정이었다. 고래 만은 로스 빙붕의 입구였으며, 아문센이 기지 캠프를 만들 계획이었던 곳이다. 고래 만은 배가 진입할 수 있는 로스해의 최남단 지점이었으며, 맥머도 사운드에 있는 스콧의 기지보다 60nmi 더 극점에 가까웠다.[8] 1907~09년 어니스트 섀클턴은 고래 만의 얼음이 불안정하다고 생각했지만, 섀클턴의 기록을 연구한 아문센은 이곳의 빙벽이 여울 또는 암초에 접지되어 안전하고 안정적인 기지를 지원할 것이라고 결론지었다.[9] 해안 파티를 상륙시킨 후, ''프람''호는 다음 해 초 해안 파티를 데리러 오기 전에 대서양에서 해양 연구를 수행할 예정이었다.[10]

출항 전 몇 달 동안 원정대 자금 확보는 더욱 어려워졌다. 대중의 관심이 줄어들면서 신문 계약이 취소되었고, 의회는 추가 지원 요청을 거절했다. 아문센은 원정대를 유지하기 위해 집을 담보로 잡아야 했다. 심각한 빚에 시달리던 그는 개인적인 재정적 파산을 막기 위해 전적으로 원정대의 성공에 의존하게 되었다.
북대서양에서 한 달간의 시험 항해를 마친 후, ''프람''호는 1910년 7월 말 크리스티안산으로 항해하여 개들을 태우고 출항 준비를 마쳤다. 크리스티안산에 있는 동안 아문센은 부에노스아이레스 주재 노르웨이 장관의 형제인 페테르 "돈 페드로" 크리스토퍼슨으로부터 도움을 제안받았다. 크리스토퍼슨은 몬테비데오 또는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프람''호에 연료 및 기타 물품을 제공하겠다고 제안했고, 아문센은 이 제안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8월 9일 ''프람''호가 출항하기 직전, 아문센은 원정대의 실제 목적지를 두 명의 젊은 장교인 프레스투르와 예르트센에게 밝혔다. 마데이라의 푼샬까지의 4주간의 항해 동안, 일부 준비에 대해 이해할 수 없고 장교들의 회피적인 답변에 직면한 승무원들 사이에서 불안한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아문센의 전기 작가인 롤랜드 헌트포드는 이것이 "의심과 침체된 분위기를 조성하기에 충분했다"고 말한다.
''프람''호는 9월 6일에 푼샬에 도착했다. 3일 후 아문센은 승무원들에게 수정된 계획을 알렸다. 그는 아직 최종 목적지인 북극으로 가는 길에 남극점을 "우회"할 의향이 있다고 말했지만 잠시 기다려야 했다. 아문센이 새로운 제안을 설명한 후, 각자 계속 갈 의향이 있는지 질문했고 모두 긍정적으로 대답했다. 아문센은 난센에게 장문의 설명 편지를 썼는데, 쿡과 피어리의 북극 정복 주장이 자신의 원래 계획에 "사형 선고"를 내렸다고 강조했다. 그는 필요에 의해 이 행동을 강요받았다고 느끼고 용서를 구했으며, 자신의 업적이 궁극적으로 어떤 불쾌함이라도 만회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9월 9일 푼샬을 떠나기 전에 아문센은 스콧에게 계획 변경을 알리기 위해 전보를 보냈다. 스콧의 배 ''테라 노바''는 6월 15일에 카디프를 출발하여 10월 초에 호주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아문센은 남쪽으로 향하고 있다는 간략한 정보를 담아 멜버른으로 전보를 보냈다. 노르웨이의 계획이나 남극에서의 목적지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스콧은 왕립지리학회(RGS) 서기인 존 스콧 켈티에게 "나는 조만간 알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썼다. 아문센의 수정된 계획에 대한 소식은 10월 초에 노르웨이에 도착했고 일반적으로 적대적인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난센은 축복과 따뜻한 지지를 보냈지만, 아문센의 행동은 언론과 대중으로부터 거의 예외 없이 비난을 받았고 자금 지원은 거의 완전히 끊어졌다. 영국의 반응은 예상대로 부정적이었다. 켈티가 처음에는 믿지 못하겠다는 반응을 보이다가 곧 분노와 경멸로 바뀌었다. 영향력 있는 전 RGS 회장인 클레멘츠 마컴 경은 "아문센의 비열한 행위에 대한 자세한 내용을 스콧에게 보냈습니다... 내가 스콧이라면 그들이 상륙하지 못하게 할 것입니다"라고 썼다. 세상의 반응을 알지 못한 채, ''프람''호는 4개월 동안 남쪽으로 항해했다. 1911년 1월 1일에 첫 번째 빙산을 발견했고, 1월 11일에는 장벽 자체가 보이기 시작했으며, 1월 14일에는 ''프람''호가 고래 만에 있었다.
3. 4. 운송 수단, 장비 및 물품
아문센은 개썰매를 주 운송 수단으로 선택했는데, 이는 영국 탐험가들이 개를 싫어하는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그는 "개가 주인을 이해하지 못하는 일이 있을까? 아니면 개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주인일까?"라고 기록하며, 100마리의 북그린란드 썰매개를 주문했다. 이 개들은 짐 운반뿐만 아니라, 다른 개의 먹이와 탐험대원에게 신선한 고기를 제공하는 역할도 했다.[1]탐험대의 스키 부츠는 아문센이 특별히 디자인하여 2년간의 테스트와 수정을 거친 결과물이었다.[2] 극지 의류로는 북 그린란드산 바다표범 가죽으로 만든 수트와 순록 가죽, 늑대 가죽, 버버리(Burberry) 천(개버딘)으로 만든 네칠릭 이누이트 스타일의 옷이 포함되었다.[3] 썰매는 노르웨이산 물푸레나무로 틀을 만들고 미국산 히코리 나무 활주부에 철을 씌웠으며, 스키판 역시 히코리 나무로 만들어 크레바스에 빠질 위험을 줄였다.[4]
텐트는 바닥이 내장되어 있고 단일 폴만 필요했으며, "지금까지 사용된 것 중 가장 튼튼하고 실용적인" 것이었다.[5] 행군 중 요리를 위해 아문센은 난센이 고안한 조리기구 대신 스웨덴산 프리무스 스토브를 선택했는데, 이는 난센의 조리기구가 너무 많은 공간을 차지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6]
아문센은 벨지카 호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괴혈병의 위험을 인지하고 있었다. 비록 당시에는 비타민 C 결핍이 원인이라는 것을 몰랐지만, 신선한 고기를 섭취하면 이 질병에 대처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7] 이를 위해 썰매 여행 식단에 정기적으로 물범 고기를 추가할 계획을 세웠고,[8] 채소와 오트밀이 포함된 특별한 종류의 페미칸도 주문했다.[9] 탐험대는 의약품, 축제, 사교 행사 등에 사용할 와인과 증류주를 충분히 갖추고 있었다. 또한, 벨지카 호에서의 사기 저하를 염두에 두고 약 3,000권의 책, 축음기, 다량의 레코드, 다양한 악기를 갖춘 도서관을 마련하여 여가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했다.[10]
4. 탐험 과정
1911년 2월 초, 로알 아문센은 다음 해 여름 남극점 공격에 앞서 장벽을 가로지르는 보급 기지 구축 여행을 조직했다. 예상 경로를 따라 설치될 보급 기지는 탐험대가 운반할 식량과 연료의 양을 제한할 목적이었다.
2월 10일, 아문센, 프레스루드, 헬머 한센, 요한센은 18마리의 개가 끄는 3대의 썰매로 첫 번째 보급 기지 설치 여행을 시작했다. 이전 탐험가들의 책을 통해 장벽에 대해 알고 있었고, 어려운 조건을 예상했지만, 실제 장벽 표면은 일반 빙하와 매우 유사했다. 첫날 15nmi (약 28km)를 이동했고, 아문센은 개들이 이러한 조건에서 잘 달리는 것을 보고 영국인들이 장벽에서 개를 사용하는 것을 꺼리는 것에 의아해했다. 2월 14일, 남위 80° 지점에 도달하여 보급 기지를 설치하고 2월 16일에 프람헤임으로 돌아왔다.[3]
2월 22일, 8명의 대원, 7대의 썰매, 42마리의 개와 함께 두 번째 보급 기지 설치 여행을 떠났다. 그러나 장벽 상태는 급격히 악화되어 평균 기온이 9°C 하락했고, 거친 눈이 얼음 표면 위로 날렸다. 때때로 -40°C까지 내려가는 추위 속에서 3월 3일 남위 81° 지점에 두 번째 보급 기지를 설치했다. 아문센, 헬머 한센, 프레스루드, 요한센, 위스팅은 가장 강한 개들과 함께 남위 83° 지점까지 가려 했지만, 어려운 조건으로 3월 8일 남위 82° 지점에서 멈췄다. 개들이 지쳐가는 것을 본 아문센은 3월 22일 가벼운 썰매로 프람헤임에 돌아왔다.[6]
아문센은 극야가 오기 전 더 많은 보급품을 남쪽으로 옮기고자 했다. 3월 31일, 요한센이 이끄는 7명의 탐험대가 약 1088.62kg의 물개 고기를 싣고 남위 80° 보급 기지로 향했다. 탐험대는 균열 지대로 들어가 예상보다 사흘 늦은 4월 11일에 돌아왔다.[7]
보급 기지 설치 여행을 통해 총 약 3401.94kg의 보급품을 실은 세 개의 보급 기지가 설치되었다. 여기에는 약 1360.78kg의 물개 고기와 40impgal의 등유가 포함되었다. 아문센은 특히 두 번째 여행에서 개들이 무거운 썰매를 끄는 데 어려움을 겪는 것을 보고, 필요하다면 대원 수를 줄여서라도 극지 여행에 개를 더 많이 투입하기로 결정했다. 이 과정에서 요한센은 장비에 대한 불만을 공개적으로 표현했고, 아문센은 이를 자신의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여겼다.[8]
4. 1. 프람헤임
프람헤임에서 4월 21일, 태양이 지고 4개월 동안 해가 뜨지 않는 극야가 시작되었다.[1] 아문센은 벨기카 원정 당시 겨울 동안 얼음에 갇혔을 때 겪었던 지루함과 사기 저하를 염려했다. 썰매를 움직일 수 없었지만, 기지 대원들은 바쁘게 움직였다.[2] 급하게 처리해야 할 문제는 썰매를 개량하는 것이었는데, 보급소 설치 여행에서 썰매가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번 원정을 위해 특별히 선택된 썰매 외에도, 1898년부터 1902년까지 프람호로 진행했던 스베르드루프 원정에서 사용했던 썰매 몇 대를 아문센이 가져왔다. 이때 아문센은 그것이 앞으로의 임무에 더 적합하다고 생각했다. 비알란은 나무 부품에 대패질을 하여 낡은 썰매의 무게를 거의 3분의 1이나 줄였다. 예비로 있던 히코리 재료로 독자적인 썰매를 새롭게 3대나 만들어냈다. 개조된 썰매는 장벽을 횡단할 때 사용하고, 비알란의 새로운 썰매는 남극 대지에서 여행의 최종 단계에 사용하기로 했다.[3] 요한센은 썰매에 실을 식량을 준비했는데, 비스킷 42,000개, 페미컨 통조림 1,320개, 그리고 약 100kg의 초콜릿이었다.[4] 다른 사람들은 부츠, 조리 도구, 고글, 스키판, 텐트 개량을 했다.[5] 괴혈병의 위험을 막기 위해, 겨울이 오기 전에 대량으로 모아 얼린 바다표범 고기를 하루에 두 번 먹었다. 요리사 린드스트룀은 병조림 클라우드베리(구름딸기)와 블루베리로 비타민 C를 보충했고, 또한 신선한 효모를 사용하여 구운 통밀빵을 제공하여 비타민 B를 보충했다.[6][7]아문센은 그의 대원과 장비에 신뢰를 두고 있었지만, 하셀이 기록했듯이 자신은 스콧의 모터 구동 썰매가 영국대를 성공으로 이끌 것이라는 두려움에 시달렸다.[8] 이를 고려한 아문센은 태양이 돌아오는 8월 말에 바로 남극점 여행을 시작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요한센은 그 계절에는 너무 추워서 장벽을 넘을 수 없다고 경고했다. 아문센의 의견이 받아들여져, 8월 24일에 태양이 돌아왔을 때, 7대의 썰매를 출발할 수 있도록 준비했다.[9] 요한센의 걱정은 타당해 보였다. 처음 2주 동안 기상 조건이 극심해, 기온이 -58°C까지 내려가 출발을 방해했다.[10] 1911년 9월 8일, 기온이 -27°C까지 올라가자, 아문센은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다고 판단하고, 8명의 대원이 출발했다. 린드스트룀만이 프람하임에 남았다.[9]
4. 2. 보급소 설치
1911년 2월 초, 로알 아문센은 다음 해 여름에 있을 남극점 공격을 준비하기 위해 장벽을 가로지르는 보급 기지 구축 여행을 조직하기 시작했다. 예상 경로를 따라 정기적으로 설치될 보급 기지는 남극점 탐험대가 운반해야 할 식량과 연료의 양을 제한할 것이었다.첫 번째 보급 기지 설치 여행은 2월 10일에 시작되었고, 아문센, 프레스루드, 헬머 한센, 요한센과 18마리의 개가 3대의 썰매를 끌고 출발했다. 그들은 이전에 출판된 탐험가들의 책을 통해 장벽에 대해 알고 있었고, 어려운 조건을 예상했지만, 장벽 표면이 일반적인 빙하와 매우 유사하다는 사실에 놀랐다. 첫날 15nmi를 이동했고, 아문센은 개들이 이러한 조건에서 잘 달리는 것을 보고 영국인들이 장벽에서 개를 사용하는 것을 꺼리는 것에 대해 의아해했다. 탐험대는 2월 14일에 남위 80° 지점에 도달하여 보급 기지를 설치하고, 2월 16일에 프람헤임으로 돌아왔다.[3]
두 번째 보급 기지 설치 여행은 2월 22일에 8명의 남자, 7대의 썰매, 42마리의 개와 함께 프람헤임을 출발했다. 그러나 장벽의 상태는 급격히 악화되어 평균 기온이 9°C 하락했고, 거친 눈이 얼음 표면 위로 날렸다. 때때로 -40°C까지 내려가는 기온에서, 3월 3일 탐험대는 남위 81° 지점에 도달하여 두 번째 보급 기지를 설치했다. 아문센, 헬머 한센, 프레스루드, 요한센, 위스팅은 가장 강한 개들과 함께 남위 83° 지점에 도달하기를 희망했지만, 어려운 조건 속에서 3월 8일 남위 82° 지점에서 멈춰 섰다. 아문센은 개들이 지쳐가는 것을 보고, 3월 22일에 가벼운 썰매로 프람헤임에 빠르게 돌아왔다.[6]
아문센은 임박한 극야가 여행을 불가능하게 만들기 전에 더 많은 보급품을 남쪽으로 가져가기를 원했고, 3월 31일 요한센이 이끄는 7명의 탐험대가 약 1088.62kg의 물개 고기를 가지고 남위 80° 보급 기지로 프람헤임을 출발했다. 탐험대는 균열 지대로 들어가 예상보다 사흘 늦은 4월 11일에 돌아왔다.[7]
보급 기지 설치 여행을 통해 약 3401.94kg의 보급품을 포함한 세 개의 보급 기지가 구축되었는데, 여기에는 약 1360.78kg의 물개 고기와 40impgal의 파라핀 오일이 포함되었다. 아문센은 특히 두 번째 여행에서 개들이 무거운 썰매를 끄는 데 어려움을 겪는 것을 보고, 필요하다면 사람 수를 줄여서라도 극지 여행을 위해 개의 수를 늘리기로 결정했다. 이 여행은 요한센과 아문센 사이의 불화를 드러냈는데, 요한센은 장비의 불만족스러운 성격에 대해 공개적으로 불평했고, 아문센은 그의 권위에 도전받았다고 믿었다.[8]
4. 3. 월동

4월 21일, 프람헤임에 해가 지고 4개월간 극야가 계속되었다.[1] 아문센은 ''벨기카'' 원정 당시의 경험을 바탕으로, 대원들의 사기 저하를 막기 위해 노력했다. 썰매를 움직일 수 없는 상황에서도 대원들은 바쁘게 움직였다.[2] 당면 과제는 썰매 개량이었다. 아문센은 기존 썰매 외에도 스베르드루프 원정대의 썰매를 가져왔는데, 앞으로의 임무에 더 적합하다고 판단했다. 올라프 비알란은 낡은 썰매의 무게를 3분의 1로 줄이고, 히코리 재료로 새 썰매 3대를 제작했다. 개조된 썰매는 장벽 횡단에, 새 썰매는 남극 고원에서의 최종 여정에 사용될 예정이었다.[3] 얄마르 요한센은 비스킷 42,000개, 페미컨 1,320개, 초콜릿 약 약 99.79kg 등 썰매에 실을 식량을 준비했다.[4] 다른 대원들은 부츠, 조리 도구, 고글, 스키, 텐트 등을 개량했다.[5] 괴혈병 예방을 위해 얼린 바다표범 고기를 매일 섭취하고, 클라우드베리와 블루베리로 비타민 C를, 효모를 넣은 통밀빵으로 비타민 B를 보충했다.[6][7]
아문센은 대원과 장비를 신뢰했지만, 로버트 팰컨 스콧의 모터 썰매가 영국 탐험대를 성공으로 이끌 것이라는 불안감에 시달렸다.[7] 8월 말, 해가 뜨자마자 남극점 탐험을 시작하려 했으나, 요한센은 시기가 너무 이르다고 경고했다. 아문센은 이를 무시하고 8월 24일 썰매 7대를 준비했지만, 혹독한 날씨(최저 -58°C)로 인해 출발이 지연되었다.[8][9] 9월 8일, 기온이 -27°C로 오르자 아문센은 8명의 대원을 이끌고 출발했다. 린드스트롬은 프람헤임에 남았다.[8]
초반에는 순조롭게 전진하여 하루 약 15nmi를 이동했다. 늑대 가죽과 순록 가죽 옷 덕분에 추위를 견딜 수 있었지만, 멈추면 땀이 나고 밤에는 잠을 이루기 어려웠다. 개들의 발은 동상에 걸렸다.[8] 9월 12일, 기온이 -56°C까지 떨어지자 이동을 멈추고 이글루를 지었다.[10] 아문센은 너무 일찍 출발했음을 깨닫고 프람헤임으로 귀환을 결정했다. 요한센은 아문센의 성급함과 영국에 대한 집착을 비판했다.
9월 14일, 귀환 중 남위 80도 지점에 장비 대부분을 남겨 썰매를 가볍게 했다. 다음 날, 강풍과 추위 속에 개 여러 마리가 죽고, 약해진 개들은 썰매에 실렸다. 9월 16일, 아문센은 오스카 위스팅, 헬머 한센과 함께 먼저 프람헤임으로 돌아갔고, 나머지는 뒤처졌다. 크리스티안 프레스트루드는 개의 발이 동상에 걸리는 등 어려움을 겪으며 요한센과 함께 자정 넘어 프람헤임에 도착했다.
다음 날, 아문센은 요한센에게 늦은 이유를 추궁했고, 요한센은 버려졌다는 생각에 화가 났다고 항변했다. 아문센은 프리드쇼프 난센에게 요한센의 "격렬한 반항"을 보고했고, 요한센은 남극점 탐험대에서 제외되었다. 요한센은 프레스트루드, 스타벨루드와 함께 에드워드 7세 랜드 탐험에 배속되었다. 아문센, 헬머 한센, 비알란드, 하셀, 위스팅 5명이 남극점 탐험대로 남았다.
4. 4. 남극점 도달
1911년 12월 14일 오후 3시경, 로알 아문센과 그의 탐험대는 남극점에 도달했다. 그들은 노르웨이 국기를 꽂고, 그 극지 평원을 "호콘 7세 국왕의 고원"이라고 명명했다. 아문센은 북극점 정복을 꿈꿨지만 남극점에 도달한 자신의 업적에 대해 "인간은 결코 자신의 소망과 정반대되는 목표를 달성한 적이 없다"고 회고했다.탐험대는 극점의 정확한 위치를 측정하기 위해 3일 동안 노력했다. 육분의 측정을 여러 번 거친 후, 비알란, 위스팅, 하셀은 각기 다른 방향으로 스키를 타며 극점을 "봉쇄"했다.
최종적으로 탐험대는 그들의 관측 결과 실제 극점에 최대한 가깝다고 판단되는 지점에 폴하임이라고 불리는 텐트를 설치했다. 텐트 안에는 로버트 팰컨 스콧을 위한 장비와, 스콧에게 전달을 부탁하는 호콘 국왕에게 보내는 편지를 남겨두었다.
4. 4. 1. 장벽과 산맥

1911년 10월 19일, 로알 아문센(Roald Amundsen)을 포함한 5명의 대원들은 썰매 4대와 개 52마리를 이끌고 남극점 원정을 다시 시작했다.[1] 하지만 곧 짙은 안개로 인해 길을 잃고, 이전에 요한센(Johansen)의 보급소 설치대가 발견했던 크레바스 지대로 들어갔다. 오스카르 위스팅(Oscar Wisting)은 아문센이 타고 있던 썰매가 눈 다리가 무너지면서 크레바스 아래로 떨어질 뻔했다고 회상했다.[2]
이러한 위험에도 불구하고 탐험대는 하루에 15nmi 이상 이동하여 11월 5일에는 남위 82도 데포에 도착했다. 그들은 3마일 간격으로 눈 덩어리로 만든 케언을 세워 경로를 표시했다.[3] 11월 17일, 탐험대는 장벽의 가장자리에 도달하여 남극 횡단 산맥과 마주했다. 어니스트 섀클턴(Ernest Shackleton)이 개척한 비어드모어 빙하를 따라가기로 한 로버트 팰컨 스콧(Robert Falcon Scott)과는 달리, 아문센은 산맥을 통과하는 자신만의 경로를 찾아야 했다. 며칠 동안 산기슭을 탐험하고 약 457.20m 정도 올라간 후, 탐험대는 남극 고원으로 이어지는 30nmi 길이의 가파른 빙하를 발견했다. 아문센은 그의 주요 재정 후원자 중 한 명의 이름을 따서 이것을 악셀 하이베르그 빙하(Axel Heiberg Glacier)라고 명명했다.[4] 이 지역에서 처음 발견되고 대략적으로 지도에 표시된 다른 지형들은 아문센과 그의 동료들에 의해 명명되었는데, 대부분 그들 자신과 원정을 지원한 사람들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예를 들어, 모드 여왕 산맥(Queen Maud Mountains), 올라프 왕자 산맥(Prince Olav Mountains), 프리드쇼프 난센 산(Mount Fridtjof Nansen), 돈 페드로 크리스토퍼슨 산(Mount Don Pedro Christophersen), 빌헬름 크리스토퍼슨 산(Mount Wilhelm Christophersen), 한센 산(Mount Hanssen), 위스팅 산(Mount Wisting), 하셀 산(Mount Hassel), 뱌알란 산(Mount Bjaaland), 엥겔스타드 산(Mount Engelstad), 리브 빙하(Liv Glacier) 및 닐센 고원(Nilsen Plateau) 등이 있다. [4]
빙하 등반은 예상보다 훨씬 어려웠고, 우회해야 할 필요성과 깊고 부드러운 눈 때문에 더욱 길어졌다. 3일간의 힘든 등반 끝에 탐험대는 빙하 정상에 도달했다.[5] 아문센은 개들의 능력을 칭찬했고, 그러한 조건에서 개들이 일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자신을 반성했다. 11월 21일, 탐험대는 약 27.36km를 이동했고 약 1524.00m를 등반했다.[6]
4. 4. 2. 남극 고원으로의 행군
1911년 10월 19일, 로알 아문센(Roald Amundsen)과 4명의 대원들은 4대의 썰매와 52마리의 개를 이끌고 남극점을 향한 여정을 시작했다. 출발 직후 날씨가 악화되었고, 짙은 안개 속에서 탐험대는 이전에 요한센(Johansen)이 발견했던 크레바스 지대로 들어갔다. 오스카 위스팅(Oscar Wisting)은 썰매가 눈 다리 아래로 꺼지면서 아문센이 크레바스에 빠질 뻔했다고 회상했다.이러한 위험에도 불구하고 탐험대는 하루에 15nmi 이상 이동하여 11월 5일에는 남위 82도 지점에 도달했다. 그들은 약 4.83km 간격으로 눈 덩어리로 만든 케언을 세워 경로를 표시했다. 11월 17일, 탐험대는 남극 횡단 산맥에 직면했다. 아문센은 비어드모어 빙하를 따라가는 대신, 산을 통과하는 자신만의 경로를 찾아야 했다. 며칠 동안 산기슭을 탐험하고 약 457.20m 정도 올라간 후, 탐험대는 남극 고원으로 이어지는 30nmi 길이의 가파른 빙하인 악셀 하이베르그 빙하를 발견했다.
빙하 등반은 예상보다 훨씬 어려웠고, 우회로와 깊고 부드러운 눈 때문에 더 길어졌다. 3일간의 힘든 등반 끝에 탐험대는 빙하 정상에 도달했다. 아문센은 개들의 능력을 칭찬하며, 그러한 조건에서 개들이 일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자신을 비웃었다. 11월 21일, 탐험대는 약 27.36km를 이동했고 약 1524.00m를 등반했다.
해발 약 3230.88m의 빙하 정상(남위 85도 36분)에서 아문센은 남극점 도달을 위한 마지막 단계를 준비했다. 빙벽 단계에서 7마리가 죽고, 등반에 참여한 45마리의 개 중 18마리만 앞으로 나아가고 나머지는 식량으로 사용하기 위해 죽였다. 썰매 운전자들은 자신의 팀 개를 죽이고 가죽을 벗긴 후, 개와 사람에게 고기를 나누어 주었다. 아문센은 "우리는 그곳을 '정육점'이라고 불렀다. ... 우리는 개들과 너무 친해졌기 때문이다."라고 회상했다.
일행은 최대 60일간의 여정에 필요한 물품을 3개의 썰매에 싣고, 남은 물품과 개 사체를 저장소에 남겨두었다. 악천후로 인해 11월 25일까지 출발할 수 없었고, 짙은 안개 속에서 미지의 지형을 조심스럽게 지나갔다. 그들은 빈번한 크레바스로 덮인 얼음 표면 위를 이동했는데, 이는 시야가 좋지 않은 것과 함께 그들의 진행 속도를 늦추었다. 아문센은 이 지역을 "악마의 빙하"라고 불렀다. 12월 4일, 그들은 아래에 공간이 있는 눈과 얼음 층 아래에 크레바스가 숨겨져 있는 지역에 도착했는데, 아문센은 그 위를 지날 때 "불쾌하게 텅 빈" 소리가 났다고 말했다. 그는 이 지역을 "악마의 무도회장"이라고 이름 지었다. 그날 늦게 더 단단한 땅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남위 87도에 도달했다.
12월 8일, 노르웨이인들은 섀클턴의 최남단 기록인 남위 88도 23분을 넘어섰다. 극점에 가까워지면서, 그들은 다른 탐험대가 먼저 도착했을 가능성을 암시하는 풍경의 변화를 찾았다. 12월 12일 캠프를 치는 동안, 그들은 지평선에 나타난 검은 물체에 잠시 놀랐지만, 이는 멀리 떨어진 곳에서 개들의 배설물이 아지랑이에 의해 확대된 것으로 밝혀졌다. 다음 날 그들은 극점에서 15nmi 떨어진 남위 89도 45분에서 캠프를 쳤다. 1911년 12월 14일 오후 3시경, 동료들의 동의를 얻어 아문센은 썰매 앞에서 이동했고, 일행은 남극점 근처에 도착했다. 그들은 노르웨이 국기를 꽂고, 극지 평원을 "호콘 7세 국왕의 고원"이라고 명명했다.
다음 3일 동안 그들은 극점의 정확한 위치를 고정하기 위해 노력했다. 여러 시간에 걸쳐 여러 육분의 측정을 한 후, 비알란, 위스팅, 하셀은 극점을 "봉쇄"하기 위해 각기 다른 방향으로 스키를 탔다. 마지막으로 일행은 그들의 관찰을 통해 계산한 실제 극점에 최대한 가깝게 폴하임이라고 불리는 텐트를 쳤다. 텐트 안에 아문센은 스콧을 위한 장비와 스콧에게 전달해 줄 것을 요청한 호콘 국왕에게 보내는 편지를 남겨두었다.
4. 4. 3. 남극점 도달과 폴하임 설치
1911년 12월 14일 오후 3시경, 아문센과 그의 탐험대는 남극점에 도달했다. 그들은 노르웨이 국기를 꽂고, 그 극지 평원을 "호콘 7세 국왕의 고원"이라고 명명했다. 아문센은 북극점 정복을 꿈꿨지만 남극점에 도달한 자신의 업적에 대해 "인간은 결코 자신의 소망과 정반대되는 목표를 달성한 적이 없다"고 회고했다.탐험대는 이후 3일 동안 극점의 정확한 위치를 측정하기 위해 노력했다. 북극점에서 쿡과 피어리의 주장이 논쟁이 되었던 것을 고려하여, 아문센은 스콧을 위해 명확한 표식을 남기고자 했다. 여러 번의 육분의 측정을 거친 후, 비알란, 비스팅, 하셀은 각기 다른 방향으로 스키를 타며 극점을 "봉쇄"했다. 아문센은 그들이 함께 정확한 지점을 찾을 것이라고 추론했다.
마지막으로 탐험대는 그들의 관측 결과 실제 극점에 최대한 가깝다고 판단되는 지점에 폴하임이라고 불리는 텐트를 설치했다. 텐트 안에는 스콧을 위한 장비와, 스콧에게 전달을 부탁하는 호콘 국왕에게 보내는 편지를 남겨두었다.
4. 5. 프람헤임으로의 귀환
1912년 12월 18일, 탐험대는 프람헤임으로 돌아가는 여정을 시작했다.[1] 아문센은 스콧보다 먼저 문명 세계로 돌아가 소식을 전하기로 결심했다.[2]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개와 사람의 체력을 보존하기 위해 하루 이동 거리를 15nmi로 제한했다. 24시간 동안 햇빛이 비치는 동안 탐험대는 가상의 밤에 이동하여 해를 등지고 설맹의 위험을 줄였다. 탐험대는 원정 중에 세워진 눈 무덤의 안내를 받아 1912년 1월 4일에 부처스 샵에 도착하여 장벽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3] 스키를 탄 사람들은 "쏜살같이 내려갔지만", 썰매 운전사인 헬머 한센과 비스팅에게는 하강이 위태로웠다. 썰매는 조작하기 어려웠고, 크레바스를 만났을 때 급정지할 수 있도록 러너에 브레이크를 추가했다.[4]1월 7일, 탐험대는 장벽에 있는 첫 번째 보급 기지에 도착했다.[5] 아문센은 이제 속도를 높일 수 있다고 생각했고, 사람들은 15nmi를 이동하고, 6시간 동안 휴식을 취한 다음 행진을 재개하는 일정을 채택했다.[6] 이러한 방식으로 그들은 하루에 약 30nmi를 이동했고, 1월 25일 오전 4시에 프람헤임에 도착했다. 10월에 출발한 52마리의 개 중 11마리가 살아남아 2대의 썰매를 끌었다. 남극점 왕복 여정은 예정보다 10일 빠른 99일이 걸렸으며, 약 1860nmi를 이동했다.[7]
4. 6. 세계에 알림
아문센은 프람헤임으로 돌아온 후, 즉시 원정대를 해산했다. 오두막에서 작별 만찬을 가진 후, 일행은 살아남은 개들과 더 가치 있는 장비를 프람호에 실었다. 프람호는 1912년 1월 30일 늦게 고래만(Bay of Whales)을 떠나 태즈메이니아의 호바트로 향했다. 5주간의 항해 동안 아문센은 전보를 준비하고 언론에 발표할 첫 번째 보고서를 작성했다.[1] 3월 7일, 프람호는 호바트에 도착했고, 아문센은 스콧으로부터 아직 소식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즉시 형 레온, 난센, 호콘 국왕에게 전보를 보내 자신의 성공을 간략하게 알렸다. 다음 날, 그는 자신의 독점권을 판매한 런던의 ''데일리 크로니클''에 이 이야기의 첫 번째 전체 보고서를 전보로 보냈다.[2] 프람호는 호바트에 2주 동안 머물렀으며, 오스트레일리아 남극 탐험대(Australasian Antarctic Expedition) 소속 더글러스 모슨의 배 ''오로라호''와 합류했다. 아문센은 그들에게 살아남은 개들을 선물했다.[3]5. 탐험 이후
아문센은 호바트에서 시어도어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과 조지 5세 영국 국왕을 포함한 많은 이들로부터 축하 전보를 받았다. 조지 5세는 아문센이 귀환 후 처음 방문한 곳이 대영 제국 영토라는 점에 기쁨을 표했다. 노르웨이에서는 이 소식이 머리기사로 보도되었고, 전국에 국기가 게양되었다. 탐험대 참가자 모두는 호콘 7세 국왕이 제정한 노르웨이 남극 훈장(''Sydpolsmedaljen'')을 받았다.[1] 다만, 아문센의 전기 작가 롤랜드 헌트포드는 "환호 속의 냉기"를 언급하며, 아문센의 전술에 대한 불안감이 남아 있었다고 말한다. 한 노르웨이 신문은 아문센이 새로운 경로를 찾았고, 스콧의 맥머도 해협 경로는 침범하지 않은 것에 대해 안도감을 표했다.[2]
영국에서 아문센의 승리에 대한 언론 반응은 절제되었지만 대체로 긍정적이었다. ''데일리 크로니클''과 ''일러스트레이티드 런던 뉴스''의 열광적인 보도를 제외하고, ''맨체스터 가디언''은 노르웨이인들의 용기와 결단력으로 비난의 여지가 모두 사라졌다고 언급했다. ''영국 소년'' 독자들은 "용감한 노르웨이인"이 얻은 영예를 아까워하지 말 것을 권고했고, ''소년의 신문''은 모든 영국 소년이 아문센의 탐험 기록을 읽어야 한다고 제안했다.[3] ''The Times'' 특파원은 아문센이 스콧에게 너무 늦게 통보하여 스콧이 대응할 수 없게 한 것에 대해 가벼운 질책을 가했다.[4]
왕립지리학회 고위 인사들은 사적으로 더욱 적대적인 감정을 드러냈다. 그들에게 아문센의 업적은 "더러운 속임수"의 결과였다. 클레멘츠 마컴은 아문센의 주장이 사기일 수 있다고 암시했다.[2] 1912년에 아문센이 왕립지리학회에서 연설했을 때, 학회 회장 커즌 경은 농담으로 "개들을 위해 세 번의 환호"를 외치며 모욕감을 주었다.[5] 어니스트 섀클턴은 아문센의 승리를 폄하하는 데 동참하지 않았고, 그를 "오늘날 가장 위대한 극지 탐험가"라고 불렀다.[6] 캐슬린 스콧은 남편의 사망 소식을 듣기 전에 아문센의 여정에 대해 "매우 훌륭한 업적... 짜증이 나도 존경하지 않을 수 없다"라고 인정했다.[6]
1913년 2월, 위스콘신주 매디슨에 있던 아문센은 스콧과 그의 탐험대원 4명이 1912년 1월 17일에 남극점에 도달했지만, 귀환 중 3월 29일까지 모두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었다.[1] 1912년 11월, 남극의 겨울이 끝난 후 스콧, 윌슨, 바우어스의 시신이 발견되었다.[1] 아문센은 이 소식에 대해 "끔찍하다, 끔찍하다"라고 반응했고,[2] 스콧에 대해 "스콧 대위는 정직함, 진실함, 용기, 그리고 인간을 만드는 모든 것의 기록을 남겼다."라며 애도를 표했다.[3]
롤란드 헌트포드에 따르면, 스콧의 죽음 소식은 "승리자 아문센이 순교자 스콧에 의해 가려지게" 만들었다.[4] 영국에서는 스콧이 고귀하게 행동했고 공정하게 경쟁했다는 신화가 빠르게 만들어졌다. 스콧이 패배한 이유는 아문센이 자신의 진정한 의도를 숨기고, 개를 사용했으며, 이 개들을 식량으로 도살했기 때문이라는 주장이었다.[4] 더욱이 아문센은 "전문가"로 여겨졌는데, 당시 영국 상류층의 사고방식으로는 그의 업적이 평가절하되었다.[5] 이러한 인식은 스콧의 일기와 그의 "대중에게 보내는 메시지"가 출판되면서 더욱 강화되었다. 헌트포드는 이를 두고 "[스콧의] 문학적 재능은 그의 카드였다. 마치 그는 묻힌 텐트에서 손을 뻗어 복수한 것과 같았다."라고 평했다.[4] 그럼에도 불구하고, 탐험가들 사이에서 아문센의 이름은 여전히 존경받았다.[6] 몇 년 후 쓰여진 테라노바 원정 기록에서, 스콧의 동료였던 앱슬리 체리가라드는 아문센의 성공 요인을 "그의 뛰어난 자질", 특히 알려진 길이 아닌 새로운 경로를 선택한 그의 용기에서 찾았다.[6]
5. 1. 동부 탐험대
1911년 11월 8일, 프레스트루드, 스투베루드, 요한센은 킹 에드워드 7세 랜드로 출발했다.[4] 단단한 빙벽이 얼음으로 덮인 육지로 바뀌는 지점을 찾는 것은 어려웠다. 12월 1일, 일행은 의심할 여지 없이 건조한 땅이자, 1902년 디스커버리 탐험대에서 스콧이 기록한 누나탁을 처음 발견했다.[4] 이 지점에 도달한 후, 지질 표본과 이끼 샘플을 수집했고, 주변을 간략하게 탐험한 후 12월 16일 프람하임으로 돌아왔다.[4] 이들은 킹 에드워드 7세 랜드에 발을 디딘 최초의 인물이었다.[4]5. 2. 프람호와 개남환

1911년 2월 15일, ''프람호''는 고래 만을 떠나 부에노스아이레스로 향했고, 4월 17일에 도착했다.[1] 여기서 닐센은 원정대 자금이 고갈되었고, 배를 위해 따로 마련해 둔 자금도 들어오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다행히 아문센의 친구 돈 페드로 크리스토퍼슨이 이전에 약속했던 물품과 연료를 제공해 주었다.[2] ''프람호''는 6월에 남아메리카와 아프리카 사이에서 해양 관측 항해를 시작하여 3개월을 보냈다.[3] 9월에 부에노스아이레스로 돌아와 최종 정비와 재보급을 마친 후, 10월 5일에 남쪽으로 항해했다. 강풍과 폭풍우로 항해가 길어졌지만, 1912년 1월 9일에 고래 만에 도착했다.[4]
1월 17일, 프람하임에 있던 사람들은 두 번째 배, 시라세 노부가 이끄는 일본 남극 탐험대를 태운 ''카이난 마루''의 출현에 놀랐다.[5] 언어 문제로 두 탐험대 간의 의사소통은 제한적이었지만, 노르웨이인들은 일본인들이 에드워드 7세 반도로 향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6] ''카이난 마루''는 다음 날 출발했고, 1월 26일에는 에드워드 7세 반도에 탐사대를 상륙시켰다. 이는 바다에서 이 해안에 처음 상륙한 것이었다. 이전의 ''디스커버리''(1902), ''님로드''(1908), ''테라 노바''(1911)의 시도는 모두 실패했었다.[7]
5. 3. 당시의 반응
아문센은 호바트에서 미국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와 영국 국왕 조지 5세를 포함한 많은 이들로부터 축하 전보를 받았다. 특히 조지 5세는 아문센이 귀환 후 처음 방문한 곳이 대영 제국 영토라는 점에 기쁨을 표했다. 덴마크와 스웨덴의 지배에서 벗어나 6년 전에 독립한 노르웨이에서는 이 소식이 머리기사로 보도되었고, 전국에 국기가 게양되었다. 탐험대 참가자 모두는 탐험을 기념하기 위해 호콘 7세 국왕이 제정한 노르웨이 남극 훈장(''Sydpolsmedaljen'')을 받았다.[1] 하지만 아문센의 전기 작가 롤랜드 헌트포드는 "환호 속의 냉기"를 언급하며, 아문센의 전술에 대한 불안감이 남아 있었다고 말한다. 한 노르웨이 신문은 아문센이 새로운 경로를 찾았고, 스콧의 맥머도 해협 경로는 침범하지 않은 것에 대해 안도감을 표했다.[2]영국에서 아문센의 승리에 대한 언론 반응은 절제되었지만 대체로 긍정적이었다. 아문센의 성공에 재정적 이해관계가 있었던 ''데일리 크로니클''과 ''일러스트레이티드 런던 뉴스''의 열광적인 보도를 제외하고, ''맨체스터 가디언''은 노르웨이인들의 용기와 결단력으로 비난의 여지가 모두 사라졌다고 언급했다. ''영국 소년'' 독자들은 "용감한 노르웨이인"이 얻은 영예를 아까워하지 말 것을 권고했고, ''소년의 신문''은 모든 영국 소년이 아문센의 탐험 기록을 읽어야 한다고 제안했다.[3] ''The Times'' 특파원은 아문센이 스콧에게 너무 늦게 통보하여 스콧이 대응할 수 없게 한 것에 대해 가벼운 질책을 가했다. "더욱 불필요했던 것은, 스콧 선장보다 남극 탐험에 협력을 더 환영할 사람은 없을 것이기 때문... 하지만, 아문센 선장을 아는 사람은 그의 진실성에 의심을 품을 수 없으며, 그가 극점에 도달했다고 말했으니 우리는 그를 믿을 수밖에 없다".[4]
왕립지리학회 고위 인사들은 최소한 사적으로 더욱 적대적인 감정을 드러냈다. 그들에게 아문센의 업적은 "더러운 속임수"의 결과였다. 클레멘츠 마컴은 아문센의 주장이 사기일 수 있다고 암시했다. "테라 노바호가 돌아올 때까지 진실을 기다려야 한다".[2] 1912년에 아문센이 왕립지리학회에서 연설했을 때, 학회 회장 커즌 경이 농담으로 "개들을 위해 세 번의 환호"를 외치자 모욕감을 느꼈다.[5] 어니스트 섀클턴은 아문센의 승리를 폄하하는 데 동참하지 않았고, 그를 "오늘날 가장 위대한 극지 탐험가"라고 불렀다.[6] 남편의 사망 소식을 듣기 전에 캐슬린 스콧은 아문센의 여정에 대해 "매우 훌륭한 업적... 짜증이 나도 존경하지 않을 수 없다"라고 인정했다.[6]
5. 4. 스콧의 비극
1913년 2월, 위스콘신주 매디슨에 있던 아문센은 스콧과 그의 탐험대원 4명이 1912년 1월 17일에 남극점에 도달했지만, 귀환 중 3월 29일까지 모두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었다.[1] 1912년 11월, 남극의 겨울이 끝난 후 스콧, 윌슨, 바우어스의 시신이 발견되었다.[1] 아문센은 이 소식에 대해 처음에는 "끔찍하다, 끔찍하다"라고 반응했다.[2] 그는 스콧에 대해 "스콧 대위는 정직함, 진실함, 용기, 그리고 인간을 만드는 모든 것의 기록을 남겼다."라며 애도를 표했다.[3]
롤란드 헌트포드에 따르면, 스콧의 죽음 소식은 "승리자 아문센이 순교자 스콧에 의해 가려지게" 만들었다.[4] 영국에서는 스콧이 고귀하게 행동했고 공정하게 경쟁했다는 신화가 빠르게 만들어졌다. 스콧이 패배한 이유는 아문센이 자신의 진정한 의도를 숨기고, 개를 사용했으며, 이 개들을 식량으로 도살했기 때문이라는 주장이었다.[4] 더욱이 아문센은 "전문가"로 여겨졌는데, 당시 영국 상류층의 사고방식으로는 그의 업적이 평가절하되었다.[5] 이러한 인식은 스콧의 일기와 그의 "대중에게 보내는 메시지"가 출판되면서 더욱 강화되었다.[4] 헌트포드는 이를 두고 "[스콧의] 문학적 재능은 그의 카드였다. 마치 그는 묻힌 텐트에서 손을 뻗어 복수한 것과 같았다."라고 평했다.[4]
그럼에도 불구하고, 탐험가들 사이에서 아문센의 이름은 여전히 존경받았다.[6] 몇 년 후 쓰여진 테라노바 원정 기록에서, 스콧의 동료였던 앱슬리 체리가라드는 아문센의 성공 요인을 "그의 뛰어난 자질", 특히 알려진 길이 아닌 새로운 경로를 선택한 그의 용기에서 찾았다.[6]
6. 역사적 평가
아문센의 남극점 정복은 제1차 세계 대전의 발발로 인해 북극 탐험 계획이 연기되면서 당시에는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아문센은 북극 탐험을 위해 ''Maud''호를 타고 1918년에 출발했지만, 북동항로 횡단에는 성공했으나 북극점을 표류하지는 못했다.[4] 이후 아문센은 항공기를 이용한 극지 탐험에 헌신했으며, 1926년 비행선 ''노르웨이''를 타고 북극 상공을 비행했다. 1928년에는 탐험대 구조 중 스피츠베르겐 인근에서 실종되었다.[5]
아문센과 함께 남극점을 밟았던 대원들 중 비알란과 하셀은 이후 극지 탐험에 참여하지 않았고, 헬머 한센과 비스팅은 ''Maud''호 탐험에 합류했다. 비스팅은 ''프람''호의 마지막 항해를 이끌었다.[5] 요한센은 남극 탐험 이후 우울증과 가난 속에서 생을 마감했다.[5]
아문센의 업적은 오랫동안 로버트 팰컨 스콧의 그늘에 가려져 있었다. 영국에서 스콧을 영웅시하는 분위기 속에 아문센은 '승리자'로만 여겨졌다. 그러나 20세기 후반 스콧 탐험 방식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 등장하면서, 아문센의 뛰어난 계획과 준비성이 재조명받기 시작했다.[5]
스테파니 바르체프스키는 아문센의 성공 요인을 "훌륭한 계획, 썰매 개와 스키에 대한 오랜 경험, 인상적인 체력"이라고 분석했다. 다이애나 프레스턴은 스콧이 지리적 탐험과 과학적 지식이라는 두 목표 사이에서 갈등한 반면, 아문센은 남극점 정복이라는 단 하나의 목표에 집중하여 성공했다고 평가했다.
6. 1. 현대 연구
아문센 탐험 100주년 기념 논문에서 연구자들은 텐트와 깃발이 남극점에서 북쪽으로 약 17m의 얼음 아래, 약 1분 위도 지점, 즉 약 1 해리 지점에 묻혀 있다고 주장했다.[6]21세기 초, 작가들이 스콧의 비극에 대해 그의 무능함 외의 다른 이유를 추정하고 제안하면서 스콧에 대한 평가가 다소 회복되자, 아문센의 업적도 주목받았다.[10] 발크제우스키는 "아문센과 그의 대원들은 뛰어난 계획, 개 썰매와 스키의 오랜 경험, 훌륭한 체력으로 남극점에 도달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다이애나 프레스턴은 스콧 탐험대에 대한 증언에서 아문센의 성공 요인을 다음과 같이 구체적으로 명시하고 있다. 아문센은 남극점에 도달한다는 하나의 목표에 집중한 반면, 스콧은 지리적 탐험과 과학적 지식 간의 상충하는 주장을 해결해야 했다. "실용적이고 경험이 풍부한 전문가인 아문센은 주의 깊게 계획을 세우고, 북극에서 배운 모든 교훈을 적용했으며, 이미 충분히 시험된 운송 수단에 의존하고, 감상적이 되지 않고 식량의 가능성을 추구했다. 대원 관리에 있어서도 효율적이고 감정에 휩쓸리지 않았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1957년에 남극점에 설립된 미국의 과학 관측 기지는 아문센-스콧 남극 기지로 명명되어 두 극지 개척자를 기념하고 있다.
참조
[1]
서적
Nansen's Fram expedition
[2]
문서
Roald Amundsen's Dog Farm
[3]
서적
The Last Place on Earth
1985
[4]
웹사이트
Review of 'The Last Viking. The Life of Roald Amundsen'
https://www.cnrs-scr[...]
2020-11-22
[5]
뉴스
Scott of the Antarctic could have been saved if his orders had been followed, say scientists
https://www.telegrap[...]
The Telegraph
2013-03-27
[6]
간행물
The present location of the tent that Roald Amundsen left behind at the South Pole in December 1911
2011-01-21
[7]
서적
Nansen's Fram expedition
[8]
문서
Roald Amundsen's Dog Farm
[9]
서적
The Last Place on Earth
1985
[10]
뉴스
Scott of the Antarctic could have been saved if his orders had been followed, say scientists
http://www.telegraph[...]
The Telegraph
2013-0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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