텐구당의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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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텐구당의 난은 1864년 미토 번에서 일어난 내전으로, 존왕양이 사상을 가진 무사들이 막부의 탄압에 저항하여 일으킨 사건이다. 미토학의 영향을 받은 텐구당은 1840년대부터 번 내부의 파벌 다툼을 겪었고, 1864년 후지타 고시로를 중심으로 거병했다. 그러나 막부군의 진압으로 실패하고, 많은 텐구당원들이 처형되었다. 이 사건은 막부의 권위를 실추시키고, 존왕양이 운동을 확산시키는 결과를 가져왔으며, 일본 근대화 과정에 영향을 미쳤다. 오늘날에도 텐구당 관련 유적과 기념비가 남아 추모가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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텐구당의 난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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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쟁 개요 | |
분쟁 명칭 | 미토 막부 말기 소란 (水戸幕末争乱) |
다른 명칭 | 덴구토의 난 (天狗党の乱) |
일부 | 막부 말기 분쟁의 일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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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간 | 1864년 5월 2일 – 1865년 1월 14일 (1년, 8개월, 1주, 5일) |
장소 | 일본 동부 |
결과 | 막부의 승리 |
교전 세력 | |
교전 세력 1 | 덴구토 지역 사무라이 및 고쿠가쿠 자원 봉사자 |
교전 세력 2 | 이다 번 |
지휘관 및 지도자 | |
덴구토 지휘관 | 다케다 고운사이 (처형) 야마쿠니 효부 (처형) 마쓰다이라 요리노리 (처형) 가메야마 요시하루 (처형) |
막부 지휘관 | 도쿠가와 요시노부 다케나카 시게카타 이치카와 산자에몬 다누마 오키타카 야지마 덴자에몬 시오하라 히코시치 |
병력 규모 | |
덴구토 병력 | 2,000명 |
막부 병력 | 약 10,000명 |
사상자 및 피해 | |
덴구토 사상자 | 약 1,300명의 반군 사망, 약 353명 처형, 100명 억류 중 사망 |
막부 사상자 | 약 6,700명의 막부군 사망 |
2. 배경
텐구당의 난이 일어나게 된 배경은 복합적이다.
미토번에서는 17세기부터 도쿠가와 미쓰쿠니가 쇼코칸에서 대일본사 편찬을 시작한 이래, 1906년에 도쿠가와 구니유키가 완성할 때까지 미토 학이라는 독자적인 사상 체계가 발전했다.[1] 미토학은 존황사상을 강조했는데, 이는 막부 중심의 정치 체제와 갈등을 빚었다.[1]
다치하라 스이켄에 의해 부흥된 대일본사 편찬 사업은 미토번 내에서 파벌 간의 대립을 야기했다. 다치하라를 따르는 보수파와 후지타 유코쿠를 따르는 개화파는 대일본사 편찬 방식을 두고 대립하였고, 이는 단순한 사상적 대립을 넘어 정치적 주도권을 둘러싼 권력 투쟁으로 이어졌다. 1797년 번주 도쿠가와 하루모리가 유코쿠의 방식을 채택하면서 다치하라는 쇼코칸에서 퇴직하였고, 양측의 대립은 파벌 간의 다툼으로 발전하였다.
개화파를 이은 후지타 도코가 양 파의 관계 회복에 힘썼으나, 1855년 안세이 대지진으로 도코가 사망하면서 조정 역할을 잃은 항쟁은 피의 숙청으로까지 번지게 되었다. 이 항쟁으로 양 파 모두 주요 인재를 잃고 문제 해결 능력을 상실하게 되었다.
미·일 수호 통상조약에서 고메이 천황의 뜻을 무시하고 조약이 체결되자, 막부에 격노한 천황은 1858년 9월 14일 칙서를 직접 하사하는 이례적인 행동을 보였다. (무오년의 밀칙 참조) 다이로 이이 나오스케 등 막부 주류파는 이를 막부 타도 계획으로 파악하고, 쇼군 도쿠가와 이에사다의 후계자 문제를 둘러싼 대립에서 미토 번 중심의 히토쓰바시파에 가담한 인물들을 탄압했다. (안세이 대옥)
2. 1. 미토학과 존황사상
미토번에서는 17세기부터 도쿠가와 미쓰쿠니가 쇼코칸에서 대일본사 편찬을 시작한 이래, 1906년에 도쿠가와 구니유키가 완성할 때까지 미토 학이라는 독자적인 사상 체계가 발전했다.[1] 미토학은 존황사상을 강조했는데, 이는 막부 중심의 정치 체제와 갈등을 빚었다.[1]2. 2. 파벌 간의 대립
다치하라 스이켄에 의해 부흥된 대일본사 편찬 사업은 미토번 내에서 파벌 간의 대립을 야기했다. 다치하라를 따르는 보수파와 후지타 유코쿠를 따르는 개화파는 대일본사 편찬 방식을 두고 대립하였고, 이는 단순한 사상적 대립을 넘어 정치적 주도권을 둘러싼 권력 투쟁으로 이어졌다. 1797년 번주 도쿠가와 하루모리가 유코쿠의 방식을 채택하면서 다치하라는 쇼코칸에서 퇴직하였고, 양측의 대립은 파벌 간의 다툼으로 발전하였다.개화파를 이은 후지타 도코가 양 파의 관계 회복에 힘썼으나, 1855년 안세이 대지진으로 도코가 사망하면서 조정 역할을 잃은 항쟁은 피의 숙청으로까지 번지게 되었다. 이 항쟁으로 양 파 모두 주요 인재를 잃고 문제 해결 능력을 상실하게 되었다.
2. 3. 대외적 위기
미·일 수호 통상조약에서 고메이 천황의 뜻을 무시하고 조약이 체결되자, 막부에 격노한 천황은 1858년 9월 14일 칙서를 직접 하사하는 이례적인 행동을 보였다. (무오년의 밀칙 참조) 다이로 이이 나오스케 등 막부 주류파는 이를 막부 타도 계획으로 파악하고, 쇼군 도쿠가와 이에사다의 후계자 문제를 둘러싼 대립에서 미토 번 중심의 히토쓰바시파에 가담한 인물들을 탄압했다. (안세이 대옥)3. 텐구당의 유래
미토번에서 번정 개혁을 추진하던 후지타 토코, 아이자와 세이시사이 등이 등용되자, 이들을 반대하는 세력들은 "일반 사람들을 경멸하고, 타인의 비판에 겸허하지 않고 편협하며, 코를 높이 쳐들고 뽐내고 있다"라는 이유로 '''텐구당'''이라고 불렀다.[2] 이에 대해 도쿠가와 나리아키는 고카 2년 10월에 로주아베 마사히로에게, 에도에서는 오만한 자를 "텐구"라고 부르지만, 미토에서는 의기가 있고 국가에 충성심이 있는 유지를 "텐구"라고 부른다고 주장했다.[3]
하지만 텐구당은 내부에서도 격렬한 당쟁과 이합집산을 반복하여, 시기에 따라 그 구성에 큰 차이를 보였다.[4] 텐구당은 "칙서" 반납 문제에서 '''진파'''와 '''격파'''로 분열되었고, 격파 내에서도 근거지별로 '''쓰쿠바 세력'''과 '''이타코 세력''' 등의 집단이 있어 각각 독자적으로 움직였다.[4] 그렇기 때문에 『미토시사 중권(五)』에서는 텐구당이라는 명칭을 최종적으로 교토로 향해 서상한 집단에 한정하여 사용하고 있다.[4]
4. 거병
1863년 2월 3일 히토쓰바시 요시노부가 에도를 떠난 9일 후, 미토 번 번주 도쿠가와 요시아쓰 등이 요시노부를 따라 에도를 떠났다. 이들 중에는 다케다 고운사이, 야마구니 효보, 후지타 고시로 등 훗날 텐구당의 난을 주도하는 인물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은 교토에서 조슈 번의 가쓰라 고고로, 구사카 겐즈이 등과 교류하며 존황양이 사상을 더욱 굳혔다. 후지타 고시로는 조슈 번과 함께 군사를 일으켜 막부에 양이를 요구하려 했으나, 고운사이의 만류로 실패했다.
1864년 3월 26일, 조정이 요코하마 항 쇄항과 해안 방비에 관한 군비를 요구했으나 막부가 아무런 계획이 없다고 판단한 후지타 고시로는 스스로 양이 실행의 선구자가 되기로 결심하고, 각지를 돌며 동지와 군비를 모았다.
1864년 5월 2일, 후지타 고시로는 쓰쿠바 산에 모인 62명의 동지들과 함께 봉기했다. 당시 23세였던 후지타는 미토 번 부교 다마루이 나노에몬을 설득하여 총대장으로 추대했다. 고시로의 거병 소식을 들은 미토 번 메쓰케 야마구니 효보는 동생인 다마루이 나노에몬이 총대장을 맡았다는 것을 알고 번주 요시아쓰의 명을 받아 설득하러 갔지만, 오히려 텐구당에 가담하게 된다.
거병 후, 각지에서 낭인, 무사, 마을 주민, 농민들이 합류하여 텐구당의 규모는 수일 후 150명, 최대 1,000명 이상으로 커졌다.[4]
4. 1. 거병 후의 쟁란(争乱)
쓰쿠바 산에서 거병한 텐구당은 1864년 5월 8일, 시모쓰케노 쿠니 닛코(도치키 현 닛코시)의 닛코 동조궁을 거점으로 삼아 양이(攘夷) 운동을 전개하려 했으나, 닛코 부교에게 거절당하고 5월 말까지 시모쓰케의 오히라 산에 머물렀다.[4]닛코를 떠난 텐구당은 히타치로 향했으나, 미토 번 내에서 이치카와 히로토미가 이끄는 보수파 쇼세이 당이 결성되어 과격한 탄압을 시작하자 쓰쿠바 산으로 돌아갔다. 이 과정에서 다나카 겐조가 별동대를 조직하여 도치기, 마나베 등지에서 자금을 조달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마을에 방화하는 사건이 발생하여 텐구당은 '폭주'로 인식되었다.[4] 특히 도치기주쿠에서는 다나카 등이 마을 사람들을 살해하고 금품을 강탈했으며, 군자금 요구에 응하지 않자 숙소에 불을 질러 237채가 소실되는 참극이 벌어졌다.
막부는 텐구당 추토령을 내리고 여러 번에 출병을 명했으며, 미토 번도 이에 호응하여 추토군을 결성했다. 1864년 8월 8일, 연합군과 텐구당 사이에 전투가 시작되었으나, 추토군은 텐구당의 야습에 패주했다. 이치카와 등은 미토로 도망쳐 미토 성을 점거하고 텐구당 가담자 가족을 투옥하는 등 보복을 가했다.[4]
거병 초기에는 존황양이(尊皇攘夷)를 내세웠으나, 미토 번 내부 대립이 심화되면서 텐구당에서 이탈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약 500명이 텐구당과 결별하고 독자적인 행동을 하다가 막부군에 포위되어 패배했다.[4]
미토 번 무사와 평민 중심으로 구성된 텐구당은 미토 성으로 진격하여 이치카와 일파와 교전했으나 패배하고 나카 항 근처까지 퇴각했다. 한편, 교토에 있던 번주 요시아쓰의 대리인 마쓰다이라 요리노리가 막부의 명으로 미토에 왔으나, 이치카와 일파는 이들의 입성을 거부하고 전투가 벌어졌다. 요리노리 측은 텐구당의 지원을 받아 선전했지만, 보급 문제 등으로 다시 나카 항으로 후퇴했다.[4]
텐구당의 가세로 요리노리는 막부에게 텐구당과 동일시되어 토벌 대상이 되었다. 막부군의 포위 속에서 텐구당은 요리노리 세력과 합류하여 나카 항으로 향했다. 이 합류로 텐구당에 반대했던 다케다 고운사이가 텐구당과 함께하게 되었다.[4]
이치카와 세력은 막부에 원군을 요청하여 나카 항을 포위했다. 막부는 다누마 오키타카를 대장으로 하는 부대를 파견하여 포위에 가담했다. 11월 4일, 마쓰다이라 요리노리는 "막부에 진의를 호소한다"며 막부군을 유인하여 할복하고, 가신 천여 명은 투항했다.[4]
텐구당은 혼란에 빠졌지만, 천여 명이 탈출하여 미토 번 북부의 다이고 촌(현재 이바라키현 다이고 마치)에 집결했다. 이들은 다케다 고운사이를 총대장으로 추대하고, 교토로 진군하여 히토쓰바시 요시노부를 통해 조정에 존황양이의 뜻을 전하고자 했다. 텐구당은 이전의 방화 사건을 반성하고 군율을 정비하여 민간인 피해를 최소화하려 노력했다.[4]
텐구당은 11월 29일 다이고를 출발하여 나카센도를 따라 교토로 향했다. 여러 번이 막부의 추토 명령을 받았으나, 텐구당은 정예군이었고 대포까지 소지하고 있어 전투를 피하는 경우가 많았다. 텐구당은 1864년 11월 16일 시모니타에서 다카사키 번 군대와 교전하여 승리했고(시모니타 전투), 11월 19일 와다 고개에서 다카시마 번, 마쓰모토 번 연합군과 교전하여 승리했다(와다 고개 전투).[4]
그러나 미노 우누마주쿠 근처에서 히코네 번, 오가키 번 등 대군이 진을 치고 있어, 텐구당은 나카센도를 벗어나 북쪽으로 우회하여 교토로 향했다. 히토쓰바시 요시노부는 텐구당 추토를 위해 가가 번, 아이즈 번 등을 이끌고 출진했다. 텐구당은 이비주쿠에서 비와 호를 거쳐 교토로 가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에치젠(현재의 후쿠이현)으로 우회하여 교토를 노리기로 했다. 12월에 접어들어 추위와 눈 속에서 험난한 고개를 넘었지만, 에치젠에 들어가는 데 성공했다.[4]
1864년 10월 10일, 나카미나토에서 6,700명의 막부군이 2,000명의 텐구당에게 패배하는 등, 분쟁은 격화되었다.[5] 1864년 12월, 텐구당은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이끄는 10,000명이 넘는 군대에 직면하여 항복했다.[6] 이 봉기로 텐구당 측 1,300명이 사망하고, 353명이 처형되는 등 잔혹한 탄압이 이루어졌다.[7]
5. 결과
텐구당의 난은 결국 실패로 끝났지만, 이 사건은 도쿠가와 막부의 권위를 크게 떨어뜨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또한,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계기 중 하나가 되었다.[7]
난이 진압된 후, 막부는 텐구당에 대해 대대적인 탄압을 가했다. 1865년 1월 14일, 가가번에 투항한 다케다 고운사이 등 텐구당 간부들은 무장 해제되었지만, 막부의 강경한 태도로 인해 가혹한 처벌을 받았다. 주도자들은 3월 1일부터 3월 20일까지 라이코 사(来迎寺) 경내에서 참수되었고, 가담자들과 그 가족들 역시 귀양, 추방 등의 처벌을 받았다.[7] 좁은 청어 창고에 갇힌 많은 사람들이 혹한과 열악한 환경 속에서 쓰러져 20명 이상이 병사했다고 전해진다.
미토번에서는 이치카와 산자에몬 등 쇼세이당이 중심이 되어 여자, 어린이, 유아를 포함한 텐구당의 가족들을 모두 처형했다. 나카노미나토 반사로의 관계자들은 직접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존왕양이파라는 이유로 자결하거나 옥사하는 등 가혹한 탄압이 이어졌다.
오바마번에 맡겨진 다케다 긴지로 등 110명은 처음에는 유배형을 받았으나, 도쿠가와 이에모치가 사망하고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쇼군직에 오르면서 근신 처분으로 변경되었다. 오바마 번주 사카이 타다우지는 이들을 미하마정 사가키의 저택으로 옮겨 후대하였다.
1868년, 보신 전쟁이 발발하자, 긴지로 등 텐구당 잔당은 조슈번의 지원을 받아 미토 번청을 장악하고 쇼세이당에게 보복을 가했다. 이 과정에서 쇼세이당의 가족들이 모두 처형되는 등 참혹한 보복이 이어졌다.
미토번은 텐구당의 난과 그 이후의 내분으로 인해 많은 인재를 잃었고, 이는 메이지 유신 이후 신정부에서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지 못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6. 난(乱) 후
난이 진압된 후, 미토 번에서는 쇼세이 당이 권력을 잡고 다케다 고운사이의 처자식을 비롯한 난에 가담한 사람들의 가족을 모두 처형했다.[10] 그러나 텐구당 중 일부는 조슈 번의 지원을 받아 교토에 잠복, '혼코쿠지 당(本国寺党)'이라 자칭하며 복권을 노렸다.
무진 전쟁이 발발하자 조정은 미토 번의 보수파(쇼세이 당) 토벌 명령을 내렸고, 혼코쿠지 당을 비롯한 텐구당 잔당들은 미토 번으로 돌아와 전 텐구당 파들과 함께 쇼세이 당을 진압했다.
이치카와 히로토미 등 쇼세이 당은 미토 번에서 나가 호쿠에쓰 전쟁, 아이즈 전쟁에 참전했다. 신정부군에 맞서 싸웠으나 결국 패배, 미토 성을 기습했지만 실패하고(고도칸 전쟁), 시모우사 요우카 시장 전투에서 괴멸되었다(마쓰야마 전쟁). 이치카와를 비롯한 쇼세이 당의 많은 이들이 처형되었다.
번의 실권은 다케다 긴지로 등 텐구당이 장악했고, 쇼세이 당에 대한 박해는 더욱 심해졌다. 번 무사뿐 아니라 농민, 마을 주민들 사이에서도 보복과 린치가 자행되었다.
이러한 내부 항쟁으로 미토 번은 많은 인재를 잃었고, 메이지 시대 신정부에 요인을 거의 배출하지 못했다.
7. 평가 및 영향
텐구당의 난은 실패로 끝났지만, 일본 근대화 과정에서 중요한 역사적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이 사건은 막부 체제의 모순을 드러냈을 뿐만 아니라, 존왕양이 운동이 확산되는 데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11][12]
특히, 텐구당이 내세운 존왕양이 사상은 조선의 개화파 지식인들에게도 큰 자극을 주었다. 이는 갑신정변(甲申政變)과 같은 조선의 개혁 운동에도 일정한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게이오 4년(1868년) 1월 27일 도바·후시미 전투를 시작으로 보신 전쟁이 발발하자, 다케다 킨지로 등 텐구당 잔당은 조슈번의 지원을 받아 혼코쿠지당과 합류하여 조정으로부터 쇼세이당 토벌 칙서를 받았다.[21] 텐구당과 혼코쿠지당(양자를 합쳐 "사이미당"이라고 칭했다)은 미토번청을 장악하고 보복을 시작하여, 쇼세이당의 가족들을 모두 처형했다.
야마카와 키쿠에는 킨지로에 대해 "무지하고 유치한 그를 지배하는 것은 공허한 명문의 우월감과 조정으로부터의 마치 복수를 부추기는 듯한 매우 부적절한 말뿐이었다. 5개조 서약조차 읽을 수 없었고 읽어 들어도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라고 평가했다.
미토학을 배경으로 존왕양이 운동을 처음에는 주도했던 미토번이었지만, 번내 항쟁으로 많은 인재를 잃어, 신정부에서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지 못했다.[22]
8. 현대의 계승
미토시(이바라키)와 히코네시는 사쿠라다몬 외의 변(1860년) 이후 적대적인 관계였으나, 110년 만에 텐구토 구성원들의 사망 장소인 쓰루가시에서 화해했다.[15]
일본의 원자력 밀집 지역은 미토 인근과 쓰루가 인근에 집중되어 있는데, 이 두 지역은 텐구토의 난과 관련이 있다. 특히 미토의 이웃인 오아라이정의 조요와 쓰루가의 몬주는 일본에 있는 두 개의 나트륨 냉각 고속로이다.
참조
[1]
서적
Before the Dawn
University of Hawaii Press
1987-10-01
[2]
웹사이트
Account of the Battle of Wada Peak handwritten by Takashima Domain strategist Shiohara Hikoshichi found
http://kyodoshi.com/[...]
All-Japan Local Newspaper Association
2021
[3]
서적
The Cambridge History of Japan
https://books.google[...]
[4]
문서
Totman, p.112
[5]
문서
Totman, p.118
[6]
문서
Totman, p.119-120
[7]
문서
Totman, p.120
[8]
문서
元治元年(甲子年)に起こったことから。
[9]
문서
幕府陸軍約3300人、高崎藩・笠間藩兵約2000人に、諸生党が結成した追討軍数百人が追従した。
[10]
문서
大挙して水戸に進発した一団を「大発勢」と呼ぶ。
[11]
문서
昭和16年([[1941年]])に作られた『明治維新水戸風雲録』では、この軍議の際に耕雲斎は最期の一戦を仕掛け討ち死にする事を主張したが、小四郎が反対し上洛する事に決まったという。
[12]
문서
天狗党が諸費用をきちんと宿場に支払うなど規律厳守に努めたことは、[[島崎藤村]]の代表作『[[夜明け前]]』にも記述されている。
[13]
문서
[[大目付]]の[[黒川盛泰]]らが従軍。
[14]
서적
幕末、残り火燃ゆ-桜田門外変後の水戸藩と天狗党の変-
総合出版社歴研
2014-09-09
[15]
문서
ただし、加賀藩側の天狗党に対する評価は「是に於てか、尊王も佐幕もなく、攘夷もなく開国もない。唯有るものは一藩内の勢力争奪の為めにする交刃と砲火とのみであった」というものであった。(『水戸浪士西上録』218頁。石川県図書館協会、1934年)
[16]
서적
幕末維新(第5編)
山内家史料刊行委員会編纂
[17]
서적
板垣退助君伝 第1巻
[[自由新聞|自由新聞社]]
1893
[18]
서적
土佐維新史料
[19]
서적
明治功臣録
明治功臣録刊行會編輯局
1915
[20]
문서
板垣退助『維新前後経歴談』(所収『維新史料編纂会講演速記録(1)』159頁、『板垣退助君戊辰戦略』他より。
[21]
문서
細布(さいみ)と呼ばれる麻の、官軍支給品の陣羽織を着用していた。
[22]
문서
水戸藩出身で維新の功労で唯一爵位を受けた[[香川敬三]]は文久3年の上洛後に水戸に帰還せずに京都で尊皇攘夷運動を続けていたために結果的に一連の水戸藩の争乱に巻き込まれなかったことによる。
[23]
문서
「九重の里」とは宮中のことだとされる。
[24]
서적
歴史を射つ
御茶の水書房
2015
[25]
문서
但し横瀬夜雨の『天狗塚』では、討伐されたのは12人のはずが昭和の改葬の際に掘り出したところ19人分の骨が出てきたとされ、素人の数え間違いか古い塚か墓に投げ込んだからではないかと推測してい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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