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미 힐피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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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토미 힐피거는 미국의 패션 디자이너로, 1985년 자신의 이름을 딴 브랜드 "토미 힐피거"를 런칭했다. 1951년 뉴욕주 엘미라에서 태어난 힐피거는 1969년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1971년 엘미라에 첫 매장인 "People's Place"를 열며 패션 사업을 시작했다. 1984년에는 사업가 모한 무르자니의 제안으로 남성 스포츠웨어 라인을 디자인했고, 1990년대에는 힙합 패션과 음악 산업과의 협업을 통해 브랜드의 인지도를 높였다. 1995년에는 미국 패션 디자이너 협의회에서 올해의 남성복 디자이너로 선정되었으며, 2005년에는 브랜드를 사모 투자 회사에 매각했다. 그는 또한 자선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토미 힐피거 기업 재단을 설립하고, 다양한 단체에 기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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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카 트럼프는 사업가, 전직 모델, 백악관 선임 고문으로,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딸이자 트럼프 그룹 부사장을 역임했으며, 트럼프 행정부에서 무보수 백악관 선임 고문으로 활동하며 여성 기업가 지원, 경제 정책, 인신매매 방지 등의 분야에서 활동했다. - 미국의 패션 디자이너 - 코트니 카다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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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미 힐피거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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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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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토머스 제이컵 힐피거 |
출생일 | 1951년 3월 24일 |
출생지 | 미국 뉴욕주 엘마이라 |
직업 | 패션 디자이너 |
배우자 | 제인 클로펜스타인 (1978년 결혼, 1979년 이혼) 수지 시로나 (1980년 결혼, 2000년 이혼) 디 오클레포 (2008년 결혼) |
자녀 | 5명 (리키 힐 포함) |
웹사이트 | 공식 웹사이트 |
2. 초기 생애 및 경력
토미 힐피거는 1951년 3월 24일 뉴욕주 엘미라에서 9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모두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다. 아버지 리처드는 독일계 스위스 시계 제작자였고, 어머니 버지니아는 아일랜드계 간호사였다. 힐피거는 로버트 번스의 형제인 길버트 번스의 직계 후손이라고도 주장한다.
힐피거는 어린 시절을 매우 행복했다고 묘사하며, 부모님 덕분에 훌륭한 직업 윤리와 타인에 대한 연민을 갖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는 난독증을 앓고 있다.[12] 스포츠, 패션, 음악 산업에 대한 관심은 그의 가족 내에서도 나타나는 경향이었다. 그의 형제 앤디 힐피거는 음악가이자 디자이너로 활동했고, 또 다른 형제 빌리 힐피거는 킹 플럭스 등 여러 밴드에서 기타리스트로 활동했다.
1969년 엘미라 자유 아카데미 고등학교를 졸업한 힐피거는 대학교육을 받기를 원했던 부모님의 바람과는 달리, 고등학교 시절부터 패션 사업에 대한 열정을 키웠다. 1970년대에 지역에서 패션 사업을 시작했으며, 디자인은 독학으로 배웠다.
2. 1. People's Place와 초기 디자인 (1970년대-1983년)
1969년 여름, 케이프 코드에 있는 의류 매장에서 일한 경험을 바탕으로, 1971년 힐피거는 150USD를 투자하여 엘미라에 자신의 첫 매장인 "People's Place"를 열었다. 첫 매장은 현재 퍼스트 아레나가 있는 엘미라 시내에 위치했으며, 지하에는 헤어 살롱, 레코드 가게, 록 콘서트장이 있었다. 힐피거는 뉴욕에서 통바지, 농부 블라우스, 가죽 재킷과 같은 옷들을 구입하여 판매했지만, 이러한 디자인에 만족하지 못하고 직접 디자인을 스케치하기 시작했다. 그는 독학으로 패션 디자인을 공부하며 "디자인은 내가 했던 그 어떤 것보다 나를 행복하게 만들었다. 나는 그 초기 작품들을 통해 디자인이 내 인생이 될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고 회고했다.People's Place는 7개의 매장으로 확장되었으나, 1977년 파산했다. 힐피거는 패션 산업의 비즈니스 측면에 대한 수업을 들으며 경험을 쌓았다. 1979년 뉴욕으로 이주하여 여러 브랜드에서 일했으며, 같은 해에 "토미 힐"이라는 회사를 설립하여 조다쉬 진 등을 취급했다. 힐피거는 인도에서 시간을 보내며 그의 사업에 대해 더 많이 배웠다. 그는 "나는 공장에 앉아 내 스케치 더미를 놓고 그들이 만들어지는 것을 보면서 수정했다. 이보다 더 좋은 디자인 학교는 세상에 없다."라고 말했다. 1981년에는 "20세기 서바이벌"을 설립했고, 이듬해에는 여성 의류를 디자인하는 "클릭 포인트"를 설립했다.
3. 토미 힐피거 브랜드
1984년, 모한 무르자니의 제안으로 남성 스포츠웨어 디자인을 맡게 되면서, 그의 지원을 받아 자신의 브랜드 "토미 힐피거"를 론칭했다. 1995년 페페 진스 USA의 라이선스를 취득했고, 1997년에는 자신의 첫 번째 책인 ''All American: A Style Book''을 출판했다.
2012년에는 미국 패션 디자이너 협의회로부터 제프리 빈 평생 공로상을 수상했다. 2013년 브랜드의 글로벌 소매 판매액은 64억달러였으며, 2014년에는 67억달러였다. 힐피거는 회사의 수석 디자이너로 남아 디자인 팀을 이끌고 전체 창작 과정을 감독하고 있다.
2016년에는 모델 지지 하디드와 의류 디자인에 협업하여 TommyXGigi 의류 컬렉션을 출시했다. 2015년 1월, 힐피거는 회고록을 쓰고 있다고 발표했으며, 피터 노블러와 함께 집필한 힐피거의 회고록 ''American Dreamer: My Life in Fashion & Business''는 2016년 11월에 출판되었다. 힐피거는 이 책을 "나의 [40년 패션 경력]과 개인적인 삶을 모두 규정하는 순간들을 보여주는 로드맵"이라고 묘사했다.
3. 1. 토미 힐피거 회사 설립 (1984년-1990년대)
1984년, 힐피거는 사업가 모한 무르자니의 제안으로 남성 스포츠웨어 라인을 디자인하고 이끌게 되었다. 무르자니는 힐피거가 자신의 브랜드를 설립할 수 있도록 지원했다. 이후 힐피거는 무르자니를 위해 코카콜라 의류 라인의 디자인을 감독했다.1985년, 그는 머르자니 그룹의 지원을 받아 토미 힐피거 코퍼레이션을 설립했다. 새로운 의류 라인은 타임스 스퀘어에 조지 로이스가 디자인한 대형 광고판을 설치하는 등 대대적인 마케팅 캠페인과 함께 선보였다. 1989년, 힐피거는 무르자니 인터내셔널을 떠났고, 사일러스 추가 힐피거 브랜드에 재정적 지원을 제공했으며, 랄프 로렌의 전 임원들이 새로 설립된 토미 힐피거 Inc.의 임원으로 합류했다.
토미 힐피거 코퍼레이션은 1992년에 기업 공개를 통해 상장되었고, 힐피거의 시그니처 남성복 컬렉션을 선보였다. 힐피거는 1995년 미국 패션 디자이너 협의회로부터 올해의 남성복 디자이너로 선정되었다.
1996년, 토미 힐피거 Inc.는 여성 의류 유통을 시작했다. 1997년 말, 힐피거는 비벌리힐스에 첫 번째 매장을 열었고, 1998년에는 런던에 매장을 열었다.
3. 2. 브랜드 노출 증가 (1990년대-2004년)
로큰롤의 팬인 힐피거의 컬렉션은 종종 음악 서브컬처의 패션에 영향을 받았다. 의류는 음악 산업과 관련하여 마케팅되었으며, 1993년 피트 타운센드의 사이코데렐릭 투어의 공식 후원자였다. 힐피거는 1997년 셰릴 크로우의 If It Makes You Happy 투어, 1999년 브리트니 스피어스의 ...Baby One More Time Tour 메인 스폰서, 레니 크라비츠의 1999년 Freedom 투어를 포함하여 여러 음악 행사를 후원했다. 1990년대 중반까지 힐피거의 의류 스타일은 미국의 "프레피" 씬과 힙합 패션 모두에서 인기를 얻었다. 1997년 알리야는 토미 힐피거 코퍼레이션의 대변인이 되었다.힐피거는 2001년 패션 패러디 영화 ''주랜더''에 카메오로 출연했으며, 2002년부터 2006년까지 토미 힐피거 Inc.는 토미 힐피거 앳 존스 비치 극장 공연장의 명명권을 소유했다. 2000년대 초반 판매 부진으로 인해 힐피거는 힐피거 라벨의 디자이너 브랜드 독점성을 유지하기 위해 브랜드 개편을 시작하여, 가장 잘 팔리는 힐피거 라인을 메이시스에서만 유통하는 계약을 체결했다.
토미 힐피거 코퍼레이션은 2000년대에도 음악가들과 긴밀히 협력하여 의류뿐만 아니라 향수에도 집중했다. 2003년 토미 힐피거는 트루 스타를 출시하고, 비욘세를 모델로 내세웠다. 토미 힐피거 코퍼레이션의 2004년 매출은 약 18억달러였고, 5,400명의 직원을 고용하고 있었다.
"어느 해, 제 형 앤디가 마크 론슨, 키다다 존스, 케이트 허드슨을 포함한 록과 할리우드 전설들의 아들딸들을 투어 버스에 태우고 전국에서 패션쇼를 열었습니다... 우리는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부쉬의 라이브 공연, 브라이언트 파크에서 퍼렐, 파리에서 레니 크라비츠와 함께 런웨이 쇼를 열었습니다. 런던에서는 케이트 모스와 나오미 캠벨이 그 주위에서 춤을 추는 가운데 트리치가 런웨이에 섰습니다. 저는 롤링 스톤스의 [1998년 "노 시큐리티"] 투어를 위해 그들의 옷을 디자인했고, 믹 재거와 밴드와 함께 일하는 것은 정말 훌륭한 경험이었습니다." |
— 2010년 토미 힐피거 |
3. 3. 매각 및 미디어 출연 (2005년-2011년)
2005년, CBS의 리얼리티 쇼 ''더 컷''에서 토미 힐피거는 자신의 패션 라인을 만들기 위해 경쟁하는 16명의 참가자들을 심사했다. 이 쇼는 도널드 트럼프의 ''어프렌티스''와 유사한 방식으로 진행되었으며, 최종적으로 힐피거는 크리스 코르테스를 "다음 위대한 미국 디자이너"로 선정했다.2005년 12월, 힐피거는 의류 브랜드를 사모 투자 회사인 아팍스 파트너스에 16억달러에 매각했다.[2] 이 거래는 2006년 5월에 완료되었다.[3] 2008년, 힐피거는 리브스, 바 라파엘리와 함께 브라보 특별 프로그램 ''토미 힐피거 프레젠트 아이로닉 아이코닉 아메리카''의 공동 진행을 맡았다. 힐피거와 디자이너 조지 로이스가 쓴 책 ''아이로닉 아이코닉 아메리카''를 바탕으로 한 이 프로그램은 팝 문화가 미국인의 취향과 스타일에 미친 영향을 탐구했다.
2009년, 힐피거는 ''프로젝트 런웨이'' 에피소드의 게스트 심사위원으로 출연했으며, 2010 월드 뮤직 어워드에서 아콘에게 최우수 아프리카 아티스트 상을 수여했다.
2010년 3월, 필립스-반 호이젠(PVH)은 토미 힐피거 브랜드를 30억달러에 인수했다. 2010년 8월부터 2011년 8월까지 "Meet The Hilfigers"라는 토미 힐피거 광고 캠페인이 진행되었다. 2011년, 힐피거와 파트너는 메트로폴리탄 생명 보험 회사 타워 건물을 1.7억달러에 매입하여 고급 호텔로 변모시킬 계획이었으나, 같은 해 9월 이 프로젝트에서 철수했다.
2012년, 힐피거는 네이먼 마커스 패션 디렉터 켄 다우닝과 함께 ''프로젝트 런웨이: 올 스타''의 결선 게스트 심사위원으로 참여했고, 얼마 후 ''아메리칸 아이돌'' 시즌 11 참가자들의 패션 컨설턴트로 활동했다.
3. 4. 최근 활동 및 회고록 (2012년-현재)
힐피거는 회사를 매각한 후에도 토미 힐피거에 남아 해당 회사의 수석 디자이너로서 디자인 팀을 이끌고 전체 창작 과정을 감독하며 활발하게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5]4. 디자인 스타일 및 영향
토미 힐피거의 초기 디자인은 1960년대 반문화 패션의 영향을 받았지만, 1980년대 이후에는 클래식한 아메리카 뉴잉글랜드 프레피 스타일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1990년대 스포츠웨어 분야에서 폴로 랄프 로렌, 캘빈 클라인, 노티카 등과 함께 가장 두드러진 브랜드 중 하나였다.
힙합 패션은 1990년대에 힐피거 브랜드를 포함하기 시작했으며, 스눕 독이 ''새터데이 나이트 라이브''에 출연하여 힐피거 스웨트셔츠를 입었을 때, 다음 날 뉴욕시 매장에서 매진되기도 했다. 힐피거는 퍼피와 쿨리오와 같은 래퍼들이 런웨이 쇼에서 워킹을 하는 등 새로운 힙합 시장을 공략했다. 토미 힐피거 카펜터 진과 같은 특정 품목은 특히 인기를 얻었다.
힐피거는 여러 패션 라인을 유지하며, 캐주얼 의류와 오트 쿠튀르 의뢰를 모두 소화한다. 그레이스 켈리, 제임스 딘, 데보라 해리, 이기 팝, 패라 포셋, 스티브 맥퀸, 재키와 존 F. 케네디, 앤디 워홀 등 다양한 미국 아이콘들의 스타일에 영향을 받았다. 그의 디자인 중 많은 부분은 하드 록과 팝 음악 산업의 스타일에서 영감을 받았다.
힐피거는 회사의 수석 디자이너로 남아 디자인 팀을 이끌고 전체 창작 과정을 감독하고 있다. 2016년에는 모델 지지 하디드와 의류 디자인에 협업하여 TommyXGigi 의류 컬렉션을 출시했다.
4. 1. 사회적 영향 및 한국과의 관계
힐피거는 2012년 마크 앤서니 컬렉션을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마크 앤서니는 힐피거가 그에게 전화를 걸어 의류 라인이 가치 있다는 것을 설득하기 전까지는 패션 사업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힐피거는 2012년 미국 패션 디자이너 협의회로부터 제프리 빈 평생 공로상을 수상했다. 2013년 브랜드의 글로벌 소매 판매액은 64억달러였으며, 2014년에는 67억달러였다.힐피거는 2015년 1월 회고록을 쓰고 있다고 발표했다. 이 책은 1년 동안 연대기순으로 쓰여졌으며, 힐피거는 "쓰는 것을 망설였지만, 언젠가는 잊을 수도 있기에 지금 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라고 설명했다. 공동 저자인 피터 노블러는 친구와 가족을 인터뷰할 수 있는 모든 권한을 가졌으며, 힐피거는 다이앤 폰 퍼스텐버그의 회고록에서 솔직함에 영감을 얻었다고 언급했다. 힐피거는 집필 과정을 "훌륭한 치료"와 "재미있는" 작업이라고 칭하며, "패션 업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에 대한 커튼 뒤의 엿보기를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고 주장했다.
힐피거의 회고록 ''American Dreamer: My Life in Fashion & Business''는 피터 노블러와 공동 집필하여 2016년 11월에 출판되었다. 힐피거는 성명을 통해 이 책을 "나의 [40년 패션 경력]과 개인적인 삶을 모두 규정하는 순간들을 보여주는 로드맵"이라고 묘사했으며, 이 책은 그의 어린 시절, 초기 사업, 그리고 패션에서의 후기 삶을 다루고 있다. ''커커스 리뷰''는 이 책을 "정직하고 솔직하며, 대부분 재미있는 자서전"이라고 평가했으며, 힐피거는 출간 직후 마이애미 도서전에 이 책을 홍보하기 위해 참석했다. ''American Dreamer''는 2016년 12월 뉴욕 타임스 베스트셀러 목록에 올랐다.[5]
5. 자선 활동
1995년, 힐피거는 토미 힐피거 기업 재단을 설립했다. 이 재단은 건강, 교육, 문화 프로그램을 중심으로 위험에 처한 미국 청소년을 위한 자선 단체를 지원한다. 1999년, The Fresh Air Fund의 캠프 파이오니어 프로그램은 힐피거의 후원을 기념하여 캠프 토미로 이름이 변경되었다.[6]
2008년부터 힐피거는 유방암 치료법을 찾는 국제 단체인 Breast Health International(BHI)를 지원하기 위해 한정판 핸드백을 디자인해 왔다. 핸드백 판매 수익의 일부는 BHI의 Fund For Living 프로그램에 기부된다.
밀레니엄 프라미스는 극심한 빈곤, 기아, 예방 가능한 질병을 빈곤 지역에서 근절하는 데 초점을 맞춘 비영리 단체이다. 2009년, 힐피거는 밀레니엄 프라미스에 5년간 20억달러를 기부하기로 약정했다. 이 기부금은 우간다의 한 도시에서 구호 활동에 사용되었다.
2012년, 토미 힐피거 기업 재단의 모든 자선 활동은 Tommy Cares로 이름이 변경되었다. 이는 브랜드의 비영리 파트너십, 자선 기부 및 직원 참여를 통합하는 광범위한 글로벌 이니셔티브이다. Tommy Cares는 세이브 더 칠드런, 세계 야생 생물 기금, War Child등의 단체를 지원하고 있다. 힐피거와 그의 아내는 Autism Speaks의 이사로 재직하고 있으며, 이 단체를 통해 힐피거는 2014년 9월 골든 도어 영화제의 후원자가 되었다.
6. 수상 및 영예
연도 | 수상 내역 |
---|---|
1995년 | 미국 패션 디자이너 협의회(CFDA) - 올해의 남성복 디자이너 |
1996년 | 미국 업적 아카데미 - 골든 플레이트 상[8] |
1997년 | FiFi 어워드 - 올해의 남성 향수 (럭스 부문)[9] |
1998년 | 파슨스 디자인 스쿨 - 올해의 디자이너 상 |
1998년 | GQ 매거진 - 올해의 디자이너 ("올해의 남성" 특별호) |
2000년 | FiFi 어워드 - 올해의 최고의 마케팅 혁신 |
2002년 | GQ 독일 - 올해의 국제 디자이너 |
2002년 | 마약 남용 저항 교육 - 미국 청소년을 위한 자선 활동에 대한 미래상 |
2006년 | GQ 스페인 - 올해의 디자이너 |
2006년 | 하버드 재단 - 피터 J. 고메스 올해의 인도주의자 |
2006년 | 우리는 가족 재단 - 비전상 |
2007년 | 히스패닉 연맹 - 개인 업적상 |
2008년 | 여성 의류 일간지 - 연간 "100인 명단"에서 1위 디자이너 및 16위 브랜드 |
2009년 | 유네스코 - 자선 활동에 대한 유네스코 지원상 |
2009년 | 마리끌레르 매거진 - 평생 공로상 |
2010년 | 프랫 인스티튜트 - 레전드 상 |
2011년 | 필라델피아 대학교 - 스피릿 오브 디자인 어워드 |
2012년 | 미국 패션 디자이너 협의회(CFDA) - 제프리 빈 평생 공로상 (안나 윈투어가 수여) |
2014년 | GQ 인도 - 아이콘 어워드 |
2015년 | Race To Erase MS - 다발성 경화증 치료법을 찾기 위한 헌신에 대해 영예를 받음 |
2015년 | GQ 독일 - 올해의 디자이너 |
2016년 | 데일리 프론트 로우 - 패션 비저너리 |
7. 출연 작품
Frasier
Zoolander
The Cut
Project Runway
Project Runway: All Stars
American Idol
Zoolander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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