툴롱 전투 (17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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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툴롱 전투 (1707년)는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중 프랑스 해군 기지인 툴롱을 공격하려 했던 연합군의 시도이다. 1700년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발발 이후, 북부 이탈리아 전선에서 프랑스군이 우위를 점했다. 영국은 툴롱 공격을 통해 지중해 해상 우위를 확보하고, 프랑스군을 분산시키려 했다. 1707년 7월 외젠 공과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는 클라우드슬리 쇼벌 제독의 지원을 받아 툴롱을 공격했으나, 프랑스의 방어 강화와 연합군의 병력 부족, 질병 등으로 인해 8월 철수했다. 이 전투는 연합군에게 13,000명 이상의 사상자를 발생시켰고, 프랑스 해군력 약화와 서부 지중해에서의 영국 해군 우위를 확인시켰지만, 연합군의 전략적 목표 달성에는 실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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툴롱 전투 (1707년)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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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 개요 | |
전투명 | 툴롱 포위전 |
시기 | 1707년 7월 29일 – 8월 21일 |
장소 | 프랑스 왕국 툴롱 |
결과 | 프랑스 왕국의 승리 |
관련 전쟁 |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
교전 세력 | |
공격 측 | 합스부르크 군주국 사보이 공국 그레이트브리튼 왕국 네덜란드 공화국 |
방어 측 | 프랑스 왕국 |
지휘관 및 지도자 | |
공격 측 지휘관 |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 사보이 공작 외젠 클라우즐리 쇼벨 코르넬리스 베크만 요한 빌헬름 폰 작센-고타-알텐부르크 (전사) |
방어 측 지휘관 | 르네 드 푸를레 드 테세 자크 엘레오노르 루셀 드 그랑세 드 메다비 |
병력 규모 | |
공격 측 병력 | 35,000명 |
방어 측 병력 | 수비대: 10,000명 야전군: 20,000명 |
피해 규모 | |
공격 측 피해 | 사망, 부상, 탈영, 질병으로 인한 사망: 13,000명 |
방어 측 피해 | 불명 전열함 46척 자침 |
2. 배경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은 1700년 11월, 자녀 없이 사망한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2세의 후계 문제로 발발했다. 카를로스 2세는 프랑스 국왕 루이 14세의 손자인 스페인 국왕 펠리페 5세를 후계자로 지명했고, 1700년 11월 16일 펠리페 5세가 광대한 스페인 제국의 왕위를 계승했다. 이는 유럽의 세력 균형을 우려한 다른 국가들의 반발을 샀고, 특히 합스부르크 왕가는 카를 대공을 왕위 후보로 내세우며 대동맹을 결성하여 프랑스 및 스페인과 맞섰다.
전쟁 초기, 북부 이탈리아 전선에서는 프랑스군이 우세를 점했으나, 사보이 공국이 1703년 대동맹 측으로 돌아서고, 1706년 오이겐 공이 토리노 포위전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면서 전세가 역전되었다. 1707년 밀라노 협약으로 이탈리아 주둔 프랑스군이 철수하면서 이탈리아 전선은 대체로 안정되었다.
이탈리아 전선이 안정되자 연합군은 확보된 병력을 다른 곳으로 돌릴 여유를 갖게 되었다. 영국은 지중해에서 프랑스 해군의 영향력을 약화시키고 남부 프랑스를 압박하기 위해 프랑스의 주요 해군 기지인 툴롱 공격을 제안했다. 이는 프랑스에게 영토를 빼앗겼던 사보이 공작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의 이해관계와도 맞아떨어졌다. 툴롱 점령은 서지중해의 제해권을 확보하고, 프랑스 남부의 카미사드 반란을 지원하며, 스페인에 집중된 프랑스군을 분산시키는 등의 전략적 목표를 가지고 추진되었다.[1]
2. 1. 이탈리아 전선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에서 북부 이탈리아는 스페인이 지배하던 밀라노 공국과 만토바 공국을 둘러싼 주요 전장이었다. 이 지역은 오스트리아 대공국의 남부 국경 안보에 매우 중요하게 여겨졌다. 1701년 3월, 프랑스군은 두 도시를 모두 점령하고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가 다스리던 사보이 공국과 동맹을 맺었다.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의 딸 사보이의 마리아 루이사는 스페인 국왕 펠리페 5세와 결혼하기도 했다.그러나 1703년 10월,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는 프랑스와의 동맹을 파기하고 대동맹 측에 합류했다. 이에 프랑스 원수 루이 도보송 드 라 푀야드는 1704년 빌프랑슈 쉬르 메르와 사보이 백국 등 알프스 산맥 북쪽의 사보이 영토를 점령했다. 또한 피에몬테에서는 방돔 공작이 공세를 펼쳐 1705년 말에는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가 수도 토리노만을 겨우 통제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상황은 1706년 7월, 방돔 공작과 그의 병력이 라미예 전투에서의 패배 이후 프랑스 북부 국경을 강화하기 위해 이동하면서 반전되었다. 독일 지원군으로 강화된 외젠 공은 9월 토리노 포위전에서 프랑스군을 격파했다. 비록 카스틸리오네 전투에서 프랑스가 소규모 승리를 거두기도 했지만, 이탈리아에서의 전쟁은 사실상 연합군의 승리로 기울었다. 1707년 3월, 밀라노 협약이 체결되어 롬바르디아의 프랑스군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요제프 1세의 허가 하에 남부 프랑스로 자유롭게 철수할 수 있게 되었다. 이는 다른 동맹국들의 불만을 사기도 했다.
이탈리아 북부 전선이 정리되면서 합스부르크 군주국과 사보이 공국은 병력을 다른 곳에 투입할 여유를 갖게 되었다. 한편, 나폴리 왕국 역시 빌리히 폰 다운이 이끄는 오스트리아군에 의해 점령되어, 이탈리아 반도는 거의 동맹군의 수중에 들어갔다. 그러나 오스트리아의 이탈리아 지배력 강화는 지중해에서의 세력 균형을 우려한 영국과 네덜란드의 견제를 받았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오스트리아는 동맹국들을 달래고 프랑스 남부를 압박하기 위해 영국 해군의 협력을 얻어 프랑스 해군 기지인 툴롱 원정을 계획하게 되었다. 이 계획은 영국군 총사령관 말버러 공작의 제안과 사보이 공작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결과였다. 툴롱 점령은 지중해 서부에서 연합군의 해상 우위를 확보하고, 남부 프랑스의 카미사드 반란을 지원하며, 스페인에 집중된 부르봉 왕가의 병력을 분산시키는 등의 전략적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툴롱 원정은 여러 요인으로 지연되었고, 결국 툴롱 전투는 실패로 돌아갔다. 하지만 전투 이후 9월에 나폴리 평정이 완료되면서 오스트리아는 이탈리아에서의 영토 확보를 확정지었다. 이탈리아 전선은 이후 큰 변화 없이 교착 상태를 유지하다 종전을 맞았다. 외젠 공은 스페인령 네덜란드로 이동하여 말버러 공작과 함께 싸웠고, 이탈리아에는 다운 장군과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가 남아 남부 프랑스 공격을 시도했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2. 2. 툴롱 공격 계획
1706년 토리노 전투에서 오이겐 공자가 이끄는 오스트리아군이 프랑스군을 북부 이탈리아에서 몰아낸 후, 빌리히 폰 다운이 이끄는 오스트리아군이 남부 나폴리 왕국까지 원정하여 이탈리아 대부분 지역은 동맹군의 수중에 들어왔다. 그러나 오스트리아가 나폴리까지 평정하면서 지중해에서 세력을 확장하는 것을 경계한 영국과 네덜란드는 불만을 표했다. 이에 오스트리아는 동맹국들을 달래기 위해 영국 해군의 협력을 얻어 프랑스의 주요 해군 기지인 툴롱 원정에 나서기로 결정했다.[1]툴롱은 프랑스 해군의 핵심 거점이었기 때문에, 이곳을 점령하면 연합군은 서지중해의 제해권을 장악할 수 있었다. 이 공격 계획은 남쪽에서 프랑스를 압박하려던 영국군 총사령관 말버러 공작 존 처칠의 구상에서 시작되었다. 영국은 툴롱 공격을 통해 당시 남부 프랑스에서 일어난 카미사르 봉기(프로테스탄트 반란)를 지원하고, 스페인에 투입된 프랑스 병력을 분산시키는 효과를 기대했다. 또한, 이 계획은 프랑스에 의해 빌프랑슈쉬르메르와 사보이 공국 지역을 빼앗겼던 사보이아 공작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의 영토 회복 의도와도 맞아떨어졌다.[1]
원정은 원래 5월 초에 시작될 예정이었으나, 여러 요인으로 인해 지연되었다. 알프스 산맥의 눈이 늦게 녹았고,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가 병을 앓았으며, 클라우즐리 쇼벨 제독이 이끄는 영국과 네덜란드의 연합 함대가 6월이 되어서야 이탈리아에 도착했기 때문이다. 결국 동맹군은 7월에야 알프스를 넘어 니스를 점령하고 7월 26일 툴롱에 도착했다.[1]
하지만 동맹군의 움직임은 이미 프랑스에 알려진 상태였다. 프랑스 왕 루이 14세는 각 전선에 툴롱 구원을 명령했고, 툴롱을 방어하던 테세 백작 르네 드 플레는 주변 병력을 모아 방어 태세를 강화했다. 반면, 동맹군은 보급로가 길어져 후방에 대한 불안감을 안고 있었다. 오이겐 공자는 이러한 어려움을 예상하고 철수를 주장했지만,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와 쇼벨 제독의 강한 의지에 밀려 마지못해 포위전에 참여하게 되었다.[1]
3. 툴롱 포위전 (1707년)
오이겐 공자는 1706년 토리노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북부 이탈리아에서 몰아냈고, 빌리히 폰 다운이 이끄는 오스트리아군이 남부 나폴리 왕국을 점령하면서 이탈리아 전선은 동맹군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그러나 나폴리 점령은 지중해에서 오스트리아의 영향력 확대를 경계한 영국과 네덜란드의 불만을 샀다. 이에 오스트리아는 동맹국을 달래고 남부 프랑스를 압박하기 위해 영국 해군의 협력 하에 프랑스의 주요 해군 기지인 툴롱 원정에 나서게 되었다. 이 계획은 영국군 총사령관 말버러 공작 존 처칠의 제안에서 시작되었으며, 사보이아 공작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의 이해관계와도 맞아떨어졌다.
원래 5월 초 시작될 예정이었던 원정은 알프스 산맥의 늦은 해빙,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의 병, 그리고 클라우드슬리 쇼벌 제독이 이끄는 영국-네덜란드 연합 함대의 도착 지연 등으로 인해 7월로 크게 늦춰졌다. 또한, 요제프 1세 황제가 6월에 10,000명의 병력을 나폴리 점령을 위해 차출하면서 병력도 줄어들었다. 이러한 지연은 프랑스가 툴롱의 방비를 강화할 시간을 주었다.
7월 6일, 오이겐 공자와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는 쇼벨 제독 함대의 지원을 받으며 텐데 고개를 통해 알프스를 넘어 니스를 점령하고, 7월 말(26일 또는 27일) 툴롱 근교의 라 발레트 뒤 바르에 도착했다. 그러나 연합군의 진격은 더뎠고, 4월 알만사 전투에서 승리한 프랑스는 스페인으로부터 증원군을 보낼 여유를 확보한 상태였다. 연합군이 도착했을 때, 툴롱을 지키는 테세 백작 르네 드 프룰레는 이미 20,000명 이상의 병력을 집결시켜 방어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1] 프랑스 왕 루이 14세는 항구에 정박 중이던 46척의 전열함이 나포되거나 파괴되는 것을 막기 위해 자침시키도록 명령했고, 함포는 육상 방어 시설로 옮겨졌다.
7월 29일 포위가 시작되었지만, 연합군은 병력과 중포 부족, 보급 문제, 질병 등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오이겐 공자는 초기부터 작전의 어려움을 예상하고 철수를 주장했으나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와 쇼벨에게 밀려 마지못해 포위전에 참가했다.[1] 8월 6일, 연합군은 항구 위의 산타 카타리나 고지를 점령했지만, 8월 14일 테세 백작의 반격으로 고지를 다시 빼앗기고 큰 피해를 입었다. 이 전투에서 요한 빌헬름 폰 작센고타알텐부르크 공작이 전사했다.
연합군 내부의 갈등이 심화되고, 베릭 공작 등이 이끄는 프랑스 구원군이 접근해오자, 결국 8월 20일 포위 중단이 결정되었다.[1] 8월 22일 연합군은 철수를 시작했으며, 철수 과정에서 쇼벨 제독의 함대는 18시간 동안 툴롱 항구를 포격하여 자침해 있던 프랑스 군함 2척을 완전히 파괴하고 다수의 함선에 심각한 손상을 입혔으며, 조선소와 해군 물자도 파괴했다. 이로 인해 프랑스 해군의 재건은 더욱 어려워졌고, 연합 함대의 지중해 활동은 더 용이해졌다.[2] 비록 툴롱 포위는 실패로 끝났으나, 같은 해 9월 나폴리 평정이 완료되면서 오스트리아는 이탈리아에서의 영유권을 확고히 할 수 있었다.[2]
3. 1. 연합군의 어려움
1707년 4월 연합군은 35,000명의 병력을 모았으나, 6월 요제프 1세 황제가 나폴리 점령을 위해 10,000명의 병력을 차출하면서 작전이 지연되었다. 이는 프랑스가 툴롱 주변의 방어를 강화할 시간을 벌어주었다. 또한, 합스부르크 세력의 공고화와 피에몬테 북서부 지역에 프랑스군이 계속 주둔하는 상황은 사보이아 공작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가 이탈리아 외부 작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을 주저하게 만들었다. 특히 1703년 토리노 조약에서 오스트리아가 약속한 많은 사항이 이행되지 않은 점도 영향을 미쳤다.클라우드슬리 쇼벌 제독 휘하의 잉글랜드-네덜란드 함대의 지원에도 불구하고, 오이겐 공자와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가 이끄는 연합군의 진격은 더뎠다. 7월 6일 텐데 고개를 넘어 니스를 재점령하고 7월 말 라 발레트 뒤 바르에 도착했지만, 그 사이 프랑스는 4월 알만사 전투에서의 승리를 바탕으로 스페인으로부터 증원군을 파견할 여유를 확보했다. 연합군이 7월 27일 툴롱에 도착했을 때, 프랑스 사령관 테세 백작은 이미 20,000명 이상의 병력을 툴롱 외곽에 배치하여 방어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툴롱 항구에는 50문에서 110문까지의 규모를 가진 46척의 전열함이 정박해 있었으나, 루이 14세는 연합군에 의한 나포나 파괴를 우려하여 배들을 자침시키고 함포는 육상 방어 시설로 옮기도록 명령했다. 연합군은 정식 포위 작전을 수행할 병력이나 중포가 부족한 상황에서 8월 6일 항구 위의 산타 카타리나 고지를 점령했지만, 4일 후 테세에게 고지를 탈환당하며 막대한 피해를 입었고, 이 전투에서 작센고타알텐부르크 공작 요한 빌헬름도 사망했다.
기대했던 카미사르 봉기는 일어나지 않았고, 오히려 롬바르디아에서 철수한 프랑스군이 메다비 백작의 지휘 아래 리에에 집결하여 연합군의 후방을 위협했다. 또한 연합군은 보급로가 길어져 식량 부족에 시달렸고, 이질이 만연하여 수천 명의 병사들이 전투 불능 상태에 빠지거나 사망했으며, 처우에 대한 불만으로 탈주병이 속출했다.[1]
사령부 내에서도 불화가 심각했다. 오이겐 공자는 작전의 어려움을 예상하고 초기에 철수를 주장했지만,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와 쇼벨 제독에게 밀려 마지못해 포위전에 참여했다.[1] 포위전이 난관에 부딪히자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는 오이겐 공자가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다고 비난했고, 오이겐 공자는 자신에게 책임을 전가하려 한다고 반박하며 갈등이 깊어졌다.[1] 이러한 내부 분열과 악화되는 전황 속에서 베릭 공작, 부르고뉴 공작, 베리 공작 등이 이끄는 프랑스 구원군이 툴롱으로 향하고 있다는 소식은 연합군에게 더욱 불리하게 작용했다.[1] 결국 연합군은 8월 18일 해상 공격으로 생 루이 요새를 점령하는 작은 성과를 거두었지만, 전반적인 상황 악화로 8월 22일 철수를 결정할 수밖에 없었다.
3. 2. 프랑스의 방어
연합군의 나폴리 점령을 위한 병력 차출로 작전이 지연되면서, 프랑스는 툴롱 주변의 방어를 강화할 시간을 벌었다. 1707년 4월 알만사 전투에서의 승리 역시 프랑스가 스페인으로부터 증원군을 보낼 수 있게 해주었다. 연합군이 7월 27일 툴롱에 도착했을 때, 프랑스 사령관 테세 백작은 이미 20,000명 이상의 병력을 툴롱 외곽의 방어선에 배치하여 방어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1]툴롱 항구에는 50문에서 110문 포를 갖춘 전열함 46척이 정박해 있었다. 프랑스의 루이 14세는 이 함선들이 연합군에게 나포되거나 불타는 것을 막기 위해, 일단 배들을 가라앉혔다가 나중에 다시 인양하도록 명령했다. 함선에 실려 있던 함포들은 육상 방어 시설로 옮겨져 방어력을 강화하는 데 사용되었다.
연합군은 정식 포위 공격을 수행할 병력이나 중포가 부족한 상황이었지만, 8월 6일 항구 위쪽의 산타 카타리나 고지를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8월 14일, 테세 백작은 즉시 반격에 나서 이 고지를 탈환했으며, 이 과정에서 연합군은 요한 빌헬름 폰 작센고타알텐부르크 공작을 포함한 많은 사상자를 내는 등 큰 피해를 입었다.
한편, 베릭 공작, 부르고뉴 공작 루이, 베리 공작 샤를 형제가 이끄는 프랑스 구원군이 툴롱으로 향하고 있었고, 메다비 백작 휘하의 병력은 리에에 집결하여 연합군의 후방을 위협했다.[1] 이러한 프랑스 측의 효과적인 방어와 압박 속에서 연합군은 결국 8월 20일 포위를 풀고 8월 22일 철수하기로 결정했다.[1][2] 비록 프랑스 함대는 자침으로 인해 큰 손실을 입었지만, 툴롱 방어에는 성공하였다.
3. 3. 포위전의 실패와 철수
연합군이 7월 27일 툴롱에 도착했을 때, 르네 드 프룰레 드 테세는 이미 20,000명 이상의 병력을 툴롱 외곽에 배치하여 방어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툴롱 항구에는 50문에서 110문 포를 갖춘 전열함 46척이 정박해 있었는데, 루이 14세는 이 배들이 불타는 것을 막기 위해 자침시켰다가 나중에 다시 인양하도록 명령했고, 함포는 육상 방어 시설로 옮겨졌다.7월 29일 포위가 시작되었지만, 연합군은 정식 포위 작전을 수행하기에는 병력과 중포가 부족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8월 6일에는 항구 위의 산타 카타리나 고지를, 8월 10일에는 생 마르그리트 요새의 외곽 시설을 점령했다. 그러나 4일 뒤인 8월 14일, 테세는 반격을 가해 고지를 탈환했고, 이 과정에서 연합군은 요한 빌헬름 폰 작센고타알텐부르크 공작이 전사하는 등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포위전 동안 연합군은 여러 어려움에 직면했다. 기대했던 카미자르 봉기는 일어나지 않았고, 롬바르디에서 철수한 프랑스 병력이 메다비 백작 휘하에 리에에 집결하여 연합군의 후방을 위협했다. 또한 연합군 내부에서는 식량 부족과 이질 만연으로 사망자가 늘고 탈주병이 속출했으며, 사령부 내에서도 오이겐 공작과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 사이에 갈등이 심화되었다.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는 오이겐 공작의 소극적인 태도를 비난했고, 오이겐 공작은 자신에게 책임을 전가하려 한다고 반박했다.[1] 프랑스 측에서는 베릭 공작, 부르고뉴 공작 루이, 베리 공작 샤를 형제가 이끄는 구원군이 툴롱으로 향하고 있어 연합군에게는 더욱 불리한 상황이었다.
8월 18일, 연합군은 해상 공격을 통해 생 루이 요새를 점령하는 데 성공했지만, 수천 명의 병사들이 질병으로 전투 불능 상태에 빠지는 등 전황은 개선되지 않았다. 결국 8월 20일 포위 중단이 결정되었고, 오이겐 공작과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는 8월 22일 철수하기로 합의했다.[1]
철수 과정에서 포위 포병과 환자들을 배에 태운 뒤, 클라우드슬리 쇼벌 제독의 함대는 18시간 동안 툴롱 항구를 포격했다. 이 포격으로 프랑스 군함 2척이 침몰했고, 이미 자침해 있던 많은 배들이 심각하게 손상되었다. 또한 배를 수리하는 데 필수적인 조선소와 해군 물자도 파괴되어 프랑스 해군의 재건은 더욱 어려워졌다. 이로 인해 연합 함대의 지중해 진출은 더욱 용이해졌다.[2] 툴롱 포위전 자체는 실패로 끝났지만, 이 시기 나폴리 왕국 평정이 완료되면서 오스트리아는 이탈리아에서의 영유권을 확고히 하고 군사력을 다른 전선으로 돌릴 수 있게 되었다.[2]
4. 결과 및 영향
툴롱 공격은 실패로 끝났지만, 전쟁의 향방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프랑스 함대는 이 전투의 여파로 큰 타격을 입어 전쟁이 끝날 때까지 사실상 활동 불능 상태가 되었고, 루이 14세는 해군에 투입되던 자금을 스페인 내 육군 전력 강화에 사용하게 되었다. 이는 부르봉 왕가가 알만사 전투에서의 승리 효과를 충분히 활용하는 데 제약을 주었다.
비록 툴롱 점령에는 실패했지만, 이 작전은 서부 지중해에서 영국 해군의 통제력을 강화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러나 연합군 역시 13,000명에 달하는 사상자를 냈는데, 대부분은 질병으로 인한 손실이었다. 말버러 공작은 이를 심각한 전략적 패배로 간주했으며, 이 실패로 인해 상대적으로 방비가 허술했던 프랑스 남부 국경을 통해 프랑스 본토를 공격하려던 연합군의 계획은 무산되었다.
한편, 오스트리아는 툴롱 포위전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남부 이탈리아의 나폴리 왕국을 점령하는 데 성공하여 이탈리아에서의 영유권을 확고히 했다.[2] 오이겐 공자와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는 이후 알프스를 넘어 피에몬테 북서부에서 프랑스 수비대를 몰아냈지만, 빌프랑슈와 사보이 지역은 1714년 전쟁이 끝날 때까지 프랑스의 영향력 아래 놓여 있었다.
포위 공격 직후 영국 함대는 본국으로 귀환하던 중, 1707년 10월 항해상의 오류로 큰 해난 사고를 겪었다. 이 사고로 함대 사령관 쇼벨 제독을 포함한 많은 인명 피해가 발생했으며, 이는 해상에서 정확한 위치 측정의 중요성을 부각시켜 훗날 영국에서 경도법이 제정되는 계기가 되었다.
4. 1. 프랑스의 피해
툴롱 전투의 결과, 프랑스 함대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사실상 활동 불능 상태에 빠졌다. 이에 루이 14세는 해군 함대에 투입되던 자금을 스페인 내 육군 전력을 강화하는 데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이러한 자원 재분배는 부르봉 왕가가 알만사 전투에서의 승리 효과를 충분히 활용하지 못하게 만드는 결과를 낳았다.4. 2. 연합군의 피해
툴롱 공격 작전의 실패는 연합군에게 큰 손실을 안겨주었다. 총 13,000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는데, 이 중 상당수는 전투보다는 질병으로 인해 목숨을 잃거나 전투 불능 상태가 된 경우였다. 포위 공격 중 동맹군 진영에서는 식량 부족과 이질 확산으로 사망자가 증가했으며, 병사들의 처우에 대한 불만으로 탈영병도 속출했다.[1] 말버러는 이를 심각한 전략적 패배로 간주했다.또한, 포위 공격 종료 후 영국으로 귀환하던 영국-네덜란드 연합 함대는 해상에서 큰 재난을 겪었다. 1707년 10월 22일, 안개 속에서 발생한 항해상의 오류로 인해 실리 제도 근해에서 제독 클라우즐리 쇼벨이 탑승했던 함선을 포함하여 총 4척의 군함이 좌초되는 1707년 실리 해난 사고가 발생했다. 이 사고로 쇼벨 제독을 포함하여 약 2,000명의 인원이 희생되었다. 이 비극적인 사건은 이후 선박의 정확한 위치 측정 기술의 중요성을 부각시키는 계기가 되었으며, 영국에서는 경도법이 제정되고 경도상을 통해 크로노미터 개발이 촉진되었다. 쇼벨 제독의 사망 이후, 존 리크가 지중해 함대의 지휘권을 인계받았다.
4. 3. 전략적 영향
툴롱 공격 실패로 프랑스 함대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사실상 무력화되었고, 루이 14세는 함대에 투입되던 자원을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의 육군 전력 강화에 돌리기로 결정했다. 비록 툴롱 점령에는 실패했지만, 이 작전을 통해 영국 해군은 서부 지중해에 대한 통제력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또한 프랑스가 자원을 육군으로 돌리면서 부르봉 왕가는 알만사 전투에서의 승리를 효과적으로 활용하기 어려워졌다.그러나 연합군 역시 이 작전으로 인해 13,000명에 달하는 사상자를 냈는데, 대부분은 질병으로 인한 손실이었다. 말버러 공작은 이를 심각한 전략적 패배로 여겼다. 이 실패로 인해 상대적으로 방비가 허술했던 프랑스 남부 국경을 통해 프랑스 본토를 공격하려던 연합군의 계획은 무산되었고, 이후 전쟁은 강력하게 방어되는 북부 전선에서의 소모전 양상으로 흘러가게 되었다.
한편, 사보이 공자 오이겐 공자와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는 9월 초 알프스를 다시 넘어 피에몬테 북서부에 남아 있던 프랑스 수비대를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빌프랑슈와 사보이 지역은 1714년 전쟁이 끝날 때까지 프랑스의 영향력 아래 놓여 있었다.
툴롱 포위 공격 직후 영국 함대는 본국으로 귀환하던 중, 1707년 10월 22일 항해상의 오류로 인해 큰 재난을 겪었다. 1707년 실리 해난 사고로 알려진 이 사건으로 인해 함대 사령관 클라우디슬리 쇼벨 제독을 포함하여 4척의 군함과 약 2,000명의 인원이 목숨을 잃었다. 이 비극적인 사고는 해상에서 정확한 경도를 측정하는 방법의 중요성을 부각시켰고, 결국 1714년 영국 의회가 경도법을 제정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법은 정확한 경도 계산법을 개발하는 사람에게 막대한 상금을 내걸었다.
4. 4. 이탈리아 전선의 변화
툴롱 포위전 자체는 실패했지만, 이 시기 오스트리아는 빌리히 폰 다운이 이끄는 군대를 통해 남부 이탈리아의 나폴리 왕국을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툴롱 포위전이 끝난 9월, 나폴리 평정이 완료되면서 오스트리아는 이탈리아에서의 영토 소유를 확고히 할 수 있었으며, 이를 통해 확보된 군사력을 다른 전선으로 돌릴 여유를 얻게 되었다.[2]툴롱 전투 이후, 주요 지휘관 중 한 명이었던 오이겐 공자는 스페인령 네덜란드(현재의 벨기에 및 네덜란드 남부)로 이동하여 말버러 공작과 합류해 프랑스 북부 전선에서 싸우게 되었다.
한편,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는 사보이아 군대를 이끌고 이탈리아 전선에 남아, 나폴리 원정을 마친 다운과 함께 남부 프랑스에 대한 공격을 계속 시도했다.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는 9월 초 알프스를 다시 넘어 피에몬테 북서부에 남아 있던 프랑스 수비대를 몰아내는 등 일부 성과를 거두기도 했으나, 빌프랑슈와 사보이 지역은 1714년 전쟁이 끝날 때까지 프랑스의 영향 아래 남아 있었고, 남부 프랑스 공격은 큰 전과를 거두지 못한 채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이 끝날 때까지 비슷한 양상이 반복되었다.
참조
[1]
서적
友清、P195、P203 - P204、マッケイ、P127 - P131
[2]
서적
友清、P204 - P205、マッケイ、P133 - P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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