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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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트라키스는 고대 그리스의 지명으로, 헤라클레스가 죽었다고 전해지는 오이타 산 기슭에 위치해 그의 후손들이 정착한 곳으로 유명하다. 그리스 신화에서 헤라클레스는 아내 데이아네이라의 실수로 인해 죽음을 맞이하고, 소포클레스의 비극 《트라키스의 여인들》의 무대가 되기도 했다. 기원전 427년, 스파르타는 이 지역을 방어하기 위해 트라키스에 요새를 건설하고 '트라키스 헤라클레아'로 이름을 변경했으나 펠로폰네소스 전쟁 중 테살리아인들의 반대로 실패했다. 그리스 독립 전쟁 시기에는 클레프테스의 활동 근거지였으며,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독일군에 대한 저항 운동이 일어났다. 오늘날 헤라클레아 마을은 농업 공동체로 번성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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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라키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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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신화
트라키스는 그리스 신화, 특히 헤라클레스의 최후와 관련된 중요한 배경으로 등장한다. 고대 시대에 이 정착지는 헤라클레스가 죽었다고 전해지는 오이타 산 기슭에 위치해 있었으며, 헤라클레스의 후손들이 정착한 곳으로도 유명했다.[5]
헤라클레스는 실수로 에우노모스를 죽인 후 아내 데이아네이라와 함께 트라키스로 이주했다. 그곳에서 이올레를 포로로 데려왔고, 데이아네이라는 헤라클레스의 마음을 붙잡기 위해 네소스에게서 받은 묘약(실은 히드라의 독)을 옷에 발라 건네주었다. 이 옷을 입은 헤라클레스는 큰 고통을 겪었고, 결국 오이테 산에서 스스로 화장하여 올림포스의 신이 되었다.
2. 1. 헤라클레스의 최후
그리스 신화 최강의 영웅 헤라클레스는 칼리돈의 왕 오이네우스의 친족 아들인 에우노모스를 실수로 죽인 후, 아내 데이아네이라와 함께 말리스의 트라키스로 이주했다. 헤라클레스는 오이칼리아를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그 왕녀 이올레를 포로로 트라키스로 데려왔다. 헤라클레스가 이올레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전령 리카스를 통해 전해 들은 데이아네이라는 그의 마음을 붙잡아 두기 위해, 네소스에게 받은 묘약(실제로는 히드라의 독)을 옷에 발라 헤라클레스에게 건네주었다.[5] 케나이온 곶에서 개선 기념 제사를 지낼 때 이 옷을 입은 헤라클레스는 피부가 타면서 뼈가 드러나는 듯한 고통을 겪었다. 자신이 바른 묘약 때문에 헤라클레스가 고통받고 있다는 소식을 아들 힐로스에게 들은 데이아네이라는 자살했다.헤라클레스는 트라키스에 있는 오이테 산까지 자신을 옮기도록 하고, 그곳에서 장작을 쌓아 스스로 산 채로 화장하도록 힐로스에게 명령했다. 아버지를 불태우는 일은 힐로스에게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었기에, 지나가던 포이아스 혹은 필록테테스에게 그것을 부탁하고, 그 은혜로 헤라클레스의 강궁을 주었다. 헤라클레스는 힐로스에게 이올레를 아내로 맞이하라고 명령하고, 화염 속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 순간, 하늘에서 벼락이 화장터에 쏟아져 내리고, 헤라클레스는 전 우주를 지배하는 올림포스의 신들 중 하나가 되었다.
2. 2. 소포클레스의 비극
그리스 신화 최강의 영웅 헤라클레스는 칼리돈의 왕 오이네우스의 친족 아들인 에우노모스를 잘못 죽여 버린 뒤 아내 데이아네이라와 함께 트라키스로 이사했다. 헤라클레스는 오이칼리아를 공략하여 그곳의 공주 이올레를 포로로 잡고 트라키스로 돌아왔다. 헤라클레스가 이올레와 사랑에 빠졌다는 소문은 전령 리카스를 통해 데이아네이라에게 들어갔다. 그녀는 헤라클레스의 마음을 붙잡아 두기 위해 켄타우로스 네소스로부터 ‘사랑의 묘약’이라고 받은 미약을 옷에 발라 헤라클레스에게 내밀었다. 그러나 이 미약은 사실 히드라의 맹독과 네소스의 피와 정액이 묻은 것이었다. 케나이온 곶에서 전승 기념 연회에서 이 옷을 입게 된 헤라클레스는 피부가 타면서 뼈가 드러나는 듯한 고통을 겪었다. 아들 힐로스에게 자신이 발라 둔 미약에 의해 헤라클레스가 죽을 고통을 앓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데이아네이라는 자살했다.헤라클레스는 트라키스의 오이타 산까지 자신을 옮겨 장작을 쌓고 산 채로 화장하도록 힐로스에 명령했다. 힐로스는 아버지를 산 채로 화장하는 것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지나가던 포이아스 또는 필록테테스에게 그것을 요구했고, 그 은혜로 헤라클레스의 강궁을 주었다. 헤라클레스는 힐로스에게 이올레에게 장가가라고 명령하고 화염 속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 순간 하늘에서 벼락이 화장터에 쏟아져, 헤라클레스는 전 우주를 지배하는 올림포스 신들 중 하나가 되었다.
그리스의 유명한 비극작가 소포클레스가 쓴 트라키스의 여인들은 트라키스를 무대로 한 유명한 비극이며, 헤라클레스의 최후가 훌륭하게 표현되어 있다.
3. 고대 트라키스와 헤라클레아
고대 시대에 이 정착지는 헤라클레스가 죽었다고 전해지는 오이타 산 기슭에 위치해 있었으며, 헤라클레스의 후손들이 정착한 곳으로 유명했다. 그리스-페르시아 전쟁 중에는 페르시아 군대가 테르모필레로 진격하면서 헤라클레아의 비옥한 평원에 상륙하고 주둔했다.
기원전 427년 스파르타인들이 오이타 산악 부족의 약탈로부터 트라키니아 평원을 지키기 위해 수비대를 파견하고 아소포스 협곡 근처에 요새를 건설하면서 "트라키스"는 "트라키스 헤라클레아"로 이름이 변경되었다.[5]
3. 1. 스파르타의 식민 도시 건설 시도
펠로폰네소스 전쟁 당시 말리스 지방의 트라키스 인들은 오이타 인들과의 싸움에서 패배한 후 동맹 세력을 찾고 있었다. 처음에는 아테나이와 동맹을 맺으려 했으나, 아테나이의 침략적 성향을 우려하여 펠로폰네소스 동맹의 맹주인 스파르타와 손을 잡으려 했다. 인근의 도리아 인도 이에 동조했고, 스파르타는 이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식민단을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스파르타는 아테나이를 견제하고 에우보이아섬 공격을 위한 해군 기지와 트라키아 방면으로의 길을 확보하기 위해 트라키스에 폴리스를 건설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판단했다.[5] 델포이에서 신탁을 받은 결과 건설해도 좋다는 길조를 얻었기에, 스파르타는 그리스 전역에서 식민지 참가자를 모집하여 헤라클레이아 도시국가를 건설했다.그러나 펠로폰네소스 전쟁 기간 동안 스파르타의 정착 시도는 테살리아인들의 적대감으로 인해 실패로 끝났다.[6]
3. 2. 테베와 아이톨리아 동맹의 지배
스파르타가 테베에 의해 축출된 후, 테베는 중앙 그리스에서 새로운 우위를 이용하여 트라키스인들을 복원했고, 이들은 371년까지 헤라클레아를 유지했다.[5] 이후 헤라클레아는 페라이의 제이슨에 의해 점령되어 해체되었다.[5] 기원전 280년 이후 요새는 재건되었고, 아이톨리아인들에게 켈트족과 마케도니아에 대항하는 방어벽 역할을 했다.[5] 191년에 고대 로마에 점령되었지만, 146년까지 아이톨리아 동맹에 반환되었고, 그 이후 잊혀져 스트라보는 이곳을 거의 버려진 곳으로 묘사했다.[5]4. 근현대 트라키스
그리스 독립 전쟁 당시 트라키스 지역은 오스만 제국의 지배에 저항하는 클레프테스(산악 전사)들의 활동 근거지였으며, 이들은 오스만 제국의 농산물에 대한 인두세(하라크)에 반대했다.[5]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독일에 대한 저항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고, 남북 그리스를 연결하는 중요한 철도 교량이 이곳에서 파괴되었다.
4. 1. 현대의 헤라클레아
오늘날 헤라클레아 마을은 번성하는 농업 공동체이다. 최근 발굴을 통해 오이타 산 기슭, 아소포스 강둑 근처에서 일련의 작은 무덤들이 발견되었다.참조
[1]
서적
An inventory of archaic and classical poleis
https://archive.org/[...]
Oxford University Press
[2]
논문
The Kingdom of Pelius and Achilles
[3]
기타
Homer Iliad 2.682
[4]
기타
Pausanias, Guide to Greece 10.22.1
[5]
간행물
Trachis
[6]
서적
Dictionary of Greek and Roman Geography
https://www.perse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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