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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키비아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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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알키비아데스는 고대 아테네 출신의 정치가이자 장군으로, 클레이니아스의 아들이며 페리클레스의 조카이다. 그는 소크라테스의 제자였으며, 수사학에 능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아테네의 공격적인 정책을 주장하며 두각을 나타냈으나, 시칠리아 원정 중 불경죄 혐의로 기소되어 스파르타로 망명했다. 스파르타에서는 아테네에 대한 전략 조언을 했고, 이후 페르시아로 망명하여 티사페르네스를 도왔다. 아테네로 돌아와 군 지휘권을 얻었지만, 노티움 해전 패배 후 다시 망명하여 암살당했다. 알키비아데스는 재능과 외모, 언변으로 칭송받았지만, 오만하고 변덕스러운 성격으로 인해 논란의 중심에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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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키비아데스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알키비아데스
원어 이름Ἀλκιβιάδης Κλεινίου Σκαμβωνίδης
로마자 표기Alkibiádēs
출생기원전 450년경
출생지아테네, 그리스
사망기원전 404년 (45–46세)
사망지헬레스폰티네 프리지아, 아케메네스 제국
배우자히파레테
기원전 4세기로 추정되는 알키비아데스의 흉상
기원전 4세기로 추정되는 알키비아데스의 흉상
군사 정보
소속아테네 (기원전 432–415년)
스파르타 (기원전 415–412년)
페르시아 (기원전 412–411년)
군종아테네군 (기원전 432–415년)
스파르타군 (기원전 415–412년)
아케메네스 군 (기원전 412–411년)
계급스트라테고스
주요 전투포티다이아 전투
펠로폰네소스 전쟁
델리움 전투
시칠리아 원정
아비도스 전투
키지코스 전투
비잔티움 공성전

2. 생애

장바티스트 르뇨: ''소크라테스, 육감적 쾌락으로부터 알키비아데스를 끌어내려는' (1791)


알키비아데스는 클레이니아스의 아들이며, 스캄보니다이 데모스 출신이다. 어머니 데이노마케는 메가클레스의 딸이자 알크마이오니다이 가문 출신으로, 페리클레스와 그의 형제 아리프론은 데이노마케의 조카였다.[177] 외할아버지는 클레이스테네스의 친구였다.[178] 아버지 클레이니아스가 기원전 447년 코로네이아 전투에서 전사한 후, 페리클레스와 아리프론이 그의 후견인이 되었다.[179]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알키비아데스는 소크라테스 등 유명한 교사들에게서 사사받았고 수사학을 잘 교육받았다.

알키비아데스는 아테네 출신으로, 아버지 클레이니아스[3] 가문은 스파르타 귀족들과 오랜 크세니아 관계를 맺었고, "알키비아데스"라는 이름도 스파르타 기원이었다.[23][4] 어머니는 알크마이오니다이 가문의 메가클레스의 딸 데이노마케로, 에우뤼사케스와 텔라모니아스 아약스까지 가계가 거슬러 올라간다.[5] 외할아버지는 클레이스테네스의 친구였다.[7] 코로네이아 전투 (기원전 447년)에서 클레이니아스가 사망한 후, 페리클레스와 아리프론이 후견인이 되었다.[8]

플루타르크에 따르면, 소크라테스 등 여러 스승을 두었고, 수사학에 정통했다. 그는 무절제한 행동으로 유명했다. 소크라테스는 그의 허영심을 고치려 제자로 삼았다고 한다.[15] 크세노폰은 소크라테스가 알키비아데스에게 도덕을 가르치려 했으나 실패했다고 전한다.[15]

포티다이아 전투 (기원전 432년): 소크라테스가 알키비아데스를 구하는 장면. 18세기 판화.


포티다이아 전투에서 소크라테스가 그의 목숨을 구했고,[16] 델리온 전투에서 소크라테스를 구하며 은혜를 갚았다. 플루타르크와 플라톤[21]은 알키비아데스를 소크라테스의 사랑하는 사람으로 묘사한다.[22]

장-레옹 제롬: ''아스파시아의 집에서 알키비아데스를 찾는 소크라테스'' (1861)


알키비아데스는 히파레테와 결혼하여 많은 지참금을 받았고,[23] 아들과 딸을 낳았다.[25]

니키아스의 평화 조약 체결 후, 알키비아데스는 공격적인 아테네의 행동을 주장하면서 두각을 나타냈다. 이 조약은 펠로폰네소스 전쟁 중반에 스파르타와 아테네 사이에 체결된 불안한 휴전으로, 7년간의 전투 끝에 양측 모두 결정적인 우위를 점하지 못한 채 체결되었다. 역사가 아놀드 W. 고메와 라파엘 씰리, 그리고 투키디데스[26] 알키비아데스가 스파르타인들이 니키아스라케스를 통해 조약을 협상하고 자신의 젊음 때문에 그를 무시한 것에 분개했다고 생각한다.[27][28]

조약 해석에 대한 논쟁으로 인해 스파르타인들은 미해결 문제를 모두 해결하기 위해 전권을 가진 사절들을 아테네로 파견했다. 아테네인들은 처음에 이 사절들을 잘 받아들였지만, 알키비아데스는 그들이 에클레시아(아테네 의회)에 연설하기 전에 비밀리에 그들을 만나 의회가 거만하고 큰 야망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29] 그는 그들에게 스파르타를 대표하는 외교적 권한을 포기하고 대신 아테네 정치에서 그의 영향력을 통해 그들을 돕도록 촉구했다.[30] 사절들은 알키비아데스에게 깊은 인상을 받고 그와 동의하여 스파르타와 진정으로 합의를 원했던 니키아스와 사이가 멀어졌다.[29] 다음 날 의회에서 알키비아데스는 그들에게 스파르타가 그들에게 협상할 권한을 어떻게 부여했는지 물었고, 그들은 약속대로 전권과 독립된 권한을 가지고 오지 않았다고 대답했다. 이것은 그들이 전날 말했던 것과 정면으로 모순되었고, 알키비아데스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그들의 성격을 비난하고, 그들의 목표에 의심을 품게 하고, 그들의 신뢰성을 파괴했다. 이 계략은 알키비아데스의 지위를 높이고 니키아스를 당황하게 했으며, 알키비아데스는 그 후 장군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그의 증가하는 권력을 이용하여 아르고스, 만티네이아, 엘리스 및 펠로폰네소스의 다른 국가들 사이의 동맹을 조직하여 그 지역에서 스파르타의 지배력을 위협했다. 고메에 따르면, "그것은 주로 펠로폰네소스 군대를 이끄는 아테네 장군이 스파르타의 명성이 최저 수준일 때 펠로폰네소스를 통과하여 스파르타를 조롱하는 웅장한 계획이었다".[31] 그러나 이 동맹은 결국 만티네이아 전투에서 패배했다.[32]

기원전 416~415년 사이 어느 시점에 히페르볼로스 한쪽과 니키아스와 알키비아데스 다른 한쪽 사이에 복잡한 투쟁이 벌어졌다. 히페르볼로스는 이 둘 중 한 명을 추방시키려고 했지만, 니키아스와 알키비아데스는 그들의 영향력을 결합하여 대신 히페르볼로스를 추방하도록 사람들을 설득했다.[33] 이 사건은 니키아스와 알키비아데스 각자가 지도자들의 의지에 따라 표결이 결정되는 개인적인 추종자들을 지휘했음을 보여준다.[28]

알키비아데스는 기원전 416~415년에 멜로스 점령에 관여한 장군 중 한 명이 아니었지만, 플루타르코스는 그를 멜로스의 성인 남성들이 살해되고 여성과 어린이들이 노예로 팔린다는 법령을 지지한 사람으로 묘사한다.[34] 알키비아데스의 추방을 촉구하는 연설인 "알키비아데스에 대하여"(역사적으로 웅변가 안도키데스에게 귀속되지만 사실은 그가 한 것이 아님)는 알키비아데스가 이 노예로 팔린 여성 중 한 명과 아이를 낳았다고 주장한다.[35]

알키비아데스가 활약한 시대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시기였고, 이 전쟁은 페리클레스가 주창한 농성 작전이 통하지 않았다. 스파르타가 원정을 하게 됨으로써 보급로가 끊길 우려가 있었기 때문에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고 있었다. 페리클레스는 전염병으로 사망했기 때문에, 그 이외의 유력한 정치인들이 다음 단계를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알키비아데스의 정적이기도 한 니키아스가 휴전을 주장하여 기원전 421년의 니키아스 평화조약에 의해 아테나이가 이끄는 델로스 동맹스파르타가 이끄는 펠로폰네소스 동맹은 강화를 하게 되었다. 그러나 주전론을 주창 알키비아데스는 그것을 깨고 다시 전쟁을 재개시켰고, 동맹국을 돕는다는 명분으로 시켈리아 전역을 지배하에 두기 위해 시켈리아 원정을 제안하였다. 그리고 그도 니키아스와 함께 두 사람의 사령관 중 한 명으로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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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415년, 시칠리아 도시 세게스타(에게스타/Egestael)의 사절들이 아테네에 도착하여 셀리누스(Selinus)와의 전쟁에서 아테네의 지원을 요청했다. 원정에 대한 논의 과정에서 니키아스는 아테네의 개입에 강력하게 반대하며, 이 원정이 매우 큰 비용을 초래할 것이라고 설명하고, 원정의 주요 지지자로 부상한 알키비아데스의 성격과 동기를 비난했다.[36] 반면 알키비아데스는 이 새로운 전장에서의 원정이 도시에 부를 가져다주고 제국을 확장할 것이라고 주장했는데, 이는 마치 페르시아 전쟁과 같을 것이라고 했다. 알키비아데스는 자신의 연설에서 (대부분의 역사가들의 견해에 따르면 지나치게 낙관적으로) 아테네인들이 이 지역에서 동맹국을 모집하고 시칠리아에서 가장 강력한 도시인 시라쿠사에 대한 지배를 확립할 수 있을 것이라고 예측했다.[37] 알키비아데스가 이 계획을 열정적으로 옹호했음에도 불구하고, 소규모 원정을 대규모 원정으로 바꾸고 시칠리아 정복을 가능하고 안전하게 보이도록 만든 사람은 그가 아니라 니키아스였다.[38] 함대 규모를 크게 늘린 것도 그의 제안이었다.[40] 철학자 레오 슈트라우스는 시칠리아 원정이 페리클레스가 수행한 모든 것들을 능가했다고 강조한다. 니키아스의 의도는 거의 확실히 필요한 병력에 대한 자신의 높은 추정치로 의회를 충격에 빠뜨리는 것이었지만, 동료 시민들을 설득하지 못한 대신 그의 분석은 그들을 더욱 열렬하게 만들었다.[41] 그의 바람과는 달리 니키아스는 알키비아데스와 라마쿠스와 함께 장군으로 임명되었고, 세 사람 모두 시칠리아에 있는 동안 아테네의 최상의 이익을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완전한 권한을 부여받았다.[42]

원정 준비 중 어느 날 밤, 헤르메스 신의 머리를 얹은 받침대(plinth) 위의 남근(phallus)이 있는 헤르마(hermai)들이 아테네 전역에서 훼손되었다. 이것은 종교적인 스캔들이었고, 알키비아데스에 대한 ''불경죄''(불경) 혐의로 이어졌으며, 이 임무에 대한 불길한 징조로 여겨졌다. 플루타르코스는 정치 지도자 안드로클레스(Androcles)가 알키비아데스와 그의 친구들이 조각상을 훼손하고 엘레우시스 신비의식을 모독했다고 고발한 거짓 증인을 사용했다고 설명한다. 나중에 그의 반대자들은 알키비아데스가 계획대로 출항하여 원정에서 돌아온 후 재판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연설가들을 고용했다. 알키비아데스는 그들의 의도를 의심했고, 자신의 명예를 깨끗이 하기 위해 사형 위험을 무릅쓰고 즉시 재판을 받을 것을 요청했다.[43] 이 요청은 거부되었고, 혐의가 해결되지 않은 채 함대는 얼마 후 출항했다.[44]

"사람들은 우월한 자의 공격을 막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종종 공격을 막기 위해 선제타격을 가한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 제국의 정확한 한계점을 정할 수 없다. 우리는 유지하는 것에 만족해서는 안 되고 확장하기 위해 책략을 써야 하는 지점에 도달했다. 왜냐하면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지배하는 것을 중단하면 우리 자신이 지배당할 위험에 처하기 때문이다. 또한 당신은 다른 사람들과 같은 관점에서 무위를 바라볼 수 없다. 당신이 당신의 습관을 바꾸고 그들의 습관과 같게 만들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말이다."
알키비아데스의 시칠리아 원정 전 연설, 투키디데스 (VI, 18)에 기록됨



알키비아데스가 예상했던 대로, 그의 부재는 그의 적들을 더욱 대담하게 만들었고, 그들은 그를 다른 신성 모독 행위와 발언으로 고발하기 시작했으며, 심지어 이러한 행위가 민주주의에 대한 음모와 관련이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46] 투키디데스에 따르면, 아테네인들은 항상 두려워했고 모든 것을 의심스럽게 생각했다.[47] 함대가 카타니아에 도착했을 때, 알키비아데스와 다른 사람들을 아테네로 돌아와 재판을 받도록 데려올 삼단노선 '살라미니아(Salaminia)' 호를 기다리고 있었다.[47] 알키비아데스는 아테네로 돌아가는 사자들에게 자신의 배를 타고 그들을 따라가겠다고 말했지만, 투리이(Thurii)에서 그는 그의 승무원과 함께 도망쳤다. 아테네에서는 결석재판에서 유죄 판결을 받고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의 재산은 몰수되었고, 도망친 사람들을 죽이는 데 성공한 사람에게는 한 타란트(talent)의 상금이 약속되었다.[48] 한편, 시칠리아에 있는 아테네군은 초기 몇 차례의 승리 후 메시나(Messina)로 진격했는데, 장군들은 그 도시 내부의 비밀 동맹국들이 그 도시를 배신할 것으로 예상했다. 그러나 알키비아데스는 자신이 추방될 것을 예상하고 메시나에 있는 시라쿠사인들의 친구들에게 정보를 제공했고, 그들은 아테네인들의 입장을 막는 데 성공했다.[49] 얼마 후 라마쿠스가 전투에서 사망하면서 시칠리아 원정의 지휘권은 니키아스의 손에 들어갔다.

알키비아데스는 스파르타에서 전략 조언자로 활동하며, 아테네에 대한 대규모 공격 작전을 제안하거나 지도하였다. 그는 아테네의 내부 정보를 흘려 시켈리아(시칠리아) 내부의 방어 정보를 스파르타 측에 알려주었다.[50] 그 결과, 스파르타는 규리포스(Gylippus)가 이끄는 군대를 시켈리아 섬에 파병하여 철저히 항전하기로 했다.

스파르타군에 의해 시켈리아 군은 방어가 강화되었고, 아테네는 막대한 전력을 투입했음에도 불구하고 시켈리아 원정은 전멸에 가까운 대패로 끝났다(기원전 413년). 스파르타 원정군은 항복한 아테네의 사령관 니키아스와 데모스테네스를 받아들였지만, 시라쿠사에 의해 처형되었다. 이 사건은 시라쿠사의 펠로폰네소스 전쟁 참전이라는 결과도 초래했다.

알키비아데스는 스파르타의 군사 고문으로 활동했고 스파르타가 몇 가지 중요한 성공을 거두도록 도왔다. 그는 아테네에서 약 16km 떨어진 데켈레아(Decelea)에 영구 요새를 건설할 것을 조언했는데, 이 요새는 도시에서 바로 보이는 곳에 있었다.[55] 이를 통해 스파르타인들은 아테네인들을 그들의 가옥과 농작물, 그리고 수니온(Sunium)의 은광에서 완전히 차단했다. 이것은 아티카(Attica)에서 아테네와의 전쟁을 재개하려는 알키비아데스의 계획의 일부였다. 이 조치는 아테네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혔고 시민들은 일년 내내 도시의 장벽 안에서 살도록 강요하여 식량을 위해 해상 무역에 전적으로 의존하게 만들었다. 아테네가 제2 전선에서 이처럼 포위된 것을 본 델로스 동맹의 구성원들은 반란을 고려하기 시작했다. 시칠리아에서 아테네가 참패한 직후 알키비아데스는 스파르타 함대와 함께 이오니아(Ionia)로 항해하여 여러 중요 도시들이 반란을 일으키도록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56][57]

그러나 스파르타에서도 알키비아데스는 이내 강력한 정적을 만들게 되어, 페르시아로 도망쳐야 했다. 투리이에서 사라진 후 알키비아데스는 스파르타인들에게 급히 연락하여, 만약 그들이 그에게 피난처를 제공한다면 "그가 적이었을 때 그들에게 입힌 모든 해악보다 더 큰 도움과 봉사를 제공할 것"이라고 약속했다.[50] 스파르타인들은 이 요청을 받아들여 그를 받아들였다. 이러한 변절로 인해 아테네인들은 그를 결석재판으로 사형을 선고하고 그의 재산을 몰수했다.[51][52]

시라쿠사 구원에 군대를 파병할지 여부에 대한 스파르타 내 논쟁에서 알키비아데스는 연설하여 아테네인들이 시칠리아, 이탈리아, 심지어 카르타고(Carthage)까지 정복하기를 바란다고 알림으로써 스파르타의 에포로이(ephor)들에게 아테네의 야망에 대한 두려움을 심어주었다.[53] 예일대학교(Yale University)의 역사학자 도널드 카간(Donald Kagan)은 알키비아데스가 스파르타인들에게 그의 도움으로 얻을 수 있는 이익을 확신시키기 위해 아테네인들의 계획을 의도적으로 과장했다고 믿는다. 카간은 알키비아데스가 아직 그의 "전설적인" 명성을 얻지 못했고, 스파르타인들은 그를 "패배하고 사냥당하는 인물"로 보았으며, 그의 정책은 "전략적 실패"를 가져왔고 "결정적인 결과"를 가져오지 못했다고 주장한다. 정확하다면 이 평가는 알키비아데스의 가장 큰 재능 중 하나인 그의 매우 설득력 있는 연설 능력을 강조한다.[54] 위협이 임박한 것처럼 보이게 만든 후 알키비아데스는 스파르타인들에게 군대를 파병하고, 가장 중요한 것은 시라쿠사인들을 훈육하고 지원할 스파르타 지휘관을 파견할 것을 조언했다.[53]

이러한 스파르타 대의에 대한 귀중한 공헌에도 불구하고, 이 무렵 알키비아데스는 아기스 2세 왕 정부의 총애를 잃었다.[58] 아기스 2세의 아내 티마이아(Timaea)가 낳은 아들 레오티키데스(Leotychides)는 많은 사람들에게 알키비아데스의 아들이라고 여겨졌다.[59][60] 다른 기록에 따르면 알키비아데스는 아기스 2세 왕이 아티카(Attica)에 있는 스파르타 군대와 함께 부재한 것을 이용하여 그의 아내를 유혹했다고 한다.[4]

알키비아데스의 영향력은 그와 친분이 있던 에포로이(ephor) 엔디우스(Endius)의 은퇴 후 더욱 감소했다.[61] 스파르타 해군 제독 아스티오쿠스(Astyochus)가 그를 죽이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알려져 있지만, 알키비아데스는 이 명령에 대한 경고를 받고 기원전 412년 펠로폰네소스군을 재정적으로 지원해 온 페르시아 사트라프(satrap) 티사페르네스(Tissaphernes)에게 망명했다.[62]

알키비아데스는 스파르타에서 고문과 같은 위치에서 아테네에 곡물 수송의 요지 데켈레아에 요새를 만들 것을 건의하였다. 페르시아 제국 아케메네스 왕조와 스파르타의 원조 협상을 위해 교섭을 벌이기도 했다. 그러나 스파르타 왕비와 정을 통했다는 이유로 스파르타와의 관계가 악화되었다. 결국 그는 페르시아 제국의 태수 티사페르네스에게 망명하여 조언자로 활동했다.

티사페르네스(Tissaphernes)의 주화. 알키비아데스가 고문으로 있던 시절. 아스티라(Astyra), 미시아(Mysia). 기원전 400~395년경


알키비아데스는 현지 페르시아 궁정에 도착하여 강력한 사트라프 티사페르네스의 신임을 얻고 여러 정책 제안을 했는데, 이는 호평을 받았다. 투키디데스에 따르면, 알키비아데스는 즉시 티사페르네스를 이용하여 펠로폰네소스 동맹에 피해를 주기 시작했다. 그의 설득에 따라 사트라프는 펠로폰네소스 함대에 대한 지원금을 줄이고 불규칙적으로 지급하기 시작했다.[62] 다음으로 알키비아데스는 티사페르네스에게 각 도시의 장군들에게 뇌물을 주어 그들의 활동에 대한 귀중한 정보를 얻도록 조언했다. 마지막으로,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 그는 사트라프에게 페르시아 함대를 갈등에 개입시키는 것을 서두르지 말라고 조언했다. 전쟁이 길어질수록 전투원들은 더욱 지쳐갈 것이고, 이로 인해 페르시아는 전투 후 더 쉽게 그 지역을 정복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알키비아데스는 페르시아의 이익을 위해 아테네와 스파르타 모두를 먼저 쇠약하게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사트라프를 설득하려 했다. "아테네의 힘을 최대한 약화시킨 후, 곧바로 펠로폰네소스인들을 제거해야 한다"는 것이었다.[63]

알키비아데스의 조언은 페르시아에 이익이 되었지만, 그것은 단지 수단일 뿐이었다. 투키디데스는 그의 진짜 동기는 페르시아에 대한 그의 영향력을 이용하여 아테네로 복귀하는 것이었다고 말한다.[64] 알키비아데스는 고국에서 역경을 겪은 후 아케메네스 제국으로 피신한 여러 그리스 귀족 중 한 명이었으며, 다른 유명한 인물로는 테미스토클레스, 데마라토스, 또는 공길로스가 있다.[65] 투키디데스(투키디데스 8.47)에 따르면, 알키비아데스는 아케메네스 왕(다리우스 2세)에게도 조언을 했기 때문에, 그를 만나기 위해 수사 또는 바빌로니아로 여행했을 가능성이 있다.[65][64]

알키비아데스는 "급진적 민주주의"가 자신을 아테네로 소환하는 데 동의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66] 그는 사모스의 아테네 지도자들과 서신을 교환하며, 만약 그들이 자신에게 우호적인 과두정을 수립할 수 있다면 자신이 아테네로 돌아와 페르시아의 돈과 147척의 페르시아 함대를 데려올 것이라고 제안했다.[67] 알키비아데스는 군 장교들을 설득하여 아테네 헌법 변경, 알키비아데스의 소환 투표, 티사페르네스와 페르시아 왕을 아테네 편으로 끌어들이는 계획을 제시했다. 아테네 함대의 장교 대부분이 이 계획을 받아들였으나, 프리니쿠스만이 반대했다.[68] 트라시불루스의 음모 개입 여부는 불분명하다.[69][70]

아테네 함대의 장교들은 음모자 그룹을 형성했지만, 병사와 선원 대다수의 반대에 직면했다. 이들은 "왕으로부터의 급료라는 유리한 전망"으로 진정되었다.[71] 피산데르는 아테네에 사절로 보내져 알키비아데스의 복귀와 민주주의 폐지를 논의했다.[72] 프리니쿠스는 알키비아데스가 복수할까 두려워 스파르타 해군 사령관 아스티오쿠스에게 비밀 편지를 보냈으나, 아스티오쿠스는 이를 알키비아데스에게 알렸다.[73] 알키비아데스는 프리니쿠스를 배신자로 몰았지만, 프리니쿠스는 이를 예측하고 사모스를 요새화했다.[74]

피산데르와 사절들은 아테네에서 알키비아데스와 그의 약속을 중심으로 주장을 펼쳤고, 에클레시아는 프리니쿠스를 축출하고 피산데르를 포함한 사절단을 티사페르네스와 협상하게 했다.[75] 그러나 티사페르네스는 중립 정책을 고수하며 합의를 거부했다.[76][77] 알키비아데스는 아테네인들에게 강경한 요구를 제시하며 협상이 결렬되었다.[78]

협상 실패에도 불구하고, 음모자들은 민주주의를 전복하고 400인의 과두정부를 세웠다. 그러나 사모스에서는 비슷한 쿠데타가 실패했다. 사모스의 민주주의자들은 음모를 저지하고, 삼단노선선장 트라시불루스와 트라실루스를 포함한 새로운 장군들을 선출했다.[79] 군대는 민주주의를 지키기로 결의했다.[80]

트라시불루스는 군대를 설득하여 알키비아데스의 복귀를 위한 투표를 하게 했고, 알키비아데스를 사모스로 데려왔다.[81] 알키비아데스는 티사페르네스에 대한 자신의 영향력을 자랑하며 군대를 고무시켰고, 즉시 장군으로 선출되었다.[84] 그는 아테네의 내전을 막고 400인 정부를 전복시켰다.[82][85]

알키비아데스는 티사페르네스에게 항해했으나, 실제 목적은 자신의 지위를 과시하고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것이었다. 역사가에 따르면 알키비아데스는 티사페르네스가 함대를 데려올 의도가 없음을 알고 있었다.[86]

키지쿠스 해전에서의 아테네 전략. ''왼쪽'': 알키비아데스의 유인 부대(파랑)가 스파르타 함대(검정)를 바다로 유인한다. ''오른쪽'': 트라시불루스와 테라메네스가 스파르타 함대의 후방을 차단하여 키지쿠스로의 후퇴를 막는 동안, 알키비아데스는 추격하는 함대를 향해 방향을 틀었다.


알키비아데스는 기원전 411년 5천인 정체제에 의해 소환되었지만, 기원전 407년까지 아테네로 돌아오지 않았다.[87] 그는 아비도스 전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알키비아데스는 헬레스폰토스에서 아테네 함대가 승리하는 데 기여했다.[88][91] 전투 직후, 알키비아데스는 티사페르네스를 만나려다 체포되었으나, 탈출하여 지휘권을 회복했다.[93][94]

키지쿠스에서 아테네 함대는 알키비아데스의 계략으로 스파르타 함대를 격파했다.[98] 스파르타는 평화를 청했지만, 아테네는 거부했다.[99][121][100][101]

알키비아데스는 칼케돈 포위 공격에서 승리하고, 셀림브리아를 점령했다.[102][105][103] 그는 비잔티움 포위 공격에도 참여하여 도시를 함락시켰다.[105]



기원전 407년, 알키비아데스는 아테네로 귀환하여 영웅적인 환영을 받았다.[110] 그는 육해군 최고 사령관으로 선출되었다.[115]

기원전 406년, 알키비아데스는 노티움에서 리산드로스에게 패배했다.[116] 이 패배로 알키비아데스는 지휘권에서 해임되고 망명을 선택했다.[119][120]

2. 1. 유년기

알키비아데스는 클레이니아스의 아들이며, 스캄보니다이 데모스 출신이다. 어머니 데이노마케는 메가클레스의 딸이자 알크마이오니다이 가문 출신으로, 페리클레스와 그의 형제 아리프론은 데이노마케의 조카였다.[177] 외할아버지는 클레이스테네스의 친구였다.[178] 아버지 클레이니아스가 기원전 447년 코로네이아 전투에서 전사한 후, 페리클레스와 아리프론이 그의 후견인이 되었다.[179]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알키비아데스는 소크라테스 등 유명한 교사들에게서 사사받았고 수사학을 잘 교육받았다.

알키비아데스는 아테네 출신으로, 아버지 클레이니아스[3] 가문은 스파르타 귀족들과 오랜 크세니아 관계를 맺었고, "알키비아데스"라는 이름도 스파르타 기원이었다.[23][4] 어머니는 알크마이오니다이 가문의 메가클레스의 딸 데이노마케로, 에우뤼사케스와 텔라모니아스 아약스까지 가계가 거슬러 올라간다.[5] 외할아버지는 클레이스테네스의 친구였다.[7] 코로네이아 전투 (기원전 447년)에서 클레이니아스가 사망한 후, 페리클레스와 아리프론이 후견인이 되었다.[8]

플루타르크에 따르면, 소크라테스 등 여러 스승을 두었고, 수사학에 정통했다. 그는 무절제한 행동으로 유명했다. 소크라테스는 그의 허영심을 고치려 제자로 삼았다고 한다.[15] 크세노폰은 소크라테스가 알키비아데스에게 도덕을 가르치려 했으나 실패했다고 전한다.[15]

포티다이아 전투에서 소크라테스가 그의 목숨을 구했고,[16] 델리온 전투에서 소크라테스를 구하며 은혜를 갚았다. 플루타르크와 플라톤[21]은 알키비아데스를 소크라테스의 사랑하는 사람으로 묘사한다.[22]

알키비아데스는 히파레테와 결혼하여 많은 지참금을 받았고,[23] 아들과 딸을 낳았다.[25]

2. 2. 펠로폰네소스 전쟁

니키아스의 평화 조약 체결 후, 알키비아데스는 공격적인 아테네의 행동을 주장하면서 두각을 나타냈다. 이 조약은 펠로폰네소스 전쟁 중반에 스파르타와 아테네 사이에 체결된 불안한 휴전으로, 7년간의 전투 끝에 양측 모두 결정적인 우위를 점하지 못한 채 체결되었다. 역사가 아놀드 W. 고메와 라파엘 씰리, 그리고 투키디데스[26] 알키비아데스가 스파르타인들이 니키아스라케스를 통해 조약을 협상하고 자신의 젊음 때문에 그를 무시한 것에 분개했다고 생각한다.[27][28]

조약 해석에 대한 논쟁으로 인해 스파르타인들은 미해결 문제를 모두 해결하기 위해 전권을 가진 사절들을 아테네로 파견했다. 아테네인들은 처음에 이 사절들을 잘 받아들였지만, 알키비아데스는 그들이 에클레시아(아테네 의회)에 연설하기 전에 비밀리에 그들을 만나 의회가 거만하고 큰 야망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29] 그는 그들에게 스파르타를 대표하는 외교적 권한을 포기하고 대신 아테네 정치에서 그의 영향력을 통해 그들을 돕도록 촉구했다.[30] 사절들은 알키비아데스에게 깊은 인상을 받고 그와 동의하여 스파르타와 진정으로 합의를 원했던 니키아스와 사이가 멀어졌다.[29] 다음 날 의회에서 알키비아데스는 그들에게 스파르타가 그들에게 협상할 권한을 어떻게 부여했는지 물었고, 그들은 약속대로 전권과 독립된 권한을 가지고 오지 않았다고 대답했다. 이것은 그들이 전날 말했던 것과 정면으로 모순되었고, 알키비아데스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그들의 성격을 비난하고, 그들의 목표에 의심을 품게 하고, 그들의 신뢰성을 파괴했다. 이 계략은 알키비아데스의 지위를 높이고 니키아스를 당황하게 했으며, 알키비아데스는 그 후 장군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그의 증가하는 권력을 이용하여 아르고스, 만티네이아, 엘리스 및 펠로폰네소스의 다른 국가들 사이의 동맹을 조직하여 그 지역에서 스파르타의 지배력을 위협했다. 고메에 따르면, "그것은 주로 펠로폰네소스 군대를 이끄는 아테네 장군이 스파르타의 명성이 최저 수준일 때 펠로폰네소스를 통과하여 스파르타를 조롱하는 웅장한 계획이었다".[31] 그러나 이 동맹은 결국 만티네이아 전투에서 패배했다.[32]

기원전 416~415년 사이 어느 시점에 히페르볼로스 한쪽과 니키아스와 알키비아데스 다른 한쪽 사이에 복잡한 투쟁이 벌어졌다. 히페르볼로스는 이 둘 중 한 명을 추방시키려고 했지만, 니키아스와 알키비아데스는 그들의 영향력을 결합하여 대신 히페르볼로스를 추방하도록 사람들을 설득했다.[33] 이 사건은 니키아스와 알키비아데스 각자가 지도자들의 의지에 따라 표결이 결정되는 개인적인 추종자들을 지휘했음을 보여준다.[28]

알키비아데스는 기원전 416~415년에 멜로스 점령에 관여한 장군 중 한 명이 아니었지만, 플루타르코스는 그를 멜로스의 성인 남성들이 살해되고 여성과 어린이들이 노예로 팔린다는 법령을 지지한 사람으로 묘사한다.[34] 알키비아데스의 추방을 촉구하는 연설인 "알키비아데스에 대하여"(역사적으로 웅변가 안도키데스에게 귀속되지만 사실은 그가 한 것이 아님)는 알키비아데스가 이 노예로 팔린 여성 중 한 명과 아이를 낳았다고 주장한다.[35]

2. 2. 1. 시칠리아 원정

알키비아데스가 활약한 시대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시기였고, 이 전쟁은 페리클레스가 주창한 농성 작전이 통하지 않았다. 스파르타가 원정을 하게 됨으로써 보급로가 끊길 우려가 있었기 때문에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고 있었다. 페리클레스는 전염병으로 사망했기 때문에, 그 이외의 유력한 정치인들이 다음 단계를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알키비아데스의 정적이기도 한 니키아스가 휴전을 주장하여 기원전 421년의 니키아스 평화조약에 의해 아테나이가 이끄는 델로스 동맹스파르타가 이끄는 펠로폰네소스 동맹은 강화를 하게 되었다. 그러나 주전론을 주창 알키비아데스는 그것을 깨고 다시 전쟁을 재개시켰고, 동맹국을 돕는다는 명분으로 시켈리아 전역을 지배하에 두기 위해 시켈리아 원정을 제안하였다. 그리고 그도 니키아스와 함께 두 사람의 사령관 중 한 명으로 참여했다.

기원전 415년, 시칠리아 도시 세게스타(에게스타/Egestael)의 사절들이 아테네에 도착하여 셀리누스(Selinus)와의 전쟁에서 아테네의 지원을 요청했다. 원정에 대한 논의 과정에서 니키아스는 아테네의 개입에 강력하게 반대하며, 이 원정이 매우 큰 비용을 초래할 것이라고 설명하고, 원정의 주요 지지자로 부상한 알키비아데스의 성격과 동기를 비난했다.[36] 반면 알키비아데스는 이 새로운 전장에서의 원정이 도시에 부를 가져다주고 제국을 확장할 것이라고 주장했는데, 이는 마치 페르시아 전쟁과 같을 것이라고 했다. 알키비아데스는 자신의 연설에서 (대부분의 역사가들의 견해에 따르면 지나치게 낙관적으로) 아테네인들이 이 지역에서 동맹국을 모집하고 시칠리아에서 가장 강력한 도시인 시라쿠사에 대한 지배를 확립할 수 있을 것이라고 예측했다.[37] 알키비아데스가 이 계획을 열정적으로 옹호했음에도 불구하고, 소규모 원정을 대규모 원정으로 바꾸고 시칠리아 정복을 가능하고 안전하게 보이도록 만든 사람은 그가 아니라 니키아스였다.[38] 함대 규모를 크게 늘린 것도 그의 제안이었다.[40] 철학자 레오 슈트라우스는 시칠리아 원정이 페리클레스가 수행한 모든 것들을 능가했다고 강조한다. 니키아스의 의도는 거의 확실히 필요한 병력에 대한 자신의 높은 추정치로 의회를 충격에 빠뜨리는 것이었지만, 동료 시민들을 설득하지 못한 대신 그의 분석은 그들을 더욱 열렬하게 만들었다.[41] 그의 바람과는 달리 니키아스는 알키비아데스와 라마쿠스와 함께 장군으로 임명되었고, 세 사람 모두 시칠리아에 있는 동안 아테네의 최상의 이익을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완전한 권한을 부여받았다.[42]

원정 준비 중 어느 날 밤, 헤르메스 신의 머리를 얹은 받침대(plinth) 위의 남근(phallus)이 있는 헤르마(hermai)들이 아테네 전역에서 훼손되었다. 이것은 종교적인 스캔들이었고, 알키비아데스에 대한 ''불경죄''(불경) 혐의로 이어졌으며, 이 임무에 대한 불길한 징조로 여겨졌다. 플루타르코스는 정치 지도자 안드로클레스(Androcles)가 알키비아데스와 그의 친구들이 조각상을 훼손하고 엘레우시스 신비의식을 모독했다고 고발한 거짓 증인을 사용했다고 설명한다. 나중에 그의 반대자들은 알키비아데스가 계획대로 출항하여 원정에서 돌아온 후 재판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연설가들을 고용했다. 알키비아데스는 그들의 의도를 의심했고, 자신의 명예를 깨끗이 하기 위해 사형 위험을 무릅쓰고 즉시 재판을 받을 것을 요청했다.[43] 이 요청은 거부되었고, 혐의가 해결되지 않은 채 함대는 얼마 후 출항했다.[44]

"사람들은 우월한 자의 공격을 막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종종 공격을 막기 위해 선제타격을 가한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 제국의 정확한 한계점을 정할 수 없다. 우리는 유지하는 것에 만족해서는 안 되고 확장하기 위해 책략을 써야 하는 지점에 도달했다. 왜냐하면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지배하는 것을 중단하면 우리 자신이 지배당할 위험에 처하기 때문이다. 또한 당신은 다른 사람들과 같은 관점에서 무위를 바라볼 수 없다. 당신이 당신의 습관을 바꾸고 그들의 습관과 같게 만들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말이다."
알키비아데스의 시칠리아 원정 전 연설, 투키디데스 (VI, 18)에 기록됨



알키비아데스가 예상했던 대로, 그의 부재는 그의 적들을 더욱 대담하게 만들었고, 그들은 그를 다른 신성 모독 행위와 발언으로 고발하기 시작했으며, 심지어 이러한 행위가 민주주의에 대한 음모와 관련이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46] 투키디데스에 따르면, 아테네인들은 항상 두려워했고 모든 것을 의심스럽게 생각했다.[47] 함대가 카타니아에 도착했을 때, 알키비아데스와 다른 사람들을 아테네로 돌아와 재판을 받도록 데려올 삼단노선 '살라미니아(Salaminia)' 호를 기다리고 있었다.[47] 알키비아데스는 아테네로 돌아가는 사자들에게 자신의 배를 타고 그들을 따라가겠다고 말했지만, 투리이(Thurii)에서 그는 그의 승무원과 함께 도망쳤다. 아테네에서는 결석재판에서 유죄 판결을 받고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의 재산은 몰수되었고, 도망친 사람들을 죽이는 데 성공한 사람에게는 한 타란트(talent)의 상금이 약속되었다.[48] 한편, 시칠리아에 있는 아테네군은 초기 몇 차례의 승리 후 메시나(Messina)로 진격했는데, 장군들은 그 도시 내부의 비밀 동맹국들이 그 도시를 배신할 것으로 예상했다. 그러나 알키비아데스는 자신이 추방될 것을 예상하고 메시나에 있는 시라쿠사인들의 친구들에게 정보를 제공했고, 그들은 아테네인들의 입장을 막는 데 성공했다.[49] 얼마 후 라마쿠스가 전투에서 사망하면서 시칠리아 원정의 지휘권은 니키아스의 손에 들어갔다.

2. 2. 2. 스파르타 망명

알키비아데스는 스파르타에서 전략 조언자로 활동하며, 아테네에 대한 대규모 공격 작전을 제안하거나 지도하였다. 그는 아테네의 내부 정보를 흘려 시켈리아(시칠리아) 내부의 방어 정보를 스파르타 측에 알려주었다.[50] 그 결과, 스파르타는 규리포스(Gylippus)가 이끄는 군대를 시켈리아 섬에 파병하여 철저히 항전하기로 했다.

스파르타군에 의해 시켈리아 군은 방어가 강화되었고, 아테네는 막대한 전력을 투입했음에도 불구하고 시켈리아 원정은 전멸에 가까운 대패로 끝났다(기원전 413년). 스파르타 원정군은 항복한 아테네의 사령관 니키아스와 데모스테네스를 받아들였지만, 시라쿠사에 의해 처형되었다. 이 사건은 시라쿠사의 펠로폰네소스 전쟁 참전이라는 결과도 초래했다.

알키비아데스는 스파르타의 군사 고문으로 활동했고 스파르타가 몇 가지 중요한 성공을 거두도록 도왔다. 그는 아테네에서 약 16km 떨어진 데켈레아(Decelea)에 영구 요새를 건설할 것을 조언했는데, 이 요새는 도시에서 바로 보이는 곳에 있었다.[55] 이를 통해 스파르타인들은 아테네인들을 그들의 가옥과 농작물, 그리고 수니온(Sunium)의 은광에서 완전히 차단했다. 이것은 아티카(Attica)에서 아테네와의 전쟁을 재개하려는 알키비아데스의 계획의 일부였다. 이 조치는 아테네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혔고 시민들은 일년 내내 도시의 장벽 안에서 살도록 강요하여 식량을 위해 해상 무역에 전적으로 의존하게 만들었다. 아테네가 제2 전선에서 이처럼 포위된 것을 본 델로스 동맹의 구성원들은 반란을 고려하기 시작했다. 시칠리아에서 아테네가 참패한 직후 알키비아데스는 스파르타 함대와 함께 이오니아(Ionia)로 항해하여 여러 중요 도시들이 반란을 일으키도록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56][57]

그러나 스파르타에서도 알키비아데스는 이내 강력한 정적을 만들게 되어, 페르시아로 도망쳐야 했다. 투리이에서 사라진 후 알키비아데스는 스파르타인들에게 급히 연락하여, 만약 그들이 그에게 피난처를 제공한다면 "그가 적이었을 때 그들에게 입힌 모든 해악보다 더 큰 도움과 봉사를 제공할 것"이라고 약속했다.[50] 스파르타인들은 이 요청을 받아들여 그를 받아들였다. 이러한 변절로 인해 아테네인들은 그를 결석재판으로 사형을 선고하고 그의 재산을 몰수했다.[51][52]

시라쿠사 구원에 군대를 파병할지 여부에 대한 스파르타 내 논쟁에서 알키비아데스는 연설하여 아테네인들이 시칠리아, 이탈리아, 심지어 카르타고(Carthage)까지 정복하기를 바란다고 알림으로써 스파르타의 에포로이(ephor)들에게 아테네의 야망에 대한 두려움을 심어주었다.[53] 예일대학교(Yale University)의 역사학자 도널드 카간(Donald Kagan)은 알키비아데스가 스파르타인들에게 그의 도움으로 얻을 수 있는 이익을 확신시키기 위해 아테네인들의 계획을 의도적으로 과장했다고 믿는다. 카간은 알키비아데스가 아직 그의 "전설적인" 명성을 얻지 못했고, 스파르타인들은 그를 "패배하고 사냥당하는 인물"로 보았으며, 그의 정책은 "전략적 실패"를 가져왔고 "결정적인 결과"를 가져오지 못했다고 주장한다. 정확하다면 이 평가는 알키비아데스의 가장 큰 재능 중 하나인 그의 매우 설득력 있는 연설 능력을 강조한다.[54] 위협이 임박한 것처럼 보이게 만든 후 알키비아데스는 스파르타인들에게 군대를 파병하고, 가장 중요한 것은 시라쿠사인들을 훈육하고 지원할 스파르타 지휘관을 파견할 것을 조언했다.[53]

이러한 스파르타 대의에 대한 귀중한 공헌에도 불구하고, 이 무렵 알키비아데스는 아기스 2세 왕 정부의 총애를 잃었다.[58] 아기스 2세의 아내 티마이아(Timaea)가 낳은 아들 레오티키데스(Leotychides)는 많은 사람들에게 알키비아데스의 아들이라고 여겨졌다.[59][60] 다른 기록에 따르면 알키비아데스는 아기스 2세 왕이 아티카(Attica)에 있는 스파르타 군대와 함께 부재한 것을 이용하여 그의 아내를 유혹했다고 한다.[4]

알키비아데스의 영향력은 그와 친분이 있던 에포로이(ephor) 엔디우스(Endius)의 은퇴 후 더욱 감소했다.[61] 스파르타 해군 제독 아스티오쿠스(Astyochus)가 그를 죽이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알려져 있지만, 알키비아데스는 이 명령에 대한 경고를 받고 기원전 412년 펠로폰네소스군을 재정적으로 지원해 온 페르시아 사트라프(satrap) 티사페르네스(Tissaphernes)에게 망명했다.[62]

2. 2. 3. 페르시아 망명

알키비아데스는 스파르타에서 고문과 같은 위치에서 아테네에 곡물 수송의 요지 데켈레아에 요새를 만들 것을 건의하였다. 페르시아 제국 아케메네스 왕조와 스파르타의 원조 협상을 위해 교섭을 벌이기도 했다. 그러나 스파르타 왕비와 정을 통했다는 이유로 스파르타와의 관계가 악화되었다. 결국 그는 페르시아 제국의 태수 티사페르네스에게 망명하여 조언자로 활동했다.

알키비아데스는 현지 페르시아 궁정에 도착하여 강력한 사트라프 티사페르네스의 신임을 얻고 여러 정책 제안을 했는데, 이는 호평을 받았다. 투키디데스에 따르면, 알키비아데스는 즉시 티사페르네스를 이용하여 펠로폰네소스 동맹에 피해를 주기 시작했다. 그의 설득에 따라 사트라프는 펠로폰네소스 함대에 대한 지원금을 줄이고 불규칙적으로 지급하기 시작했다.[62] 다음으로 알키비아데스는 티사페르네스에게 각 도시의 장군들에게 뇌물을 주어 그들의 활동에 대한 귀중한 정보를 얻도록 조언했다. 마지막으로,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 그는 사트라프에게 페르시아 함대를 갈등에 개입시키는 것을 서두르지 말라고 조언했다. 전쟁이 길어질수록 전투원들은 더욱 지쳐갈 것이고, 이로 인해 페르시아는 전투 후 더 쉽게 그 지역을 정복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알키비아데스는 페르시아의 이익을 위해 아테네와 스파르타 모두를 먼저 쇠약하게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사트라프를 설득하려 했다. "아테네의 힘을 최대한 약화시킨 후, 곧바로 펠로폰네소스인들을 제거해야 한다"는 것이었다.[63]

알키비아데스의 조언은 페르시아에 이익이 되었지만, 그것은 단지 수단일 뿐이었다. 투키디데스는 그의 진짜 동기는 페르시아에 대한 그의 영향력을 이용하여 아테네로 복귀하는 것이었다고 말한다.[64] 알키비아데스는 고국에서 역경을 겪은 후 아케메네스 제국으로 피신한 여러 그리스 귀족 중 한 명이었으며, 다른 유명한 인물로는 테미스토클레스, 데마라토스, 또는 공길로스가 있다.[65] 투키디데스(투키디데스 8.47)에 따르면, 알키비아데스는 아케메네스 왕(다리우스 2세)에게도 조언을 했기 때문에, 그를 만나기 위해 수사 또는 바빌로니아로 여행했을 가능성이 있다.[65][64]

2. 3. 아테네 복귀와 몰락

알키비아데스는 "급진적 민주주의"가 자신을 아테네로 소환하는 데 동의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66] 그는 사모스의 아테네 지도자들과 서신을 교환하며, 만약 그들이 자신에게 우호적인 과두정을 수립할 수 있다면 자신이 아테네로 돌아와 페르시아의 돈과 147척의 페르시아 함대를 데려올 것이라고 제안했다.[67] 알키비아데스는 군 장교들을 설득하여 아테네 헌법 변경, 알키비아데스의 소환 투표, 티사페르네스와 페르시아 왕을 아테네 편으로 끌어들이는 계획을 제시했다. 아테네 함대의 장교 대부분이 이 계획을 받아들였으나, 프리니쿠스만이 반대했다.[68] 트라시불루스의 음모 개입 여부는 불분명하다.[69][70]

아테네 함대의 장교들은 음모자 그룹을 형성했지만, 병사와 선원 대다수의 반대에 직면했다. 이들은 "왕으로부터의 급료라는 유리한 전망"으로 진정되었다.[71] 피산데르는 아테네에 사절로 보내져 알키비아데스의 복귀와 민주주의 폐지를 논의했다.[72] 프리니쿠스는 알키비아데스가 복수할까 두려워 스파르타 해군 사령관 아스티오쿠스에게 비밀 편지를 보냈으나, 아스티오쿠스는 이를 알키비아데스에게 알렸다.[73] 알키비아데스는 프리니쿠스를 배신자로 몰았지만, 프리니쿠스는 이를 예측하고 사모스를 요새화했다.[74]

피산데르와 사절들은 아테네에서 알키비아데스와 그의 약속을 중심으로 주장을 펼쳤고, 에클레시아는 프리니쿠스를 축출하고 피산데르를 포함한 사절단을 티사페르네스와 협상하게 했다.[75] 그러나 티사페르네스는 중립 정책을 고수하며 합의를 거부했다.[76][77] 알키비아데스는 아테네인들에게 강경한 요구를 제시하며 협상이 결렬되었다.[78]

협상 실패에도 불구하고, 음모자들은 민주주의를 전복하고 400인의 과두정부를 세웠다. 그러나 사모스에서는 비슷한 쿠데타가 실패했다. 사모스의 민주주의자들은 음모를 저지하고, 삼단노선선장 트라시불루스와 트라실루스를 포함한 새로운 장군들을 선출했다.[79] 군대는 민주주의를 지키기로 결의했다.[80]

트라시불루스는 군대를 설득하여 알키비아데스의 복귀를 위한 투표를 하게 했고, 알키비아데스를 사모스로 데려왔다.[81] 알키비아데스는 티사페르네스에 대한 자신의 영향력을 자랑하며 군대를 고무시켰고, 즉시 장군으로 선출되었다.[84] 그는 아테네의 내전을 막고 400인 정부를 전복시켰다.[82][85]

알키비아데스는 티사페르네스에게 항해했으나, 실제 목적은 자신의 지위를 과시하고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것이었다. 역사가에 따르면 알키비아데스는 티사페르네스가 함대를 데려올 의도가 없음을 알고 있었다.[86]

알키비아데스는 기원전 411년 5천인 정체제에 의해 소환되었지만, 기원전 407년까지 아테네로 돌아오지 않았다.[87] 그는 아비도스 전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알키비아데스는 헬레스폰토스에서 아테네 함대가 승리하는 데 기여했다.[88][91] 전투 직후, 알키비아데스는 티사페르네스를 만나려다 체포되었으나, 탈출하여 지휘권을 회복했다.[93][94]

키지쿠스에서 아테네 함대는 알키비아데스의 계략으로 스파르타 함대를 격파했다.[98] 스파르타는 평화를 청했지만, 아테네는 거부했다.[99][121][100][101]

알키비아데스는 칼케돈 포위 공격에서 승리하고, 셀림브리아를 점령했다.[102][105][103] 그는 비잔티움 포위 공격에도 참여하여 도시를 함락시켰다.[105]

기원전 407년, 알키비아데스는 아테네로 귀환하여 영웅적인 환영을 받았다.[110] 그는 육해군 최고 사령관으로 선출되었다.[115]

기원전 406년, 알키비아데스는 노티움에서 리산드로스에게 패배했다.[116] 이 패배로 알키비아데스는 지휘권에서 해임되고 망명을 선택했다.[119][120]

3. 최후

기원전 411년 아테나이에서 과두 정권이 수립되면서 알키비아데스는 귀국을 허용받았다. 그 후 사모스 섬의 아테나이 주둔군 지휘관이 되었고, 기원전 410년에 스파르타 군을 물리쳤다. 그러나 기원전 406년 함대 부장의 독단에 의한 패전의 책임을 자신에게 떠넘기자 트라키아로 망명한다. 망명처인 프리기아에서 태수 파르나바조스의 환대를 받았지만, 스파르타의 요청에 의해 암살당했다. (혹은 복잡한 여성 관계로 피살되었다.)

미셸 드 나폴리: ''알키비아데스의 죽음'' (c. 1839), 나폴리 국립 고고학 박물관


알키비아데스는 아케메네스 제국의 사트라프 파르나바조스가 통치하는 헬레스폰티네 프리고아에서 생을 마감했다.


아이고스포타미 해전 이전에 알키비아데스는 아테네 함대가 전술적으로 불리한 위치에 정박해 있다는 것을 알고 항구와 도시의 이점을 얻을 수 있는 세스토스로 이동할 것을 조언했지만,[123][124] 아테네 장군들은 "패배할 경우 비난이 자신들에게 돌아가고, 승리할 경우 모든 사람들이 알키비아데스에게 공을 돌릴 것이라고 생각하여"[124][128] 그에게 떠나라고 요청했다. 며칠 후 함대는 리산드로스에게 궤멸되었다.

아이고스포타미 해전 이후, 알키비아데스는 헬레스폰트를 건너 헬레스폰티네 프리고아(Hellespontine Phrygia)로 피신하여 스파르타에 대항하여 아케메네스 왕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의 지원을 확보하려 했다.[129] 알키비아데스는 고국에서 역경을 겪은 후 아케메네스 제국으로 피신한 여러 그리스 귀족 중 한 명이었다.[65]

[[File:La_mort_d'Alcibiade_Philippe_Chéry_1791.jpg|thumb|upright=1.35|기원전 404년, 아케메네스 제국의 헬레스폰티네 프리고아 지방에 망명해 있던 알키비아데스는 스파르타의 사주를 받은 사트라프 파르나바조스 2세의 명령을 따랐을 가능성이 있는 페르시아 병사들에게 암살당했다. '알키비아데스의 죽음'. 필립 셰리, 1791. 라로셸 미술관.] ]

알키비아데스의 죽음에 대한 상황에 대해서는 불확실한 점이 많으며, 상반되는 기록이 있다. 가장 오래된 기록에 따르면 스파르타인들, 특히 리산드로스가 책임이 있다.[130] 플루타르코스의 설명에 따르면 리산드로스는 파르나바조스에게 사절을 보냈고, 파르나바조스는 그의 형제를 프리고아에 있는 알키비아데스의 애인 티만드라가 있는 곳으로 파견했다.

기원전 404년, 그가 페르시아 궁정으로 향하려던 참에 그의 거처가 포위되어 불이 붙었다. 탈출의 기회가 없음을 알고 그는 단검을 들고 암살자들에게 달려들었고, 쏟아지는 화살에 맞아 죽었다.[133]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알키비아데스가 죽은 곳은 프리고아의 산인 엘라푸스였다.[134]

4. 인물

알키비아데스는 재능, 외모, 집안, 덕망 모두에서 탁월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덕과 악덕 모두에서 그를 능가하는 사람이 없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135][136] 그의 출중한 용모는 남녀 모두에게 사랑받았고, 애인이 끊이지 않았으며, 언변 또한 뛰어나 다른 사람을 지지하거나 민중을 선동하는 데 능했다.[140]

어려서부터 오만하고 전횡하는 성격으로 자신의 뛰어난 재능을 사랑하고, 보통 사람이나 다른 사람을 업신여겼다. 그러나 자신보다 뛰어나다고 판단한 인물에게는 남다른 존경과 열정을 쏟았다. 스승인 소크라테스에게는 소크라테스가 다른 사람을 보는 것만으로 질투할 정도로 심취하였고, 심지어 미모로 그를 유혹하기도 했다. 하지만 자제심이 강한 소크라테스에게는 무의미한 시도였다.

알키비아데스의 딸 힙파레테의 비문(케라메이코스 묘지, 아테네)


고대 그리스에서 알키비아데스는 논란의 여지가 있는 인물이었다. 투키디데스는 그를 "극도로 야심적"인 인물로, 시칠리아 원정을 제안한 것도 자신의 성공을 통해 부와 명성을 얻기 위함이었다고 평가한다. 투키디데스는 알키비아데스의 행동이 모든 사람에게 불쾌감을 주어 결국 아테네를 멸망시켰다고 비판한다.[135] 플루타르크는 그를 "가장 무책임하고 인간을 완전히 무시하는 사람"으로 묘사한다.[136] 반면, 디오도로스는 그가 "정신적으로 뛰어나고 위대한 기업에 전념하는 사람"이었다고 주장한다.[137] 데모스테네스는 알키비아데스가 민주주의를 위해 무기를 들었고, 개인적인 봉사를 통해 애국심을 보였다고 옹호한다.[140] 이소크라테스는 알키비아데스가 아테네에 베푼 봉사에 대해 감사를 받을 자격이 있다고 주장한다.[142] 리시아스는 아테네인들이 알키비아데스를 적으로 여겨야 한다고 주장하며, "그는 어떤 친구의 공개적인 도움에도 상처로 갚는다"고 비판한다.[143][144]

아리스토텔레스는 '''아테네 정치제도'''에서 알키비아데스를 최고의 아테네 정치가 명단에 포함시키지 않았지만, '''후분석편'''에서는 알키비아데스와 같은 교만한 사람의 특징은 "인생의 변화 속에서의 침착함과 불명예에 대한 참을 수 없는 성격"이라고 언급한다.[145][146] 안도키데스는 알키비아데스에 대해 "자신이 국가의 법을 준수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대신, 당신이 그의 삶의 방식을 준수하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148] 코르넬리우스 네포스는 알키비아데스가 "모든 아테네인들 중에서 생활의 웅장함과 화려함을 능가했다"고 평가한다.[149]

현대에 이르러서도 알키비아데스에 대한 평가는 학자들 사이에서 엇갈린다. 맬컴 F. 맥그리거는 알키비아데스를 단순한 기회주의자가 아니라 영리한 도박꾼으로 평가한다.[150] 에반젤로스 P. 포티아디스는 알키비아데스가 "일류 외교관"이었고 "엄청난 기술"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의 정신적 능력이 훌륭한 정신과 균형을 이루지 못해 선동에 취약했다고 평가한다.[7] K. 파파레고풀로스는 그의 "정신적 미덕"을 강조하며 테미스토클레스와 비교하지만, 동시에 그를 "반역자, 대담하고 불경한 사람"이라고 평가한다.[151] 데이비드 그리블은 알키비아데스가 그의 도시에 대해 취한 행동이 오해되었고, "알키비아데스가 도시와 결별하게 된 긴장은 순전히 개인적 가치와 시민적 가치 사이에 있었다"고 주장한다.[153] 러셀 메이그스는 알키비아데스가 큰 매력과 뛰어난 능력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절대적으로 파렴치했으며, 그의 행동은 이기적인 동기로 좌우되었다고 평가한다.[58] 아타나시오스 G. 플라티아스와 콘스탄티노스 콜리오풀로스는 알키비아데스 자신의 주장이 "어떤 사람들이 여전히 믿는 것처럼 알키비아데스가 위대한 정치가였다는 생각을 없애기에 충분하다"고 주장한다.[154] 안나 C. 살터와 허비 클렉리는 알키비아데스가 정신병질의 고전적인 특징을 보인다고 평가한다.[155][156]

투키디데스는 비판적인 논평에도 불구하고 "대중적으로 그의 전쟁 수행은 바람직한 수준만큼이나 훌륭했다"고 인정한다.[135] 디오도로스와 데모스테네스는 그를 위대한 장군으로 여긴다.[137][140] 포티아디스에 따르면 알키비아데스는 무적의 장군이었고, 그가 어디를 가든 승리가 따랐다.[7] 반면 파파리 고풀로스와 플라티아스, 콜리오풀로스는 알키비아데스가 주도한 시칠리아 원정이 전략적 실수였다고 평가한다.[157][37] 안젤로스 블라호스는 시칠리아 원정이 전통적인 아테네의 열망에 기반한 합리적인 전략적 결정이었으며, 알키비아데스는 서부 전체 정복이라는 더 광범위한 계획을 구상했다고 주장한다.[159][160][161] 그러나 카간은 알키비아데스가 아테네 원정의 대규모가 그의 전략에 기반한 외교 계획을 약화시켰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했다고 비판한다.[162]

카간은 알키비아데스가 상당한 능력을 가진 사령관이었지만, 군사 천재는 아니었고, 그의 자신감과 야망이 그의 기술을 훨씬 넘어섰다고 평가한다. 그는 알키비아데스가 중요한 실수와 심각한 잘못된 계산을 할 수 있었다고 지적하며, 노티움에서 함대를 경험 없는 장교에게 맡긴 실수와 키지쿠스에서의 승리가 대부분 트라시불루스의 공이라고 주장한다.[162]

플루타르코스는 "알키비아데스는 다른 재능 외에도 뛰어난 연설가였다"고 주장하며, 테오프라스토스는 알키비아데스가 주어진 상황에서 요구되는 것을 발견하고 이해하는 데 가장 능숙했다고 평가한다.[164] 그러나 그는 종종 연설 중에 말을 더듬었지만, 곧 다시 시작하여 매우 신중하게 진행했다.[164] 심지어 아리스토파네스가 언급한 그의 혀 짧은 소리조차도 그의 말을 설득력 있고 매력적으로 만들었다.[165][166] 에우폴리스는 그를 "말재주꾼의 왕이지만, 연설에서는 가장 무능한 자"라고 평가하는데, 이는 그가 에클레시아(민회) 앞에서 연설할 때보다 사적인 담화에서 더 웅변적이었다는 뜻이다.[33] 데모스테네스는 알키비아데스가 "당대 최고의 연설가"로 여겨졌다고 강조한다.[140] 토마스 하비넥은 연설가 알키비아데스가 주어진 상황에서 청중이 필요로 하는 어떤 모습이든 보였다고 평가하며, 수사학 분야에서 사람들은 알키비아데스의 애정에 그들 자신의 애정으로 화답했다고 주장한다.[167][168] 아리스토파네스에 따르면, 아테네는 "그를 그리워하고, 또 증오하지만, 그를 돌려받기를 원한다".[169]

피에트로 테스타: ''술 취한 알키비아데스가 심포지엄을 방해하다'' (1648)


5. 평가

고대 그리스에서 알키비아데스는 논란의 여지가 있는 인물이었다. 투키디데스는 알키비아데스를 "극도로 야심적"이었다고 평가하며, 시칠리아 원정을 제안한 것도 자신의 성공을 통해 "부와 명성을 얻기 위"함이었다고 평가했다.[135] 그는 알키비아데스를 아테네 멸망의 직접적인 책임자로 보지는 않았지만, "그의 행동은 모든 사람에게 불쾌감을 주었고, 아테네인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일을 맡기게 하여 결국 도시를 멸망시켰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135] 플루타르크는 그를 "가장 무책임하고 인간을 완전히 무시하는 사람"으로 여겼다.[136] 반면, 디오도로스는 그가 "정신적으로 뛰어나고 위대한 기업에 전념하는 사람"이었다고 주장한다.[137] 데모스테네스는 알키비아데스가 민주주의를 위해 무기를 들었고, 개인적인 봉사를 통해 애국심을 보였다며 그의 업적을 옹호했다.[140] 이소크라테스의 연설 중 하나는 알키비아데스 2세가 전달했는데, 그 연설은 정치가가 아테네인들에게 베푼 봉사에 대해 감사를 받을 자격이 있다고 주장한다.[142] 반면, 리시아스는 아테네인들이 알키비아데스를 적이라고 여겨야 한다고 주장했다.[143][144] 안도키데스는 알키비아데스에 대해 "자신이 국가의 법을 준수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대신, 당신이 그의 삶의 방식을 준수하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148]

오늘날에도 알키비아데스에 대한 평가는 학자들 사이에서 엇갈린다. 맬컴 F. 맥그리거는 알키비아데스가 단순한 기회주의자가 아니라 영리한 도박꾼이었다고 평가한다.[150] 에반젤로스 P. 포티아디스는 알키비아데스가 "일류 외교관"이었고 "엄청난 기술"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의 정신적 능력이 그의 훌륭한 정신과 균형을 이루지 못했다고 지적한다.[7] K. 파파레고풀로스는 그의 "정신적 미덕"을 강조하고 그를 테미스토클레스와 비교하지만, 동시에 그를 "반역자, 대담하고 불경한 사람"이라고 평가한다.[151] 데이비드 그리블은 알키비아데스가 그의 도시에 대해 취한 행동이 오해되었고 "알키비아데스가 도시와 결별하게 된 긴장은 순전히 개인적 가치와 시민적 가치 사이에 있었다"고 주장한다.[153] 러셀 메이그스는 아테네의 정치가가 그의 큰 매력과 뛰어난 능력에도 불구하고 절대적으로 파렴치했다고 주장하며, 그의 행동은 이기적인 동기로 좌우되었다고 평가한다.[58] 아타나시오스 G. 플라티아스와 콘스탄티노스 콜리오풀로스는 알키비아데스 자신의 주장이 "어떤 사람들이 여전히 믿는 것처럼 알키비아데스가 위대한 정치가였다는 생각을 없애기에 충분하다"고 비판한다.[154]

투키디데스는 비판적인 논평에도 불구하고 "대중적으로 그의 전쟁 수행은 바람직한 수준만큼이나 훌륭했다"고 인정한다.[135] 디오도로스와 데모스테네스는 그를 위대한 장군으로 여긴다.[137][140] 포티아디스에 따르면 알키비아데스는 무적의 장군이었고, 그가 어디를 가든 승리가 그를 따랐다고 한다.[7] 반면 파파리고풀로스는 알키비아데스가 주도한 시칠리아 원정이 전략적 실수였다고 믿는다.[157] 플라티아스와 콜리오풀로스는 시칠리아 원정이 "경솔한 태도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과소평가된 적"으로 인한 최대의 전략적 실책이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37] 안젤로스 블라호스는 이 원정이 전통적인 아테네의 열망에 기반한 합리적인 전략적 결정이었다고 평가한다.[159] 그는 알키비아데스가 서부 전체 정복이라는 더 광범위한 계획을 구상했다고 주장한다.[160] 카간은 알키비아데스가 상당한 능력을 가진 사령관이었지만, 군사 천재는 아니었고, 그의 자신감과 야망은 그의 기술을 훨씬 넘어섰다고 평가하며, 노티움에서 알키비아데스가 범한 심각한 실수를 지적한다.[162]

6. 유산

알키비아데스는 고대 희극에서 아리스토파네스와 클레온의 대결과 유사하게 에우폴리스와의 서사적인 대결이 있었다고 전해진다.[141] 그는 소크라테스 대화편(''향연'', ''프로타고라스'', ''알키비아데스 1서'' 및 ''2서'')에서 소크라테스의 연인이자 제자로 등장하며, 아이쉬네스와 안티스테네스의 대화편에도 등장한다. 안티스테네스는 알키비아데스의 뛰어난 체력, 용기, 아름다움을 묘사하며 "아킬레우스가 이렇게 생기지 않았다면, 그는 진정으로 잘생긴 것이 아니었다"라고 말했다.[170] 소크라테스는 재판에서 알키비아데스를 포함한 전 제자들의 죄에 대해 자신을 유죄로 판결하려는 시도를 반박하며 ''변론''에서 "나는 누구의 스승도 된 적이 없다"라고 선언했다.[172]

아고스티노 베네치아노의 판화. 르네상스 시대의 알키비아데스를 반영하고 있다.


알키비아데스는 중세와 르네상스 작품, 그리고 여러 중요한 현대 문학 작품에서도 꾸준히 묘사되었다.[173] 셰익스피어와 토마스 미들턴의 비극적 희극 ''아테네의 티몬''의 주요 등장인물이며, 역사 소설에서 애나 보먼 도드, 거트루드 애서턴, 메리 레노, 로즈메리 서트클리프, 다니엘 차바리아, 스티븐 프레스필드, 피터 그린,[175] 일야 레오나르트 프페이퍼와 같은 작가들의 주인공이었다.

알키비아데스는 비디오 게임 ''어쌔신 크리드 오디세이''의 줄거리에 등장하며, 그의 군사적 능력은 영화 "패튼"에서 조지 S. 패튼 주니어에 의해 언급되었다.

7. 같이 보기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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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 서적 Plato's Dialectic at Play and Aeschines on Socratic Eros
[171] 서적 Plato's Socrates as Educator
[172] 웹사이트 Apology https://www.perseus.[...]
[173] 웹사이트 Alcibiades http://www.glbtq.com[...] 2017-05-19
[174] 서적 Titus Andronicus and Timon of Athens Modern Library
[175] 서적 Alcibiades
[176] 웹사이트 Alcibiades 1 http://www.perseus.t[...]
[177] 서적 Household Interests
[178] 백과사전 Alcibiades
[179] 서적 Commentary of Plato's Alcibiad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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