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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시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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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페르시아인은 시대, 지역, 문맥에 따라 다양하게 정의되는 민족 명칭으로, 가장 넓은 의미로는 역사적 이란 지역과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페르시아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을 포괄한다. 좁게는 이란 국적을 가진 사람들 중 페르시아어를 사용하는 집단을 지칭하며, 지리적·문화적 개념인 페르시아와 연결된다. 어원은 라틴어 'Persia'에서 유래되었으며, 고대 페르시아어 'Pārsa'에서 파생되었다. 페르시아인이라는 용어는 그리스어, 성경 등 다양한 문헌에서 나타나며, 용례는 시대와 상황에 따라 변해왔다. 고대에는 페르시아 제국을, 중세에는 다양한 이란 민족과 튀르크족을 포함하는 광범위한 의미로 사용되었다. 1935년 이란은 '이란'이라는 국호를 사용하기 시작했으나, '페르시아인'은 여전히 이란 문화권의 주요 인구를 지칭하는 데 사용된다. 페르시아인은 기원전 1000년경 이란 고원에 정착한 이란계 아리아인으로, 고대 페르시아 제국을 건설하며 서아시아 역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페르시아 문화는 예술, 문학, 건축 등 다양한 분야에서 발전했으며, 페르시아 카펫, 페르시아 문학, 페르시아 정원 등이 대표적이다. 이란의 설날인 노루즈는 페르시아인과 이란의 다른 민족들이 기념하는 중요한 명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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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시아인
지도
기본 정보
민족 이름페르시아인
로마자 표기Pārsi‌ها/Fārsi/Irāni
언어페르시아어, 기타 이란어군
종교대다수: 시아 이슬람
소수: 조로아스터교, 기독교, 유대교, 바하이 신앙, 수니 이슬람, 그리고 기타 종교
관련 민족기타 이란 민족
인구6천만 명 이상
거주 지역이란
인구 비율이란 전체 인구의 51–65% (길라크인 및 마잔데란인 포함)
언어 및 문화
언어페르시아어
문화다른 페르시아인과 관련된 문화 체계를 따름
페르시아어 방언파르시(Fārsi), 페르시아어(Persian)
언어 사용이란에서 모국어로서 최소 65%의 인구가 사용하고, 나머지 35%의 상당수도 제2외국어로 사용한다.
역사적 배경
기원기원전 9세기에 우르미아 호수 서남쪽으로 이주한 이란 부족에서 유래
고대 명칭파르수아(Pārsa)
초기 활동기원전 843년에 처음 언급
지리적 이동기원전 690년에서 640년 사이에 안샨 지역으로 이동
민족적 의미 획득이 시점부터 페르시아인의 땅이라는 민족적 의미 획득
아케메네스 제국페르시아인들이 아케메네스 제국을 세움
제국 통치페르시아 제국은 페르시아인들의 지도하에 다민족 국가로 발전
메디아인과의 관계메디아인은 페르시아인의 이란 자매 민족으로서 특별한 위치를 가짐
문화적 영향사산 왕조의 예술은 인도, 투르케스탄, 중국, 시리아, 소아시아, 콘스탄티노플, 발칸 반도, 이집트, 스페인 등으로 확산됨
민족 명칭 관련
타지크사파비 시대 중반에 이란의 페르시아인을 '타지크'로 지칭하는 것이 문학적 허례허식으로 여겨짐
파르시/아자미1617년 이스파한에서 피에트로 델라 발레는 토착 페르시아인들의 자칭으로 '파르시'와 '아자미'만을 언급
타트/라아야트키질바쉬 투르크멘 엘리트가 사용한 경멸적인 이칭으로 '타트'와 '라아야트'가 있음
현대 타트'타트'는 카스피해 서쪽에 있는 이란어 사용 집단을 지칭하는 데 사용

2. 명칭

기원전 550년 - 기원전 330년]]

“페르시아인”이라는 민족 명칭이 가리키는 범위는 시대, 지역, 문맥 등에 따라 다양하게 변화한다. 가장 넓은 의미로는 역사적인 이란 지역과 중앙아시아 지역에 살면서 주로 페르시아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을 두루 가리킨다. 좁은 의미로는 이란 이슬람 공화국 국적을 가진 사람들(이란인) 중 주로 정착 생활을 하고 페르시아어를 주로 사용하는 집단을 가리키는 민족 명칭 파르시(Fārsi)의 번역어이다.

넓은 의미의 "페르시아인"은 지리적·문화적 개념으로서의 "페르시아"와 연결된 민족 명칭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페르시아" 개념은 시대, 언어에 따라 의미가 크게 다를수 있다.

가장 좁은 의미의 페르시아인은 현대 이란의 민족 집단 파르시를 번역한 말이며, 또한 그 직접적인 조상이라고 볼 수 있는 현재 이란 지역에서 활동했던 페르시아어 사용 정주민들을 가리켜 사용된다. 파르시는 페르시아어로 "파르스 사람"을 의미하는데, 파르스는 고대 이란의 파르사이며, "페르시아"라는 지명의 어원이 되었다.

2. 1. 어원

"페르시아인"이라는 용어는 라틴어 Persiala에서 유래하며, 이는 다시 그리스어 (Περσίςgrc)[20]에서 유래한다. 이는 고대 페르시아어 (𐎱𐎠𐎼𐎿peo)의 헬레니즘화된 형태이며, 현대 페르시아어에서는 (فارسfa)로 발전한다.[21] 성경, 특히 다니엘, 에스더, 에스라, 느헤미야에서는 (פָּרָסhe)로 표기되어 있다.

그리스 민간어원설은 그 이름을 그리스 신화의 전설적인 인물인 페르세우스와 연결시킨다. 헤로도토스는 이 이야기를 전하며,[22] 페르시아인들이 그 이름을 따온 페르세우스의 아들인 페르세스를 만들어낸다. 페르시아인들 자신도 이 이야기를 알고 있었던 것 같다.[23] 크세르크세스 1세는 그리스 침략 중 이 이야기를 이용하여 아르고스인들을 회유하려 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페르시아인”이라는 민족 명칭이 가리키는 범위는 시대, 지역, 문맥 등에 따라 다양하게 변화한다. 가장 넓은 의미로는 역사적인 이란 지역과 중앙아시아 지역에 살면서 주로 페르시아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을 두루 가리킨다. 좁은 의미로는 이란 이슬람 공화국 국적을 가진 사람들(이란인) 중 주로 정착 생활을 하고 페르시아어를 주로 사용하는 집단을 가리키는 민족 명칭 파르시(Fārsi)의 번역어이다.

넓은 의미의 "페르시아인"은 지리적·문화적 개념으로서의 "페르시아"와 연결된 민족 명칭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페르시아" 개념은 시대, 언어에 따라 의미가 크게 다를수 있다.

가장 좁은 의미의 페르시아인은 현대 이란의 민족 집단 파르시를 번역한 말이며, 또한 그 직접적인 조상이라고 볼 수 있는 현재 이란 지역에서 활동했던 페르시아어 사용 정주민들을 가리켜 사용된다. 파르시는 페르시아어로 "파르스 사람"을 의미하는데, 파르스는 고대 이란의 파르사이며, "페르시아"라는 지명의 어원이 되었다.

2. 2. 용례의 역사

페르시아(Persis)는 고대 이란의 여러 주 가운데 하나에 불과했지만,[24] "페르시아"(Persia)와 같은 용어의 변형들은 그리스어 자료를 통해 차용되어 오랫동안 페르시아 제국 전체를 가리키는 외래어로 사용되었다.[25] 따라서 특히 서구 세계에서는 "페르시아"(Persia)와 "페르시아인"(Persian)이라는 명칭이 이란과 그 백성 전체를 가리키게 되었다.[25][11] “페르시아인”의 어원이 된 지명 “페르시아”는 하카마니슈 왕조(아카이메네스 왕조)와 사산 왕조의 발상지였던 현재 이란 파르스주 주변 지역(파르스 지방)의 옛 이름 “파르사”에서 유래한다.

일부 중세 및 근세 이슬람 자료들 또한 코라즈미아어를 사용하는 사람들,[26] 마잔데란어를 사용하는 사람들,[27] 그리고 구 아제르바이잔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을 포함한 다양한 이란 민족과 언어를 가리키는 데 "페르시아인"이라는 용어의 동족어를 사용했다.[28] 10세기 이라크 역사가 알마수디는 파흘라비어, 다리어, 아제리어를 페르시아어의 방언으로 언급한다.[29] 1333년, 중세 모로코 여행가이자 학자인 이븐 바투타카불의 아프간인들을 페르시아인의 특정 하위 부족으로 언급했다.[30] 레오노라 울프(Leonora Woulfe) 쉬엘 여사는 카자르 시대 이란에 대한 자신의 관찰에서 쿠르드족과 레크족이 자신들을 "옛 페르시아인"의 종족으로 여겼다고 말한다.[31]

사산 왕조 시대에는 한문 사료에서도 “파사(波斯)”라는 말이 사용되었던 것처럼, 이 왕조의 지배 영역을 가리키는 다른 이름으로 사용되었던 것이다. 이 시대의 그리스와 로마 사람들에게 “페르시아인”은 페르시아 국가의 사람들을 모호하게 가리키는 말이었다. 중세 동로마 제국에서 그리스어로 "페르시아인"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는, 종종 소아시아(아나톨리아)에서 동쪽에 거주하는 민족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었다. 따라서 셀주크 제국, 룸 셀주크 제국 및 오스만 제국의 튀르크계 민족도 "페르시아인"에 포함되었고, "페르시아인"은 반드시 페르시아어를 사용하는 민족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1935년 3월 21일, 당시 이란 국왕인 파흘라비 왕조의 레자 팔레비는 국제 사회에 공식적인 서신에서 이란이라는 국가의 고유 명칭을 사용해 줄 것을 요청하는 칙령을 발표했다. 그러나 "페르시아인"(Persian)이라는 용어는 여전히 역사적으로 이란 문화권에 거주하는 이란 민족의 주요 인구를 지칭하는 데 사용된다.[32][33]

사산조를 멸망시키고 그 영토 대부분을 지배하게 된 우마이야 칼리파는 지배하에 들어온 옛 사산조 사람들을 아랍어로 아자미(عجم, 'ajam,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하는 자"라는 뜻)라고 불렀다. 아랍인의 시각에서 "아자미"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점차 이슬람교로 개종하였고, 압바스 칼리파 후기에는 사만 왕조, 부이 왕조 등의 이슬람 왕조를 건국하였다.

사파비 왕조 이후의 이란, 샤이바니 왕조 이후의 중앙아시아에서는 튀르크와 "페르시아인"의 혼주가 진행되어, 옛날에는 유목민이었던 튀르크가 도시에 정착하여 문인이 되거나, "페르시아인"이 군인이 되는 경우도 있었다.

20세기에 이란, 소비에트 연방이 형성되면서, 이렇게 모호해지고 있던 "페르시아인"은 모어를 주된 척도로 하여 다시 민족으로서 구별되게 되었다.

전이슬람 시대의 역사 서술에서는 아케메네스 왕조(하카마니슈 왕조)와 사산 왕조 사람들을 가리키는 민족 명칭으로 "페르시아인"이 빈번하게 사용된다. 그러나 최근에는 각 제국에 관련된 각 집단을 엄밀하게 정의하여 구분하고, 전체를 모호하게 페르시아인이라고 하는 경우는 줄어드는 경향이 보인다.

급속한 발흥 이후 짧은 기간 안에 사산조(サーサーン朝)의 옛 영토 대부분을 지배하게 된 이슬람 세력 하에서는, 초기에는 사산조의 지방 행정 조직이 유지되었고, 사산조 사람들은 조로아스터교를 믿고 페르시아어를 모어로 하면서 이슬람 세력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초기 이슬람 역사에서 "페르시아인(ペルシア人)"이라고 불리는 것은 이러한 옛 사산조 사람들을 가리킨다. 압바스 혁명(アッバース朝革命)에서 자주 언급되는 "페르시아인"은 이렇게 아랍에 대해 아잠이라고 불렸던 이란 고원 주변의 사람들이며, 압바스 시대에 이란에서 성립한 여러 왕조가 "페르시아인의 왕조"라고 불리는 것은 이들을 건국한 왕가가 아랍이 아닌 아잠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카자르 왕조(ガージャール朝) 무렵이 되면, 한국어 역사 서술에서는 더 이상 "페르시아인"이라는 명칭은 거의 사용되지 않고, 대부분 "이란인"으로 바뀐다. 현대의 문맥에서는 이란인 중에서 특히 민족 분류상 "파르시(ファールスィー)"에 속하는 사람을 특히 가리키고 싶을 때에만 "페르시아인"이 사용된다고 말할 수 있다.

3. 역사

페르시아는 기원전 3000년 구 아시리아어 자료에서 로 처음 언급되며, 수메르 지역의 한 곳을 가리킨다.[11][34] 기원전 9세기 신아시리아의 살만에셀 3세의 흑색 오벨리스크 비문에는 님루드에서 발견되었는데, 후기 아시리아어 형태인 와 로, 자그로스 산맥에 위치한 지역과 민족으로 나타낸다.[35][36][37][38][39] 이란계 민족들이 우르미아 호 서쪽과 남서쪽으로 이주하면서 "페르시아인"으로 알려지게 되었고, 남쪽으로 이주한 이들은 지역 이름을 함께 가져와 페르시스(페르시아 본토, 즉 오늘날 파르스주)가 되었다.[35][36][37][38][39]

고대 페르시아 군인과 귀족 복장. Braun & Scheider의 ''의상의 역사'' (1861–1880).


고대 페르시아인들은 신아시리아 제국 멸망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40] 메디아인들은 메디아를 중심으로 제국을 통일했고, 기원전 612년경 지역의 주요 문화 및 정치 강국이 되었다.[41] 아케메네스 왕조 아래 페르시아인들은 메디아의 속국이었다가 기원전 552년 반란을 일으켜 기원전 550년 키루스 2세의 승리로 이어졌다. 페르시아인들은 이란 고원의 나머지 지역으로 영향력을 확대했고, 엘람인과 만네아인을 포함한 비이란계 토착민 집단과 동화되었다.[42]

아케메네스 제국의 최대 영토 지도.


아케메네스 제국은 서쪽의 동유럽 일부에서 동쪽의 인더스 계곡에 이르기까지 확장되어,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제국이었다.[43] 파사르가다이와 페르세폴리스 건설을 포함하여 증가하는 영향력을 지원하기 위한 기반 시설을 개발했다.[44] 제국은 그리스 도시 국가 경계까지 확장되었고, 페르시아인과 아테네인들은 상호 문화 교류에서 서로에게 영향을 주었다.[45] 마케도니아 왕국에 대한 유산과 영향은 그리스-페르시아 전쟁 이후에도 수세기 동안 지속되었다.[14]

알렉산더 모자이크에 묘사된 다리우스 3세가 이끄는 페르시아 전사들.


아케메네스 시대에 페르시아 식민자들은 소아시아에 정착했다.[14] 리디아의 사르디스 근처 히르카니아 평야는 스트라보에 따르면 히르카니아에서 이주한 페르시아 정착민들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 사르디스 근처 키루스의 평야는 이 지역에 수많은 페르시아 정착촌이 있었음을 보여준다.[14] 리디아와 폰투스는 소아시아에서 페르시아 신들을 숭배하는 주요 중심지였다.[14] 파우사니아스에 따르면, 서기 2세기 후반까지도 히로카이사레이아와 히파이파에서 페르시아 불 축제와 유사한 의식을 볼 수 있었다.[14] 키우스의 미트리다테스 3세는 폰투스 왕국을 세웠고, 미트리다테스 6세 대왕 치하에서 폰투스 왕국은 콜키스, 카파도키아, 비티니아, 그리스 식민지 타우리카 크리소네소스, 로마 속주 아시아를 지배했다. 미트리다테스 전쟁에서 로마와의 오랜 투쟁 끝에 폰투스는 패배했고, 일부는 비티니아 폰투스 속주로 로마 공화국에 편입되었고, 동쪽 절반은 속국으로 남았다.

마케도니아 정복 이후 카파도키아와 소아시아의 페르시아 식민자들은 이란 본토와 단절되었지만, 이란 신앙을 계속 실천했다.[14] 기원전 1세기 카파도키아 왕국에서 그들을 관찰한 스트라보는 (XV.3.15) 이 "불을 지피는 자들"이 많은 "페르시아 신들의 성지"와 불 사원을 가지고 있었다고 기록했다.[14] 아우구스투스 시대에 저술한 스트라보는 아케메네스 제국 멸망 후 거의 300년 만에 소아시아 서부의 페르시아인들의 흔적만을 기록했지만, 카파도키아를 "거의 살아있는 페르시아의 일부"로 간주했다.[14]

기원전 330년 알렉산드로스 대왕에 의한 아케메네스 제국 정복으로 이란의 지배력은 무너졌지만, 기원전 247년 파르티아에서 일어난 고대 이란 민족 집단에 의해 파르티아 제국이 세워지면서 곧 다시 부상했다. 파르티아 시대까지 이란 정체성은 민족적, 언어적, 종교적 가치를 지녔지만, 정치적 중요성은 없었다.[46] 파르티아 제국의 공용어였던 파르티아어는 페르시아어[47][48][49]뿐만 아니라 아르메니아어에도 영향을 미쳤다.

낙시에 루스탐의 부조. 샤푸르 1세가 발레리아누스 1세와 필리푸스 아라부스를 정복한 모습.


사산 왕조는 서기 224년 파르티아 왕조를 계승했다. 사산 제국 시대에 "옛 현자들"()의 지혜를 복원하려는 국가 문화가 형성되었다.[46] 이 국가 문화에는 영웅적인 과거의 영광과 고풍스러운 정신이 포함되었다.[46] 이 기간 동안 이란 정체성은 최고조에 달했다.[46] 중세 페르시아어[47][50][51][86]는 제국의 공용어가 되었고[52] 이란인들 사이에 널리 퍼졌다.[46]

파르티아인과 사산인들은 로마인과 광범위하게 교류했다. 로마-페르시아 전쟁과 비잔티움-사산 전쟁은 서아시아, 유럽, 카프카스, 북아프리카, 지중해 분지의 지형을 형성했다. 400년 이상 사산인과 비잔티움인은 세계의 두 주요 강국으로 인정받았다.[53][54][55] 고대 후기의 카파도키아는 여전히 중요한 이란적 특징을 유지했다. 스티븐 미첼은 ''옥스포드 고대 후기 사전''에서 "카파도키아의 많은 주민은 페르시아계였고 이란의 불 숭배는 465년까지도 확인된다"고 언급한다.[14]

아랍에 의한 사산 제국 정복 이후 아랍 칼리파들은 이 지역을 지배했고, 이란의 이슬람화 과정이 진행되었다. 우마이야 칼리파국부터 아랍 정복자들은 아랍어를 제국 전역의 주요 언어로 확립하려 했다.[56] 은 비아랍인, 특히 페르시아인을 지칭하는 용어로 채택되었다.[57] 이 용어는 경멸적인 의미를 갖게 되었지만, 점차 "페르시아인"의 동의어로 받아들여졌고,[56][58][59] 오늘날까지도 중동의 아랍 국가에 사는 페르시아어를 사용하는 공동체를 지칭하는 용어로 남아 있다.[60] 쇠퇴하는 압바스 칼리파국의 변두리에서 사마니드를 포함한 이슬람 이란 왕국들이 세워졌다. 사마니드 통치 기간 동안 페르시아어는 2세기 동안 언급이 없다가 처음으로 공식적으로 사용되었는데,[61] 아랍 문자와 많은 아랍어 어휘를 받아들였다.[62] 페르시아어와 문화는 몽골과 튀르크(일칸국, 가즈나비드, 셀주크, 호라즘샤, 티무르 포함) 침략 이후에도 계속 번성했는데, 이들은 페르시아화되었고, 소아시아, 중앙아시아, 남아시아에서 더욱 발전하여, 투르코-페르시아와 인도-페르시아 혼합 문화인 페르시아 문화권 사회의 확장을 이끌었다.



16세기에 사파비 제국의 등장으로 이란의 패권이 재건되었다.[64] 사파비 제국 아래 페르시아어와 정체성에 대한 초점이 되살아났고, 제국의 정치적 발전은 다시 한번 페르시아어를 국가의 주요 언어로 유지했다.[65] 사파비 시대와 카자르와 같은 후대의 현대 이란 왕조에서는 사산 페르시아 제국 시대의 건축 및 상징적 요소가 재도입되어 현대 이란과 고대 과거를 연결했다.[66] 팔레비 왕조 통치 기간에 이란 고대 제국의 유산에 대한 현대적인 수용은 민족주의적 자부심의 동기를 제공했다.[67] 이란의 현대 건축은 국가의 고전 시대 건축에서 영감을 받았는데, 특히 아케메네스 수도 페르세폴리스와 파사르가다이, 사산 수도 크테시폰의 고대 유적의 세부 사항을 채택했다.[68] 파르스주는 현대 수도인 쉬라즈와 함께, 쉬라즈 예술 축제와 페르시아 제국 창건 2500주년 기념 행사 기간 동안 관심의 중심이 되었다.[69] 팔레비 통치자들은 이란을 현대화했고 1979년 혁명까지 통치했다.

최근 동양사 연구에서는 광의의 "페르시아인"은 거의 사용되지 않게 되었다. 전이슬람 시대의 역사 서술에서는 고전 고대 여러 언어에서 사용된 "페르시아인"이라는 용어를 계승하여, 아케메네스 왕조(하카마니슈 왕조)와 사산 왕조 사람들을 가리키는 민족 명칭으로 "페르시아인"이 빈번하게 사용된다. 이러한 문맥에서 페르시아인은 "페르시아 제국"의 주요 구성원이었던 파르사 지방 사람들뿐만 아니라, 아케메네스 왕조와 사산 왕조의 백성이라는 의미를 포함하기도 하며, 이러한 의미에서는 서쪽의 반독립적인 변방 지역 사람들도 페르시아인으로 불리기도 한다.

3. 1. 기원과 이동 경로

페르시아인은 이란계 아리아인이다. 아리아인(Aryan)과 이란(Iran)은 같은 어원을 가진다. 기원전 1000년경 동족인 메디아인과 함께 이란고원에 이주, 메디아인이 고원의 서북부에 분포된 것에 대하여 페르시아인은 서남부의 파르사 지방(현재의 파르스 주)에 정착했다. 특히 동 아리안 유목민들은 동아시아의 유목민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3. 2. 고대 페르시아 제국

페르시아는 기원전 3000년 구 아시리아어 자료에서 로 처음 언급되며, 수메르 지역을 가리켰다.[11][34] 고대 이란 민족 유목민들이 우르미아 호 서쪽과 남서쪽으로 이주하면서 이 지역 이름이 채택되었고, 결국 "페르시아인"으로 알려지게 되었다.[11][34] 기원전 9세기 신아시리아의 살만에셀 3세의 흑색 오벨리스크 비문에는 와 로, 자그로스 산맥에 위치한 지역과 민족으로 나타난다.[35][36][37][38][39] 이 중 는 남쪽으로 이주하여 페르시스(페르시아 본토, 오늘날 파르스주)가 되었을 것으로 여겨지며, 고대 페르시아인에 대한 가장 초기의 기록으로 간주된다.[35][36][37][38][39]

고대 페르시아인들은 신아시리아 제국 멸망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40] 메디아인들은 메디아를 중심으로 제국을 이루었고, 기원전 612년경 지역의 주요 문화 및 정치적 강국이 되었다.[41] 아케메네스 왕조 아래 페르시아인들은 중앙 메디아 세력의 속국을 형성했다. 기원전 552년 아케메네스 페르시아인들은 메디아 왕국에 반란을 일으켰고, 기원전 550년 키루스 2세의 승리로 이어졌다. 페르시아인들은 이란 고원의 나머지 지역으로 영향력을 확대했고, 엘람인과 만네아인을 포함한 지역의 비이란계 토착민 집단과 동화되었다.[42]

아케메네스 제국은 최대 영토일 때 서쪽의 동유럽 일부에서 동쪽의 인더스 계곡에 이르기까지 확장되어,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제국이 되었다.[43] 아케메네스인들은 파사르가다이와 페르세폴리스 도시 건설을 포함하여 증가하는 영향력을 지원하기 위한 기반 시설을 개발했다.[44] 이 제국은 오늘날 그리스 본토의 그리스 도시 국가의 경계까지 확장되었고, 페르시아인과 아테네인들은 상호 문화 교류에서 서로에게 영향을 주었다.[45] 마케도니아 왕국에 대한 유산과 영향 또한 상당히 컸으며,[14] 그리스-페르시아 전쟁 이후 페르시아인들이 유럽에서 철수한 후에도 수세기 동안 지속되었다.[14]

아케메네스 시대에 페르시아 식민자들은 소아시아에 정착했다. 리디아(가장 중요한 아케메네스 사트라피)의 사르디스 근처에는 히르카니아 평야가 있었는데, 스트라보에 따르면 히르카니아에서 이주한 페르시아 정착민들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고 한다. 사르디스 근처에는 키루스의 평야가 있었는데, 이는 이 지역에 수많은 페르시아 정착촌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수세기 동안 리디아와 폰투스는 소아시아에서 페르시아 신들을 숭배하는 주요 중심지였다고 한다. 파우사니아스에 따르면, 서기 2세기 후반까지도 히로카이사레이아와 히파이파 마을에서 페르시아 불 축제와 유사한 의식을 볼 수 있었다. 페르시아 귀족이자 키우스 마을의 페르시아 지배 엘리트의 일원이었던 키우스의 미트리다테스 3세는 후에 소아시아 북부에 폰투스 왕국을 세웠다. 미트리다테스 6세 치하에서 폰투스 왕국은 콜키스, 카파도키아, 비티니아, 그리스 식민지 타우리카 크리소네소스, 그리고 잠시 로마 속주 아시아를 지배했다. 미트리다테스 전쟁에서 로마와의 오랜 투쟁 끝에 폰투스는 패배했고, 그 일부는 비티니아 폰투스 속주로 로마 공화국에 편입되었고, 동쪽 절반은 속국으로 남았다.

마케도니아 정복 이후 카파도키아와 소아시아의 나머지 지역에 있는 페르시아 식민자들은 이란 본토의 동종교인들과 단절되었지만, 조상들의 이란 신앙을 계속해서 실천했다. 기원전 1세기 카파도키아 왕국에서 그들을 관찰한 스트라보는 (XV.3.15) 이 "불을 지피는 자들"이 많은 "페르시아 신들의 성지"와 불 사원을 가지고 있었다고 기록했다. 아우구스투스 시대에 저술한 스트라보는 아케메네스 페르시아 제국 멸망 후 거의 300년 만에 소아시아 서부의 페르시아인들의 흔적만을 기록했지만, 카파도키아를 "거의 살아있는 페르시아의 일부"로 간주했다.

기원전 330년 알렉산드로스 대왕에 의한 아케메네스 제국의 정복으로 이란의 지배력은 무너졌지만, 기원전 247년 파르티아에서 일어난 고대 이란 민족 집단에 의해 파르티아 제국이 세워지면서 곧 다시 부상했다. 파르티아 시대까지 이란 정체성은 민족적, 언어적, 종교적 가치를 지녔다. 그러나 아직 정치적 중요성은 없었다.[46] 파르티아 제국의 공용어였던 파르티아어는 페르시아어[47][48][49]뿐만 아니라 인접한 아르메니아어에도 영향을 미쳤다.

파르티아 왕조는 서기 224년 페르시아 사산 왕조에 의해 계승되었다. 사산 제국 시대가 되자, "옛 현자들"()의 지혜를 복원하고 부흥시키려는 동기로 이란인임을 충분히 인식하는 국가 문화가 형성되었다.[46] 이 국가 문화의 다른 측면에는 위대한 영웅적인 과거의 영광과 고풍스러운 정신이 포함되었다.[46] 이 기간 동안 이란 정체성은 모든 측면에서 최고조에 달했다.[46] 현대 페르시아어의 직계 조상이자 다른 여러 이란 방언의 하나인 중세 페르시아어[47][50][51][86]는 제국의 공용어가 되었고[52] 이란인들 사이에 널리 퍼졌다.[46]

파르티아인과 사산인들은 문화적으로 로마인과 광범위하게 교류했다. 로마-페르시아 전쟁과 비잔티움-사산 전쟁은 수세기 동안 서아시아, 유럽, 카프카스, 북아프리카, 지중해 분지의 지형을 형성했다. 400년 이상 사산인과 이웃 비잔티움인은 세계의 두 주요 강국으로 인정받았다.[53][54][55] 로마 시대에 접어든 고대 후기의 카파도키아는 여전히 중요한 이란적 특징을 유지했다. 스티븐 미첼은 ''옥스포드 고대 후기 사전''에서 "카파도키아의 많은 주민은 페르시아계였고 이란의 불 숭배는 465년까지도 확인된다"고 언급한다.

중세 시대 아랍에 의한 사산 제국의 정복 이후 아랍 칼리파들은 다음 수세기 동안 이 지역을 지배했고, 그 기간 동안 이란의 이슬람화의 긴 과정이 진행되었다. 페르시아의 문화적, 언어적 지배에 맞서, 우마이야 칼리파국부터 시작하여 아랍 정복자들은 제국 전역의 피정복민들의 주요 언어로 아랍어를 확립하기 시작했는데, 때로는 강압적으로 하여 지역에 대한 새로운 정치적 현실을 더욱 확고히 했다.[56] "제대로 말할 수 없는 사람들"을 의미하는 아랍어 용어 은 비아랍인(또는 비아랍어 사용자), 특히 페르시아인을 지칭하는 용어로 채택되었다.[57] 이 용어는 경멸적인 의미를 갖게 되고 문화적, 민족적 열등을 의미했지만, 점차 "페르시아인"의 동의어로 받아들여졌고[56][58][59] 오늘날까지도 중동의 현대 아랍 국가에 사는 페르시아어를 사용하는 공동체를 지칭하는 용어로 남아 있다.[60] 이후 쇠퇴하는 압바스 칼리파국의 변두리에서 일련의 이슬람 이란 왕국들이 세워졌는데, 9세기 사마니드가 그중 하나이다. 사마니드 통치 기간 동안 페르시아어는 2세기 동안 언급이 없다가 처음으로 공식적으로 사용되었는데,[61] 이제 아랍 문자와 많은 아랍어 어휘를 받아들였다.[62]

페르시아어와 문화는 몽골과 튀르크( 일칸국, 가즈나비드, 셀주크, 호라즘샤, 티무르 포함)의 침략과 정복 이후에도 계속해서 번성했는데, 이들은 스스로 상당히 페르시아화되었고, 소아시아, 중앙아시아, 남아시아에서 더욱 발전하여, 특히 투르코-페르시아와 인도-페르시아 혼합 문화인 페르시아 문화권 사회의 확장으로 페르시아 문화가 번성했다.

16세기에 사파비 제국의 등장으로 이란의 패권이 재건되었다.[64] 사파비 제국 아래 페르시아어와 정체성에 대한 초점이 더욱 되살아났고, 제국의 정치적 발전은 다시 한번 페르시아어를 국가의 주요 언어로 유지했다.[65]

전이슬람 시대의 역사 서술에서는 고전 고대 여러 언어에서 사용된 "페르시아인"이라는 용어를 계승하여, 아케메네스 왕조(하카마니슈 왕조)와 사산 왕조 사람들을 가리키는 민족 명칭으로 "페르시아인"이 빈번하게 사용된다. 이러한 문맥에서 페르시아인은 "페르시아 제국"의 주요 구성원이었던 파르사 지방 사람들뿐만 아니라, 아케메네스 왕조와 사산 왕조의 백성이라는 의미를 포함하기도 하며, 이러한 의미에서는 서쪽의 반독립적인 변방 지역 사람들도 페르시아인으로 불리기도 한다.

최근에는 아케메네스 왕조사, 사산 왕조사의 서술에서는 각 제국에 관련된 각 집단을 엄밀하게 정의하여 구분하고, 전체를 모호하게 페르시아인이라고 하는 경우는 줄어드는 경향이 보인다. 이러한 배경에는 연구의 심화와 기존의 근대 유럽의 동양 연구에서 동양과 서양을 대립시키고, 동양을 비보편적인 것으로 위치 지우는 오리엔탈리즘적인 시각에 대한 비판이 존재한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일본에서 동쪽의 관점에서 "페르시아인"을 이야기할 때는, 예를 들어 정창원의 중앙아시아 전래의 보물에 대한 낭만주의와 결합하여, 멀리 실크로드 저편에서 온 환상적인 사람들, "천평의 페르시아인"이라는 이미지가 부여되기 쉽고, 고대의 "페르시아인"은 실크로드 이미지와 강하게 연결되어 버렸다.

21세기 전후부터 일본의 동양학(중앙아시아사, 중앙유라시아사, 인도사) 연구에서는 실크로드의 서술은 중국과 로마·페르시아 간의 동서 장거리 무역을 강조하여 중앙아시아를 단순한 통과 지점으로 보는 시각에 치우쳐 있으며, 실제로는 오아시스 간·남북 무역도 성행했던 중앙아시아사의 실제를 잘못 파악하게 만드는 것이라는 비판을 견딜 수 없게 되었다. 이러한 사정으로 현재 동양사 연구에서는 광의의 "페르시아인"은 거의 사용되지 않게 되었다.

3. 3. 파르티아와 사산 제국

페르시아는 기원전 3천년기 아시리아 자료에서 구 아시리아어 형태인 로 처음 언급되며, 수메르 지역의 한 곳을 가리킨다.[11][34] 이 지역의 이름은 고대 이란 민족 유목민들이 우르미아 호 서쪽과 남서쪽으로 이주하면서 채택되었고, 결국 "페르시아인"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기원전 9세기 신아시리아의 살만에셀 3세의 흑색 오벨리스크 비문에는 님루드에서 발견되었는데, 후기 아시리아어 형태인 와 로, 자그로스 산맥에 위치한 지역과 민족으로 나타낸다. 이 중 는 남쪽으로 이주하여 지역 이름을 페르시스(페르시아 본토, 즉 오늘날 파르스주)로 가져왔을 것으로 여겨지며, 이것이 고대 페르시아인에 대한 가장 초기의 기록으로 간주된다.[35][36][37][38][39]

고대 페르시아인들은 신아시리아 제국 멸망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40] 또 다른 고대 이란 민족인 메디아인들은 메디아를 중심으로 한 제국 아래 이 지역을 통일했고, 기원전 612년경 당시 지역의 주요 문화 및 정치적 강국이 되었다.[41] 아케메네스 왕조 아래 페르시아인들은 중앙 메디아 세력의 속국을 형성했다. 기원전 552년 아케메네스 페르시아인들은 메디아 왕국에 반란을 일으켰고, 기원전 550년 키루스 2세의 승리로 이어졌다. 페르시아인들은 그들의 영향력을 이란 고원의 나머지 지역으로 확대했고, 엘람인과 만네아인을 포함한 지역의 비이란계 토착민 집단과 동화되었다.[42]

아케메네스 제국은 최대 영토일 때 서쪽의 동유럽 일부에서 동쪽의 인더스 계곡에 이르기까지 확장되어, 세계에서 그때까지 볼 수 없었던 가장 큰 제국이 되었다.[43] 아케메네스인들은 파사르가다이와 페르세폴리스 도시 건설을 포함하여 증가하는 영향력을 지원하기 위한 기반 시설을 개발했다.[44] 이 제국은 오늘날 그리스 본토의 그리스 도시 국가의 경계까지 확장되었고, 페르시아인과 아테네인들은 상호 문화 교류에서 서로에게 영향을 주었다.[45] 마케도니아 왕국에 대한 유산과 영향 또한 상당히 컸으며,[14] 그리스-페르시아 전쟁 이후 페르시아인들이 유럽에서 철수한 후에도 수세기 동안 지속되었다.[14]

기원전 330년 알렉산드로스 대왕에 의한 아케메네스 제국의 정복으로 이란의 지배력은 무너졌지만, 기원전 247년 파르티아에서 일어난 고대 이란 민족 집단에 의해 파르티아 제국이 세워지면서 곧 다시 부상했다. 파르티아 시대까지 이란 정체성은 민족적, 언어적, 종교적 가치를 지녔다. 그러나 아직 정치적 중요성은 없었다.[46] 파르티아 제국의 공용어였던 파르티아어는 페르시아어[47][48][49]뿐만 아니라 인접한 아르메니아어에도 영향을 미쳤다.

파르티아 왕조는 서기 224년 페르시아 사산 왕조에 의해 계승되었다. 사산 제국 시대가 되자, "옛 현자들"()의 지혜를 복원하고 부흥시키려는 동기로 이란인임을 충분히 인식하는 국가 문화가 형성되었다.[46] 이 국가 문화의 다른 측면에는 위대한 영웅적인 과거의 영광과 고풍스러운 정신이 포함되었다.[46] 이 기간 동안 이란 정체성은 모든 측면에서 최고조에 달했다.[46] 현대 페르시아어의 직계 조상이자 다른 여러 이란 방언의 하나인 중세 페르시아어[47][50][51][86]는 제국의 공용어가 되었고[52] 이란인들 사이에 널리 퍼졌다.[46]

파르티아인과 사산인들은 문화적으로 로마인과 광범위하게 교류했다. 로마-페르시아 전쟁과 비잔티움-사산 전쟁은 수세기 동안 서아시아, 유럽, 카프카스, 북아프리카, 지중해 분지의 지형을 형성했다. 400년 이상 사산인과 이웃 비잔티움인은 세계의 두 주요 강국으로 인정받았다.[53][54][55]

3. 4. 이슬람 시대

페르시아는 기원전 3천년기 아시리아 자료에서 처음으로 언급되는데, 구 아시리아어 형태인 로, 수메르 지역에 속한 지역을 가리킨다.[11][34] 기원전 9세기 신아시리아의 살만에셀 3세의 흑색 오벨리스크 비문은 님루드에서 발견되었는데, 후기 아시리아어 형태인 와 로, 자그로스 산맥에 위치한 지역과 민족으로 나타낸다.[35][36][37][38][39]

알렉산드로스 대왕에 의한 아케메네스 제국의 정복으로 이란의 지배력은 무너졌지만, 기원전 247년 파르티아에서 일어난 고대 이란 민족 집단에 의해 파르티아 제국이 세워지면서 곧 다시 부상했다. 파르티아 시대까지 이란 정체성은 민족적, 언어적, 종교적 가치를 지녔다. 그러나 아직 정치적 중요성은 없었다.[46] 파르티아 왕조는 서기 224년 페르시아 사산 왕조에 의해 계승되었다. 사산 제국 시대가 되자, "옛 현자들"()의 지혜를 복원하고 부흥시키려는 동기로 이란인임을 충분히 인식하는 국가 문화가 형성되었다.[46] 이 국가 문화의 다른 측면에는 위대한 영웅적인 과거의 영광과 고풍스러운 정신이 포함되었다.[46]

파르티아인과 사산인들은 문화적으로 로마인과 광범위하게 교류했다. 로마-페르시아 전쟁과 비잔티움-사산 전쟁은 수세기 동안 서아시아, 유럽, 카프카스, 북아프리카, 지중해 분지의 지형을 형성했다. 400년 이상 사산인과 이웃 비잔티움인은 세계의 두 주요 강국으로 인정받았다.[53][54][55]

중세 시대 아랍에 의한 사산 제국의 정복 이후 아랍 칼리파들은 다음 수세기 동안 이 지역을 지배했고, 그 기간 동안 이란의 이슬람화의 긴 과정이 진행되었다. 페르시아의 문화적, 언어적 지배에 맞서, 우마이야 칼리파국부터 시작하여 아랍 정복자들은 제국 전역의 피정복민들의 주요 언어로 아랍어를 확립하기 시작했는데, 때로는 강압적으로 하여 지역에 대한 새로운 정치적 현실을 더욱 확고히 했다.[56] "제대로 말할 수 없는 사람들"을 의미하는 아랍어 용어 은 비아랍인(또는 비아랍어 사용자), 특히 페르시아인을 지칭하는 용어로 채택되었다.[57] 이후 쇠퇴하는 압바스 칼리파국의 변두리에서 일련의 이슬람 이란 왕국들이 세워졌는데, 9세기 사마니드가 그중 하나이다. 사마니드 통치 기간 동안 페르시아어는 2세기 동안 언급이 없다가 처음으로 공식적으로 사용되었는데,[61] 이제 아랍 문자와 많은 아랍어 어휘를 받아들였다.[62]

사파비 왕조 이후의 이란, 샤이바니 왕조 이후의 중앙아시아에서는 튀르크와 "페르시아인"의 혼주가 진행되었다. 이 시기에는 사파비 왕조가 시아파를 국교로 삼은 것에 반해 샤이바니 왕조 이하는 수니파에 머물렀던 것처럼, 이란 세계에서 동서의 이분화가 진행되어 근세 초기에는 옛 "페르시아인"은 이란에서는 이란인, 중앙아시아에서는 사르트라고 불리게 되었다.

20세기에 이란, 소비에트 연방이 형성되면서, 이렇게 모호해지고 있던 "페르시아인"은 모어를 주된 척도로 하여 다시 민족으로서 구별되게 되었다.

3. 5. 근현대

페르시아는 기원전 3천년기 아시리아 자료에서 구 아시리아어 형태인 로 처음 언급되며, 수메르 지역의 한 곳을 가리킨다.[11][34] 기원전 9세기 신아시리아의 살만에셀 3세의 흑색 오벨리스크 비문에는 와 로 자그로스 산맥에 위치한 지역과 민족으로 나타난다.[35][36][37][38][39] 이란계 민족들이 우르미아 호 서쪽과 남서쪽으로 이주하면서 "페르시아인"으로 알려지게 되었고, 남쪽으로 이주한 이들은 지역 이름을 함께 가져와 페르시스(페르시아 본토, 즉 오늘날 파르스주)가 되었다.[35][36][37][38][39]

고대 페르시아인들은 신아시리아 제국 멸망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40] 메디아인들은 메디아를 중심으로 제국을 통일했고, 기원전 612년경 지역의 주요 문화 및 정치 강국이 되었다.[41] 아케메네스 왕조 아래 페르시아인들은 메디아의 속국이었다가 기원전 552년 반란을 일으켜 기원전 550년 키루스 2세의 승리로 이어졌다. 페르시아인들은 이란 고원의 나머지 지역으로 영향력을 확대했고, 엘람인과 만네아인을 포함한 비이란계 토착민 집단과 동화되었다.[42]

아케메네스 제국은 서쪽의 동유럽 일부에서 동쪽의 인더스 계곡에 이르기까지 확장되어,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제국이었다.[43] 파사르가다이와 페르세폴리스 건설을 포함하여 증가하는 영향력을 지원하기 위한 기반 시설을 개발했다.[44] 제국은 그리스 도시 국가 경계까지 확장되었고, 페르시아인과 아테네인들은 상호 문화 교류에서 서로에게 영향을 주었다.[45] 마케도니아 왕국에 대한 유산과 영향은 그리스-페르시아 전쟁 이후에도 수세기 동안 지속되었다.[14]

아케메네스 시대에 페르시아 식민자들은 소아시아에 정착했다.[14] 리디아의 사르디스 근처 히르카니아 평야는 스트라보에 따르면 히르카니아에서 이주한 페르시아 정착민들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 사르디스 근처 키루스의 평야는 이 지역에 수많은 페르시아 정착촌이 있었음을 보여준다.[14] 리디아와 폰투스는 소아시아에서 페르시아 신들을 숭배하는 주요 중심지였다.[14] 파우사니아스에 따르면, 서기 2세기 후반까지도 히로카이사레이아와 히파이파에서 페르시아 불 축제와 유사한 의식을 볼 수 있었다.[14] 키우스의 미트리다테스 3세는 폰투스 왕국을 세웠고, 미트리다테스 6세 대왕 치하에서 폰투스 왕국은 콜키스, 카파도키아, 비티니아, 그리스 식민지 타우리카 크리소네소스, 로마 속주 아시아를 지배했다. 미트리다테스 전쟁에서 로마와의 오랜 투쟁 끝에 폰투스는 패배했고, 일부는 비티니아 폰투스 속주로 로마 공화국에 편입되었고, 동쪽 절반은 속국으로 남았다.

마케도니아 정복 이후 카파도키아와 소아시아의 페르시아 식민자들은 이란 본토와 단절되었지만, 이란 신앙을 계속 실천했다.[14] 기원전 1세기 카파도키아 왕국에서 그들을 관찰한 스트라보는 (XV.3.15) 이 "불을 지피는 자들"이 많은 "페르시아 신들의 성지"와 불 사원을 가지고 있었다고 기록했다.[14] 아우구스투스 시대에 저술한 스트라보는 아케메네스 제국 멸망 후 거의 300년 만에 소아시아 서부의 페르시아인들의 흔적만을 기록했지만, 카파도키아를 "거의 살아있는 페르시아의 일부"로 간주했다.[14]

기원전 330년 알렉산드로스 대왕에 의한 아케메네스 제국 정복으로 이란의 지배력은 무너졌지만, 기원전 247년 파르티아에서 일어난 고대 이란 민족 집단에 의해 파르티아 제국이 세워지면서 곧 다시 부상했다. 파르티아 시대까지 이란 정체성은 민족적, 언어적, 종교적 가치를 지녔지만, 정치적 중요성은 없었다.[46] 파르티아 제국의 공용어였던 파르티아어는 페르시아어[47][48][49]뿐만 아니라 아르메니아어에도 영향을 미쳤다.

사산 왕조는 서기 224년 파르티아 왕조를 계승했다. 사산 제국 시대에 "옛 현자들"()의 지혜를 복원하려는 국가 문화가 형성되었다.[46] 이 국가 문화에는 영웅적인 과거의 영광과 고풍스러운 정신이 포함되었다.[46] 이 기간 동안 이란 정체성은 최고조에 달했다.[46] 중세 페르시아어[47][50][51][86]는 제국의 공용어가 되었고[52] 이란인들 사이에 널리 퍼졌다.[46]

파르티아인과 사산인들은 로마인과 광범위하게 교류했다. 로마-페르시아 전쟁과 비잔티움-사산 전쟁은 서아시아, 유럽, 카프카스, 북아프리카, 지중해 분지의 지형을 형성했다. 400년 이상 사산인과 비잔티움인은 세계의 두 주요 강국으로 인정받았다.[53][54][55] 고대 후기의 카파도키아는 여전히 중요한 이란적 특징을 유지했다. 스티븐 미첼은 ''옥스포드 고대 후기 사전''에서 "카파도키아의 많은 주민은 페르시아계였고 이란의 불 숭배는 465년까지도 확인된다"고 언급한다.[14]

아랍에 의한 사산 제국 정복 이후 아랍 칼리파들은 이 지역을 지배했고, 이란의 이슬람화 과정이 진행되었다. 우마이야 칼리파국부터 아랍 정복자들은 아랍어를 제국 전역의 주요 언어로 확립하려 했다.[56] 은 비아랍인, 특히 페르시아인을 지칭하는 용어로 채택되었다.[57] 이 용어는 경멸적인 의미를 갖게 되었지만, 점차 "페르시아인"의 동의어로 받아들여졌고,[56][58][59] 오늘날까지도 중동의 아랍 국가에 사는 페르시아어를 사용하는 공동체를 지칭하는 용어로 남아 있다.[60] 쇠퇴하는 압바스 칼리파국의 변두리에서 사마니드를 포함한 이슬람 이란 왕국들이 세워졌다. 사마니드 통치 기간 동안 페르시아어는 2세기 동안 언급이 없다가 처음으로 공식적으로 사용되었는데,[61] 아랍 문자와 많은 아랍어 어휘를 받아들였다.[62] 페르시아어와 문화는 몽골과 튀르크(일칸국, 가즈나비드, 셀주크, 호라즘샤, 티무르 포함) 침략 이후에도 계속 번성했는데, 이들은 페르시아화되었고, 소아시아, 중앙아시아, 남아시아에서 더욱 발전하여, 투르코-페르시아와 인도-페르시아 혼합 문화인 페르시아 문화권 사회의 확장을 이끌었다.

16세기에 사파비 제국의 등장으로 이란의 패권이 재건되었다.[64] 사파비 제국 아래 페르시아어와 정체성에 대한 초점이 되살아났고, 제국의 정치적 발전은 다시 한번 페르시아어를 국가의 주요 언어로 유지했다.[65] 사파비 시대와 카자르와 같은 후대의 현대 이란 왕조에서는 사산 페르시아 제국 시대의 건축 및 상징적 요소가 재도입되어 현대 이란과 고대 과거를 연결했다.[66] 팔레비 왕조 통치 기간에 이란 고대 제국의 유산에 대한 현대적인 수용은 민족주의적 자부심의 동기를 제공했다.[67] 이란의 현대 건축은 국가의 고전 시대 건축에서 영감을 받았는데, 특히 아케메네스 수도 페르세폴리스와 파사르가다이, 사산 수도 크테시폰의 고대 유적의 세부 사항을 채택했다.[68] 파르스주는 현대 수도인 쉬라즈와 함께, 쉬라즈 예술 축제와 페르시아 제국 창건 2500주년 기념 행사 기간 동안 관심의 중심이 되었다.[69] 팔레비 통치자들은 이란을 현대화했고 1979년 혁명까지 통치했다.

4. 인류학

현대 이란에서는 페르시아인이 인구 대다수를 차지한다.[3] 그들은 이란어의 현대 방언을 모국어로 사용하며,[70] 이는 국가의 공식 언어로 사용된다.[71]

==== 분포 및 인구 ====

페르시아인을 비롯한 이란계 민족은 아프가니스탄, 타지키스탄, 우즈베키스탄, 파키스탄, 신장웨이우얼 자치구 등 여러 지역에 거주한다. 코카서스에는 타트족이라는 이란계 민족이 거주하며, 러시아,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외에도 미국, 아랍에미리트, 독일,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등지에도 페르시아인이 거주한다.

==== 언어 ====

고대 페르시아어가 설형문자로 새겨진 베히스툰 비문.


페르시아어는 인도유럽어족의 이란어군에 속하는 서이란어군에 속한다. 현대 페르시아어는 사산조 페르시아 제국의 공식 종교 및 문학 언어였던 중세 페르시아어의 계승 언어로 분류되며, 중세 페르시아어는 아케메네스 제국 시대에 사용되었던 고대 페르시아어의 계승 언어이다.[51][47][50] 고대 페르시아어는 원문으로 전해지는 가장 오래된 인도유럽어 중 하나이다.[50] 고대 페르시아어 샘플은 현재의 이란, 아르메니아, 이집트, 이라크, 루마니아 (게를라), 그리고 튀르키예에서 발견되었다.[72] 고대 페르시아어로 쓰여진 가장 오래된 기록물은 베히스툰 비문[73]이며, 이것은 아케메네스 제국의 통치자 다리우스 대왕 시대의 여러 언어로 된 비문으로 이란 서부의 절벽에 새겨져 있다.

==== 관련 민족 ====

이란, 아프가니스탄, 타지키스탄, 우즈베키스탄, 코카서스, 터키, 이라크 및 페르시아만 아랍 국가들에 주로 거주하는 여러 민족 집단과 공동체는 페르시아인과 인종적 또는 언어적으로 관련이 있다.[74]

타지크인타지키스탄, 아프가니스탄, 우즈베키스탄 출신의 민족으로, 다양한 방언의 페르시아어를 사용한다.[16] 타트족은 코카서스(주로 아제르바이잔 공화국러시아의 다게스탄 공화국에 거주) 출신의 이란계 민족으로, 타트어를 사용한다.[75] 루르족은 이란 서부 출신의 이란계 민족으로, 종종 페르시아인과 쿠르드족과 관련이 있으며,루리어를 사용한다.[83][84] 아프가니스탄에서 세 번째로 큰 민족 집단을 구성하는 하자라족[87][88][89]과 반유목민족인 아이막족[93]다리어 방언 연속체의 일부인 페르시아어 (하자라기어, 아이마키)를 사용한다.[90][70] 현대 아랍 국가 출신의 페르시아어 사용 공동체는 일반적으로 바레인 아잠, 이라크 아잠, 쿠웨이트 아잠을 포함하여 ''아잠''으로 지칭된다.[60] 파르시족은 사산조 페르시아 제국 멸망 후 종교 박해를 피해 남아시아로 이주한 페르시아계 조로아스터교 공동체이다.[95]

4. 1. 분포 및 인구

페르시아인을 비롯한 이란계 민족은 아프가니스탄, 타지키스탄, 우즈베키스탄, 파키스탄, 신장웨이우얼 자치구 등 여러 지역에 거주한다. 코카서스에는 타트족이라는 이란계 민족이 거주하며, 러시아,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외에도 미국, 아랍에미리트, 독일,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등지에도 페르시아인이 거주한다.

4. 2. 언어



페르시아어는 인도유럽어족의 이란어군에 속하는 서이란어군에 속한다. 현대 페르시아어는 사산조 페르시아 제국의 공식 종교 및 문학 언어였던 중세 페르시아어의 계승 언어로 분류되며, 중세 페르시아어는 아케메네스 제국 시대에 사용되었던 고대 페르시아어의 계승 언어이다.[51][47][50] 고대 페르시아어는 원문으로 전해지는 가장 오래된 인도유럽어 중 하나이다.[50] 고대 페르시아어 샘플은 현재의 이란, 아르메니아, 이집트, 이라크, 루마니아 (게를라), 그리고 튀르키예에서 발견되었다.[72] 고대 페르시아어로 쓰여진 가장 오래된 기록물은 베히스툰 비문[73]이며, 이것은 아케메네스 제국의 통치자 다리우스 대왕 시대의 여러 언어로 된 비문으로 이란 서부의 절벽에 새겨져 있다.

4. 3. 관련 민족

이란, 아프가니스탄, 타지키스탄, 우즈베키스탄, 코카서스, 터키, 이라크 및 페르시아만 아랍 국가들에 주로 거주하는 여러 민족 집단과 공동체는 페르시아인과 인종적 또는 언어적으로 관련이 있다.[74]

타지크인타지키스탄, 아프가니스탄, 우즈베키스탄 출신의 민족으로, 다양한 방언의 페르시아어를 사용한다.[16] 타트족은 코카서스(주로 아제르바이잔 공화국러시아의 다게스탄 공화국에 거주) 출신의 이란계 민족으로, 타트어를 사용한다.[75] 루르족은 이란 서부 출신의 이란계 민족으로, 종종 페르시아인과 쿠르드족과 관련이 있으며,루리어를 사용한다.[83][84] 아프가니스탄에서 세 번째로 큰 민족 집단을 구성하는 하자라족[87][88][89]과 반유목민족인 아이막족[93]다리어 방언 연속체의 일부인 페르시아어 (하자라기어, 아이마키)를 사용한다.[90][70] 현대 아랍 국가 출신의 페르시아어 사용 공동체는 일반적으로 바레인 아잠, 이라크 아잠, 쿠웨이트 아잠을 포함하여 ''아잠''으로 지칭된다.[60] 파르시족은 사산조 페르시아 제국 멸망 후 종교 박해를 피해 남아시아로 이주한 페르시아계 조로아스터교 공동체이다.[95]

5. 문화

고대 이란의 페르시아와 메디아 제국, 아케메네스 제국, 파르티아 제국, 사산 제국에서부터 인접한 그리스 도시 국가와 마케도니아 왕국[99][14]을 거쳐 중세 이슬람 세계[103][100]에 이르기까지, 현대 이란과 유라시아의 다른 지역[101][102][103][104]에 이르기까지 페르시아 문화는 확장되고, 기념되고, 통합되어 왔다. 이는 주로 페르시아의 지정학적 조건과 아케메네스 제국만큼이나 강력했던 끊임없이 변화하는 정치적 환경과의 복잡한 관계 때문이다.

페르시아인들의 예술적 유산은 절충적이며 동서양의 기여를 포함하고 있다. 이란의 중심적인 위치 때문에 페르시아 미술은 동양과 서양 전통의 융합 지점 역할을 해왔다. 페르시아인들은 서예, 카펫 짜기, 유리 공예, 칠기, 상감 세공(카탐), 금속 세공, 미니어처 삽화, 모자이크, 도자기, 직물 디자인 등 다양한 예술 형태에 기여해왔다.[105]

5. 1. 예술

5. 2. 문학

페르시아어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고 영향력 있는 문학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106] 기원전 6세기부터 4세기 사이의 여러 비문에 고대 페르시아어로 쓰인 작품들이 남아 있으며, 파르티아와 사산조 시대의 비문과 기원 3세기부터 10세기 사이의 조로아스터교마니교 경전에서 중세 페르시아 문학이 확인된다. 신페르시아 문학은 아랍의 이란 정복 이후 9세기부터 번영했으며,[107] 많은 동방 궁정에서 궁정 전통으로 발전했다.[106]

피르다우시의 ''샤흐나메'', 루미의 작품, 오마르 핫얌의 ''루바이야트'', 니자미 간자비의 ''판지 간지'', 하피즈의 ''디완'', 니샤푸르의 아타르의 ''새들의 회의'', 그리고 사아디 시라지의 ''굴리스탄''과 ''부스탄'' 등의 잡문집은 중세 페르시아 문학의 유명한 작품들 중 하나이다. 아흐마드 샴루, 푸르그 파룩자드, 메디 아크반 살레스, 파르빈 에테사미, 사데크 헤다야트, 시민 다네슈바르 등 작가들의 작품에 의해 번영하는 현대 페르시아 문학도 형성되었다.

모든 페르시아 문학이 페르시아어로 쓰인 것은 아니다. 아랍어나 그리스어와 같은 다른 언어로 페르시아인들이 쓴 작품들도 포함될 수 있다. 동시에 페르시아어로 쓰인 모든 문학이 민족적으로 페르시아인이나 이란인에 의해 쓰인 것은 아니다. 투르크계, 코카서스계, 인도계 작가들도 페르시아 문화권 환경에서 페르시아 문학을 사용했다.

5. 3. 건축

고대 페르시아 건축의 가장 주목할 만한 사례는 페르시아 출신 아케메네스 왕조의 작품들이다. 기원전 550년경 제국의 확장과 함께 시작된 아케메네스 제국 건축은 키루스 2세의 엄숙한 무덤이 있는 파사르가데부터 페르세폴리스와 낙시 루스탐의 구조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유산을 남긴 예술적 성장의 시대에 번영하였다.[108] 밤 성채는 실크로드에 있는 밤에 건설된 194,000 제곱미터 규모의 거대한 구조물로 기원전 5세기경의 것이다.[109] 아케메네스 건축의 본질적인 특징은 메디아 건축, 아시리아 건축, 아시아 그리스 건축의 요소들이 모두 통합된 절충적인 성격이다.[110]

사산 왕조 건축 유산에는 데르벤트 요새(현재 러시아의 일부인 북카프카스에 위치), 루드칸 성, 샤푸르-크바스트 성과 같은 성곽 요새, 아르다시르 궁전, 사르베스탄 궁전과 같은 궁전, 샤흐레스탄 다리, 샤푸리 다리와 같은 다리, 크테시폰 아치 그리고 탁에보스탄의 부조 등이 포함된다.

이란 고대 페르시아 제국 시대의 건축 요소는 후대에도 채택되어 통합되었다.[66] 특히 파흘라비 왕조 통치하에 이란의 근대화 과정에서 고대 역사를 지닌 현대 국가의 특징을 나타내는 데 사용되었다.[67][68]

크세노폰은 그의 저서 ''경제론''[111]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를 조성하여 토지가 생산하는 좋은 것들과 아름다운 것들로 가득 채웠다."}}

페르시아 정원은 아케메네스 제국 전역에서 발견된 가장 초기의 예시로, 페르시아 건축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112] 정원은 아케메네스 왕조의 군주들에게 중요한 장소였으며,[111] 수로, 최초로 기록된 중력식 물줄기, 기하학적 시스템으로 배열된 분지 등 발전된 아케메네스 시대의 수자원 기술을 활용했다.[113] 궁전과 같은 인프라에 의해 이러한 대칭적으로 배열된 식재와 관개 시설을 둘러쌈으로써 "낙원"의 인상을 만들어냈다.[114] "낙원"이라는 단어 자체는 아베스타어 (고대 페르시아어 ; 현대 페르시아어 , )에서 유래했으며, 문자 그대로 "담으로 둘러싸인 곳"으로 번역된다. 4분원형 (''čārbāq'') 설계가 특징인 페르시아 정원은 역사를 통틀어 다양한 형태로 발전되어 왔으며,[111] 유라시아의 여러 다른 문화권에서도 채택되었다. 2011년 6월 유네스코의 세계유산 목록에 등재되었다.

5. 4. 카펫

카펫 직조는 페르시아 문화의 중요한 부분이며, 페르시아 카펫은 가장 정교한 수공예 예술품 중 하나로 여겨진다.[115]

아케메네스 제국의 카펫과 양탄자 예술은 잘 알려져 있다. 크세노폰사르디스 도시의 카펫 생산을 묘사하며, 현지인들이 카펫 생산을 자랑스러워한다고 기술했다. 아테네우스 또한 그의 저서 『Deipnosophistae』에서 "우스꽝스러운 모양의 그리핀"이 있는 "매우 정교하게 수놓은" 페르시아 카펫을 언급했다.[116]

파지르크 카펫은 기원전 4세기의 스키타이족 융단으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기존 카펫으로 여겨지며, 페르시아 왕궁 건물에서 발견되는 석판 디자인의 스타일리쉬한 참고 자료를 포함한 아시리아와 아케메네스 디자인의 요소들을 보여준다.[116]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된 페르시아 카펫.

5. 5. 음악

크세노폰의 기록에 따르면, 아케메네스 왕조의 궁정에는 많은 가수들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시대의 음악에 대한 정보는 거의 없다. 사산 왕조 시대의 음악은 이전 시대보다 더 많고 자세한 기록이 있으며, 특히 조로아스터교 음악 의례의 맥락에서 더욱 분명하다.[117] 전반적으로, 사산 왕조 음악은 영향력이 컸고 후대에 이어졌다.[118]

5세기에서 7세기 사이 사산 왕조 시대의 은그릇에 묘사된 무용수들과 악기 연주자들.


이란 음악은 전체적으로 그 지역 고유의 다양한 악기를 사용하며, 고대와 중세 이후로 놀랍도록 발전해 왔다. 전통 사산 왕조 음악에서는 옥타브가 17개의 음으로 나뉘었다. 13세기 말까지 이란 음악은 서양 음악과 유사한 12음계 옥타브를 유지했다.[119]

5. 6. 명절

이란의 설날노루즈(Nowruz)는 "새로운 날"이라는 뜻으로, 페르시아인들과 이란의 다른 민족들이 춘분(March equinox)에 해당하는 이란력의 첫 번째 달인 파르바르딘(Farvardin) 첫날(그레고리력으로 3월 21일 경)에 봄의 시작을 기념하기 위해 지킨다. 고대 이란 제국의 영향을 받았던 이란과 여러 다른 국가들에서 전해 내려오는 오래된 전통인[120][121] 노루즈는 유네스코의 무형문화유산 목록에 등재되었다.[122] 이란에서는 노루즈 축제(차르샨베 수리와 시즈데베다르 포함)가 이란력으로 전년도 마지막 수요일 저녁부터 새해 13일까지 이어진다. 이슬람 축제 또한 무슬림 페르시아인들 사이에 널리 기념된다.

5. 7. 대한민국과의 관계

덴표(天平) 8년(736년) 8월 23일 조의 『일본후기(続日本紀)』 기록에 따르면, 당나라로 사신을 보낸 부사가 귀국할 때 당나라 사람 3명과 이밀애(李密翳)라는 페르시아인 1명을 데리고 천황에게 알현했다는 기록이 있다.[123] 나라시(奈良市)의 헤이조쿄(平城京) 유적(식부성(式部省) 유적)에서 발견된 덴표신고(天平神護) 원년(765년) 목간(木簡)에는 "파사(破斯)"라는 성씨(名字)를 가진 관리(파사청도(破斯清道))가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페르시아인 관리의 근무 기록으로 여겨진다.[123]

5. 8. 더불어민주당의 관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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