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울 에를리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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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울 에를리히는 1854년 프로이센 왕국에서 태어난 독일의 의사이자 과학자이다. 그는 조직 염색 연구, 혈액학, 면역학, 화학요법 분야의 선구자였으며, 1908년 면역학 연구로 노벨 생리학·의학상을 수상했다. 그는 혈액-뇌 장벽의 존재를 발견하고, 면역 반응의 측쇄설을 제창했으며, 매독 치료제인 살바르산을 개발하는 등 다양한 업적을 남겼다. 에를리히는 1915년 사망했으며, 그의 이름은 많은 연구소, 거리, 상 등에 사용되어 그의 업적을 기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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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울 에를리히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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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파울 에를리히 |
원어 이름 | Paul Ehrlich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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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일 | 1854년 3월 14일 |
출생지 | 스트셸린(Strehlen), 하부 실레지아(Lower Silesia), 프로이센 왕국(Kingdom of Prussia) (현재 스트셸린(Strzelin), 폴란드) |
사망일 | 1915년 8월 20일 |
사망지 | 바트홈부르크(Bad Homburg), 헤센(Hesse), 독일 제국(German Empire) |
국적 | 독일 |
학문 분야 | |
분야 | 면역학 |
모교 | 브레슬라우 대학교 스트라스부르 대학교 프라이부르크 대학교 라이프치히 대학교 |
지도 학생 | 한스 슐로스베르거 |
박사 학위 논문 제목 (원어) | Beiträge zur Theorie und Praxis der histologischen Färbung |
박사 학위 논문 제목 (번역) | 조직학적 염색의 이론과 실제에 대한 기여 |
박사 학위 취득 년도 | 1878년 |
알려진 업적 | 화학 요법 면역학 호염기구 마법의 탄환 비만 세포 수용체 이론 곁사슬 이론 에를리히 시약 |
수상 | |
수상 | 노벨 생리학·의학상 (1908년) 에든버러 대학교 캐머런 상(1914년) |
개인 정보 | |
배우자 | 헤드비히 핑쿠스 (1864–1948) (1883년 결혼) |
자녀 | 스테파니, 마리안 |
기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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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프로이센 왕국 슐레지엔 슈토레렌(현재의 폴란드 돌니실롱스크주)에서 유태계 독일인 가정에서 태어났으며, 브로츠와프, 스트라스부르, 프라이부르크, 라이프치히 등 여러 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했다. 젊은 시절부터 색소를 이용한 조직 염색 연구에 매진하여, 가열 염색 결핵균 표본을 통해 코흐의 연구소에 들어가 면역학 연구를 시작했다. 베링의 요청으로 항독소 혈청 제조 기술을 개선하여 베를린 교외 스테글리츠 국립 혈청검정 겸 혈청연구소 소장을 역임했고, 이후 연구소는 프랑크푸르트의 실험치료법연구소로 확장 이전되었다. 혈청 검정법과 면역 단위를 확립하여 각국 검정법의 규범을 만들었으며, 면역 반응 이론인 측쇄설(側鎖說)을 주장했다.
1899년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으로 이전한 실험 치료 연구소에서 연구를 이어갔고, 1906년에는 게오르크 슈파이어 하우스의 소장이 되었다. 1909년, 특정 병원균을 표적으로 하는 최초의 약물인 매독 치료제 살바르산을 발견했다.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당시 독일의 정치와 군국주의를 옹호하는 93인 선언에 서명했다. 1915년 8월 17일 심장 마비를 겪고, 8월 20일 바트 홈부르크 포어 데어 회에(Bad Homburg vor der Höhe)에서 사망하여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의 랫-바일슈트라세에 있는 유대인 묘지에 안장되었다.
2. 1. 출생과 성장 배경
프로이센 왕국 슐레지엔의 슈토레렌(현재의 폴란드 돌니실롱스크주)에서 유태계 독일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지역 유대인 공동체의 지도자였으며,[2] 여관 주인이자 술 제조업자였고 슈트렐렌에서 왕실 복권 수집가로 일했다. 할아버지 하이만 에를리히(Heymann Ehrlich)는 증류주 제조업자이자 여관 관리자였다. 에를리히는 초등학교를 마친 후 브레슬라우(브레슬라우)의 마리아-마달레나-김나지움(Maria-Magdalenen-Gymnasium) 중등학교에 다녔으며, 그곳에서 훗날 동료가 된 알베르트 나이서(Albert Neisser)를 만났다. 학생 시절, 현미경 조직 염색 과정에 매료되었던 그는 브로츠와프, 스트라스부르(Strasbourg), 프라이부르크 임 브라이스가우(Freiburg im Breisgau), 라이프치히(Leipzig) 대학교에서 의학을 공부하는 동안 그 관심을 유지했다. 1883년 노이슈타트(현재 폴란드 프루드니크)의 회당에서 헤드비히 핑쿠스(Hedwig Pinkus, 1864–1948)와 결혼하여 스테파니와 마리안네라는 두 딸을 낳았다. 헤드비히는 노이슈타트의 섬유 공장주였던 막스 핑쿠스(Max Pinkus)(ZPB "Frotex")의 여동생이었다. 그는 노이슈타트의 비제너슈트라세(Wiesenerstrasse)에 있는 프랭켈 가족의 빌라에 정착했다.[6]
2. 2. 의학 교육 및 초기 연구
프로이센 왕국 슐레지엔의 슈토레렌(현재의 폴란드 돌니실롱스크주)에서 유태계 독일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브로츠와프, 스트라스부르, 프라이부르크, 라이프치히의 각 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했다. 청년 시대부터 색소에 의한 조직 염색에 대한 연구를 추진했으며, 가열 염색 결핵균 표본을 계기로 코흐의 연구소에 초빙되어 면역학 연구에 종사했다. 이후 베링의 요청으로 항독소 혈청 제조 기술을 개량하여 성공하였고, 베를린 교외 스테글리츠 국립 혈청검정 겸 혈청연구소 소장이 되었다. 이어서 이 연구소는 규모를 확대하여 프랑크푸르트의 실험치료법연구소로 이전하였고, 에를리히는 해당 연구소의 소장이 되었다.[27][28][29]2. 3. 로베르트 코흐와의 만남과 면역학 연구
에를리히는 브레슬라우에서 학생이었을 때, 병리학자 율리우스 프리드리히 콘하임으로부터 연구 기회를 얻었고, 당시 포젠 주 볼슈타인의 지방 의사였던 로베르트 코흐를 소개받았다. 코흐는 탄저병 병원체의 생활 주기를 밝혀냈고, 페르디난트 콘의 소개로 1876년 4월 30일부터 5월 2일까지 브레슬라우에서 자신의 연구 결과를 발표했는데, 에를리히는 이 발표에 참석했다.1882년 3월 24일, 에를리히는 코흐가 결핵균을 확인한 방법을 보고하는 강연에 참석했다. 에를리히는 이 강연을 "과학 분야에서 가장 위대한 경험"으로 묘사했다. 에를리히는 코흐의 염색 방법을 개선했고, 코흐는 이를 환영했다. 이후 두 사람은 우정을 맺었다.
1890년, 에를리히는 코흐의 요청으로 베를린-모아빗의 공립 병원에서 결핵 연구소를 맡았다. 이곳에서 코흐가 기대했던 결핵 치료제 투베르쿨린이 연구되었고, 에를리히는 자신에게 직접 투여하기도 했다. 투베르쿨린 스캔들에서 에를리히는 코흐를 지지하며 투베르쿨린의 진단 목적 가치를 강조했다. 1891년 코흐는 에를리히를 새로 설립된 프레드리히 빌헬름 대학교(현재 훔볼트 대학교)의 전염병 연구소(현재 로베르트 코흐 연구소)[10]에 초청했다. 코흐는 에를리히에게 실험실 직원, 환자, 화학 물질 및 실험 동물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도록 했고, 에를리히는 이에 대해 감사하게 생각했다.
에를리히는 자신의 개인 연구실에서 면역에 대한 최초의 실험을 시작했다. 그는 쥐들을 리신과 아브린 독에 익숙하게 만들었다. 소량이지만 점차 증가하는 양의 리신을 먹인 후, 쥐들이 "리신에 대한 내성"을 갖게 되었다는 것을 확인했다. 에를리히는 이것을 면역으로 해석했고, 며칠 후 갑자기 시작되어 몇 달 후에도 여전히 존재한다는 것을 관찰했지만, 리신에 대해 면역이 된 쥐들은 아브린에 대해서는 처리하지 않은 동물과 마찬가지로 민감했다.
이후 획득된 면역의 "유전"에 대한 연구가 이어졌다. 그는 태아가 어미의 폐 순환을 통해 항체를 공급받는다고 결론지었다. 또 다른 실험에서 그는 처리된 암컷 쥐와 처리되지 않은 암컷 쥐의 새끼를 바꿔서 키웠다. 처리된 암컷 쥐에게서 젖을 먹은 쥐들은 독으로부터 보호되었는데, 이는 항체가 모유를 통해서도 전달될 수 있다는 증거를 제공한다.
에를리히는 자가면역도 연구했지만, 유기체의 면역 체계가 유기체 자신의 조직을 공격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자가중독 공포(horror autotoxicus)"라고 부르며 거부했다. 에를리히는 유기체를 자가면역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조절 기전이 존재한다고 제안했다.[13]
2. 4. 베링과의 협력과 갈등
에밀 아돌프 폰 베링은 1893년까지 베를린 감염병 연구소에서 혈청을 이용한 디프테리아와 파상풍 치료법 개발에 매달렸으나, 결과는 일관적이지 못했다. 로베르트 코흐는 베링과 에를리히에게 공동 연구를 제안했다. 에를리히는 생쥐를 이용한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실험 동물의 면역 수준을 빠르게 높일 수 있었고, 이들의 공동 연구는 성공적이었다. 1894년 초 디프테리아 혈청을 이용한 임상 시험이 성공을 거두었고, 8월에는 호이스트(Hoechst) 화학회사가 "베링의 디프테리아 치료제"를 시장에 출시하기 시작했다.[15]두 আবিষ্কার자는 원래 호이스트의 지분을 제외한 모든 이익을 나누기로 합의했었다. 그러나 계약은 여러 차례 변경되었고, 결국 에를리히는 8%의 이익만을 받는 데 압력을 받았다. 에를리히는 자신이 불공정한 대우를 받았다고 분개했고, 베링과의 관계는 그 이후로 문제가 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나중에 파상풍 혈청의 가역성 문제[14]로 인해 더욱 악화되었다. 에를리히는 혈청 요법의 원리를 베링과 키타사토 시바사부로가 개발했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러나 그는 인간에게도 사용할 수 있는 혈청을 처음으로 개발한 사람은 자신이며, 디프테리아 혈청 개발에 대한 자신의 역할이 충분히 인정받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베링은 프로이센 문화부에서 에를리히를 음해했고, 1900년부터 에를리히는 베링과의 협력을 거부했다. 폰 베링은 디프테리아 연구에 대한 공헌으로 1901년 최초의 노벨 생리학·의학상을 단독 수상했다.[15]
2. 5. 프랑크푸르트 시기: 화학요법 연구의 발전
1899년 그의 연구소는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으로 이전되었고 실험 치료 연구소(Institut für experimentelle Therapie)로 이름이 바뀌었다. 그곳에서 그의 중요한 협력자 중 한 명은 막스 나이서(Max Neisser)였다. 1904년 에를리히는 괴팅겐 대학교(University of Göttingen)에서 명예 교수직을 받았다. 1906년 에를리히는 프랑크푸르트의 게오르크 슈파이어 하우스(Georg Speyer House)의 소장이 되었는데, 이곳은 그의 연구소와 제휴된 민간 연구 재단이었다. 여기서 그는 1909년 특정 병원균을 표적으로 하는 최초의 약물인 매독 치료제 살바르산을 발견했는데, 매독은 당시 유럽에서 가장 치명적이고 전염성이 강한 질병 중 하나였다. 1914년 에를리히는 에든버러 대학교의 캐머런 상(Cameron Prize)을 수상했다. 그의 연구소에서 에를리히와 함께 일한 외국 방문 과학자들 중에는 노벨상 수상자인 헨리 할릿 데일(Henry Hallett Dale)과 파울 카러(Paul Karrer)이 있었다. 그의 연구소는 1947년 에를리히의 공로를 기리기 위해 파울 에를리히 연구소로 이름이 바뀌었다.실험치료연구소가 프랑크푸르트로 이전하기 전에, 에를리히는 이미 메틸렌블루 연구를 재개했었다. 게오르그 슈파이어 사후 그의 미망인 프란치스카 슈파이어는 그의 추모를 위해 게오르그-슈파이어 하우스를 설립했는데,[17] 이는 에를리히 연구소 옆에 세워졌다. 게오르그-슈파이어 하우스 소장으로서 에를리히는 그의 화학요법 연구를 그곳으로 옮겼다. 그는 메틸렌블루만큼 효과적이면서도 부작용이 없는 약물을 찾고 있었다. 그의 모델은 한편으로는 퀴닌의 말라리아 치료 효과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혈청 요법과 유사하게, 개별 질병에 대해 특이적인 효과를 가진 화학적 의약품도 존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의 목표는 ''Therapia sterilisans magna'', 다시 말해 모든 질병 병원체를 죽일 수 있는 치료법을 찾는 것이었다.

실험 치료의 모델로 에를리히는 기니피그 질병인 트리파노소마를 사용하여 실험 동물에 다양한 화학 물질을 테스트했다. 트리파노소마는 실제로 트리판 레드라는 염료로 성공적으로 사멸시킬 수 있었다. 1906년부터 그는 아톡실을 집중적으로 조사하여 1906/07년 코흐의 수면병 탐험 중에 다른 비소 화합물과 함께 로베르트 코흐가 테스트하도록 했다. 이름이 문자 그대로 "무독성"을 의미하지만, 아톡실은 특히 시신경에 손상을 입힌다. 에를리히는 제약 산업에서 현재 사용되는 스크리닝의 의미에서 화학 화합물의 체계적인 테스트를 정교하게 만들었다. 그는 화합물 418 - 아르세노페닐글리신 - 이 인상적인 치료 효과를 가지고 있음을 발견하고 아프리카에서 테스트하도록 했다.
조수인 하타 사하치로의 지원을 받아 에를리히는 1909년에 화합물 606, 살바르산이 "나선균" 스피로헤타 박테리아, 그 중 하나의 아종이 매독을 일으키는 것을 효과적으로 퇴치한다는 것을 발견했다.[18] 이 화합물은 인체 시험에서 부작용이 거의 없다는 것이 입증되었고, 이 치료 후 7명의 매독 환자에게서 스피로헤타가 사라졌다.
광범위한 임상 시험(모든 연구 참가자는 결핵균의 부정적인 예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후 호이스트사는 1910년 말 살바르산이라는 이름으로 이 화합물을 시장에 출시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이론적 고려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최초의 특정 치료 효과를 가진 약물이었다. 살바르산은 특히 수은염의 기존 치료법과 비교했을 때 놀라울 정도로 효과적임이 입증되었다. 호이스트 AG에서 제조한 살바르산은 세계에서 가장 널리 처방되는 약물이 되었다. 1940년대에 페니실린이 등장할 때까지 매독 치료에 가장 효과적인 약물이었다.[19] 살바르산은 부작용과 용해도 면에서 개선이 필요했고 1911년에 네오살바르산으로 대체되었다. 에를리히의 연구는 혈액-뇌 장벽의 존재를 밝혔지만, 그 자신은 그러한 장벽을 믿지 않았고, 리나 슈테른이 나중에 그 용어를 만들었다.
이 약물은 소위 "살바르산 전쟁"을 촉발했다. 한편으로는 성적 억제의 도덕적 붕괴를 우려하는 사람들의 적대감이 있었다. 에를리히는 또한 명백하게 반유대주의적인 어조로 과도하게 자신을 부유하게 했다는 비난을 받았다. 또한 에를리히의 동료인 파울 울렌후트는 이 약물을 발견한 데 있어 우선권을 주장했다.
임상 시험 중에 일부 사람들이 사망했기 때문에 에를리히는 "무엇이든 멈추지 않는다"는 비난을 받았다. 1914년, 가장 저명한 고발자 중 한 명이 에를리히가 증언하도록 소환된 재판에서 중상모략죄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비록 에를리히가 이로써 무죄를 선고받았지만, 이 시련은 그를 깊은 우울증에 빠뜨렸고, 그로부터 결코 완전히 회복되지 못했다.[20]
2. 6. 말년과 죽음
1914년 에를리히는 독일 제1차 세계 대전의 정치와 군국주의를 옹호하는 93인 선언에 서명했다. 1915년 8월 17일 에를리히는 심장 마비를 일으켰고, 8월 20일 바트 홈부르크 포어 데어 회에(Bad Homburg vor der Höhe)에서 사망했다. 독일 황제 빌헬름 2세는 조의 전보에서 "저는 문명 세계 전체와 함께 의학 과학과 고통받는 인류에 대한 그의 위대한 공로로 이 공로 있는 연구자의 죽음을 애도합니다. 그의 평생의 업적은 불멸의 명성과 그의 동시대인과 후손 모두의 감사를 보장합니다"라고 썼다.[7]에를리히는 프랑크푸르트 구 유대인 묘지(Old Jewish Cemetery, Frankfurt)(114블록 N)에 묻혔다.[8]
3. 주요 연구 업적
파울 에를리히는 혈액학, 면역학, 화학 요법의 기초를 세운 독창적인 연구자로, 세균학 및 의화학 분야에 많은 신기술을 고안했다. 150편이 넘는 그의 논문은 다양한 분야에 걸쳐 있다.
에를리히는 아닐린 색소를 이용한 생체 염색 연구를 통해 혈액 뇌 장벽의 존재를 발견했다.[9] 면역학 연구에서는 항원-항체의 특이성과 양적 관계를 밝히고, 세포가 특정 독성물질과 결합하는 수용기, 즉 '측쇄'를 가지고 있다는 '측쇄설'을 주장하여 독소에 대한 면역 반응을 설명했다.[16] 이 공로로 1908년 일리야 메치니코프와 함께 노벨 생리학·의학상을 수상했다.
1900년대 초, 에를리히는 암 연구에 매진하여 종양 세포의 악성도 변화와 전이 현상을 연구했으며, 약화된 암 세포를 이용한 면역 생성 가능성을 탐구했다.
또한, 질병을 일으키는 유기체만을 선택적으로 공격하는 "마법의 탄환" 개념을 제시했다. 1909년 조수 하타 사하치로와 함께 매독 치료제인 살바르산을 발견했는데,[18] 이는 항체-약물 접합체 개발의 기반이 되었으며, 페니실린 등장 이전까지 매독 치료에 널리 사용되었다.[19]
그는 트리파노소마에 대한 트리판로트 발견(1904년), 수면병 특효약인 아톡실의 구조식 발견(1906년) 등 화학요법제 연구에도 업적을 남겼다. 그의 연구는 설파제, 페니실린 등 항생물질 발견을 촉진했다.[19]
3. 1. 혈액학 및 조직학 연구
파울 에를리히는 혈액학, 면역학, 화학 요법의 기초를 마련한 독창적인 연구자였으며, 세균학 및 의료 화학 방면으로 수많은 새로운 기법을 고안했다. 150여 편의 논문은 다방면에 걸쳐 있다. 처음에는 혈액 얼룩에 착안하여 아닐린 염료에 의한 생체 염색으로 연구를 발전시켜 혈액 뇌 장벽의 존재에 주목했다.[9] 1870년대 초, 에를리히의 사촌인 카를 바이거트(Karl Weigert)는 최초로 염료를 이용하여 세균을 염색하고 조직학적 연구 및 세균 진단에 아닐린 색소를 도입한 사람이었다. 스트라스부르크에서 해부학자 하인리히 빌헬름 발데이어(Heinrich Wilhelm Waldeyer) 아래에서 연구하는 동안, 에를리히는 그의 사촌이 시작한 색소와 현미경 연구를 위한 조직 염색 연구를 계속했다. 그는 프라이부르크 임 브라이스가우에서 8번째 대학 학기에 주로 붉은 염료인 다알리아(모노페닐로산닐린)를 연구하여 그의 첫 번째 논문을 발표했다.[9]1878년 그는 그의 논문 지도교수인 율리우스 프리드리히 콘하임(Julius Friedrich Cohnheim)을 따라 라이프치히로 갔고, 그 해에 "조직 염색의 이론과 실제에 대한 기여"(''Beiträge zur Theorie und Praxis der histologischen Färbung'')라는 제목의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그의 논문 연구에서 가장 뛰어난 결과 중 하나는 새로운 세포 유형의 발견이었다. 에를리히는 추정되는 형질 세포의 세포질에서 알칼리성 염료의 도움으로 가시화할 수 있는 과립을 발견했다. 그는 이 과립이 영양 상태가 좋은 징후라고 생각하여 이 세포를 비만 세포(독일어로 동물 비육 사료를 의미하는 ''Mast''에서 유래)라고 명명했다. 화학에 대한 이러한 초점은 의학 논문으로서는 이례적인 것이었다. 그는 이 논문에서 알려진 모든 염색 기술과 사용된 색소의 화학적 성질을 제시했다.
샤리테에 있던 동안, 에를리히는 그들의 서로 다른 과립에 따라 백혈구를 분화하는 것을 자세히 설명했다. 전제 조건은 그가 개발한 건조 표본 기술이었다. 두 개의 슬라이드 글라스 사이에 놓이고 분젠 버너 위에서 가열된 혈액 한 방울은 혈액 세포를 고정시키면서 여전히 염색될 수 있도록 했다. 에를리히는 알칼리성과 산성 염료를 모두 사용했고, 새로운 "중성" 염료도 만들었다. 이것은 처음으로 림프구를 백혈구 중에서 구별할 수 있게 했다. 과립을 연구함으로써 그는 비과립성 림프구, 단핵 및 다핵 백혈구, 호산구 및 비만 세포를 구별할 수 있었다.
1880년부터 에를리히는 적혈구도 연구했다. 그는 핵이 있는 적혈구의 존재를 증명했는데, 그는 이를 세분화하여 정형적 아세포, 거대 아세포, 소형 아세포, 이상 아세포로 나누었다. 그는 적혈구의 전구체를 발견했다. 따라서 에를리히는 백혈구 연구로 백혈병을 체계화하기 위한 기반을 마련한 후 빈혈 분석의 기초를 마련했다.
샤리테에서 그의 임무에는 환자의 혈액과 소변 검체를 분석하는 것이 포함되었다. 1881년 그는 단순한 설사 증상과 다양한 유형의 장티푸스를 구별하는 데 사용할 수 있는 새로운 소변 검사법을 발표했다. 염색의 강도는 질병 예후를 가능하게 했다. 그가 사용한 색소 용액은 오늘날 에를리히 시약으로 알려져 있다.
에를리히의 위대한 업적이자 그의 후속 경력 동안 문제의 원천이 된 것은 그가 화학, 생물학, 의학을 상호 연관시키는 새로운 연구 분야를 개척했다는 것이다. 그의 많은 연구는 필요한 화학적 지식이 부족한 의학계에서 거부되었다. 또한 에를리히에게 적합한 교수직이 보이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했다.
3. 2. 측쇄설
세포가 특정한 독성물질을 흡수하거나 동화하는 측쇄 혹은 수용기를 가지고 있다는 가설이다. 독성을 가진 분자는 세포의 측쇄와 결합해야 세포에 작용할 수 있다. 독성에 감염된 유기체는 많은 측쇄를 만들어내는데, 이 측쇄로 인해 새로운 감염을 막아낼 수 있는 면역이 생긴다. 에를리히는 토끼 실험을 통해 독성을 조금씩 늘리는 방법을 사용하여 치사량의 5000배가 되는 농도에서 살아남았다는 것을 증명했다. 이 이론은 혈청의 효과와 항원의 정량적인 형태를 설명해냈다.[16]에를리히는 세포 원형질이 독소가 결합하여 기능에 영향을 미치는 화학적 '측쇄'(오늘날의 용어는 거대분자)를 가지는 특수 구조를 포함하고 있다고 가정했다. 만약 유기체가 독소의 영향에서 살아남으면, 차단된 측쇄는 새로운 것으로 대체된다. 이러한 재생은 훈련될 수 있으며, 이 현상을 '면역'이라고 한다. 세포가 과잉의 측쇄를 생성하면, 이것들은 항체로서 혈액으로 방출될 수도 있다.
이후 몇 년 동안 에를리히는 "암보셉터", "1차, 2차, 3차 수용체" 등, 더 이상 일반적이지 않은 개념을 사용하여 그의 측쇄 이론을 확장했다. 그는 항원과 항체 사이에 "첨가제" 또는 "보체"라고 부르는 추가적인 면역 분자를 가정했다. 그에게 있어 측쇄는 적어도 두 개의 기능기를 포함하고 있었다.
면역학에 대한 이론적 토대를 마련하고 혈청 원자가에 대한 연구를 한 공로로 에를리히는 1908년 일리야 메치니코프와 함께 노벨 생리학·의학상을 수상했다. 파스퇴르 연구소에서 면역의 세포적 부분인 식세포작용을 연구했던 메치니코프는 이전에 에를리히를 강하게 비판했다.
3. 3. 화학요법 연구: 살바르산 발견
에를리히는 기니피그 질병인 트리파노소마를 실험 모델로 사용하여 다양한 화학 물질을 실험 동물에 테스트했다. 트리파노소마는 트리판 레드라는 염료로 효과적으로 사멸시킬 수 있었다. 1906년부터 에를리히는 아톡실을 집중적으로 조사하여, 1906/07년 코흐의 수면병 탐험 중에 로베르트 코흐가 다른 비소 화합물과 함께 테스트하도록 했다. 아톡실은 이름이 문자 그대로 "무독성"을 의미하지만, 특히 시신경에 손상을 입힌다.[17] 에를리히는 제약 산업에서 현재 사용되는 스크리닝과 같은 방식으로 화학 화합물의 체계적인 테스트를 정교하게 만들었다. 그는 화합물 418(아르세노페닐글리신)이 인상적인 치료 효과를 가지고 있음을 발견하고 아프리카에서 테스트하도록 했다.
1909년, 에를리히는 조수인 하타 사하치로의 지원을 받아 화합물 606, 살바르산이 매독을 일으키는 나선균 스피로헤타 박테리아를 효과적으로 퇴치한다는 것을 발견했다.[18] 이 화합물은 인체 시험에서 부작용이 거의 없었고, 치료 후 7명의 매독 환자에게서 스피로헤타가 사라졌다.
1910년 말, 호이스트사는 광범위한 임상 시험을 거쳐 살바르산을 시장에 출시했다. 이는 이론적 고려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최초의 특정 치료 효과를 가진 약물이었다. 살바르산은 특히 수은염을 이용한 기존 치료법과 비교했을 때 놀라울 정도로 효과적이었다. 호이스트 AG에서 제조한 살바르산은 세계에서 가장 널리 처방되는 약물이 되었으며, 1940년대에 페니실린이 등장할 때까지 매독 치료에 가장 효과적인 약물이었다.[19] 살바르산은 부작용과 용해도 면에서 개선이 필요했고, 1911년에 네오살바르산으로 대체되었다.
3. 4. 기타 연구 업적
그는 혈액학, 면역학, 화학 요법의 기초를 세운 독창적인 연구자이며, 세균학 및 의화학 분야에 많은 신기술을 고안했다. 150편이 넘는 논문은 다양한 분야에 걸쳐 있다.처음에는 혈액 염색에 주목하여, 아닐린 색소를 이용한 생체 염색으로 연구를 발전시켜 “혈액-뇌 장벽”의 존재를 처음으로 알아챘다.[19] 이어 면역학 연구로 옮겨, 식물성 단백질 독소인 리신, 아브린, 로핀의 실험을 시작으로 항원-항체의 특이성과 그 양적 관계를 밝히고, 유명한 측쇄설을 제창했다. 이 이론은 혈청의 효과와 항원량의 가능한 측정을 설명하는 것이다.
후에 트리파노소마에 대한 트리판로트의 발견(1904년)과 여러 가지 화학요법제의 연구를 거쳐, 1906년 수면병에 대한 특효약인 아톡실(Atoxyl)의 구조식을 발견했다. 1910년에는 그의 연구소에서 일본의 의학자 하타 사하치로가 실험을 담당했던 매독 치료제 살바르산(606호)의 발견으로 이어졌다. 이 발견은 후에 설파제, 페니실린 등의 항생물질 발견을 촉진했다는 점에서 공적이 크다. 참고로 적리균의 발견자인 시가 키요시는 에를리히와 같은 스승 밑에서 공부했다.
또한, 앞서 언급했듯이 기타사토 시바사부로도 에를리히와 마찬가지로 로베르트 코흐(Robert Koch)의 제자이다.
4. 유산과 영향
에를리히는 질병을 일으키는 유기체를 선택적으로 표적으로 삼는 화합물을 만들 수 있다면 그 유기체에 대한 독소를 선택성 물질과 함께 전달할 수 있다고 추론했다. 따라서, 표적이 된 유기체만 죽이는 "마법의 탄환"(''Zauberkugel'', 그가 이상적인 치료제라고 부른 용어)이 만들어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마법의 탄환"이라는 개념은 항체-약물 접합체(세포독성 생물학적 활성 약물에 연결된 단클론 항체)의 개발을 통해 어느 정도 실현되었는데, 이는 세포독성 약물을 지정된 표적(예: 암세포)에 선택적으로 전달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1910년 프랑크푸르트-작센하우젠에 에를리히의 이름을 딴 거리가 조성되었다. 나치 독일 시대에는 에를리히의 업적이 무시되고 에밀 아돌프 폰 베링이 이상적인 아리아인 과학자로 미화되면서 에를리히의 이름을 딴 거리는 다른 이름으로 바뀌었다. 전쟁이 끝난 직후 파울-에를리히-슈트라세(Paul-Ehrlich-Strasse)라는 이름이 복원되었고, 오늘날에도 많은 독일 도시에 에를리히의 이름을 딴 거리가 있다.
서독은 1954년 에를리히(3월 14일생)와 에밀 폰 베링(3월 15일생)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우표를 발행했다. 2001년까지 발행된 200독일 마르크 지폐에는 에를리히의 초상이 들어 있었다.
슈테글리츠 혈청 연구 및 검사 연구소와 프랑크푸르트 왕립 실험 치료 연구소의 후신인 독일 파울 에를리히 연구소는 1947년 초대 소장인 에를리히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21]
에를리히의 이름은 많은 학교와 약국,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에 있는 파울-에를리히-게젤샤프트 퓨어 케모테라피 e. V.(PEG), 바트 홈부르크 포어 데어 회에에 있는 파울-에를리히-클리닉에도 사용되고 있다. 파울 에를리히 및 루트비히 다름슈테터 상은 생의학 연구 분야에서 가장 권위 있는 독일 상이다. 의약 화학 분야 박사 과정 유럽 네트워크(Paul Ehrlich MedChem Euro PhD Network)도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22]
미국 유대인 반 명예훼손 위원회는 파울 에를리히-귄터 K. 슈베린 인권상을 수여한다. 1970년 달의 크레이터에 그의 이름이 붙여졌다.
에를리히의 생애와 업적은 에드워드 G. 로빈슨이 주연한 1940년 미국 영화 ''닥터 에를리히의 마법의 탄환''에 등장한다. 이 영화는 매독 치료제인 살바르산(606호 화합물)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나치 정권은 유대인 과학자에 대한 이러한 헌정에 반대했기 때문에 독일에서는 이 영화를 비밀로 유지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이 영화는 아카데미 각본상 후보에 올랐다.[23]
'''에를리히의 주요 수상 및 서훈 내역'''
- 1882년 교수직 수여
- 1890년 훔볼트 대학교 초빙 교수 임명
- 1896년 비학술적인 프로이센의 궁정 의학관(Geheimer Medizinalrat) 작위 수여
- 1903년 프로이센 과학계 최고 훈장인 과학 대금훈장(Große Goldene Medaille für Verdienste um die Wissenschaften) 수여 (이전에는 루돌프 피르호에게만 수여됨)
- 1904년 괴팅겐 대학교 명예 교수직;[24] 시카고 대학교 명예 박사 학위 수여
- 1907년 궁정 고위 의학관(Geheimer Obermedizinalrat) 작위 수여; 옥스퍼드 대학교 명예 박사 학위 수여
- 1908년 "면역 연구"로 노벨 생리학·의학상 수상[25][26]
- 1911년 프로이센 최고 민간인 훈장인 궁정 참사관(Wirklicher Geheimer Rat, "각하" 칭호 포함) 작위 수여
- 1912년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 시 및 그의 출생지 스트젤린의 명예 시민이 됨
- 1914년 에든버러 대학교 치료학 카메론 상 수상, 신설된 프랑크푸르트 대학교의 약리학 정교수 임명

파울 에를리히의 초상화는 1991년 발행된 200마르크 지폐에 사용되었다. 또한, 에를리히와 마찬가지로 로베르트 코흐의 제자인 기타사토 시바사부로가 2024년도 지폐 개정에 따라 1000엔 지폐의 초상으로 사용될 것이 2019년 4월 9일 발표되었다.[27][28][29] 새로운 지폐는 2024년 7월 3일에 발행되었다.[30]
그는 혈액학, 면역학, 화학요법의 기초를 세운 독창적인 연구자이며, 세균학 및 의화학 분야에 많은 신기술을 고안했다. 150편이 넘는 논문은 다양한 분야에 걸쳐 있다. 처음에는 혈액 염색에 주목하여, 아닐린 색소를 이용한 생체 염색으로 연구를 발전시켜 “혈액-뇌 장벽”의 존재를 처음으로 알아챘다. 이어 면역학 연구로 옮겨, 식물성 단백질 독소인 리신, 아브린, 로핀의 실험을 시작으로 항원-항체의 특이성과 그 양적 관계를 밝히고, 유명한 측쇄설을 제창했다. 이 이론은 혈청의 효과와 항원량의 가능한 측정을 설명하는 것이다.
후에 트리파노소마에 대한 트리판로트의 발견(1904년)과 여러 가지 화학요법제의 연구를 거쳐, 1906년 수면병에 대한 특효약인 아토크실(Atoxy)의 구조식을 발견했다. 1910년에는 그의 연구소에서 일본의 의학자 하타 사하치로가 실험을 담당했던 매독 치료제 살바르산(606호)의 발견으로 이어졌다. 이 발견은 후에 설파제, 페니실린 등의 항생물질 발견을 촉진했다는 점에서 공적이 크다. 참고로 적리균의 발견자인 시가 키요시는 에를리히와 같은 스승 밑에서 공부했다. 또한, 앞서 언급했듯이 기타사토 시바사부로도 에를리히와 마찬가지로 로베르트 코흐의 제자이다.
5. 주요 저서
출판 연도 | 제목 | 공동 저자 | 비고 |
---|---|---|---|
1897년 | 디프테리아 치료혈청의 가치 평가와 그 이론적 기초 Die Wertbemessung des Diphtherieheilserum and deren theoretischen Grundlagen|디 베르트베메숭 데스 디프테리하일제룸 운트 데렌 테오레티셴 그룬트라겐de | A. 라자루스 | |
1904년 | 면역 연구에 관한 논문집 Gesammelte Arbeiten zur Immunitätsforschung|게잠멜테 아르바이텐 추어 이무니테츠포르슝de | ||
1905년 | 독소와 항독소 사이의 관계와 그것을 연구하는 방법 Über die Beziehungen zwischen Toxin und Antitoxin und die Wege zu ihrer Erforschung|위버 디 베치웅엔 츠비셴 톡신 운트 안티톡신 운트 디 베게 추 이러 에어포르슝de | ||
1910년 | 스피로헤타병의 실험적 화학 요법 Die experimentelle Chemotherapie der Spirillosen|디 엑스페리멘텔레 케모테라피 데어 슈피릴로젠de | ||
1911년 ~ 1914년 | 살바르산에 관한 논문 Abhandlungen über Salvarsan|압한들룽엔 위버 잘바르잔de | 4권 |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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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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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it Mechanisms of the Intracellular Bacterium Ehrlichia
2010-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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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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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Look Ahead XVIII: Explorations in Transformative Resear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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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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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h beklage mit der gesamten gebildeten Welt den Tod dieses um die medizinische Wissenschaft und die leidende Menschheit so hochverdienten Forschers, dessen Lebenswerk ihm bei der Mit- und Nachwelt unvergänglichen Ruhm und Dank siche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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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13th Academy Awards (1941) Nominees and Winn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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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ving medical mysteries by help of anima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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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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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ul Ehrlich, 1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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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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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しい日本銀行券及び五百円貨幣を発行します
https://www.mof.go.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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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4-09
[28]
뉴스
新紙幣を正式に発表 一万円札の裏は東京駅
https://www.sankei.c[...]
2019-04-09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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紙幣のデザイン刷新へ 1万円は渋沢栄一
https://www.itmedia.[...]
2019-04-09
[30]
웹사이트
新しい日本銀行券特設サイト
https://www.npb.go.j[...]
[31]
서적
세계사를 뒤흔든 16가지 발견
다산초당
관련 사건 타임라인
( 최근 20개의 뉴스만 표기 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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