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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데리크 7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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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레데리크 7세는 1808년 코펜하겐에서 크리스티안 8세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848년 덴마크 국왕으로 즉위한 후 헌법 제정 요구에 직면하여 절대 군주제를 종식시키고 입헌군주제로 전환했다. 제1차 슐레스비히 전쟁에서 "국가 지도자"로 추앙받았으며, 국민자유당의 전성기를 맞이하여 정치 및 경제 개혁을 추진했다. 세 번 결혼했지만 적통 후계자를 남기지 못하고, 글뤽스부르크 가문의 크리스티안 9세를 후계자로 지명했다. 1863년 사망했으며, 덴마크에서 가장 사랑받는 국왕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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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데리크 7세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42세의 프레데리크 7세 그림
아우구스트 쉬외트의 초상화, 1850년경
칭호덴마크 국왕
추가 정보(더 보기...)
재위 기간1848년 1월 20일 – 1863년 11월 15일
선임자크리스티안 8세
후임자크리스티안 9세
배우자빌헬미네 마리 (1828년 결혼, 1837년 이혼)
카롤리네 마리아네 (1841년 결혼, 1846년 이혼)
루이세 라스무센 (1850년 결혼)
전체 이름프레데리크 칼 크리스티안
왕가올덴부르크 왕가
아버지크리스티안 8세
어머니샤를로테 프레데리카 추 메클렌부르크슈베린
출생일1808년 10월 6일
출생지코펜하겐, 덴마크
사망일1863년 11월 15일
사망지글뤽스부르크, 홀슈타인 공국
매장지로스킬레 대성당
종교덴마크 국교회
서명
작위
작위 명칭슐레스비히 공작
홀슈타인 공작
작센라우엔부르크 공작

2. 생애

올덴부르크 왕조의 마지막 덴마크 국왕이다. 1808년 10월 6일 코펜하겐 아말리엔보르 성에서 당시 왕자였던 크리스티안 8세와 그의 첫 부인 메클렌부르크-슈베린 공녀 샤를로테 프레데리카 사이의 아들로 태어났다. 부모의 이혼 후 다소 방치된 유년기를 보냈으며, 청년기에는 사적인 스캔들로 인해 "왕실의 문제아"로 여겨지기도 했다.

그는 평생 세 번 결혼했다. 1828년 프레데리크 6세의 딸 빌헬미네 마리 공주와 결혼했으나 1837년 이혼했고, 1841년 메클렌부르크의 카롤리네 마리아네 공녀와 재혼했지만 1846년 다시 이혼했다. 1850년에는 평민 출신의 전직 발레 무용수였던 루이세 라스무센과 귀천상혼을 하여 '단너 백작부인' 작위를 수여했다. 이 결혼은 귀족 사회의 큰 반발을 샀으나, 왕에게는 안정감을 주었고 백작부인은 왕이 민중과 소통하도록 돕는 등 긍정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된다.

1848년 1월 왕위에 오르자마자 헌법 제정 요구와 슐레스비히-홀슈타인 문제라는 중대한 과제에 직면했다. 그는 덴마크 국민의 요구를 수용하여 1848년 3월 절대군주제의 종식을 받아들였고, 이는 1849년 6월 5일 입헌군주제 전환과 의회 설립을 골자로 하는 덴마크 헌법("6월 헌법") 제정으로 이어졌다. 이로써 덴마크는 절대군주제 국가에서 입헌군주제 국가로 전환되었다.

같은 시기,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의 독일 연방 편입을 둘러싼 갈등은 1848년부터 1851년까지 이어진 제1차 슐레스비히 전쟁으로 비화되었다. 프레데리크 7세는 직접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전쟁 기간 동안 "국가의 지도자"로 부상하며 국민적 영웅으로 추앙받았다.

재위 기간 동안 프레데리크 7세는 대체로 입헌군주로서 행동했지만, 때때로 정치에 개입하기도 했다. 1854년에는 보수적인 안데르스 산되 외르스테드 내각의 몰락에 영향을 주었고, 1859년에는 왕비의 영향 아래 구성된 자유주의 정부를 받아들였다. 1854년 이후 집권한 국민자유당 시기에는 코펜하겐 성곽 철거 사업 시작, 1857년 자유 무역 도입 등 정치, 경제적 개혁이 이루어졌다.

세 번의 결혼에도 불구하고 적법한 자녀를 얻지 못해 왕위 계승 문제가 제기되었으나, 1852년 글뤽스부르크 왕가의 크리스티안 공자를 왕위 계승자로 지명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했다.

프레데리크 7세는 술을 즐기고 다소 괴팍한 성격이라는 평가도 있었지만, 격식에 얽매이지 않고 소탈하면서도 위엄 있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는 "Folkets Kærlighed, min Styrkeda" (민중의 사랑은 나의 힘)를 표어로 삼고 덴마크 전역을 여행하며 일반 백성들과 직접 교류하려 노력했으며, 이러한 모습 덕분에 높은 인기를 누렸다. 또한 고고학에도 관심이 많아 덴마크 유물에 대한 대중적 관심을 높이는 데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9]

1863년 11월 15일, 독일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의 글뤽스부르크에서 사망했다. 그의 시신은 역대 덴마크 군주들이 묻힌 로스킬레 대성당에 안치되었다. 그의 죽음으로 올덴부르크 왕조의 직계 남성 혈통이 단절되었고, 왕위는 크리스티안 9세에게 계승되어 글뤽스부르크 왕가 시대가 열렸다.

프레데리크 7세 기마상, 크리스티안스보르 궁전, 슬롯스홀멘

2. 1. 초기 생애

프레데리크 왕자의 초상화, 1824년경


미래의 프레데리크 7세는 1808년 10월 6일 오전 11시, 당시 부모의 거주지였던 코펜하겐의 아말리엔보르 궁전(Amalienborg Palace) 단지 내 레베차우 궁전(Levetzau's Palace)에서 태어났다.[2] 그는 15세기 이래 덴마크를 통치해 온 올덴부르크 왕가(House of Oldenburg)의 일원으로, 당시 크리스티안 프레데리크 왕자(Prince Christian Frederick, 훗날 크리스티안 8세)와 그의 첫 번째 부인인 메클렌부르크-슈베린 공녀 샤를로테 프레데리카(Duchess Charlotte Frederica of Mecklenburg-Schwerin) 사이에서 태어난 두 번째 아이이자 장남이었다. 그의 외조부모는 메클렌부르크-슈베린 대공 프리드리히 프란츠 1세(Friedrich Franz I, Grand Duke of Mecklenburg-Schwerin)와 작센-고타-알텐부르크 공녀 루이제(Princess Louise of Saxe-Gotha-Altenburg (1756–1808))였다.

어린 왕자는 같은 해 10월 17일, 왕실 고해신부(confessor)이자 셸란의 주교였던 니콜라이 에딩거 발레(Nicolai Edinger Balle)에게 ''프레데리크 카를 크리스티안''(Frederik Carl Christian)이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2] 그의 어머니는 그를 항상 ''프리츠''(Fritz)라고 불렀다. 부모가 이혼한 후, 그는 주목받지 못하는 유년기를 보냈으며, 청년기에는 여러 사생활 스캔들로 인해 "왕실의 문제아"로 여겨지기도 했다.

프레데리크는 평생 세 번 결혼했다. 1828년에는 프레데리크 6세 국왕의 딸인 빌헬미네 마리(Vilhelmine Marie) 공주와 결혼했으나, 이 결혼 생활은 순탄치 않아 1834년부터 별거에 들어갔고 1837년에 결국 이혼했다. 1841년에는 메클렌부르크의 카롤리네 마리아네(Caroline Mariane)와 두 번째 결혼을 했지만, 이 결혼 역시 1846년에 이혼으로 끝났다.

1850년 8월, 그는 평민 출신의 전직 발레 무용수였던 루이세 라스무센(Louise Rasmussen)과 귀천상혼을 했다. 루이세는 왕과 오랜 관계를 유지해 온 연인이었으며, 이 결혼은 왕에게는 행복을 가져다준 것으로 보이나, 당시 귀족 사회에서는 격렬한 분노와 반발을 일으켰다. 루이세는 이후 다너 백작부인(Countess Danner)의 칭호를 받았다.

프레데리크 7세는 여러 차례의 결혼과 관계에도 불구하고 공식적인 자녀를 두지 못했다. 이 때문에 그가 불임이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널리 퍼졌으나, 정확한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다. 이로 인해 그의 아버지 크리스티안 8세 재위 시절부터 왕위 계승 문제가 중요한 현안으로 떠올랐다.

한편, 프레데리크 7세에게 사생아가 있었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1994년 처음 제기된 주장에 따르면, 그는 엘세 마리아 굴드보르그 페데르센(Else Maria Guldborg Pedersen, 마리 폴센으로도 알려짐)과의 사이에서 1843년 11월 21일 프레데리크 칼 크리스티안 폴센(Frederik Carl Christian Poulsen)이라는 아들을 얻었다고 한다. 2009년에는 자신이 이 아들을 통해 프레데리크 7세의 증손녀라고 주장하는 여성이 나타나기도 했으나[3][4], 설령 사실이라 하더라도 사생자는 덴마크 왕위 계승에서 제외된다. 또한, 그가 친구이자 신문 발행인인 칼 베를링(Carl Berling)과 동성애 관계였다는 주장도 있다.[5][6]

2. 2. 결혼과 이혼

프레데리크 7세와 그의 귀천상혼 배우자인 루이세 라스무센의 사진, 1860년-1861년경


프레데리크 7세는 청년기에 사생활 문제로 "왕실의 문제아"로 여겨지기도 했다. 그의 결혼 생활은 순탄치 않았으며, 첫 두 번의 결혼은 모두 이혼으로 끝났다.

1828년 11월 1일 코펜하겐에서 첫 번째 사촌인 빌헬미네 마리 공주(프레데리크 6세의 딸)와 첫 결혼을 했다. 그러나 1834년 별거에 들어갔고 1837년 이혼했다. 1841년 6월 10일에는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의 카롤리네 샤를로테 마리아네 공녀와 두 번째로 결혼했지만, 이 결혼 역시 1846년 이혼으로 끝났다.

1850년 8월 7일 프레데릭스보르 궁전에서 평민 출신이자 전직 발레 무용수였던 루이세 라스무센과 귀천상혼을 했다. 그녀는 모자 제작자였으며, 고트힐프 L. 쾨펜과 줄리아네 캐롤라인 라스무센 사이의 사생아로, 오랫동안 프레데리크 7세의 지인이자 정부였다. 왕은 그녀에게 '단너 백작부인'(Lensgrevinde Danner) 작위를 수여했다. 이 결혼은 귀족과 부르주아 계층의 큰 반발을 샀으나, 부부 관계는 행복했던 것으로 보인다. 라스무센은 비판자들에게는 신분 상승을 노린 인물로 비난받았지만, 지지자들에게는 소박한 '민중의 딸'로 여겨졌으며 왕에게 안정적인 영향을 준 것으로 평가된다. 그녀는 왕이 지방을 순회하며 민중과 교류하도록 도와 왕의 인기를 유지하는 데 기여했다.

프레데리크 7세는 두 번의 공식 결혼과 여러 관계에도 불구하고 자녀를 얻지 못했다. 이로 인해 덴마크 왕위 계승 문제가 일찍부터 제기되었으며, 그가 불임이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있다. 한편, 프레데리크 7세가 엘세 마리아 굴드보르그 페데르센(마리 폴센)과의 사이에서 1843년 11월 21일 아들 프레데리크 칼 크리스티안 폴센을 낳았다는 주장이 1994년에 제기되었다. 2009년에는 자신이 이 아들의 손녀, 즉 프레데리크 7세의 증손녀라고 주장하는 여성이 나타나기도 했다.[3][4] 그러나 설령 사실이라 하더라도 사생아는 덴마크 왕위 계승에서 제외된다.

또한 프레데리크 7세가 친구이자 신문 발행인인 칼 베를링과 동성애 관계였다는 주장도 있다. 양성애자였던 베를링은 루이세 라스무센과의 사이에서 사생아 칼 크리스티안을 두었는데, 프레데리크 7세는 이 아이를 매우 아꼈다고 전해진다. 일각에서는 왕이 라스무센과 결혼한 이유가 베를링과의 관계 및 그의 아들을 가까이 두기 위한 것이었다고 추측하기도 한다. 결혼 후 세 사람은 왕궁에서 함께 지냈으며, 베를링은 궁정 관리로 임명되었다.[5][6]

2. 3. 덴마크 헌법 승인과 입헌군주제 전환

프레데리크 7세를 묘사한 독일의 풍자화 (제1차 슐레스비히 전쟁 당시)


1848년 1월 왕위에 오르자마자 프레데리크 7세는 헌법 제정 요구에 직면했다. 당시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주민들은 덴마크로부터의 분리 독립을 원했고, 덴마크인들은 남유틀란트를 덴마크 영토로 유지하고자 했다. 이러한 갈등은 1848년부터 1851년까지 이어진 제1차 슐레스비히 전쟁으로 비화되었다. 이 전쟁 과정에서 프레데리크 7세는 직접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음에도 "국가의 지도자"로 부상하며 국가적 영웅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프레데리크 7세는 헌법 제정에 대한 덴마크 국민의 요구를 받아들여 1848년 3월 절대군주제의 종식을 승인했다. 이는 1849년 6월 5일, 절대군주제를 입헌군주제로 전환하고 덴마크 의회를 설립하는 내용을 담은 덴마크 헌법 (소위 "6월 헌법")의 승인으로 이어졌다. 이로써 덴마크는 입헌군주제로 전환되었다.

재위 기간 동안 프레데리크 7세는 대체로 입헌군주로서 행동했지만, 정치 개입을 완전히 포기하지는 않았다. 1854년에는 강경 보수 성향의 안데르스 산되 외르스테드 내각의 몰락에 기여했으며, 1859년부터 1860년까지는 그의 아내였던 루이세 라스무센의 주도로 임명된 자유주의 정부를 수용하기도 했다. 이러한 정치적 개입은 때때로 마찰을 일으켰으나, 그의 대중적 인기에 큰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다. 이는 당시 제정된 덴마크 최초의 헌법이 군주의 권한 범위에 대해 다소 모호하게 규정하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프레데리크 7세의 통치 시기는 1854년 총선거 이후 집권한 국민자유당의 전성기와 맞물린다. 이 시기 덴마크는 정치, 경제 개혁에 착수하여 코펜하겐의 성곽 철거 사업을 시작하고 1857년에는 자유 무역을 도입하는 등의 변화를 겪었다.

2. 4. 슐레스비히-홀슈타인 문제와 전쟁

1848년 1월 왕위에 오른 프레데리크 7세는 즉위와 거의 동시에 헌법 제정 요구와 슐레스비히-홀슈타인 공국의 독립 문제라는 두 가지 중대한 과제에 직면했다.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지역의 독일계 주민들은 덴마크로부터 분리되어 독일 연방에 편입되기를 원했지만, 덴마크인들은 남유틀란트(Sønderjylland)라고도 불리는 슐레스비히를 덴마크의 영토로 유지하고자 하는 열망이 강했다.

프레데리크 7세는 덴마크 국민의 요구에 부응하여 1848년 3월 절대군주제의 종식을 받아들이는 한편, 슐레스비히 문제에 있어서도 덴마크의 입장을 지지했다. 이러한 상황은 결국 1848년부터 1851년까지 덴마크와 프로이센 왕국이 주도하는 독일 연방 세력 간의 제1차 슐레스비히 전쟁으로 이어졌다. 이 전쟁 기간 동안 프레데리크 7세는 직접 전투에 참여하지는 않았으나 '국가의 지도자'로서의 면모를 보이며 덴마크 국민들에게 전쟁 영웅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슐레스비히-홀슈타인 문제(Schleswig-Holstein Question)는 프레데리크 7세의 통치 기간 내내 중요한 정치적 쟁점으로 남았다. 독일 측에서는 덴마크가 슐레스비히를 완전히 통합하려는 시도에 반대했고, 덴마크 내부에서도 이 문제와 관련된 정치적 다툼이 계속되었다. 국제 정세를 고려하여 헌법을 일부 수정하기도 했으나, 이는 오히려 덴마크 내에서 불만을 야기하는 요인이 되기도 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1854년부터 집권한 국민자유당은 독일에 대해 점차 강경한 노선을 취하게 되었다. 프레데리크 7세 역시 이러한 노선을 지지했으며, 1862년부터 1863년 사이 슐레스비히-홀슈타인 문제가 다시금 고조되자 범스칸디나비아 국가 간의 군사적 공동 대응을 공개적으로 언급하기도 했다.

프레데리크 7세는 갑작스럽게 사망하기 직전, 덴마크 왕국과 슐레스비히 공국에 모두 적용될 새로운 특별 헌법, 이른바 11월 헌법에 최종 서명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 헌법은 덴마크와 슐레스비히의 더 긴밀한 통합을 목표로 했으나, 그의 사후 프로이센 왕국오스트리아 제국의 강력한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결국 1864년 제2차 슐레스비히 전쟁의 빌미가 되었다.

2. 5. 정치, 경제 개혁

1849년 6월 5일에는 절대군주제를 폐지하고 입헌군주제로 전환하며, 덴마크 의회를 설립하는 내용이 담긴 덴마크 헌법을 승인했다. 이로써 덴마크는 입헌군주국으로 나아가는 중요한 발걸음을 내디뎠다.

프레데리크 7세는 재위 기간 동안 전반적으로 헌법 군주로서 행동했지만, 정치에 개입하는 것을 완전히 포기하지는 않았다. 1854년에는 보수적인 안데르스 산되 외르스테드(Anders Sandøe Ørsted) 내각의 몰락에 기여했으며, 1859년부터 1860년까지는 그의 아내 루이세의 영향 아래 임명된 자유주의 정부를 받아들이기도 했다.

1854년 총선거를 통해 국민자유당이 집권하면서 덴마크는 본격적인 정치, 경제 개혁에 착수했다. 이 시기는 국민자유당의 전성기로, 코펜하겐 주변 성곽 철거 사업을 시작하고 1857년에는 자유 무역을 도입하는 등 여러 개혁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슐레스비히-홀슈타인 문제와 관련된 국내외 갈등은 계속되었다. 독일 연방의 압력과 국내 야당과의 다툼 속에서 국제 정세에 맞춰 헌법을 일부 수정해야 했으며, 이는 덴마크 내에서 불만을 야기했다. 결국 국민자유당은 독일에 대한 더욱 강경한 저항 노선을 채택하게 되었고, 이는 1864년 제2차 슐레스비히 전쟁의 배경이 되었다. 프레데리크 7세는 이러한 노선을 전적으로 지지했으며, 사망 직전인 1863년에는 덴마크와 슐레스비히를 위한 새로운 특별 헌법인 11월 헌법에 서명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2. 6. 말년과 사망

1850년 8월, 프레데리크 7세는 평민 출신의 전직 발레 무용수였던 루이세 라스무센과 귀천상혼을 했다. 그녀는 왕과의 결혼으로 다너(Danner) 백작부인이 되었다. 이 결혼은 귀족과 부르주아 계층 사이에서 큰 분노를 일으켰고, 백작부인은 비천한 돈벌이꾼이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그녀는 왕에게 정신적 안정을 주었으며, 왕이 지방을 순회하며 민중과 직접 만나도록 독려하여 왕의 인기를 유지하는 데 기여한 것으로 평가받는다.[1][2]

프레데리크 7세에게는 적법한 자녀가 없었기 때문에 왕위 계승 문제가 중요한 현안이었다. 1852년 그는 글뤽스부르크 왕가 출신의 크리스티안 공자(크리스티안 9세)를 왕위 계승자로 공식 임명하여 이 문제를 해결했다.[3]

그의 통치 기간 동안 프레데리크 7세는 대체로 입헌군주제의 틀 안에서 행동했지만, 정치에 완전히 손을 떼지는 않았다. 1854년에는 강경 보수 성향의 안데르스 산되 외르스테드(Anders Sandøe Ørsted) 내각이 물러나는 데 영향을 미쳤으며, 1859년부터 1860년까지는 왕비의 주도로 구성된 것으로 알려진 자유주의 정부를 받아들였다.[4][2]

1854년 총선거를 통해 국민자유당이 집권하면서 덴마크는 정치 및 경제 개혁에 착수했다. 이 시기 주요 변화로는 코펜하겐의 오래된 성곽 철거 사업 시작과 1857년 자유 무역 정책 도입 등이 있다.[3][4]

그러나 슐레스비히-홀슈타인 문제는 그의 통치 기간 내내 계속해서 덴마크를 괴롭혔다. 덴마크가 슐레스비히(남유틀란트)를 통합하려는 시도에 대해 독일 연방, 특히 프로이센이 반대하며 압력을 가했고, 국제 정세에 맞춰 헌법을 일부 수정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하기도 했다. 이는 덴마크 내에서 불만을 야기했고, 결국 국민자유당과 프레데리크 7세는 독일에 대해 더욱 저항적인 노선을 취하게 되었다.[4][2] 1862년부터 1863년 사이, 공국 문제가 다시 심화되자 그는 범스칸디나비아주의에 입각한 스칸디나비아 국가 간의 군사 협력을 공개적으로 지지하기도 했다.[4][2] 사망 직전에는 덴마크 왕국과 슐레스비히 공국을 위한 새로운 공동 헌법, 이른바 11월 헌법(November Constitution)에 서명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 헌법은 그의 사후 제2차 슐레스비히 전쟁의 직접적인 원인이 된다.[4][2]

프레데리크 7세는 술을 즐기고 다소 괴팍한 성격을 가졌다는 평가도 있지만, 격식에 얽매이지 않고 소탈하면서도 위엄을 잃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그는 "Folkets Kærlighed, min Styrke|폴켓스 캘리헤드, 민 스튀르케da" (민중의 사랑은 나의 힘)를 자신의 표어로 삼았으며, 덴마크 전국을 자주 여행하며 일반 백성들과 직접 교류하려 노력했다.[3] 이러한 노력 덕분에 여러 정치적 위기에도 불구하고 그는 국민들 사이에서 높은 인기를 누릴 수 있었다.[4]

1863년 11월 15일, 프레데리크 7세는 독일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의 글뤽스부르크에서 사망했다.[3] 그의 시신은 역대 덴마크 군주들이 잠든 로스킬레 대성당에 안치되었다.[3] 그의 죽음으로 올덴부르크 왕조 본가의 직계 남성 혈통은 단절되었고, 왕위는 미리 지명되었던 크리스티안 9세에게 계승되어 글뤽스부르크 왕가 시대가 시작되었다.

3. 왕위 계승 위기

프레데리크 7세 사진, 1860년경


프레데리크 7세는 세 번 결혼했지만 적법한 후계자를 얻지 못했다. 이는 덴마크 왕위 계승에 심각한 문제를 야기했는데, 당시 덴마크 국왕은 슐레스비히와 홀슈타인의 군주를 겸하고 있었지만, 각 지역의 왕위 계승법이 달랐기 때문이다. 덴마크 왕국 자체는 프리드리히 3세의 직계 남성 후손이 없을 경우 여성 후계자도 왕위를 계승할 수 있는 반살리카 법적 요소를 가지고 있었지만(1953년 개정 이전), 독일 연방에 속한 홀슈타인 공국은 엄격한 살리카 법을 따라 남성 후계자에게만 계승권이 있었다. 슐레스비히 공국의 계승법 적용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었다.

프레데리크 7세는 프리드리히 3세의 마지막 남계 후손이었기 때문에, 그의 사후 덴마크 왕위는 여성 친족에게 넘어갈 수 있었지만, 살리카 법에 따르면 홀슈타인 공작위는 올덴부르크 왕조의 방계 가문인 아우구스텐부르크 가문과 글뤽스부르크 가문에게 계승될 가능성이 있었다. 특히 아우구스텐부르크의 프레데리크는 살리카 법에 따른 우선 상속권자로 여겨졌으나, 그의 아버지가 제1차 슐레스비히 전쟁 이후 1852년 런던 의정서에 따라 금전적 보상을 받고 계승권을 포기한 전력이 있어 문제가 복잡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지역의 독일계 주민들 사이에서는 민족주의 감정이 고조되어 덴마크로부터의 독립 움직임이 강해졌다. 덴마크 왕실과 유럽 열강들은 덴마크 왕국과 두 공국의 분리를 막고 후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논의를 거듭했고, 결국 1852년 런던 의정서를 통해 글뤽스부르크 가문의 크리스티안 왕자를 프레데리크 7세의 추정상속인으로 결정했다. 그러나 이 결정은 모든 이해 당사자를 만족시키지 못했고, 특히 아우구스텐부르크 가문과 독일 민족주의자들의 반발을 샀다. 결국 프레데리크 7세가 1863년 사망하자 계승 문제는 제2차 슐레스비히 전쟁으로 비화되는 주요 원인이 되었다.

3. 1. 아우구스텐부르크 가문

슐레스비히-홀슈타인 공국은 덴마크 왕국과는 다른 계승 원칙을 따랐다. 이 지역은 살리카 법에 따라 홀슈타인의 헤드비히 여왕의 남성 후손에게만 상속될 수 있었다. 프레데리크 7세는 프리드리히 3세의 마지막 남계 후손이었기에, 덴마크 왕위 계승법에 따라서는 그의 사후 여성 친족에게 왕위가 넘어갈 수 있었지만, 슐레스비히-홀슈타인 공국에는 이 법이 적용되지 않았다.

프레데리크 7세 사후, 살리카 법에 따른 슐레스비히-홀슈타인 공국의 상속권자는 아우구스텐부르크 공작 가문의 프리드리히였다. 그는 프레데리크 7세가 사망하자 자신을 슐레스비히-홀슈타인 공작 프리드리히 8세라고 선포했다.

그러나 프리드리히의 아버지인 크리스티안 아우구스트 2세(아우구스텐부르크 공)는 제1차 슐레스비히 전쟁 이후인 1852년 5월 8일, 런던 의정서에 따라 금전적 보상을 받는 대가로 슐레스비히홀슈타인 공국에 대한 자신의 계승권을 포기한 상태였다. 이 포기 선언은 양 공국에 공포되었으며, 국제적으로도 확인되었다. 이 때문에 아들 프리드리히는 공식적으로 계승 자격이 없다고 간주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 민족주의자들 사이에서 그는 독립 운동의 상징적인 인물로 부상했다.

1863년 11월 프레데리크 7세가 사망하자, 아우구스텐부르크의 프리드리히는 아버지의 계승권 포기에도 불구하고 다시 한번 슐레스비히-홀슈타인 공국의 계승을 주장했다. 프레데리크 7세는 올덴부르크 왕조의 마지막 남계 국왕으로서 슐레스비히와 홀슈타인의 공작 지위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의 죽음으로 남계 혈통이 단절되면서 공국의 계승 문제가 복잡해졌다. 이러한 계승권 주장의 차이는 결국 제2차 슐레스비히 전쟁의 발발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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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2. 글뤽스부르크 가문



프레데리크 7세는 세 번 결혼했지만 적법한 후계자를 얻지 못했다. 후계자 없이 중년에 접어들면서, 그의 사촌인 글뤽스부르크의 크리스티안 왕자(1818~1906)가 1852년 그의 추정상속인으로 선택되었다. 크리스티안 왕자는 덴마크의 크리스티안 3세의 부계 후손이었다. 1863년 프레데리크 7세가 사망하자 크리스티안 왕자는 크리스티안 9세로 왕위에 올랐다.

당시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지역의 독일계 주민들 사이에서는 민족주의 감정이 고조되고 있었다. 이로 인해 두 공국을 덴마크 왕권 아래 통합하려는 계획은 국제적으로나 공국 내부에서나 합의를 얻기 어려웠다. 두 공국은 전통적으로 살리카 법에 따라 홀슈타인의 헤드비히 여왕의 남성 후손들에게 상속되어 왔다. 이 원칙에 따르면 프레데리크 7세 사후의 상속인은 아우구스텐부르크 공작 프리드리히였다. 그는 프레데리크 7세 사망 후 자신을 슐레스비히-홀슈타인 공작으로 선포했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는 1852년 5월 8일 런던 의정서에 따라 보상을 받는 대가로 슐레스비히와 홀슈타인 공국 계승권을 포기했었기 때문에, 프리드리히의 계승 자격에는 논란이 있었다. 그의 아버지가 계승권을 포기했음에도 불구하고, 프리드리히는 독일 민족주의 운동의 상징적인 인물이 되었다. 런던 의정서는 제1차 슐레스비히 전쟁을 종결시킨 조약이었다.

덴마크 역시 (1953년 왕위 계승법 개정 전까지) 살리카 법을 따랐지만, 이는 덴마크 최초의 세습 군주였던 프리드리히 3세의 후손에게만 적용되었다. 프레데리크 7세는 프리드리히 3세의 마지막 남계 후손이었기 때문에, 그의 사후에는 반살리카 원칙에 따라 여성 후계자에게 왕위가 넘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이 규정을 덴마크 국왕이 동군연합 형태로 통치해 온 슐레스비히와 홀슈타인 공국에도 적용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해석이 엇갈렸다. 이 문제는 결국 별도의 입법 과정을 통해 해결되었다.

프레데리크 7세의 가장 가까운 여성 친척은 그의 아버지 크리스티안 8세의 이복누이인 덴마크의 루이제 샤를로테 공주의 자녀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홀슈타인 계승 자격이 없었고, 슐레스비히에 대한 계승권도 논란의 여지가 있었다. 프레데리크 7세의 반살리카 상속 순위에서 더 앞서는 인물은 프레데리크 6세의 딸들인 덴마크의 캐롤라인 공주와 빌헬미네 마리 공주였으나, 두 사람 모두 자녀가 없었다. 그 다음 순위는 프레데리크 6세의 여동생인 덴마크의 루이제 아우구스테 공주였는데, 그녀는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의 살리카 법 상속자인 아우구스텐부르크 공작과 결혼했지만, 캐롤라인과 빌헬미네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덴마크 왕위 계승권이 없었다.

글뤽스부르크 가문은 덴마크의 프리드리히 5세의 딸을 통해 프리드리히 3세의 여성 후손으로서 덴마크 왕위 계승권을 가졌고, 동시에 슐레스비히-홀슈타인 공국에 대한 남계 계승권도 (비록 하위 순위였지만) 가지고 있었다. 이 가문에 속한 인물이 바로 크리스티안 왕자(1818~1906)와 그의 형제들이었다.

글뤽스부르크의 크리스티안 왕자는 여러 요인으로 인해 유력한 후계자로 부상했다. 그는 프레데리크 6세와 마리 소피 왕비 부부의 "양손자"(실제로는 마리 왕비의 조카이자 프레데리크 6세의 사촌의 아들)로서 왕실과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또한 덴마크인으로 자랐고 덴마크어를 사용하며 왕가의 영지에서 생활했기 때문에, 독일 민족주의와는 거리가 멀었다. 이는 다른 독일계 공작 가문들과 달리 덴마크인들에게 호감을 주는 요소였다. 그는 프리드리히 3세의 후손으로서 덴마크 왕위 계승 자격이 있었고, 별도로 슐레스비히-홀슈타인 공국 계승권도 가지고 있었지만, 두 경우 모두 최우선 순위는 아니었다.

결정적으로 크리스티안 왕자는 1842년 헤세-카셀의 루이제 공주와 결혼했다. 루이제 공주는 당시 프레데리크 7세와 가장 가까운 여성 친척이었던 덴마크의 루이제 샤를로테 공주의 딸이었다. 루이제 공주의 어머니와 형제들은 그녀와 남편 크리스티안 왕자를 위해 자신들의 덴마크 왕위 계승권을 포기했다. 이로써 크리스티안 왕자의 아내는 사실상 프레데리크 7세의 가장 유력한 여성 상속인이 되었다. 복잡했던 덴마크 왕위 계승 문제는 1852년 새로운 법률 제정을 통해 글뤽스부르크의 크리스티안 왕자를 프레데리크 7세의 공식 후계자로 지정하면서 해결되었다.

1863년 프레데리크 7세는 글뤽스부르크성에서 사망하여 로스킬레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그의 뒤를 이어 크리스티안 왕자가 크리스티안 9세로 즉위했다.

그러나 1863년 11월, 아우구스텐부르크의 프리드리히가 슐레스비히-홀슈타인 공작위를 주장하고 나섰다. 프레데리크 7세는 덴마크 국왕이자 동시에 슐레스비히-홀슈타인 공작이었지만, 그의 사망으로 덴마크 왕가의 남계 혈통이 단절되면서 공국의 상속 문제가 다시 불거진 것이다. 이 계승 분쟁은 결국 제2차 슐레스비히 전쟁으로 이어졌다.

3. 3. 스웨덴과의 연합 모색

프레데리크 7세는 당시 유행하던 범스칸디나비아주의에 공감하고 있었다. 그는 런던 의정서에 의해 결정된 글뤼크스부르크 왕가의 왕위 계승보다는 스웨덴 왕실과의 연합을 모색하기도 했다. 당시 스웨덴 국왕 오스카르 1세와 그의 아들 카를 15세는 범스칸디나비아주의를 통해 왕권 강화를 도모하며 이 운동에 열성적이었다. 프레데리크 7세와 카를 15세는 덴마크와 스웨덴을 동군연합 형태의 연합 왕국으로 만들고, 카를 15세가 프레데리크 7세의 양자가 되는 방안까지 논의했다.

특히 덴마크 내부에서는 커져가는 독일의 위협에 맞서기 위해 스웨덴과의 연합이 현실적인 대안으로 진지하게 논의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범스칸디나비아주의의 확산과 맞물려 더욱 힘을 얻었다.

그러나 이러한 움직임은 주변 유럽 열강들의 경계심을 불러일으켰고, 북유럽에 대한 외교적 압력으로 이어졌다. 범스칸디나비아주의는 북유럽 민중 사이에서 큰 호응을 얻었지만, 정작 각국 정부는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특히 스웨덴 정부는 베르나도테 왕조가 덴마크 왕위를 계승하는 것에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으며, 덴마크가 처한 슐레스비히-홀슈타인 문제에 대해서도 적극적인 해결 의지를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레데리크 7세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스웨덴의 지원 가능성에 대한 기대를 놓지 않았다.

3. 4. 결과



프레데리크 7세는 세 번 결혼했지만 적통 후계자를 남기지 못했다. 그가 후계자 없이 중년에 이르자, 그의 사촌인 글뤼크스부르크의 크리스티안 왕자(1818~1906)가 1852년 추정상속인으로 선택되었다. 크리스티안 왕자는 덴마크의 크리스티안 3세의 부계 후손이었다. 프레데리크 7세가 1863년 사망하자 크리스티안 왕자는 크리스티안 9세로 즉위했다.

슐레스비히와 홀슈타인의 독일어 사용 지역에서는 민족주의 감정이 고조되었으나, 이 공국들을 덴마크 왕국 아래 통합하는 것에 대해 국제적으로나 공국 내부적으로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 공국들은 과거 홀슈타인의 헤드비히 여왕의 후손들 사이에서 살리카 법에 따라 상속되어 왔다. 프레데리크 7세 이후 살리카 법에 따른 상속인은 아우구스텐부르크 공작 프레데리크였다. 그는 프레데리크 7세 사후 자신을 슐레스비히-홀슈타인 공작으로 선포했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는 제1차 슐레스비히 전쟁을 종결시킨 런던 의정서 (1852)에 따라 1852년 5월 8일, 보상을 받는 대가로 슐레스비히와 홀슈타인 공국 계승권을 포기했기 때문에, 프레데리크 공작은 계승 자격이 없다고 여겨졌다. 그럼에도 그는 독일 민족주의 독립 운동의 상징적인 인물이 되었다.

덴마크는 덴마크의 프리드리히 3세의 후손에게만 적용되는 살리카 법을 따르고 있었으나 (1953년 왕위 계승법 개정 전까지), 프레데리크 7세는 프리드리히 3세의 마지막 남계 후손이었다. 따라서 그의 먼 친척인 아우구스텐부르크 가문과 글뤼크스부르크 가문은 덴마크 왕위 계승 자격은 없었지만, 슐레스비히와 홀슈타인 공국에 대한 세습 권리는 유지했다. 프레데리크 7세의 사망으로 덴마크 왕위는 반살리카 법에 따라 여성 후계자에게 넘어갈 수 있었지만, 이 법을 덴마크 국왕이 동군연합으로 통치해 온 슐레스비히와 홀슈타인 공국에 적용할 수 있는지에 대한 해석 차이가 있었다. 이 문제는 결국 새로운 계승자를 확정하는 별도의 입법 과정을 통해 해결되었다.

프레데리크 7세의 가장 가까운 여성 친척은 고모인 덴마크의 루이제 샤를로테 공주의 자녀들이었지만, 이들은 홀슈타인 계승 자격이 없었고 슐레스비히에 대한 권리도 논쟁의 여지가 있었다. 프레데리크 7세의 반살리카 법 상속녀는 덴마크의 캐롤라인 공주와 그의 이혼한 아내 빌헬미네였으나 둘 다 자녀가 없었다. 그 다음 순위는 프레데리크 6세의 누이인 덴마크의 루이제 아우구스테 공주였는데, 그녀는 아우구스텐부르크 공작과 결혼했지만, 캐롤라인과 빌헬미네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계승권이 없었다.

글뤼크스부르크 가문 역시 덴마크의 프리드리히 5세의 딸을 통해 프리드리히 3세의 반살리카 상속인이자,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의 하위 남계 상속인이었다. 이 가문의 크리스티안 왕자(1818~1906)는 덴마크의 프리드리히 6세와 헤센카셀의 마리 조피 왕비 부부와 가까운 사이였고, 덴마크어를 사용하며 자랐으며 다른 독일계 왕자들과 달리 덴마크에 맞서 싸우지 않았다. 그는 덴마크 왕위 계승 자격은 있었지만 우선 순위는 아니었고, 공국 계승 자격도 있었지만 역시 우선 순위는 아니었다. 크리스티안 왕자는 프레데리크 7세의 가장 가까운 여성 친척의 딸인 헤센카셀의 루이제 공주와 결혼했는데, 루이제의 어머니와 형제들은 그녀와 남편을 위해 자신들의 권리를 포기했다. 이로써 크리스티안 왕자의 아내가 프레데리크 7세의 가장 가까운 여성 상속인이 되었다. 이러한 복잡한 상황 속에서 덴마크 의회는 1852년 입법을 통해 글뤼크스부르크의 크리스티안 왕자를 프레데리크 7세의 공식 후계자로 결정했다.

프레데리크 7세는 1863년 글뤽스부르크에서 사망하여 로스킬레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그의 뒤를 이어 크리스티안 9세가 즉위했다.

프레데리크 7세의 사망 직후인 1863년 11월, 아우구스텐부르크의 프레데리크는 자신이 슐레스비히와 홀슈타인 공국의 정당한 계승자라고 주장하며 독립을 선포했다. 이는 공국의 독일계 주민들로부터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프로이센 왕국오스트리아 제국은 덴마크가 제정한 11월 헌법에 반대하며 제2차 슐레스비히 전쟁을 일으켰다. 전쟁 결과, 1866년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은 프로이센에 병합되었다. 아우구스텐부르크 공작 가문은 이후에도 슐레스비히-홀슈타인 공작 칭호를 사용했으나, 1931년에 단절되었다.

4. 유산



프레데리크 7세는 근대 덴마크 역사상 가장 사랑받는 국왕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이는 그가 절대 군주제를 포기한 점과 그의 개인적인 성격 덕분이었다. 술을 즐기고 때때로 기이한 행동을 보이는 등 당대에 기록된 약점들도 있었지만, 그는 배우와 같은 재능도 지니고 있었다. 소탈하면서도 진정으로 호쾌한 면모를 보였으며, "단순하지만 위엄 있는 군주"로서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덴마크 곳곳을 여행하며 일반 백성들과 직접 만나 교류하기도 했다. 또한 열렬한 골동품 수집가였는데, 훗날 덴마크 고고학자 P.V. 글롭은 프레데리크 7세가 다른 누구보다 덴마크 유물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높이는 데 크게 기여했다고 평가했다.[9]

5. 훈장

프레데리크 7세는 덴마크 국내 훈장뿐만 아니라 유럽 여러 국가로부터 다양한 훈장을 수여받았다.[10][11]

5. 1. 덴마크 훈장


  • 코끼리 훈장 작위, 1817년 10월 28일[10]
  • 덴마크 훈장 십자훈장[10]
  • 덴마크 훈장 대십자장, 1841년 6월 10일[10]

5. 2. 외국 훈장

[11]

  • 안할트 공국: 알베르트 곰 훈장 대십자장, 1840년 12월 17일[12]
  • 오스트리아 제국: 헝가리 성 스테판 훈장 대십자장, 1849년[13]
  • 벨기에: 레오폴드 훈장 대숙위장, 1857년 3월 20일[14]
  • 브라질 제국: 페드루 1세 훈장 대십자장
  • 프랑스 제국: 레지옹 도뇌르 훈장 대십자장
  • 하노버 왕국[15]
  • * 하노버 성 조지 훈장 작위, 1851년
  • * 왕립 귀르피크 훈장 대십자장 (왕립 겔프 훈장의 다른 이름으로 추정되나, 링크는 겔프 훈장으로 연결)
  • 헤센: 헤센-카셀 황금 사자 훈장 작위
  • 이탈리아 왕국: 수태고지 훈장 작위, 1861년 8월 25일[16] (훈장 명칭 수정)
  • 네덜란드: 윌리엄 군사 훈장 대십자장, 1849년 6월 21일[17] (훈장 명칭 수정)
  • 올덴부르크: 페터 프리드리히 루트비히 공작 훈장 대십자장, 금관 휘장 포함, 1848년 2월 10일[18]
  • 포르투갈 왕국: 삼 훈장 띠 대십자장[19]
  • 프로이센 왕국:
  • * 검은 독수리 훈장 작위, 1840년 12월 14일[20]
  • * 붉은 독수리 훈장 대십자장
  • 러시아 제국:
  • * 성 안드레 훈장 작위 (훈장 명칭 수정)
  • * 알렉산드르 네프스키 훈장 작위
  • * 백색 독수리 훈장 작위 (러시아 제국 시기 포함)
  • * 성 안나 훈장 1등급 작위
  • 스페인: 금모피 훈장 작위, 1848년 2월 25일[21] (훈장 명칭 수정)
  • 스웨덴-노르웨이:
  • * 세라핌 훈장 작위, 1841년 6월 14일[22]
  • * 찰스 13세 훈장 작위, 1853년 4월 11일[23] (훈장 명칭 수정)
  • * 성 올라프 훈장 대십자장
  • 튀니스: 후세이니드 왕가 훈장[24]
  • 시칠리아 왕국: 성 야누아리우스 훈장 작위, 1848년[25] (훈장 명칭 수정)

6. 가계도

프레데리크 7세의 가계
세대관계이름비고
본인프레데리크 7세
부모아버지크리스티안 8세
어머니메클렌부르크-슈베린 공녀 샤를로테 프레데리카
조부모친할아버지덴마크・노르웨이 왕세자 프레데리크
친할머니메클렌부르크-슈베린 공녀 소피아 프레데리카
외할아버지메클렌부르크-슈베린 대공 프리드리히 프란츠 1세
외할머니작센-고타-알텐부르크 공녀 루이제(1756–1808)
증조부모친조부의 아버지프레데리크 5세
친조부의 어머니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 공녀 율리아나 마리아
친조모의 아버지메클렌부르크-슈베린 공작 루이외조부의 아버지와 동일 인물
친조모의 어머니작센-코부르크-잘펠트 공녀 샤를로테 소피아외조부의 어머니와 동일 인물
외조부의 아버지메클렌부르크-슈베린 공작 루이친조모의 아버지와 동일 인물
외조부의 어머니작센-코부르크-잘펠트 공녀 샤를로테 소피아친조모의 어머니와 동일 인물
외조모의 아버지작센-고타-알텐부르크 왕자 요한 아우구스트
외조모의 어머니루이제 레우스-슐라이츠 백작부인


참조

[1] 웹사이트 Frederik VII, Konge af Danmark https://runeberg.org[...] Salmonsens konversationsleksikon 2016-08-15
[2] 서적 Kongelig Dåb. Fjorten generationer ved Rosenborg-døbefonten Forlaget Hovedland
[3] 뉴스 Margrethe could be your Queen http://politiken.dk/[...] Politiken 2009-10-02
[4] 서적 Getes Erindringer Ådalen
[5] 웹사이트 DIS-Forum :: AneEfterlysning :: Louise Rasmussen (Danner) http://www.dis-danma[...]
[6] 서적 Hemmelige Efterretninger om de danske Konger efter souveraineteten Copenhagen
[7] 웹사이트 1863 Danish coin https://en.numista.c[...]
[8] 서적 Frederik 7. En kongeskæbne Aschehoug Dansk Forlag
[9] 서적 The Bog People: Iron Age Man Preserved Faber and Faber Limited
[10] 서적 Der Elephanten-Orden und seine Ritter: eine historische Abhandlung über die ersten Spuren dieses Ordens und dessen fernere Entwicklung bis zu seiner gegenwärtigen Gestalt, und nächstdem ein Material zur Personalhistorie, nach den Quellen des Königlichen Geheimen-Staatsarchivs und des Königlichen Ordenskapitelsarchivs zu Kopenhagen https://books.google[...] Gedruckt in der Berlingschen Officin
[11] 서적 Statshaandbog for Kongeriget Danmark for Aaret 1861 https://dis-danmark.[...] J.H. Schultz A.-S. Universitetsbogtrykkeri 2020-05-09
[12] 서적 Staats- und Adreß-Handbuch für die Herzogthümer Anhalt-Dessau und Anhalt-Köthen: 1851 https://books.google[...] Katz
[13] 웹사이트 A Szent István Rend tagjai http://tornai.com/re[...]
[14] 서적 Le livre d'or de l'ordre de Léopold et de la croix de fer https://books.google[...] lelong
[15] 서적 Hof- und Staatshandbuch für das Königreich Hannover: 1861 https://archive.org/[...] Berenberg
[16] 서적 Notizia storica del nobilissimo ordine supremo della santissima Annunziata. Sunto degli statuti, catalogo dei cavalieri https://books.google[...] Eredi Botta 2019-03-04
[17] 웹사이트 Militaire Willems-Orde: Frederik VII https://www.defensie[...] 1849-06-21
[18] 서적 Hof- und Staatshandbuch des Großherzogtums Oldenburg: für das Jahr 1861 unknown
[19] 웹사이트 Frederick VII's Miniature Orders http://www.kongernes[...] 2020-05-10
[20] 서적 Liste der Ritter des Königlich Preußischen Hohen Ordens vom Schwarzen Adler unknown
[21] 간행물 Caballeros Existentes en la Insignie Orden del Toison de Oro https://babel.hathit[...] 2020-05-09
[22] 서적 Kungliga Serafimerorden: 1748–1998
[23] 서적 Riddare af Konung Carl XIII:s orden: 1811–1900: biografiska anteckningar http://www.archive.o[...] Eksjö, Eksjö tryckeri-aktiebolag
[24] 웹사이트 Nichan ad-Dam, ou ordre du Sang, institué... – Lot 198 https://www.beaussan[...]
[25] 서적 Vicende e personaggi dell'Insigne e reale Ordine di San Gennaro dalla sua fondazione alla fine del Regno delle Due Sicilie http://www.socist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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