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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르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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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알렉산드르 1세는 파벨 1세의 장남으로, 예카테리나 2세의 총애를 받으며 성장하여 러시아 제국의 황제가 되었다. 그는 자유주의 교육을 받았으나, 즉위 후 비밀 위원회와 스페란스키 개혁을 통해 입헌군주제와 농노제 폐지를 시도했으나, 귀족들의 반발과 나폴레옹 전쟁으로 인해 좌절되었다. 나폴레옹 전쟁에서 승리한 후 빈 회의를 주도하며 신성 동맹을 결성했으나, 말년에는 반동 정치로 돌아서 종교에 몰두하다가 급사했다. 그의 죽음 이후 러시아에서는 데카브리스트의 난이 일어나는 등 혼란이 발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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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르 1세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조지 도가 그린 알렉산드르 1세 초상화, 1826년
초상화, 조지 도, 1826년
이름알렉산드르 1세 파블로비치
로마자 표기Aleksandr I Pavlovich
러시아어 표기Александр I Павлович
별칭축복제
전체 이름알렉산드르 파블로비치 로마노프
로마자 전체 이름Aleksandr Pavlovich Romanov
알렉산드르 1세 서명
서명
통치
직위러시아 황제
재위 시작1801년 3월 23일
재위 종료1825년 12월 1일
즉위일1801년 9월 27일
전임자파벨 1세
후임자니콜라이 1세
폴란드 왕폴란드 왕국의 왕
폴란드 왕 재위 시작1815년
폴란드 왕 재위 종료1825년
폴란드 전임자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1세
폴란드 후임자니콜라이 1세
생애
출생일1777년 12월 23일
출생지러시아 제국, 상트페테르부르크, 겨울 궁전
사망일1825년 12월 1일
사망지러시아 제국, 타간로크, 알렉산드르 1세 궁전
매장일1826년 3월 13일
매장지상트페테르부르크, 성 베드로와 바울 대성당
가문
왕조홀슈타인-고토르프-로마노프 왕조
가문로마노프가
아버지파벨 1세
어머니소피 도로테아 폰 뷔르템베르크
가족 관계
배우자루이제 폰 바덴 (1793년 결혼)
자녀엘리자베타 알렉산드로브나
니콜라이 루카시 (사생아)
마리아 (실제 아버지: 아담 예지 차르토리스키)
엘리자베타 (실제 아버지: 알렉세이 오코트니코프)
소피아 (서자)
자녀 더보기더보기...
종교
종교러시아 정교회
군사 경력
소속러시아 제국 육군
주요 전투제3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
아우스터리츠 전투
제6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
라이프치히 전투
파리 전투
핀란드 전쟁
기타
핀란드 대공핀란드 대공국의 대공
핀란드 대공 재위 시작1809년 9월 17일
핀란드 대공 재위 종료1825년 12월 1일
핀란드 전임자스웨덴 왕자 칼 구스타프
핀란드 후임자니콜라이 1세

2. 생애

조지 도(George Dawe)가 그린 알렉산드르 1세의 초상화 (1817년)


알렉산드르 1세는 1777년 12월 23일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파벨 1세와 마리아 표도로브나 사이의 맏아들로 태어났다.[2] 그는 할머니인 예카테리나 2세의 손에서 자랐으며[3], 계몽주의 사상과 러시아 전제정치의 전통이라는 상반된 영향을 받으며 성장했다. 1793년, 15세의 나이에 14세의 루이제 공주(엘리자베타 알렉세예브나)와 결혼했다.

1801년 3월 23일, 아버지 파벨 1세가 암살된 후 23세의 나이로 황제에 즉위했다. 즉위 초에는 계몽주의 사상의 영향을 받아 개혁을 시도했으나, 나폴레옹 전쟁의 발발과 국내외 정세 변화 속에서 점차 보수적인 입장으로 선회했다.

그의 치세는 나폴레옹과의 관계로 점철되었다. 초기에는 반(反)나폴레옹 대프랑스 동맹에 가담했으나, 아우스터리츠 전투프리틀란트 전투에서의 패배 이후 1807년 틸지트 조약을 맺고 나폴레옹과 일시적인 동맹 관계를 형성하기도 했다. 그러나 대륙봉쇄령과 폴란드 문제 등으로 관계가 악화되어 결국 1812년 나폴레옹의 러시아 침공을 맞게 된다. 이 전쟁에서 러시아는 초토화 작전과 혹독한 겨울 추위를 이용해 프랑스 대군을 격퇴하며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고, 이는 러시아에서 조국 전쟁으로 불린다.

나폴레옹 몰락 이후 알렉산드르 1세는 유럽의 최강 군주로 부상하여 빈 회의를 주도하고, 기독교 정신에 입각한 군주 간의 동맹인 신성 동맹 결성을 제창하며 전후 유럽 질서 재편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그러나 통치 말기에는 점차 신비주의에 빠져들고 국내 정치에서는 보수 반동적인 경향을 보였다.

정신적으로 지쳐가던 알렉산드르 1세는 1825년 가을, 황후의 요양을 위해 방문한 남부 도시 타간로크에서 티푸스에 걸려 11월 19일(율리우스력) 47세의 나이로 급작스럽게 사망했다.[24]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여러 의혹과 함께 표도르 쿠즈미치 전설을 낳기도 했다.

2. 1. 즉위 이전

파벨 1세와 뷔르텐베르크의 소피 도로테아(러시아 이름 마리아 표도로브나)의 맏아들로, 1777년 12월 23일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났다.[2] 이름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수호성인인 알렉산드르 네프스키에서 따왔다.[10] 그는 태어나자마자 할머니인 예카테리나 2세에게 보내져 부모가 있는 가치나 궁전에서 떨어져 동생 콘스탄틴과 함께 여제의 손에서 양육되었다.[3][49] 1777년 12월 31일,[4] 겨울궁전 대성당[5]에서 사제장 이오안 이오아노비치 판필로프[7](예카테리나 2세의 고해사제)[8]에게 세례를 받았다. 대모는 예카테리나 2세였고, 대부는 신성 로마 황제 요제프 2세와 프리드리히 2세였다.[9]

1800년 블라디미르 보로비코프스키가 그린 알렉산드르 파블로비치 대공의 초상화


알렉산드르의 부인 엘리자베타 알렉세예브나의 영세


예카테리나 2세는 아들 파벨을 싫어하여 황제의 자질이 부족하다고 여겼고, 대신 손자인 알렉산드르에게 제위를 물려주려 했다.[11] 이를 위해 직접 자유주의 교육을 시키며 길렀다. 알렉산드르의 교육은 상반된 측면을 지녔다. 그는 할머니 예카테리나 2세의 자유로운 궁정 분위기와 스위스 출신 가정교사 프레데릭-세자르 드 라 아르프[50]로부터 루소의 인간애와 공화주의 사상을 흡수했다. 라 아르프는 자코뱅주의자로, 알렉산드르에게 강한 자유주의적 경향을 심어주었으나, 교육은 알렉산드르의 결혼으로 중단되어 불완전한 이상주의만을 남겼다. 동시에 그는 군사 총독이자 관리인이었던 니콜라이 살티코프로부터 러시아의 전통적인 전제정치 원칙을 배웠다. 살티코프는 알렉산드르가 할머니와 아버지 사이에서 정치적으로 처신하는 법을 가르쳤으며, 젊은 시절 프랑스 혁명폴란드 봉기에 동정적이던 알렉산드르가 아버지 파벨이 거주하는 가치나에 가서 군사 훈련에 참여하도록 이끌었다. 종교 교사였던 안드레이 아파나시예비치 삼보르스키는 영국에 오래 거주한 경험을 바탕으로 알렉산드르와 콘스탄틴에게 당시 러시아 황족에게는 드문 유창한 영어를 가르쳤다. 이러한 상반된 교육과 환경은 훗날 그가 교활하고 위선적이라는 평가를 받는 성격을 형성하는 데 영향을 미쳤을 수 있다.

1793년 10월 9일, 알렉산드르는 15세의 나이에 14세의 루이제 공주와 결혼했다. 루이제 공주는 결혼 후 엘리자베타 알렉세예브나라는 러시아 이름을 사용했다. 결혼식은 할머니 예카테리나 2세가 직접 주관했으며, 부부를 위해 알렉산드르 궁전을 지어주었다. 하지만 알렉산드르는 아내에게 부부로서의 애정보다는 형제애만을 느꼈다고 전해진다. 그는 화려한 예카테리나 2세의 궁정에서 벗어나 아버지 파벨 1세가 있는 가치나 궁전을 방문하며 점차 아버지에게 공감하게 되었다. 가치나에서는 소박한 프로이센식 군복을 입고 군사 훈련에 참여했지만, 성미가 급한 아버지 파벨의 격노를 겪기도 했다.

1796년 11월, 예카테리나 2세가 알렉산드르를 후계자로 지명하기 전에 사망하면서 아버지 파벨 1세가 황제로 즉위했다. 알렉산드르는 아버지의 통치를 비판적으로 보았으며, 러시아가 "광인들의 장난감"이 되었고 "절대 권력은 모든 것을 파괴한다"고 기록하기도 했다. 파벨 1세는 귀족들을 중심으로 많은 이들의 반감을 샀으며, 자신에 대한 음모를 의심했다. 결국 1801년 3월 11일 밤부터 12일 새벽 사이, 니콜라이 파닌 백작과 페테르부르크 총독 팔렌 백작 등이 이끄는 근위 연대가 파벨 1세가 거주하던 미하일롭스키 궁전에 난입하여 황제를 암살했다.

알렉산드르가 아버지의 암살 계획을 사전에 알았는지, 혹은 암살 실행일을 결정하는 데 관여했는지에 대해서는 역사가들 사이에서 논쟁이 있다. 그러나 아버지가 살해된 사실 자체에는 큰 충격을 받았고, 깊은 죄책감에 시달렸다고 전해진다. 이 사건과 할아버지 표트르 3세의 비극적인 죽음(1762년 궁정 쿠데타)을 경험하며 알렉산드르는 더욱 신중한 성격이 되었다. 그는 파벨 1세 암살 직후 반란 세력의 추대를 받아 1801년 3월 23일 황제로 즉위했다.

2. 2. 즉위 이후

1800년 러시아 제국(보라색)과 다른 유럽 제국들


알렉산드르 1세는 1801년 3월 23일 아버지 파벨 1세가 암살된 후 23세의 나이로 러시아 황제가 되었다.[1] 아버지를 살해한 음모에 그가 어느 정도 관여했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으나, 이 사건은 그에게 깊은 정신적 상처를 남긴 것으로 보인다.[1] 그는 즉위 당일 왕위를 계승했고[2], 그해 9월 15일 크렘린에서 대관식을 치렀다.

알렉산드르 1세의 기마 초상화, 프란츠 크뤼거 작 (1837년, 사후)


즉위 초 알렉산드르 1세는 계몽주의 사상의 영향을 받아 러시아의 비효율적인 중앙집권적 정부 시스템을 개혁하려는 의지를 보였다. 그는 빅토르 코추베이, 니콜라이 노보실체프, 파벨 스트로가노프, 아담 예지 차르토리스키 등 젊은 친구들로 구성된 비밀 위원회를 조직하여 입헌군주제 수립을 포함한 개혁 방안을 논의하게 했다.[1] 이후 자유주의 관료 미하일 스페란스키를 중용하여 정부 부처 개편, 국무원 설립 등 정부 개혁을 추진했다.[1] 또한 러시아의 고질적인 문제였던 농노제 개선에도 관심을 기울여 1803년 '자유 농민' 제도를 도입했으나, 이는 제한적인 조치에 그쳤다.[3] 교육 분야에서는 대학 설립 및 확충, 학문과 예술 지원에 힘썼으나, 통치 후반기에는 외국 학자들을 추방하기도 했다.[4] 1815년 이후에는 군대의 경제적 자립을 위한 군사촌 제도를 도입했다.[5]

알렉산드르 1세의 황제 문장


알렉산드르 1세는 복잡하고 모순적인 인물로 평가받는다. 나폴레옹은 그를 "교활한 비잔틴인"[5]으로, 메테르니히는 "달래야 할 광인"으로 보았다. 반면 토머스 제퍼슨은 그가 러시아 국민에게 자유주의 사상을 전파할 것으로 기대하기도 했다.[12]

즉위 직후 그는 아버지의 정책 일부를 뒤집고 영국과 평화를 맺었으며, 프로이센 왕국과 긴밀한 동맹을 구축했다.[6] 한때 나폴레옹을 찬양하기도 했으나, 앙리 드 부르봉 처형 사건 이후 환멸을 느끼고 반(反)나폴레옹 노선으로 돌아섰다.[6][7] 그는 대프랑스 동맹에 가담했으나 아우스터리츠 전투(1805)와 프리틀란트 전투(1807)에서 연이어 패배했다.

나폴레옹, 알렉산더 1세, 루이제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 여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 (틸지트, 1807)


결국 알렉산드르는 1807년 틸지트 조약을 통해 나폴레옹과 동맹을 맺었다. 나폴레옹은 세계 제국 분할 등을 제안하며 알렉산드르의 환심을 사려 했고,[6] 알렉산드르는 이 동맹을 이용해 스웨덴으로부터 핀란드를 획득(1809)하고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하려 했다.

19세기 아돌프 뢰른(Adolphe Roehn)의 그림, 틸지트(Tilsit)에서의 나폴레옹과 알렉산더 1세의 회담


그러나 대륙봉쇄령으로 인한 러시아의 경제적 타격, 폴란드 문제에 대한 이견, 나폴레옹의 올덴부르크 공국 합병 등으로 양국 관계는 급격히 악화되었다.[8] 알렉산드르는 영국과의 비밀 무역을 재개하며[9] 사실상 대륙 봉쇄령에서 이탈했다.[10]

1812년 최대 규모의 프랑스 제국


전쟁이 임박하자 알렉산드르는 스웨덴과 방위 조약을 맺고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을 종결시켜 외교적 대비를 마쳤다.[10] 1812년 나폴레옹이 러시아를 침공하자(프랑스의 러시아 침공), 러시아는 초토화 작전과 보로디노 전투 등 격렬한 저항, 혹독한 겨울 추위를 통해 프랑스 대군에게 괴멸적인 타격을 입혔다. 이 전쟁은 러시아에서 조국 전쟁으로 불리며, 나폴레옹 몰락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1812년 11월 나폴레옹의 대군 잔여 세력이 베레지나 강을 건너는 모습


러시아의 승리는 제6차 대프랑스 동맹 결성으로 이어졌고, 알렉산드르 1세는 동맹군을 이끌고 라이프치히 전투(1813)에서 승리한 뒤 1814년 3월 31일 파리에 입성하여 나폴레옹을 몰락시키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요한 페터 크라프트(Johann Peter Krafft)의 ''라이프치히 전투 승전 선포'' 삽화. 1813년 라이프치히 전투 이후 알렉산드르 1세, 프란츠 1세(오스트리아 황제),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프로이센 국왕) 회동 장면


1814년 파리에 진입하는 러시아 군대


나폴레옹 전쟁 이후 유럽 최강 군주로 부상한 알렉산드르는 전후 질서를 재편하기 위한 빈 회의(1814-1815)를 주도했다. 그는 기독교 정신에 입각한 군주 간의 연합체인 신성 동맹 결성을 제창했으나, 이는 다른 강대국들에게 러시아의 패권 야욕으로 비춰지기도 했다.[18] 이 시기 그는 바바라 폰 크뤼데너 등 종교적 신비주의자들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8] 빈 회의 결과, 그는 폴란드 입헌왕국의 왕위를 겸하게 되었다.

연합 군주들의 영국 방문 (1814년 6월)


빈 회의에서의 협상


초기에는 폴란드 헌법 제정[19][20]이나 핀란드 대공국 자치 인정[19][20] 등 자유주의적 면모를 보이기도 했지만, 1818년 이후 유럽 각지의 혁명 움직임에 충격을 받고 점차 보수화되었다. 그는 메테르니히의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되었고, 트로파우 회의(1820)에서는 과거 자신의 자유주의적 입장을 후회한다고 밝혔으며[23], 신성 동맹이 각국 내정에 간섭할 수 있다는 원칙을 용인했다.[9]

로렌스가 그린 알렉산더 1세 (1814-18년, 영국 왕실 소장)


1809년 포르보 의회에서 알렉산더 1세는 새로운 핀란드 헌법핀란드 헌법을 확인하고 핀란드를 자치적인 핀란드 대공국핀란드 대공국으로 만들었다.


1821년 그리스 독립 전쟁이 발발하자, 알렉산드르는 유럽의 안정 유지와 정교회 수호자로서의 역할 사이에서 갈등했다. 초기에는 메테르니히의 영향으로 그리스 봉기에 반대했으나,[6] 이후 오스트리아의 태도에 실망하고 러시아 내 여론에 따라 점차 그리스 독립을 지지하는 방향으로 선회했다.[6]

러시아-페르시아 전쟁 당시의 간자 전투


한편, 알렉산드르 1세 치세 동안 러시아는 캅카스에서도 영향력을 확장했다. 가자르 왕조 페르시아와의 전쟁(1804-1813)에서 승리하여 1813년 굴리스탄 조약을 체결하고, 현재의 다게스탄, 조지아, 아제르바이잔 대부분과 북부 아르메니아 일부를 포함한 광대한 영토를 획득했다.

1823년에는 러시아에 콜레라가 유행하자 방역 조치를 지시하기도 했다.

2. 2. 1. 비밀 위원회

알렉산드르 1세가 즉위할 당시 러시아는 표트르 1세 시대부터 추진된 서구화 정책의 누적된 문제들이 표면화되기 시작했다. 전제군주제가 서구화를 통해 국력 강화와 행정 개선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계몽주의 사상이 유입되었고, 이로 인해 입헌정치, 평등, 자유와 같은 개념이 확산되며 기존 러시아 전통 사회 및 정치 체제에 대한 비판이 거세졌다. 특히 농노제에 대한 비판은 사회악으로 여겨질 만큼 강하게 제기되었다.

이러한 사회적 요구가 분출되자 알렉산드르 1세는 초기에는 시대의 흐름에 부응하려는 노력을 보였다. 그는 비효율적인 중앙집권적 정부 시스템을 개혁하고자 했으며, 그 일환으로 즉위 직후 비공식 자문 기구인 비밀 위원회(Негласный комитет|네글라스니 코미테트ru)를 조직했다. 이 위원회는 황제의 젊은 시절 친구들이자 서구의 진보적인 계몽주의 사상에 밝았던 파벨 스트로가노프, 니콜라이 노보실체프, 빅토르 코추베이, 아담 예지 차르토리스키 등 젊은 귀족들로 구성되었다.

알렉산드르 1세가 직접 의장을 맡은 비밀 위원회에서는 러시아 제국의 근본적인 개조를 목표로 활발한 논의가 이루어졌다. 주요 의제는 전제정치에서 벗어나 법치 질서를 확립하기 위한 헌법 제정과 입헌군주제 도입, 농노제 폐지, 교육 제도 개혁 등이었다.

비밀 위원회의 논의는 여러 개혁안으로 이어졌으나, 실제 구현된 것은 일부에 그쳤다. 대표적으로 표트르 1세가 도입했던 참의회(Коллегии|콜레기ru) 제도가 폐지되고, 그 대신 외무, 육군, 해군, 내무, 재무, 문부(국민 계몽), 사법, 상무의 8개 부처가 신설되었다. 각 부처에는 장관이 임명되었고, 부처 간 업무 조정을 위해 장관 회의가 조직되었다.

농노제 폐지 문제 역시 위원회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졌지만, 실질적인 진전을 이루지는 못했다. 스트로가노프 등 일부 위원들은 농노 해방을 강력히 주장했으나, 당시 행정부와 귀족층의 이해 부족 및 강한 반발에 부딪혔다. 황제 자신도 특권층의 약화를 가져올 수 있는 급진적인 개혁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했다. 결국 1803년 지주가 자발적으로 농노를 토지와 함께 유상으로 해방하여 '자유 농민'으로 삼을 수 있도록 허용하는 칙령이 발표되었지만, 이는 극히 제한적인 조치에 불과했다. 대다수 농노의 처지는 변하지 않았고, 농노제는 이후 1861년 알렉산드르 2세에 의해 폐지될 때까지 존속하게 되었다.

알렉산드르 1세와 비밀 위원회가 추진한 개혁 구상은 귀족 계층을 중심으로 한 보수파의 거센 반발에 직면했다. 또한, 1805년 프랑스와의 전쟁이 발발하면서 국내 개혁은 뒷전으로 밀려났다. 결국 개혁 동력을 상실한 비밀 위원회는 1807년 해산되었다.

2. 2. 2. 스페란스키 개혁



집권 초기, 젊은 알렉산드르 1세는 러시아 제국이 의존해 온 비효율적이고 중앙집권적인 정부 시스템을 개혁하려는 강한 의지를 보였다. 그는 기존 장관들을 유임시키면서도, 자신의 젊고 열정적인 친구들인 빅토르 코추베이, 니콜라이 노보실체프, 파벨 스트로가노프, 아담 예지 차르토리스키로 구성된 비밀 위원회를 임명했다. 이 위원회는 계몽주의 사상에 따라 입헌군주제 수립을 목표로 하는 국내 개혁 계획을 세우는 임무를 맡았다.

몇 년 후, 자유주의적인 미하일 스페란스키가 황제의 가장 가까운 고문 중 한 명이 되어 개혁을 위한 정교한 계획을 세웠다. 정부 개혁의 일환으로, 표트르 1세가 창설했던 구 대학(콜레기야)은 폐지되고 황제에게 직접 책임을 지는 장관들이 이끄는 새로운 부처들이 설립되었다. 이는 1802년부터 몇 년에 걸쳐 현재와 유사한 장관 중심의 관료 제도로 확립되었으며, 처음에는 법무부, 외무부, 재무부, 국방부, 상업부, 문교부가 있었으나 후에 상업부가 폐지되고 경찰부가 신설되었다. 또한, 모든 부처 간의 문제를 다루기 위해 군주가 의장을 맡는 장관회의가 설치되었다. 입법 절차를 개선하기 위해 국무원이 설립되었는데, 이는 장차 대의제 입법부의 상원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되었다. 통치 상원은 제국의 최고 사법 기관으로 재편되었다. 1801년에 시작된 법전 편찬 작업은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완료되지 못했다.

스페란스키는 알렉산드르 1세의 명령에 따라 더욱 대담한 "국가 개조" 수준의 법제 개혁안을 제안했다. 이 개혁안은 헌법 제정, 황제 아래 입법·행정·사법의 분립, 법치주의에 기반한 입헌군주제 확립을 기본 방향으로 제시했다. 구체적으로는 황제가 임명하는 국가 평의회와 간접 선거로 선출되는 의회(두마)의 설립을 구상했다.

알렉산드르는 러시아의 또 다른 주요 문제인 농노의 지위 개선에도 관심을 보였다. 비록 농노 해방은 알렉산드르 2세 시대인 1861년에야 이루어졌지만, 알렉산드르 1세는 1801년에 국유 농민을 포함한 대부분의 계층에게 토지 소유권을 부여하고, 1803년에는 지주에 의해 자발적으로 해방된 농민들을 위한 새로운 사회 계층인 "자유 농민" 제도를 만들었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들은 대다수 농노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다.

하지만 스페란스키의 개혁안은 시대를 너무 앞서나갔고, 황제의 여동생이자 보수적인 예카테리나 파블로브나 대공녀를 비롯한 귀족과 관료층의 거센 반발에 부딪혔다. 스페란스키에 대한 반감이 커지는 가운데,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와의 관계 악화로 국내 안정이 중요해진 알렉산드르 1세는 개혁 추진을 주저하게 되었다. 결국 나폴레옹과의 대결을 앞두고 국내의 반발을 잠재울 필요성을 느낀 황제는 1812년 3월, 스페란스키를 국가 고문직에서 해임하고 니즈니 노브고로드로 추방함으로써 개혁은 좌절되었다.

2. 2. 3. 나폴레옹 전쟁

1801년 황제가 된 알렉산드르 1세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끊임없는 야심을 경계했다. 그는 영국과의 경제적 유대, 오스트리아 제국과의 전통적 우호 관계, 프랑스에 대한 적대 감정 등을 고려하여 1804년 영국이 주도하는 대프랑스 동맹에 가담했다. 또한 나폴레옹을 위험 인물로 여기고 유럽의 새로운 질서를 구상하고 있었다. 1805년에는 오스트리아, 러시아, 스웨덴 연합군이 영국과 함께 프랑스 및 동맹국 에스파냐와 맞섰다. 그러나 그해 12월,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오스트리아-러시아 연합군은 프랑스군에게 크게 패배했다. 오스트리아는 이후 전투에서 큰 타격을 입고 전쟁을 포기했지만, 러시아는 프로이센 왕국을 새로운 동맹으로 맞이하여 전쟁을 계속했다. 하지만 프로이센마저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에서 프랑스에게 패배했고, 러시아도 프리틀란트 전투에서 대패했다.

상황이 불리해지자 알렉산드르 1세는 정책을 바꿔 나폴레옹과 강화를 추진했다. 1807년 6월 25일, 틸지트에서 프로이센과 함께 프랑스와 틸지트 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으로 프로이센의 지위는 크게 약화되었지만, 러시아는 동유럽에서 지도적인 위치를 확보하며 프랑스를 제외한 유럽 대륙 최강대국으로 부상했다. 나폴레옹은 알렉산드르 1세에게 세계 제국 분할, 다뉴브 공국 할양, 핀란드 병합 자유 등을 제안하며 환심을 사려 했다.[14] 알렉산드르 1세는 나폴레옹을 지지하는 척하며 영국과 맞서는 한편, 다른 적대국들과의 전쟁을 통해 국경을 확장할 기회를 얻었다. 이 시기 러시아의 지배권은 서쪽의 그루지야 지방까지 이르렀다. 또한 틸지트 조약의 결과로 스웨덴과 전쟁(제2차 러시아-스웨덴 전쟁)을 벌여 1809년 프레데릭스함 조약으로 핀란드를 병합했고, 1806년부터 진행 중이던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에서는 1812년 베사라비아를 병합했다.

틸지트 조약 이후 잠시 평화가 찾아왔지만, 나폴레옹이 영국 고립을 위해 선포한 대륙봉쇄령은 양국 관계를 다시 악화시켰다. 농업 국가인 러시아는 영국으로 곡물 수출이 막히자 경제적으로 큰 타격을 입었고, 특히 대지주 귀족들의 불만이 커졌다. 러시아 내 보수층 귀족들은 "프랑스 혁명의 아들", "코르시카 출신의 벼락부자", "적그리스도"인 나폴레옹과의 동맹 자체에 비판적이었다. 또한, 알렉산드르 1세와 나폴레옹 사이의 개인적인 불신과 외교적 경쟁, 나폴레옹의 러시아 영토에 대한 야심 등이 겹치면서 1812년 전쟁의 원인이 되었다. 알렉산드르 1세는 나폴레옹이 폴란드인들을 부추기는 것에 항의하며 폴란드 복원 의도를 의심했고, 나폴레옹 역시 러시아가 대륙 봉쇄령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는다고 불만을 가졌다.[15] 나폴레옹이 알렉산드르 1세의 여동생 안나 파블로브나와의 결혼을 제안했으나 거절당하고, 오스트리아 황녀 마리 루이즈와 약혼을 발표하면서 관계는 더욱 냉각되었다. 결정적으로 프랑스가 알렉산드르 1세의 친척(여동생 예카테리나의 남편)이 다스리던 올덴부르크 대공국을 합병하면서 동맹은 파탄에 이르렀다. 결국 1810년 러시아는 대륙봉쇄령에서 사실상 이탈하고 영국과의 비밀 무역을 재개했다.

전쟁이 임박하자 알렉산드르 1세는 외교적으로 대비했다. 1812년 4월 스웨덴과 상호 방위 조약을 맺고, 5월에는 부쿠레슈티 조약으로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을 종결시켜 남쪽 국경을 안정시켰다.

1812년 6월, 나폴레옹은 프랑스군 15만 명과 동맹국 원군을 합쳐 총 60만 명에 달하는 대군(Grande Armée)을 이끌고 러시아를 침공했다(프랑스의 러시아 침공). 프랑스군은 라트비아, 벨라루스, 우크라이나 국경 세 방향으로 공격을 시작했다. 러시아는 서부 국경의 20만 병력을 3개 부대로 나누어 방어에 나섰다. 알렉산드르 1세와 당시 총사령관 미하일 바르클라이 드 톨리는 초기에는 의도적으로 후퇴하며 초토화 작전을 펼치는 장기전을 계획했다. 러시아군은 후퇴하면서 프랑스군이 이용할 식량과 가옥을 모두 불태우고, 기습 공격으로 프랑스군에게 피해를 입혔다. 스몰렌스크 전투에서 러시아군은 격렬히 저항했으나 후퇴했고, 프랑스군 역시 2만 명 이상의 손실을 입었다.

귀족들의 압력으로 바르클라이 드 톨리 대신 미하일 쿠투조프 공작이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쿠투조프는 후퇴 전략에는 동의했지만, 옛 수도 모스크바를 싸움 없이 내주는 것을 반대했다. 그는 모스크바 서쪽 약 약 112.65km 떨어진 보로디노에서 결전을 준비했다. 1812년 9월 7일 벌어진 보로디노 전투는 나폴레옹 전쟁 중 가장 치열하고 유혈이 낭자한 단일 전투였다. 25만 명이 넘는 병력이 참전하여 7만 명 이상의 사상자를 냈다. 러시아군은 약 4만 명, 프랑스 및 동맹군은 약 6만 명의 사상자를 기록했다. 전투는 결정적인 승패 없이 끝났지만, 쿠투조프는 병력 손실을 고려하여 모스크바 남동쪽으로 후퇴하기로 결정했다.

9월 14일, 나폴레옹 군대는 텅 빈 모스크바에 입성했다. 그러나 입성 직후 도시 전체에 대화재가 발생하여 프랑스군이 머물 곳과 보급품이 대부분 소실되었다. 화재 원인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으나, 프랑스군의 약탈 중 실화 또는 러시아 총독 표도르 로스톱친 백작의 의도적인 방화 등이 거론된다. 모스크바 점령과 크렘린 훼손은 알렉산드르 1세의 나폴레옹에 대한 감정을 격렬한 증오로 바꾸었다.[17] 나폴레옹은 알렉산드르 1세가 항복할 것을 기대했지만, 황제는 응하지 않았다. 혹독한 추위와 식량 부족, 계속되는 러시아군의 게릴라전과 농민 파르티잔 공격에 시달리던 프랑스군은 결국 10월 중순 퇴각을 시작했다. 퇴각 과정은 처참했다. 굶주림과 추위, 러시아군의 끊임없는 추격으로 프랑스군은 괴멸적인 피해를 입었다. 특히 11월 베레지나 전투에서 큰 손실을 겪었다. 1812년 말, 나폴레옹이 프랑스로 돌아왔을 때 60만 대군 중 살아남은 병력은 약 2만 7천 명에 불과했다.

1812년 전쟁은 러시아에서 조국 전쟁으로 불리며, 외세의 침략에 맞선 영웅적인 투쟁으로 기억된다. 이 승리는 러시아인들의 민족 의식을 크게 고취시켰고, 후대의 많은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또한 나폴레옹 전쟁의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어 프랑스의 패권을 약화시키고 제6차 대프랑스 동맹 결성을 촉발했다.

러시아의 승리는 제6차 대프랑스 동맹 결성으로 이어졌다. 1813년, 쿠투조프가 사망했지만 러시아군은 알렉산드르 1세를 따라 프랑스군을 계속 추격했다. 동맹군은 1813년 독일 전역에서 초반에는 고전했으나, 오스트리아의 참전 이후 라이프치히 전투(1813년 10월)에서 나폴레옹에게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이 전투로 친프랑스 라인 동맹이 붕괴되고 나폴레옹의 독일 지배가 끝났다. 알렉산드르 1세는 동맹군 최고 사령관이자 핵심 군주로서 동맹군을 이끌고 프랑스 본토로 진격할 것을 주장했고, 1814년 1월 동맹군은 프랑스 북동부로 진입했다. 수적 열세에도 나폴레옹은 브리엔 전투, 라 로티에르 전투 등에서 분전했지만, 동맹군의 진격을 막지는 못했다. 알렉산드르 1세의 강력한 의지로 동맹군은 파리로 진격했고, 1814년 3월 30일 파리 전투가 벌어졌다. 러시아군과 프로이센군, 오스트리아군 등이 파리 외곽을 공격하여 격전 끝에 프랑스군은 항복했다. 알렉산드르 1세는 관대한 항복 조건을 제시하며 파괴가 아닌 평화를 가져왔다고 선언했다. 3월 31일, 알렉산드르 1세는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 슈바르첸베르크 공작 등과 함께 파리에 입성했다. 이는 백년 전쟁 이후 약 400년 만에 외국 군대가 파리에 진입한 사건이었다.

파리 함락 소식을 들은 나폴레옹은 퐁텐블로에서 프랑스 원수들의 압력으로 퇴위를 강요받았다. 1814년 4월 6일, 그는 무조건 항복했고, 퐁텐블로 조약에 따라 엘바섬으로 유배되었다.

나폴레옹을 몰락시킨 주역으로 부상한 알렉산드르 1세는 전후 처리를 위한 빈 회의(1815)에서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군주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기독교 정신에 입각한 유럽 평화 유지를 명분으로 신성 동맹 결성을 제창하며 유럽의 복고주의 질서 구축에 앞장섰다. 그러나 폴란드에 대한 지배력을 유지하려는 그의 태도는 다른 강대국들과의 갈등을 빚기도 했다.[18] 빈 회의 결과, 나폴레옹이 세웠던 바르샤바 공국을 넘겨받아 폴란드 입헌왕국을 부활시키고 스스로 왕위를 겸하는 실리를 챙겼다. 모스크바 대화재 이후 종교적 신념이 깊어진 알렉산드르 1세는 바바라 폰 크뤼데너 여남작 등 신비주의적 종교인들의 영향을 받으며 자신의 정치적 행동을 신의 계시와 연결시키기도 했다.

한편, 나폴레옹 전쟁 시기 러시아는 캅카스 지역에서도 영향력을 확장했다. 1801년 카르틀리-카헤티 왕국(조지아 동부) 병합 이후, 파벨 치치아노프 장군 주도로 주변 칸국들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려 했다. 이는 가자르 왕조 페르시아와의 전쟁(1804-1813)으로 이어졌다. 1804년 간자 칸국 점령 당시 약 3,000명[16]~7,000명의 주민이 학살당하는 등 충돌 끝에 러시아는 표트르 코틀랴레프스키 장군의 활약으로 우위를 점했고, 1813년 굴리스탄 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으로 페르시아는 현재의 다게스탄, 조지아, 아제르바이잔 대부분과 북부 아르메니아 일부를 포함한 북캅카스남캅카스 영토 상당 부분을 러시아에 할양해야 했다.

2. 2. 4. 빈 회의와 신성 동맹

1812년 러시아 원정에서 나폴레옹에게 승리하고 제6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을 성공적으로 이끈 알렉산드르 1세는 유럽 대륙의 최강 군주로 부상했다. 모스크바 대화재 이후 깊은 종교적, 정신적 변화를 겪었다고 알려진 그는 스스로를 "유럽의 중재자"이자 "유럽의 구원자"로 여기며 나폴레옹 전쟁 이후의 새로운 국제 질서를 재편하기 위한 빈 회의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빈 회의 기간 동안 알렉산드르 1세는 신비주의경건주의에 깊이 빠져들었는데, 특히 바바라 폰 크뤼데너 여남작과 같은 인물들의 영향을 받았다. 그는 이러한 종교적 신념을 바탕으로 유럽 군주들에게 기독교 정신에 입각한 국가 간의 연합체인 신성 동맹 결성을 제안했다. 이 구상은 표면적으로는 실현되었으나, 클레멘스 폰 메테르니히를 비롯한 다른 열강의 지도자들은 알렉산드르 1세의 진의를 의심하며 냉소적인 반응을 보였다. 과거 틸지트 조약에서의 행보나, 프레데리크 세자르 드 라 아르프의 영향을 받은 자유주의적 언사를 동시에 구사하는 그의 모순적인 태도는 이러한 불신을 더욱 키웠다. 그들은 신성 동맹을 알렉산드르 1세가 러시아의 패권을 확장하려는 야심을 숨기기 위한 위장으로 보았다. 영국의 로버트 스튜어트, 비스컨트 캐슬리는 알렉산드르 1세가 폴란드에 대한 지배력을 유지하려 조약 의무를 위반한다며 그의 "양심"을 직접적으로 비판하기도 했다.[18]

빈 회의 시기, 알렉산드르 1세는 한때 지지했던 제한적 자유주의 원칙에 따라 일부 진보적인 조치를 취하기도 했다. 1815년에는 러시아 내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폴란드 입헌 왕국을 부활시켜 헌법을 부여하고 국회 개설을 허용했으며[19][20], 1809년 획득했던 핀란드 대공국의 자치권을 인정하고 스스로 초대 대공이 되었다.[19][20]

그러나 1818년 말 엑스라샤펠 회의를 기점으로 그의 입장은 점차 보수적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러시아 근위대 장교들의 혁명 음모 발각과 극작가 아우구스트 폰 코체부 암살 사건(1819년) 등 유럽 전역에서 나타나는 혁명적 움직임에 충격을 받은 그는 메테르니히와의 관계를 강화하며 그의 보수적인 정치 노선에 점차 동조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카를스바드 칙령과 같은 노골적인 반동 정책에 거리를 두었으나[21], 1820년대 혁명이 나폴리와 피에몬테 등지에서 발생하자 그의 보수적인 입장 변화는 더욱 뚜렷해졌다.

1820년 트로파우 회의에서 알렉산드르 1세는 메테르니히에게 과거 자신의 자유주의적 입장을 후회한다고 고백하기에 이르렀다.[23] 이는 중요한 변화였다. 결국 그는 11월 19일 트로파우 의정서에 서명함으로써, 신성 동맹이 개별 국가의 주권을 침해하고 내정에 간섭할 수 있다는 주장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게 되었다. 이는 알렉산드르 1세가 초기에 구상했던 이상적인 국가 연합과는 달리, 현실적으로 각국 군주들이 자국의 혁명 운동을 억압하기 위한 도구로 신성 동맹이 변질되는 것을 용인한 것이었다.

카포디스트리아스, 요안니스, 러시아의 전 외무장관은 독립 그리스의 초대 국가 원수로 선출되었다.


1821년 라이바흐 의회 도중 오스만 제국에 대항하는 그리스 독립 전쟁이 발발하자 알렉산드르 1세는 또 다른 딜레마에 직면했다. 그는 유럽의 안정이라는 신성 동맹의 원칙과 정교회 세계의 수호자로서 오스만 제국에 맞서야 한다는 러시아의 전통적인 사명 사이에서 갈등했다. 초기에는 메테르니히의 조언에 따라 유럽의 질서 유지를 우선시하여 그리스 봉기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다. 봉기 지도자 알렉산드로스 힙실란티스를 러시아군에서 축출하고, 그리스계 외무장관 카포디스트리아스, 요안니스를 통해 러시아의 동조를 부인했으며, 베로나 의회로 향하던 그리스 대표단의 길을 막기도 했다.

그러나 메테르니히가 그리스도교의 이익보다 오스트리아 중심의 세력 균형(오스만 제국 포함)을 우선시하는 태도를 보이자, 알렉산드르 1세는 오스트리아의 진정한 의도를 깨닫고 실망했다. 러시아로 돌아온 그는 자국 내의 그리스 독립 지지 여론에 점차 영향을 받아, 러시아의 정책 방향을 그리스의 대의를 지지하는 쪽으로 서서히 바꾸어 나갔다.

2. 3. 말년

대프랑스 전쟁 후 알렉산드르 1세는 전 육군 장관 아락체예프에게 국내 정치를 일임하고 국제 정치에 몰두하면서 신비주의에 탐닉했다. 아락체예프는 자유주의자들을 탄압하고 반동 정치로 일관하여 국민들의 원성을 샀다.

나폴레옹 1세를 "유럽의 압제자이자 세계 평화의 파괴자"로 규정한 알렉산드르 1세는 자신이 신성한 사명을 수행한다고 믿었다. 런던 주재 특사 니콜라이 노보실체프에게 보낸 지시문에서 그는 전쟁의 목표가 프랑스 해방뿐 아니라 "신성한 인권의 승리"라고 주장했다. 이를 위해 각 국가가 국민의 최대 이익을 위해 행동하도록 정부를 구성하고, 국가 간 관계를 명확한 규칙으로 정립하여 준수하게 하는 "유럽 연합"과 같은 체제를 구상했다. 이 기구는 "국가들의 긍정적 권리"와 "중립의 특권"을 보장하고, 평화 유지를 위한 중재 의무를 지니며, "새로운 국제법 규약"을 형성할 것으로 기대했다.[13]

알렉산드르 1세는 대륙의 복음주의 부흥 운동 지도자들과 서신을 교환하며 성경 구절에서 징조와 인도를 찾으려 했다. 1813년 가을 바젤에서 종교적 모험가인 크뤼데너 여남작을 만난 후, 신비주의적 경건주의는 그의 사생활뿐 아니라 정치 행동의 원동력이 되었다. 크뤼데너 여남작과 그녀의 동료 복음 전도자 앙리 루이 앙페타는 황제의 가장 비밀스러운 생각을 공유하는 측근이 되었다.

나폴레옹 몰락 후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군주가 된 알렉산드르 1세의 행보는 메테르니히와 같은 현실주의적 정치인들에게 의심을 샀다. 그의 복음주의적 언어 뒤에 거대한 야망이 숨겨져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또한, 혁명에 반대하면서도 여전히 "자유"와 "계몽"을 언급하는 그의 모순적인 태도는 보수주의자들에게 러시아가 유럽 전체를 지배하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의심을 불러일으켰다. 빈 회의에서 그가 폴란드에 대한 지배력을 유지하려 하자, 영국의 캐슬리 경은 조약 의무 위반이라며 그의 "양심"을 직접적으로 비난했다.[18]

알렉산드르 1세와 엘리자베타 알렉세예브나(바덴의 루이제)가 1814년 빈 회의에서 함께 찍힌 메달


알렉산드르 1세와 바덴의 루이제


개인적으로 알렉산드르 1세는 1793년 바덴의 루이제와 결혼하여 엘리자베타 알렉세예브나 황후로 맞이했으나, 할머니 예카테리나 2세가 계획한 이 정략결혼이 불행했다고 후에 친구인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에게 털어놓았다. 두 딸 마리아와 엘리자베타가 어린 나이에 사망했지만, 이 공통의 슬픔은 부부 사이를 더욱 가깝게 만들었다. 1799년부터 1818년까지 정부였던 마리아 나르이시키나와의 관계가 있었으나, 그녀와의 사이에서 낳은 사랑하는 딸 소피아 나르이시키나가 요절하자 황후의 너그러운 위로를 받으며 부부 관계를 회복했다. 1809년에는 핀란드 귀족 여성 울라 몰레르스바르드와의 불륜 및 사생아 출산 소문이 돌았으나 확인된 바는 없다.

1818년경부터 알렉산드르 1세의 정치적 견해는 변화하기 시작했다. 나폴레옹 전쟁에 참전했던 일부 젊은 장교들은 서유럽의 발전에 충격을 받고 조국의 낙후를 절감했다. 이들 중 일부는 급진화하여 공화정 수립이나 황제 암살까지 모의하는 비밀 결사를 조직했다(파벨 페스텔, 표트르 카호프스키 등). 이러한 움직임이 발각되자 알렉산드르 1세는 이전의 자유주의적 사상을 버렸다. 대외적으로는 아헨 회의에서 오스트리아 재상 메테르니히와 만나 친교를 맺고 그의 영향을 강하게 받게 되었다. 나폴리와 피에몬테에서 혁명이 발발하고 프랑스, 독일, 러시아 국내로 동요가 확산될 조짐을 보이자 급격히 반동화되었다.

1820년 10월, 트로파우 회의에 참석하여 자유주의 운동 탄압을 위해 상호 내정 간섭을 할 수 있다고 규정한 트로파우 의정서에 서명했다. 1821년에는 라이바흐 회의에 참석했다. 이때 오스만 제국에서 그리스인들이 독립을 목표로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접한 알렉산드르는 죽을 때까지 정교회 수호자로서의 입장과 유럽에서의 신성 동맹이라는 이상 사이에서 끊임없이 고뇌하게 된다. 처음에는 메테르니히의 영향 아래 유럽 동맹을 중시하면서 정교회 십자군 구상을 융합시키려고 노력했다.

러시아 국내에서는 알렉산드르 1세의 종교적 "계몽주의"가 국가주의적 반동 정치로 변질되었다. 1817년 문부성을 종무와 통합하고 골리친 공작을 신설된 부서의 책임자로 임명했다. 골리친 공작은 일부 자유주의적 성향에도 불구하고 1819년부터 1821년까지 제국대학 폐쇄, 학교 교육에서 자연법, 윤리학, 논리학 금지, 성경 교육 강화 등 반동 정책을 시행했다. 그러나 골리친 공작조차 러시아 정교회 내에서는 지나치게 자유주의적이고 이단적으로 간주되었고, 결국 황제의 총신이자 전 육군 장관인 아락체예프 백작과의 권력 투쟁에서 패배하여 사임했다. 아락체예프는 각료 회의, 국가 평의회, 황제 관방을 장악하여 사실상 국정을 독점했다. 그는 무지하고 잔혹하며 비굴했지만 황제에게 충성스러웠고, 나폴레옹 전쟁 후 파탄 난 국가 재정 재건을 위해 툰무촌(군둔촌)을 설립했으나 결과는 참담했다.

젊은 장교들의 비밀 결사는 점차 급진화되었다. 알렉산드르 1세는 이러한 움직임을 파악하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으나, 말년에는 모든 것에 무관심해지고 우울증 증세를 보였다는 분석도 있다. 그는 국정에서 점차 손을 떼고 아락체예프 백작에게 실권을 맡긴 채 은둔하는 경향을 보였으며, 궁정에 성직자를 초청하여 기독교 신앙에서 구원을 찾으려 했다.

정신 상태가 악화되면서 알렉산드르 1세는 점점 더 의심이 많아지고, 은둔하며, 종교적으로 변했고, 활동성이 줄어들었다. 1825년 가을, 황후의 병세 악화로 러시아 남부로 요양을 떠났다. 9월에는 알렉산드르 넵스키 수도원을 방문하여 고행 중인 노수도사 알렉세이와 면담하기도 했다. 이후 황후를 동반하고 흑해 연안의 타간로크 별궁으로 행차했으나, 11월 티푸스(혹은 심한 단독 감염증)로 추정되는 열병에 걸려 회복하지 못하고 11월 19일(율리우스력) 급사했다. 향년 47세. 그의 갑작스럽고 비밀스러운 죽음은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12월에야 알려졌다.[24]

그의 사후, 본부인 사이의 자녀가 없어 동생 니콜라이 1세가 제위를 이었으나, 즉위 과정에서 형제간의 갈등이 있었다. 황제의 시신이 장례식을 위해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이송되는 동안 황후 엘리자베타도 몇 달 후 사망했다. 알렉산드르 1세는 1826년 3월 13일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 내 베드로와 바울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알렉산드르 1세의 죽음을 둘러싸고 그가 죽음을 가장하고 은둔자로서 표도르 쿠즈미치라는 이름으로 살았다는 전설이 널리 퍼졌다. 이 설은 알렉산드르와 쿠즈미치 사이의 놀라운 외모 유사성, 필적 감정 결과(러시아 필적 감정 학회 회장 스베틀라나 세묘노바는 동일하다고 판단), 쿠즈미치가 임종 시 남긴 모호한 말("주님의 업적은 놀랍습니다…열리지 않는 비밀은 없습니다") 등을 근거로 한다.[25][26] 이 이야기는 오늘날에도 종종 회자된다.

3. 평가 및 영향

알렉산드르 1세는 동시대 사람들에게 상반된 평가를 받았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그를 "교활한 비잔틴인"이자 "북방의 탈마"(프랑수아 조제프 탈마)라고 부르며, "지성, 우아함, 교육을 갖추고 매력적이지만 진심이 없고 신뢰할 수 없으며, 영리하고 위선적이며 교활하다"고 평가했다. 클레멘스 폰 메테르니히는 그를 "달래야 할 광인"으로 보았고, 로버트 스튜어트, 제2대 런던데리 후작은 "위대한 자질"을 인정하면서도 "의심 많고 우유부단하다"고 지적했다. 반면, 토머스 제퍼슨은 그를 존경할 만한 인물로 여기며 러시아 국민에게 "자연권에 대한 감각"을 퍼뜨릴 것으로 기대했다.[12] 루트비히 판 베토벤은 1803년 그에게 바이올린 소나타 제6번을 헌정했고, 알렉산드르 1세는 1814년 빈 회의에서 베토벤을 만나 감명을 받아 다이아몬드를 선물하기도 했다.

개인적으로 알렉산드르 1세는 미남이었고 애교가 많았으며, 우정을 중시하고 사교성이 풍부하여 특히 빈 회의에서 그의 인품과 화려한 태도가 돋보였다. 그러나 청년기 교육의 영향으로 우유부단하고 애매한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그의 통치는 러시아에 여러 문제를 남겼다. 알렉산드르 사후 러시아에는 스파이와 비밀 경찰의 활동, 불명확한 러시아 제국 황위 계승법, 군대의 이반, 끊이지 않는 폴란드의 무장 봉기, 위선으로 가득 찬 교육 제도, 사회 변화에 뒤처진 러시아 정교회, 파탄 난 경제, 그리고 사회적 후진성을 상징하는 러시아의 농노제 등의 문제가 심화되었다.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인한 황위 공백은 데카브리스트의 난이 일어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51]

종교적으로 알렉산드르 1세는 1812년 러시아 원정을 계기로 경건주의적인 "개종"을 경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주로 교회 슬라브어로 되어 있던 성경러시아어 번역을 추진하고 "성서 협회"를 통해 보급에 힘썼다. 그러나 정작 러시아 정교회 자체에는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으며, 오히려 모라비아 형제단, 독일 신비주의와 교류하고 퀘이커를 러시아에 초청하는 등 서구 신비주의 사상에 더 큰 관심을 보였다. 이러한 황제의 러시아 정교회에 대한 무관심은 결과적으로 19세기 러시아 정교회가 직면한 문제들을 심화시키고 그 해결을 지연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4. 추가 참고 사항

널리 알려진 전설에 따르면, 알렉산드르 1세가 가짜 죽음을 꾸미고 표도르 쿠즈미치라는 이름의 은둔자로 살았다는 설이 있다.[25] 이 설은 알렉산드르와 쿠즈미치 사이의 놀라운 외모 유사성 등을 근거로 하며, 러시아 필적 감정 학회 회장 스베틀라나 세묘노바는 두 사람의 필적이 동일하다고 판단하기도 했다. 표도르 쿠즈미치의 임종을 지킨 사제가 그에게 실제 알렉산드르 1세인지 물었을 때, 쿠즈미치는 "주님의 업적은 놀랍습니다…열리지 않는 비밀은 없습니다"라고 모호하게 답했다고 전해진다.[26]

알렉산드르 1세가 1795년부터 1797년 사이에 할아버지인 뷔르템베르크 공작 프리드리히 2세 외젠(Frederick II Eugene, Duke of Württemberg)에게 보낸 편지들은 형제자매들의 편지와 함께 독일 슈투트가르트의 주립 기록 보관소(Hauptstaatsarchiv Stuttgart)에 보존되어 있다.[30]

1986년 헬싱키 대학교(University of Helsinki) 마당에 있는 알렉산더 1세의 흉상


'''훈장 및 훈표'''[31]

국가훈장비고
러시아 제국[32]성 안드레 훈장기사
러시아 제국성 알렉산더 네프스키 훈장기사
러시아 제국성 안나 훈장1등급 기사
러시아 제국예루살렘 성 요한 기사단대십자장
스웨덴세라핌 훈장기사 (1799년 11월 16일)[33]
스웨덴검 훈장대십자장 1등급 (1814년 1월 15일)[34]
프로이센 왕국흑독수리 훈장기사 (1779년 11월 30일)[35]
프로이센 왕국철십자 훈장 (1813)2등급
시칠리아 왕국성 야누아리우스 훈장기사 (1800년)[36]
프랑스 제1제국레지옹 도뇌르 훈장대수장 (1807년 7월 7일)[37]
프랑스 왕국레지옹 도뇌르 훈장대십자장 (1815년)
프랑스 왕국성령 훈장기사 (1815년)[38]
덴마크코끼리 훈장기사 (1808년 7월 2일)[39]
영국가터 훈장외국인 기사 (1813년 7월 27일)[40]
바이에른 왕국성 후베르투스 훈장기사 (1813년)[41]
스페인황금양모 훈장기사 (1814년 5월 30일)[42]
오스트리아 제국마리아 테레지아 군사 훈장기사 (1815년)[43]
네덜란드빌렘 군사 훈장대십자장 (1818년 11월 19일)[44]
사르데냐 왕국최고 성모령기사 (1822년 11월 5일)[45]
포르투갈 왕국삼관 띠대십자장 (1824년 2월 10일)[46]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 공국백색매 훈장대십자장[47]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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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논문 1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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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서적 The Russian Empire in the Eighteenth Century: Searching for a Place in the World 1997
[49] 서적 名画で読み解く ロマノフ家12の物語 光文社
[50] 웹페이지 #추정
[51] 서적 十九世紀ロシア農村司祭の生活-付 近代ロシアの国家と教会- 中央大学出版部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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