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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르 베레고부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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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피에르 베레고부아는 프랑스의 정치인으로, 1925년 프랑스에서 태어났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레지스탕스 활동을 거쳐 사회주의 정당에서 활동했으며,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의 측근으로 대통령 비서실장, 경제 재무 장관, 사회 문제 장관 등을 역임했다. 1992년에는 프랑스 총리로 임명되어 경제 자유화, 프랑 통화 위기 극복 등의 정책을 추진했으나, 1993년 총선 패배 후 자살했다. 그의 죽음과 관련된 언론의 보도에 대해 미테랑 대통령은 비판적인 입장을 표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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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르 베레고부아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피에르 외젠 베레고부아
출생일1925년 12월 23일
출생지프랑스 세ー느=마리팀 현 데빌 레 루앙
사망일1993년 5월 1일
사망지프랑스 네베르
직업금속 기사, 정치인
정치 경력
소속 정당SFIO (1959년까지)
PSU (1960년–69년)
PS (1969년–93년)
프랑스 총리재임 기간: 1992년 4월 2일 – 1993년 3월 29일
대통령: 프랑수아 미테랑
전임: 에디트 크레송
후임: 에두아르 발라뒤르
국방부 장관재임 기간: 1993년 3월 9일 – 1993년 3월 29일
대통령: 프랑수아 미테랑
경제・재무・예산 장관재임 기간: 1984년 7월 19일 – 1986년 3월 20일, 1988년 5월 13일 – 1992년 4월 2일
대통령: 프랑수아 미테랑
사회 문제・국민 연대 장관재임 기간: 1982년 6월 29일 – 1984년 7월 17일
대통령: 프랑수아 미테랑
개인 정보
배우자질베르트 베레고부아
자녀4명

2. 초기 생애 및 정치 입문

피에르 베레고부아는 우크라이나계 이민자 가정 출신으로, 데빌르레루앙에서 태어났다. 16세에 금속 노동자로 사회생활을 시작했으며, 제2차 세계 대전 중 프랑스 국철(SNCF)에서 근무하며 프랑스 레지스탕스 활동에 참여한 것을 계기로 정치에 입문했다.

전후 사회주의 정당인 SFIO와 노동조합 노동자 세력에서 활동했으며, 공공사업 및 교통부 장관 크리스티앙 피노의 참모를 거쳐 국영 기업 가스 드 프랑스에서 근무하기도 했다. 1959년 SFIO를 떠나 통합 사회당(PSU) 창당에 참여했고, 피에르 망데스 프랑스의 고문으로 활동했다. 1969년 개편된 사회당(PS)에 합류하여 프랑수아 미테랑의 측근이 되었으며, 좌파 연합의 ''공동 강령'' 협상에 참여하는 등 당내에서 입지를 다졌다.

2. 1. 출생과 성장

피에르 베레고부아는 1925년 12월 23일, 북프랑스 노르망디 센마리팀의 데빌르레루앙에서 프랑스인 어머니와 우크라이나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원래 성이 우크라이나어로는 Береговий|베레호비uk, 러시아어로는 Береговой|베레고보이ru였으며, 러시아 내전 이후 러시아 제국을 떠나 프랑스로 이주한 이민자였다.

그는 16세에 자격을 갖춘 금속 노동자로 사회 생활을 시작했으며, 이후 섬유 공장, 프랑스 국철(SNCF), 프랑스 가스 공사(Gaz de France) 등에서 근무하며 마감 기술자 및 밀링 선반 기술자 직업 적성 증명서(CAP)를 취득했다.

프랑스 국철에서 일하던 중 제2차 세계 대전을 겪었고, 전쟁 중 프랑스 레지스탕스 운동에 참여한 것을 계기로 정치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2. 2. 제2차 세계 대전과 레지스탕스 활동

피에르 베레고부아는 데빌르레루앙에서 프랑스인 어머니와 우크라이나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러시아 내전 이후 러시아 제국을 떠났으며, 원래 성은 우크라이나어로 Береговий|베레호비ukr, 러시아어로는 Береговой|베레고보이rus였다.

그는 16세에 자격을 갖춘 금속 노동자로 사회 생활을 시작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SNCF에서 근무하며 프랑스 레지스탕스 활동에 참여했고, 이를 계기로 정치에 발을 들였다. 전쟁 후 사회주의 정당인 SFIO와 노동조합 연맹 노동자의 힘의 일원으로 활동했다. 1949년에는 공공사업 및 교통부 장관 크리스티앙 피노의 참모로 들어가 노동조합과의 관계를 담당하는 고문 역할을 맡았다. 1년 뒤에는 국영 가스 회사인 ''가스 드 프랑스''의 기술 요원이 되었다.

2. 3. 노동 운동과 사회주의 정당 활동

피에르 베레고부아는 데빌르레루앙에서 프랑스인 어머니와 우크라이나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16세에 금속 노동자로 사회 생활을 시작했으며,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국영 철도 회사 SNCF에서 일하며 프랑스 레지스탕스 활동에 참여했다. 이를 계기로 정치에 입문하게 되었다.

전후, 베레고부아는 사회주의 정당인 SFIO에 입당하고 노동조합 연맹 노동자 세력(Force Ouvrière)의 조합원으로 활동하며 노동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1949년에는 공공사업 및 교통부 장관 크리스티앙 피노의 참모가 되어 노동조합 관계 고문으로 활동했으며, 1950년에는 국영 가스 회사인 ''가스 드 프랑스''(Gaz de France)의 기술 요원이 되었다.

1958년 피에르 망데스 프랑스의 영향을 받아 자치 사회당(PSA)에 참여했으며, 이듬해인 1959년 SFIO를 탈당했다. 1960년에는 분열된 사회주의 세력을 모아 통합 사회당(PSU)을 창당하는 데 공헌했다. 이후 피에르 망데스 프랑스의 고문으로 활동했으며, 1967년에는 알랭 사바리와 함께 망데스 프랑스를 지지하는 좌파 성향의 클럽 연합(좌익 개혁 클럽)을 결성했다.

1969년, 새롭게 개편된 사회당(PS)에 합류한 베레고부아는 당시 당 제1서기였던 프랑수아 미테랑의 충실한 협력자로 부상했다. 그는 미테랑을 중심으로 한 당 집행부의 일원으로 활동하며, 특히 좌파 연합의 정책 합의인 ''공동 강령''(Programme commun) 협상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3. 정치 경력

피에르 베레고부아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SNCF에서 일하며 프랑스 레지스탕스 활동에 참여한 것을 계기로 정치에 입문했다. 처음에는 사회주의 계열의 SFIO와 노동조합 연맹 노동자 세력에서 활동했으며, 1949년에는 공공사업 및 교통부 장관 크리스티앙 피노의 참모로 활동했다.

1959년 SFIO를 떠나 통합 사회당(PSU) 창당에 참여했고, 피에르 망데스 프랑스의 고문으로 활동했다. 1967년 알랭 사바리와 함께 좌파 그룹을 결성했으며, 이 그룹은 1969년 개편된 사회당(PS)에 합류했다. 그는 프랑수아 미테랑을 중심으로 한 당 지도부의 일원이 되어 좌파 연합의 ''공동 강령'' 협상 등에 참여하며 정치적 입지를 다졌다.

1981년 미테랑이 프랑스 대통령으로 선출된 후, 베레고부아는 대통령 비서실 사무총장으로 임명되었다. 이후 사회부 장관(1982–1984)과 경제 및 재정부 장관(1984–1986, 1988–1992)을 역임하며 미테랑 정부의 핵심 인사로 부상했다. 그는 프랑스 경제 정책 변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으며, 특히 프랑스 사회주의가 시장 경제에 적응하는 과정을 상징하는 인물로 평가받았다.

정부 요직을 맡는 동시에 1983년 네베르 시장으로 선출되었고, 1986년에는 미테랑의 정치적 기반인 니에브르 지역구에서 프랑스 국민 의회 의원으로 당선되는 등 지역 정치 기반도 다졌다. 1988년 미테랑의 대통령 재선 캠페인에서도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1992년 지방 선거에서 사회당이 참패하자, 그는 총리로 임명되어 소수 정부를 이끌었다. 총리로서 실업, 경제 침체, 부패 척결을 약속하고 여러 사회 정책 개혁을 추진했으나[1][2][3][4][5][6][7][8][9], 경제적 어려움은 지속되었다. 결국 1993년 3월 총선에서 사회당은 역사적인 참패를 당했고, 베레고부아는 선거 패배의 책임을 지고 총리직에서 사임했다.

3. 1. 미테랑 정부의 핵심 인사

1981년 프랑수아 미테랑이 프랑스 대통령으로 선출되자, 피에르 베레고부아는 대통령 비서실 사무총장으로 발탁되었다. 그는 미테랑의 충실한 협력자로서 사회당 내에서 입지를 다져왔으며, 미테랑의 지지 기반인 니에브르주에서 국민 의회 의원에 당선되었고, 네베르 시장으로도 선출되었다.

1982년에는 피에르 모루아 내각의 사회부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이 시기 베레고부아는 사회주의 경제 정책을 지속하기 위해 유럽 통화 시스템에서 프랑스가 탈퇴해야 한다고 미테랑 대통령에게 조언한 인물 중 하나였다. 그러나 1983년 3월, 미테랑은 모루아 총리의 의견을 받아들여 경제 정책의 방향 전환을 결정했다.

1985년 플라자 합의 당시 재무 장관들. 왼쪽부터 게르하르트 슈톨텐베르크 (서독), 피에르 베레고부아 (프랑스), 제임스 A. 베이커 3세 (미국), 나이젤 로슨 (영국), 다케시타 노보루 (일본).


1984년 로랑 파비우스 내각이 출범하면서 베레고부아는 경제 및 재정부 장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는 신자유주의적 경제 정책과 재정 균형을 추구하며 정책 전환을 주도했다. 이 시기 그는 1985년 플라자 합의에 프랑스 대표로 참여하기도 했다. 1986년 사회당이 총선에서 패배하면서 잠시 장관직에서 물러났으나, 1988년 대통령 선거에서는 미테랑의 재선을 위해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미테랑의 재선 이후, 베레고부아는 미셸 로카르 내각에서 다시 경제 및 재정부 장관을 맡았다. 그는 프랑스 사회주의가 시장 경제에 적응하는 과정을 상징하는 인물로 여겨졌으며, 재계와도 긴밀한 관계를 구축했다. 1991년 에디트 크레송 내각에서는 경제, 재정, 예산, 대외 무역 등 광범위한 권한을 가진 이른바 "슈퍼 재무 장관"으로 불리며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1992년 지방 선거에서 사회당이 참패하자 크레송 내각은 총사퇴했고, 베레고부아가 후임 총리로 임명되어 소수 정부를 이끌게 되었다. 그는 총리로서 실업, 경제 침체, 부패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프랑스 국민 의회 취임 연설에서는 부패 스캔들에 연루된 우파 야당 정치인들의 이름을 알고 있다고 발언하여 파문을 일으키기도 했다. 또한, 사법부에 의해 기소된 도시부 장관 베르나르 타피에게 사임을 강요하며 부패 척결 의지를 보였다.

베레고부아 내각은 여러 사회 정책 개혁을 추진했다.

  • 1992년 11월, 노동법에 성희롱 정의를 명시하고 노동 감독관과 직장 위원회에 집행 권한을 부여하는 법안 통과.[2]
  • 1992년 5월, 농지세 감면과 젊은 농민 보조금 증액 등 농민 지원 강화.[3]
  • 1992년 6월, 시장에게 공공 주택에서 사회적 혼합을 장려하도록 의무화하는 법안 통과.[4]
  • 1992년 7월, 탁아 보모의 지위 향상 및 아동 보육의 질 개선 법안(7월 12일), 의료 지원 혜택 개선 법안(7월 29일) 통과.[5]
  • 1993년 1월, 경제 활동 및 공공 절차에서의 부패 방지 및 투명성 증진을 위한 '사팽 법' 제정.[6]
  • 1993년 1월, 이혼 시에도 합법적인 가족 내 공동 부모 권한 원칙을 확립하는 법안 통과.[7]
  • 1993년, 주택 혜택 범위 확대.[8][9]


그러나 경제 상황은 개선되지 않았고 실업자는 300만 명까지 증가했다. 결국 1993년 3월 총선에서 사회당은 이전 260석에서 53석으로 의석수가 급감하는 역사적인 참패를 당했다. 베레고부아는 선거 패배의 책임을 지고 1993년 3월 29일 총리직에서 사임했다.

'''주요 공직'''

직책임기
총리1992–1993
경제 재정 장관1984–1986 / 1988–1992
사회 문제 장관1982–1984
대통령 비서실 사무총장1981–1982
프랑스 국민 의회 의원 (니에브르주 선거구)1986–1988, 1993년 3월–5월
니에브르주 일반 평의원1985–1993
네베르 시장1983–1993
네베르 시의원1983–1993


3. 2. 네베르 시장 및 국회의원

1993년 3월–1993년 5월1988년 장관 임명 / 1993년 재선 후 사망일반 평의원니에브르1985년–1993년 5월1992년 재선 / 임기 중 사망시장네베르1983년–1993년 5월1989년 재선 / 임기 중 사망시의원네베르1983년–1993년 5월1989년 재선 / 임기 중 사망


3. 3. 프랑스 총리 (1992-1993)

1992년 지방 선거에서 PS가 큰 패배를 겪자, 에디트 크레송 내각이 총사퇴하고 피에르 베레고부아가 후임 총리로 임명되어 새로운 소수 정부를 구성했다. 그는 총리로서 실업, 경제 침체, 부패와의 싸움을 선언했다.

프랑스 국민 의회에서 행한 취임 연설에서 그는 부패 스캔들에 연루된 우파 야당 정치인들의 이름을 알고 있다고 주장하여 논란을 일으켰다. 또한, 1992년 5월에는 프랑스 사법부에 의해 기소된 도시부 장관 베르나르 타피에게 사임을 강요했는데, 이는 '발라두르 사법'이라는 잘못된 명칭으로 불리기도 했다.[1] 베레고부아 내각은 경제 및 사회 문제 해결을 위해 다양한 정책을 추진했으나[2][3][4][5][6][7][8][9], 높은 실업률 등 경제적 어려움은 지속되었다.

총리 재임 약 1년 후인 1993년 3월 국회의원 선거에서 사회당은 역사적인 참패를 당했다. 이전 선거에서 260석을 확보했던 사회당 의석수는 53석으로 급감했으며, 이는 프랑스 좌파 역사상 최악의 선거 패배 중 하나이자 집권당이 겪은 가장 큰 패배 중 하나로 기록되었다. 선거 참패의 책임을 지고 베레고부아는 1993년 3월 29일 총리직에서 사임했다.

3. 3. 1. 경제 정책

1981년 프랑수아 미테랑이 대통령으로 선출된 후, 베레고부아는 대통령 비서실 사무총장이 되었다. 1982년 피에르 모루아 내각에서 사회부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이 시기 베레고부아는 사회주의 경제 정책을 지속하기 위해 유럽 통화 시스템(EMS)에서 프랑이 탈퇴해야 한다고 미테랑 대통령에게 조언했던 인물 중 하나였다. 그러나 1983년 3월, 미테랑 대통령은 피에르 모루아 총리의 의견을 받아들여 긴축 재정으로 경제 정책 방향을 전환했다.

1984년 로랑 파비우스 내각이 출범하면서 베레고부아는 경제 및 재정부 장관에 임명되어 1986년 사회당의 총선 패배까지 직을 유지했다. 이 시기 그는 신자유주의적 경제 정책과 재정 균형으로의 정책 전환을 추진했다. 1985년에는 뉴욕 플라자 호텔에서 열린 플라자 합의에 프랑스 대표로 참석하여 미국 달러 가치 안정을 위한 국제 공조에 참여했다.

1988년 미테랑이 재선에 성공하자, 베레고부아는 미셸 로카르 내각에서 다시 경제 및 재정부 장관을 맡았다. 그는 프랑스 사회주의가 시장 경제에 적응하는 과정을 상징하는 인물로 여겨졌으며, 재계 인사들과도 긴밀한 관계를 구축했다. 1991년 에디트 크레송 내각에서는 경제 및 재정부 장관에 재임명되었고, 재무 관련 부처의 권한이 집중되면서 "슈퍼 재무 장관"으로 불리기도 했다.

1992년 4월, 지방 선거 패배의 책임을 지고 크레송 내각이 총사퇴하자 베레고부아는 후임 총리로 임명되었다. 총리로서 그는 경제 자유화, 기업 부담 경감, 공공 독점 부문의 국유화와 경쟁 부문의 민영화를 실행했다. 또한 프랑화 가치 방어, 인플레이션 억제, 무역 흑자 전환 등의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1992년 프랑스의 공업 생산은 전년 대비 0.5% 감소했고, 실업률이 상승하여 실업자 수가 300만 명에 달하는 등 경제적 어려움도 겪었다.

3. 3. 2. 사회 정책

총리 재임 기간 동안 피에르 베레고부아는 다양한 사회 개혁을 추진했다.

1992년 5월에는 농민들에게 더 많은 지원을 제공했는데, 이는 주로 농지세 감면과 젊은 농민에 대한 보조금 증가로 이루어졌다.[3] 같은 해 6월에는 프랑스 의회가 시장에게 공공 주택에서 사회적 혼합을 장려하도록 요구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4]

아동 및 가족 정책과 관련하여, 1992년 7월 12일 법은 탁아 보모의 지위를 향상시키고 "가족 환경에서 어린이의 보육의 질"을 높이는 것을 목표로 했다.[5] 또한, 1993년 1월 법은 이혼이 발생하더라도 합법적인 가족 내에서 공동 부모 권한의 원칙을 확립했다.[7]

노동법 분야에서는 1992년 11월, 성희롱에 대한 (논쟁의 여지가 있는 좁은) 정의를 노동법에 삽입하고 노동 검사 및 직장 위원회에 이를 시행할 권한을 부여하는 법이 통과되었다.[2]

의료 지원 혜택도 개선되어 1992년 7월 29일 관련 법이 제정되었다.[5] 부패 방지를 위해서는 1993년 1월 소위 '사팽 법'을 제정하여 "경제 활동 및 공공 절차에서" 부패를 방지하고 투명성을 장려하고자 했다.[6]

또한, 1993년에는 주택 혜택의 범위가 확대되었다.[8][9]

3. 3. 3. 1993년 총선 패배와 사임

1992년 지방 선거에서 PS가 큰 패배를 겪은 후, 피에르 베레고부아는 마침내 총리로 임명되어 새로운 소수 정부를 이끌게 되었다. 그는 실업, 경제 침체, 부패와의 싸움을 선언했다.[1] 총리 취임 후, 그는 경제 자유화, 기업 부담 경감, 공공 부문 개혁 등을 추진하며 프랑 통화 위기 극복, 인플레이션 억제, 무역 흑자 전환 등 일부 성과를 거두었다. 또한 사회 정책에서도 성희롱 방지법 제정[2], 농민 지원 강화[3], 공공 주택 내 사회적 혼합 장려[4], 탁아 보모 지위 향상 및 의료 지원 개선[5], 부패 방지 및 투명성 강화를 위한 사팽 법 제정[6], 이혼 시 공동 부모 권한 원칙 확립[7], 주택 혜택 확대[8][9] 등 다수의 개혁을 이루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경제는 어려움을 겪었다. 1992년 공업 생산은 전년 대비 감소했고, 실업률은 높아져 실업자 수가 300만 명에 달했다. 결국 약 1년간의 총리 재임 끝에 맞이한 1993년 3월 국회의원 선거에서 사회당은 참패했다. 이전 선거에서 260석을 확보했던 사회당 의석수는 53석으로 급감했으며, 이는 프랑스 좌파 역사상 최악의 선거 패배 중 하나이자 집권당이 겪은 가장 큰 패배 중 하나로 기록되었다. 선거 참패의 책임을 지고 베레고부아는 1993년 3월 29일 총리직에서 사임했다.

4. 죽음과 논란

피에르 베레고부아는 1993년 5월 1일 네베르에서 권총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10]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여러 논란을 동반했다. 친구들은 1993년 3월 프랑스 총선에서 사회당이 참패한 이후 그가 우울증을 겪었다고 증언했다.[10] 또한, 베레고부아는 친구이자 사업가인 로제-파트리스 펠라(Roger-Patrice Pelat)로부터 받은 의 무이자 대출[10]북한 호텔 건설 관련 편의 제공 의혹 등으로 조사를 받고 있었다. 네베르에서 열린 그의 장례식에서 프랑수아 미테랑 당시 대통령은 이러한 스캔들과 관련된 언론의 압력이 그의 죽음에 책임이 있다며 강하게 비판했다.[11]

4. 1. 자살

1993년 5월 1일, 베레고부아는 네베르에서 권총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10] 이른 아침, 그는 운전기사에게 차에서 기다리라고 말한 뒤 혼자 강변길을 걸었고, 잠시 후 총성이 울렸다. 급히 헬리콥터파리로 이송되었으나 결국 사망이 확인되었다. 그의 머리에는 두 발의 총알이 발견되어 한때 보디가드에 의한 암살설이 제기되기도 했으나, 주변 증언 등을 토대로 자살로 결론 내려졌다.

그의 친구들은 1993년 3월 프랑스 국회의원 선거에서 사회당이 기존 282석에서 67석으로 크게 줄어드는 참패를 당한 이후 베레고부아가 깊은 우울감에 빠졌다고 증언했다.[10] 사회당의 참패 배경에는 파비우스 전 총리 등이 연루된 약해 에이즈 사건과 당의 부정 회계 등 여러 스캔들이 있었다. 베레고부아 본인 역시 사업가이자 가까운 친구였던 로제-파트리스 펠라(Roger-Patrice Pelat, 브라로도 불림)로부터 아파트 구입 자금 명목으로 을 무이자로 빌린 사실과, 펠라를 위해 북한의 호텔 건설 사업에 편의를 제공하려 했다는 의혹 등으로 조사를 받고 있었다. 펠라는 페시네-트라이앵글(Pechiney-Triangle) 사건으로 유죄 판결을 받은 직후인 1989년 3월 7일 심장마비로 사망한 인물이다.[10]

긴장과 충격 속에서 네베르에서 열린 베레고부아의 장례식에 참석한 프랑수아 미테랑 당시 프랑스 대통령은 펠라 스캔들과 관련된 언론의 압력이 베레고부아의 죽음에 책임이 있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그는 언론을 겨냥하여 베레고부아의 "명예가 개들에게 던져졌다"고 말하며, 그에게 "자신의 운명을 선택하는 사람의 웅대함"을 부여했다.[11] 미테랑은 베레고부아의 부고를 접하고 언론을 "개 같은 놈들"이라고 비난했다고도 전해진다.

4. 2. 자살 배경 논란

베레고부아는 1993년 5월 1일 네베르에서 권총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10] 이른 아침, 그는 운전기사에게 차에서 기다리라고 지시한 뒤 혼자 강변 길을 걸었고, 잠시 후 총성이 울렸다. 곧바로 헬리콥터를 이용해 파리로 이송되었으나 사망이 확인되었다.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의 배경에는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친구들은 1993년 3월 프랑스 총선에서 사회당이 577석 중 단 67석만을 얻는 참패를 겪은 후 베레고부아가 깊은 우울감에 빠졌다고 증언했다.[10] 당시 사회당은 전 총리 로랑 파비우스 등이 연루된 약해 에이즈 사건과 당의 부정 회계 문제 등 잇따른 스캔들로 인해 정치적으로 큰 위기에 처해 있었다.

개인적으로 베레고부아는 사업가이자 절친한 친구였던 로제-파트리스 펠라로부터 을 무이자로 대출받은 건과 관련하여 조사를 받고 있었다. 공교롭게도 펠라는 페시네-트라이앵글 사건으로 유죄 판결을 받은 직후인 1989년 3월 7일 심장마비로 사망한 인물이었다.[10] 또한,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의 친구인 실업가 브라로부터 아파트 구입 자금을 무이자로 빌렸다는 의혹과 브라를 위해 북한의 호텔 건설 사업에 편의를 제공하려 했다는 의혹도 제기된 상태였다.

사건 현장에서 베레고부아의 머리에 두 발의 총알이 발견되면서 일각에서는 보디가드에 의한 암살설을 제기하기도 했으나, 주변 증언 등을 종합하여 자살로 최종 결론 내려졌다.

네베르에서 열린 베레고부아의 장례식은 긴장과 충격 속에서 치러졌다.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은 추도 연설에서 펠라 스캔들과 관련된 언론의 집요한 압박이 베레고부아를 죽음으로 내몰았다며 강하게 비판했다. 그는 언론을 겨냥하여 베레고부아의 "명예가 개들에게 던져졌다"고 말하며, 그의 죽음에 "스스로 운명을 선택하는 사람의 웅장함"을 부여했다.[11] 미테랑은 베레고부아의 부고를 접한 직후 언론을 "개 같은 놈들"이라고 비난한 것으로 전해진다.

4. 3. 미테랑 대통령의 언론 비판

피에르 베레고부아는 1993년 3월 총선에서 사회당이 참패하고, 친구인 사업가 로제-파트리스 펠라로부터 받은 무이자 대출[10]북한 호텔 건설 관련 편의 제공 의혹 등 여러 스캔들로 언론의 집중적인 조명을 받으며 힘든 시기를 보냈다. 결국 1993년 5월 1일 네베르에서 권총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10]

네베르에서 열린 베레고부아의 장례식은 긴장과 충격 속에서 치러졌다. 이 자리에서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은 친구의 죽음에 대한 언론의 책임론을 제기하며 강하게 비판했다. 미테랑은 스캔들과 관련된 언론의 압박이 베레고부아를 죽음으로 몰고 갔다고 주장하며, 언론을 향해 베레고부아의 "명예가 개들에게 던져졌다"고 말했다.[11] 또한 미테랑은 베레고부아의 죽음을 "자신의 운명을 선택하는 사람의 웅대함"으로 표현하기도 했다.[11] 일부 보도에 따르면 미테랑은 언론을 "개 같은 놈들"이라고 비난했다고도 전해진다. 이는 약해 에이즈 사건, 사회당 부정 회계 문제와 더불어 베레고부아 본인의 스캔들이 언론을 통해 집중적으로 다뤄지던 상황에 대한 미테랑의 격한 반응으로 해석된다.

5. 역대 선거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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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명직책명대수정당1차 득표율1차 득표수2차 득표율2차 득표수결과당락
1986년 프랑스 총선하원의원 (니에브르 선거구)8대사회당0%-표 1위--
1988년 프랑스 총선하원의원 (니에브르 제1선거구)9대사회당53.71%19,744표 1위--
1993년 프랑스 총선하원의원 (니에브르 제4선거구)10대사회당34.34%12,755표53.69%20,904표1위--


참조

[1] 웹사이트 Le Monde - Toute l'actualité en continu http://www.lemonde.f[...] 2023-02-26
[2] 서적 Integrating Gender: Women, Law and Politics in the European Union https://books.google[...] Verso 2017-01-08
[3] 서적 OECD Economic Surveys: France 1992 – Books – OECD iLibrary http://www.oecd-ilib[...] oecd-ilibrary.org 2017-01-08
[4] 서적 Race and Ethnicity: Integration, adaptation and change https://books.google[...] Routledge 2017-01-08
[5] 서적 European Social Charter: Governmental Committee, 13th Report https://books.google[...] Council of Europe Press 2017-01-08
[6] 서적 Sharing Concerns: Country Case Studies in Public-Private Partnerships https://books.google[...] Cambridge Scholars Publishing 2017-01-08
[7] 서적 Family Law and Family Values https://books.google[...] Bloomsbury Publishing 2017-01-08
[8] 문서 http://www.eea-esem.[...]
[9] 웹사이트 Archived copy https://web.archive.[...] 2016-05-14
[10] 뉴스 In French Ex-Premier's Suicide, Cries of 'J'Accuse' https://www.nytimes.[...] 2009-08-28
[11] 뉴스 Funeral lament for death of ex-PM: Mitterrand salutes 'man of integrity' https://www.independ[...] 2020-0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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