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에르 베레고부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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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피에르 베레고부아는 프랑스의 정치인으로, 1925년 프랑스에서 태어났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레지스탕스 활동을 거쳐 사회주의 정당에서 활동했으며,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의 측근으로 대통령 비서실장, 경제 재무 장관, 사회 문제 장관 등을 역임했다. 1992년에는 프랑스 총리로 임명되어 경제 자유화, 프랑 통화 위기 극복 등의 정책을 추진했으나, 1993년 총선 패배 후 자살했다. 그의 죽음과 관련된 언론의 보도에 대해 미테랑 대통령은 비판적인 입장을 표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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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르 베레고부아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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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피에르 외젠 베레고부아 |
출생일 | 1925년 12월 23일 |
출생지 | 프랑스 세ー느=마리팀 현 데빌 레 루앙 |
사망일 | 1993년 5월 1일 |
사망지 | 프랑스 네베르 |
직업 | 금속 기사, 정치인 |
정치 경력 | |
소속 정당 | SFIO (1959년까지) PSU (1960년–69년) PS (1969년–93년) |
프랑스 총리 | 재임 기간: 1992년 4월 2일 – 1993년 3월 29일 대통령: 프랑수아 미테랑 전임: 에디트 크레송 후임: 에두아르 발라뒤르 |
국방부 장관 | 재임 기간: 1993년 3월 9일 – 1993년 3월 29일 대통령: 프랑수아 미테랑 |
경제・재무・예산 장관 | 재임 기간: 1984년 7월 19일 – 1986년 3월 20일, 1988년 5월 13일 – 1992년 4월 2일 대통령: 프랑수아 미테랑 |
사회 문제・국민 연대 장관 | 재임 기간: 1982년 6월 29일 – 1984년 7월 17일 대통령: 프랑수아 미테랑 |
개인 정보 | |
배우자 | 질베르트 베레고부아 |
자녀 | 4명 |
2. 초기 생애 및 정치 입문
피에르 베레고부아는 우크라이나계 이민자 가정 출신으로, 데빌르레루앙에서 태어났다. 16세에 금속 노동자로 사회생활을 시작했으며, 제2차 세계 대전 중 프랑스 국철(SNCF)에서 근무하며 프랑스 레지스탕스 활동에 참여한 것을 계기로 정치에 입문했다.
전후 사회주의 정당인 SFIO와 노동조합 노동자 세력에서 활동했으며, 공공사업 및 교통부 장관 크리스티앙 피노의 참모를 거쳐 국영 기업 가스 드 프랑스에서 근무하기도 했다. 1959년 SFIO를 떠나 통합 사회당(PSU) 창당에 참여했고, 피에르 망데스 프랑스의 고문으로 활동했다. 1969년 개편된 사회당(PS)에 합류하여 프랑수아 미테랑의 측근이 되었으며, 좌파 연합의 ''공동 강령'' 협상에 참여하는 등 당내에서 입지를 다졌다.
2. 1. 출생과 성장
피에르 베레고부아는 1925년 12월 23일, 북프랑스 노르망디 센마리팀의 데빌르레루앙에서 프랑스인 어머니와 우크라이나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원래 성이 우크라이나어로는 Береговий|베레호비uk, 러시아어로는 Береговой|베레고보이ru였으며, 러시아 내전 이후 러시아 제국을 떠나 프랑스로 이주한 이민자였다.그는 16세에 자격을 갖춘 금속 노동자로 사회 생활을 시작했으며, 이후 섬유 공장, 프랑스 국철(SNCF), 프랑스 가스 공사(Gaz de France) 등에서 근무하며 마감 기술자 및 밀링 선반 기술자 직업 적성 증명서(CAP)를 취득했다.
프랑스 국철에서 일하던 중 제2차 세계 대전을 겪었고, 전쟁 중 프랑스 레지스탕스 운동에 참여한 것을 계기로 정치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2. 2. 제2차 세계 대전과 레지스탕스 활동
피에르 베레고부아는 데빌르레루앙에서 프랑스인 어머니와 우크라이나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러시아 내전 이후 러시아 제국을 떠났으며, 원래 성은 우크라이나어로 Береговий|베레호비ukr, 러시아어로는 Береговой|베레고보이rus였다.그는 16세에 자격을 갖춘 금속 노동자로 사회 생활을 시작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SNCF에서 근무하며 프랑스 레지스탕스 활동에 참여했고, 이를 계기로 정치에 발을 들였다. 전쟁 후 사회주의 정당인 SFIO와 노동조합 연맹 노동자의 힘의 일원으로 활동했다. 1949년에는 공공사업 및 교통부 장관 크리스티앙 피노의 참모로 들어가 노동조합과의 관계를 담당하는 고문 역할을 맡았다. 1년 뒤에는 국영 가스 회사인 ''가스 드 프랑스''의 기술 요원이 되었다.
2. 3. 노동 운동과 사회주의 정당 활동
피에르 베레고부아는 데빌르레루앙에서 프랑스인 어머니와 우크라이나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16세에 금속 노동자로 사회 생활을 시작했으며,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국영 철도 회사 SNCF에서 일하며 프랑스 레지스탕스 활동에 참여했다. 이를 계기로 정치에 입문하게 되었다.전후, 베레고부아는 사회주의 정당인 SFIO에 입당하고 노동조합 연맹 노동자 세력(Force Ouvrière)의 조합원으로 활동하며 노동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1949년에는 공공사업 및 교통부 장관 크리스티앙 피노의 참모가 되어 노동조합 관계 고문으로 활동했으며, 1950년에는 국영 가스 회사인 ''가스 드 프랑스''(Gaz de France)의 기술 요원이 되었다.
1958년 피에르 망데스 프랑스의 영향을 받아 자치 사회당(PSA)에 참여했으며, 이듬해인 1959년 SFIO를 탈당했다. 1960년에는 분열된 사회주의 세력을 모아 통합 사회당(PSU)을 창당하는 데 공헌했다. 이후 피에르 망데스 프랑스의 고문으로 활동했으며, 1967년에는 알랭 사바리와 함께 망데스 프랑스를 지지하는 좌파 성향의 클럽 연합(좌익 개혁 클럽)을 결성했다.
1969년, 새롭게 개편된 사회당(PS)에 합류한 베레고부아는 당시 당 제1서기였던 프랑수아 미테랑의 충실한 협력자로 부상했다. 그는 미테랑을 중심으로 한 당 집행부의 일원으로 활동하며, 특히 좌파 연합의 정책 합의인 ''공동 강령''(Programme commun) 협상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3. 정치 경력
피에르 베레고부아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SNCF에서 일하며 프랑스 레지스탕스 활동에 참여한 것을 계기로 정치에 입문했다. 처음에는 사회주의 계열의 SFIO와 노동조합 연맹 노동자 세력에서 활동했으며, 1949년에는 공공사업 및 교통부 장관 크리스티앙 피노의 참모로 활동했다.
1959년 SFIO를 떠나 통합 사회당(PSU) 창당에 참여했고, 피에르 망데스 프랑스의 고문으로 활동했다. 1967년 알랭 사바리와 함께 좌파 그룹을 결성했으며, 이 그룹은 1969년 개편된 사회당(PS)에 합류했다. 그는 프랑수아 미테랑을 중심으로 한 당 지도부의 일원이 되어 좌파 연합의 ''공동 강령'' 협상 등에 참여하며 정치적 입지를 다졌다.
1981년 미테랑이 프랑스 대통령으로 선출된 후, 베레고부아는 대통령 비서실 사무총장으로 임명되었다. 이후 사회부 장관(1982–1984)과 경제 및 재정부 장관(1984–1986, 1988–1992)을 역임하며 미테랑 정부의 핵심 인사로 부상했다. 그는 프랑스 경제 정책 변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으며, 특히 프랑스 사회주의가 시장 경제에 적응하는 과정을 상징하는 인물로 평가받았다.
정부 요직을 맡는 동시에 1983년 네베르 시장으로 선출되었고, 1986년에는 미테랑의 정치적 기반인 니에브르 지역구에서 프랑스 국민 의회 의원으로 당선되는 등 지역 정치 기반도 다졌다. 1988년 미테랑의 대통령 재선 캠페인에서도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1992년 지방 선거에서 사회당이 참패하자, 그는 총리로 임명되어 소수 정부를 이끌었다. 총리로서 실업, 경제 침체, 부패 척결을 약속하고 여러 사회 정책 개혁을 추진했으나[1][2][3][4][5][6][7][8][9], 경제적 어려움은 지속되었다. 결국 1993년 3월 총선에서 사회당은 역사적인 참패를 당했고, 베레고부아는 선거 패배의 책임을 지고 총리직에서 사임했다.
3. 1. 미테랑 정부의 핵심 인사
1981년 프랑수아 미테랑이 프랑스 대통령으로 선출되자, 피에르 베레고부아는 대통령 비서실 사무총장으로 발탁되었다. 그는 미테랑의 충실한 협력자로서 사회당 내에서 입지를 다져왔으며, 미테랑의 지지 기반인 니에브르주에서 국민 의회 의원에 당선되었고, 네베르 시장으로도 선출되었다.1982년에는 피에르 모루아 내각의 사회부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이 시기 베레고부아는 사회주의 경제 정책을 지속하기 위해 유럽 통화 시스템에서 프랑스가 탈퇴해야 한다고 미테랑 대통령에게 조언한 인물 중 하나였다. 그러나 1983년 3월, 미테랑은 모루아 총리의 의견을 받아들여 경제 정책의 방향 전환을 결정했다.

1984년 로랑 파비우스 내각이 출범하면서 베레고부아는 경제 및 재정부 장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는 신자유주의적 경제 정책과 재정 균형을 추구하며 정책 전환을 주도했다. 이 시기 그는 1985년 플라자 합의에 프랑스 대표로 참여하기도 했다. 1986년 사회당이 총선에서 패배하면서 잠시 장관직에서 물러났으나, 1988년 대통령 선거에서는 미테랑의 재선을 위해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미테랑의 재선 이후, 베레고부아는 미셸 로카르 내각에서 다시 경제 및 재정부 장관을 맡았다. 그는 프랑스 사회주의가 시장 경제에 적응하는 과정을 상징하는 인물로 여겨졌으며, 재계와도 긴밀한 관계를 구축했다. 1991년 에디트 크레송 내각에서는 경제, 재정, 예산, 대외 무역 등 광범위한 권한을 가진 이른바 "슈퍼 재무 장관"으로 불리며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1992년 지방 선거에서 사회당이 참패하자 크레송 내각은 총사퇴했고, 베레고부아가 후임 총리로 임명되어 소수 정부를 이끌게 되었다. 그는 총리로서 실업, 경제 침체, 부패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프랑스 국민 의회 취임 연설에서는 부패 스캔들에 연루된 우파 야당 정치인들의 이름을 알고 있다고 발언하여 파문을 일으키기도 했다. 또한, 사법부에 의해 기소된 도시부 장관 베르나르 타피에게 사임을 강요하며 부패 척결 의지를 보였다.
베레고부아 내각은 여러 사회 정책 개혁을 추진했다.
- 1992년 11월, 노동법에 성희롱 정의를 명시하고 노동 감독관과 직장 위원회에 집행 권한을 부여하는 법안 통과.[2]
- 1992년 5월, 농지세 감면과 젊은 농민 보조금 증액 등 농민 지원 강화.[3]
- 1992년 6월, 시장에게 공공 주택에서 사회적 혼합을 장려하도록 의무화하는 법안 통과.[4]
- 1992년 7월, 탁아 보모의 지위 향상 및 아동 보육의 질 개선 법안(7월 12일), 의료 지원 혜택 개선 법안(7월 29일) 통과.[5]
- 1993년 1월, 경제 활동 및 공공 절차에서의 부패 방지 및 투명성 증진을 위한 '사팽 법' 제정.[6]
- 1993년 1월, 이혼 시에도 합법적인 가족 내 공동 부모 권한 원칙을 확립하는 법안 통과.[7]
- 1993년, 주택 혜택 범위 확대.[8][9]
그러나 경제 상황은 개선되지 않았고 실업자는 300만 명까지 증가했다. 결국 1993년 3월 총선에서 사회당은 이전 260석에서 53석으로 의석수가 급감하는 역사적인 참패를 당했다. 베레고부아는 선거 패배의 책임을 지고 1993년 3월 29일 총리직에서 사임했다.
'''주요 공직'''
직책 | 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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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리 | 1992–1993 |
경제 재정 장관 | 1984–1986 / 1988–1992 |
사회 문제 장관 | 1982–1984 |
대통령 비서실 사무총장 | 1981–1982 |
프랑스 국민 의회 의원 (니에브르주 선거구) | 1986–1988, 1993년 3월–5월 |
니에브르주 일반 평의원 | 1985–1993 |
네베르 시장 | 1983–1993 |
네베르 시의원 | 1983–199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