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에르 망데스 프랑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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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피에르 망데스 프랑스는 1907년 파리에서 태어난 프랑스의 정치인이다. 그는 변호사, 정치대학 졸업 후 급진당에 입당하여 하원 의원, 재무부 차관을 역임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비시 프랑스에 체포되었다가 탈출하여 자유 프랑스군에 합류, 공군으로 참전했다. 제4공화국에서 총리로 임명되어 인도차이나 전쟁을 종결하고 북아프리카 문제에 관여했으나, 알제리 문제로 인해 내각이 붕괴되었다. 제5공화국 수립에 반대하며 좌파 정당에서 활동했고, 1969년 대선에서 가스통 데페르를 지지했다. 그는 공정하고 진실된 인물로 평가받으며, 제네바 협정 체결을 통해 인도차이나 전쟁을 종결한 업적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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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르 망데스 프랑스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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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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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피에르 이자크 이지도르 망데스 프랑스 |
출생일 | 1907년 1월 11일 |
출생지 | 파리 |
사망일 | 1982년 10월 18일 |
사망지 | 파리 |
정당 | 급진당 (1924–1959) 자율사회당 (1959–1960) 통합사회당 (1960–1971) |
배우자 | 릴리 시쿠렐 (1933년 결혼, 1967년 사별) 마리-클레르 세르방-슈레베르 드 플뢰리외 (1971년 결혼) |
자녀 | 2명 |
모교 | 파리 대학교 |
프랑스 총리 | |
직위 | 프랑스 총리 |
임기 시작 | 1954년 6월 18일 |
임기 종료 | 1955년 2월 23일 |
대통령 | 르네 코티 |
이전 | 조제프 라니엘 |
이후 | 에드가 포르 |
외무부 장관 | |
직위 | 외무부 장관 |
임기 시작 | 1954년 6월 18일 |
임기 종료 | 1955년 1월 20일 |
총리 | 자신 |
이전 | 조르주 비돌 |
이후 | 에드가 포르 |
루비에 시장 | |
직위 | 루비에 시장 |
임기 시작 | 1953년 3월 13일 |
임기 종료 | 1958년 11월 27일 |
이전 | 마르셀 말에르브 |
이후 | 앙드레 뱅슬로 |
임기 시작 (이전) | 1935년 5월 17일 |
임기 종료 (이전) | 1939년 9월 20일 |
이전 (이전) | 라울 토렐 |
이후 (이전) | 오귀스트 프로망탱 |
외르 주 총의회 의장 | |
직위 | 외르 주 총의회 의장 |
임기 시작 | 1945년 10월 6일 |
임기 종료 | 1958년 12월 6일 |
이전 | 직위 신설 |
이후 | 귀스타브 에옹 |
국민 경제 장관 | |
직위 | 국민 경제 장관 |
임기 시작 | 1944년 9월 4일 |
임기 종료 | 1945년 4월 6일 |
총리 | 샤를 드 골 |
이전 | 직위 신설 |
이후 | 르네 플레벤 |
재정 담당 | |
직위 | 재정 담당 |
임기 시작 | 1943년 11월 3일 |
임기 종료 | 1944년 9월 4일 |
대통령 | 샤를 드 골 |
이전 | 모리스 쿠브 드 뮈르빌 |
이후 | 에메 르페르크 |
2. 초기 생애 및 교육
망데스 프랑스는 1907년 1월 11일 파리에서 태어났다.[3] 그의 아버지는 리모주 출신의 직물 상인이었으며, 그의 가문은 16세기에 프랑스에 정착한 포르투갈계 유대인 (세파르딤) 중산층 가정의 후손이었다.[3] 그는 파리 정치대학과 파리 대학교 법학부에서 수학하여 법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3]
학생 시절, 그는 프랑스의 전통적인 중도좌파 정당인 급진사회당(급진당)의 지도자 에두아르 에리오에게 영향을 받아 당의 학생 조직인 공화국 사회주의 대학 행동 연맹에서 활동했으며, 1924년 급진당에 입당했다.[3] (급진당은 주류 사회주의 정당인 SFIO와는 구별된다.)
1926년, 19세의 나이로 파리 변호사 협회의 최연소 회원이 되었다.[3] 그는 살바토르 시큐렐의 조카인 릴리 시큐렐과 결혼했다.[4] 유대계라는 점 때문에 당시 프랑스 정계에서 어려움을 겪기도 했으나, 뛰어난 학력을 바탕으로 이를 극복해 나갔다.
3. 정치 경력
1932년 망데스 프랑스는 하원 외르 선거구 의원으로 선출되어 정계에 입문했으며, 당시 의회 최연소 의원이었다.[3] 1936년 선거에서는 급진적인 농업 단체 농민 방어 위원회 의장 모데스트 르구에즈에게 700표 차이로 간신히 승리했는데, 망데스 프랑스 자신은 이 선거를 가장 힘든 선거였다고 회고했다.[5]
그의 능력은 일찍부터 인정받아, 1938년 레옹 블룸 정부에서 재무부 차관으로 임명되었다.[3]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자유 프랑스군에 합류하여 활동했으며(자세한 내용은 제2차 세계 대전 시기 참조), 1944년 파리 해방 이후 샤를 드골이 이끄는 프랑스 임시 정부에서 국민 경제 장관을 맡았다.[3] 그러나 경제 정책을 둘러싼 이견으로 곧 사임했으며, 이후 국제 부흥 개발 은행 이사, 국제 연합 경제 사회 이사회 프랑스 대표 등을 역임했다.[3]
망데스 프랑스는 프랑스 제4공화국과 프랑스 제5공화국 시기에도 활발한 정치 활동을 이어갔으며, 총리직을 포함한 여러 정부 요직과 선출직을 거쳤다. (자세한 내용은 제4공화국 시기, 제5공화국 시기 참조)
'''정부 직책'''
'''선거직'''
직책 | 선거구 | 임기 | 비고 |
---|---|---|---|
프랑스 국민 의회 의원 | 외르주 | 1932년–1942년 (필리프 페탱에 의해 해임) / 1946년–1958년 | 1932년 당선, 1936년, 1946년, 1951년, 1956년 재선 |
이제르주 (제2 선거구) | 1967년–1968년 | 1967년 당선, 1968년 낙선 | |
외르주 일반 의회 의장 | 외르주 | 1951년–1958년 | 1955년 재선 |
외르주 일반 의회 의원 | 외르주 | 1937년–1958년 | 1945년, 1951년 재선 |
루비에 시장 | 루비에 | 1935년–1939년 (사임) / 1953년–1958년 (사임) | 1953년 재선 |
루비에 시의원 | 루비에 | 1935년–1939년 (사임) / 1953년–1958년 (사임) | 1953년 재선 |
3. 1. 제2차 세계 대전 시기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그는 프랑스 공군에 지원했다.[3] 1940년 프랑스가 나치 독일에 항복하고 비시 프랑스 정권이 수립된 후, 그는 다른 군 부대와 함께 프랑스령 북아프리카로 이동했으나 비시 프랑스 당국에 의해 체포되었다.[3] 1941년 5월, 그는 탈영 혐의로 재판에 넘겨져 금고 6년, 군적 박탈, 10년간의 시민권 박탈이라는 판결을 받았다.[3] 그러나 같은 해 6월, 극적으로 감옥을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3] 그의 재판, 유죄 판결, 그리고 탈출 과정은 훗날 유명 다큐멘터리 ''슬픔과 연민''에서 다루어졌다.[3]탈출 후 1942년 초 영국으로 망명한 망데스 프랑스는 샤를 드골이 이끄는 자유 프랑스군에 합류했다.[3] 그는 자유 프랑스 공군에 소속되어 "로렌 폭격대" 대장을 맡았으며, 전쟁 기간 동안 총 12차례의 폭격 임무에 참여하는 등 적극적으로 항전 활동을 벌였다.[3] 이후 알제에 국민해방위원회(CFLN)가 설립되자 재정 담당 위원으로 임명되었고,[3] 1944년 미국 브레튼우즈에서 열린 국제 연합 통화 금융 회의에 프랑스 대표단을 이끌고 참석하여 전후 국제 금융 질서 수립 논의에 참여했다.[3]
1944년 9월 파리가 해방되고 드골을 수반으로 하는 프랑스 임시 정부가 수립되자, 망데스 프랑스는 국민 경제 장관으로 임명되었다.[3] 그러나 그는 인플레이션을 억제하기 위한 임금 규제 정책을 주장하며 당시 재무부 장관이었던 르네 플르방과 대립했다. 플르방은 보다 자유방임주의적인 경제 정책을 선호했다.[3] 결국 드골이 플르방의 손을 들어주자, 망데스 프랑스는 1945년 장관직에서 사임했다.[3] 그럼에도 드골은 그의 능력을 인정하여, 국제 부흥 개발 은행(IBRD) 이사와 국제 연합 경제 사회 이사회(ECOSOC) 프랑스 대표로 추천했다.[3]
3. 2. 제4공화국 시기
1947년, 제4공화국 하에서 프랑스의 민주주의 정치가 재개되면서 망데스 프랑스는 국민 의회 의원으로 다시 선출되었다. 그는 1953년 6월 처음으로 내각 구성을 시도했지만, 의회에서 과반수 지지를 얻지 못해 조제프 라니엘 내각이 들어섰다. 이 시기 프랑스 정치는 외교 및 대외 정책, 특히 인도차이나와 알제리를 중심으로 한 북아프리카 식민지 문제가 가장 큰 현안이었다.망데스 프랑스는 1950년부터 프랑스 식민주의에 대해 일관되게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프랑스는 인도차이나에서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을 벌이고 있었고, 1954년에는 알제리 독립 전쟁까지 발발하며 주요 식민지 분쟁에 깊이 휘말려 있었다. 1954년 5월,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프랑스군이 베트민(베트남 독립 동맹회)에게 결정적으로 패배하자, 전쟁 지속을 주장하던 라니엘 내각은 결국 총사퇴했다. 망데스 프랑스는 라니엘 내각의 노선을 강하게 비판하며 붕괴를 이끌었고, 1954년 6월 19일 르네 코티 대통령의 요청으로 중도 우파의 지지를 받아 내각을 구성했다. 당시 내각에는 훗날 사회당 소속 대통령이 되는 젊은 프랑수아 미테랑이 내무부 장관으로 참여했다.
총리가 된 망데스 프랑스는 취임 연설에서 30일 안에 인도차이나 전쟁을 끝내겠다고 선언하며, 실패 시 사임하겠다는 약속까지 했다. 그는 즉시 베트남 공산주의 지도자 호치민과 협상을 시작했고, 베트민을 지원하던 중국의 저우언라이 총리와도 만나 회담했다. 7월 10일 시작된 제네바 회담에서 망데스 프랑스는 뱌체슬라프 몰로토프 소련 외무장관 등과 치열한 협상을 벌였고, 협상 과정을 라디오를 통해 국민들에게 알리며 불퇴전의 의지를 보였다. 마침내 7월 21일, 인도차이나 국가들의 독립과 북위 17도선을 경계로 한 베트남 분단 등을 골자로 하는 제네바 협정이 체결되었다. 프랑스 의회는 이 협정을 찬성 471표, 반대 14표라는 압도적인 표차로 비준했다. 그러나 민주공화운동(MRP) 일부와 온건파, 그리고 로마 가톨릭 교회를 기반으로 한 극우 및 국가주의 세력은 식민지 포기에 큰 충격을 받았고, 베트남의 가톨릭 신자들이 공산주의 치하에 놓이는 것에 반대하며 망데스 프랑스를 비난했다. 이러한 비난 중 상당수는 반유대주의적인 성격을 띠었으며, 당시 극우 푸자드당 소속이었던 장마리 르 펜은 망데스 프랑스에 대해 "애국적이고 거의 육체적인 혐오감"을 느꼈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인도차이나 문제를 해결한 망데스 프랑스는 곧바로 북아프리카 문제 해결에 나섰다. 1954년 7월 말, 그는 튀니지의 민족주의 지도자 하비브 부르기바(훗날 튀니지 초대 대통령)와 협상을 시작하여 1956년 독립의 길을 열었고, 모로코의 무함마드 5세와도 프랑스 철수에 대한 논의를 시작했다. 이러한 조치들은 망데스 프랑스의 후임인 에드가 포르 내각 시기에 독립을 달성하는 기반이 되었다. 그는 알제리의 민족주의자들에게도 양보하는 입장이었으나, 알제리에는 100만 명에 달하는 유럽계 정착민(피에 누아르)이 거주하고 있어 상황이 복잡했고, 이는 식민 세력의 강한 반발을 샀다. 미래의 용병 밥 데나르는 1954년 망데스 프랑스 암살 미수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고 14개월 징역형을 선고받기도 했다.[6]
망데스 프랑스는 자신이 속한 급진당이 프랑스 정치의 현대화와 쇄신을 이끄는 정당이 되기를 희망하며, SFIO(사회당)를 대체하고자 했다. 그는 더 큰 유럽 통합을 지지하며 서유럽 연합 결성에 기여했고 광범위한 경제 개혁을 제안했다. 또한 다른 유럽 국가들과의 국방 협력을 선호했지만, 1954년 8월 서독의 재무장에 대한 우려 등으로 인해 국민 의회는 유럽 방위 공동체(EDC) 조약 비준을 거부했다. 이 결정은 민주공화운동(MRP) 등 EDC 지지 세력의 이탈을 초래했다.
결국 알제리에서의 테러 증가와 이에 대한 망데스 프랑스의 양보 정책에 대한 우익의 반발이 거세지면서 그의 입지는 점차 좁아졌다. 1955년 2월, 의회 신임 투표에서 패배하면서 망데스 프랑스 내각은 총사퇴했다. 후임 총리로는 급진당 내 경쟁자였던 우파 성향의 에드가 포르가 취임했다.
1956년, 망데스 프랑스는 사회당(SFIO)의 기 몰레가 이끄는 내각에 국무 장관으로 참여했지만, 알제리 전쟁 처리에 대한 몰레 총리와의 의견 차이로 인해 얼마 지나지 않아 사임했다.[3] 알제리 문제에 대한 에드가 포르 등 당내 보수파와의 갈등은 결국 1957년 망데스 프랑스가 급진당 대표직에서 물러나는 결과로 이어졌다.
'''정부 직책'''
직책 | 임기 |
---|---|
국무총리 | 1954년–1955년 |
외무부 장관 | 1954년–1955년 |
국무 장관 | 1956년 1월–5월 (사임) |
'''선거직'''
직책 | 선거구 | 임기 | 비고 |
---|---|---|---|
프랑스 국민 의회 의원 | 외르주 | 1932년–1942년 (필리프 페탱에 의해 해임) / 1946년–1958년 | 1932년 당선, 1936년, 1946년, 1951년, 1956년 재선 |
이제르주 (제2 선거구) | 1967년–1968년 | 1968년 당선 | |
외르주 일반 의회 의장 | 외르주 | 1951년–1958년 | 1955년 재선 |
외르주 일반 의회 의원 | 외르주 | 1937년–1958년 | 1945년, 1951년 재선 |
루비에 시장 | 루비에 | 1935년–1939년 (사임) / 1953년–1958년 (사임) | 1953년 재선 |
루비에 시의원 | 루비에 | 1935년–1939년 (사임) / 1953년–1958년 (사임) | 1953년 재선 |
3. 3. 제5공화국 시기

프랑스 좌파의 다수와 마찬가지로, 망데스 프랑스는 알제리 위기가 프랑스 제4공화국 체제를 무너뜨리고 프랑스 제5공화국 수립으로 이어진 1958년 5월 위기 당시 샤를 드골의 집권에 반대했다.[3] 그는 반골주의 단체인 '민주 세력 연합'을 이끌었으나, 1958년 11월 선거에서 의석을 잃었다. 1959년 말, 드골을 지지하는 급진당 내 다수파에 의해 당에서 제명된 후, 그는 SFIO에서 탈퇴한 이들이 만든 자율 사회당(PSA)에 합류했다.[3]
1960년 4월, PSA는 다른 여러 소규모 좌파 그룹과 합쳐져 통합 사회당(PSU)을 창당했다.[3] 그는 1962년 1월 PSU 회의에서 알제리 전쟁에 대한 반대 입장을 표명했으며, 같은 해 선거에서 외르 지역구 의석을 되찾으려 했으나 실패했다.[7]
1967년, 그는 PSU 소속으로 이제르 지역구에서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어 의회에 복귀했지만, 1968년 5월 사건 이후 치러진 총선에서 골주의 정당인 UDR이 압승하면서 다시 의석을 잃었다. 망데스 프랑스와 PSU는 1968년 5월 사건 당시 학생 시위대의 입장에 공감하는 태도를 보였는데,[3] 이는 그의 나이와 정치적 경력을 고려할 때 이례적인 행보로 평가받았다.
1년 뒤인 1969년 대통령 선거에서는 사회주의 진영의 가스통 데페르 후보가 망데스 프랑스를 총리 후보로 지명하며 함께 선거 운동을 펼쳤다. 이는 프랑스 대선 역사상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대통령 후보와 총리 후보가 한 조(ticket)를 이루어 출마한 사례였다. 그러나 데페르는 1차 투표에서 5%의 저조한 득표율을 기록하며 탈락했다.
1971년 프랑수아 미테랑이 새로운 사회당(PS)을 창당했을 때, 망데스 프랑스는 이를 지지했으나 다시 정계에 복귀하지는 않았다. 그는 1981년 미테랑이 대통령으로 당선되는 것을 지켜본 후, 이듬해인 1982년 10월 18일 파리에서 7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4. 정치적 유산 및 평가
피에르 망데스 프랑스는 총리 취임 연설에서 인도차이나 전쟁을 30일 안에 끝내겠다고 약속하며, 실패 시 사임하겠다는 공약을 내걸었다.[1] 그는 호치민과 휴전을 논의하는 한편, 베트민의 배후인 중국과의 관계를 중시하여 1954년 6월 23일 저우언라이 중국 총리와 회담했다.[1] 7월 10일 시작된 제네바 회담에서 망데스 프랑스는 소련의 뱌체슬라프 몰로토프 외무장관과 치열한 협상을 벌였고, 이 과정은 프랑스 국내에 상세히 보도되었다.[1] 망데스 프랑스 자신도 라디오 연설을 통해 협상에 대한 강한 의지를 국민에게 전달했다.[1] 결국 7월 21일, 인도차이나 국가들의 독립과 북위 17도선을 경계로 한 남북 베트남 분단 등을 골자로 하는 제네바 협정이 체결되었다.[1] 프랑스 의회는 이 협정을 찬성 471표, 반대 14표라는 압도적인 표차로 승인했다.[1] 반대표는 주로 민주공화운동(MRP)과 일부 온건파 의원들이 던졌으며, 가톨릭교회를 기반으로 한 극우 및 국가주의자 세력은 식민지 포기에 큰 충격을 받고 공산주의 세력에게 가톨릭 신자들을 넘겨주는 것에 반대했다.[1] 훗날 국민전선 당수가 되는 장마리 르 펜은 당시 극우 성향의 푸자드파 소속으로, 애국심 때문에 망데스 프랑스에 반발했다고 회고했다.[1]
망데스 프랑스의 가장 큰 정치적 업적은 제네바 협정 체결을 통해 인도차이나 전쟁을 종결시킨 것이다.[1] 그는 인도차이나 문제에 대한 현실적인 해결책을 제시하고 30일 내 휴전 약속을 지킴으로써 국민적 신뢰를 얻었다.[1]
그는 공정하고 엄격하며 진실된 인물로 평가받았으며, 평생 프랑스의 전통적인 의회 존중 공화제를 지지하는 입장을 견지했다.[1] 그의 정치 노선은 교조적인 사회주의가 아닌 온건한 중도 좌파 성향으로, '망데스주의'라고 불리기도 한다.[1] 제2차 세계 대전 때부터 알고 지낸 샤를 드골과는 정치적 입장이 달랐지만 서로 존경하는 관계를 유지했다.[1] 이처럼 정치적 견해가 다른 이들조차 그의 정치적 식견, 이상주의, 정의감에 대해서는 높이 평가했다.[1]
그러나 망데스 프랑스 정권은 의회 내에서 안정적인 지지 기반을 확보하지 못했다.[1] 이로 인해 유럽 방위 공동체(EDC) 구상이 실패하고, 알제리 전쟁으로 국론이 분열되었을 때 효과적인 대응을 하지 못하면서 정권은 빠르게 무너졌다.[1] 또한 그가 유대인이라는 사실 때문에 프랑스 사회 내 우익 세력을 중심으로 반유대주의적 공격이 가해지기도 했다.[1]
정권을 잃은 후에도 그는 북아프리카와 중동 문제에 적극적으로 관여했다.[1] 특히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팔레스타인 국가의 독립을 지지하는 입장을 취해 이슬람교도들로부터도 신뢰를 받았다.[1]
현재 파리 시내에는 그의 이름을 딴 '피에르 망데스 프랑스 거리'가 있다.[1]
5. 저서
망데스 프랑스는 다음과 같은 저서를 출판했다.
- ''1926년과 1927년 프랑스 재정 정상화'', 1928년 3월 3일 파리 대학교 법학부에서 제출된 박사 학위 논문, LGDJ, 1928
- ''푸앵카레 정부의 재정 사업''. 조르주 보네의 서문, LGDJ, 1928
- La Banque internationale. Contribution à l'étude du problème des États-Unis d'Europe|라 방크 앵테르나시오날. 콩트리뷔시옹 아 레튀드 뒤 프로블렘 데 제타쥐니 되로프fra ''국제 결제 은행, 유럽 합중국 문제 연구 기여'', Librairie Valois, 1930
- Le Département de l'Eure au point de vue économique|르 데파르트망 드 뢰르 오 푸앵 드 뷔 에코노미크fra ''경제적 관점에서 본 외르 (Eure) 지역'', 1933, M. C. 브리케의 서문
- Liberté, liberté chérie… Choses vécues|리베르테, 리베르테 셰리... 쇼즈 베퀴fra ''자유, 사랑하는 자유.. 겪었던 일들'', 뉴욕, Les éditions Didier, 1943
- Roissy-en-France|루아시앙프랑스fra ''로아시-앙-프랑스'', Julliard 1947
- Gouverner, c'est choisir|구베르네, 세 슈아지르fra ''통치한다는 것은 선택하는 것이다'', (1) Julliard 1953.
- Gouverner, c'est choisir|구베르네, 세 슈아지르fra ''통치한다는 것은 선택하는 것이다'', (2) Sept mois et dix-sept jours juin 1954-février 1955|세트 무아 에 디세트 주르 쥐앵 1954-페브리에 1955fra ''7개월 17일 1954년 6월-1955년 2월'', Julliard, 1955
- Dire la vérité, Causeries du Samedi|디르 라 베리테, 코즈리 뒤 삼디fra ''진실을 말하다, 토요일 대담'', Julliard 1955
- Gouverner, c'est choisir|구베르네, 세 슈아지르fra ''통치한다는 것은 선택하는 것이다'', (3) La Politique et la Vérité|라 폴리티크 에 라 베리테fra ''정치와 진실''-Julliard 1958
- Pour une République moderne|푸르 윈 레퓌블리크 모데른fra ''현대 공화국을 위하여'', Gallimard, 1962, 재판 1966
- Pour préparer l'avenir, Propositions pour une action|푸르 프레파레 라브니르, 프로포지시옹 푸르 윈 악시옹fra ''미래를 준비하기 위해, 행동 제안'', 파리: Denoël, 1968
- Dialogues avec l'Asie d'aujourd'hui|디알로그 아베크 라지 도주르뒤fra ''오늘날의 아시아와의 대화'' -Gallimard 1972
- Choisir, Conversations avec Jean Bothorel|슈아지르, 콩베르사시옹 아베크 장 보토렐fra ''선택하다, 장 보토렐과의 대화'' Stock 1974
- La vérité guidait leurs pas|라 베리테 기데 뢰르 파fra ''진실이 그들의 발걸음을 인도했다'', Gallimard, 1976
- Regard sur la Ve République (1958-1978), entretien avec François Lanzenberg|르가르 쉬르 라 생키엠 레퓌블리크 (1958-1978), 앙트르티앵 아베크 프랑수아 랑젠베르그fra ''제5공화국 (1958-1978)에 대한 시선, 프랑수아 랑젠베르그와의 인터뷰'', 파리, Fayard, 1983.
'''전집'''
- Œuvres complètes|외브르 콩플레트fra, 제1권, S'engager 1922-43|상가제 1922-43fra, (1984), 837 p.
- Œuvres complètes|외브르 콩플레트fra, 제2권, Une politique de l'économie 1943-54|윈 폴리티크 드 레코노미 1943-54fra, (1985), 630 p.
- Œuvres complètes|외브르 콩플레트fra, 제3권, Gouverner, c'est choisir 1954-55|구베르네, 세 슈아지르 1954-55fra, (1986), 831 p.
- Œuvres complètes|외브르 콩플레트fra, 제4권, Pour une république moderne 1955-62|푸르 윈 레퓌블리크 모데른 1955-62fra, (1988), 969 p.
- Œuvres complètes|외브르 콩플레트fra, 제5권, Préparer l'avenir 1963-73|프레파레 라브니르 1963-73fra, (1989), 874 p.
- Œuvres complètes|외브르 콩플레트fra, 제6권, Une vision du monde 1974-82|윈 비지옹 뒤 몽드 1974-82fra, (1990), 684 p.
6. 서훈
- 레지옹 도뇌르 훈장 사령관
- 1939-1945 전쟁 십자 훈장
- 레지스탕스 훈장
- (벨기에): 레오폴드 훈장 대십자
- (모로코): 우이삼 알라위 훈장 대훈위
- (모나코): 생샤를 훈장 대십자
- (튀니지): 영광 훈장 대훈위
참조
[1]
서적
France since the Popular Front: Government and People 1936-1996
[2]
서적
Worse Than a Monolith: Alliance Politics and Problems of Coercive Diplomacy in Asia
https://books.google[...]
Princeton UP
2016-09-21
[3]
서적
Political Leaders of Contemporary Western Europe: A Biographical Dictionary
https://books.google[...]
Greenwood Publishing Group
[4]
뉴스
1927: Owner of Egypt's Grandest Store Brutally Murdered in Cairo
https://www.haaretz.[...]
2018-06-14
[5]
간행물
Pierre Mendès France, élu d’un département rural
https://books.opened[...]
Pierre Mendès France et la démocratie locale
[6]
뉴스
Obituary: Bob Denard
http://news.bbc.co.u[...]
2007-10-14
[7]
뉴스
De Gaulle Wins In France
https://news.google.[...]
St. Petersburg Times
1962-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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