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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르 드 롱사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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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피에르 드 롱사르는 16세기 프랑스를 대표하는 시인으로, 플레야드파의 지도자이자 '시인들의 왕자'로 불렸다. 그는 다양한 형식과 주제의 작품을 남겼으며, 특히 소네트와 송시에서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롱사르는 고대 그리스와 로마 문학에서 영감을 받아 프랑스 시의 혁신을 주도했으며, 프랑스 문학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의 작품은 낭만주의 시대에 재조명되었으며, 현재까지도 프랑스 문학의 중요한 유산으로 평가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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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르 드 롱사르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벤자민 풀롱의 롱사르 초상화, ca. 1580.
벤자민 풀롱의 롱사르 초상화, 1580년경
본명피에르 드 롱사르
출생일1524년 9월 11일
출생지쿠튀르 쉬르 루아르, 프랑스
사망일1585년 12월 27일
사망지라 리슈, 프랑스
국적프랑스
언어중세 프랑스어
직업
직업시인
문학 활동
사조플레야드, 프랑스 르네상스
주요 작품레 오드(Les Odes)
레 자무르(Les Amours)
엘렌을 위한 소네트(Sonnets pour Hélène)
레 디스쿠르(Les Discours)
학력
교육나바라 대학교
서명
피에르 드 롱사르 서명
피에르 드 롱사르 서명

2. 생애

피에르 드 롱사르는 루아르에셰르주 쿠튀르 쉬르 루아르 마을의 라 포소니에르 저택에서 태어났다. 롱사르 가문의 프랑스 분파 창시자는 백년 전쟁 초기에 두각을 나타낸 보두앵 드 롱사르였다. 시인의 아버지는 프랑수아 1세의 '궁정 집사'였던 루이 드 롱사르였고, 어머니는 명문가 출신인 잔 드 쇼드리에였다. 피에르는 막내아들이었다.

어릴 때 집에서 교육을 받은 롱사르는 9살 때 나바르 대학교에 입학했다. 마들렌 드 발루아가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5세와 결혼했을 때, 스코틀랜드 궁정의 시종이 되어 고전 작가들의 프랑스어 번역에 영감을 받았다.[1] 1년 후, 잉글랜드를 거쳐 프랑스로 돌아왔다.

그는 클로드 드 뤼미에르, 라시니 영주와 함께 플랑드르, 네덜란드, 스코틀랜드 등으로 외교 임무를 수행했다.[2] 이후 라 플레아드의 동료인 앙투안 드 바이에프의 아버지 라자르 드 바이에프의 수행 비서가 되어 슈파이어 제국 회의에 참석했다. 뒤 벨레-랑제 추기경의 측근으로 합류했고, 프랑수아 라블레와의 악명 높은 다툼도 이 시기에 시작되었다.

1540년 알자스 방문 이후 청각 장애로 외교 경력이 중단되자, 학문에 전념하기로 결심했다. 장 도라가 교장이었던 콜레주 코케레를 선택했는데, 도라는 훗날 플레야드의 일원이 되었고, 바이에프 집안의 가정교사로 롱사르와 이미 알고 지냈다. 앙투안 드 바이에프, 레미 벨로, 조아생 뒤 벨레가 합류했다. 무레투스(마르크 앙투안 드 무레)도 이곳 학생으로 프랑스 비극 창작에 큰 영향을 미쳤다.

7년간의 학업 기간 동안 롱사르는 고전의 원리를 자국어에 적용하려는 새로운 문학 운동을 펼쳤다. 1549년 뒤 벨레의 "프랑스어 옹호 및 해설"은 플레야드의 시작을 알렸다. 플레야드는 롱사르, 뒤 벨레, 바이에프, 벨로, 퐁튀 드 티아르, 조델, 도라 7명으로 구성되었다. 롱사르의 작품은 조금 늦게 나왔는데, 뒤 벨레의 속임수로 출판을 결심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1550년 "송시" 첫 4권에 앞서 몇몇 단편, 앙투안 드 부르봉과 잔 드 나바르에 대한 결혼 축시(1550), "프랑스 찬가"(1549), "평화를 위한 송시"가 나왔다.

1552년, 15세 카산드르 살비아티에게 헌정된 "카산드르의 사랑"과 송시 5권이 출판되어 문학적 논쟁을 일으켰다. 클레망 마로 추종자들은 플레야드의 문학 비평, 자국어적이고 중세적인 형태에 대한 경멸, "고대인을 따르라"는 조언 등을 비판했다.[3]

그의 인기는 압도적이었고 번영은 끊이지 않았다. 1555년 ''찬가'', 1556년 ''사랑''의 결론, 1560년 메리 스튜어트 초청으로 알려진 ''전집'', 1565년 ''비가, 가면극과 양치기 노래'', ''프랑스 시의 기법 요약''을 출판했다.

샤를 9세는 롱사르를 각별히 총애하여 궁궐에 방을 내주고, 수도원장직 등을 하사했다. 그러나 위그노들의 반감을 사 풍자시의 대상이 되고, 방탕한 사람이자 무신론자로 묘사되었으며, 뒤 바르타스가 라이벌로 내세워졌다. 롱사르는 암살 시도까지 당했다고 주장했다.

이 기간 동안 서사시 ''프랑시아드''(1572)를 썼지만, 완성되지 못했고 10음절 ''평행 운'' 때문에 실패작으로 간주된다. 이는 프랑스 알렉산드린과 비교되어 불리하게 평가받았다. 성 바르톨로뮤 학살과 출판 시기가 겹치는 불운도 겪었다.

샤를 9세 사후에도 궁정의 총애는 여전했지만, 건강 악화로 궁정을 떠나 방돔 집, 크루아-발 수도원, 파리 등에서 만년을 보냈다. 장 갈랑의 손님으로 본쿠르 대학에 머물렀고, 생 마르셀 교외에 타운 하우스도 있었다. 책에서 이익을 바라지 않았지만, 엘리자베스 1세 등 여러 사람에게서 선물을 받았다. 메리 여왕은 감옥에서 편지를 보냈고, 토르콰토 타소는 ''예루살렘 해방''에 대해 자문했다.

가까운 친구들의 죽음과 건강 악화로 슬픈 만년을 보냈지만, 문학 작품의 질은 저하되지 않았다. 마지막 시 중 일부는 최고 작품에 속한다. 그러나 작품을 반복 수정하는 유혹에 빠져 후기 수정 중 상당수는 개선되지 않았다. 1585년 말 건강이 악화되어 여러 집을 전전하다 투렌의 생 코스메 수도원에서 1585년 12월 27일 사망하여 그곳 교회에 묻혔다.

2. 1. 초기 생애 ( ~ 1540년)

롱사르는 1524년 9월 11일, 오늘날의 루아르에셰르주 쿠튀르 쉬르 루아르 마을에 있는 라 포소니에르 저택에서 귀족 가문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다.[1] 그의 가문은 도나우강 북쪽의 루마니아 일대 출신으로, 보두앵 드 롱사르가 14세기 초 프랑스로 와서 이 지역에 가문의 방계 혈통의 기초를 다졌다. 롱사르의 아버지는 프랑수아 1세의 '궁정 집사'였던 루이 드 롱사르였고,[1] 어머니는 명문가 출신인 잔 드 쇼드리에였다. 어린 시절 롱사르는 집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9살 때 나바르 대학교에 입학했다.[1]

라 포소니에르 저택, 롱사르의 집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5세와 마들렌 드 발루아의 결혼으로 롱사르는 스코틀랜드 궁정의 시종이 되었고, 이곳에서 고전 작가들의 프랑스어 번역에 영감을 받았다.[1] 이후 잉글랜드를 거쳐 프랑스로 돌아온 그는 외교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플랑드르, 네덜란드, 스코틀랜드 등을 여행했다.[2] 롱사르는 라자르 드 바이에프의 수행 비서, 뒤 벨레-랑제 추기경의 측근으로 활동하며 프랑수아 라블레와의 악명 높은 다툼을 벌이기도 했다.

2. 2. 학문과 플레야드 결성 (1540년 ~ 1550년)

1540년, 롱사르는 알자스 방문 후 청각 장애를 겪게 되어 외교관의 꿈을 접고 학문에 전념하기로 결심했다.[3] 그는 장 도라가 교장으로 있던 파리의 콜레주 코케레에서 수학했다. 이곳에서 훗날 플레야드를 함께 이끌 장-앙투안 드 바이에프, 레미 벨로, 조아생 뒤 벨레 등을 만났다.[3]

롱사르는 7년간 학업에 정진하며 고전 문학을 연구하고, 자국어에 고전의 원리를 적용하려는 새로운 문학 운동을 구상했다. 1549년, 뒤 벨레가 "프랑스어 옹호 및 해설"을 발표하면서 플레야드(또는 브리게이드)가 정식으로 출범했다. 플레야드는 롱사르, 뒤 벨레, 바이에프, 벨로, 퐁튀 드 티아르, 에티엔 조델, 도라 등 7명의 작가로 구성되었다.[3]

2. 3. 작품 활동과 명성 (1550년 ~ 1572년)

1550년, 롱사르는 《송시》 첫 4권을 출판하며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1552년, 《카산드르의 사랑》과 《송시》 5권을 출판하며 문학적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클레망 마로의 추종자들은 플레야드의 문학 비평과 고전주의 지향을 비판했다.[1] 롱사르는 송시, 사랑시, 익살시집, 사계시, 논설시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발표하며 프랑스 문단에서 확고한 위치를 차지했다.[1] 1555년 《찬가》, 1556년 《사랑》의 결론, 1560년 《전집》, 1565년 《비가, 가면극과 양치기 노래》와 《프랑스 시의 기법 요약》 등을 출간했다.[1]

샤를 9세는 롱사르를 각별히 총애하며 궁정에 방을 내주고, 수도원장직과 수도원 부원장직을 하사했다.[1] 위그노들은 롱사르를 방탕한 사람이자 무신론자로 묘사하며 비판하고, 뒤 바르타스를 그의 라이벌로 내세웠다.[1]

이 기간 동안 롱사르는 서사시 《프랑시아드》(1572)를 쓰기 시작했지만, 결코 완성되지 못했고 시의 운율 때문에 일반적으로 실패작으로 간주된다. 10음절의 '평행 운'은 서사시의 장르와 잘 어울리지 않았다.[1] 이 운율(10음절)은 뒤 바르타스와 아그리파 도비네가 곧 선보일 훌륭한 프랑스 알렉산드린과 비교하여 불리하게 대비될 수밖에 없었다.[1]

2. 4. 프랑시아드와 말년 (1572년 ~ 1585년)

La Franciade|프랑시아드프랑스어1572년 성 바르톨로뮤 축일의 학살 직전에 롱사르가 발표한 서사시이다. 10음절의 평행 운을 사용하고 구성이 미약하여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1] 샤를 9세의 요청에 따라 쓴 작품이지만, 롱사르의 다른 작품들과 같은 수준은 아니었다. 샤를 9세가 알렉상드랭(1행 12음절) 대신 1행 10음절의 시를 선택한 것은 아쉬운 점으로 꼽힌다.[1]

샤를 9세가 죽은 후에도 롱사르는 궁정에서 좋은 대우를 받았지만, 건강이 나빠져 궁정을 떠나 만년을 보냈다.[1] 그는 방돔의 집, 크루아-발 수도원, 파리 등에서 지냈다.[1] 콜레주 드 봉쿠르의 학자 장 갈랑의 초청으로 파리에 머물기도 했고, 포부르 생 마르셀에 자택을 가지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1]

롱사르는 많은 친구들을 먼저 떠나보내고 자신의 병도 악화되어 슬픈 만년을 보냈다.[1]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리자베스 1세를 포함한 외국 군주들은 그에게 선물을 보내기도 했다.[1]

병세에도 불구하고 롱사르는 뛰어난 창작 활동을 계속했으며, 만년의 작품 중 일부는 그의 최고 걸작으로 평가받는다.[1] 프랑수아 랑 드 누는 롱사르에 대항하는 시편을 집필하기도 했다.[1]

1585년 12월 27일, 롱사르는 투르 (앤드르에루아르주)의 생 코스메 수도원에서 사망하여 그곳 교회에 묻혔다.[1]

3. 작품 세계

롱사르는 송시(Ode), 사랑시, 익살시집, 사계시, 논설시(les discours), 라 프랑시아드(La Franciade) 등 다양한 주제로 작품을 썼다. 송시는 핀다로스풍 송시(Odes pindariques), 호라티우스풍 송시(Odes horatiennes), 사랑의 송시, 철학 송시 등으로 나뉜다. 대표적인 사랑시로는 소네트 <카상드르의 사랑>, <마리의 사랑>, <엘렌을 위한 소네트집> 등이 있다.[1]

롱사르는 방대한 양의 작품을 남겼고, 여러 형태를 시도했다. 프랑스에 소네트를 도입하지는 않았지만, 도입된 후 능숙하게 활용했다. 그의 소네트 중 "''Quand vous serez bien vieille''"는 프랑스 문학의 걸작으로 꼽힌다. 고대 시인들의 형식을 모방하다가 자신만의 독창적인 운율 체계를 개발했다.

그의 작품은 특히 애정시와 시골 묘사에서 뛰어나며, "''오드 아 카상드르''", "''퐁텐 벨리에''", "''포레 드 가스티느''" 등이 유명하다. 우아하고 신선한 표현과 화려한 형용사를 사용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3. 1. 주요 작품

송시(Ode)는 핀다로스풍 송시(Odes pindariques)와 호라티우스풍 송시(Odes horatiennes), 사랑의 송시, 철학 송시로 나뉜다.[1] 핀다로스풍 송시는 기원전 5세기 그리스 시인 핀다로스를 모방한 것으로, 핀다로스의 송시가 올림픽을 비롯한 고대 그리스 경기의 승자를 찬양하는 것이었으나 롱사르의 송시는 군주를 찬양한다.[1] 호라티우스풍 송시는 로마 시인 호라티우스의 친밀한 서정시를 본뜬 것이다.[1]

사랑시로는 소네트 <카상드르의 사랑>, <마리의 사랑>, <엘렌을 위한 소네트집> 등이 있다.[1] 그 외에는 익살시집(le livret de folastries), 사계절을 그려낸 시로 자연과 신비주의를 엮은 사계시, 정치참여적 시집인 논설시(les discours)가 있다.[1]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 번안작인 라 프랑시아드(la Franciade)가 있다.[1]

롱사르는 ''플레아드''의 명실상부한 지도자이자 가장 방대한 시인이었다. 그는 프랑스에 소네트를 도입하지 않았지만, 도입된 직후 숙련된 솜씨로 그것을 실천했다. 그의 많은 송시는 최고 수준의 작품이며, 유명한 "''Quand vous serez bien vieille''"은 프랑스 문학의 인정받는 보석 중 하나이다. 그는 고대인들의 연 시 배열을 모방하는 것으로 시작했지만, 곧 이를 버리고 정확한 정량적 미터법 대신 호라티우스 송가를 운율에 맞게 조정하는 지혜를 얻었다.

그의 주요 작품은 다음과 같다.

작품명연도
『송시(頌詩) Odes』1550-1552년
『연애시집(戀愛詩集) Les Amours』1552년
『왕가의 숲 Le bocage royal』1554년
『속 연애시집(續戀愛詩集) Continuation des Amours』1555-1556년
『찬가(讚歌) Les Hymnes』1555-1556년
바쿠스 찬가 Hymne de Bacus』 (드라와 공저)1555년
『시대의 비참에 관한 담론 Discours sur les misères du temps』1562년
『비가(悲歌), 가면무도회, 목가 Eligies, Mascarades et Bergerie』1565년
『프랑스 시법 발췌 Abrégé de l'art poétique français』1565년
『프랑시아드 La Franciade』1572년


3. 2. 문학적 특징

황금색 갈색 송아지 가죽으로 만든 책 표지
롱사르 작품집, 1571년


롱사르 작품의 특징과 변천은 문학 역사상 가장 주목할 만한 것들 중 하나이며, 지난 3세기 동안 프랑스 문학의 발전을 보여주는 일종의 삽화를 제공한다. 그는 오랫동안 지나치게 칭찬받거나 격렬하게 비난받는 운명을 겪었다. 처음에는 마로의 친구들과 추종자들의 적대감이, 그 다음에는 위그노 파벌의 더욱 격렬한 적대감이 닥쳤다. 그러나 그의 사후, 말레르브의 후원 아래 고전주의 반동이 시작되었다. 말레르브 이후, 코르네유와 동시대인들의 떠오르는 영광은 플레야드의 시험적이고 불균등한 작품을 가렸고, 17세기 후반 프랑스 비평의 독재자였던 보엘로 자신이 직접 공격했다.

그 후 롱사르는, 장 드 라 브뤼예르와 페넬롱과 같은 몇몇 안목 있는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조롱당하지 않으면 잊혀졌다. 그는 18세기 전체와 19세기의 첫 4분의 1 동안 이러한 상태로 남아 있었다. 낭만주의 부흥은 그를 보엘로의 희생자로 보고, 그의 훌륭한 표현, 풍부한 운율 능력, 고전적이고 중세적인 특성의 결합에 매료되어 그의 이름을 일종의 투쟁 구호로 채택했으며, 잠시 동안 그의 장점을 다소 과장했다. 생트뵈브의 ''16세기 프랑스 문학의 모습''과 후대 작가들의 비평적 작업은 롱사르의 명성을 확립했다.

롱사르는 ''플레야드''의 명실상부한 지도자이자 가장 방대한 시인이었다. 그는 또한 그들 중 최고였을 가능성이 높지만, 벨로의 몇몇 고립된 작품은 가볍고 산뜻한 표현에서 그를 능가한다. 뒤 벨레의 여러 소네트는 르네상스의 우울함을 그의 어떤 것보다 더 완벽하게 보여준다. 그러나 그의 작품은 매우 방대하고 (대략 10만 줄에 가까운 그의 작품을 가지고 있다), 형태가 매우 다양하다. 그는 프랑스에 소네트를 도입하지 않았지만, 도입된 직후 숙련된 솜씨로 그것을 실천했다. 유명한 "''Quand vous serez bien vieille''"은 프랑스 문학의 인정받는 보석 중 하나이다.

장미 품종 '피에르 드 롱사르', 롱사르의 시 ''오드 아 카상드르'' (''미뇽, 장미를 보러 가자...'')를 참조하여 명명


그의 많은 송시는 흥미롭고, 최고 수준의 작품이다. 그는 고대인들의 연 시 배열을 모방하는 것으로 시작했지만, 곧 이를 버리고 정확한 정량적 미터법 대신 호라티우스 송가를 운율에 맞게 조정했다. 이 후자의 종류에서 그는 17세기에 사라진 절묘하게 멜로디컬한 리듬을 고안했다. ''프란시아드''의 서문은 시 자체보다 우수한 (알렉상드랭으로 되어 있다) 훌륭한 시이다. 일반적으로 롱사르는 그의 애정시 (카상드르, 피클, 마리, 제네브르, 엘렌—엘렌 드 서게르, 후기이자 주로 "문학적" 사랑 등—에 대한 긴 연작 소네트와 송시), 그리고 그의 시골 묘사 (유명한 "''오드 아 카상드르''[http://fr.wikisource.org/wiki/%C2%AB_Mignonne,_allons_voir_si_la_rose_%C2%BB], "''퐁텐 벨리에''," "''포레 드 가스티느''," 등)에서 최고이며, 이는 우아하고 신선하다. 그는 그의 학파가 유행시킨 우아한 축소형을 사용했다. 그는 또한 플레아드의 또 다른 취향이었던 화려한 형용사 ("''마르브린''," "''시나브린''," "''이보린''" 등)를 다루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다. 롱사르는 16세기 프랑스 시가 이후 두 시대의 시에 비해 탁월한 두 가지 매력—언어와 이미지의 웅장함, 우아한 운율의 다양함—을 보여준다.

참조

[1] 서적 Ronsard: Prince des poètes ou poète des princes (1550-1556) Droz 1976
[2] 서적 Lyrics of Ronsard Oliver and Boyd 1967
[3] 문서 Pierre de Ronsard의 수용 과정에 대한 설명
[4] 웹사이트 Pierre de Ronsard https://www.larousse[...] Éditions Larousse - Encyclopédie Larousse en ligne 2020-0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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