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에르 코르네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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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피에르 코르네유는 17세기 프랑스의 대표적인 극작가로, 프랑스 고전주의 연극의 기초를 다졌다. 그는 루앙에서 태어나 예수회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스페인 연극의 영향을 받아 희극 《멜리트》로 파리 무대에 데뷔했다. 이후 《르 시드》의 성공으로 프랑스 고전극의 기반을 다졌으며, 《오라스》, 《신나》, 《폴리외크트》, 《로도군》 등 의지 비극으로 명성을 얻었다. 코르네유는 프랑스 아카데미 회원으로 선출되었으나, 말년에는 라신에게 비극 작가로서의 입지를 잃었다. 그의 작품은 볼테르의 비평을 받았으며, 19세기 이후 나폴레옹의 지지를 받으며 재평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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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르 코르네유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본명 | 피에르 코르네유 |
출생일 | 1606년 6월 6일 |
출생지 | 프랑스 루앙 |
사망일 | 1684년 10월 1일 (78세) |
사망지 | 파리 |
안장지 | 생로크 교회, 파리 |
국적 | 프랑스 |
활동 시대 | 고전주의 |
직업 | |
직업 | 극작가 |
장르 | 비극 희극 |
영향 | |
영향을 준 인물 | 장 라신 몰리에르 |
가족 | |
배우자 | 마리 드 람페리에르 |
친척 | 토마 코르네유 |
주요 작품 | |
대표작 | 르 시드 |
소속 | |
소속 | 아카데미 프랑세즈 |
2. 일대기
루앙의 성직자 집안에서 태어나 신앙심이 깊은 분위기 속에서 자랐으며 예수회가 경영하는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라틴 문학, 특히 비극 시인 세네카에 심취했으며, 후에 에스파냐 연극을 연구하여 그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1] 수학(修學) 후에는 고향 루앙에서 성직자가 되는 한편 사교계에도 출입, 연애 사건이 계기가 되어 쓴 희극 <멜리트>를 1629년에 파리에서 상연하여 예상 외의 성공을 거두었기에 파리로 진출했다.
1647년 프랑스 아카데미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페르타리트>(1652)는 실패작이었고, 파리에서 낙향하여 루앙에 은둔하기도 했다. 이후 재무상 푸케의 간청과 동생 토마 코르네유의 성공에 자극받아 극단에 복귀, <외디프>(1659), <세르토리우스>(1662), <아틸라>(1667), <쉬레나>(1674) 등을 발표했다. 이 작품들은 운문과 장면에서 정적인 아름다움은 있었으나, 심리와 문체 면에서 장 라신에게 밀려 큰 인기를 얻지 못했다.
동생 토마 코르네유(1625-1709)도 극시인이 되어 에스파냐극 번안에 재능을 보였으나, 로마네스크극 <티모크라트>(1653)는 당대 성공을 거두었지만 문학적 가치는 낮았고, 형의 명성만 남았다.
코르네유는 1659년 이후 14년간 매년 1편씩 작품을 발표했지만, 초기만큼의 성공은 없었다. 1670년 장 라신과 같은 소재로 경쟁했으나, 코르네유의 《티토와 베레니스》는 라신의 《베레니스》에 패했다. 몰리에르와 협력하여 희극 《프시케》(1671년)를 발표하기도 했지만, 복귀 후 대부분 비극 작품이었다. 《황금 양털》(1660년), 《세르토리우스》(1662년), 《오톤》(1664년), 《아제질라스》(1666년), 《아틸라》(1667년) 등이 있다.
마지막 작품은 비극 《쉬레나》(1674년)이다. 이후 은퇴하여 파리에서 사망, 생 로크에 매장되었고, 1821년 기념비가 세워졌다.
2. 1. 초기
루앙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소관료 피에르 코르네유, 어머니는 마르트 르 파상이다.[1] 예수회에서 엄격한 교육을 받았고, 18세에 법학을 공부하기 시작하여 법조계에 진출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이후 아버지는 코르네유를 루앙의 관청에 들여보냈다.코르네유는 여가 시간을 이용하여 첫 희곡을 썼지만, 정확히 무엇인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1629년 희극 《멜리트》(''Mélite'')를 써서 순회 극단에 가져갔고, 극단의 레퍼토리에 포함되어 파리에서 성공을 거두었다. 이후 코르네유는 정기적으로 극을 쓰기 시작했고, 같은 해 파리로 이주하여 프랑스 연극계의 인기 극작가 중 한 명이 되었다. 《멜리트》 등 그의 초기 희극은 유행을 선도하는 파리 사람들의 말투와 매너를 반영하여 이전의 전통적인 프랑스 희극과는 전혀 달랐다.
코르네유는 자신의 희극을 "신사 계급의 대화의 한 장면"이라고 묘사했다. 1635년에는 최초의 비극 《메데》(''Médée'')를 썼다. 19세 연하의 동생이자 극작가인 토마 코르네유(Thomas Corneille)는 1693년 초연된 샤르팡티에 작곡의 동명 오페라 대본을 쓰기도 했다.

2. 2. 5인의 시인회
1634년, 리슐리외가 루앙을 방문했을 때 코르네유는 그를 위한 시를 썼는데, 이 시가 리슐리외의 마음에 들어 그를 '5인의 시인회' (Les Cinq Auteurs|레 생크 오퇴르프랑스어)의 일원으로 발탁했다. 이 회의 다른 구성원으로는 기욤 코르테, 프랑수아 르 메텔 드 보아로베르, 장 로트로, 클로드 드 레스투아르가 있었다.5인의 시인회는 미덕을 강조하는 새로운 종류의 극을 만들고자 했던 리슐리외의 구상을 실현하기 위해 선택되었다. 리슐리외가 아이디어를 제시하면, 이들이 그것을 극의 형태로 표현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리슐리외의 요구는 코르네유에게 지나치게 제약이 많았고, 코르네유는 리슐리외가 정해놓은 한계를 벗어나 혁신을 시도했다. 이로 인해 코르네유와 리슐리외 사이에 갈등이 발생했고, 첫 계약 기간이 끝난 후 코르네유는 5인의 시인회를 떠나 루앙으로 돌아갔다.
2. 3. 《르 시드》 논쟁
1633년 리슐리외 등 4명의 극시인과 함께 '''코메디 데 튀를'''을 형성했으나, 소심한 반면 자유를 갈구하는 성격 때문에 탈퇴하여 루앙으로 돌아갔다. 그 후 새 시대의 요구에 부응하여 1636년에는 르 시드를 발표, 대성공을 거두는 한편, 대논쟁을 일으키기도 했다. 르 시드는 이 작가의 성공작인 동시에 프랑스 고전극의 기초를 확립시킨 작품이기도 하다.[1]청년기사 동 로드리그는 아버지가 받은 치욕을 씻기 위해 애인 시메인의 부친 동 고메스 백작을 결투로 쓰러뜨린다. 시메인은 자식된 의무로서 국왕에게 로드리그의 목숨을 살려달라고 호소한다. 이 의무감에 의해 정념을 초극하려는 경향으로서 코르네유의 비극은 '''의지 비극'''이라고도 불리며 이는 희비극의 외면적인 갈등 대립을 심리적으로 내면화시켰다는 점에서 획기적이었다. 표현에도 대구(對句)의 명문이 많고 지금도 많이 애송되고 있다.[1]

1637년 초판의 희곡은 비극희극이라는 부제를 달아 고전적인 비극/희극 구분을 의도적으로 무시했음을 인정했다. 《르 시드》는 엄청난 대중적 성공을 거두었지만, "''Querelle du Cid''" 또는 "르 시드의 논쟁"으로 알려진 극적 관행의 규범에 대한 열띤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추기경 리슐리외의 프랑스 아카데미|Académie française프랑스어는 이 희곡의 성공을 인정했지만, 부분적으로 고전적인 삼일치인 시간, 장소, 행동을 존중하지 않았기 때문에 결함이 있다고 판단했다(시간의 통일성은 희곡의 모든 행동이 24시간 이내에 일어나야 함을 규정했고, 장소의 통일성은 행동에 대한 설정이 하나만 있어야 하며, 행동의 통일성은 줄거리가 단일 갈등 또는 문제에 집중되어야 함을 의미했다). 새로 결성된 ''아카데미''는 문화 활동에 대한 국가 통제를 주장하는 기관이었다. 일반적으로 프랑스어를 표준화하려는 노력을 다루었지만, 리슐리외 자신은 《르 시드》에 대한 분석을 명령했다.[2]
도덕성에 대한 비난은 유명한 팜플렛 캠페인의 형태로 이 희곡에 가해졌다. 이러한 공격은 극장이 도덕적 교육의 장이라는 고전 이론에 근거했다. 이 희곡에 관한 아카데미의 권고는 장 샤플랭의 《프랑스 아카데미가 르 시드의 비극 희극에 대해 느끼는 점》(1638)에 명시되어 있다. 심지어 저명한 작가 조르주 드 스퀴데리도 자신의 《르 시드에 대한 관찰》(1637)에서 이 희곡을 가혹하게 비판했다. 이 "팜플렛 전쟁"의 격렬함은 코르네유의 자랑스러운 시인 《아리스트에 대한 변명》에 의해 더욱 고조되었는데, 그는 자신의 재능에 대해 횡설수설하며 자랑했고 다른 작가는 라이벌이 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 시와 팜플렛들은 한때 "존경받던" 극작가들이 비방하는 공격을 주고받으면서 차례로 공개되었다. 한때 코르네유는 작가 장 마레의 가족과 가문에 대해 여러 차례 비난을 가했다. 당시 마레의 절친한 친구였던 스퀴데리는 코르네유의 "불쾌함" 수준으로 떨어지지 않고 대신 《르 시드》와 그 위반 사항을 계속해서 비판했다. 스퀴데리는 심지어 《르 시드》에 대해 "이 희곡이 담고 있는 아름다움의 거의 모든 부분이 표절되었다."라고 말했다.[2]
이 "팜플렛 전쟁"은 결국 리슐리외가 프랑스 아카데미에 희곡을 분석하도록 요청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최종 결론에서 아카데미는 코르네유가 시간의 통일성을 지키려고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르 시드》가 너무 많은 통일성을 깨뜨려 가치 있는 작품이 아니라고 판결했다.[2]
이 논란은 아카데미의 판결과 함께 코르네유에게 너무 큰 부담이 되었고, 그는 루앙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그의 희곡 중 하나가 좋지 않게 평가되었을 때, 코르네유는 공적 생활에서 물러나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한동안 공개적으로 침묵을 지켰지만, 사적으로는 "문제에 시달리고 사로잡혀 이 희곡을 여러 차례 수정했다."라고 전해진다.[2]
2. 4. 4대 비극과 이후
1640년, 코르네유는 연극 무대로 복귀했다. 『르 시드』 논쟁으로 인해 코르네유는 고전극의 규칙에 더 주의를 기울이게 되었다. 이는 그의 다음 작품들에서 분명히 드러났다. 고전 비극인 『호라티우스』(1640, 리슐리외 추기경에게 헌정), 『키나』(1643), 그리고 『폴리외크트』(1643)가 그것이다. 이 세 작품과 『르 시드』는 함께 코르네유의 "고전 사부작"으로 알려져 있다. 코르네유는 또한 아카데미의 비판에 대응하여 고전 비극의 관례에 더 가깝게 만들기 위해 『르 시드』를 여러 차례 수정했다. 1648년, 1660년, 그리고 1682년 판은 더 이상 "희비극"이라는 부제를 사용하지 않고 "비극"이라는 부제를 사용했다.코르네유의 인기는 높아졌고 1640년대 중반에 그의 희곡 첫 번째 전집이 출판되었다. 코르네유는 1641년 마리 드 랑페리에르와 결혼하여 일곱 명의 자녀를 두었다. 1640년대 중후반에 코르네유는 주로 비극을 제작했는데, ''폼페이의 죽음''(1644년 공연), ''로도군''(1645년 공연), ''테오도르''(1646년 공연), 그리고 ''에라클리우스''(1647년 공연)가 그것이다. 그는 또한 이 시기에 코미디 한 편을 썼는데, 바로 ''거짓말쟁이''(1644)이다.
1652년, 희곡 ''페르타리트''는 비평가들의 좋지 않은 평가를 받았고, 실망한 코르네유는 연극계를 떠나기로 결심했다. 그는 토마스 아 켐피스가 쓴 ''그리스도를 본받아''의 영향력 있는 운문 번역에 집중하기 시작했고, 이는 1656년에 완성되었다. 약 8년의 공백기를 가진 후, 코르네유는 1659년 무대로 돌아오도록 설득되었다. 그는 희곡 ''오이디푸스''를 썼는데, 이는 루이 14세의 호평을 받았다. 이듬해 코르네유는 ''드라마 시에 관한 세 개의 담론''을 출판했는데, 이는 부분적으로 그의 스타일에 대한 변론이었다. 이 글들은 코르네유가 ''르 시드의 논쟁''에 대한 응답으로 볼 수 있다. 그는 고전극의 규칙의 중요성을 동시에 유지하면서, ''르 시드''에서 그 규칙을 위반한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했다. 코르네유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극작 지침이 문자 그대로 엄격하게 해석될 의도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대신, 그는 그것들이 해석에 열려 있다고 제안했다. 고전 규칙의 관련성은 유지되었지만, 코르네유는 혁신을 억압할 정도로 그 규칙이 횡포적이어서는 안 된다고 제안했다.
3. 작품 목록
- ''멜리트''(Mélite) (1629)
- ''클리트랑드르''(Clitandre) (1630–31)
- ''
- ''팔레 갤러리''(La Galerie du Palais) (1631–32)
- ''라 쉬방트''(La Suivante) (1634)
- ''왕궁''(La Place royale) (1633–34)
- ''튈르리 희극''(La Comédie des Tuileries) (5명의 작가, 코르네유의 3막, 1635)
- ''메데''(Médée) (1635)
- ''환상 희극''(L'Illusion comique) (1636)
- ''르 시드''(Le Cid) (1637)
- ''
- ''폴리외크트''(Polyeucte) (1642)
- ''폼페이의 죽음''(La Mort de Pompée) (1643)
- ''
- ''거짓말쟁이''(Le Menteur) (1643)
- ''로도군''(Rodogune) (1644)
- ''거짓말쟁이의 속편''(La Suite du Menteur) (1645)
- ''
- ''에라클리우스''(Héraclius) (1647)
- ''아라곤의 돈 산체''(Don Sanche d'Aragon) (1650)
- ''안드로메다''(Andromède) (1650)
- ''니코메드''(Nicomède) (1651)
- ''페르타리트''(Pertharite) (1651)
- ''예수의 모방''(L'Imitation de Jésus-Christ) (1656)
- ''
- ''극시(드라마)에 관한 세 개의 담론''(Trois Discours sur le poème dramatique) (1660)
- La Toison d'or|lt=La Toison d'or프랑스어 (1660)
- ''
- Sophonisbe|lt=Sophonisbe프랑스어 (1663)
- ''
- ''아제실라스''(Agésilas) (1666)
- ''
- ''티투스와 베레니케''(Tite et Bérénice) (1670)
- ''프시케]''(Psyché) (
4. 영향 및 유산
볼테르는 프랑스 학사원의 지원을 받아 12권으로 구성된 코르네유의 희곡집인 ''코르네유에 대한 논평''을 제작했는데,[3][4] 이는 볼테르의 문학 비평 작품 중 가장 규모가 큰 것이었다.[5] 볼테르는 학사원에 보낸 제안서에서 코르네유가 프랑스어에 한 일은 호메로스가 그리스어에 한 일과 같다고 묘사했는데, 이는 프랑스어가 위대한 예술의 매개체가 될 수 있음을 세상에 보여준 것이었다.[3] 볼테르는 윌리엄 셰익스피어와 같은 점점 더 인기를 얻는 외국적 영향에 맞서 고전 프랑스 문학을 옹호하고자 했다. 1764년에 출판된 ''논평'' 초판에는 코르네유의 더 나은 작품에 초점을 맞추고 비교적 절제된 비판을 담고 있었다. 10년 후 출판된 2판에서는 볼테르가 코르네유에 대해 더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객관적인 비평의 필요성에 대한 강한 견해를 갖게 되었다. 그는 500개의 비판적 주석을 추가하여 더 많은 작품을 다루고 더 부정적인 어조를 취했다.[6]
코르네유에 대한 비평가들의 의견은 이미 매우 양극화되어 있었다. 볼테르의 개입은 논쟁을 더욱 양극화시켰고, 일부 비평가들은 그의 비판을 고루한 것이고 질투심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았다.[5][7] 19세기에 들어서면서 여론은 볼테르에게 불리하게 돌아섰다. 나폴레옹은 볼테르보다 코르네유를 선호한다고 밝혔고, 이는 극작가로서 코르네유의 명성을 되살리는 동시에 볼테르의 명성을 깎아내렸다.[7]
1989년 비디오 강좌 시리즈 "서구 전통"의 31화에서 UCLA의 교수인 유진 웨버는 코르네유의 작품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하지만 코르네유의 희곡은 설교, 도덕주의, 감상주의에 흔들리지 않는 귀족층을 대상으로 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 훈련과 자기 부정의 위대함을 보여줌으로써 그들에게 영향을 미쳤고, 자신이 '원하는' 것이 아니라 '해야 하는' 것을 하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코르네유는 기독교인처럼 자신의 의무를 다하는 것이 당신을 '선하게' 만든다고 말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의무를 다하는 것이 당신을 '위대하게' 만든다고 말했음을 주목하십시오. 코르네유가 열정과 의무 사이의 갈등을 제시했을 때, 그것은 새로운 발명이 아니었습니다. 코르네유에서 새롭게 나타난 점은 정당한 열정이 동등하게 정당한 또 다른 열정과 대립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는 것입니다. 옳고 그름의 대결에서 두 권리의 대결로 논쟁을 격상시키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싸움에 휘말린 신사는 자신이 틀렸다는 것을 인정할 수 없었지만, 그의 동기가 숭고하다고 전제하면 적어도 당신의 주장을 고려할 것이고, 이것이 코르네유가 논쟁을 더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림으로써 달성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모험 이야기를 좋아했던 17세기 사람들은 그 안에서 전에 잘 알지 못했던 무언가를 얻고 있다는 막연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옳았습니다. 그들은 전에 그것을 알지 못했는데, 그 이유는 그것이 그리스인들과 함께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로마의 사상은 너무 법적이었고, 기독교의 사상은 너무 단순해서 두 가지 권리가 있을 수 있고, 갈등에 두 가지 측면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이것은 매우 세련된 견해이며, 매우 세련된 정신에만 적합합니다. 그리고 코르네유를 읽고 그의 희곡을 본 17세기 사회의 극소수의 사람들은 그다지 세련되지 않았지만, 적어도 시도하기 시작했습니다.영어
5. 한국에서의 수용
Pierre Corneille프랑스어의 작품은 한국에서 다음과 같이 번역, 출판되었다:
출판 연도 | 제목 | 번역자 | 출판사 | 비고 |
---|---|---|---|---|
1975년 | 『코르네유 명작선』 | 이와세 타카시, 이토 히로시, 이지치 히토시, 타케다 히로시, 미나요시 쿄헤이 | 백수사 | 「무대는 꿈」, 「르 시드」, 「오라스」, 「신나」, 「폴리유크트」, 「거짓말쟁이 남자」, 「로도귄느」, 「니코메드」, 「르 시드 논쟁」 수록 |
1996년 | 『코르네유 희극 전집』 | 모치다 히로시 | 카와이 출판 신사 | 「메리트 혹은 가짜 편지」, 「미망인 혹은 배신당한 배신남」, 「재판소 복도 혹은 연적의 여자 친구」, 「시녀」, 「왕궁 광장 혹은 엄청난 연인」, 「연극의 환영」, 「거짓말쟁이 남자」, 「속・거짓말쟁이 남자」 수록 |
1928년 | 『폴리우크트』 | 키무라 타로 | 이와나미 문고 | |
1958년 | 『거짓말쟁이 남자』 | 이와세 타카시 | 이와나미 문고 | 1989년 복간 |
2001년 | 『거짓말쟁이 남자・무대는 꿈』 | 이와세 타카시・이무라 준이치 | 이와나미 문고 | |
2008년 | 『르 시드』 | 스즈키 아키라 | 대학 서림 | 대역 텍스트 |
2020년 | 『르 시드』 | 타카하시 마사히사 | 쿄료쿠샤 |
참조
[1]
서적
Corneille and His Times
https://books.google[...]
Harper & Bros., NY
1852
[2]
웹사이트
Lycée Pierre Corneille de Rouen – History
http://lgcorneille-l[...]
[3]
간행물
Introduction
Voltaire Foundation, Oxford
[4]
서적
In the King's Wake: Post-Absolutist Culture in France
https://books.googl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99
[5]
논문
The Role of the Foreign Theatre in Voltaire's "Corneille"
1976
[6]
간행물
The commentary
Voltaire Foundation, Oxford
[7]
간행물
Preface
Voltaire Foundation, Oxfo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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