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라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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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장 라신은 17세기 프랑스의 극작가로, 프랑스 문학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파리 근교에서 태어나 포르 루아이얄 수도원에서 교육받으며 고전 문학에 심취했다. 라신은 비극에서 인간의 파멸을 주로 다루었으며, 특히 알렉상드랭 시를 능숙하게 사용하여 간결하고 정제된 문체를 구사했다. 주요 작품으로는 《안드로마크》, 《페드르》 등이 있으며, 프랑스 아카데미 회원이기도 했다. 그의 작품은 얀센주의적 운명론과 인간의 내면 심리를 섬세하게 묘사하여, 당대와 후대에 걸쳐 많은 논쟁과 찬사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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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라신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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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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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장바티스트 라신 |
출생일 | 1639년 12월 21일 |
출생지 | 프랑스 왕국, 피카르디, 라페르테밀롱 |
사망일 | 1699년 4월 21일 |
사망지 | 프랑스, 파리 |
직업 | 극작가 |
활동 기간 | 17세기 |
장르 | 비극 (주로), 희극 |
사조 | 고전주의, 얀센주의 |
주요 작품 | 앙드로마크 페드르 아탈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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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 | |
모교 | 리세 생루이 |
가족 | |
자녀 | 장바티스트 라신 루이 라신 |
언어별 이름 | |
프랑스어 | Jean Baptiste Racine |
발음 (영어) | IPA: /ræˈsiːn/ 발음 표기: rass-EEN IPA (미국): /rəˈsiːn/ 발음 표기: rə-SEEN |
발음 (프랑스어) | IPA: /ʒɑ̃ batist ʁasin/ |
추가 정보 | |
라틴어 표기 | Iohannes Racinus |
2. 생애
장 라신은 1639년 12월 21일 프랑스 북부 피카르디 지방의 에나 주 라 페르트 밀롱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부모를 여의고, 장세니슴의 영향을 받은 포르 루아이얄 수도원 부속 학교에서 엄격한 가톨릭 교육을 받았다. 이곳에서 고전 문학에 대한 소양과 얀센주의 세계관을 익혔으며, 이는 훗날 그의 작품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명문 학교인 아르쿠르 대학(Collège d'Harcourt)에 진학하면서 파리 생활을 시작했고, 문학에 점차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18세 때 루이 14세의 결혼을 축하하는 찬가를 써서 상을 받으면서 시 작품에 전념하게 되었다.[32] 1667년 비극 〈앙드로마크〉로 특별한 후대를 받아 레피네의 소수도원장 직함을 받았다.
1677년 비극 〈페드르〉 상연을 둘러싸고 게고네 극단과 갈등을 빚은 것을 계기로 극작 활동에서 물러나 국왕의 역사 편찬관으로서의 직무에 전념하게 되었다.[33] 1692년부터 4년간은 국왕과 함께 전장을 돌아다녔으며, 베르사유 궁전과 퐁텐블로에 개인 방을 제공받고, 귀족들을 제치고 국왕을 알현할 수 있을 정도로 총애를 받았다.
이후 망트농 부인이 운영하는 여학교 교재용으로 구약성서에서 소재를 얻은 〈에스테르〉(1689년)와 〈아탈리〉(1691년)만을 상연하였다. 1699년, 라신은 파리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유언에 따라 포르 루아이얄에 안장되었다.
2. 1. 어린 시절과 교육
라신은 프랑스 파리 동북쪽의 소도시인 샹파뉴 주 라 페르테 밀롱에서 세무 관리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신앙심이 깊은 가정이었으나 1641년에 어머니를, 1643년에는 아버지를 잇따라 여의었다. 그 뒤 조부모 밑에서 자랐으나 1649년에 할아버지를 여의고, 할머니 마리 데므랑은 딸 아니에스가 수녀로 있는 포르 루아이얄 수도원으로 이주했다. 이곳은 장세니슴의 본산으로, 많은 지식인이 은자(隱者)로서 모여들어 그들이 가르치는 부속 학교는 권위가 있었다. 라신은 이곳에서 얀센파로서 유명한 니콜, 그리스 학자 랑슬로 등에게서 교육을 받았으며, 나중에는 보베의 학원 기숙생이 되어 일반 교양 과정을 수료했다. 1655~1658년에 포르 루아이얄에서 그 당시 보기 드물던 그리스어 교육을 받고 <에티오피아의 이야기>, <테아게네스와 칼리클레아>를 탐독했다고 하나, 확실한 것은 소포클레스와 에우리피데스의 비극을 연구했었다는 점이다.1658년에 파리 대학의 아르쿠르 학사(學舍)에 들어가 논리학 및 철학을 배우는 한편, 1659년경부터 먼 친척인 니콜라 비타르의 소개로 슈브르즈 공(公)의 저택에 출입하면서 라 퐁텐 등과 알게 되어 문학에 뜻을 두었다.
2. 2. 문학적 성장과 초기 작품
라신은 프랑스 파리 동북쪽의 소도시인 샹파뉴 주 라 페르테 밀롱에서 세무관리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신앙심이 깊은 가정이었으나 1641년에 어머니를, 1643년에는 아버지를 잇따라 여의었다.[31] 그 뒤 조부모 밑에서 자랐으나 1649년에 할아버지가 돌아가시자, 할머니 마리 데므랑은 딸 아니에스가 수녀로 있는 포르 루아이얄 수도원으로 이주했다. 이 수도원은 장세니슴의 본산으로, 많은 지식인들이 은자(隱者)로서 모여들어 그들이 가르치는 부속학교는 권위가 있었다. 라신은 이곳에서 얀센파로 유명한 니콜, 그리스 학자 랑슬로 등에게서 교육을 받았으며, 나중에는 보베의 학원 기숙생이 되어 일반 교양과정을 수료했다. 1655~1658년에는 포르 루아이얄에서 그 당시 보기 드물던 그리스어 교육을 받고 <에티오피아의 이야기>, <테아게네스와 칼리클레아>를 탐독했다고 하나, 확실한 것은 소포클레스와 에 ವಿರು피데스의 비극을 연구했다는 점이다.1658년에 파리 대학의 아르쿠르 학사(學舍)에 들어가 논리학 및 철학을 배우는 한편, 1659년경부터 먼 친척인 니콜라 비타르의 소개로 슈브르즈 공(公)의 저택에 출입하면서 라 퐁텐 등과 알게 되어 문학에 뜻을 두었다.[31]
1660년, 루이 14세의 혼례식에 즈음하여 <센강의 요정>을 헌정, 문단의 원로 샤플랭의 인정을 받아 하사금을 탔으며, 각본도 썼으나 이는 상연을 거절당했다.[32] 1661년에 외삼촌이자 주교 대리인 앙투안 스코난을 찾아 남프랑스의 위제스로 가서 성직자가 되려고 했으나 실패하고, 다시 파리로 돌아왔다. 그러나 시작(詩作)으로 국왕의 연금을 받을 수 있는 시인의 서열에 들었다.
브왈로를 알게 되고 몰리에르 극단에 의해 1664년에 첫 작품 <라 테바이드>를 상연했으며, 이어 <알렉산드르 대왕>(1665년)으로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전자는 코르네유에게서, 후자는 당시의 유행 작가 퀴노(Quinault)의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이 작품을 비극 연출이 서툰 몰리에드 극단에서 부르고뉴 극단으로 옮김과 동시에 자기의 애인이기도 했던 유명 여배우 라 뒤파르크까지 전속시켰기 때문에 몰리에르와의 사이가 악화되었다. 또한 1666년 연극이 비도덕적이라고 한 포르 루아이얄의 은사에게 반발, 그 친분도 결렬되었다.[32]
2. 3. 성공과 명성
몰리에르 극단이 1664년에 상연한 첫 작품 <라 테바이드>와 이듬해의 <알렉산드르 대왕>으로 성공을 거두었으나, 전자는 코르네유에게서, 후자는 당시 유행 작가 퀴노(Quinault)의 영향을 받았다는 평가를 받았다.[15] <알렉산드르 대왕>은 비극 연출이 서툰 몰리에르 극단에서 부르고뉴 극단으로 옮겨 상연되었고, 라신은 애인이었던 유명 여배우 라 뒤파르크를 전속시켜 몰리에르와의 사이가 악화되었다.[15] 1666년에는 연극이 비도덕적이라고 비판한 포르 루아이얄의 은사에게 반발하여 친분이 결렬되었다.[15]1667년, <앙드로마크>가 부르고뉴 극단에 의해 왕의 어전에서 상연되었다.[15] 이 작품은 트로이아의 용사 헥토르의 미망인 안드로마케를 사랑하는 피뤼스, 피뤼스를 사랑하는 에르미온, 에르미온을 사모하는 그리스 왕자 오레스테스의 관계를 중심으로 숙명적인 정념에서 비롯된 파멸을 묘사했다.[15] 아름다운 12음각시에 박진적인 심리분석을 꾀하여 코르네유의 의지비극에 대비되는 정념비극의 새 경지를 개척했다는 평가를 받았다.[15] 몰리에르가 이 작품을 풍자한 소극을 상연하자, 1668년에는 유일한 희극 <소송광(訴訟狂)>으로 맞섰다.[15]
1669년에는 로마 황제 네론과 모후(母后)의 권력투쟁을 다룬 <브리타니퀴우스>를 발표했다.[15] 1670년에는 로마를 무대로 하는 비련의 비극 <베레니스>를 같은 주제로 코르네유와 경쟁하여 승리했다.[15] 그는 이 작품의 서문에서 단순한 제재에 의한 박진성과 그 감동만이 비극의 본질이라고 주장했다.[15] 이 무렵부터 여배우 라 샹메레와 애정관계를 맺었다.[15]
오스만 제국의 후궁(後宮)을 무대로 하는 흉폭한 질투의 비극 <바자제>(1672년)로 비극계의 왕자 자리를 획득했다.[15] 1673년에는 프랑스 아카데미 회원이 되었다.[15] 로마에 저항한 노왕의 죽음과 왕비, 배다른 왕자와의 사랑 갈등을 그린 <미토리다트>, 1674년에는 에우리피데스에서 취재한 <이피제니>로 각각 성공을 거두어 경제적, 사회적 지위를 확립했다.[15]
2. 4. 《페드르》와 은퇴
에우리피데스에게서 소재를 취하여 테세우스의 왕비 페드르와 전처 소생 이포리트 사이의 사련(邪戀)을 다룬 비극 《페드르》를 1677년에 발표하여 정념 비극을 완성하였다. 그러나 라신의 적이었던 프라동이 같은 주제로 작품을 경작(競作)하게 하여 공연을 방해하였다.[16] 이 극에서 기독교 윤리를 강조한 포르 루아이얄과의 화해와 함께, 그해에 평범한 처녀와 결혼하였다. 그는 국왕의 수사관(修史官)으로 임명된 후 극작을 그만두고 가정과 공무에 전념하는 한편 <포르 루아이얄 사요(史要)>를 썼다. 이 기간은 '라신의 침묵'이라고 불리며 여러 가지로 해석되고 있다.[16]2. 5. 만년과 종교극
1677년 라신은 에우리피데스의 작품을 바탕으로 테세우스의 아내 페드르와 전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이폴리토스 간의 비극적인 사랑을 다룬 <페드르>를 통해 정념 비극을 완성하였다. 그러나 라신의 적대 세력은 프란돈을 시켜 같은 주제로 작품을 쓰게 하여 공연을 방해했다. 이 작품에서 기독교 윤리를 강조한 포르 루아이얄과의 화해와 더불어, 같은 해에 평범한 여성과 결혼한 라신은 국왕의 수사관으로 임명된 후 극작 활동을 중단하고 가정과 공무에 전념하며 <포르 루아이얄 사요(史要)>를 집필했다. 이 시기는 '라신의 침묵'이라 불리며 오늘날까지 다양한 해석이 이루어지고 있다.이후 라신은 사실상 왕비인 망트농 부인이 운영하는 여학교 교재용으로 구약성서에서 소재를 얻은 <에스테르>(1689년)와 <아탈리>(1691년)만을 상연하였다. 1699년, 라신은 파리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유언에 따라 포르 루아이얄에 안장되었다.
3. 작품 세계
라신의 시적 재능은 프랑스 문학에 남긴 가장 큰 공헌으로 평가받는다. 그는 알렉산드랭 시형을 능숙하게 구사했으며,[11] 균형 잡힌 인물 묘사와 극적인 줄거리 구성을 6음보 양격의 정교하고 화려한 운문으로 표현했다.
라신의 작품은 당대 비평가들로부터 역사적 사실성이 부족하다거나(''브리타니쿠스'', ''미트리다테'') 사건이 부족하다는(''베레니스'')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라신은 경쟁 극작가들이 역사적 사실성에서 더 큰 잘못을 저지르고 있으며, 가장 큰 비극이 반드시 유혈 사태와 죽음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반박했다.
라신은 자신의 작품을 인쇄할 때 서문을 붙이는 습관이 있었는데, 이는 그의 작품이 비극뿐만 아니라 연극론으로서의 가치도 지니게 했다. 오스만 제국의 황위 계승 쟁탈을 소재로 한 『바자제(Bajazet)』 서문에서는 "비극의 소재는 관객으로부터 적절한 거리를 가져야 한다. 이 거리는 신화나 오래된 역사와 같은 시간적 거리일 뿐만 아니라, 시간적으로는 그리 멀지 않지만 우리의 풍속에 익숙하지 않은 거리적 거리여도 좋다"고 언급했다.
3. 1. 주제와 소재
라신은 사용하는 어휘를 2500단어로 제한했으며,[12] 일상적인 표현은 모두 사용하지 않았다. 그는 그리스인들은 삽을 삽이라고 부를 수 있었지만, 라틴어나 프랑스어에서는 그럴 수 없다고 믿었다. 3일치의 법칙은 엄격하게 준수되었으며, 오랜 위기의 마지막 단계만 묘사되었다. 등장인물은 모두 왕족으로, 그 수는 최소한으로 유지되었다. 무대 위에서의 행동은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에우리피데스의 《히폴리토스》와 달리, 불구가 된 히폴리토스는 무대에 등장하지 않는다. 단 하나의 예외는 《바자제트》에서 아탈리드가 관객 앞에서 자결하는 장면인데, 이는 잔혹함과 동양적인 색채로 유명한 희곡에서는 허용될 수 있었다.비극은 인간이 번영에서 재앙으로 몰락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영웅이 추락하는 지위가 높을수록 비극은 더욱 커진다. 나르시스(''브리타니쿠스'')[13]와 오노네(''페드르'')[14]를 제외하면, 라신은 왕, 왕비, 왕자, 공주 등 일상생활의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말하고 행동할 수 있는 인물들의 운명을 묘사했다.
라신이 풍부하게 차용한 그리스 비극은 인간이 고통과 열망에 무관심한 신들의 지배를 받는다고 가정하는 경향이 있었다.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에서 주인공은 가족이 신탁의 예언을 피하기 위해 아무리 애썼더라도, 결국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했으며 이러한 무의식적인 범죄에 대한 벌을 치러야 한다는 끔찍한 사실을 점차 깨닫게 된다.[15] 무고한 남녀를 죄로 이끌고 마찬가지로 무고한 자녀에게 응보를 요구하는 잔혹한 운명에 대한 인식은 오이디푸스의 전설을 다루는 ''테바이데(La Thébaïde)''에도 스며들어 있다.
라신은 종종 얀세니즘적 운명론의 영향을 받았다고 여겨지지만, 라신의 비극과 얀세니즘의 연관성은 여러 근거를 들어 논쟁되어 왔다. 예를 들어, 라신 자신은 얀세니즘과의 어떤 연관성도 부인했다.[16] 기독교인으로서 라신은 아이스킬로스와 소포클레스처럼 신이 인간을 예측할 수 없는 파멸로 이끄는 데 무자비하다고 가정할 수 없었다. 대신 운명은 (적어도 세속적인 희곡에서는) 충족되지 않는 사랑의 통제 불가능한 광기가 된다.
에우리피데스의 작품에서처럼, 신들은 더 상징적으로 되었다. 비너스는 에우리피데스의 『히폴리투스』에서 인간 내부의 꺼지지 않는 성적 욕망의 힘을 나타낸다. 그러나 이것은 그녀의 어머니 파시파에가 황소와 교미하여 미노타우르스를 낳게 한 괴물 같은 퇴행적 성향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라신에게 있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13장에서 비극의 특징으로 언급된 ''하마르티아''는 단순히 선의로 행한 행위가 나중에 매우 심각한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 아니며, 단순한 판단의 오류도 아니다. 그것은 성격의 결함이다.
라신의 극적 인물들은 재앙으로 이끄는 흠결을 알고 있지만, 그것을 극복할 수 없다는 점에서 그리스 비극의 패턴과는 다르다. 그리스 비극의 인식, 즉 아나그노리시스(anagnorisis)는 『오이디푸스 왕』에서처럼 숙명이 오이디푸스에게 닥치는 극의 끝에 국한되지 않는다. 페드라(Phèdre)는 처음부터 자신의 욕망의 괴물스러움을 깨닫고, 극 전체를 통해 자신의 치명적이고 유전적인 약점을 분석하고 반추할 수 있는 정신적 명료함을 유지한다. 에르미온느(Hermione)의 상황은 그리스 비극에 좀 더 가깝다. 피루스(Pyrrhus)에 대한 그녀의 사랑은 매우 자연스럽고, 그 자체로 인격의 결함이 아니다. 그러나 격렬하게 변하는 심리 상태를 분석하는 데 있어서의 명료함에도 불구하고, 왕이 진정으로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며, 이러한 약점은 비극적인 결과가 발생하는 하마르티아(hamartia)가 된다.
라신에게 사랑은 생리적 장애와 매우 흡사하다. 그것은 고요함과 위기의 번갈리는 기분, 그리고 회복이나 성취에 대한 기만적인 희망을 가진 치명적인 질병과 같다. 최종적인 차도는 빠른 죽음으로 끝난다. 그의 주요 인물들은 괴물이며, 극의 구조와 운율의 규칙성과 극명하게 대조된다. 고통받는 연인 에르미온느, 록산느(Roxane), 페드라는 자신의 고통과 그것을 완화할 수 있는 수단만을 알 뿐이다. 그녀의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존경과 그의 행복과 복지에 대한 관심에 기초하지 않고 본질적으로 이기적이다. 질투의 고통 속에서 그녀는 그를 죽임으로써(혹은 페드라의 경우 그를 죽게 둠으로써) "멸시받는 사랑의 고통"을 완화하려고 시도하며, 그를 자신의 고통과 연관시킨다. 비극의 깊이는 에르미온느가 피루스의 안드로마케(Andromaque)에 대한 사랑이 죽음 너머까지 계속된다는 것을 깨달을 때, 또는 페드라가 젊은 연인들의 순수함과 자신의 부자연스러움을 대조할 때 도달한다. 이 부자연스러움은 세상의 빛으로부터 감춰져야 한다. 라신이 문학에 기여한 가장 독특한 점은 사랑의 양면성에 대한 개념이다. "내가 사랑하는지, 아니면 미워하는지 알 수 없을까?"
이러한 연인들의 열정은 인간으로서의 그들의 존엄성을 완전히 파괴하고, 보통 그들을 죽이거나 이성을 빼앗는다. 티투스(Titus)와 베레니스(Bérénice)를 제외하고, 그들은 의무감에 대한 모든 감각을 잃는다. 피루스는 그리스와의 동맹을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는 적국 노예와 결혼하기 위해 약혼녀를 버린다. 오레스테스(Orestes)의 대사로서의 의무는 연인으로서의 그의 열망에 종속되며, 마침내 그가 파견된 왕을 살해한다. 네론(Néron)의 주니(Junie)에 대한 열정은 그가 브리타니쿠스(Britannicus)를 독살하게 하고, 따라서 2년간의 덕행 있는 통치 후에 폭정을 시작하게 만든다.
라신 특유의 틀은 영원한 삼각관계이다. 두 젊은 연인, 왕자와 공주가 세 번째 사람, 보통 젊은 왕자에 대한 사랑이 일방적인 여왕에 의해 그들의 사랑이 좌절된다. 페드라는 힙폴리토스(Hippolyte)와 아리시(Aricie)의 결혼 가능성을 파괴한다. 바자제트(Bajazet)와 아탈리드(Atalide)는 록산느의 질투 때문에 결혼하지 못한다. 네론은 브리타니쿠스를 주니로부터 갈라놓는다. 『베레니스』(Bérénice)에서 연인들은 국가적 고려 사항으로 인해 헤어진다. 『안드로마케』(Andromaque)에서 희비극에서 빌려온 짝사랑의 체계는 극적 구성을 바꾸고, 에르미온느는 자신의 약혼자였지만 자신에게 무관심했고, 이제는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여자와 결혼하는 남자를 파괴한다. 젊은 왕자와 공주들은 유쾌하고, 다양한 정도의 순수함과 낙관주의를 보여주며, 악의적인 음모와 라신 특유의 사랑/증오의 희생자이다.
라신 비극의 주요 등장인물왕(피르(Pyrrhus), 네론(Néron), 티투스(Titus), 미트리다테스(Mithridate), 아가멤논(Agamemnon), 테세우스(Thésée))은 다른 등장인물들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다. 피르는 안드로마케(Andromaque)에게 자신과 결혼하거나 아들을 죽게 내버려 두는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강요한다. 피르는 약혼녀를 에피로스에서 일 년 동안 기다리게 한 후, 결혼할 의향이 있다고 선언했지만 거의 즉시 마음을 바꾼다. 미트리다테스는 자신의 죽음에 대한 거짓 소문을 퍼뜨려 파르나케(Pharnace)의 모니메(Monime)에 대한 사랑을 알게 된다. 약혼녀를 포기하는 척함으로써, 그는 그녀가 이전에 그의 다른 아들인 짚하레스(Xipharès)를 사랑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짚하레스가 파르나케와 로마군과 싸우다 죽었다는 잘못된 정보를 얻은 그는 모니메에게 독약을 마시라고 명령한다. 죽어가면서 그는 두 연인을 하나로 묶는다. 테세우스는 다소 모호한 인물로, 주로 줄거리 전개 방식에 미치는 영향이 중요하다. 페드르(Phèdre)는 그의 죽음에 대한 거짓 소식을 듣고 힙폴리토스(Hippolyte)에게 자신의 사랑을 고백한다. 그의 예상치 못한 귀환은 그녀를 혼란에 빠뜨리고 외노네(Œnone)의 주장에 실체를 부여한다. 너무나 인간적인 눈먼 상태에서 그는 자신의 아들이 무죄임에도 불구하고 그를 죽음으로 몰아넣는다. 아무라트(Amurat)만이 무대에 실제로 등장하지 않지만, 그의 존재는 끊임없이 느껴진다. 바자제트(Bajazet)를 사형 선고하는 편지(IV 3)를 통한 그의 개입은 파국을 재촉한다.
여왕은 다른 누구보다도 작품마다 변화가 크며, 항상 가장 세심하게 묘사된 인물이다. 헤르미온느(Hermione)(애처롭고 감정적으로 안정적인 안드로마케보다는 그녀가 일반적으로 여왕이 맡는 역할과 동등한 역할을 맡기 때문에)는 젊고 첫사랑의 신선함을 지녔다. 그녀는 오레스테스(Oreste)를 복수의 도구로 이용하는 데 무자비하며, 짧은 승리의 순간에 아스티아낙스(Astyanax)의 목숨을 구걸하는 것을 거부할 정도로 잔인하다. 늙고 외로운 여인인 아그리피나(Agrippine), "여러분 주인의 딸이자, 아내이자, 자매이자, 어머니"인 그녀는 자신의 아들을 왕위에 올리기 위해 어떤 일도 서슴지 않았고, 왕위 계승에서 제외했던 왕자의 편을 들면서 네론에게 자신의 영향력을 재확인하려고 헛수고를 한다. 라신의 여왕들 중 가장 사나운 용감한 록사네(Roxane)는 바자제트의 죽음을 명령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고, 그가 자신을 변명하기도 전에 자신의 곁에서 그를 추방한다. 클리템네스트라(Clytemnestre)는 부드럽고 친절하지만 딸 이피게니아(Iphigénie)를 희생의 위협으로부터 구하는 데는 전혀 효과적이지 못하다. 수동적이고 우유부단한 페드르는 외노네에게 이끌려 간다. 자신의 사랑의 불순함을 깊이 인식하면서, 그녀는 그것을 퇴행적인 특성이자 신들의 벌로 여기며, 질투에 휩싸여 사랑하는 사람을 저주로부터 구할 수 없다.
측근들의 주요 기능은 독백을 불필요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들이 행동을 더 진전시키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그들은 항상 그들의 주인과 여주인의 성격을 반영한다. 따라서 나르시스(Narcisse)와 부르우스(Burrhus)는 젊은 네론 내부의 선과 악의 싸우는 요소들을 상징한다. 그러나 나르시스는 단순한 반영 이상이다. 그는 배신하여 결국 그의 주인 브리타니쿠스(Britannicus)를 독살한다. 반면 부르우스는 중세 도덕극의 전형적인 "착한 천사"이다. 그는 그의 반대편 인물보다 훨씬 덜 화려한 인물이다. 페드르의 악마 같은 천재인 외노네는 그녀의 여주인에게 근친상간의 열정을 힙폴리토스에게 말하도록 설득하고, 테세우스의 예상치 못한 귀환에 젊은 왕자를 고발한다. 세피세(Céphise)는 피르가 여주인에게 얼마나 깊이 애착을 가지고 있는지 알고, 절망에 빠진 안드로마케에게 아들을 위해 그에게 마지막으로 호소하도록 촉구하여 극의 전개를 바꾼다.
라신은 그리스 비극 작가들보다 세 일치의 법칙을 더욱 엄격하게 준수했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과 서사시의 차이점을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 "비극은 일반적으로 그 행동을 24시간 또는 그보다 조금 넘는 기간으로 제한하려고 하는 반면, 서사시는 시간적으로 제한이 없다." [17]
아티카 비극의 거장들 이후 수세기가 지나 그들의 작품을 일반화의 근거로 사용하면서, 그는 비극의 행위가 태양의 단일 회전으로 제한되어야 하거나 한 장소에서 일어나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그는 단지 이러한 제한이 비극 작가들에 의해 자주 실천되었지만, 그러한 제한이 없는 많은 연극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아이스킬로스의 ''아가멤논''은 트로이에서 아르고스까지의 여정(수일이 걸렸어야 할)을 약 15분으로 압축한다.
장소의 통일성 또한 아티카 비극의 일반적인 특징은 아니었다. 아이스킬로스의 ''에우메니데스''는 두 개의 배경을 가지고 있으며, 에우리피데스의 ''여인들의 간청''에서는 행동이 어디에서 일어나고 있는지 전혀 알 수 없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막이 없고 독특한 무대 장치가 없으며 합창단이 거의 항상 연극 내내 무대에 남아 있던 그리스 극장의 상황은 행동을 하루와 한 장소로 제한하는 것이 자주 바람직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극적 행위에 관해 제시하는 유일한 규칙[18]은 다른 모든 예술 형태와 마찬가지로 비극은 내적 통일성을 가져야 하며, 그 모든 부분이 전체와 유기적으로 관련되어 있어 어떤 부분도 변경하거나 생략하면 연극의 경제성을 해칠 수 없다는 것이다. 어떤 극평가도 이러한 ''행위의 통일성''에 이의를 제기한 적이 없다. 그러나 시간과 장소의 통일성은 사실 르네상스의 이론가들(장 드 라 타이유)과 다른 작가들(장 보클랭 드 라 프레네와 장 메레)에 의해 ''시학''에서 읽혀졌다. 리슐리외 추기경으로부터 받은 지지는 결국 그들의 완전한 승리를 보장했고, 초기 작품에서 이를 따르지 않았던 피에르 코르넬은 ''씨드''(1636) 이후로 그렇게 했다. 그러나 그조차도 그것들을 지루한 강요라고 생각했다. 24시간 만에 씨드가 시메네의 아버지를 결투에서 죽이고 밤에 무어 침입자들을 제압하고 적이 도망친 지 몇 시간 만에 두 번째 결투를 벌였다는 것을 우리가 믿을 수 있게 만드는 것은 매우 쉬운 믿음의 정지 상태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이러한 불일치 – 그리고 코넬이 그 연극의 ''에크자맹''에서 인정하는 다른 것들 – 는 가장 부주의한 관객에게도 명백하다.
"한 달 만에 일어날 수 있는 수많은 사건들"을 그의 희곡에 쑤셔 넣는 경쟁자와 달리, 라신은 급격히 고조되는 긴장 속에서 돌연 위기에 처하게 되고 후퇴할 수 없는 정신 상태의 변화를 묘사한다. 소위 아리스토텔레스의 규칙은 수개월 또는 수년간의 감정적 긴장 후 새로운 사건이 발생하여 재난을 촉진하는 몇 시간 동안 비극적 행동에 집중하게 하기 때문에 이러한 유형의 드라마에 완벽하게 적합하다.
라신이 그의 비극을 이 매우 엄격한 틀에 맞추는 데 성공한 가장 두드러진 증거는 그것을 보는 동안 관객은 통일성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가 ''페드르''를 쓰기 얼마 전에 같은 주제가 가브리엘 질베르와 마티외 비다르에 의해 다루어졌는데, 두 사람 모두 4막 이후로 히폴리토스를 무대에서 멀리했다. 반면에 라신은 그를 5막 1장에 등장시키는데, 그 마지막 대사는 5막 6장의 테라메네의 이야기보다 70~80줄 앞선다. 이 대사들을 말하는 4분 동안 젊은 왕자는 테라메네와 함께 나가 괴물을 만나 싸우고 죽었고, 테라메네는 그의 주인의 죽음을 알리러 돌아왔다. 게다가 아리시는 5막 3장이 끝날 때까지 무대를 떠나지 않으므로, 두 개의 짧은 장면에서 그녀는 해변에서 죽어가는 연인을 만나고 그와 작별했다! 이러한 연대기적 모순은 극장에서는 눈에 띄지 않는다.
라신은 항상 장소의 통일성을 준수한다. 부트로툼의 피루스 궁전의 한 방; 로마의 티투스와 베레니스의 아파트를 분리하는 대기실; 아울리스의 아가멤논의 진영; 예루살렘 사원의 대기실: 라신은 이러한 모호하고 먼 배경을 선택함으로써 그의 연극에 보편적인 성격을 부여하고, 상반되고 주저하는 정신 상태의 제시는 물질적 환경에 대한 과도한 주장에 의해 방해받지 않는다. 물론 때때로 장소의 통일성은 약간 억지스러운 만남으로 이어진다. 예를 들어, 피루스가 오레스테스를 만나러 오는 이유(1막 2장)는 이 규칙을 준수하기 위한 것 외에는 다른 이유가 없다. 마지막으로, 장소의 통일성은 이야기를 필요로 하며, 이것은 다시 라신의 기본적인 목표와 완전히 조화를 이룬다. ''안드로마크''가 피루스와 그의 신부가 다가와 사원에 들어가는 것을 볼 수 있게 되면 어떻게 될까? 중요한 사실은 클레오네의 말이 헤르미온에게 미치는 영향이다. 오레스테스가 헤르미온에게 피루스의 살해를 이야기하는 것은 이 연극의 최고의 아이러니다. 테라메네의 이야기는 가장 기억에 남고 시적인 언어로 사건을 묘사하는데, 이 사건은 무대에서 불완전하게 표현되는 것을 보게 된다면 훨씬 덜 감동적일 것이다.
행위의 통일성에 관해서 라신은 작은 줄거리를 제외하고(리어왕에서 맹인이고 부자연스러운 아버지와 그것이 불러일으키는 응보에 대한 평행 주제를 비교해 보라) 희극적인 요소를 배제함으로써 윌리엄 셰익스피어와 극명하게 다르다. ''안드로마크''의 2막 5장이나 ''알렉산드르 르 그랑''과 ''미트리다트''의 많은 장면들이 희극적인 뉘앙스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다. 안드로마크는 피루스와 결혼하는 데 동의할까? 아가멤논은 이피게니아를 희생할까? 에스테르는 남편을 설득하여 유대인들을 구할 수 있을까? ''바자제'', ''페드르'' 및 ''아탈리''의 줄거리는 다른 것들보다 거의 더 복잡하지 않다.
그의 비극 작품 대부분은 세 일치의 법칙을 엄격하게 지키며, 주로 그리스 신화와 고대 로마의 역사적 사실을 소재로 한다. 구약 성서를 소재로 한 작품은 라신은 비극이 아닌 역사극으로 분류했다.
라신은 균형 잡힌 인물 묘사와 극적인 줄거리 구성을 알렉산드랭(alexandrin) 시행이라 불리는 6음보 양격의 정교하고 화려한 운문으로 썼다. 후기의 성서를 소재로 한 작품을 제외하면, 라신의 극은 두 명의 젊은 연인을 중심으로 하는 경우가 많다. 두 사람은 서로 사랑하지만, 여성이 왕과 같은 고위층 남성에게 선택받거나, 두 사람이 서로 적대적인 가문에 속해 있어 연애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러한 갈등이 라신 비극의 중심이 된다. 여기에 제삼자의 질투, 정치 투쟁 등이 더해져 줄거리가 복잡해지고, 최종적으로 두 연인의 사랑은 이루어지지 않고, 주인공의 죽음으로 막이 내린다.
또한 라신은 자신의 작품을 인쇄하여 간행할 때 반드시 새로 쓴 서문을 붙이는 습관이 있었다. 이 때문에 라신의 작품은 단순히 비극으로서의 가치뿐만 아니라 연극론으로서의 가치도 지닌다. 라신의 시론 중에서는 오스만 제국의 황위 계승 쟁탈을 소재로 하는 『바자제(Bajazet)』에 붙인 서문에서 "비극의 소재는 관객으로부터 적절한 거리를 가져야 한다. 이 거리는 신화나 오래된 역사와 같은 시간적 거리일 뿐만 아니라, 시간적으로는 그리 멀지 않지만 우리의 풍속에 익숙하지 않은 거리적 거리여도 좋다"는 등이 알려져 있다.
3. 2. 형식과 문체
라신의 시적 재능은 프랑스 문학에 남긴 가장 큰 공헌으로 여겨진다. 그는 알렉산드랭 시형을 능숙하게 사용한 것으로 유명하다.[11]라신은 어휘를 2500단어로 제한하고,[12] 일상적인 표현을 모두 배제했다. 그는 그리스인들은 삽을 삽이라고 부를 수 있었지만, 라틴어나 프랑스어에서는 그럴 수 없다고 믿었다. 3일치의 법칙은 엄격하게 준수되었으며, 오랜 위기의 마지막 단계만 묘사되었다. 무대 위의 행동은 거의 제거되었고, 왕족인 등장인물의 수는 최소한으로 유지되었다. 에우리피데스의 《히폴리토스》와 달리, 불구가 된 히폴리토스는 무대에 등장하지 않는다. 단 하나의 예외는 《바자제트》에서 아탈리드가 관객 앞에서 자결하는 장면인데, 이는 잔혹함과 동양적인 색채로 유명한 희곡에서는 허용될 수 있다.
라신은 세 일치의 법칙을 그리스 비극 작가들보다 더 엄격하게 준수했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과 서사시의 차이를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 "비극은 일반적으로 그 행동을 24시간 또는 그보다 조금 넘는 기간으로 제한하려고 하는 반면, 서사시는 시간적으로 제한이 없다." [17]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의 행위가 태양의 단일 회전으로 제한되거나 한 장소에서 일어나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았다. 그는 단지 이러한 제한이 비극 작가들에 의해 자주 실천되었지만, 그러한 제한이 없는 많은 연극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고 말했다.
장소의 통일성 또한 아티카 비극의 일반적인 특징은 아니었다. 그러나 막이 없고 독특한 무대 장치가 없으며 합창단이 거의 항상 연극 내내 무대에 남아 있던 그리스 극장의 상황은 행동을 하루와 한 장소로 제한하는 것이 자주 바람직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극적 행위에 관해 제시하는 유일한 규칙은[18] 다른 모든 예술 형태와 마찬가지로 비극은 내적 통일성을 가져야 하며, 그 모든 부분이 전체와 유기적으로 관련되어 있어 어떤 부분도 변경하거나 생략하면 연극의 경제성을 해칠 수 없다는 것이다.
시간과 장소의 통일성은 르네상스의 이론가들과 작가들에 의해 ''시학''에서 읽혀졌다. 리슐리외 추기경의 지지는 그들의 완전한 승리를 보장했고, 피에르 코르넬은 ''씨드''(1636) 이후로 그것들을 따랐지만, 지루한 강요라고 생각했다.
라신은 급격히 고조되는 긴장 속에서 돌연 위기에 처하게 되고 후퇴할 수 없는 정신 상태의 변화를 묘사한다. 소위 아리스토텔레스의 규칙은 수개월 또는 수년간의 감정적 긴장 후 새로운 사건이 발생하여 재난을 촉진하는 몇 시간 동안 비극적 행동에 집중하게 하기 때문에 이러한 유형의 드라마에 완벽하게 적합하다.
라신이 그의 비극을 이 매우 엄격한 틀에 맞추는 데 성공한 가장 두드러진 증거는 그것을 보는 동안 관객은 통일성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한다는 것이다.
라신은 항상 장소의 통일성을 준수한다. 부트로툼의 피루스 궁전의 한 방, 로마의 티투스와 베레니스의 아파트를 분리하는 대기실 등 모호하고 먼 배경을 선택함으로써 그의 연극에 보편적인 성격을 부여하고, 상반되고 주저하는 정신 상태의 제시는 물질적 환경에 대한 과도한 주장에 의해 방해받지 않는다.
행위의 통일성에 관해서 라신은 작은 줄거리를 제외하고, 희극적인 요소를 배제함으로써 윌리엄 셰익스피어와 극명하게 다르다.
라신의 비극은 매우 조용하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긴장감 넘치는 분위기 속에서 시작된다. 새로운 요소가 등장하면서 이미 긴장된 상황은 위기에 처하거나 위기에 처하게 된다. 어두워지는 분위기 속에서 주인공들의 변화무쌍한 심리 상태가 연이어 나타나면서, 일반적으로 4막에서 참을 수 없는 불협화음의 해결에 이르게 된다. 보통 4막이 끝날 무렵 결정되는 상황의 전개를 통해 비극은 빠른 결말로 치닫는다.
그의 비극 작품 대부분은 세 일치의 법칙을 엄격하게 지키며, 주로 그리스 신화와 고대 로마의 역사적 사실을 소재로 한다. 구약 성서를 소재로 한 작품은 라신은 비극이 아닌 역사극으로 분류했다.
라신은 균형 잡힌 인물 묘사와 극적인 줄거리 구성을 알렉산드랭(alexandrin) 시행이라 불리는 6음보 양격의 정교하고 화려한 운문으로 썼다. 후기의 성서를 소재로 한 작품을 제외하면, 라신의 극은 두 명의 젊은 연인을 중심으로 하는 경우가 많다. 두 사람은 서로 사랑하지만, 여성이 왕과 같은 고위층 남성에게 선택받거나, 두 사람이 서로 적대적인 가문에 속해 있어 연애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러한 갈등이 라신 비극의 중심이 된다. 여기에 제삼자의 질투, 정치 투쟁 등이 더해져 줄거리가 복잡해지고, 최종적으로 두 연인의 사랑은 이루어지지 않고, 주인공의 죽음으로 막이 내린다.
또한 라신은 자신의 작품을 인쇄하여 간행할 때 반드시 새로 쓴 서문을 붙이는 습관이 있었다. 이 때문에 라신의 작품은 단순히 비극으로서의 가치뿐만 아니라 연극론으로서의 가치도 지닌다. 라신의 시론 중에서는 오스만 제국의 황위 계승 쟁탈을 소재로 하는 『바자제(Bajazet)』에 붙인 서문에서 "비극의 소재는 관객으로부터 적절한 거리를 가져야 한다. 이 거리는 신화나 오래된 역사와 같은 시간적 거리일 뿐만 아니라, 시간적으로는 그리 멀지 않지만 우리의 풍속에 익숙하지 않은 거리적 거리여도 좋다"는 등이 알려져 있다.
3. 3. 얀센주의와 라신
라신은 포르 루아얄 소학교에서 얀세니즘 신봉자들과 교류하며 평생 큰 영향을 받았다.[16] 포르 루아얄은 프랑스 주교들과 교황에 의해 이단으로 정죄된 신학인 얀세니즘 추종자들이 운영했다.[16] 어린 시절 부모를 여읜 라신은 조부모의 보살핌을 받았는데, 1649년 조부가 사망하자 할머니가 포르 루아얄 수녀원으로 들어가면서 라신도 함께 그곳으로 가게 되었다.[16]라신은 종종 얀세니즘적 운명론의 깊은 영향을 받았다고 여겨지지만, 라신 자신은 얀세니즘과의 연관성을 부인했다.[16]
4. 주요 작품 목록
제목 | 원제 | 형식 | 초연 연도 |
---|---|---|---|
테바이데 | La Thébaïde | 5막 운문 비극 | 1664년 |
알렉상드르 르 그랑 | Alexandre le Grand | 5막 운문 비극 | 1665년 |
안드로막 | Andromaque | 5막 운문 비극 | 1667년 |
소송광 | Les Plaideurs | 3막 운문 희극 | 1668년 |
브리타니쿠스 | Britannicus | 5막 운문 비극 | 1669년 |
베레니스 | Bérénice | 5막 운문 비극 | 1670년 |
바자제 | Bajazet | 5막 운문 비극 | 1672년 |
미트리다테 | Mithridate | 5막 운문 비극 | 1673년 |
이피게니 | Iphigénie | 5막 운문 비극 | 1674년 |
페드르 | Phèdre | 5막 운문 비극 | 1677년 |
에스테르 | Esther | 3막 운문 비극 | 1689년 |
아탈리 | Athalie | 5막 운문 비극 | 1691년 |
5. 영향 및 평가
라신의 시적 재능은 그가 프랑스 문학에 남긴 가장 큰 공헌으로 평가받는다. 그는 알렉산드랭 시형을 능숙하게 다룬 것으로 유명하다.[11]
라신의 작품은 당대 비평가들로부터 역사적 사실성이 부족하다는 비판을 받았다. ''브리타니쿠스''(1669)와 ''미트리다테''(1673) 등이 그 예시이다. 그러나 라신은 경쟁 극작가들이 이 점에서 더 큰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고 반박했다. 또한 ''베레니스''(1670)는 사건이 부족하다는 비판을 받았으나, 라신은 가장 큰 비극이 반드시 유혈 사태와 죽음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라신은 얀세니즘의 영향을 받았다고 여겨지기도 하지만, 라신 자신은 이를 부인했다.[16] 그는 아이스킬로스나 소포클레스처럼 신이 인간을 파멸로 이끄는 데 무자비하다고 보지 않았다. 대신 운명은 충족되지 않는 사랑의 통제 불가능한 광기로 나타난다. 에우리피데스의 작품에서처럼 신들은 상징적으로 변모했다. 비너스는 인간 내부의 성적 욕망을 나타내며, 파시파에의 퇴행적 성향과도 연결된다.
라신에게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서 언급된 ''하마르티아''는 단순한 판단 오류가 아닌 성격의 결함이다.
라신의 작품은 다양한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필립 버틀러는 그의 저서 "라신: 연구"(1974)에서 라신에 대한 주요 비판들을 시대별로 분류했다. 라신은 동시대인 피에르 코르네유와 비교되었는데, 초기에는 코르네유의 복잡성을 버리고 단순함을 추구한 점이 엇갈린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1674년 부알로가 라신의 비극 모델이 더 우월하다고 평가하면서, 라신은 당대 최고의 문학적 거장 중 하나로 자리매김했다.
버틀러는 이 시기를 라신의 "신격화" 시점으로 묘사했다. 라신의 명성은 몰리에르, 장 드 라 퐁텐, 라 로슈푸코 등 문학 거장들의 부상, 베르사유 궁전 확장, 장바티스트 륄리의 음악 혁명, 루이 14세의 통치 등 프랑스의 문화적, 정치적 성취와 맞물려 있었다. 프랑스는 "프랑스 정신(l'esprit français)"이라는 국가 정체성을 확립하며, 라신과 그의 작품은 완벽한 비극 모델로 여겨졌다. 그러나 버틀러는 이러한 경향이 프랑스 극을 진부한 모방으로 만들었다고 비판했다.
이후 프리드리히 실러, 요한 볼프강 폰 괴테 등 독일에서는 라신을 "궁정극"으로 폄하했고, 프랑스 내에서도 비판이 있었지만, 샤를 보들레르, 귀스타브 플로베르 등 새로운 작가들의 등장으로 라신의 단순함이 재평가되었다. 해외 비평가들은 프랑스 혐오증 때문에 라신을 비판하기도 했지만, 프랑스인들은 라신을 이해할 수 없다고 여겼다.
20세기에는 라신과 그의 작품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졌다. 비평가들은 『페드라』와 같은 작품이 보편적인 인물들을 통해 현실주의 드라마로 해석될 수 있다고 보았다. 또한 작품에 내재된 폭력과 스캔들에 대한 새로운 조명도 이루어졌다. 장-이브 타디에에 따르면, 마르셀 프루스트는 라신을 좋아했으며, 자신과 닮은 형제처럼 여겼다.[21]
앙토냉 아르토는 『연극과 잔혹성』에서 라신의 심리적 연극 때문에 연극의 즉각적이고 폭력적인 행위에 익숙하지 않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현재 라신은 여전히 문학적 천재로 널리 인정받으며, 그의 작품은 널리 읽히고 공연된다. 그의 영향은 A. S. 바이어트의 4부작(『정원의 처녀』, 『정물화』, 『바벨탑』, 『휘파람 부는 여자』)에서도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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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웹사이트
Before Columbus Foundation, Winners of the 2011 American Book Awards
https://web.archive.[...]
Before Columbus Foundation
2011-10-07
[31]
서적
ポール=ロワイヤル略史
審美社
[32]
서적
ルイ十四世の世紀(三)
岩波文庫
[33]
서적
わが懐かしき街
図書出版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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