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에트로 비에르코보드는 이탈리아의 전 축구 선수이자 감독으로, 수비수로 활약했다. 그는 코모에서 선수 경력을 시작해 피오렌티나, 로마, 삼프도리아, 유벤투스, AC 밀란, 피아첸차 등에서 뛰었으며, 세리에 A에서 562경기에 출전하여 역대 7위에 해당하는 기록을 세웠다. 삼프도리아에서 4번의 코파 이탈리아 우승, 유러피언 컵위너스컵 우승, 세리에 A 우승을 경험했으며, 유벤투스에서는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이탈리아 국가대표팀으로 45경기에 출전하여 2골을 기록했으며, 1982년 FIFA 월드컵 우승, 1990년 FIFA 월드컵 3위를 달성했다. 은퇴 후에는 카타니아, 플로렌티아 비올라, 트리에스티나, 부다페스트 혼베드, 캄자 등에서 감독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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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에르코보드는 베르가모도 칼치나테에서 태어났다. 그는 소련의 전쟁 포로였던 아버지의 아들이다. 그의 아버지 이반 루캬노비치 베르호보드(Іван Лук’янович Верховод|이반 루캬노비치 베르호보드ukr)는 우크라이나인으로,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포로로 잡혀 북부 이탈리아의 나치 포로수용소에서 탈출했다. 이후 그는 이탈리아 레지스탕스(레시스텐자)에 합류하여 유격대원으로 활동했다. 전쟁이 끝난 후, 그는 소련으로 돌아가지 않고 롬바르디아에 정착했다.
3. 클럽 경력
비에르코보드는 초기에 맨마킹을 주로 하는 센터백이었으나, 이후 존 마킹 시스템에서도 뛰어난 기량을 보이며 오랜 기간 최상위 리그에서 활약했다.[2][3] 그는 코모에서 프로 경력을 시작했으며[41], 삼프도리아로 이적했다. 팀이 강등되자 세리에 A 무대에서 뛰기 위해 피오렌티나(1981-82)와 로마(1982-83)에서 임대 생활을 했다.[41] 특히 로마에서는 1983년 첫 세리에 A 우승(스쿠데토)을 경험하며 성공적인 시즌을 보냈다.[2][3][39]
1983년 삼프도리아로 복귀한 비에르코보드는 12시즌 동안 팀의 핵심 선수로 활약하며 전성기를 보냈다.[39] 이 기간 동안 그는 코파 이탈리아 4회 우승, 유러피언 컵위너스컵 1회 우승을 차지했으며, 1991년에는 삼프도리아 구단 역사상 첫 세리에 A 우승을 이끌었다.[2][3][39]
1995년 유벤투스로 이적한 그는 1996년, 37세의 나이로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경험하는 노련함을 보여주었다.[2][3]아약스와의 결승전에 출전하여 팀의 승리에 기여했다.[2][3][39] 이후 밀란을 거쳐 피아첸차에서 선수 생활 말년을 보냈으며, 40대 초반까지 주전으로 활약하다가 2000년, 41세의 나이로 현역에서 은퇴했다.[49][50][41] 그는 세리에 A에서 통산 562경기에 출전했다.[49][50][2][3]
3. 1. 초기 경력
비에르코보드는 우크라이나 출신 붉은 군대 군인이었던 아버지에게서 태어났다.[42] 그의 아버지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군 포로가 되어 이탈리아로 이송되었으나, 전쟁 후에도 이탈리아에 남아 생활했다.[39][41] 비에르코보드는 소년 시절 배관공으로 일하며 축구를 배웠고[39], 처음에는 빠른 발을 이용해 오른쪽 윙어로 뛰었으나 큰 성과를 내지 못하고 수비수로 포지션을 변경했다.[39] 16세 무렵 여러 팀의 입단 테스트를 받았는데, AC 밀란 테스트에서는 좋은 평가를 받았지만 해당 포지션에 선수가 많아 입단하지 못했다.[41]
당시 세리에 D의 ASD 로마네세에서 뛰던 중, 코모와의 연습 경기에서 관계자들의 눈에 띄어 1976년 코모로 이적했다.[41] 코모에서 뛰어난 신체 능력을 갖춘 센터백으로 활약하며 주목받기 시작했다.[43] 초기에는 맨마킹을 주로 하는 센터백이었지만, 이후 존 마킹 시스템에서도 뛰어난 기량을 선보였다.[2][3]
1980-81 시즌을 앞두고 삼프도리아로 이적하여, 1980년 9월 14일 AS 로마와의 경기에서 세리에 A 데뷔전을 치렀고, 같은 해 12월 28일 칼리아리를 상대로 세리에 A 첫 골을 기록했다.[41] 해당 시즌 30경기에 출전해 2골을 넣었으나[41], 팀은 세리에 B로 강등되었다. 세리에 A 무대에서 계속 뛰고 싶었던 그는 1981-82 시즌 피오렌티나로 임대되었고, 이곳에서의 활약을 바탕으로 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에 발탁되어 월드컵에 참가하는 기회를 얻었다.[41]
월드컵 이후 1982-83 시즌에는 로마로 다시 임대 이적했다.[39] 로마에서는 팔캉, 브루노 콘티 등과 함께 팀의 스쿠데토 획득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으며[39], 이탈리아 스포츠지 Guerin Sportivo가 선정한 시즌 최우수 선수상을 받기도 했다.[44] 비에르코보드 본인은 1983-84 시즌에도 로마에 남아 챔피언스컵 무대에서 뛰고 싶어 했지만, 원 소속팀인 삼프도리아로 복귀하게 되었다.[41]
3. 2. AS 로마
피오렌티나에서 임대 생활을 마친 후, 1982-83 시즌 AS 로마로 다시 임대 이적하여 뛰었다.[39] 비에르코보드는 로마에서 팔캉, 브루노 콘티 등과 함께 뛰며 선수 경력 첫 성공을 맛보았다. 그는 1982-83 시즌 팀의 세리에 A 우승(스쿠데토)에 기여했으며,[2][3][39] 이 활약으로 이탈리아 스포츠 잡지 '구에린 스포르티보'(Guerin Sportivo)가 선정한 시즌 최우수 선수로 뽑혔다.[44] 비에르코보드 본인은 1983-84 시즌에도 로마에 남아 UEFA 챔피언스 리그에 출전하여 우승하고 싶었지만, 임대 기간 만료 후 원 소속팀인 삼프도리아로 복귀해야 했다.[41]
비에르코보드가 삼프도리아에 오래 머문 이유 중 하나는 파올로 만토바니 회장과의 약속 때문이었다. 그는 단순히 중위권에 머무는 팀이 아니라 챔피언스컵에서 경쟁하길 원했고, 만토바니 회장은 이에 부응하여 팀 전력을 강화했다[39]. 1990년AC 밀란의 영입 제안을 받았을 때도 회장 및 동료들과 상의 후 잔류를 결정할 만큼 팀 내 관계도 좋았다고 한다[39].
삼프도리아 소속으로 통산 493경기에 출전하여 39골을 기록했다[41].
3. 4. 유벤투스 FC
1995년, 비에르코보드는 유벤투스로 이적하여[39]삼프도리아 시절의 동료였던 잔루카 비알리와 다시 한 팀에서 뛰게 되었다.[39] 그는 유벤투스에서 경험 많은 수비수로서의 면모를 보여주었는데, 특히 1996년에는 37세의 나이로 자신의 유일한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차지했다.[2][3] 그는 로마에서 열린 결승전에 선발 출전하여 아약스의 공격을 막아냈고, 유벤투스는 승부차기 끝에 승리하며 우승컵을 들어 올렸다.[2][3][39]
3. 5. AC 밀란과 피아첸차
유벤투스에서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경험한 후, 비에르코보드는 1996-97 시즌을 앞두고 페루자 칼초와 입단에 합의했으나, 조반니 갈레오네 감독과의 불화로 이적이 무산되었다.[41] 때마침 AC 밀란의 주장이자 핵심 수비수였던 프랑코 바레시가 부상으로 전력에서 이탈하면서, 비에르코보드는 AC 밀란에 입단하게 되었다.[41] 이는 그가 소년 시절 트라이 아웃을 봤으나 입단하지 못했던 팀으로, 21년 만의 입단이었다.[41] 초기 오스카르 타바레스 감독 체제에서는 거의 기용되지 못했지만, 시즌 중반 아리고 사키 감독이 부임한 후에는 주전으로 활약하며 리그 18경기에 출전했다.[41]
1997-98 시즌, 비에르코보드는 피아첸차로 이적하여 선수 생활 말년을 보냈다.[41] 그는 40대 초반의 나이에도 꾸준히 주전으로 활약했으며, 특히 처음 두 시즌 동안 높은 수준의 경기력을 보여주었다.[41] 1998-99 시즌에는 세리에 A 잔류를 위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시즌 마지막 10경기에서 3골을 기록하며 팀이 6승을 거두는 데 크게 기여했다.[4][5] 그의 두 번째 골은 1999년 4월 3일, 40번째 생일을 3일 앞두고 우디네세와의 경기에서 터졌고, 팀은 이 경기에서 4-3으로 승리했다.[4][5] 시즌 마지막 경기였던 1999년 5월 23일 살레르니타나전에서는 40세 47일의 나이로 득점하여 팀의 1-1 무승부를 이끌었다.[4][5] 이 골로 그는 실비오 피올라 이후 세리에 A에서 골을 넣은 두 번째 40세 이상 선수가 되었으며, 현재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 알레산드로 코스타쿠르타, 피올라, 파비오 콸리아렐라에 이어 역대 세리에 A 최고령 득점자 5위에 올라 있다.[6]
비에르코보드는 40세가 넘어서도 현역 생활을 이어갔으나, 피아첸차가 세리에 B로 강등되자 2000년, 41세의 나이로 현역에서 은퇴했다.[41]
3. 6. 세리에 A 기록
비에르코보드는 1980년9월 14일, 삼프도리아 소속으로 AS 로마와의 경기에서 세리에 A 무대에 데뷔했다.[41] 같은 해 12월 28일에는 칼리아리를 상대로 세리에 A 첫 골을 기록했다.[41] 그는 피오렌티나(1981-82 시즌)와 로마(1982-83 시즌)에서 임대 선수로 활약하며 경험을 쌓았다.[41] 특히 로마에서는 1982-83 시즌 스쿠데토 획득에 기여했으며,[2][3][39] 이탈리아 스포츠 잡지 Guerin Sportivo|구에린 스포르티보it가 선정한 시즌 최우수 선수상을 받기도 했다.[44]
1983년 삼프도리아로 복귀한 그는 12시즌 동안 팀의 핵심 수비수로 활약하며 전성기를 보냈다. 이 기간 동안 1990-91 시즌 스쿠데토를 포함하여[2][3][39] 4번의 코파 이탈리아 우승과 1번의 유러피언 컵위너스컵 우승을 경험했다.[2][3]
이후 유벤투스(1995-96 시즌), 밀란(1996-97 시즌), 피아첸차(1997-2000 시즌)를 거치며 선수 생활을 이어갔다.[41] 특히 피아첸차 소속이던 1998-99 시즌에는 시즌 막판 10경기에서 3골을 넣으며 팀의 세리에 A 잔류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4][5] 1999년 5월 23일, 살레르니타나와의 경기에서 득점했을 때 그의 나이는 40세 47일이었는데, 이는 당시 실비오 피올라에 이어 세리에 A 역사상 두 번째 최고령 득점 기록이었다.[4][5][41] 현재 이 기록은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 알레산드로 코스타쿠르타, 피올라, 파비오 콸리아렐라에 이어 역대 5위에 해당한다.[6]
비에르코보드는 1981년부터 1993년까지 이탈리아 국가대표팀 소속으로 총 45경기에 출전해 2골을 기록했다.[51][52][40] 그는 1981년 1월 6일, 몬테비데오에서 열린 네덜란드와의 1981년 "문디알리토" 대회 경기(1-1 무승부)에서 21세의 나이로 국가대표팀 데뷔전을 치렀다.[51][41]
엔초 베아르초트 감독이 이끌던 1982년 FIFA 월드컵 당시 이탈리아 선수단의 일원이었으며, 이탈리아는 이 대회에서 우승했지만 비에르코보드는 경기에 출전하지 못했다.[51][41][40] 이후 대표팀에 자리 잡아 1984년 로스앤젤레스 하계 올림픽에 이탈리아 대표로 참가하여 준결승에 진출, 최종 4위를 기록했다.[51]1986년 FIFA 월드컵에서는 이탈리아 대표팀의 일원으로 4경기에 모두 출전했다.[40]
아첼리오 비치니 감독 체제 하에서는 잠시 대표팀과 멀어졌으나, 이탈리아 안방에서 열린 1990년 FIFA 월드컵 직전에 복귀하여 3경기에 출전했고, 이탈리아의 3위 달성에 기여했다.[51][40] 그는 또한 이탈리아 국가대표팀 역사상 최고령 득점 기록을 가지고 있는데, 아리고 사키 감독 시절인 1993년 3월 24일, 몰타와의 1994년 FIFA 월드컵 예선 경기에서 득점하여 팀의 6-1 대승에 일조했다.[51]
그의 마지막 국가대표 경기는 1993년 5월 1일 스위스와의 1994년 FIFA 월드컵 예선 경기였다.[40] 비에르코보드는 월드컵과 올림픽에는 참가했지만, 유럽 축구 선수권 대회 본선에는 이탈리아 대표로 출전한 경험이 없다.[51]
5. 경기 방식
'차르'(lo Zar)라는 별명으로 알려진[53][9] 비에르코보드는 끈질기고 신체 조건이 좋으며 발이 빠른 왼발잡이 중앙 수비수였다.[49][50][54][2][3][10] 그는 이탈리아 축구 역사상 최고의 수비수 중 한 명으로 꼽히며,[55][56][11][12] 현역 시절에는 세계에서 가장 빠른 수비수 중 한 명이자,[57][58] 넘치는 힘, 밀착 마크, 거친 태클로 1980년대와 1990년대 세리에 A에서 가장 상대하기 힘든 수비수로 명성을 떨쳤다.[49][50][54][2][3][10]
주로 상대 공격수를 일대일로 막는 '스토퍼'(stopper) 역할을 맡았으나, 때로는 보다 수비적인 최후방 수비수 역할도 수행했다. 뛰어난 주력, 강인한 힘, 예측력, 위치 선정, 공을 따내는 순간 포착 능력, 그리고 경기를 읽는 능력을 바탕으로 상대 공격을 효과적으로 차단하고 공 소유권을 되찾아왔다.[49][50][54][59][60][61][2][3][10][15][16][17] 이러한 능력 덕분에 선수 생활 말년에 지역 방어 시스템이 주류가 되었을 때도 뛰어난 활약을 이어갈 수 있었다.[49][50][54][59][60][61][2][3][10][15][16][17]
젊은 시절에는 기술적으로 다소 투박하다는 평가도 있었지만, 경험을 쌓으면서 기술 및 전술적인 면에서도 크게 발전했다.[60][61][62][16][17][18]중앙 수비수로서는 큰 키가 아니었음에도 뛰어난 점프력을 이용한 제공권 장악 능력이 탁월했으며, 헤더로 득점하는 것을 즐겨 이탈리아 축구 역사상 가장 많은 골을 넣은 수비수 중 한 명으로 기록되었다.[61][63][17][19]
때로는 거칠게 보일 수 있는 경기 방식과 달리, 경기장 안팎에서는 신사적인 선수로 평가받았으며,[49][50][64][2][3][20] 오랜 기간 꾸준히 활약할 수 있었던 비결로는 철저한 자기 관리, 훈련에 대한 헌신적인 자세, 뛰어난 리더십, 그리고 부상을 피하는 능력 등이 꼽힌다.[50][65][66][67][3][21][22][23] 당대 최고의 공격수들로부터 상대하기 가장 어려운 수비수 중 하나로 인정받았다.
특히 아르헨티나의 축구 전설 디에고 마라도나는 2008년 아르헨티나 잡지 ''El Gráfico''와의 인터뷰에서 비에르코보드를 자신이 상대한 가장 어려운 상대로 지목했다.[68][9] 그는 비에르코보드를 "짐승 같았다. 눈썹까지 근육으로 되어 있었다"고 묘사하며, "그를 제치기는 쉬웠지만, 고개를 들면 어느새 다시 내 앞에 서 있었다. 그를 완전히 따돌리려면 서너 번은 제쳐야 했고, 결국 감당하기 힘들어 공을 동료에게 넘기곤 했다"고 회상했다.[53][9] 마라도나는 현역 시절 비에르코보드에게 '헐크'라는 별명을 붙여주기도 했는데,[49][2][41]SSC 나폴리 소속일 당시 비에르코보드는 마라도나를 자주 전담 마크했다.[41] 마라도나는 자신의 저서에서도 비에르코보드를 높이 평가하며 "인터셉트의 명수였고 발 기술은 위협적이었다. 사냥개 같으면서도 바위 벽과 같았고, 엄청난 기세로 공을 빼앗아 동료에게 정확한 패스를 연결했다. 마크 능력 또한 일류였다"고 술회했다.[42]
잉글랜드의 공격수 게리 리네커 역시 ''FourFourTwo''와의 인터뷰에서 비에르코보드를 "상대해 본 수비수 중 가장 거친 선수"였다고 평가했다.[69][25] 그는 "비에르코보드는 그야말로 괴물 같았고, 번개처럼 빨랐다. 그에게 한두 번 굴욕을 당하기도 했다"고 덧붙였다.[69][25]
네덜란드의 공격수 마르코 판 바스턴은 비에르코보드와 리카르도 페리를 자신이 상대하기 가장 어려웠던 최고의 수비수 두 명으로 꼽았다.[70][26]
아르헨티나의 공격수 가브리엘 바티스투타 또한 1992년에 비에르코보드를 세계 최고의 수비수라고 평가했다.[7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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