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하마구치 오사치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하마구치 오사치는 일본의 정치인으로, 1870년 고치현에서 태어나 도쿄 제국대학을 졸업하고 대장성 관료로 경력을 시작했다. 1915년 입헌동지회에 입당하여 정계에 진출, 중의원 의원을 지냈으며, 재무대신과 내무대신을 역임했다. 1929년 헌법민정당 총재로서 내각총리대신에 취임하여 금융 해제와 긴축 재정을 추진했으나, 1930년 도쿄역에서 암살 시도를 겪었다. 이후 건강 악화로 사임하고 1931년 사망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하마구치 오사치 - 제1차 와카쓰키 내각
    제1차 와카쓰키 내각은 와카쓰키 레이지로가 총리대신을 맡아 1926년부터 1927년까지 재임하며 보통선거법 시행 후 정치적 혼란과 금융 공황을 겪었으며, 타이완 은행 구제안 부결로 인해 총사퇴했다.
  • 하마구치 오사치 - 런던 해군 군축 회담
    런던 해군 군축 회담은 1930년 영국, 미국, 일본, 프랑스, 이탈리아가 잠수함 무장 제한 및 함선 건조 제한을 주요 내용으로 체결한 조약이며, 일본의 탈퇴로 군축 시대가 종식되었다.
  • 재정가 - 오쿠보 나가야스
    오쿠보 나가야스는 아즈치모모야마 시대부터 에도 시대 초기의 무장으로, 다케다 가신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섬기며 행정 능력을 인정받아 막부 운영에 기여했으나, 말년에 부정 축재 의혹으로 실각하고 가문이 몰락했다.
  • 재정가 - 오쿠마 시게노부
    오쿠마 시게노부는 메이지 시대의 정치가이자 교육자로, 두 차례 총리대신을 역임하며 재정 개혁, 철도 건설, 헌법 제정, 와세다 대학 설립 등에 기여했으나, 제국주의적 정책으로 비판받기도 하는 등 격변의 시대를 살았다.
  • 일본의 암살된 정치인 - 아사누마 이네지로
    아사누마 이네지로는 일본 사회당 위원장으로, 사회주의 운동가, 정치인으로서 일본 노농당 창립, 도쿄 시의회 의원, 국회 의원, 사회당 재건, 헌법 9조 개정 및 재군사화 반대 운동을 주도했으나, 1960년 미일 안보 조약 개정 반대 투쟁 중 극우 청년에게 암살당했다.
  • 일본의 암살된 정치인 - 사이토 마코토
    사이토 마코토는 일본 제국의 해군 군인이자 정치가로, 해군대신, 조선총독, 내각총리대신 등을 역임하며 해군력 확장, 문화 통치 추진, 만주국 승인, 국제연맹 탈퇴 등의 행적을 남겼으나 2·26 사건으로 암살당했다.
하마구치 오사치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하마구치 오사치
별칭"라이온 총리"
출생일1870년 4월 1일 (음력 1870년 5월 1일)
출생지일본 고치현 고치시
사망일1931년 8월 26일
사망지도쿄, 일본
사망 원인총상
안장 장소아오야마 묘지, 도쿄, 일본
서명
정치 경력
정당입헌민정당 (1927–1931)
기타 정당입헌동지회 (1916년까지)
헌정회 (1916–1931)
배우자나츠코 하마구치
학력도쿄 제국대학
관직
작위정2위
훈장훈1등 욱일동화대수장
학위법학사 (제국대학, 1895년)
주요 친척 (정치가)오하시 다케오 (사위)
나라자키 야스마사 (의손)
내각총리대신
직위일본국 내각총리대신
재임 기간1931년 3월 10일 - 1931년 4월 14일
전임 총리시데하라 기주로 (대리)
후임 총리와카쓰키 레이지로
재임 기간 21929년 7월 2일 - 1930년 11월 14일
전임 총리 2다나카 기이치
후임 총리 2시데하라 기주로 (대리)
내각하마구치 내각
국왕쇼와 천황
내무대신
직위내무대신
내각제1차 와카쓰키 내각
재임 기간1926년 6월 3일 - 1927년 4월 20일
대장대신
직위대장대신
내각가토 다카아키 내각
제1차 와카쓰키 내각
재임 기간1924년 6월 11일 - 1926년 6월 3일
중의원 의원
직위중의원 의원
선거구고치시
고치현 군부
고치현 제2구
고치현 제1구
재임 기간1915년 3월 25일 - 1917년 1월 25일
재임 기간 21919년 3월 26일 - 1931년 8월 26일
입헌민정당 총재
직위초대 입헌민정당 총재
재임 기간1927년 6월 1일 - 1931년 4월 13일

2. 생애

하마구치 오사치는 1870년 고치현에서 태어나 도쿄 대학 법과를 졸업한 후 대장성에 들어가 관료로서 경력을 시작했다. 전매국장, 체신차관, 대장차관 등 주요 직책을 거치며 엘리트 관료로 인정받았다.

1915년 정계에 입문하여 중의원 의원으로 활동했으며, 가토 다카아키 내각과 와카쓰키 레이지로 내각에서 대장대신과 내무대신을 역임했다. 그는 긴축 재정 정책을 추진하려 했으며, 1927년 입헌민정당이 창당되자 초대 총재로 추대되어 당을 이끌었다.

2. 1. 초기 생애 및 관료 경력

하마구치는 1870년 5월 1일(메이지 3년 4월 1일) 시코쿠 섬의 고치현 고치시(당시 도사국 나가오카군 이케무라 카라타니[14])에서 태어났다. 원래 성은 미즈구치(水口)였으며, 아버지는 현지에서 임업을 경영하던 미즈구치 이네히라(水口胤平)였다. 그는 3형제 중 막내였다.

1889년(메이지 22년), 고치현 아게군 타노무라(현 다노정)의 부유한 집안 출신인 하마구치 요시타테(濱口義立)의 장녀 하마구치 나츠(濱口夏, 당시 16세)와 결혼하면서 하마구치가의 양자가 되어 성을 바꾸었다.

학력으로는 구제 고치 중학교(현 고치현립 고치오테마에 고등학교)와 제3고등중학교를 거쳤다. 제3고등중학교 재학 시절 영어 교사는 훗날 미쓰이 재벌의 핵심 인물이 되는 단다쿠마(団琢磨)였다.[15] 이후 도쿄 제국대학 법과정치학과에 진학하여 1895년(메이지 28년) 우수한 성적(3등)으로 졸업했다. 대학 동창회였던 니하치카이(二八会)는 나중에 그의 정치적 기반이 되었다. 하이하라 기쥬로와는 제3고등중학교와 도쿄 제국대학 시절 동급생이었다.

대학 졸업 후인 1895년, 대장성(현 재무성)에 들어가 관료로서의 경력을 시작했다.[2] 1907년에는 전매국장으로 승진했고, 1912년에는 체신차관, 1914년에는 대장차관을 역임하며 엘리트 관료의 길을 걸었다.

2. 2. 정치 입문

하마구치 오사치, 1931년 이전


도쿄 제국대학 졸업 후 대장성에 들어가 전매국 국장, 우정 차관, 대장차관 등을 역임하며 관료로서 경력을 쌓았다.

1915년 가토 다카아키가 이끄는 입헌동지회에 입당하며 정계에 입문했다. 같은 해 고치현 제2구에서 일본 국회 중의원 의원으로 처음 선출되었고, 1931년 사망할 때까지 의원직을 유지했다. 입헌동지회는 1916년 헌정회로 개편되었는데, 하마구치는 헌정회 내에서 와카쓰키 레이지로, 안다치 켄조와 함께 3간부로서 가토 다카아키를 지지하는 핵심 인물로 활동했다.[16]

1924년 6월, 제1차 가토 다카아키 내각에서 대장대신으로 처음 입각했다. 그는 재정 긴축 정책을 추진하여 정부 지출 17% 삭감과 수만 명의 공무원 감원을 제안했으나, 관료들의 강한 반대에 부딪혀 정책 규모는 상당히 축소되었다.[3] 1926년 1월부터 6월까지는 제1차 와카쓰키 내각에서도 대장대신을 맡았다.

이후 1926년 6월부터 1927년 4월까지 같은 와카쓰키 내각에서 내무대신으로 자리를 옮겼다. 내무대신 시절에는 대장대신 시절의 긴축 정책 기조를 이어받아, 검소함과 공공 소비 절약을 강조하는 영화 제작을 후원하는 등 일종의 도덕 운동을 통해 일본의 무역 적자를 줄이려 시도했다.[4]

1927년, 헌정회와 정우본당이 합당하여 새로운 정당인 입헌민정당이 결성되자, 하마구치는 초대 총재로 추대되어 당을 이끌게 되었다.

3. 내각총리대신 재임

1929년 6월 다나카 기이치 내각 붕괴 후, 민정당 총재였던 하마구치 오사치는 일본의 총리로 취임하여 민정당 중심의 내각을 구성했다. 하마구치 내각은 해외 군사적 팽창보다는 국내 경제 문제 해결을 우선시했으며[5], 강직한 성품으로 알려진 하마구치는 취임 시 부패 없는 행정을 약속했다.

그의 주요 관심사는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지속된 불경기와 1923년 간토 대지진 피해로 악화된 일본 경제였다. 하마구치는 긴축 재정, 디플레이션 유도, 산업 합리화를 추진했으나, 취임 직후 발생한 1929년 대공황으로 경제는 더욱 어려워졌다. 특히 일본 엔화의 금본위제 복귀는 수출 증진을 목표로 했으나, 결과적으로 경제 상황을 더욱 악화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외교적으로는 시데하라 기주로 외무대신을 중심으로 국제 협조 노선을 유지하며 1930년 런던 해군 조약 체결을 추진했다. 이는 군비 축소를 통한 재정 건전화 목적도 있었으나, 해군 군령부와 야당 정우회, 우익 세력으로부터 메이지 헌법상 통수권 침해라는 거센 비판과 반대에 부딪혔다.[6]

1930년 11월 14일 도쿄역에서의 하마구치 오사치 암살 시도


경제 정책 실패와 군축 조약을 둘러싼 갈등으로 하마구치 내각의 인기는 하락했고, 정부의 대외 정책에 불만을 품은 우익 세력의 적개심은 커져갔다. 결국 1930년 11월 14일, 하마구치는 도쿄역에서 극우 비밀결사 애국사 단원 사고야 토메오에게 저격당하는 암살 시도의 희생자가 되었다. (9년 전 하라 다카시 총리도 같은 장소 근처에서 암살되었다.) 이 사건의 배후에는 정우회 정치인 오가와 헤이키치가 연루된 것으로 알려졌다.[7]

하마구치는 심각한 부상에도 불구하고 1931년 3월 총리직에 복귀했으나, 건강 악화로 인해 시데하라 기주로 외무대신이 총리 권한대행을 맡는 등 정상적인 직무 수행이 어려웠다. 야당의 공세와 건강 문제로 결국 한 달 만인 4월에 사임하고 와카쓰키 레이지로에게 총리직을 넘겨주었다.[8] 그는 같은 해 8월 26일 사망했으며, 묘소는 도쿄의 아오야마 묘지에 있다.

암살범 사고야 토메오는 살인 미수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1934년 사면으로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 그는 1940년에 석방되었으며, 1972년 사망할 때까지 극우 활동을 이어갔다.[9]

한편, 하마구치 내각은 1931년 제한적인 여성 참정권 법안(25세 이상 여성에게 남편 동의 하 지방 선거 투표권 및 피선거권 부여)을 제출하여 중의원을 통과시켰으나, 귀족원의 반대로 최종 부결되었다.[10]

3. 1. 제1차 하마구치 내각 (1929~1930)

1929년 6월, 장작림 폭사 사건의 책임을 지고 다나카 기이치 내각이 총사퇴하자, 헌정민정당 총재였던 하마구치 오사치가 후임 내각총리대신으로 취임하여 제1차 하마구치 내각을 조직했다. 이는 메이지 시대 출생자로는 최초의 총리 내각이었다. 하마구치는 민정당 당원들을 중심으로 내각을 구성했으며, 이들은 대체로 해외에서의 군사적 팽창보다는 국내 경제 개혁을 우선시하는 입장이었다.[5] 강직하고 소신 있는 성격으로 알려진 하마구치는 취임 연설에서 부패 없는 정치를 약속하며 국가를 위해 필요하다면 "죽을 각오가 되어 있다"고 밝혔다. 또한 당시 최신 매체였던 라디오를 통해 국민에게 직접 자신의 정책을 설명한 최초의 총리이기도 했다.

하마구치 내각의 최우선 과제는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지속된 불경기와 1923년 간토 대지진의 피해로 악화된 일본 경제를 회복시키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하마구치는 긴축 재정, 디플레이션 유도, 산업 합리화를 주요 정책 방향으로 설정했다. 재계에서 신망이 두터운 이노우에 준노스케일본은행 총재를 대장대신으로 기용하여 금본위제 복귀(금 해금)와 긴축 재정 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했다. 그러나 내각 출범 직후 터진 1929년 대공황은 일본 경제에 더 큰 타격을 주었다.

하마구치는 금본위제 복귀를 통해 엔화 가치를 안정시키고 수출을 증진시키려 했으나, 당시 디플레이션이 진행 중이던 일본 경제 상황과 맞물려 오히려 상황을 악화시켰다. 특히 엔화 가치를 과거 수준(구 평가)으로 높게 설정하여 금 해금을 단행한 조치는 수출 경쟁력을 약화시켜 심각한 디플레이션 불황을 초래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당시 이시바시 단잔과 같은 언론인들은 엔화 가치를 현실에 맞게 낮추어(신 평가) 금 해금을 실시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러한 정책은 "폭풍 속으로 창문을 활짝 열어젖히는 격"이라는 비판에 직면했으며, 결과적으로 1929년 실질 GDP 성장률은 0.5%, 1930년에는 1.1%에 그치는 등 경제적 실패로 평가받았다. 하마구치 자신은 이러한 고통이 경제 정상화를 위한 불가피한 과정이며 장기적으로 일본 경제 구조 개혁으로 이어질 것이라 믿었지만, 그의 정책은 심각한 불황과 사회 불안을 야기하는 결과를 낳았다. 당시 긴축 정책의 어려움을 반영한 '긴축 소곡'(사이죠 야소 작사, 나카야마 신페이 작곡)이라는 유행가가 일본 빅터에서 발매되기도 했다.

하마구치 오사치가 총격을 받은 도쿄역 현장


하마구치 오사치 총격 사건을 기념하는 도쿄역의 기념비


외교 분야에서는 가토 다카아키 내각 시절부터 외무대신을 역임했던 시데하라 기주로를 다시 기용하여 시데하라 외교로 불리는 국제 협조 노선을 견지했다. 이는 중국과의 관계 개선 및 영국, 미국과의 협력을 중시하는 정책이었다. 1930년에는 런던 해군 군축 조약 체결을 추진했는데, 이는 군비 축소를 통한 재정 건전화의 일환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 조약은 해군력 증강을 원했던 해군 군령부와 야당인 입헌정우회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혔다. 특히 군부와 우익 세력은 군축 조약 체결이 메이지 헌법에 보장된 천황의 통수권을 침해하는 행위라고 비난하며 하마구치 내각을 공격했다.[6] 추밀원에서의 조약 비준 과정도 순탄치 않았으나, 원로 사이온지 긴모치의 지원을 받아 가까스로 조약을 비준시킬 수 있었다.[17]

하지만 경제 정책의 실패와 군축 조약을 둘러싼 갈등으로 인해 하마구치 내각에 대한 국민적 지지는 점차 약화되었고, 정부의 유화적인 외교 정책에 불만을 품은 우익 세력의 반감은 극에 달했다. 결국 1930년 11월 14일, 하마구치는 도쿄역에서 열차를 기다리던 중 극우 단체 애국사(愛國社) 소속 청년 사고야 도메오에게 권총으로 저격당했다. (9년 전인 1921년에는 하라 다카시 총리가 같은 도쿄역 구내에서 암살당한 바 있다.) 이 암살 시도의 배후에는 입헌정우회 소속 정치인 오가와 헤이키치가 연루되어 있었다.[7] 하마구치는 목숨은 건졌으나 심각한 부상을 입고 수개월 동안 입원 치료를 받아야 했다.

3. 2. 제2차 하마구치 내각 (1931)

외교복을 입은 하마구치 오사치 총리


1930년 11월 14일 도쿄역에서 애국사 소속 사고야 토시오에게 저격당한 하마구치는 병상에 있었으나, 1931년 3월 총리직에 복귀하여 제2차 하마구치 내각을 조직했다. 그러나 저격 사건의 후유증으로 건강이 계속 악화되어, 개원한 제59회 제국의회에는 외무대신 시데하라 기주로가 총리 권한대행 자격으로 참석해야 했다.[8]

야당인 정우회는 총리의 부재와 권한대행인 시데하라가 여당 민정당 소속이 아니라는 점을 들어 정부를 강하게 공격했다. 시데하라가 런던 해군 군축 조약에 대한 쇼와 천황의 지지를 언급한 것이 논란을 키웠고, 정우회는 하마구치의 직접 출석 전까지 예산 심의 참여를 거부하며 공세를 이어갔다.[8]

결국 하마구치는 악화된 건강에도 불구하고 1931년 3월 10일 중의원, 다음 날인 11일에는 귀족원에 무리하게 출석해야만 했다. 하지만 상태가 호전되지 않아 4월 4일 재입원했고, 총리직 수행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여 4월 13일 사임, 와카쓰키 레이지로에게 자리를 넘겨주었다.[8]

한편, 제2차 하마구치 내각은 1931년 여성 참정권 법안을 중의원에 제출했다. 이 법안은 25세 이상 여성이 남편의 동의를 얻어 지방 선거 투표권과 피선거권을 갖도록 하는 내용이었다. 법안은 중의원을 통과했지만, 같은 해 3월 귀족원에서 184대 62라는 큰 표 차이로 부결되었다.[10]

총리직 사임 후 요양에 전념했으나, 하마구치는 저격 사건 후유증인 방선균증(放線菌症) 악화로 같은 해 8월 26일 사망했다.[8][20] 그의 묘소는 도쿄의 아오야마 묘지에 있다.[8]

3. 3. 사망

(내용 없음 - 주어진 원본 소스에는 '사망' 섹션에 해당하는 정보가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4. 정책 및 평가

하마구치 오사치 내각은 제1차 세계 대전 이후의 경제난 극복과 국제 사회와의 협력을 주요 정책 목표로 삼았다. 경제적으로는 이노우에 준노스케를 대장대신으로 기용하여 긴축 재정과 금본위제 복귀를 강력하게 추진했으나, 1929년 대공황의 여파와 맞물려 오히려 심각한 디플레이션 불황을 초래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외교적으로는 시데하라 기주로를 외무대신으로 하여 국제협조주의에 기반한 시데하라 외교를 펼쳤으며, 1930년 런던 해군 군축 조약 체결이라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이 군축 조약은 국내 군부우익 세력으로부터 통수권 침해라는 거센 반발을 샀으며, 이러한 정치적 갈등은 하마구치 총리가 피격당하는 사건의 배경 중 하나가 되었다.

4. 1. 경제 정책

하마구치 내각의 주요 과제는 제1차 세계 대전 이후의 만성적인 불경기와 1923년 간토 대지진 피해, 1927년 쇼와 금융공황 등으로 약화된 일본 경제를 재건하는 것이었다.[5] 하마구치는 군비 확장 움직임을 억제하고 경제를 회복시키기 위해 긴축 재정, 디플레이션 유도, 산업 합리화를 추진했으며, 특히 금본위제 복귀(금융 해금)를 핵심 정책으로 삼았다. 이를 위해 재계의 신임이 두터웠던 전 일본은행 총재 이노우에 준노스케를 대장대신으로 기용했다.

하마구치 내각은 긴축 재정 정책의 일환으로 군사비를 삭감하여 1930년 런던 해군 군축 조약 비준을 추진했으며,[5] 야당인 헌법정우회와 해군 군령부의 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조약을 체결했다. 그러나 가장 논란이 많았던 정책은 금본위제 복귀였다. 화의 가치를 안정시키고 수출을 증진하려는 목적이었으나,[5] 당시 일본 경제는 이미 디플레이션 상태에 있었고, 국제적으로도 금본위제 복귀가 디플레이션을 심화시킨다는 비판이 있었다. 하마구치는 군부를 포함한 각계의 반대를 무릅쓰고 금 해금을 단행했다.[16] 특히 당시 일본 경제 동향을 고려하여 엔화 가치를 낮춰 복귀해야 한다는 이시바시 단잔 등의 '신 평가' 주장을 외면하고, 전쟁 전의 높은 가치로 복귀하는 '구 평가'를 고집한 결정은 치명적이었다. 이는 "폭풍 속으로 창문을 활짝 열어젖히는 격"이라는 비판을 받았으며, 수출 부진을 심화시켜 심각한 디플레이션 불황을 초래했다.

설상가상으로 정책 시행 직후 1929년 대공황이 발생하면서 일본 경제는 세계 경제 침체의 직격탄을 맞았다.[5] 그 결과 하마구치 내각 시기 실질 GDP 성장률은 1929년 0.5%, 1930년 1.1%에 그치는 등 경제 정책은 실패로 평가받게 되었다. 하마구치 자신은 "우리는 국민 여러분과 함께 이 일시적인 고통을 견뎌내겠다"고 호소하며, 금 해제가 장기적인 경제 구조 개혁의 시작이라고 생각했지만, 결과적으로는 극심한 불황과 사회 불안을 야기했다.

하마구치 피격 이후 경제 정책을 계승한 제2차 와카쓰키 내각 시기인 1931년 성장률도 0.4%로 저조했다. 이 장기 불황은 이후 들어선 정우회 이누카이 내각의 대장대신 다카하시 고레이가 금 수출 재금지, 일본은행의 국채 인수 등 하마구치 내각과는 정반대의 리플레이션 및 적극적 재정 정책을 펼치면서 비로소 종결되었다. 다카하시의 정책 하에 일본 경제는 1932년 4.4%, 1933년 11.4%, 1934년 8.7%의 높은 성장률을 기록하며 세계 대공황에서 가장 먼저 벗어난 국가 중 하나가 되었다. 이는 하마구치 내각의 경제 정책이 당시 상황에 적절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결과로 해석된다.

하마구치 내각의 긴축 정책과 금 해금은 당시 사회상을 반영하여 '긴축 소곡'(緊縮小唄|긴슈쿠 고우타일본어)이라는 유행가로 만들어져 일본 빅터에서 레코드로 발매되기도 했다.

4. 2. 외교 정책

하마구치 내각은 외교 정책에서 가토 다카아키 내각 시절 외무대신을 지낸 시데하라 기주로를 다시 기용하여, 이른바 '시데하라 외교'로 불리는 국제협조주의 노선을 추진하였다. 이는 중국과의 관계 개선 및 미국, 영국과의 협력을 중시하는 외교 정책이었다.

하마구치 내각의 주요 외교적 성과는 1930년 런던 해군 군축 조약의 체결이다. 하마구치는 런던 해군 군축 회의에 전권단을 파견하여 조약 체결을 추진하였다. 이는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지속된 군비 경쟁을 완화하고, 국내적으로는 긴축 재정 정책의 일환으로 군사비를 삭감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그러나 런던 해군 군축 조약 체결은 국내적으로 큰 반발에 부딪혔다. 해군의 해군군령부와 야당인 입헌정우회는 조약 내용이 일본의 국방력을 약화시키고, 메이지 헌법에 보장된 천황의 통수권을 침해하는 '통수권 간범'이라며 격렬하게 반대하였다.[6] 이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하마구치는 조약 체결을 강행하였다.

추밀원에서의 조약 비준 과정 역시 순탄치 않았으나, 원로(元老) 사이온지 긴모치의 지원을 받아 가까스로 비준을 마칠 수 있었다.[17] 하지만 이러한 국제 협조주의에 입각한 외교 정책, 특히 군축 조약 체결은 군부우익 세력의 강한 반감을 샀고, 이는 결국 하마구치 총리가 1930년 11월 도쿄역에서 극우 단체 단원에게 피격당하는 사건의 한 원인이 되었다.

4. 3. 사회 정책

(해당 섹션 제목과 요약에 부합하는 내용이 원본 소스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5. 암살 사건과 그 영향

1930년 11월 14일, 하마구치 오사치 총리는 도쿄역에서 극우 단체 애국사 소속 청년 사고야 토시오에게 저격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런던 해군 군축 조약 비준 문제와 긴축 재정 정책 등으로 인해 군부 강경파 및 우익 세력과의 갈등이 심화된 상태였으며, 특히 통수권 간범 문제는 정쟁의 주요 빌미가 되었다.

하마구치는 총격으로 중상을 입었으나 수술 후 회복세를 보였다. 그러나 야당인 정우회의 무리한 의회 등원 요구에 응하다 병세가 악화되어 1931년 4월 총리직을 사임했고, 같은 해 8월 26일 결국 사망했다. 이 사건은 당시 일본 정치에 큰 충격을 주었으며, 정당 정치의 쇠퇴와 군부의 정치적 발언권 강화를 가속화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하마구치 오사치와 그의 암살 사건은 후대의 여러 창작물에서 다루어졌다.


  • 소설
  • * 시로야마 사부로 『남자의 본심』(신초문고 외)
  • 영화
  • * 중신과 청년장교 육해군 유혈사(1958년, 연: 스즈키 기주로)
  • 텔레비전 드라마
  • * 남자의 본심(1981년, NHK, 연: 키타노미치 킨야)

5. 1. 도쿄역 저격 사건



1930년 11월 14일, 하마구치 오사치 총리는 오카야마현에서 열리는 육군 특별 대연습 시찰과 쇼와 천황 수행을 위해 도쿄역을 방문했다.[18] 오전 8시 58분경, 고베행 특급열차 '츠바메'에 탑승하기 위해 4번 승강장(현재의 도카이도선 9, 10번 승강장)을 걷던 중, 극우 단체 애국사 소속 청년 사고야 토시오(佐郷屋留雄)에게 근거리에서 권총으로 저격당했다.[7][19] (9년 전인 1921년에는 하라 다카시 총리가 같은 도쿄역 구내에서 암살당한 바 있다.)

당시 하마구치 내각은 런던 해군 군축 조약 비준과 긴축 재정 정책 추진으로 인해 해군 군령부 강경파와 우익 세력, 그리고 야당인 정우회로부터 거센 비판을 받고 있었다. 특히 군축 조약 비준은 메이지 헌법에 명시된 천황의 통수권을 침해했다는 정치적 공세의 빌미가 되었다.[6] 이러한 정치적 갈등과 대공황으로 인한 경제난이 배경이 되어 사회적 불만이 고조되었고, 이는 결국 총리 저격이라는 극단적인 사건으로 이어졌다. 체포된 범인 사고야는 "하마구치는 사회를 불안하게 만들고 천황의 통수권을 침해했다. 그래서 저격했다"고 주장했으나, '통수권 침해'의 구체적인 의미에 대해서는 제대로 답변하지 못했다.[19]

총알은 하마구치의 골반을 관통하는 중상을 입혔으나, 그는 의식을 잃지 않고 주변 사람들을 안심시키려 했다. 역장실로 옮겨져 응급 처치를 받은 후, 도쿄제국대학 의학부 부속병원으로 이송되어 시오타 히로시게 박사의 집도로 장의 일부를 절제하는 대수술을 받고 목숨을 건졌다.[19] 하마구치가 입원한 동안에는 외무대신 시데하라 기주로가 임시 총리 대리를 맡았다.[8]

하마구치는 이듬해 1931년 1월 퇴원했으나, 야당인 정우회의 집요한 등원 요구에 시달렸다. 특히 하토야마 이치로 등은 하마구치의 의회 출석을 강하게 압박했다. 결국 하마구치는 건강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상태에서 3월 중의원귀족원에 무리하게 출석했다. 그의 건강 상태는 눈에 띄게 악화되었고, 4월 4일 재입원하여 다음 날 다시 수술을 받았다. 더 이상 총리직 수행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여 4월 13일 사임하고 와카쓰키 레이지로에게 자리를 넘겨주었다.[8] 이후 요양에 힘썼으나 상처 부위의 방선균 감염(악티노미코시스)이 악화되어[20] 같은 해 8월 26일 사망했다. 향년 61세였다.[21] 그의 묘는 도쿄 아오야마 묘지에 있다.

범인 사고야 토시오는 재판 과정에서 저격 행위와 하마구치의 사망 사이에 직접적인 인과관계가 인정되지 않아 살인죄가 아닌 살인미수죄가 적용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심과 항소심을 거쳐 1933년 대심원에서 사형이 확정되었다.[22][23] 그러나 이듬해인 1934년 사면령에 따라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고, 1940년에는 가석방되었다.[24] 이는 당시 정치적 동기의 범죄에 대해 감형이나 사면이 이루어지던 사회적 분위기를 반영한다. 사고야는 출소 후에도 극우 활동을 계속했으며 1972년에 사망했다.[9] 범행에 사용된 마우저 C96 권총을 제공한 공범 이와타 아이노스케는 징역 4년, 마츠키 요스케는 징역 13년을 선고받았다.[25]

현재 하마구치가 저격당한 도쿄역 9·10번 승강장(당시 4번 승강장) 8호차 부근에는 별도의 표식이 없지만, 승강장 아래 중앙 통로의 신칸센 중앙 환승구 부근 바닥에는 사건 개요를 기록한 플레이트와 위치를 나타내는 표식이 설치되어 있다.

5. 2. 정치적 영향

1930년 11월 14일, 하마구치 오사치 총리는 도쿄역에서 우익 단체 애국사 소속 사고야 토시오에게 총격을 당했다.[18] 하마구치는 골반을 관통당하는 중상을 입었지만, 도쿄제국대학 의학부 부속병원으로 옮겨져 대수술 끝에 목숨을 건졌다.[19]

범인 사고야는 체포 후 "하마구치는 사회를 불안에 빠뜨리고, 폐하의 통수권을 범했다. 그래서 했다."라고 진술했으나, 통수권 간범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설명하지는 못했다고 전해진다.[19] 이는 당시 런던 해군 군축 조약 비준 등을 둘러싸고 정부와 대립하던 군부 및 우익 세력의 주장을 반영한 것으로 해석된다.

하마구치는 입원 치료 중 시데하라 기쥬로 외무상이 임시 총리 대리를 맡았고, 이듬해 1931년 초 퇴원했다. 그러나 야당인 정우회 소속 하토야마 이치로 등의 집요한 의회 등원 요구에 응하다가 병세가 악화되었다. 결국 1931년 4월 13일 총리직을 사임했고, 같은 해 8월 26일 총격 상처에 방선균증이 악화되어 사망했다.[20] 향년 62세(만 61세)였다.

하마구치 총리 저격 사건과 그의 사망은 당시 일본 정치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이 사건을 계기로 군부의 정치적 발언권이 더욱 강화되었으며, 정당 정치의 입지는 약화되었다. 또한, 민정당을 이끌던 하마구치의 죽음은 당내 후계자 문제를 둘러싼 분열과 대립을 야기했다.[21] 이러한 정치적 혼란은 일본이 점차 군국주의로 나아가는 배경 중 하나가 되었다.

한편, 범인 사고야 토시오의 재판에서는 하마구치의 직접적인 사인이 총격인지, 아니면 지병인 방선균증의 악화인지가 주요 쟁점이 되었다. 법원은 총격과 사망 사이에 상당 인과 관계가 부족하다고 판단하여 살인죄 대신 살인미수죄를 적용했다. 1심과 항소심에서 사형이 선고되었고[22], 1933년 상고가 기각되어 사형이 확정되었으나[23], 1934년 사면을 통해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24] 사고야는 1940년 가석방되었다.[24] 흉기인 모젤 C96을 건네는 등 범행을 도운 이와타 아이노스케와 마츠키 요스케도 방조죄로 각각 징역형을 선고받았다.[25]

하마구치가 습격당한 도쿄역 4번 승강장은 현재의 도카이도선 9·10번 승강장에 해당하며, 승강장 아래 중앙 통로에는 사건 개요를 기록한 플레이트와 바닥 표식이 남아있다.

6. 유산 및 평가

하마구치 오사치는 청렴하고 강직한 성품으로 인해 '라이온 재상'(ライオン宰相)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는 당시 만연했던 요정 정치와 밀실 협상을 지양하고, 라디오 방송 등을 통해 국민에게 직접 정책을 설명하려 노력하는 등 현대적인 정치인의 면모를 보였다. 그는 금 해금 정책을 강행했으나 세계 대공황과 맞물려 일본 경제에 큰 타격을 주면서 경제 정책은 실패로 평가받는다. 하지만 런던 해군 군축 조약 체결을 주도하는 등 국제 사회와의 협조를 중시하고 군축을 위해 노력한 점은 긍정적으로 평가된다.

하마구치 총리 저격 사건은 당시 일본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으며, 정당 정치의 위기와 군부 세력의 발호를 상징하는 사건으로 여겨진다. 이 사건은 이후 5·15 사건, 2·26 사건 등으로 이어지는 군국주의적 폭력의 서막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서훈 내역'''

날짜위계/훈장비고
1896년 12월 21일정칠위[28]
1902년 12월 27일정육위[29]
1910년 12월 26일훈삼등 서보장[32]
1912년 6월 27일금배 한 벌[34]
1916년 1월 19일훈이등 서보장[33]
1916년 4월 1일욱일장 중광장[35]
1926년 7월 2일종삼위[30]
1926년 7월 22일훈일등 서보장[36]
1927년 4월 19일훈일등 욱일대수장[37]
1930년 12월 5일제도부흥기념장[38]
1931년 4월 29일훈일등 욱일동화대수장[39]
1931년 8월 26일정이위사후 추서 [31]



'''하마구치 오사치를 다룬 작품 및 연구'''


  • '''소설'''
  • * 시로야마 사부로(城山三郎) 『남자의 본회(男の本懐)』 (신초 문고(新潮文庫) 등)

  • '''영화'''
  • * 중신과 청년장교 육해군 혈투보(重臣と青年将校 陸海軍流血史) (1958년, 감독: 스즈키 기주로(鈴木紀伊寿郎))

  • '''텔레비전 드라마'''
  • * 남자의 본회(男の本懐) (1981년, NHK, 배우: 기타오지 긴야(北大路欣也))

  • '''평전 및 연구 서적'''
  • * 가와다 미노루(川田稔) 『하마구치 오사치: 비록 목숨을 잃을지라도(浜口雄幸 - たとえ身命を失うとも)』 (미네르바 일본 평전선(ミネルヴァ日本評伝選), 미네르바 쇼보(ミネルヴァ書房), 2007년)
  • * 가와다 미노루(川田稔) 『격동 쇼와와 하마구치 오사치(激動昭和と浜口雄幸)』 (역사 문화 라이브러리(歴史文化ライブラリー), 요시카와 고분칸(吉川弘文館), 2004년)
  • * 가와다 미노루(川田稔) 『하마구치 오사치와 나가타 데쓰잔(永田鉄山)(浜口雄幸と永田鉄山)』 (고단샤 선서 메치에(講談社選書メチエ), 2009년)
  • * 하타노 마사루(波多野勝) 『하마구치 오사치: 정당 정치의 시험 시대(浜口雄幸 - 政党政治の試験時代)』 (주코 신쇼(中公新書))
  • * 하야카와 다카시(早川隆) 『일본의 상류사회와 규벌(日本の上流社会と閨閥)』 (가도카와 쇼텐(角川書店), 1983년) - 158-161쪽

7. 가족 관계


  • 아내: 하마구치 나츠(濱口夏|하마구치 나츠일본어) - 고치현의 부호 하마구치 요시타테(濱口義立|하마구치 요시타테일본어)의 장녀이다.
  • 장남: 하마구치 유히코(濱口雄彦|하마구치 유히코일본어) - 은행가이다. 도쿄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일본은행에서 근무하다 퇴직 후, 도쿄은행 초대 행장, 전국은행협회 회장, 국제전신전화(현 KDDI) 사장 및 회장을 역임했다.
  • * 아내: 나오(直|나오일본어) - 중화회업은행 전무이사 고바야시 와스케(小林和介|고바야시 와스케일본어)의 딸이다.
  • * 장녀: 코우(功|코우일본어) - 재무관료 출신으로 전 환경청 차관을 지낸 후나고 마사미치(船後正道|후나고 마사미치일본어)의 부인이다.
  • * 차녀: 마사다 요시(正田淑|마사다 요시일본어) - 상황후 미치코의 오빠인 쇼다 이와오(正田巌)의 부인이다.
  • * 삼녀: 히로코(廣子|히로코일본어) - 세이케이 대학 공학부 교수 기리사와 기요시(桐沢潔|기리사와 기요시일본어)의 부인이다.[40]
  • 차남: 하마구치 이와네(濱口巌根|하마구치 이와네일본어) - 은행가이다. 도쿄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일본흥업은행 부총재, 일본장기신용은행 회장을 지냈다.
  • * 아내: 아야(綾|아야일본어) - 미즈마치 게사로쿠(水町袈裟六)의 딸이다.
  • * 장녀: 이쿠코(郁子|이쿠코일본어) - 나라사키 야스마사(楢崎泰昌|나라사키 야스마사일본어)의 부인이다.
  • * 차녀: 에이코(英子|에이코일본어) - 전 총리 하토야마 이치로(鳩山一郎)의 사위이자 전 일본수출입은행 총재 후루사와 준이치(古沢潤一|후루사와 준이치일본어)의 차남 요시후미(嘉文|요시후미일본어)의 부인이다.[40]
  • 삼녀: 테이(貞|테이일본어) - 일본여자대학 부속 고등여학교를 졸업하고 외교관 기타다 마사모토(北田正元)와 결혼했다.
  • 사녀: 시즈카(静|시즈카일본어) - 일본여자대학 부속 고등여학교를 졸업하고 재무관료 출신으로 일본출판판매 사장 및 회장을 지낸 아이다 이와오(相田岩夫)와 결혼했다.
  • 오녀: 후지(富士|후지일본어) - 일본여자대학 부속 고등여학교를 졸업하고 내무관료 출신 정치가 오하시 다케오(大橋武夫)와 결혼했다.
  • * 장남: 오하시 무네오(大橋宗夫|오하시 무네오일본어) - 재무성 관세국장을 지냈다.
  • * 차남: 오하시 미쓰오(大橋光夫) - 쇼와덴코 사장 및 회장을 역임했으며, 아내는 이와사 가이미(岩佐凱実)의 딸이다.[40]

7. 1. 관련 서적


  • 가와다 미노루 川田稔일본어 저, 《하마구치 유키치(たとえ身命を失うとも일본어)》 (미넬르바 일본 평전선 ミネルヴァ日本評伝選일본어), 미넬르바 서방 ミネルヴァ書房일본어, 2007년
  • 가와다 미노루 川田稔일본어 저, 《격동 쇼와와 하마구치 유키치(激動昭和と浜口雄幸일본어)》 (역사 문화 라이브러리 歴史文化ライブラリー일본어), 요시카와 히로후미칸 吉川弘文館일본어, 2004년
  • 가와다 미노루 川田稔일본어 저, 《하마구치 유키치와 나가타 테츠잔 永田鉄山일본어》 (고단샤 선서 메치에 講談社選書メチエ일본어), 고단샤, 2009년
  • 하타노 마사루 波多野勝일본어 저, 《하마구치 유키치(政党政治の試験時代일본어)》, 추코 신쇼 中公新書일본어
  • 하야카와 타카시 早川隆일본어 저, 《일본의 상류 사회와 계벌(日本の上流社会と閨閥일본어)》, 각카와쇼텐 角川書店일본어, 1983년, 158-161쪽

참조

[1] 서적 Hotta
[2] 서적 The Making of Modern Japan
[3] 서적 Lever of Empire
[4] 서적 Metzler
[5] 서적 Hirohito
[6] 서적 Bix
[7] 서적 Bix
[8] 웹사이트 3-18 Shooting of Prime Minister HAMAGUCHI Osachi http://www.ndl.go.jp[...] National Diet Library of Japan 2013-01-12
[9] 뉴스 Amnesty of 1934 https://www.newspape[...] 2023-07-21
[10] 논문 Women's Rights and Society's Needs: Japan's 1931 Suffrage Bill https://www.jstor.or[...] 1986-10
[11] 간행물
[12] 웹사이트 “ライオン宰相”とよばれた浜口雄幸 https://books.bunshu[...] 文春写真館 2021-01-21
[13] 웹사이트 旺文社日本史辞典三訂版 https://kotobank.jp/[...] コトバンク 2021-01-21
[14] 웹사이트 文化財情報 史跡 濱口雄幸生家 高知市 https://www.city.koc[...]
[15] 뉴스 三井王国の元老・団琢磨 毎日コミュニケーションズ 1932-03-06
[16] 웹사이트 世界史大百科第2版 https://kotobank.jp/[...] コトバンク 2021-03-03
[17] 웹사이트 日本大百科全書 https://kotobank.jp/[...] コトバンク 2021-03-03
[18] 간행물
[19] 뉴스 手術の成否を判断するために放屁できるかが注目され、放屁が出来た際には回復の知らせとして報じられた 大阪毎日新聞 1930-11-17
[20] 서적 事典有名人の死亡診断 近代編 吉川弘文館
[21] 웹사이트 浜口雄幸 - 日本大百科全書 https://kotobank.jp/[...] コトバンク 2021-08-23
[22] 뉴스 控訴審でも佐郷屋は死刑 毎日コミュニケーションズ 1933-03-01
[23] 뉴스 佐郷屋の死刑確定、上告棄却の判決 毎日コミュニケーションズ 1933-11-07
[24] 간행물
[25] 서적 濱口雄幸 https://dl.ndl.go.jp[...] 先進社
[26] 웹사이트 “ライオン宰相”とよばれた浜口雄幸 https://books.bunshu[...] 文春写真館 2021-03-03
[27] 웹사이트 日本大百科全書 https://kotobank.jp/[...] コトバンク 2021-03-03
[28] 간행물 官報 1896-12-22
[29] 간행물 官報 1902-12-29
[30] 간행물 官報 1926-07-03
[31] 간행물 官報 1931-08-28
[32] 간행물 官報 1910-12-28
[33] 간행물 官報 1916-01-20
[34] 간행물 官報 1912-07-17
[35] 간행물 官報 1916-08-21
[36] 간행물 叙任及辞令 官報 1926-07-24
[37] 간행물 叙任及辞令 官報 1927-04-21
[38] 간행물 辞令二 官報 1931-12-28
[39] 간행물 叙任及辞令 官報 1931-05-01
[40] 서적 『「家系図」と「お屋敷」で読み解く歴代総理大臣 昭和・平成篇』 実業之日本社 2017-07-25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